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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도적으로 단어 수집
구츨라프 일행은 바질 홀의 충고대로, 중국어를 구사하는 통역을 대동함으로써 조선의 작은
어촌에서도 충분하진 않았지만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다. 또 조선의 지식인인 관리들과는
종교나 영혼 같은 '관념'에 대한 의견도 나눌 수 있었다.
이에대해 구츨라프는 '코레안과 발음은 달랐지만, 중국인과 똑같은 뜻을 나타내는 한자(the
Chinese character)'로 필담을 통해 의사소통을 했다고 분명히 기록(p329)하고 있다.
나아가 구츨라프의 항해기에는, 바질 홀의 항해기에 채집되어 수록된 "Hota,Hota!(좋다, 좋다!)'같
은 조선 단어가 이젠 익숙한 단어로 등장(p343), 상호 언어에 대한 이해가 싹트기 시작했음을 보여
준다.
아울러 미래 의사소통을 위해, 의도적으로 조선의 단어를 수집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도 있다.
"Mr.L. had been daily collecting words for his vocabulary, but now they refuse to give the
shortest sentence; for they fear that by learning their language, we may converse with them
and influence them to adopt sounder policy."(Mr.L.(항해 책임자 린제이)은 매일 어휘용 단어를
수집해왔는데, 이제 그들(조선관리)은 짧은 문장으로 말하는 것도 거부했다. (짧은 단어지만)언어
를 배움으로써, 서로 대화가 통하고 그러다 보면 원칙을 바꾸게 만들지 않을까 두려워했기 때문이
다)"<Journal of Three Voyages~, p344>
구츨라프 일행은 소통 수단을 확보하기 위해 어휘용 단어를 의도적으로 수집했고, 조선 관리들도 짧은 문장이지만 언어를 배우는 것이 상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고, 그같은 상황의 전개가 고수하고 있는 정책을 바꾸는 상황을 만들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영어로 쓴 문서를 관리에게 건네다
드디어 영국 선박의 교역 요청에 대한 조정의 지침이 하달됐다. 이십여일 이상 이제나 저제나 애타
게 기다려온 구츨라프 일행에게, 조정의 지침은 실망스럽기 짝이 없었다.
조정의 지침을 전하는 관리(조선왕조 실록에 따르면 역관 吳繼淳이다)는 "중국의 조공을 바치는
속국으로 중국의 허락없이 교역할 수 없다"며, 기왕에 받았던 왕에게 전하는 편지와 선물은 불법이
기 때문에 돌려주겠다는 의사를 전해왔다.
이에대해 당연히 왕에게 편지와 선물이 갔을 것이라고 믿고, 오랫동안 기다려온 구츨라프 일행은
현장의 조선 관리들에 대한 신뢰를 상실한다.
구츨라프 일행은 이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조선 관리에게 영어로 쓴 문서를 건넸다고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After a desultory conversation, we handed to some of the principal mandarins a paper,
descriptive of their tergiversation, and of the English character, which did not brook any
disgrace. Such plain language had desired effect; they became humble, and began to regret
their assertions of the day before" <Journal of Three Voyages~, p351~352>
두서없는 대화 뒤에 구츨라프 일행은 조선 관리들에게 그들의 변덕(조정의 답신이 오기까지 현장
의 관리들은 교역이 성사될 수도 있음을 비췄다)을 지적하는 영어로 된 문서를 건넸고, 이는 관리
들에게 모욕을 못 참게 만들어, 바람직한 결과를 가져왔으며, 이전의 주장들에 대해 후회하기 시작
했다는 것이다.
교역이 실패로 돌아간 것을 깨달은 구츨라프 일행은 조선 관리와의 대화에서 평소처럼 한자로 소
통한 것이 아니라, 전혀 뜻이 통하지 않는 영어로 된 문서를 건넴으로써, 항의의 뜻을 표한 것이다.
뒤에 살펴 볼 린제이의 보고서에도 이와같은 기록이 나온다.
조선관리는 필담으로 진행되던 대화 속에 낯선 영어가 끼어 들면서 뭔가 심각한 상황을 전하고 있
음을 간파했을 것이고, 이어 한자로 번역된 글을 통해 그 내용이 중국의 속국이어서 독자적으로 교
역을 못한다는 답변의 불합리성 등을 지적하는 내용임을 알게되자, 부끄러움을 느꼈다.
구츨라프는 조선관리들의 태도를 보고, '낯선 이들과 교류하는 것을 관리가 아니라 왕이 결정하는
것은, 왕실의 의지가 곧 그나라의 법인 모든 전제국가에서 있는 일로 전혀 낯선 일이 아니다'고 기
록했다(p353). 조선이 전제 왕국이라고 규정한 것이다.
당시 조선 관리들이 주체적이지 못한데 대한 수치심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후의 상호 논의에선 '영
국배가 곤경에 처했을 때는 즉각 충분한 식량을 제공'하고, 또 '난파 선원은 북경으로 돌려보낼 것'
등을 요구한 구츨라프 일행의 요구에 조선관리들이 동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p352).
구츨라프는 조선과의 교역을 트는데 실패한 뒤 충청도 해안을 떠나 8월17일 조선의 최남단 제주도
(Quelpoert)를 지나면서, "이곳에 공장을 세운다면 일본,코레아, 만주, 중국과 의 교역이 매우 편할
것"이라고 기록(p356)했다. 일본과 중국을 연결하는 항로상 제주도의 중요성을 지적한 것이다.
린제이 보고서의 코레아
암허스트 호의 조선 상륙에 관한, 앞서 지적한 다른 기록을 보자. '중국북방지역 항해 보고
서(Report of proceedings on a voyage~)'의 대부분은 린제이(Lindsay)의 보고서로 이
뤄져 있고, 코레아에 관한 부분은 p215~259에 기술돼 있다. 구츨라프의 코레아에 대한 보
고는 p293~294에 단 두페이지로 간략히 기술돼 있다. 구츨라프의 보고는 'Corea. Chaou-
Seen(코레아, 조선)'이란 제목아래, "산물이 알려져 있지 않고, 그들의 언어는 유럽에서 결
코 발견된 적이 없다"고 적었다. 또 교역을 거절하면서 '조공국가이기 때문에 중국의 허락
없이 교역할 수 없다'는 이유를 댄 뒤, 외국인 눈에 비굴하게 비친 것을 부끄러워 했다고
기록했다.
린제이의 보고서는 'Transactions in Chaou-seen,or Corea(조선 혹은 코레아에 있어
상거래)'라는 제목아래, '7월17일 오전 10시경, 바질 홀 군도 북단의 일단이 보였다.'고
시작하고 있다. 그날 (오후) 5시경, 처음으로 어부와 만나 필담을 나누고, 책과 라이언 버튼(영국
문장)을 선물로 줬으며, 답례로 생선을 받았다고 기록했다. 두번째 만난 어부들은 한자를 읽을 줄
몰라 의사소통에 실패했다.
린제이는 항해를 하면서 곳곳에서 '바질 홀'의 항해기에서 기록한 지형과 관리들의 옷차림 등을 언
급하고 있다. 홀의 항해기를 철저히 마스터하고 항해에 나섰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방문 목적과 교역희망 물품, 영국 사정 등을 담은 책자 등을 적어 문정차 찾아 온 조선 관리에
게 건네고, 수도는 경기도 한양이고, 300리 떨어져 있다는 대화도 기록했다. 또 조선 왕에게 선물
로 망원경 2개와 세공유리잔, 다양한 색깔의 옷감, 성경 완역본 2권과 지리 천문 과학 등에 관한 서
적을 보내고, 교역 청원서를 첨부했다.
이들은 조선에 머무는 동안 주민들을 배에 초청하고, 조선 관리의 초청을 받고 함께 술을 마시고,
수백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감자를 심고, 망원경으로 이곳저곳을 관찰하는 등 다양한 접촉을 기록
했다. 린제이는 이같은 접촉을 통해 조선사람에 대해, "상상했던 것처럼 사람을 싫어하는
(misanthropic) 종족이 아니다"고 기록(p236)했다. 이방인에 비친 조선인은 이처럼 완전히 상반되
고 있다.
한자 주기도문을 한글로 쓰게 하기도
브로튼과 홀 일행이 조선어 단어를 수집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들도 언어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을
보였다. 린제이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One day,the 27th, after a great deal of persuasion, we succeeded in inducing Yang-yih to write
out a copy of the Corean alphabet, and Mr.Gutzlaff having written the Lord's Prayer in Chinese
character, he both gave the sound, and wrote it out in Corean character, but after done so he
expressed the greatestalarm, repeatedly passing his hand across his throat, and intimating,
that if the chiefs knew it he would lose his head. He was most anxious to be permitted to
destroy the paper.To quiet his apprehensions, it was locked up before him, and he was
assured that no one should ever be allowed to see it,"
("아주 애써 설득한 끝에, 우리는 구츨라프가 주기도문을 한자로 쓰고, 양이(Yang-yih/주: 조선관
리 이름)가 한글로 베끼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그들 둘은 소리를 내고, 그것을 한글로 썼다. 그러
나 다 쓴 뒤엔 계속 목을 자르는 시늉을 하면서, 위(chief)에서 알면 목이 달아난다며 위험을 고지
했다. 그는 그 주기도문을 없애버리라고 애걸했다. 그의 불안을 달래기 위해, 그가 보는 앞에서 (금
고에 넣고)자물쇠를 채웠는데, 그는 누구도 보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다짐했다.") <Report of
proceedings on a voyage~, p239>
구츨라프가 주기도문을 한자로 쓰고, 이를 읽어 조선 관리가 한글로 받아 적었다는 것이다. 린제이
는 이밖에도 다양한 한자 단어의 한글 이름을 획득했다고 기록했다.
또, 영어 문서를 조선 관리에게 전달했다는 구츨라프의 기록과 관련, 린제이는 서울에서 온 특사
Woo Tajin(주:역관 吳繼淳)과의 대화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The envoy was named Woo Tajin, a man about forty, elegantly dressed in Chinese silks. After
the ceremony of introduction had been gone through with much form and politeness, and the
chiefs had been shown into cabins,carpets were at their request spread out deck, and the
following conversatoion took place, of which I kept a copy, verbatim, in Chinese."
(특사의 이름은 Woo Tajin이었고, 중국비단 옷을 입은 우아하게 보이는 40대 남자였다. 매우 공식
적이고 예절을 갖춘 공식인사를 나눈 뒤, 그들의 요구에 따라 갑판에서부터 카펫이 깔린 선실로 안
내됐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대화가 중국어로 축약해서 이뤄졌고, 나는 그 사본을 보관하고 있다.)
<Report of proceedings on a voyage~,p245>
이어 소개한 '다음과 같은 대화(the following conversatoion)'의 내용에서, 조선 관리의 말에 대한
대답을 영어로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첫 대화를 보면 다음과 같다.
Corean Chief. In traversing the ocean you have been exposed to perils and difficulties; truly
we feel compassion, and hope you have sustained no injury. -English. We thank you for your
inquiry. By the protection of Heaven we have arrived in safety. <Report of proceedings on a
voyage~,p245>
(조선 관리. 대양을 건너면서 많은 위험과 곤경에 빠졌을 텐데, 정말 위로의 말을 전한다. 아울러
아무런 부상이 없었기를 바란다. 영어.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소. 하느님 덕분에 안전하게 도착했
소.)
교역을 원하는 영국인과 조선의 관리 오계순은 '중국의 속국이어서 교역을 할 수 없다'는 문제를
놓고 지리한 토론을 벌였고, 영국인들은 "그러면 왜 그렇게 오랫동안 우리를 교역을 할 것처럼 묶
어 놓았냐"며 따졌다. 조정의 지침에 따라 편지와 선물을 되돌려줘야 하는 오계순은 "안 받아가면
내 목이 날아간다"는 모습을 취하며 가져가길 애원했다고 적었다.
린제이는 조선관리와의 대화 끝에 중국어로 문서를 작성했고, 번역문도 첨부했다. 그 문서의 제목
은 '왕의 조사에 대한 기억(A Memorial for the Inspection of the King)'이었다.
첫 귀절은 다음과 같다.
"Confucius says,'when a friend arrives from a distance, is not a subject of rejoicing' and now
that English ship has arrived from a distance of many myriads of le, bearing a letter and
presents, should you not rejoice thereat?"
"공자는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멀리서 친구가 찾아오니, 기쁘지 아니한가)?'라고 했다. 지금 영
국 배가 수만리 먼 곳에서 편지와 선물을 갖고 오니, 그러해야 하지 않는가?"(p252)
린제이는 이 문서에, 조선에 상륙해서 왕에게 청원서와 선물을 보내고, 답신을 기다린 저간의 사정
과 조선 관리에 대한 불신, 조선의 교역 불가에 대한 부당성 등을 기술하고, 앞서 구츨라프가 언급
했던 긴급구난 조항 등을 담았다.
그리고 4부를 작성해 조선관리들에게 주었다고 기록했다(p252). 4부를 나눠준 것은 관리들이 서로
반목하는 모습을 보여, 이 문서가 어떤 식으로든 왕에게 공개되기를 원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문서가 왕에게 알려졌는지는 불확실 하지만, 조정은 이들 관리들을 문책한다. 린제이의 보고서
를 자세히 읽어보면, 그들은 조정서 관리가 오기전에 친분관계를 유지했던 지방관리가 아니라, 조
정에서 파견 나온 오계순의 문책을 희망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지방관리들이 대거
문책됐다. 이와관련 순조실록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비국(備局)에서 아뢰기를,
“이 배는 필시 바다 가운데에 있는 나라들의 행상(行商)하는 배일텐데, 우연히 우리 나라 지경에
이르러 주문(奏文)과 예물(禮物)을 가지고 교역을 시도해보려 하다가 계획이 이루어지지 않자 저
들도 물러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나, 다만 그 주문과 예물을 그대로 두고 간 것은 자못 의아롭습
니다.
먼 곳에서 온 사람들의 속셈을 비록 헤아리기는 어려우나 우리의 처리에 있어서는 의당 신중히 해
야 하겠으므로, 문정관(問情官)과 역관 등으로 하여금 일일이 수량을 확인하여 궤(櫃)에 봉해 두게
하고 우리들에게 준 책자를 빠짐없이 모아 함께 봉(封)하여 본주(本州)의 관고(官庫)에 보관하게
하여야 하겠습니다.
공충 수사(公忠水使) 이재형(李載亨), 우후(虞候) 김형수(金瑩綬), 지방관 홍주 목사(洪州牧使)
이민회(李敏會)가 문정할 때에 거행이 지연되고 처리가 전착(顚錯)된 죄는 묻지 않을 수 없으니,
청컨대 도신(道臣)이 논감(論勘)한 대로 파직의 율로 시행하소서.” 하니, 모두 윤허하였다.<순조
32년 7월21일자 4번째 기사>
구츨라프 일행이 조선 왕의 교역에 대한 지침을 기다리면서 조선 해안 일대에서 수집한 조선에 대
한 각종 정보는 이후 조선을 찾는 사람들에게 큰 도움을 줬을 것이 틀림없다.
앞선 항해자들이 자신들의 항해기에 조선에서 수집한 단어들을 실었던 던 비해, 이들의 기록에는
보이지 않아 아쉽다. 그러나 이들 뒤에 조선을 찾은 사람의 항해기에서 조선에서 수집한 단어가 기
하급수적으로 늘어난 것을 보면, 이들이 수집했을 우리말 단어는 나중에 조선을 찾은 사람들에게
알려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어 단어는 싣지 않았지만 구츨라프는 다른 동료 선교사들을 위해 조선어에 대한 기록을 남겼
다. 1833년 중국 광동에서 선교사들을 위해 발간한 '중국총보(Chinese Repository)'에 'Remark on
the Corean Language'란 짧은 논문을 발표한 것이다. 이 글에서 구출라프는 동아시아 언어와 문
자에 관해 개관하고 한국에서 한국어를 적기위한 알파벳이 생기게 된 연유를 말하고, 한국어의 문
법구조를 약술했다. 다음은 그 일부다.
"비록 주민의 대다수는 중국 문어(文語)를 읽을 줄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더욱 많은 편
의를 위해서 그들의 언어에 기묘하게 적합한 알파벳을 채용했다. 이것은 이론적으로는 일본에서
음절(音節) 문자를 채용한 것과 비슷하다. 이 알파벳 문자는 구성이 지극히 단순하면서도 정교하
다. 이 알파벳은 열 다섯의 일반음 즉 자음(自音)을 갖고 있다. ㄱ ka, ㄴ na----. 이 열 다섯 글자
가 초성으로서 모음자 및 이중모음자와 결합하면 168개의 서로 다른 결합의 음절자를 형성한다.
ㅏ a,ㅑ ya,---.자음자들은 자주 발음이 상당히 바뀐다. 모음자들도 간혹 바뀌지만 그렇게 심하지
않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언제나 그렇다고는 할 수 없지만,호음조(好音調.euphony)를 위한 것이
다." <Chinese Repository, 1833년 vol.1, p277~278. 李基文, '十九世紀 西歐 學者들의 한글 硏究',
2000, 학술원 논문집 39집>
비록 영어 사용자들에 의해서지만, 영어와 우리말이 직접 소통할 수 있는 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
한 것이다.
첫댓글 또 좋은 자료를 올리셨군요. 고맙습니다. 내용을 잘 보아야 하겠군요. 뭔가가 있기는 있군요.
감사합니다 선생님. 카자흐스탄과 페르시아에 대해 깨닫고나서부터 중앙아시아에 대한 관심이 폭증해서 열심히 찾아보고 있습니다.
여담입니다만,요즘은 벌이도 시원치 않은 저의 본업보다 역사에 관한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도 절실하게도 듭니다. ^^ 제가 인용해온 자미두수 홈페이지에서 저의 운명을 보니 연구직이나 펜대를 잡아야하는 업종이 적성에 맞다고 나오더군요. 제 삶을 생각해보니 그것이 맞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생각하기에 따라 돈 버는 방법도 많이 있겠지요. 재미있는 것으로 돈버는 기술을 개발하면 더 재미있겠지요. 적성에 맞다는 것은 더더욱 환영할 일이고요. 기대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