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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연합교회 형성과 신학논쟁들
서론
교회사 안에서 19세기를 “선교의 시대”라고 부른다면, 20세기는 “에큐메니칼 시대”라고 부를 수 있다. 20세기에는 선교와 교회일치와 윤리적 실천이 연합되면서 “일치 안에 선교”(mission in unity)와 “값비싼 일치”(costly unity)가 신학적 논의 주제로 등장했다. 그와 함께 20세기 교회사 안에서 두드러진 현상은 연합교회의 출현이었다. 전 세계적으로 약 150번의 교단연합을 통해 현재 50개의 연합교회가 탄생했고 현재 40개의 교단들이 연합과정에 참여하고 있다.
대다수 연합교회들은 새로운 교회로 부활하기 위해 이전의 정체성들에 대해 죽을 준비를 한다는 “케노틱 교회론”(kenotic ecclesiology)을 채택했고, 1937년 에든버러 신앙과 직제대회에서 강조한 “유기적 연합”(organic union, 엡 4:17)과 1975년 세계교회협의회(WCC) 나이로비 총회에서 강조한 “협의회적 친교”(conciliar fellowship)를 연합 모델로 택했다.
예장통합교단의 경우 에큐메니칼 선교협력관계를 맺고 있는 31개의 교단 중에서 6개가 연합교회이다. 한국에 여러 다른 교단들도 연합교회들과 선교협력관계를 가지고 있지만 한국교회 안에는 연합교회들의 일치추구의 역사적 경험과 신학적 논의들에 대해서 학문적 연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주로 교파전통에 충실하면서 교회 분열에 시달려 온 한국교회에는 에큐메니칼 운동을 좌경시하는 신학적 사시(斜視)현상이 여전히 지배적이다. 또한 한국교회의 설교와 신학교육에서 교회의 보편성을 무시하는 신학적 단견도 있다. 그리고 분열 가운데서도 성장해온 한국교회는 연합경험에 대한 신학적 필요와 실용적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한국교회는 교회분열의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면서 연합교회의 역사적 경험에 대해 학문적인 눈을 열어가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경험은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치에 중요한 통찰력을 제공해 줄 것으로 확신한다.
이 글은 호주 연합교회가 형성되는 역사와 그 과정에서 일어난 신학논쟁들을 살펴보는데 목적이 있다. 호주빅토리아장로교회는 1889년 헨리 데이비스(Rev. Henry Davies)를 파송하여 경남 부산지역에 선교를 시작하면서 한국교회와 교류를 시작했다. 1977년 6월 22일 호주의 장로교회, 감리교회, 회중교회가 연합하여 호주연합교회(Uniting Church in Australia)를 형성하였고, 이 교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기독교대한감리회, 한국기독교장로회와 선교협력관계를 맺고 있다.
1. 호주연합교회의 신앙의 유산들―교파 내부의 연합들
호주연합교회는 호주식민지 정착초기부터 발전된 장로교회, 회중교회, 감리교회 세 교파전통을 신앙의 유산으로 가지고 있다. 우선 호주 안에서 세 교파 전통 각자가 하나로 연합되는 과정을 살펴본다.
⑴ 장로교회 전통의 흐름
1788년 영국에서 호주로 죄수들과 일부 정착민들을 실어 날랐던 최초의 함대(the First Fleet)에는 성공회 교인들과 장로교인들이 타고 있었다. 장로교인 정착자들은 1802년에 교회를 세웠고, 장로교회는 빅토리아(1837),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1839), 퀸즐랜드(1847), 웨스트오스트레일리아(1868)에 세워졌다. 한편 장로교회의 모국인 스코틀랜드 안에서는 복음주의(Evangelicalism)운동이 성장했고, 국가의 교회간섭에 반대하는 교회분열이 여러 차례 일어났다. 그 결과 국가교회(Church of Scotland), 자유교회(Free Church, 1843), 연합장로교회(United Presbyterian Church, 1847)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장로교전통의 세 분파는 19세기 초에 스코틀랜드인들과 아일랜드인들의 이민을 통해 호주에 이식되었다. 19세기 중반 경, 호주의 6개 주(state) 안에서 장로교회 분파들이 성공적으로 연합하여서 빅토리아(1859), 퀸즐랜드(1863), 뉴사우스웨일즈(1865),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1865)에 장로교회가 형성되었다.
이러한 장로교 연합은 스코틀랜드 안에서 일어난 연합(1929) 보다 훨씬 빨랐다. 그 원인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호주 식민지 초기에 인구증가, 교육부재, 도덕적 타락, 전통적 가치 파괴와 같은 문제에 대처하기에는 목회인력이 크게 부족했다. 따라서 선교중복과 경쟁을 피하고 목회효율을 높여야 했다. 둘째, 장로교파가 분열된 이유는 호주의 상황과 전혀 무관한 것이라는 자각이 증가했다. 셋째, 교파분열과 경쟁은 복음증거에 큰 장애가 되었다.
더 나아가 6개의 장로교회 시노드(혹은 주총회)(Synod 혹은 state assembly)들은 전국연합을 꿈꾸었다. 1884년 시드니(Sydney)에서 열린 장로교대회는 연방총회(Federal Assembly)를 위한 계획안을 작성했고, 1895년에 호주장로교회를 건설하기 위한 연합의 기초(Basis of Union)가 작성되었다. 각각의 시노드는 기존의 방식대로 자율을 유지했고, 총회는 해외선교사역, 신학생훈련, 목사를 인정하는 것에 대해서 최고의 책임을 갖도록 했다. 이러한 방식이 장로교연합을 가능하게 만든 행정적 원리였다.
1901년 6월 24일에 호주장로교회 총회가 탄생했다. 1901년의 인구센서스에 의하면 장로교인들은 인구의 11.3%를 차지했고, 성공회, 가톨릭, 감리교 다음으로 큰 규모였다. 호주연합교회에 들어오기 직전 1976년에 장로교인들은 전체 인구의 6.6%였다.
⑵ 회중교회 전통의 흐름
회중교회(Congregational Churches)는 16세기 잉글랜드 종교개혁 운동에서 출현했다. 초기 회중교회는 청교도들이었고, 성공회와 장로교와는 대조적으로 예배, 증언, 의사결정에 있어서 지역 안에 “회집된 교회”(gathered church)의 역할을 강조했다. 그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교리에는 동의하지만 그 국가교회적 직제에 대해서는 신념이 달랐기 때문에 1658년에 “사보이 선언서”(The Savoy Declaration of Faith)를 작성했다.
호주 회중교회는 18세기 말 타이티(Tahiti)선교에서 실패하고 시드니에 정착했던 런던선교회(LMS) 선교사들에 의해 시작되었다. 1830년에 호바트(Hobat)에 첫 회중교회가 세워졌다. 그 후 1840년에는 빅토리아와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에, 1853년에 퀸즐랜드에 회중교회들이 세워졌다. 회중교회도 영국인들의 이민을 통해 성장했는데 그 규모가 크지는 않았다. 회중교회는 개 교회의 독립성을 유지하면서 19세기 중반에 주 단위로 연합이 이루어졌고, 1904년에 호주ㆍ뉴질랜드 회중교회연합(Congregational Union of Australasia)을 이루었다. 이 당시 회중교회 교인들은 인구의 2%였다. 호주연합교회에 들어오기 직전 회중교인들은 인구의 0.4%에 불과했다. 회중교회는 호주연합교회 안에 개교회의 통전성(integrity)과 자율성을 보존하는데 기여했다.
⑶ 감리교회 전통의 흐름
호주 감리교회는 평신도 정착자들에 의해 1813년부터 시작되었고, 1815년에 최초의 감리교 목사가 시드니에 도착하였다. 그 후 감리교회는 태즈메이니아(Tasmania, 1820),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와 빅토리아(1837), 웨스트오스트레일리아(1830)로 전파되었다. 19세기 호주의 감리교회들은 주로 잉글랜드와 웨일즈로부터 온 이민자들로 구성되었고, 잉글랜드 안에서 일어난 웨슬리감리교회(Wesleyan Methodists)와 원시감리교회(Primitive Methodists)라는 분열을 그대로 이식했다. 그러나 1881년부터 20년 사이에 감리교회들은 연합해서 1902년에 호주ㆍ뉴질랜드 감리교회(Methodist Church of Australasia)를 만들었다. 이러한 감리교회들의 연합은 영국(1932) 안에서 보다 훨씬 빠르게 일어났다.
이 당시 감리교인들은 호주 인구의 13.4%를 차지했고, 감리교회는 성공회와 로마가톨릭교회에 이어 세 번째로 큰 교파였다. 1976년에는 감리교인 수는 전 국민의 7.3%였다. 감리교전통은 호주연합교회 안에 음악과 찬양, 전도와 사회참여 전통을 전수했다.
20세기로 들어오면서 호주의 교회와 국가에는 연합의 정신이 활발하게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1901년 호주의 6개의 식민지 주들이 호주연방국가(Federation)를 건설하면서 호주 민족주의와 국가정체성이 최고조에 도달했다. 이때, 장로교회는 1901년에, 감리교회는 1902년에, 회중교회는 1903년에 각각 전국단위의 연합을 이룩했다. 이 과정에서 교회의 지도자들은 교회의 민족적 비전과 지역적 충성심을 화해시켜 나갔다.
2. 더 큰 일치를 향한 노력들
호주연합교회 형성은 1901-24년, 1942-51년, 1954-77년, 세 단계에 걸쳐 ¾세기의 노력과 신학적 토론을 통해 이루어졌다.
⑴ 1차 단계 (1901-24)
① 협상의 과정
1901년 6월 24일에 형성된 호주장로교 총회는 교회일치를 논의하기 위한 공동위원회(joint committee)를 만들자고 감리교회와 회중교회에 제안했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커다란 호주교회”(a grand church of Australia)를 만들겠다는 희망 가운데 일어난 발상이었다. 1904년에 세 교파들 안에서 “유기적 연합”에 대한 생각이 무르익었고, 1908년 공동위원회는 연합을 위한 교리의 기초(Basis of Doctrine)를 작성했다.
한편 1909년에 장로교회와 성공회 사이에도 교회연합 논의가 일어나서 신앙, 직제, 그리고 연합방법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것은 1908년 성공회의 람베스 주교회의(Lambeth Conference)의 결정이 크게 작용했다. 그러나 호주성공회는 영국성공회로부터 독립할 수 있는 법적 권한이 없어서 이 논의는 실패했다. 그렇지만 이러한 노력은 1910년에 멜버른신학대학법안(Melbourne College of Divinity Act)을 만드는 기초가 되었고 대학원차원에서 개신교파들 사이에 에큐메니칼 신학교육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장로교 내부에서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장로교회 전통을 지키려고 하는 사람들로부터 반대가 일어났다.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 장로교회의 잡지〈배너〉(Banner) 1912년 4월자에서 편집자는 세 교파가 연합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교회는 대륙의 복음화를 위해서 자원을 절약해야 하고, 교파적 관점을 넘어 민족적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교파연합운동의 배경에 선교적 관심과 민족주의적 관심이 강했음을 보여준다. 1914년에 총회는 공동위원회를 해산하자는 동의가 있었으나 총회장의 결정투표(casting vote)로 부결되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모든 연합현상은 중단되었다.
전쟁이 끝나가던 1917년에 세 교파 사이에 연합협상이 다시 시작되었다. 1918년 공동위원회는 “연합의 기초”를 개정했는데, 이 문서는 이전의 문서들, 주 총회들과 노회들에서 올라온 견해들, 그리고 1915년에 캐나다 장로교회가 연합을 위해 작성한 ‘연합의 기초’가 참조되었다.
② 협상에 영향을 준 배경
제1차 협상시기에 연합의 정당성을 뒷받침해 주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선교운동이었다. 1910년 에든버러 선교대회(Edinburgh WMC)는 선교영역에 있어서 전 세계적인 개신교회의 협력을 탁월하게 보여주었다. 뉴사우스웨일즈 장로교회는 인도선교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이미 인도에는 장로교회 전통들과 회중교회 전통들을 가진 교회들이 연합하여 1908년에 남인도연합교회(the South India United Church)가 형성되었다. 선교지에서 일어난 이러한 교파연합에 대한 요청은 강력한 정당성을 가지고 있었다. 또 장로교회가 감리교회 및 다른 해외선교 단체들과 맺었던 예양협정(Comity agreements)도 이러한 협상에 영향을 주었다.
두 번째로 제1차 세계대전의 경험은 연합의 필요성을 크게 느끼도록 했다. 전쟁과정에서 징집을 찬성하는 개신교회와 반대하는 가톨릭교회로 인해 국론은 양분되었고, 교회분열은 지성인들의 지탄의 대상이 되어있었다. 또한 참전한 군목들은 교파들 사이의 불일치가 군목활동에 큰 장애가 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세 번째는 세속화였다. 새롭게 발전하는 국제주의와 노동조합 안에서 공산주의자들의 영향력 확대로 인해, 교회는 세상의 필요에 대해 공동으로 대응해야 한다는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다.
넷째, 신학교육의 변화였다. 각 교파들은 공동의 신학커리큘럼을 발전시켰다. 특히 호주사회의 대학들은 신학학위를 제공하지 않았는데 교파들은 협력해서 시드니 대학과 멜버른 대학 안에 신학학위를 부여하도록 로비하는 일에 협조했다. 이러한 로비활동은 교회가 전도와 회심과 같은 부흥회적 강조로부터 기독교적 생활의 교육적 모델을 강조하도록 중심을 변화시켰다.
③ 협상의 실패
1920년에 개정된 ‘연합의 기초’에 대해 각 교단들 안에서 찬반투표가 실시되었다. 감리교회는 90%가 찬성했고, 회중교회는 84%가 찬성했다. 장로교회는 모든 시노드가 찬성했지만 49개 노회들 중 오직 28개만이 찬성했다. 전체 총회의 투표결과는 찬성 246(71%) 대 반대 100(29%)으로 연합이 가결되었다. 그러나 빅토리아 주의 소수파 장로교지도자들은 연합의 기초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에 대한 심각한 배신이라고 주장하면서 투표결과에 강력하게 반대했다. 1923년에 개정된 “연합의 기초”에 대한 찬반투표에서 장로교회는 찬성 317(52%) 반대 288(48%)로 의견이 거의 반반으로 갈라졌다. 1924년 장로교총회는 교회분열을 염려하면서 모든 협상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교파연합이 실패한 주 이유는 당시 가장 강력했던 빅토리아 장로교회가 그들의 스코틀랜드-아일랜드 장로교회의 전통과 그들의 재산을 잃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⑵ 2차 단계(1942-1951)
① 협상의 과정
제2차 연합협상은 1942년 감리교회의 제안으로 시작되었다. 그해 12월 시드니에서 공동위원회가 모였다. 협상모델은 “연방적 연합”(Federal Union)이었다. .이 개념은 참여하는 교단들의 정치와 재산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일정한 영역에서의 사역은 연방적 연합의 형태를 수단으로 하여 협력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 방안은 감리교회와 회중교회 안에서 찬성을 얻었지만 역시 장로교회 안에서 반대여론이 일어났다. 3개 시노드가 반대했고, 2개 시노드에서는 보고서조차 올라오지 않았다. 오직 뉴사우스웨일즈만 원칙에 대해 찬성했다. 1948년 장로교총회는 세례 받은 교인들의 투표로 연합을 결정하도록 결의했으나 어떤 투표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마도 연방적 연합에 대한 정의(definition)가 애매했던 것이 원인이었을 것이다.
② 협상에 영향을 준 배경
첫째, 사회문화적 배경이다. 1940년대, 경기침체와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이민이 억제되었다. 그 결과 호주에서 태어난 세대들이 점차적으로 교회의 중요한 책임을 떠맡게 되었다. 문화적으로는 1938년부터 영국의 영향력들이 기울었고, 미군의 주둔 이후 미국문화의 유입이 가속화되었다. 전통의 장벽과 문화적 종교적 자기중심주의가 부서지면서 종교적 전통주의 보다는 호주 자체의 상황이 중요하게 부각되었다.
둘째, 전쟁과정과 전후에 초교파적 연합 사업이 활성화되었다. 1946년에 북오스트레일리아 주 안에서 장로교인들과 감리교인들이 연합교회(the United Church of North Australia)를 세웠고, 나중에 회중교인들도 동참했다. 멜버른에 있는 디커니스훈련소(Deaconess Training Institute) 안에서 초교파적 훈련의 협력, 호주내지선교회(AIM) 안에서 초교파적 목회자들의 협력, 호주 극서지역 목회자들의 순회공동 신학교육, 멜버른 신학대학원(Melbourne College of Divinity) 안에서의 초교파적인 신학교육 등 안에서 연합정신이 지속되었다.
셋째, 세계 에큐메니칼 운동의 영향이다. 호주교회의 대표들은 ‘신앙과 직제’의 연구모임에 참여하면서 교회의 재 연합 논의에 신학적 활력을 불어넣었다. 1947년 남인도에서 성공회, 장로교회, 감리교회, 회중교회가 연합한 남인도교회(Church of South India)의 형성과 1948년 암스테르담에서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창립은 호주교회 연합운동가들에게 대단히 큰 충격을 주었다.
③ 협상의 실패
2차 연합협상도 장로교회 내부의 반대로 실패했다. 특히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 시노드와 뉴사우스웨일즈 시노드 안에서 반대가 가장 강렬했다. 이것은 1차 연합협상 시기에 빅토리아 시노드가 반대의 중심이었던 것과 대조를 이룬다. 이러한 배경에는 시드니를 중심으로 일어난 자유주의-보수주의 논쟁이 있었다. 1930년 시노드 대학과 멜버른 대학의 일부 기독학생들은 전통 기독학생운동(SCM)의 자유주의적 성향을 거부하고 영국 복음주의기독학생회(IVF: Inter-Vasity Fellowship of Evangelical Unions)의 영향을 받아 복음주의 연합회(Evangelical Union)를 결성했다. 이러한 분위기는 보수적인 교회의 지지를 받았다.
호주에서는 미국의 근본주의-현대주의 논쟁처럼 신학논쟁이 심각하지는 않았지만 복음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은 교회연합 이슈를 가지고 상대방을 서로 공격했다. 전통적인 사회선교개념과 선교를 사회참여로 바꾸려는 노력이 서로 충돌했다. 장로교회 안에서 일부 사람들은 교회연합 없이도 교파 간 친교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반면, 복음주의자들 가운데에도 신학적 차이를 넘어 교회연합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1950년대 장로교 전통주의자들과 복음주의자들은 교회의 핵심기구들이 사회복음주의자들에 의해 장악되었다고 느끼고 있었고 자신들이 소외되고 있다는 동질감에서 공동의 대의를 발견했다. 그들은 장로교 정치를 유지시키는 것이 생존을 위해 필수적이라고 느꼈고 방어적인 입장을 택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 사이에도 교회연합에 대한 입장 차이가 있었다. 일부는 교회연합을 사회복음주의자들이 스스로 추방되어 나가는 숙청의 기회라고 보았던 반면 일부는 그렇게 되면 장로교회의 재정과 행정이 분열되고 역사적인 교회의 기억과 층들이 상실될 것을 우려했다.
1951년에 호주장로교총회는 “이 문제에 대한 명확한 결정을 내릴 수가 없기 때문에 현 단계에서 협상을 지속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된다.”는 내용을 감리교회와 회중교회로 통보했다.
그러나 장로교회를 제외한 두 교회는 미래에 세 교단의 연합을 바라보면서 둘 사이의 연합가능성을 지속적으로 탐구했다. 그러나 회중교회는 너무 작은 교단이었고 당시 감리교회는 급성장하고 있는 교단이었기 때문에 제3교단이 없이 둘 사이에 연합은 어려웠다.
⑶ 3차 단계(1954-1977)
① 초기 협상의 과정(1954-1970)
1954년 감리교회와 회중교회는 유기적 연합(Organic Union)을 목표로 “연합의 기초”를 작성했다. 그해 감리교대회는 장로교총회에 연합협상에 참석해 줄 것을 제안했다. 장로교총회는 이 안건을 201대 47로 통과시켰다. 1955년 시노드 투표에서 연합협상 안건은 70%의 찬성을 얻었다. 오직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 시노드 만이 부정적이었다.
한편 호주 성공회는 헌법개정에 심취하고 있어서 재 연합에 흥미가 없었고, 성공회의 고교회주의자들과 복음주의자들은 교파연합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1957년 세 교단은 21명의 교회연합 공동위원회(Joint Commission on Church Union)를 구성했다. 1957년 이전의 논의들은 “합병의 정서”(amalgamation mentality)가 강했고, 각 교파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특징들을 결합시키려는 실용주의적 접근을 했다. 그러나 새 공동위원회는 단순한 교파합병으로는 연합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고, 정치나 정책보다는 연합의 기초가 될 수 있는 “신앙의 본성”(the nature of the faith)에 초점을 둔 새로운 접근을 시도했다.
공동위원회는 1957년에 첫 번째 보고서 “교회의 신앙”(The Faith of the Church)을 발표했고, 많은 논의를 거쳐 1963년에 “연합의 기초”를 포함한 “교회―그 본성, 기능, 제도”(The Church―Its Nature, Function, and Ordering)를 발표했다. 공동위원회의 주요 신학자들은 “연합의 기초”란 “연합교회의 지속적인 삶을 인도하는 신앙과 직제에 관한 진술”이며 연합교회 안에 있는 지속적인 특징을 강화하는 권위“라고 정의했고, 연합교회의 정치형태는 훗날 새롭게 탄생하는 교회의 과제로 남겨두었다. 그렇지만 1963년에 발표된 ‘연합의 기초’는 새로 태어나는 연합교회(Uniting Church)가 남인도교회(Church of South India)와 협약(concordat)을 맺을 것과 감독제 형태를 도입하였기 때문에 심각한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그 논쟁은 다음 장으로 미룬다.
장로교 시노드들 안에서 찬반의 강도 차이는 각각 달랐다. 일반적으로 연합 지지자들은 이 문제가 성급하게 진행되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고 충분한 이해가 이루어지면 반대자들을 설득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젊은 지지자들은 교회연합을 교회갱신의 방법으로 생각했고, 교파교리보다 선교에 우선권을 두었다. 그러나 반대자들은 연합운동을 신학적 자유주의로 이해했고 그것이 장로교 신학의 정체성을 대체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들은 어떠한 수정안들이 나오든지, 다른 교파들이 어떤 생각을 하든지 간에 자신들의 신념을 흐리게 하는 협상에 대해 전혀 무관심했다. 1960년대와 1970년대 장로교회 안에서 친연합주의의 경향이 부양한 것은 역설적으로 개혁전통의 당파성이 성장하는 것에 대한 반감이 작용했다.
② 협상에 영향을 준 배경
첫째, 가톨릭 이민의 증가에 대한 불안감이 있었다. 1950년대 호주 사회는 백호주의(White Australian policy)라는 인종차별주의에 몰입되었고, 아시아로부터의 이민과 난민의 유입이 거부되었다. 반면, 이태리, 중부유럽, 지중해 연안 국가들로부터 엄청난 숫자의 백인계 가톨릭 인구가 호주에 유입되었고 그들의 높은 출생률로 인해 호주사회에서 가톨릭교회의 정치적 영향력은 급증했다. 이러한 현상은 개신교회들의 위기감과 단결의식을 초래했다.
둘째, 1960년대의 교회성장에도 불구하고 이민증가로 인해 인구대비 교회출석률은 감소했다. 1959년 빌리그래함의 부흥집회는 전후 호주인들의 영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수많은 불신자들이 빌리그래함의 집회에 몰려왔고 호주교회사 안에서 그러한 부흥운동은 예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 결과 호주인들이 가장 많이 교회에 모였던 시기는 1960년대 초반이었고, 신학생들의 숫자, 젊은이들과 주일학교 학생들의 숫자가 가장 많았던 시기도 바로 이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구대비 교회출석자의 비율은 떨어지고 있었다.
셋째, 이민자들에 대한 목회적 필요가 연합을 촉진했다. 멜버른과 시드니 같은 대도시 내부의 교회들은 교인감소와 건물유지의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 반면 도시근교에는 수많은 인종들의 사람들이 정착했다. 그러나 개신교회들은 로마가톨릭 혹은 동방교회 이민자들에게 복지혜택을 주는 것 외에 그들을 위한 목회를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호주사회는 처음에 이민자들의 동화정책(assimilation)을 추진했으나 이것이 불가능한 것을 깨닫고 다문화주의(multiculturalism)를 택하게 된다. 이것은 영국우월주의 신념과 종교적 교파주의를 허물었다. 이에 따라 1960년대 호주 전역에서 대도시 근교의 교회들은 교파를 초월하여 협력관계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넷째, 1960년대의 에큐메니칼 영향도 중요하다. 1960년대 초반, 호주교회 안에는 바르트(K. Barth)와 부른너(E. Brunner)의 신학적 영향력이 크게 작용했고, 또한 남인도교회(Church of South India)의 주교 레슬리 뉴비긴(Lesslie Newbigin)도 큰 영향을 주었다. 뉴비긴은 국제선교협의회(IMC) 총무로서 1961년 WCC와 IMC의 통합을 주도했으며 그것을 위해 호주를 방문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65) 역시 호주사회 안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얻었다.
③ 연합에 반대하는 의견들
호주연합교회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연합을 반대했던 장로교인들의 입장을 살펴보는 것은 역사적으로 중요하다. 세계사 안에서 다수자들이 늘 옳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소수자들의 다른 견해들은 그 자체로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 장로교회 안에서 반연합주의자들은 통일된 입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이점은 연합주의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반연합주의자들은 개혁주의적이든 복음주의적이든 신학적으로 전통주의를 옹호했다.
㈀ 첫 번째 반연합주의 그룹은 개혁주의 전통의 옹호자들이었다. 1948년 뉴사우스웨일즈에는 개혁주의 예배를 연구하고 장려하려는 웨스트민스터 협회(Westminster society)가 생겨났고, 이들은 곧 빅토리아 주의 구파 칼뱅주의 목회자들과 연대하여 세력을 형성하였다. 1960년대 장로교회 안에 개혁신학의 부흥이 일어났고 이것은 모든 개혁주의 유산에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그들은 연합운동이 실패하는 것이 장로교 전통과 감리교 전통 양쪽을 위해 유익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들 중 일부는 연합을 통해서 장로교 내부의 자유주의자들이 빠져나가고 교회가 가시적으로 정화되는 종교개혁이 일어나기를 바라기도 했다.
㈁ 두 번째로 시드니의 장로교 고교회주의자들은 성공회와의 연합을 지지했으나 감리교파와의 연합은 교회의 가톨릭성과 개혁전통을 손상시킨다고 보고 반대했다. 이들의 수는 아주 적었다.
㈂ 세 번째는 연합의 기초가 성경적 교리의 기초가 너무 약하기 때문에 부정확하고 모험적이라고 보면서 반대하였다.
㈃ 네 번째 그룹은 이론적으로는 연합을 지지하지만, 시기와 방법이 부적절하다는 실용적인 이유로 연합에 반대했다. 그들은 커다란 손실을 남길 수 있는 혁명이나 대변동으로 이루어지는 연합은 바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 많은 수의 소수파들은 침묵하는 반대자들이였는데, 그들은 전통적이고 문화적인 장로교인들이었고, 유기적 연합을 해야 할 이유에 대해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그들은 장로교회가 호주 안에서 잘못된 역할을 한다고 생각지 않았고, 다른 교회들과 친교하면서도 장로교회가 우월하다고 느끼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④ 후기 협상과정(1971-77)
공동위원회는 1970년 3월에 개정된 연합의 기초를 출판했다. 이 문서는 교회들의 재 일치는 반드시 갱신을 동반해야 하며 그 결과 선교적 과제에 헌신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것은 약간의 수정을 거쳐 1971년에 호주연합교회를 형성하는 기초가 된 최종적인 ‘연합의 일치’가 발표되었다.
1972년에 세 교단의 모든 교회들은 “연합의 기초”에 대한 찬반투표를 실시했다. 이 투표에서 감리교인들의 85%, 회중교인들의 83%가 연합을 지지했다.
반면, 장로교회 안에서는 찬반논쟁이 치열했다. 시드니 장로교인들의 다수는 연합 반대파였고, 멜버른의 장로교인들의 다수는 연합 지지자들이었다. 시드니 장로교인들의 다수는, 이 연합운동이 오몬드 칼리지(Ormond College)에 본부를 둔 데이비스 매코히(Dr. Davis McCaughey, 1914-2005)에 의해 영향을 받는 멜버른 당파에 의해 추진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미 장로교 내부분열은 진행되고 있었다.
그런데 투표용지의 질문은 큰 혼동을 일으켰다. 첫째 질문은 투표자는 자신의 교회가 연합교회에 들어가기를 원하는가를 물었고, 둘째 질문은 연합이 이루어지면 투표자는 장로교회에 남을 것인가를 물었다. 연합을 지지할 경우 투표자는 ‘예-아니오’를 답해야 했다. 1번 질문에 75.7%가 “예”를 했고 2번 질문에서는 60.8%가 “아니오”를 표시했다. 총회에서는 242대 134로 연합을 찬성했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이렇게 상반된 답을 요구하는 투표를 해보지 않았다. 이 배경에는 연합 반대파의 노력이 있었다. 만일 회중의 1/3 이상이 장로교회에 남기를 원하면 교회의 부동산은 장로교회로 귀속한다는 사전 합의가 있었기 때문에 반대파는 2번 질문을 통해 심정적으로 “예”를 유도한 것이다.
그래서 일정기간의 교육을 거친 후 1973년 9월 9일에 재투표를 실시했다. 연합반대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총회가 연합을 결정하지 않으면, 1차 투표가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에 2차 투표에 동의를 해주었다. 2차 투표에서는 1번 질문에 71.67%가 “예”를 2번 질문에는 68.68%가 “아니오”를 표시했다. 교회연합을 원하는 사람도 75.7%에서 71.7%로 줄었고, 장로교인으로 남겠다는 사람도 39.2%에서 31.3%로 줄었다. 52개 노회 중에서 42개 노회가 연합에 찬성했다. 1974년 5월 1일 호주장로교총회의 최종투표는 230대 143으로 연합을 결정했다. 결국 1437개 장로교회들 중에서 916개 교회(64%, 교인들의 69%)는 연합교회로 들어왔고 521개 교회(36%, 교인들의 31%)는 장로교회로 남았다.
재미있는 현상은 감리교회와 회중교회의 찬성률은 1920년대의 것과 큰 변화가 없는 반면 장로교회에서 연합에 대한 지지율은 1920년 57%에서 72%로 크게 늘어난 것이다. 교파 간 찬성률의 차이는 교회정치 구조와 관련되어 있었다. 회중교회는 개 교회들이 자신의 입장을 결정했다. 교인들의 수가 적었던 회중교회는 연합을 통해 얻는 것이 많았다. 따라서 주에 따라 83%~94%까지 연합에 찬성했고 반대하는 소수파는 회중교회로 남았다. 감리교회는 전국대회(national conference)가 연합을 결정했다. 연합에 반대했던 소수의 개인들과 일부 목회자들은 교회를 떠나거나 공식교인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장로교회는 개 교회―노회―시노드―총회를 통과하는 길고도 어려운 여론수렴 과정을 거쳐야 했고, 가장 강력한 신앙전통과 재산이 있었기 때문에 연합반대자가 많았다.
1974년 총회에서 장로교회 지지자들은 총회의 결정에 대해 항의서를 제출했고, 호주장로교회의 권리를 인정하라는 ‘청구권’을 요구했으나 272대 83으로 부결되었다. 그들은 교회가 연합에 들어가는 그 순간부터 호주장로교회의 명칭과 업무에 대한 모든 권한은 지속되는 교회(the continuing church)의 권리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연합교회가 형성될 때까지 교회를 지켰다.
이제 연합은 분명해졌고 교회의 재산을 분할하는 문제가 뜨거운 이슈가 되었다. 교회의 부동산은 회중들의 선택에 의해 결정되었다. 그러나 학교들과 유지재산들은 분쟁의 소지가 되었다. 총9명으로 구성된 자산위원회는 1955-56년에 이 문제에 대해 협상했다. 자산위원회는 양쪽에서 각각 3명의 대표자를 내고 외부에서 3명을 초빙했다. 학교의 소유권을 둘러싼 싸움이 가장 치열했다. 멜버른과 시드니에서는 각각 2개의 사립학교가 장로교회로 할당되었다. 특히 멜버른에서는 최고의 명문학교에 속했던 스코츠 칼리지(Scot's College)와 장로교여학교(Presbyterian Ladies College)가 장로교회로 할당되었다. 나머지 재산에 대해서 빅토리아장로교회는 비록 15%교인을 유지했지만 재산의 25%를 분할했고, 52%교인을 유지한 뉴사우스웨일즈 장로교회는 약 50%재산을 얻었다.
1977년 6월 22일 시드니에서 마지막 장로교총회가 열렸고 그 직후 호주연합교회(Uniting Church in Australia)가 창립했다. 연합교회는 5%의 회중교인들, 59%의 감리교인들, 36%의 장로교인들로 구성되었다. 연합교회의 명칭을 United로 하지 않고 Uniting으로 한 것은 앞으로도 다른 교파들과 연합을 지속하여 가겠다는 의도가 있었다.
75년간의 협상을 통해 세 교파가 하나의 교회가 되었다는 기쁨과 비전이 있었지만, 다른 한편, 정들었던 교회를 떠나야 하고, 가족들이 분리해서 예배드려야 하고, 미래의 불확실성을 견디어야 하는 고통이 뒤따랐다. 교회 재연합의 경우 늘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연합에 대한 반대와 환멸 때문에 1980년까지 3만 7000명의 교인들이 교회를 떠났다. 1960년대 절정에 올라갔던 호주교회의 교인 수는 그 이후로 급속히 감소했다. 이러한 현상은 연합에 참여하지 않았던 성공회와 로마가톨릭교회도 마찬가지였다.
⑤ 유지되는 장로교회
장로교인들의 다수가 연합교회로 들어간 이후, 남은 521개 교회와 31%의 장로교인들은 장로교회를 유지했다.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와 북부 지역에는 장로교인들이 거의 남지 않았다. 빅토리아와 퀸즐랜드에는 상당량의 소수파 장로교회들이 남았다. 그러나 뉴사우스웨일즈에는 다른 모든 주들의 장로교인들을 합친 것보다 많은 수의 장로교인들이 남았다.
지속되는 장로교회들은 모든 에큐메니칼 기구에서 탈퇴했다. 그리고 호주장로교회는 1974년에 여성목사 안수를 시작했는데 이로 인해 적은 수의 근본주의적 장로교인들이 교단을 떠나기도 했다. 남은 장로교회는 1991년에 여성안수를 중지했고, 이어서 여성장로 안수도 중지했다.
3. 연합과정에 나타난 신학적 쟁점들
⑴ 교회의 신앙(1959): 비교교회론을 넘어서
1927년 로잔 신앙과 직제대회가 출범한 이후, 교회의 신앙에 대한 질문은 국제 에큐메니칼 운동의 핵심 주제였다. 그 후 1952년까지 각 교회들은 자신들의 신앙과 직제에서 상이점과 공통점을 비교하고 확인하는 작업을 했다. 1948년 WCC의 창립은 각 교파들이 자기-만족을 넘어서 서로를 필요로 하는 것을 인정하는 과정이었다. 에큐메니칼 운동에서 그 다음 단계는 비교교회론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1952년 룬트의 신앙과 직제 대회에서 상임총무 톰킨스(O.S. Tomkins)는 비교교회론을 끝내고 새로운 과제와 직면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이러한 신앙과 직제 대회는 호주연합운동에 영향을 끼쳤다.
1957년 공동위원회는 세 교파의 특징을 합병하는 방식을 버리고 “신앙의 본성”(the nature of the faith)에 초점을 맞추어 첫 번째 보고서 “교회의 신앙”(The Faith of the Church, 1957)을 작성했다. 그들은 신앙의 일치추구에서 교회의 본성탐구로 그리고 연합된 교회의 조직과 법적인 문제를 다루는 방향을 선택했다. 이 점은 이전의 북미와 영국, 영연방 안에서 이루어진 교회연합들과는 크게 다른 점이었다.
1957년의 “교회의 신앙”은 향후 연합의 과정을 이끌어가는 세 가지 뼈대를 세웠다. 첫째는 비교교회론을 넘어서기 위해 하나님 말씀 “듣기”(listening)를 방법론으로 택했다. 이 문서에 의하면 현대적 이교주의는 하나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회초리인데, 교회는 세상과 너무 동화되거나 너무 분리되어 있어서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있다.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서 신조는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교정될 가능성에 항상 열려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바르멘 선언에 나타난 바르트주의에 크게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두 번째는 “복음의 리듬”(rhythm of the gospel)이라는 역동성을 적용하는 것이다. 교회는 성서와 신조와 신앙고백전통들 안에 전해져 내려온 사도적 전승을 역사적 상황 안에서 해석해야 하는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복음의 리듬”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복음의 리듬을 교회구조에 적용하면 장로교 정치를 보전하는 공통의 구조 안에 다른 교파전통을 끌어안는 연방적 연합 방식이 된다.
세 번째 교리(confession)에 절대적 권위를 부여하기보다 고백하기(confessing)을 강조했다. 이것은 “듣기”와 “복음의 리듬”을 신앙고백에 적용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현장에서 듣고 실천적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 교파전통을 지키는 것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교회의 신앙”의 중심내용을 살펴보면, 연합될 교회(United church)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예배하는 거룩하고 보편적인 교회의 일부이다(1항). 연합교회의 최고표준은 하나님의 말씀이며(2항), 그 다음 표준은 사도신조와 니케아 신조이고(3항), 웨스트민스터 신조, 사보이 신조, 존 웨슬리의 44개 표준설교와 신약주석을 유지하고(4항), 교회의 교리, 예배, 정치, 치리에 대해 국가의 간섭을 받지 않는다(5항).
이 문서는 수정을 거쳐 1959년에 최종적으로 완성되었다. 교리적 진술인 “교회의 신앙”은 큰 논쟁을 불러일으키지 않았지만 신앙의 기초에서 출발한다는 원리를 세워주었고 그러한 접근 방법은 다음 문서로 이어졌다.
⑵ 연합의 일치(1963)-감독 제도를 둘러싼 논쟁
1963년에 공동위원회는 “교회: 그 본성, 기능과 직제”(The Church: Its Nature, Function and Ordering, 1963)를 완성했다. 이 보고서에 첨가되어 있는 “제안용 연합의 기초”(Proposed Basis of Union)는 “호주연합교회”(the Uniting Church in Australia)라는 명칭을 처음 사용했고, 향후 연합교회가 남인도교회(CSI)와 협약(concordat)을 맺도록 제안했고, 목사, 장로, 집사 외에 감독제를 두도록 제시했다.
문서 초안자들이 감독제를 수용한 것은 교회론적인 면과 실용적인 면이 있었다. 그들은 교회론적으로 “‘사도적 계승권’…은 본질적으로 교회의 모든 삶 속에 존재하는 것이고 감독제라는 분리된 삶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정의 하면서 로마가톨릭적인 감독제를 반대하고, 성경적인 감독제를 옹호했다. 두 번째 그들은 실용적인 면에서 호주 성공회를 끌어안고 아시아의 교회들과 연대할 수 있는 큰 그림을 그렸다. 감독제는 미래에 연합교회와 성공회가 결합 하도록 개방성을 부여할 수 있고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오래된 전통들과 연속성을 가질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한편 호주사회는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자신들이 유럽보다 아시아에 속한 것을 깨닫게 되었고 호주교회도 아시아 교회들과의 연대성을 강화하려는 노력을 했다. 이런 연유로 공동위원회의 일부 지도자들은 성공회를 끌어안은 남인도교회의 연합방식을 모델로 택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연합논의 자체를 망가뜨릴 만큼 강력한 반대를 불러일으킬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초안자들은 감독제라는 용어가 가진 위험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개인적 ‘감독자’(superintendent)라는 용어를 택했으나 결국 신약성서의 용어 감독(bishop)을 사용했다. 그들이 생각한 감독제는 로마가톨릭적인 성직계서(hierarchy)가 아니라 “노회 제도 안에 있는 감독직”(bishops-in- Presbytery)이었다.
반대는 21명의 공동위원회 내부에서 시작되었다. 장로교 대표 1명은 이 보고서를 반대했고, 3명의 장로교 대표들과 4명의 감리교 대표들은 보고서의 발표를 보류하는데 서명했다. 반면, 영국에서 감독제와 싸웠던 회중전통의 대표들은 이것을 인정했다.
이 문서는 전 교회적으로 첨예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1965년 8월 공동위원회는 “이해를 향하여”(Toward Understanding)라는 문서를 배포했고, 같은 해, 반대하는 그룹은 “그 반대편”(The Other Side)이라는 문서를 보급했다.
전후 시대는 한편 에큐메니즘의 시대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교파주의 부활의 시대였다. 성공회와 아시아의 교회들과 함께 항해하기 위해 신학적인 해결을 모색하려고 했던 공동위원회의 본래 의도는 1960년대 강력한 교파주의적 반대에 걸려 좌초했다. 장로교회 6개 시노드 전체와 50개 노회(전체 58개 노회)가 남인도교회와의 협약을 반대했고, 2개 시노드와 28개 노회가 감독제에 반대했다.
⑶ 연합의 일치 (1971)
내부논쟁의 수렁에서 연합으로 가는 새로운 길을 열어준 신학자는 멜버른의 오몬드 칼리지의 학장 데이비스 매코히(Davis McCaughey)였다. 그는 신약성서 신학자로서의 신비성과 카리스마와 경건성을 지닌 인물로 공동위원회의 대표적인 지도자였고 호주연합교회가 탄생한 후 첫 총회장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는 교파 전통들을 소위 “복음의 리듬”(rhythm of the gospel)으로 대체하는 조직적 접근 방식을 시도하여 여러 신학적 견해를 끌어안았고 열정적으로 다른 사람들이 이것을 수용하도록 설득했다. 그 결과 1967년 빅토리아 주 총회는 ‘일치된 그리스도인들의 행동의 중요성은 교리와, 예배 혹은 헌법의 중요성을 훨씬 초월한다.’는 입장을 택했다.
반대자들의 입장에서 이러한 방식은 필요성이 원칙을 능가했다는 비판이 가능했다. 또한 여러 교파전통들을 하나로 모을 때에 필연적으로 환원주의적 거래가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과연 ‘교파전통을 포기할 만큼 연합이 중요한 것인가?’ 여기에 논쟁의 핵심이 있었다.
1970년 3월에 발표된 “연합의 일치”를 보면, 하나의 거룩한 사도적 보편적 교회의 신앙과 일치 안에 연합교회를 둔다(2항)고 명시하면서 사도신조와 니케아신조를 신앙고백으로 받아들였다(9항). 그리고 성서는 “예언자와 사도들의 증언”으로 그 안에서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5항)고 했는데 이는 신정통주의적 영향을 보여준다. 목회자들과 교사들은 종교개혁교부들의 증언을 공부하고 존 웨슬리의 44개 설교를 들을 것을 언급했다(10항). 교리는 성서를 해석하는 원리라고 표현하면서 현대사상과 접촉할 수 있는 개방성을 허용했다(11항). 그리고 1971년의 개정판에서는 신앙의 본질에 해당되지 않는 문제에 대해서는 견해의 자유를 허락한다고 명시했다(14항). 1971년에 승인된 “연합의 일치”는 연합교회를 형성하는 토대가 되었다.
결론
초창기 호주의 교회들은 이민을 통해 이식되었다. 특히 장로교회와 감리교회는 영국 안에서 심각하게 분열된 형태로 이식되었으나 광범위한 토지에 흩어져 사는 사람들의 영적인 필요와 목회의 어려움, 목회자의 수급의 어려움, 공통의 선교과제에 대한 중복 투자라는 낭비에 대한 재고를 바탕으로 19세기 중반에 주 단위연합을 이룩하였다. 20세기 초반 장로교, 감리교, 회중교회는 전국적 연합으로 발전했다. 이렇게 교파 내부적인 연합은 시대적인 선교적인 요청이 강해지면 큰 신학적 어려움 없이 진행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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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세기 초 호주 민족주의의 성장에 힘입어 세 교단은 더 큰 교회일치를 꿈꾸게 되었고, 1977년에 연합교회를 형성하기 까지 세 차례에 거쳐 교파연합을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했다.
1차 협상시기(1901-24)의 모델은 “유기적인 연합”(Organic union)이었다. 이 시기는 에든버러 대회(1901)의 선교운동과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서구세계의 분열과 상처, 그리고 사회주의 등장과 세속화가 교회의 일치를 강조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강력한 스코틀랜드-아일랜드 장로교전통과 부를 지키려고 했던 빅토리아 장로교회의 반대로 연합운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교회들이 지닌 기득권의 큰 격차는 연합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2차 협상시기(1942-51)의 모델은 “연방적 연합”(Federal union)이었다. 이것은 교회의 정치와 재산이 연합에 방해가 되었기 때문에 사역에만 연방적으로 협력하는 방법을 택한 것이었다. 연합운동에 가장 큰 영향을 준 배경은 2차 세계대전과 1947년 1948년의 남인도교회연합과 세계교회협의회의 창립이었다. 그러나 연합을 실패하도록 만든 핵심 원인은 뉴사우스웨일즈 장로교를 중심으로 일어난 신학적인 진보-보수 갈등이었다. 연합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눈에 연합운동 지지자들은 사회복음주의자 혹은 자유주의자로 보였던 것이다.
3차 협상시기(1954-77)의 모델은 신앙적 일치추구에서 교회본성의 탐구로 그리고 교회조직과 법적인 문제를 다루는 점진적인 방식이었다. 정치의 문제는 탄생하는 교회의 과제로 미루어 두었다. 이것은 통일성에서 다양성으로 가는 방식의 모델이었다. 연합을 촉진시킨 배경은 다문화주의 이민정책으로 개신교인들의 비율이 크게 감소한 반면, 가톨릭교회는 큰 성장을 했다는 위기감이 있었다. 1960년대 IMC가 WCC와 통합하는 과정도 큰 영향을 주었다. 교파신학을 말씀의 권위 아래 상대화 시키는 신정통주의 신학도 주요한 배경이 되었다. 그러나 장로교 내부의 반대도 컸다. 그들은 첫째, 교리적 기준들이 불충분하다는 것, 둘째, 장로직제가 적절한 지위를 갖지 못한다는 것, 셋째, 양심적인 이유로 연합을 반대했다.
교파전통이 다른 교회들 사이의 연합은 신앙과 직제가 가장 큰 문제로 등장한다. 1963년의 “연합의 기초”는 감독제를 제시했는데 그것은 성공회와의 연합 인도연합교회와의 협약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그것은 로마가톨릭의 감독제가 아닌, 노회 안에서 감독제였으나 강한 반발을 받았다. 장로교 전통은 성경적인 감독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면이 있다.
“연합의 기초”를 초안한 멜버른의 오몬드 칼리지의 데이비스 매코히(Davis McCaughey, 1914-2005)는 신학적 보수와 진보의 갈등을 종합해 내려는 과감한 신학적 토대를 세웠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성서를 상황 안에서 해석하는 “복음의 리듬”, 신앙고백보다 고백하기(confessing)라는 방법론이었다. 이러한 방법론은 여전히 수긍할 수 없는 반대자들이 있었으나 상당한 설득력을 발휘한 것이 사실이다. 교회연합의 과정에서는 다양한 신학적 이견들을 종합해 낼 수 있는 신학적 종합과 신학자 집단이 필요함을 보여준다.
한편 연합의 과정에는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 소수자들의 새로운 분열이 뒤따른 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거기에는 신학적인 이유와 재산상의 문제가 존재했다. 연합의 과정에서는 분열을 최소화 하는 노력이 절실하다.
호주연합교회의 역사는 75년간의 긴 협상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것은 교회의 보편성을 추구하는 교회론적인 운동이었지만 호주의 상황에서 선교적 실천을 염두에 둔 실용적인 면도 강했다. 교회의 연합과 일치 추구는 당위론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다. 성령의 역사, 교회를 사랑하는 신앙, 오랜 신학적 논의, 여러 사회적 환경을 진지하게 고려하는 성숙함이 요청된다.
호주연합교회 형성 약사(略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