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 종합문예지 <한국작가>(Quarterly The Korean Writers) 제36호(2013년 여름)에 실었습니다*
화초 가꾸기
심양섭
나는 화초에 관한 한 문외한이었다. 화초에 그다지 관심도 없었다. 집안의 화초 가꾸기는 오롯이 아내의 몫이었다. 그러던 내가 수년 전부터 화초에 관심을 가지고 되었다.
우선은 아내를 돕고 싶었다. 가정과 직장을 왔다 갔다 하느라 일 년 삼백육십오일 쉴 겨를이 없는 아내의 가사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었다. 내가 남성전업주부를 자처하면서 이것저것 가사를 돌보아도 아내는 여전히 가사와 육아는 자신의 책임이라고 여기며 사는 사람이다. 어느 날 갑자기 “오늘부터 내가 화초를 키우겠다”고 선언했을 때도 아내의 첫 반응은 시큰둥하다 못해 부정적이었다. 자신의 ‘유일한’ 낙(樂)을 앗아간다는 것이었다.
다음으로는 화초라도 돌보지 않고는 연약한 ‘나’를 다스릴 길이 없었다고나 할까. 물론 나는 하나님을 믿으며 오늘 밤 죽더라도 천국에 간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지만, 온갖 욕망으로 가득 찬 나의 마음과 육신은 그 무엇으로도 통제하기가 어렵다. 나는 그야말로 ‘레미제라블(Les Misérables)’, 즉 ‘불쌍한 사람들’ 중 하나인 것이다. 이제 나도 나이가 지천명(知天命)을 넘어 인생 경주의 반환점을 통과한지 오래지만 아직도 젊은 날의 꺾인 야망에 대한 미련은 고래힘줄보다 질길 만큼 강하게 남아 있다.
내가 아는 어느 재미교포 남성 과학자는 밤마다 지하 차고(garage)에 내려가서 목공예에 정력을 쏟아 붓는다. 일요일 아침마다 교회 가는 길에 서울 지하철 2호선 사당역 6번 출구를 지나치다 보면 울긋불긋 남녀 등산객들로 인도가 비좁을 지경이다. 언뜻 보기에 나보다 나이가 한 살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이 주류를 이룬다. 지푸라기라도 붙잡아보려는 인생 후반전의 안쓰러움이 느껴진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몰두하는 한 가지 일, 그것이야말로 자신을 구원해 주는 것이라고 착각(?)하면서 살아가는 것일까?
그와 마찬가지로 화초를 가꾸는 것이 결코 한 인간을 욕망의 바다에서 건져 올릴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화초라도 돌봄으로써 ‘나’를 다스리려고 오늘도 애를 쓴다. 화초 가꾸기는 ‘구원’을 얻으려고 하는 나의 여러 가지 가련한 몸짓 가운데 하나인 셈이다. 나는 탈북자교회를 다니는데 따지고 보면 그것도 탈북자를 돕기 위함이라기보다는 내가 살기 위한 몸부림이다. 일요일마다 탈북자들을 만나 친구로 지내는 것이 그나마 나의 죽어가는 영혼을 살리는 것이다. 가난한 나라에 봉사활동 갔다 온 사람들이 한결같이 “도와주러 갔다가 오히려 도움을 받고 왔다”고 실토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저명작가이면서 미국 하버드대학교 교수였던 헨리 나우웬(Henri J. M. Nouwen, 1932~1996)이 어느 날 교수직을 그만두고 캐나다 장애인 공동체에 들어가 생의 마지막 십 년을 보냈다는 이야기가 이제야 조금 이해가 된다.
인터넷에서 화초 가꾸기에 관한 수필과 기사들을 검색해 보면 화초 가꾸기의 유익함을 다양하게 설파하고 있다. 단순히 실내가 화사해진다고 말하는가 하면 심신의 안정을 가져다준다고도 한다. 혹자는 공기의 정화를 강조하고 혹자는 화초의 치료효과를 부각시킨다. 나는 화초 전문가도 아니고 화초를 직접 기른 지도 몇 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효과도 체감하기는 쉽지가 않다. 다만 나는 앞에서도 말하였듯이 화초와 함께 시간을 보냄으로써 ‘나’를 달랠 수 있어서 좋고, 짙푸른 화초들을 바라보기만 해도 눈이 시원해서 좋다. 어느 시인의 노래처럼,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나의 곁에는 강아지가 졸고 있고, 눈을 창 쪽으로 돌리면 초록의 열 친구가 나를 위로해 준다. ‘콘크리트 감옥’으로도 불리는 삭막한 고층 아파트의 주거환경이지만 나와 기꺼이 공존해주는 반려자들이 있어서, 나의 메마른 정서에 조금은 윤기가 공급되는지도 모른다. 무릇 한 생명은 각기 한 우주를 떠받치고 있기에 ‘공생(共生)’의 가치는 계산할 수가 없는 것이다.
나의 초록 친구 열 명의 이름은 녹보수(綠寶樹), 산호수, 벵갈고무나무, 홍콩 야자, 가랑코에, 긴기아난, 동백, 꽃기린, 군자란이다. 홍콩야자는 같은 크기와 색깔의 빈 화분 두 개가 집에 있기에 화원에 가서 쌍둥이로 담아 왔는데 잔병치레 없이 잘 큰다. 재작년 아내와의 결혼 이십삼 주년을 맞아 들여놓았던 긴기아난은 그 향기가 온 집안에 진동했는데 그만 병충해가 들어 몇 달 동안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은 후에 돌아왔다. 화초의 병충해를 치료해 주는 병원이 있을 수는 없으니 내 집 근처에 있는 단골화원에 맡긴 것이다. 가랑코에는 꽃이 시들어도 끝을 잘라주면 또 꽃이 피었는데 그만 물을 너무 많이 주는 바람에 절반이나 죽어버리고 절반만 남아 회생의 안간힘을 쓰고 있다. 동백은 어느 해 늦겨울 빠알간 꽃을 피웠지만 반가운 마음은 잠시 뿐이었고 바쁘게 지내다 보니 언제 지는 줄도 몰랐다. 산호수는 납작한 이파리 사이에 보일락 말락 숨은 작은 빨간 열매가 예쁘다.
지금까지 난(蘭) 화분은 여러 사람에게서 숱하게 얻어왔지만 하나도 살아남은 게 없다. 작년 봄에도 아내의 생일을 맞아 죽은 난 화분을 분갈이 하여 새 난을 가져왔지만 얼마 못 가서 또 다시 죽고 말았다. 난에 물을 줄 때는 위에서 뿌리거나 붓지 말고 양동이 같은 곳에 물을 담은 다음에 그 속에 난 화분을 넣어 난의 뿌리가 물을 빨아올리게 해야 한다고 해서 그렇게도 해 보았지만 허사였다. 난은 그 기품이 고고한 만큼이나 키우기가 까다롭다는 것이리라. 그에 비하면 군자란은 난과식물이 아닌지 너무나도 씩씩하게 잘 자라고 꽃까지 화려하게 피우기에 군자란을 주제로 별도의 수필 한 편을 쓰려고 한다.
내가 화초들에게서 위로받으려고 아내의 화초 가꾸는 즐거움을 빼앗았는데 과연 나의 화초 농사는 성공하였는가. ‘절반 실패, 절반 성공’인 듯하다. 그나마 ‘절반 성공’의 비결은 물론 홍콩야자와 벵갈고무나무 같이 잘 죽지 않고 키우기 쉬운 화초들을 주로 들여놓은 나만의 ‘전략’이다. 화초를 잘 키우려는 욕심만큼 내가 섬세하지는 못한 것 같다. 단골화원 주인에게 “화초를 키울 때 제일 중요한 게 뭐냐”고 물었더니 “통풍”이라고 했다. 내 경우에는 더워서 문을 열어놓기는 하지만 화초를 생각해서 아파트 베란다의 문을 열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내가 하는 일이라고는 화초별로 물주는 주기에 맞춰 물을 주고, 녹보수나 산호수의 줄기가 엉키고 이파리가 우거지면 전지(剪枝)하고, 한겨울이면 화초를 베란다에서 거실로 들여놓는 것밖에 없다. 다행히 베란다는 넓은 편이지만, 화초를 배치하는 나의 공간감각이 조화와 균형의 미를 얼마나 살렸는지는 의문이다. 화초마다의 개성을 고려하고 화초의 마음을 헤아리며 대화하고 화초와의 사랑에까지 이르자면 길은 아직 멀고도 멀었다.
심양섭 약력: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정치외교학과 졸업(정치학 박사), 경향신문 기자, 조선일보 기자, 이대․숙대․단국대․경기대 강사 역임. 현재 가천대․아주대․한림대 강사. 2000년 <한맥문학>으로 등단. 현재 한국문인협회, 성남문인협회, 야탑문학회, 한맥문학동인회, 시애틀문학회, 청송문학회, 한국수필가연대 회원. 저서로는 <미국 초등학교 확실하게 알고 가자>, <여자가 기자가 된다>, <반미를 해부한다>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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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심교수님, 안녕하세요 글을 대하면 교수님을 뵌 듯 반갑습니다. 애인이 많이 생겨서 늙지 않겠습니다. 따뜻한 교수님의 사랑을 받으면 애인들이 무럭무럭 자라서 기쁨을 선물 할 것입니다. 사랑이야기 많이 올려주십시요. 감사합니다.
한국에 있을 때 아파트에서 군자란을 베란다에 내놓고 길렀습니다. 남쪽 베란다여서 햇빛이 많이 들어왔지만 이파리가 누렇게 변색하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이곳에서는 며칠 전에 바람 좀 쐬라고 바깥에 내놓았더니 이파리가 누렇게 변했습니다. 비가 자주 와서 괜찮을 줄 알았지요.
이경자 선생님, 화초를 '애인'이라고 하니 '친구'라고 하는 것보다 다정하네요. 김윤선 선생님, 저도 지금 군자란을 베란다에 내놓았는데 괜찮습니다. 화원에 가서 한 번 물어봐야겠습니다. 왜 누렇게 되는지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