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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환의 흔적의 역사]무인(巫人), 혹은 무당
한 무제(재위 기원전 141~87)는 점(占)을 끔찍이 사랑했다. 오행가는 “좋다(可)”고 했고, 풍수가는 “안된다(不可)”고 했다. 12진과 오행을 연결시켜 점친 자는 “아주 흉하다(大凶)”고 했다. 지루한 논쟁이 벌어졌다.
골머리를 앓던 무제는 “사람은 오행(五行)에 따라 살지 않느냐”며 오행가의 손을 들어줬다. 한 문제(기원전 180~157) 때의 일이다. 송충(宋忠)과 가의(賈誼)가 ‘용하다’는 점쟁이(사마계주)를 찾았다. 사마계주(司馬季主)는 과연 길흉의 징험을 꿰뚫고 있었다. 감탄사가 절로 터졌다.
“선생님같이 어진 분이 왜 이런 천한 일을 하십니까. 점쟁이는 과장된 말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사거나 상하게 하고…. 게다가 귀신을 빙자해서 남의 재산을 빼앗지 않습….”
‘사람의 도리를 거스르고, 미신만 맹신하는 자는 귀신도 옳게 알려주지 않는다 (背人道 信禎祥者 鬼神不得其正)’(<사기> ‘일자·귀책열전’). 1989년, 기원전 4500~3000년 유적인 중국 뉴허량(牛河梁)에서 무인(巫人)의 흔적이 발견됐다. 무인 형상의 옥(玉)인형(사진)이었다. 적석총에서 나왔다. 곰(熊)형 옥기도 있었다. 여신상을 모신 여신묘와 제단도 발견됐다. 제정일치 시대의 수장인 무(巫)가 하늘과 조상을 위한 제사를 지낸 흔적이었다. 중국학계는 ‘중화민족의 공동조상’이라 했다. 반면 한국학계는 수근댔다. ‘혹 단군의 어머니인 웅녀(熊女)를 모신 성소(聖所)가 아닐까’ 하고. 대체 어떤 속사정이 있었을까.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갑골민주주의는 어떨까
2008년 6월. 한성백제 왕성인 풍납토성 발굴현장에서 의미심장한 유물이 나왔다. 다른 하나는 소의 견갑골에 점(占)을 친 흔적이 완연한 갑골(甲骨)이었다. <삼국사기>는 “백제의 세계(世系)는 고구려와 같이 부여에서 나왔다(世系與高句麗同出扶餘)”고 기록했다.
상나라시대 갑골
또 <삼국지> ‘위서·동이전’은 “부여와 고구려는 소를 잡아 그 굽으로 길흉을 점친다”고 했다. 이 발굴은 백제도 조상의 나라인 부여와 함께 갑골로 점을 쳤다는 사실을 입증시켜 준 것이다. 어디 고구려·백제 뿐인가.
박혁거세의 아들인 신라 2대왕 남해 차차웅(次次雄)’은 아예 ‘무당’이었다. <삼국유사>는 “차차웅은 무당이란 말의 사투리”라고 기록했다. “무당이 귀신을 섬기고 제사를 숭상하기 때문에 세상사람들이 두려워하고 공경했다”는 것이다. 또 가야 김수로왕의 창업설화를 담은 ‘구지가(龜旨歌)’는 왕을 추대할 때 점을 치는 과정을 읊은 것이다. 이형구 교수(전 선문대)에 따르면 ‘구지’는 ‘거북의 뜻’이다.
그런데 갑골문화는 하늘·조상신을 향한 제사의 산물이다. 대표적인 동이계의 습속이기도 하다. 갑골은 1962년 동이의 본향인 중국 동북방 푸허거우먼(富河溝門) 유적(기원전 3500~3000년)에서 처음 출토됐다. 그리고 이 문화는 역시 동이계의 일파인 (상)나라(기원전 1600~1046)에서 꽃을 피웠다. <예기> ‘표기’는 “은나라 사람들은 신을 존숭하고 귀신(조상)을 섬김으로써 백성을 통치한다(殷人尊神 率民以事鬼)”고 했다.
상나라 은허 갑골
나라의 길흉을 판단할 때, 전쟁의 승패를 물을 때 반드시 점을 쳤다. 점을 치는 데는 소와 사슴, 돼지의 어깨뼈 등도 애용됐다. 하지만 가장 사랑을 받은 것은 거북(龜甲)이었다. 대대로 중국 황실에서는 ‘장장의 물 속에서 1000년 자란 한자 두치되는 거북’(<사기>·‘귀책열전’)을 썼다. 거북의 배를 불로 지지면 뒷면이 열을 이기지 못해 소리를 내면서 터진다. 점치는 사람은 그 무늬를 보고 길흉을 판단했다.
<설문해자(說文解字)>에 따르면 ‘복(卜)’은 갈라지는 모양을 표현한 갑골문자이다. 또 우리말 발음인 ‘복(卜)’이나 중국발음인 ‘부(卜)’는 모두 열을 받아 터지는 소리를 표현한 것이다. ‘占’은 점궤를 말하는 행위를, ‘兆’는 갈라진 무늬를 뜻한다. 그리고 점을 치는 사람은 정인(貞人)이라 했다. ‘貞’자는 ‘점을 친 뒤(卜) 그 무늬를 보는(目) 사람(人)’을 의미한다. 점을 친 뒤에는 그 점궤를 반드시 귀갑에 새긴 뒤 보관했다. 때때로 갑골판에 구멍을 뚫어 끈으로 꿰어 매달아 놓았다. 그것이 책(冊)의 첫 모습이다. 훗날 찬란한 갑골문자로 세상에 나온…. 그랬으니 <상서(尙書)>·‘다사(多士)’의 말처럼 ‘오로지 은(殷)나라 선인들만이 ‘전(典)과 책(冊)’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국 김해 부원동 출토
물론 점복에 의존한 것은 동이족 뿐은 아니다. 한(漢)족의 나라인 주나라~한나라도 종종 점궤에 의존했다.
신생 한나라를 반석 위에 올려놓은 유항(한 문제·재위 )가 대표적이다. 창업주 고조(유방)의 넷째아들인 유항은 변방인 대(代)나라 왕이었다. 그때 조정에서 여(呂)씨들의 반란이 일어났다. 군신들이 반란을 진압한 뒤 유항을 황제로 추대하고자 했다. 하지만 유항의 신하들은 설왕설래했다. 반란을 진압한 무리들이 자신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천하를 농단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결국 점에 맡기기로 했다. 거북의 배를 불로 지져 뒷면이 터지는 무늬로 길흉을 판단하는 거북점을 친 것이다. 점을 치자 ‘대횡(大橫), 즉 가로로 크게 갈라진 무늬가 나타났다. 이는 천자(天子)이 될 징조였다. 그는 이 점궤를 믿고 수레를 달려 황궁으로 입성했다.
그렇게 점복에 기대어 천자에 오른 한 문제였지만 사마천도 감탄할 정도로 어진 정치를 폈다.
“(문제는) 덕으로 백성을 교화했다. 이로써 전국은 재물이 넉넉하고 번영했으며 예의가 일어났다. 아아. 어찌 어질지 않다고 하겠는가!(嗚呼 豈不仁哉)”
최근들어 ‘과학적 통계방법을 통한 추첨으로 의회를 구성하자’는 이른바 ‘추첨 민주주의’를 제안하는 이들도 있다. 일리있는 제안이다. ‘갑골 민주주의’는 또 어떨까. “천명을 받은 자가 왕 노릇을 했으며, 복서(卜筮·점)로 그 천명을 판단한다”(<사기> ‘일자열전’)는 말도 있지 않는가. 이런 천명으로 뽑은 김수로왕이나 한나라 문제를 보라. 지금과 같은 선거로 무자격자를 양산하느니….
/ 경향. http://leekihwan.khan.kr/ 이기환 기자의 흔적의 역사
점. 참 무지 좋아합니다^^ 점에 관한 글이 왜 그렇게 관심이 많은지요. 답답하니 그렇지만 미래는 모를 일입니다.
書經 周書 洪範(홍범) 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凡七卜五 占用二 衍? . 立時人 作卜筮. 三人占 則從二人之言. 汝則有大疑 謀及乃心. 謀及卿士 謀及庶人 謀及卜筮. 이 일곱 가지에 거북점(卜)이 다섯 가지, 시초점(占)이 두 가지가 쓰이며 변화를 이루어 정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세워 거북점과 시초점을 치되 세 사람이 점쳤다면 곧 두 사람의 말을 따르십시오. 당신에게 큰 의문이 있으면 당신의 마음에 물어보고, 귀족과 관리에게 물어보고,백성들에게 물어 보고 ,거북점과 시초점으로 물어보십시오
내 마음에 물어보고 가족에게 물어보고,친지에게 물어 보고 , 점(占)도 보십시요. 그리고 다수결을 따르면 어떨까요. 네가지가 모두 맞으면 대길(大吉)이라 했습니다.
먼저 주위에 진심으로 터놓고 상의할 분이나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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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음의 정원 원문보기 글쓴이: 마음의 정원
첫댓글 우리 역사에 무당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고 여깁니다.단군,차차웅,화랑,미실....신정시대의 상징이라 여깁니다.문자가 넉넉치 않았던 시절에 만민을 동화시킬 수 있는 방법은 제례와 종교집회가 가장 유력했을 것이라 여깁니다.하나라 옛성인 한성에서 갑골문이 많이 나오고 그 위치가 지금 중국의 핵심지역인 하남성인걸 감안하면 그 당시 우리 조상들의 강역이 중국 대륙 동안은 거의 다 했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