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의 한국 비밀문서 이야기(1)
'많으나 없다'의 산술과 '쓰레기'론
이흥환 (KISON 편집위원)
'미국의 한국 문서 이야기'는 미국 곳곳에 산재해 있는 한국 관련 문서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제목이 밋밋하다. 별로 눈길 끌 만한 이야기는 아니다. 아무리 구구절절이 가슴 시린 사연을 담고 있다 해도 '어머님 전 상서'로 시작하는 자식의 편지 제목도 밋밋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게다가 미국에 있다는 한국 관련 문서는 오래 전부터 이른바 '비밀문서'라는 이름으로 한국에 꽤 소개가 되기도 했다. 언론 보도도 있었고, 학자들이 연구도 했다. 언론이 보도도 '많이' 했고, 학자들이 연구한 것도 '많다'라고 말하고 싶은데, 사실이 그렇질 못하니 그냥 보도도 있었고, 연구도 있었다고만 했다. 오해가 없어야 한다. 보도나 연구가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방대한 문서량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많지 않다'는 말이다.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는 것이 이 이야기를 시작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많다. 엄청나게 많다. 상상 외로 많다. 직접 자료 조사를 해본 언론인이나 학자 등 전문가들이 이 사실을 가장 잘 안다. 2002년 가을, 특집물 취재를 위해 워싱턴국립기록센터(WNRC, Washington National Record Center)를 찾아가 한국 관련 문서를 꺼내 훑어보던, 양식 있고 능력 있고 훌륭한 한 중견 언론인 J씨가 뇌까리듯 내뱉은 말이 있다. "씨X, X나게 많네. 달래 강대국이 아니네. 제국주의할 만하네. 씨X." 그 점잖은 분 입에서 육두문자가 마구 쏟아지는 게 약간 놀랍기는 했지만, 그때만 해도 그냥 한번 해본 소리려니 웃고 넘겼다. 그날 저녁 숙소에 돌아오자마자 흡연 금지 푯말이 붙어 있는 호텔 방에서 심각한 표정으로 줄담배를 피우던 J씨는 이렇게 물었다. "이거 우리나라가 다 복사해서 가져가려면 몇 년쯤 걸리겠습니까?"
즉답을 못한 채 씩 웃었더니, "왜요? 몇 년 가지고도 안 될 것 같습니까?"라고 되물었다. J씨는 자신의 취재에 필요한 문서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낮에 찾아갔던 워싱턴국립기록센터에 있는 한국 관련 문서 전체를 말하는 것이었다. 기자로서 물은 게 아니라 한 사람의 한국인으로 물었다. 더 이상 답을 피할 길이 없어 두루뭉술하게 이렇게 얼버무리고 말았다. "글쎄요, 해방 이후부터만 따져도 60년 가까이 기록하고 보관해 온 건데, 반만 잡아도 한 30년 안 걸리겠습니까? 지금까지 공개된 것만 어림잡아 보더라두요."
옳은 답은 아니었다. 문서량이 정확하게 얼마나 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미국 사람들이 한국 관련 문서에 관심이 없어서, 헤아려 보지 않아서 모르는 것이 아니라, 너무 관심이 많고 그래야 한다고 생각해 시시콜콜한 것까지 다 기록하고 보관해 놓았기 때문에, 그래서 그 문서의 양이라는 것이 워낙 방대하기 때문에 모른다는 말이다. 시시콜콜한 것을 어떤 것까지 보관해 두고 있는지 몇 가지 예를 보자. 이제 웬만한 사람들은 '나라(NARA)'라는 이름으로 알 만큼 다 알고 있는 미 국립문서보관소(NARA,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에 있는 것들이다. 한국 학계 전문가나 언론인들은 '수집할 가치 없는, 쓰레기 같은 문서'라고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들이다.
이른바 '쓰레기 문서들'
박정희의 독재 개발 시대에 차관 들여와 건설했던 화천, 춘천, 당인리 등 전국 곳곳의 수력, 화력, 열병합 발전소에 대한 문서는, 발전소 건설 계획 입안 서류에서부터 차관 계약서, 미국의 민간 발전소 건설업자들의 설계도, 공정 일지, 건설 현장 사고 조사서, 한국인 채용 노무자 일당 지급 명세서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있다. 한국의 1960년대 전력 수요와 수급 계획은 물론, 향후 100년 이후 한국의 전력 사정까지 분석되어 있다. 같은 시기에 건설되었던 항만, 도로, 다리, 공공 건물 등 사회간접자본 투자 내역도 앞서 예로 든 전력 발전소 기록과 마찬가지로 징그러울 만큼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다. 이 문서의 30% 정도는 아예 보관 박스가 개봉되지도 않은 채로 잠자고 있다.
정부 주도로 산아 제한과 가족 계획 열풍이 불었을 때인 1960년대에 자신이 임신 적령기에 있었던 이른바 가임 여성이었다면(우리의 어머니나 누이들처럼) 자기 이름 석 자나 또는 자신의 모습이 찍힌, 누렇게 색 바랜 흑백 사진이 NARA의 이 USAID 문서군(Records of the Agency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 어딘가에 끼어있을지도 모른다. 한국의 가임 여성 인구 현황, 피임 기구 보급 상황, 각 가정의 재래식 피임 유형 및 방법과 문제점 등을 전국 면 단위별로 조사해 놓은 보고서는 물론,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여성의 임신에 대한 사고 방식 및 향후 아시아 지역 인구 증가에 대한 대책 보고서까지 포함되어 있는 것이 이 문서군이다.
'내 자식 먹일 쌀, 쥐세끼가 다 먹는다'는 빨간 색 글자 표어가 선명한 쥐 잡기 계몽 포스터, 말라리아 예방법을 홍보하는 소책자, 큼지막한 모기 그림 밑에 1년 열두 달 치 월력을 인쇄해 넣은 한 장짜리 홍보용 달력도 한국의 보건 위생 현황을 분석해 놓은 보고서 끄트머리에 첨부되어 있다.
1960~70년대에 미 국제개발처(USAID)가 한국의 중간급 이상 실무 담당 공무원들을 미국에 초청해 해당 분야 실무 교육을 시켰을 때가 있었다. 이때 미 국제개발처가 작성했던 문서군에는, 연수생 개개인의 신상 명세 및 이력서는 물론 연수생의 부처 내 영향력과 유력 인사들과의 친분 관계, 연수 신청서, 연수 평가 기록, 연수생 망명 기도 사건 조사서 등이 개인별 파일로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다.
한국과는 크게 상관이 없을 듯 보이는 미 재무부의 일반 문서군(General Records of the Department of the Treasury)에도 한국 파일이 들어 있다. 역시 1960년대 문서로, 사기업인 현대 시멘트와 한국 나일론, 부산과 군산의 열병합 발전소의 운영 상태를 기록한 문서들이다. 사기업이 한국 정부의 지원으로 개발 차관을 들여오게 되는 과정에서부터 차관 조건, 차관을 받을 기업의 재무 상태 등이 기록되어 있다.
사회 개발만 주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광물 등 한국의 천연 자원에 대한 것도 포함된다. 1960~70년대에 가동되었던 미 국제무역위원회의 문서군(Records of the U.S. International Trade Commission)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이 문서군에는 알루미늄, 마그네시움, 코발트, 구리 등 한국의 광물 매장량 및 개발 가능성을 조사한 기록이 들어 있다.
한국전 때의 기록은 말할 필요도 없다. 여기에 언급하고 있는 문서들은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른바 안보, 군사 정책이나 역사적인 주요 사건의 내막을 기록한 '화끈한 것'이 아니다. 한국의 일부 사학 전공자나 전문가들의 평에 따르자면 허섭쓰레기들이다. 그러니 '주요 문서'를 원하는 분들은 더 이상 시간 낭비할 필요 없이 이쯤에서 읽기를 접는 것이 낫겠다. 그래야 말하는 사람도 편하다.
피해자와 가해자 모두에게 불행한 일이긴 하지만 가족이나 인척 가운데 6.25 때 피난 길이나 혹은 마을에서 미군의 폭격기 공습 또는 기총 소사로 변을 당한 사람이 있다면, 그리고 언제 어디서 어떻게 변을 당했는지 정확한 시간과 장소만 알 수 있다면, 미 육군이든 해군이든 공군이든 사건 당시 현장에 있었던 폭격기 혹은 전투기의 기종에서부터 출격 지점, 현장 통과 시간, 사건 내용 등을, (알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알 수 있다.
한국전 당시 미 정보 정찰기들이 평양, 신의주, 원산, 대전, 춘천, 청주, 덕유산, 회문산 주변 일대 등 주요 폭격 지점 및 주요 교통로 등을 정찰한 기록을 보면, 정찰 시간, 횟수에서부터, 주요 도로에 대한 시간대 별 교통량 변화 기록(병력 및 차량 이동을 포함한)에 이르기까지 정밀하게 기록되어 있고 보관되어 있다. 미 공군 사령부 문서군(Records of Headquarters U.S. Air Force (Air Staff)) 안에 있는 정보 보고 임무(MRIR, Mission Review Intelligence Report) 기록철이다. 기록 정찰 기록이 이 정도로 세밀하게 기록되어 있으니 폭격 상황이나 전투 상황 기록은 말할 것도 없다. (노근리 사건이 제대로 주목 받게 된 것도 관련자들의 증언을 입증할 만한 기록을 찾아냈기 때문이고, 기록을 들이대고 나서야 노근리라는 이름은 비로소 사건으로 입증될 수 있었다.)
한국전 당시 야전 이동 병원의 운영 실태와 환자 수, 이동 상황 등을 세밀히 기록한 문서철(Korea Evacuation Hospital)이 군사 기록이 아닌 미 적십자 문서군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예상 밖의 일이긴 하지만, 한국 관련 문서가 어느 문서군에든 구석구석에 끼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좋은 본보기이다.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천대 받는 것들 중에 언뜻 생각나는 것만 주워섬겨도 이 정도이다. 문서의 중요도를 따지자는 것이 아니고, 미 행정부의 한국 기록이 얼마나 세세한 것까지 취급하고 있는지를 몇 가지 예로 알아본 것뿐이다. 기록 범위가 이렇다 보니 한반도에 관련된 외교, 안보, 군사, 금융 정책 및 사회 실태 조사 보고서 등 굵직굵직한 문서까지 합치면, 그 양은 섣불리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한국 문서가 가장 많다는 NARA를 예로 들어 한번 숫자로 접근해 보자. 과연 얼마나 될는지. 미리 말해 두지만 이건 추산일 뿐이다. NARA에 들락거리기 시작한 지 7년밖에 안 된 처지에서 한국 관련 문서를 다 들여다보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다 들여다볼 수도 없고, 다 들여다본 사람도 없다. 다 들여다본다는 건 도무지 가능하질 않은 일이고 씨도 먹히지 않을 소리다. 아직도 공개되지 않은 1970년대 후반 이후의 문서는 그렇다 치고, 이미 일반에 공개돼 있는 것이라 하더라도 총목록을 만들고 다 뒤져내보지 않은 한 정확한 숫자는커녕 어리짐작으로 둘러대봐도 최소 수백만 장의 오차가 나기 마련이다. 그러니 얼마나 되는지 꼭 집어서 말하는 것은, 입을 여는 순간 거짓말밖에 되지 않는다. NARA에 있는 한국 관련 문서의 97%를 이미 다 수집했다고 말하는 분도 있다길래 일부러 해본 소리이다. 들으시라고.
해마다 정부 문서의 2~3%(1억 매)만 보관된다
미 행정부에서 생산된 모든 기록은 행정부가 보관하고 있다가 평균 25~30년인 문서의 기밀 해제 연도가 되면 워싱턴 인근 매릴랜드 주의 워싱턴국립기록센터(WNRC, Washington National Record Center)로 옮긴다. 흔히 '레코드 센터'라 불리는 WNRC는 일종의 문서 임시 보관소이다. 이곳에 이관된 대부분의 문서는 아직 전문가(Archivist)의 손을 거치지 않은 상태이며, 센터의 문서 관리 책임은 아키비스트가 아닌, 문서를 이관한 각 행정부처가 가지고 있다. 대부분의 문서가 체계적으로 분류도 안 되어 있고, 폐기될 가능성이 높은 문서들이며 실제로 폐기되는 것들이 많다. 예를 들면 소득세 증빙 서류 같은 것들로 일정 기간이 지나면 센터에서 폐기시켜 버린다.
레코드 센터에서 문서를 보관하는 기간은 평균 5~25년이다. 물론 문서의 종류에 따라 다르며, 소득세 관련 서류의 경우 법률로 정해진 보관 연한은 7년이다. 레코드 센터로부터 NARA로 이관시킬 문서를 선별하는 일은, 각 행정부처에서 문서 이관을 담당하는 프로그램 책임자(Program Manager)와 기록물 책임자(Records Manager), NARA 소속 아키비스트의 협동 작업으로 이루어지며, 레코드 센터의 문서 가운데 2~3%만이 매년 NARA로 이관된다. 따라서 NARA의 문서는 미 행정부에서 생산된 문서의 고작 2~3% 정도인 셈이다.
양으로 치면 매년 평균 3만~3만5천 큐빅 피트(cubic feet)에 달한다. 1큐빅 피트가 가로 x 세로 x 높이가 각 30센티미터되는 박스 크기이며, 박스 1개에 A4 용지 또는 A3 크기의 문서가 약 3천 매 정도 담기므로, 연 평균 NARA로 이관되는 문서의 양은 최소 9천만 매에서 1억 매 안팎이다. 2005년에 레코드 센터에서 NARA로 이관된 문서는 총 5만7천 박스였고, 2004년에는 4만6천 박스, 2003년에는 3만5천 박스의 분량이었다. 2005년 한 해에 이관된 문서량을 매수로 따지면 1억7천만 매이다.
NARA로 이관된 문서는 이때부터 아키비스트의 관리 하에 들어가고, 레코드 센터의 문서와는 달리 영구 보관되는데, NARA의 서고에는 평균 25년 정도 비치되어 일반에 공개되었다가 영구 보관 장소로 다시 이관시킨다. NARA가 보관하는 문서의 양은 이미 이관된 전체 문서량의 2~3% 정도에 불과하다.
NARA의 문서 보관 능력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NARA에 더 이상 보관하지 못하는 문서는 펜실베니아 주에 있는 지하 염장 개조 보관소로 옮긴다. NARA에서 자동차로 5시간 거리에 있는 이 지하 서고는 지하 소금 창고를 개조해서 만든 곳으로 보관소의 실내 온도는 자연 상태 온도인 화씨 55~60도로 유지된다. 일부 문서는 캔사스 시티의 보관소로 이관되기도 한다. 행정부처에서 NARA로 이관되기 전에 문서를 보관하는 시간이 25년 이상으로 너무 길고, 문서를 보관하는 데 드는 비용(1년에 약 1천2백만 달러)도 많아 문서 관리가 비효율적이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행정부처 가운데 NARA로 이관시키는 문서의 양이 가장 적은 부처는 국방부이다.물론 보안이 이유이다. 예를들어 미 합동참모부(JCIS)의 경우, NARA로 이관시키는 문서는 전체 생산량의 극히 일부일 뿐이다. 한 아키비스트는 합참 문서의 "0.00001% 정도 될 것"이라고 표현했다. 또 군사 관련 문서의 많은 양이 NARA로 이관되지 않고 펜실베니아 소재 군사연구소(Military History Institute)로 간다.
그렇다면 그 많은 미 행정부의 이관 기록물 가운데 한국 관련 문서는 얼마나 될까? NARA에서 30년 가까이 일해온 선임 아키비스트인 로버트 보일란(Robert Boylan)이 '대략적인 추산(wild guess)'이라는 전제를 달고 한 말에 따르면, "2005년의 경우, 5천 박스" 정도였다. 1천5백만 매 분량이다. 2005년의 이관량이 다른 해에 비해 유독 많긴 했지만, 한 해에 새로 이관된 문서만 그 정도가 되었다. 게다가 NARA의 공개된 목록에 올라 있는 한국 관련 문서도 문서이지만, 목록화 작업을 하는 중이라 아직 공개되지 않고 있는 문서도 상당량이다. 아키비스트들의 손이 모자란 때문이다. 레코드 센터에서 이관되어 왔지만 아직 아키비스트가 뜯어보지 못한 박스도 수두룩하다.
사정이 이런데, 어떻게 감히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NARA의 한국 관련 문서를 거의 다 수집해서 이제는 더 이상 수집할 것이 없다는 말을 하는가? 말하려는 속뜻을 이해 못하는 바 아니다. 이른바 '쓸 만한 것'은 다 수집했고, 앞서 예로 들었던 '쓰레기'들은 그냥 썩게 놔둬도 된다는 말을 그렇게 표현했으리라 짐작한다. NARA에 한국 관련 문서의 양이 과연 얼마나 되느냐고 묻는 사람마다 말 끝에 꼭 빼놓지 않고 "이젠 거의 다 수집해 갔다면서요?"라고 토를 달아 묻기에 그 자리에서 말문이 막혀 말은 못하고, 이런 얘기할 기회가 생겼으니 하는 말이다. 들을 사람 들으라고.
일본 국립 국회 도서관은 1980년부터 NARA에 있는 일본 관련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해 올해로 26년째 마이크로 필름으로 수집 작업을 하고 있다. 하루 평균 2천 매를 수집한다. 1년이면 48만 매이다. 26년 동안 25만 개의 폴더(folder)를 수집했다. 1개 폴더를 평균 1백 매로 잡았을 때, 총 2천5백만 매를 수집해 간 셈이다. 2년 동안 이 작업 책임을 맡고 있는 국회 도서관의 츠토무 아키야마 씨한테 하루는 슬쩍 물어보았다. 앞으로 얼마나 더 계속할 거냐고. 대답 대신 그는 웃기부터 먼저했다. 그리고 말하기를 "저도 모릅니다. 아무도 모릅니다. 얼마나 있는지를 알아야지요?"라고 했다. 너는 한국 문서가 얼마나 되는지를 아느냐는 반문처럼 들렸다. 우문에 현답이었다.
지금까지의 얘기는 NARA의 문서 자료(textual records)에만 국한된 것이다. NARA의 사진, 지도, 동영상, 단행본 자료를 비롯해 미 의회 도서관, 미 대통령 도서관들, 미 육해공군의 문서 자료실과 군사(軍史) 기록실 등 다른 곳의 자료들에 대해서는 아직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kn-585)
미국의 한국 비밀문서 이야기(2)
RG 242 노획 문서-목록화와 사유화, 일본식과 한국식
이흥환(KISON 편집위원)
미 국립문서보관소(NARA)는 문서 형태의 기록(textual records)을 모두 550여 개의 문서군(RG, Record Group)으로 구분해 놓았다. 미 합동참모본부 문서군(Records of the U.S. Joint Chiefs of Staff), 국무부 일반 문서군(General Records of the Department of State), 백악관 문서군(Records of the White House Office), 국방정보국 문서군(Records of the Defense Intelligence Agency) 같은 식이다. 개별 행정부를 문서군 분류의 기초 단위로 한 셈인데, 같은 개별 행정부 안에서도 중요한 실, 국, 처, 소(Office, Bureau, Agency) 등은 별도의 문서군을 가지고 있다. 해군조사실 문서군(Records of the Office of Naval Research), 경제분석국 문서군(Records of the Bureau of Economic Analysis), 도서(島嶼) 문제국 문서군(Records of the Bureau of Insular Affairs)이 그런 것들이다. 시기별로 실, 국, 처의 이름이 바뀌었을 때는 바뀌지 않은 원래의 이름을 그대로 살려 별도의 문서군을 둔다.
아무튼 원하는 문서를 찾으려면 가장 먼저 이 문서군의 번호를 알아야 한다. 처음 NARA를 찾아간 사람이라면, 550개(2005년 말 현재까지는 555개 문서군)가 넘는 문서군 목록을 앞에 놓고 난감해 할 것이 아니라, 조사실의 조사 보조원(research assistant)이나 아키비스트를 찾는 것이 시간 절약, 효과 극대화의 가장 빠른 지름길이다.
조사자: 월남자 가족이다. 북한에 살고 있던 내 작은아버지를 6.25 때 거제도 포로 수용소에서 철조망 너머로 봤다는 사람이 있다. 그 후의 소식은 모른다. 수용소에서 생존해 북으로 송환되었는지, 반공포로로 석방이 됐는지도 모른다. 문서로 확인이 가능하겠는가?
아키비스트: 민간 분야가 아닌 군사 분야 문서군을 봐야 한다. 우선 헌병사령관실 문서를 먼저 뒤져 보자. RG 389의 Office of the Provost Marshal General 문서이다. 한국전 때의 포로 수용소 기록이 들어 있다.
이런 식이다. 예로 들긴 했지만, 실제 사례이다. 아키비스트들은 자기 전문 분야의 문서군 번호는 물론 시리즈 타이틀까지 훤히 꿰고 있다. 열에 한두 번쯤 아키비스트 말만 믿었다가 이틀 정도 시간 낭비를 하고 하면 정나미가 떨어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아키비스트와 함께 가는 길이 훨씬 덜 막막하고 덜 고달프기 마련이다.
독일과 일본의 문서 대접
이 550여 개 문서군 가운데 '내셔널 아카이브 컬렉션: 해외 노획 기록물(National Archives Collection of Foreign Records Seized)'이라는 것이 있다. 문서군 번호가 242라서 흔히들 'RG 242' 또는 '노획 문서(seized documents)'라고 부른다. 2차 세계대전 때 미군이 독일, 일본,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류큐 열도 등 적국 진영에서 노획해 온 전리품이다. 일본에서 가져온 문서가 총 1만 cubic feet가 넘는다. 매수로 따지면 대략 3천만 매가 넘는 양이다. 독일 문서가 cubic feet box 7천 개로 약 2천100만 매, 이탈리아 문서가 박스 3천 개로 900만 매, 오스트리아 문서가 450만 매 정도이다.
이 노획 문서들은 한때 비공개였던 적이 있으나, 1970년대에 모두 공개가 되었고, 지금은 다른 문서와 마찬가지로 누구나 열람해 볼 수 있고, 필요하면 복사해 갈 수도 있다. 비밀 해제가 되자마자 문서 원소유자인 독일 일본 등이 이 문서를 복사해가기 시작했다. 독일이 1975년에 복사 작업을 시작했다. 현대사연구소(Institute fur Zeitgeshifte)가 주축이 되었다. 비록 복사본이긴 하지만 독일 문서를 최단시일 내에 모두 되찾아가려는 프로젝트를 시작한 것이다. 적지 않은 예산이 필요했다. 자동차 회사인 폭스바겐이 이 프로젝트에 돈을 댔다. 현대사연구소에서 NARA로 연구원을 파견했고, 현지에서도 작업 인원을 고용했다. 총 20~25명이 목록 작성 및 복사 작업에 달라붙었다. 현대사연구소는 2년에 걸친 작업 끝에 독일 노획 문서의 총목록을 만들었고, 이 가운데 75%인 2천100만 매를 수집해 독일로 가져갔다.
일본 역시 1978년부터 수집 작업을 시작했다. 국립국회도서관이 수집 주체였다. 그러나 독일과는 다른 방식이었다. 독일이 많은 인원을 동원해 최단 시일 내에 수집하는, 독일이 군사전략에서 선보였던 독특한 전격전처럼 '전격 수집' 방법을 택한 반면, 일본은 적은 인원을 동원하되 장기적인 수집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또 독일은 문서 목록화에 우선 순위를 두었다. 총목록을 만들면서 수집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문서만 수집 대상으로 한 것인데, 전체 문서의 4분의 3을 수집했다. 반면, 일본 국립국회도서관은 총목록화와 동시에 장기간 일괄 수집 방식을 택했다. 장기간을 두고 가능한 한 모두 수집한다는 것이었다.
일본 국회국립도서관이 독자적으로 수집 작업을 수행한 데 비해, 독일 현대사연구소는 총목록화 작업을 하면서 NARA 아키비스트들과 공동 작업을 했다. NARA 아키비스트들과의 공동 작업으로 독일 노획 문서 목록이 완성되면 NARA에서도 그 목록을 활용할 수 있도록 한 협력 체제였다. NARA로서는 박스 안의 폴더(folder)나 개별 문서까지 목록으로 만들지는 않으므로, 독일 현대사연구소와의 공동 프로젝트 같은 것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지금도 독일 현대사연구소와 NARA의 목록 공동 작업 방식은 타 기관이나 나라의 문서 수집 방식의 훌륭한 본보기로 알려져 있고, 아키비스트들도 독일 식 수집 방식을 권한다.
NARA 아키비스트들이 독일식 수집 방법을 권하는 또 다른 이유는 개별 연구자나 조사자들의 중복 수집을 막을 수 있다는 장점 때문이다. 즉, 독일 연구자가 독일 노획 문서를 조사할 때 굳이 NARA를 찾아갈 필요 없이 독일에 이미 만들어져 있는 목록만 보면 자신이 원하는 문서가 이미 수집된 것인지, 아직 수집되지 않은 것인지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본처럼 아예 처음부터 국가 기관으로 수집 작업을 일원화시킨 후 장기 계획을 수립해 일괄 수집하는 것이 최선책이겠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차선책으로 독일 식의 목록화가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일본 국립국회도서관은 수집 초기부터 2단계 수집 계획을 세웠다. 1단계는 우선 일본 노획 문서 1만 박스를 전량 수집한다는 장기 프로젝트였다. 12년이 걸렸다. 1차 작업이 끝난 후에는 노획 문서 외에 NARA에 있는 일본 관련 문서를 체계적으로 수집하는 2차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역시 10년 이상의 장기 계획에 따른 것이었다. 일본 국립국회도서관의 이 NARA 문서 수집 프로젝트는 2006년 2월말 현재 26년간 중단 없이 지속되고 있다.
이탈리아 역시 990만 매에 가까운 방대한 양의 노획 문서를 수집했다. 독일이나 일본의 노획 문서에 비해 중요도가 다소 떨어지는 것이긴 하지만 아무튼 자국 문서를 제자리에 갖다 놓은 것이다. 15년이 걸렸다.
일본 국립국회도서관과는 별도로 '오키나와 현(縣) 아카이브'가 현 차원에서 NARA에 있는 오키나와 관련 문서를 수집하고 있다. 노획 문서군 가운데 오키나와의 2차세계대전 당시의 이름으로 된 '류큐 아일랜드 노획 문서'가 주 수집 대상이다. 카츠히코 나카모토 씨가 작업 책임을 맡고 있는 오키나와 아카이브 프로젝트는 NARA의 문서 자료뿐만 아니라 동영상과 사진 자료 수집에도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문서 자료는 1차로 540만 매를 수집했고, 2차 수집 작업은 현재 5년째 계속하고 있다.
남의 나라 이야기
이 해외 노획 문서군 가운데 한국전 때 북한군에게서 노획해 온 '북한 노획 문서'가 들어 있다. 여기에서부터는 앞의 독일이나 일본 노획 문서군과는 얘기가 전혀 딴판으로 전개된다. 독일의 목록화 공동 작업이니 일본의 장기 일괄 수집 같은 얘기는 이제부터는 다 잊어야 한다. 기억해 봤자 속만 쓰리고 가슴만 답답해진다. 한마디로, 말 그대로, '남의 나라 이야기'이다.
북한 노획 문서의 양은 총 박스 수로 2천452개이다. 박스 크기는 보관된 문서나 서류의 종류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일반적인 것이 40 x 13 x 28 센티미터의 표준(standard) 크기이고, 박스 1개에 평균 700 매의 문서가 들어 있다. 총 매수로 따지자면 170만 매 정도이나, 문서 종류나 종이 질 등을 감안할 때 200만 매는 좋이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평양에서 노획된 러시아어 문서도 있다. 600박스나 된다. 독일이나 일본 문서에 비하면 적은 양이다. 그러나 문서량이 문제가 아니다. 독일이나 일본의 노획 문서와 북한의 노획 문서는 여러 면에서 현격한 차이가 있다.
우선 원 소유자인 북한이 이 문서를 들여다볼 처지가 아니니 수집할 입장은 더욱 아니다. 북한이 수집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니 한국이 나서야 한다. 그보다는 북한의 사정이고 뭐고 간에 진작에 한국이 나섰어야 했다. 나서긴 했다. 일부 연구자들이 이 노획 문서를 연구도 했고, 일부 수집도 했다. 그러나 오히려 이게 문제가 됐다. 이 얘기는 이 글의 끝으로 잠깐 미뤄둔다.
북한 노획 문서는 그 중요성에서도 독일이나 일본 것보다 훨씬 무게가 더 실릴 수밖에 없다. 북한의 폐쇄성과 고립화 때문에 북한 내부 자료나 정보가 바깥으로 나오는 양이 다른 나라에 비해 턱 없이 적다는 점을 감안할 때, 그 시기가 1944년 이후 950년 초반에 이르는 기간의 것이라 할지라도 문서 자체의 중요성이나 희귀성이 독일이나 일본 노획 문서에 비할 바가 아닌 것이다.
문서의 보관 상태도 북한 노획 문서는 독일이나 일본 것과는 아주 딴판이다. 북한 문서의 생산 시기는 독일이나 일본보다 최소 2~3년에서 길게는 5년 이상 나중이다. 당연히 보관 상태가 더 양호하고 종이 질도 나아야겠지만 사실은 그 반대이다. 아주 조심스럽게 다루지 않으면 바로 바스러져 버릴 만큼 보관 상태가 열악하다. 최악이다. 문서가 생산될 때의 지질 자체가 형편없었다. 개인 문서는 둘째 치고 북한 내각의 공식 문서조차 지질이 나쁘다. 일부 문서는 아예 거의 파지 수준이다. 그렇다 보니 NARA 아키비스트들이 가장 염려하는 것도 바로 이 보관 상태이다.
이 노획 문서는 다른 문서군의 문서와 달리 원본 그대로 보관되어 있다. 열일곱 살의 인민군 병사가 고향의 어머니한테 쓴 편지, 소련 유학중인 아들이 평양의 부모님 앞으로 보낸 '양친님 전 상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내각상업상 장시우와 조선기업총사 대표자 변동윤 사이에 체결된 생산공장 양도양수 약정서, 평남도 민청위원회 부부장 이상 간부 명단 등 한 장밖에 없는 문서들이 대부분이다. 이 원본들이 처음에도 갱지나 파지 수준이었는데, 그때부터 50년 넘게 노획에서 이관, 보관, 보존, 열람 과정을 거치는 동안 지금은 차마 건드리기가 민망할 정도가 된 것이다. 일본, 독일, 이탈리아 등이, 심지어 오키나와 현이 이미 1970년대 중반에 자기네 나라 문서 수집을 서두른 이유 중의 하나도 이 문서들의 생산 시기와 보존 상태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문서의 이런 몇 가지 사실적 차이점 외에 북한 노획 문서와 독일 및 일본 노획 문서의 차이점을 극명하게 드러내 보이는 것은 이 문서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자세와 이용자들의 이 노획 문서에 대한 대접이다. 대접? 문서가 무슨 인격체냐, 대접을 받게? 자세? 앉아 있든 서서 읽든 들여다보면 그만이지 자세는 무슨 놈의 자세냐? 이런 반문 충분히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문서도 문서 나름이고 인격도 인격 나름이다. 덜 떨어진, 설 익은 인격보다 훨씬 더 인간적이고 귀하게 대하고 싶은 문서도 있다. 기록은 그렇게 대해야 한다. 그래서 집 없는 사람은 있어도, 보관소 없는 기록물은 없다. 집 없는 기록은 이미 기록이 아니다.
이 문서는 이미 1977년 초에 일반에 공개된 것이다. 공개라 함은, 그 사전적 의미는, 여러 사람에게 널리 터놓는다는 것이다. 독일 현대사연구소가 노획문서의 총목록을 만들고 일본 국립국회도서관이 전량을 일괄 수집해 간 것은 현대사연구소 연구원들만 보려고, 일본 국회 도서관 사람들만 들여다보려고 가져 간 것이 아니다. 모두가 보자고, 모두에게 읽히자고, 가져다가 보관한 것이다. 그런데 북한 노획 문서는 그렇지 못했다. 그런 대접을 받지 못했다. 문서를 노획해 간 미국마저도 공개했고, 적국인 북한도 보라고 이미 공개한 문서를, 그 문서를, 일부 한국의 지식인들은 개인 소유물로 만들었다. 자기 바지춤 속에 감춰버린 것이다. 만인 앞에 내세워지는 이순신, 유관순이 되었어야 마땅할 사람을 비밀 지하 감옥에 가둬버렸고 첩을 삼아 버렸다. 이런 짓거리는 배운 자들, 지식인들, 사회 지도층에 있는 자들만이 저지를 수 있는 지식 범죄이다. 가증맞은 이런 지식 범죄를 고발하는 고발장 한 장을 소개한다. 입 맛이 약간 쓰겠지만, 이 고발장은 한글이 아닌 영문으로 쓰여진 것이다.
보고서 작성 시기가 분명하지는 않으나 보고서 내용으로 추정해 볼 때 1978년 이후 것으로 보이는 북한 노획 문서 조사 보고서 한 편이 노획 문서 목록함 속에 들어 있다. '워싱턴 국립레코드센터의 북한 노획 문서'가 제목이다. 보고서 작성자는 미 의회의 토마스 호숙 강(Thomas Hosuck Kang)으로 되어 있다. 여덟 장 분량의 이 짧막한 보고서 앞머리에는 이 보고서가 '이른바 '한국에서 미군이 노획한 기록물'이라는 문서군을 조사하고 평가하기 위한 것'이라고 보고서 작성의 목적을 밝혀놓고 있다. 이 보고서는 북한 노획 문서의 역사적 배경과 중요성을 소개하고, 내용별 주제별로 문서군 내용을 분석하면서 보존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등 북한 노획 문서가 어떤 것인지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요약 정리가 잘 되어 있다.
그런데 이 보고서 속에는 독일이나 일본 등 다른 나라 노획 문서 분석 보고서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보고 내용이 들어 있다. 그 부분을 그대로 옮겨 본다.
'이 문서들은 아직 일반에게, 특히 학계에 공개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데, 그 이유는 이 문서들이 '비밀(Confidential)'로 묶여 있다가 1977년 2월16일에야 비로소 비밀 해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문서 이용자들은 세 가지 다른 형태를 보인다. 첫째, 일부 한국 학자들, 특히 한국 정부 관리들의 경우이다. 이들은 이 자료들을 이미 훑어보았고 자료 가운데 일부를 수집해 갔다. 이들 각자는 모두 자신만이 이 자료에 대해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다른 이들은 이 자료를 이용하지 못하도록 한다. 둘째, 정치적 선정주의를 노린 일부 언론인들은 민감한 시기에 이 자료들을 공개하며 왜곡과 과장의 지나친 태도를 보임으로써 일반인들을 잘못 유도하고 있다. 예를 들면, 한국 동란 기념일 하루 전인 1978년 6월24일 동아일보가 '북괴 남침 관련 비밀 문서 대량으로 쏟아져'라는 제목과 '6월24일자로 전면전 명령 하달'이라는 부제를 달아 게재한 장문의 기사가 그런 경우이다.'
언론의 왜곡 과장 보도야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니 그리 놀랄 것도 못 된다. 일부 학자나 관리들이 자신만이 문서의 존재를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는 것도 그냥 넘길 만하다. 혼자서야 얼마든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으니까. 그러나, '다른 이들이 이 자료를 이용하지 못하도록 한다'는 대목에 이르면 문제는 달라진다.
짐작이 간다. 어떤 말을 어떻게 하고 다녔을지.
아예 입 다물고 다닌 사람: 이건 그래도 나은 편이다. 문서 공개되었을 당시, 그때 입 다물고 있었다면, 다문 김에 끝까지 다물고 있기를 바란다.
미 아키비스트더러 다른 한국 사람들한테는 말하지 말라고 애원(?)에 협박(?)에 회유(?)까지 한 사람: "있는 걸 없다고 말하라고 부탁드릴 수는 없겠으나, 제발 아무 말씀도 하지 말아 달라." "이거 여기저기 말하고 다니면 곤란하다. 문서 내용이 워낙 민감해서. 자칫 잘못하면 당신도 괜히 말려든다." "내가 한국에서 다 알아서 하겠다. 당신은 나한테 좋은 문서만 골라서 넘겨라. 올가을 서울에서 열리는 국제회의에 한 일주일 정도 초청하겠다. 당신도 1년에 한번씩은 정기적으로 서울에 다녀야 하지 않겠는가. 앞으로도 나하고만 얘기하자."
이 문서가 그들의 사유물인가? 이 문서가 자기네 안방 구석에 혼자 숨겨놓고 생각날 때마다 손가락으로 찍어 빨아 먹는 꿀단지인가? 공개되지 않은 문서를 입수한 것이라면 사유화한다 해도 할 말 별로 없다. 기록 문서를 사유화하겠다는 발상 자체가 얼마나 어리석고 허망된 짓인지 금방 스스로 깨닫게 될 테니까.
하지만 이미 공개된 문서를 남들이 이용하지 못하도록 한다는 것은 가증스러운 짓이다. 내가 접근할 수 있는 길을 막았기 때문에, 내가 얻을 수 있는 이득을 채갔기 때문에, 내 밥그릇이 될 수도 있는 것을 먼저 차지했기 때문에 이기적인 심술에서 가증스럽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기록은 사실이다. 역사다. 기록을 가로막고 덮으려는 것은 사실과 역사를 왜곡하는 짓이다. 언론의 왜곡 과장은 사실 그 자체를 덮지는 못한다. 결국 사실은 밝혀진다. 그러나 있는 기록을 없는 것처럼 하겠다는 것은 사실 자체를 매장해 버리겠다는 짓이다. 하물며 북한 노획 문서 같은 문서에서랴. 사유화에 대한 집착, 꿀단지에 대한 소유욕이 얼마나 강렬하고 지독했으면, 정부 기관의 공식 보고서에서까지 언급이 되었겠는가?
'내가 다 먹었다, 나머지는 쓰레기'
더욱 안타까운 일은, 이런 일이 지금도 버젓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학자, 언론인 등 전문가는 물론 미국의 한국 관련 문서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지극히 평범한 일반인들도 북한 노획 문서의 존재를 알고 있다. 다만 그 문서의 종류나 내용 등 구체적인 것에 대해 충분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 못할 뿐이다. 왜? 이 문서에 접근했던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그 내용을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1977년에 이미 공개된 것을 30년이 가깝도록 자기 품 속에만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대학의 교수가 했다는 말이 있다. "중요한 건 이미 다 수집해 왔고 나머지는 쓰레기 같은 것들인데 그런 걸 수집할 필요가 있겠느냐"고. 다른 곳에서 벌써 대부분 수집했는데 그걸 또 건드려 뭐하겠느냐는 말도 들었다.
'다른 곳'이라 함은, '이미 다 수집했다'함은 국사편찬위원회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북한 노획 문서의 일부를 수집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국사편찬위원회가 북한 노획 문서의 절대량을 '이미 다 수집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지 않고 뒤틀어 버릴 때, 우리는 그걸 거짓말이라고 배워왔다. 아이들에게 도 그렇게 가르치고 있디. 지금도 NARA에서 무작위로 북한 노획 문서를 열람 신청해 박스를 열어 보면 손끝 하나 안 댄, 바스러지기 일보 직전의 귀중한 문서들이 수도 없이 쏟아져 나온다. 심지어 어떤 문서들은 박스 자체가 아예 밀봉된 채로 열람자의 손에 쥐어지는 것도 있다. 2천400여 개의 박스 가운데, 약 170만 매 가운데, 수집자의 손길이 미쳤다고 분명하게 판단되는 것은 아무리 많게 잡아도 전체 문서의 고작 3~4%밖에 되지 않는다.
'5% 미만'의 양이 '대부분'으로 둔갑 되는 어이 없는 산술, 눈 가리고 아옹 식의 '쓰레기'론이 사라지지 않는 한 언제 또 미 정부의 공식
보고서에 '북한 노획 문서 이용자들의 독특한 이용 행태에 대한 분석'이 등장할지 모른다.
독일은 노획 문서가 공개되자마자 2년 동안 총목록을 만들고 4분의 3을 수집해 갔다. 일본은 12년에 걸쳐 자기네 문서를 모두 복사해 갔다. 우리는 남들이 그 문서의 존재를 알까 봐, 남들이 행여 그 문서를 써먹을까 두려워, 없는 척하고 모르는 체하고 숨겨오다시피했다. 찔끔찔끔 침 바르듯 손을 대고는 지금도 '내가 다 먹었다, 나머지는 쓰레기'라고 외치고 있다.
가방 끈이 짧은 탓인지, 과문한 탓인지 북한 노획 문서를 들여다볼 때마다 필자의 눈에는 어느 문서 한 장 귀하게 보이지 않는 것이 없다. '주인 없는 집 뜨락 같아 보이는 공장 주위가 울타리가 없기 때문에 우리 내무상 견해에서 본다면 방범, 방화의 우려가 있기 때문에 공장 주위를 울타리할 것을 심중히 제의한다'는 내용의, 평양 제지 공장 지배인 한영국 앞으로 보낸, 남평양(南平壤) 내무서장 김쌍룡의 1950년 6월2일자 자필 편지 원본이 왜 '쓰레기' 취급을 받아야 하며, 평양뿐만이 아니라 무려 700곳이 넘는 지역에서 미군 손에 노획된, 북한 지식인이 일본어로 쓴 2차세계대전 전사(戰士) 자료나 토지개혁 입안서, 중농 출신 학생과 지식인 교사의 성분 조사표, 김일성을 비롯해 최창익 한설야 등 내각 주요 인물들의 자택 주소와 전화번호가 일목요연하게 반듯한 펜 글씨로 적혀 있는 색 바랜 메모 쪽지 한 장이 왜 수집 가치가 없다는 것인지 그 논리는 아무리 기를 쓰고 이해하려 들어도 도무지 이해할 능력이 없다.
'다른 이들이 이 자료를 이용하지 못하도록' 이 문서의 접근을 막는다면 그건 이 문서에 대한 대접이 아니다. 막는다고 막힐 일도 아니다. 딴 살림 차려 첩 들여 앉히고 자기만 들락거린다고 해서 끝까지 남의 눈을 가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혼자서만, 자기 손가락으로만, 꿀단지의 꿀맛을 보겠다는 것이라면 그건 도굴에 가깝다. 도굴의 끄트머리는 도굴범이라는 이름밖에 얻을 게 없다. 그게 도굴과 발굴의 차이이다. 문서를 대접하는 자세의 차이이다. 그게 노획 문서를 대하는 독일과 우리의 다른 점이고 일본과 우리의 다른 점이며, 그게 이런 글을 쓰게 만든다. 이 글을 쓰게 만들어 준 이들에게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진심이다. 감사드린다. (kn-58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