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배운 내용 정리***
1. <목민심서>
-18~19세기 초에 유명한 학자 다산 정약용의 저서
-지방관에 관한 지침서
-체계적인 서술과 날카로운 비판이 기록된 목민서
2. <목민심서>의 구성상의 특징
-지방관의 도리에 대한 지침서
3. 목민심서의 육전(六典)
-5편 이(吏)전 : 사람이나 조직
-6편 호(戶)전 : 수취관계
-7편 예(禮)전 : 제사
-8편 병(兵)전 : 군적, 병기
-9편 형(刑)전 : 송사)
-10편 공(工)전 : 산업
4. <경세유표>와 <목민심서>의 차이
<경세유표> : 1표(表) 2서(書로 대표되는 경세론을 펼친 저술 중 하나이며 제도 개혁안
<목민심서> : 지방관의 사적을 가려 뽑아 치민에 대한 도리를 논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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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는 총애하던 학자인 정약용이 오히려 그로 인해 중앙에서 어려움을 겪을 때 잠시 지방관으로 발령을 내어
그 회오리??^^에서 피할 수 있도록 배려를 했으며 암행어사나 곡산부사의 경험은 그로 인해 가능했답니다.
특히 곡산부사로써 지낸 2년간의 경험은 <목민심서>를 저술하게 된 계기가 되었을 것이며
유배를 당해 낮은 위치에 처한 '민'으로서의 경험과 본래 사람을 귀히 여기는 정약용의 소양이
당시 조선을 둘러싼 사회적 상항과 개인적 경험이 어우러졌을 것이라고 하구요.
구성상의 특징은 12편 각 편마다 6조를 붙여 72조로 이루어졌으며
1편 부임, 12편 해관과 그 이전의 흉년 빈민 구제방안인 11편 진황을 제외하면
2~4편의 율기, 봉공, 애민은 지방관으로서 백성을 대하는 자세를 강조하였고
특히 청렴하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검약해야 한다는 의미로 '절용'을 강조하였습니다.
강조한 수령상은 율기 6조 : 수령으로서의 몸과 마음
봉공 6조 : 공적인 일 수행 문제
애민 6조 : 민에 대한 사랑, 특히 가장 어려운 사람부터 보살피라는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5~10편은 우리가 흔히 외우듯...이,호,예,병,형,공 6조에 관한 내용으로 구성이 되었습니다.
<경세유표>와 <목민심서>의 차이도 중요하게 다루는데요,
<경세유표>는 요점만 말하자면 국가제도개혁에 관한 내용이고
<목민심서>는 지방관의 자세 등 도리, 즉 운영의 개선이 골자랍니다.
그의 개혁사상과 관련해서 단계별 개혁론이 1, 2, 3단계로 나눠지는데요
이 부분은 오늘날 논문과 비슷한 의미인 '잡저'에 담겨 있는 내용도 있습니다.
1단계, 즉 운영만을 개선하는 것은 <목민심서>, <흠흠신서>등에 나타나고
2단계, 국가 체제를 개편하는 내용은 <경세유표>를 중심으로 봅니다.
3단계, 늑 주권재민과 인민형명권의 입장에 선 것은 '잡문'에 실린 (원목)과 (탕론)에 나타납니다.
특히 <경세유표>는 앞선 유형원의 <반계수록>과 더불어 조선 후기 실학 가운데서도
가장 철저하게 국가 체제 개혁론을 주장한 것으로 일컬어지며 여기서 다뤄지는 내용은
토지제도에 대해서 정전론을 도입할 것을 비롯하여 부세제도, 관제 등에 대한 개혁을
상세하게 제시하고 있으며, 이는 고통받는 농민에 대한 애민사상이 바탕에 있다고 봅니다.
특히 정약용은 목민서를 저술하기 위해서 중국과 조선등 수많은 저서를 섭렵하고
여러가지 다양한 사례들을 들어 주술하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지방관의 지침서를 넘어
조선 후기의 농천 현실을 배경으로 백성들에 대한 사랑을 기반으로 새로운 사회,
새로운 역사를 만들려는 의지가 담긴 책으로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원문 읽기***
42쪽 2행 ~제3편 봉공육조 제4장 문보 끝까지(10행)
43쪽 "백성은 토지로서 논밭을 삼지만 아전들은 백성으로써 논밭을 삼는다.
백성의 껍질을 벗기고 골수를 긁어내는 것으로써 농사짓능 일로 여기고
머릿수를 모으고 마구 거두어들이는 것으로써 수확하는 일을 삼는다"
45쪽 6행 ~제9편 형전육조 제3장 신형 끝까지(19행)
아래는 2009년에 정리한 자료와 기출문제와 인터넷 보충학습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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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근심하지 않는 詩는 詩가 아니며,
시대를 아파하고 세속에 분개하지 않는 詩는 詩가 아니며,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하고 미운 것을 밉다고 하며,
착한 것을 권장하고 악을 경계하는 뜻이 담겨 있지 않은 詩는 詩가 아니다.
뜻이 세워져 있지 못한 데다 학문은 설익고, 삶의 대도(大道)를 아직 배우지 못하고,
임금을 도와 백성에게 혜 시를 지을 수 없는 것이니
너도 그 점을 힘써라.' -아들 학연에게 부친다(1808년 가을)-
사도세자가 죽임을 당하던 1762년 태어난 정약용은 개혁군주라 일컫는 정조의 신망을 받으며 함께 새로운 세상을 함께 만들어 가려던 신하였지만, 독살설까지 나도는 정조의 죽음과 함께 고난의 세월을 살게 됩니다. 여유당이란 당호는 '노자'에 ' 망설이면서(여與) 겨울에 냇물을 건너는 것같이 주저하면서(유猶) 사방의 이웃을 두려워한다'라는 구절에서 취한 것이었으니 정조가 없는 세상을 그가 얼마나 노심초사 하며 지냈는지 보여주기도 합니다.
정약용의 가문은 '팔대옥당'이란 학문 명가의 칭호를 받습니다. 이는 선조 여덟 명이 내리 옥당, 즉 홍문관의 관리가 되었음을 의미하는데 이는 그의 5대조인 정시윤이 마지막 이었습니다. 홍문관 관리로 세자시강원 필선까지 맡았던 정시윤은 숙종 때 갑술환국에서 남인들이 죽임을 당하자 시골로 가기로 결심했고,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수되면서 다시 경안천이 흘러 들어오는 아름다운 풍광의 마재에 터를 잡습니다. 이곳이 지금 다산의 유적지가 있는 조안면 능내리입니다.
이후로 영조의 탕평책 표방에 정약용의 아버지 정재원이 벼슬에 나설 수 있었으며, 그의 어머니 윤씨의 할아버지는 문인화의 대가였던 공재 윤두서였으며 노론 영수 송시열과 맞섰던 남인 영수 고산 윤선도 또한 윤씨의 증조부인 윤이석의 조부였습니다. 보통의 경우와 다르게 그는 별도의 선생을 두지 않고 홀로 공부했으며 고을 수령이었던 그의 아버지 정재원은 그가 자식에게 했듯이 역시 그를 가르쳤고 특히 인격적 면과 관련한 이야기가 전합니다.
'내(정재원)가 금강산에 놀러 갔을 때 어떤 고을에 이르러 그곳의 군수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아전이 손님이 왔다고 아뢰었는데 그는 가난한 친구였다. 군수는 콧날을 찌푸리고 고개를 저으며 괴롭다고 하면서 문을 열었다. 손님이 들어오자 군수는 기뻐하며 관대하게 대접하면서 우스개와 농담을 거리낌 없이 하니, 마치 가을 서리와 봄날의 볕이 잠깐 사이에 오가는 듯했다. 나는 이런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가난한 친구를 대하는 방법은 제일 좋은 것이 겉과 속이 함께 기뻐하는 것이고, 그 다음이 겉과 속이 모두 담담한 것이며, 제일 나쁜 것이 마음속으로는 싫어하면서도 겉으로는 기쁜 체하는 것이다.'
-'압해정씨 가승' '제22세 목사공 정재원'-
정조 재위시 벼슬길에 나간 정약용은 갑작스런 부친의 죽음으로 3년간의 여막살이를 하게 되는데, 그의 학문을 높게 평가한 정조는 여막살이를 하는 그에게 아버지 사도세자의 화성을 쌓는 규제, 즉 설계도를 맡깁니다. 그가 지은 '성설'은 원문 그대로 화성 축조에 이용되고 정조는 궁중의 비서인 '도서집성'과 '기기도설'을 그에게 내려 성 축조에 필요한 기기들의 제작까지 맡깁니다. 특히 기기도설은 서양 물리학과 도르래의 원리를 담고 있어서, 그를 이용해 우리가 아는 '거중기'나 '유형거'등의 다양한 기기가 만들어져서 화성 축조에 사용되게 됩니다.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 노론의 경계는 수없이 다산과 남인 학자들에게 칼끝을 겨누게 되고, 그를 아끼던 정조는 이런 광풍을 피하거나 혹은 그를 더욱 단련시켜 크게 쓰기 위해 수시로 여러 직책을 내리기도 합니다. 때로는 암행어사로 지방을 누비고, 때로는 난이 끊이지 않던 곡산부사로 내려가 지내면서 그는 백성들의 어려운 삶을 직접 보고 가슴으로 아픔을 느낍니다. 특히 강진 유배시절에 쓰인 '애절양'이라든가 암행어사를 다니면서 연천읍에서 지은 '적성촌에서'라는 시에는 군포 부담과 관련된 농촌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왕도 정치는 전지(田地)의 분배를 근간으로 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구차할 뿐이다.
분배가 균등치 못하고 권리의 강약이 같지 않은데 어찌 국가를 다스릴 수 있겠는가'
일종의 한전법으로 토지 소유 규모 제한을 두려했던 성호 이익의 '균전법'에 관한 글을 읽으며 어린 시절부터 이익의 사상을 존경하던 그는 토지문제에 있어서 급진적인 개혁을 주장하게 되는데 농사짓는 사람이 땅을 가져야 한다며 마을 단위 토지 제도인 여전제를 주장합니다. 그래서 그의 저서인 '경세유표'는 반계 유형원의 '반계수록'과 함께 조선 후기 실학 가운데 가장 철저한 국가체제 개혁론을 주장한 것으로 평가를 받습니다. 그의 주요 저서로는 1표2서라 하여 '목민심서, '흠흠신서', '경세유표'를 말합니다.
당대의 천재 학자였으나 역시 신유박해로 목숨을 잃은 이가환이나 우리가 널리 알고 있는 추사 김정희, 이외의 북학파 학자들과도 널리 교류하였고 특히 강진 유배시절 다산으로 거처를 옮긴 이후에는 초의나 혜장선사와 가까이 지내고 다산초당을 가꾸며 어느 정도 정신적으로 안정된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가 서학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도 나타나듯이 유학의 나라 조선에 얽매이지 않고 그것이 어디의 것이든 백성들의 삶에 이로운 것이면 취하고 정신을 혼란케 하는 것은 멀리하는 열린 학자의 자세는 이 시대 실학자들의 열린 자세가 정조와 새로운 시대를 함께 꿈꾸던 실학자들의 공통된 자세였던 것 같습니다.
이런 학자적 기질 때문이었을까요, 서학에 대한 그들의 열린 자세는 정조 사후 그의 가문 대부분이 천주교와 관련되어 멸문지화를 당하게 되는 원인이 되는데 그의 이복형 정약현은 사위 황사영과 처남 이벽으로 인해 고초를 겪었고, 그의 작은형 약종과 조카 철상은 독실한 천주교도로 그리고 매형 이승훈은 부친을 따라 간 베이징에서 조선인 최초로 서양인 신부에게 영세를 받았는데 이들 대부분이 신유박해 당시 순교하고 큰형 약전과 약용만 각각 흑산과 강진으로 유배를 떠나게 됩니다.
흑산도로 유배를 간 형 약전이 '흑산'이란 글자를 무섭다고 하자 그는 '흑'과 의미가 같은 '자(玆)'로 바꾸어 '자산'이라 불렀으며 이후 약전은 '자산'을 자신의 호로 삼았으며 '자산어보', '자산역간', '송정사의', '논어난'등을 저술합니다. 유배지에서의 외로움을 책과 주역에 몰두하며 지냈던 다산과 다르게 형 약전은 어민들과 가까이 지내면서 그들이 제대로 물고기의 이름조차 모르는 것을 알게 되면서 '자산어보'를 저술한 것으로 알려집니다. 유배지에서도 형 약전은 '복성전'이란 서당을 세워서, 아우 약용은 '다산초당'에서 그들의 학문을 베풀었습니다.
유배지에서의 외로움을 그는 주역과 기타 저술들을 하며 학문에 대한 매진으로 채우게 되는데, 특히 그가 암행어사와 곡산부사 등으로 혹은 유배지에서 마주했던 피폐한 백성들의 삶은 그로 하여금 ‘목민심서’란 저서를 낳게 합니다. 다방면에 해박한 지식을 가졌던 그는 천주교인이란 지적을 피하기 위해 더욱 주역에 매진하였고, 목민심서는 그의 경학이 완성된 이후의 저술로 중국과 우리 나라의 역대 사서를 비롯한 중요한 서적들을 두루 섭렵하여 포괄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붙여진 ‘심서’란 유배자의 현실로, 자신이 관직에 있으니 펼칠 수 없으나 백성에 대한 애틋한 마음으로 쓴 것으로 수령의 지침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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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 배경 : 어려운 농촌 현실에 대한 개혁과 애민사상
목민 : ‘백성을 기르다‘ 혹은 ’목민관(수령)‘ 자체, 백성을 다스리는 수령들의 지침서
가치 : 이전의 목민서 총합
암행어사, 지방수령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저술
경학 연구를 통한 이념적 지향 포함
제목의 의미 : ‘심서’-유배자의 현실
목민심서의 구성 : 12편
*지방관으로의 부임 과정
1편 - 부임
*지방관이 갖춰야 할 기본자세
2편 - 율기 : 자기 다스림을 통한 적극적 정치행위와 백성을 다스림
(절용-수령의 으뜸 되는 임무로 강조, 청렴하려는 자에게 필요한 기본자세)
3편 - 봉공 : 임금의 덕을 베풀기, 나라의 법 준수, 국가의 조세 수취
4편 - 애민 : 노인봉양, 어린이 양육, 곤궁한 사람 구제, 재난 구휼
*지방의 법전
5편 - 이전 : 사람이나 조직, 일반 관제 관규
6편 - 호전 : 토지를 제대로 파악하고 세금을 매기는 일
7편 - 예전 : 관아에서 주관하는 제사, 접대, 백성 교화 등
8편 - 병전 : 군적과 군포에 관한 것
9편 - 형전 : 송사의 심리와 형벌에 관한 신중 강조
(소송의 등급 부과: 민사-백성에 관한 일
공사-국가와 상급 관청에 관한 일
관사-지방수령 자신에 관한 일)
10편 - 공전 : 산림, 관아의 건물을 수선하고 성과 도로를 잘 관리하는 일
11편 - 진황 : 육전 체제에 들지 않지만 흉년에 빈민을 구제하는 방안
*관직을 떠나는 내용
12편 - 해관
*‘목민심서’에 나타난 일관된 위민사상
애민-백성을 위하고 보살피는 것
위민-통치의 대상이 아닌 백성을 위한 실천
균민-공평한 세금의 부과
*문집에 나타나는 개혁 사상의 3단계
제1단계-‘목민심서’, ‘흠흠신서’등 현실의 제도를 그대로 둔 채 운영만을 개선하는 단계
제2단계-‘경세유표’는 농민적 입장에서 국가 제도 전반의 개혁은 꾀하되 왕조 체제는 유지
제3단계-잡문에 실린 ‘탕론’과 같은 것으로 주권 재민과 인민 혁명권의 입장에 선 것
*조선 후기 실학 가운데 가장 철저한 국가체제 개혁론-‘반계수록‘과 ’경세유표‘
*조선의 목민서 : ‘임관정요(안정복)’, ‘목민대방(홍양호)’, ‘치군요결’
*의의 - 조선 후기 사회의 농촌 현실을 배경으로 하여 백성들에 대한 사랑을 기반으로 삼아
새로운 사회, 새로운 역사를 만들려는 의지가 담긴 책
1표2서 :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정약용의 주요 저서)
(흠흠-법을 존중하고 그 죄값에 대해 공정함을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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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출석 온라인강좌---
3. 정약용의 목민심서
(1)다산이 목민심서를 쓰게 된 배경은?
목민심서는 조선후기 지방의 사회실태와 민생문제를 중심으로 지방관리의 행정에 대한 지침을 담은 목민서이다. 정약용은 1801년 신유사옥 이후 18년간 귀양살이를 하였는데 그 마지막 무렵인 1818년에 이 책을 완성하였다. 여기에는 아버지 정재원의 목민관 치적을 통한 견문과 그 자신의 수령생활도 기반이 되었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당시 여러 가지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농촌현실에 대한 개혁의지와 농민들에 대한 애민사상이 깊이 담겨 있다.
(2)이 책에 담긴 정약용의 민에 대한 입장을 살펴본다면?
이 책을 담겨있는 정약용의 사상은 愛民, 爲民, 나아가 均民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위민이라는 용어도 일반적으로 유교정치이념에서 표방하는 바이지만 목민심서에 담겨있는 위민과는 차이가 있다. 정약용은 민을 통치의 대상으로서 민이 아니라 사회의 한 계층으로서 민을 인정하였다. 또한 그의 위민은 실천하는 위민이었다. 수령의 도리를 열거하면서도, 그 하나하나에 민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가 제안한 많은 제도도 이를 실천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그에게는 항상 官이나 公보다 민이 우선이었다.
(3)목민심서는 책 제목이면서 ‘목민서’류의 의미를 담고 있는데 목민서란 무엇인가?
현재 여러 종류의 목민서들이 남아있는데 대체로 수령의 부임절차와 마음가짐, 삼정을 비롯한 부세 수취방법과 재정 운영, 관속들에 대한 선발과 업무 분장 내용, 금령의 단속 및 치안에 관한 업무, 민간소송의 처리 및 재판, 형벌 관련 내용 등을 다마고 있는 민정지침서라고 할 수 있다. 조선후기의 새로운 경향으로 볼 수 있는데 안정복의 臨官政要, 홍대용의 牧民大方 등을 거쳐 목민심서에서 체제가 완성되고 그간의 목민서를 집대성하였다고 볼 수 있다.
(4) 다산의 사상에서 목민심서가 차지하는 의미는?
정약용의 저서 가운데 개혁적인 측면에서 가장 중심적인 저서는 경세유표로서 유형원의 반계수록과 더불어 조선후기 실학 가운데서도 가장 철저한 국가체제개혁론으로 일컬어진다. 여기서는 토지제도에 대해 정전론을 비롯하여 부세제도, 관제 등에 대한 개혁을 상세하게 제시하였다. 그런데 개혁의 필요성은 당시 농민들이 현실에서 겪는 폐단을 제거하기 위해 비롯되었다. 토지와 부세를 둘러싸고 농민들이 겪는 경제적인 문제를 비롯하여, 이들이 관리들이나 이서들에게서 받는 사회적 처우 등으로 미루어 당시 개혁은 시급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농민현실을 직접적으로 정리하고 방향을 제시한 것은 목민심서라고 하겠다. 이를 기초로 하여 국가체제 전반의 개혁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인터넷 보충학습---
1. ‘목민서’류의 책이 아닌 것은?
① 『삼봉집』 ② 『임관정요』 ③ 『치군요결』 ④『목민대방』
<주> 목민서는 수령들이 백성을 다스림에 있어서 취해야 할 절차 및 마음가짐을 다루는 책으로서 조선 후기에 새로이 일어난 경향이라고 할 수 있다.
2. 정약용의 『목민심서』가 다루는 내용은?
① 불교에 대한 성리학의 우위 증명
② 국자 체제 정비 방안 제시
③ 지방 관리의 행정에 대한 지침 제시
④ 유가 전통의 윤리 정치 사상과 서구의 과학 기술 융합
<주> 『목민심서』는 정약용이 조선후기 지방의 사회 실태와 민생 문제를 중심으로 지방 관리의 행정에 대한 지침을 담은 책이다.
3. 『목민심서』에 담겨있는 정약용의 민에 대한 입장이 아닌 것은?
① 애민(愛民) ② 위민(爲民) ③ 균민(均민) ④ 구민(救民)
<주> 목민심서는 백성에 대한 애민, 위민, 균민 사상으로 일관되어 있다.
4. 『목민심서』의 위민이 당시 유교 정치 이념과 다른 점은 어떤 것인가?
① 민은 관이나 공보다 우선될 수 없다.
② 백성은 통치의 대상이 아니라 사회의 한 계층이다.
③ 조선보다는 중국에서 운영되고 있는 백성들을 위한 제도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다.
④ 직접 실천하기 보다는 수령이 제도를 제대로 운영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주> 위민은 일반적으로 유교정치이념에서 표방하는 바이지만,『목민심서』의 위민은 민을 통치의 대상이 아니라 사회의 한 계층임을 인정하고, 실천하는 위민이라는 점에서 일반적인 위민과 다르다.
5. 정약용이 철저한 국가체제개혁론을 펼친 책으로 토지제도, 부세제도, 관제 등에 대한 개혁을 제시한 책은 무엇인가?
① 『삼봉집』 ② 『반계수록』 ③ 『경세유표』 ④ 『목민심서』
<주> 정약용은 『경세유표』에서 유형원의 『반계수록』과 더불어 조선후기 실학 가운데에서도 가장 철저한 국가체제개혁론을 펼쳤다.
6. 다음 중 저자와 그 저술이 올바르게 연결된 것은?
① 홍양호 - 『목민심감』 ② 최한기 - 『삼봉집』 ③ 정도전 - 『기측제의』 ④ 유형원 -『반계수록』
<주> 유형원의 『반계수록』은 조선후기 실학 가운데에서 국가체제개혁론으로 널리 알려진 책이다. 홍양호는 『목민대방』을 기술했으며, 최한기는 『기측제의』를, 정도전은 『삼봉집』을 기술했다.
7. 정약용의 『목민심서』가 집필된 배경은?
① 몽고의 침입에 대항하여 민족 정기를 살리기 위해
② 고려를 극복하고 조선이라는 새로운 국가 체제를 정비하기 위해
③ 어려움을 겪는 농촌 현실에 대한 개혁을 위해
④ 서구 과학 기술을 전통적인 사상과 융합하기 위해
<주> 『목민심서』는 경제적인 문제 뿐 아니라 사회적인 면에서도 어려움을 겪는 농촌 현실을 개혁하기 위한 책이다. ①은 『삼국유사』, ②는 『삼봉집』, ④는『기측제의』가 집필된 배경이다.
8. 『목민심서』 각 편의 제목과 내용이 일치하는 것은?
① 율기 - 지방관이 자신을 가다듬는 일에 관하여
② 봉공 - 수취 관계에 관하여
③ 호전 - 흉년에 빈민을 구제하는 방안에 관하여
④ 진황 - 나라와 사회를 위해 일하는 자세에 관하여
<주> 목민심서 12편 중 율기는 자신의 몸가짐을 가다듬는 일을, 봉공은 나라와 사회를 위해 일하는 자세를, 호전은 수취 관계를, 진황은 흉년에 빈민을 구제하는 방안을 다루고 있다.
-기출문제(방송대인의이야기)-
<목민심서>
1. 정약용의 저서 가운데 그의 개혁사상을 가장 잘 담은 책은?(04기말)
① 마과회통
② 경세유표
③ 아방강역고
④ 아언각비
2. 목민심서의 내용에 포함되지 않는 것은?(04기말)
① 수령의 부임절차와 마음가짐
② 민간소송의 처리와 재판
③ 관속들에 대한 선발과 업무의 분장
④ 암행어사 등 파견관리의 역할
3. 「목민심서」에 관한 다음 설명 중 틀린것은?(04동계)
① 이상사회를 세우기 위한 국가체제개혁론이 담겨 있다.
② 자신의 유배와 관리로서 생활 경험이 큰 토대가 되었다.
③ 조선후기 지방의 사회실태와 민생 문제를 중심으로 지방 관리의 행정에 대한 지침이다.
④ 당시 농촌현실과 맞물려 지방관을 비롯한 지식인들의 필독서가 되었다.
4. 「목민심서」의 편과 내용이 제대로 연결된 것은?(04동계)
① 「부임(赴任)」 - 중앙관리로서 임무를 맡는 과정을 기술하고 있다.
② 「봉공(奉公)」 -백성이 수령을 받드는 자세를 기술하고 있다.
③ 「공전(工典)」 - 산림에 대한 행정, 천택을 통해 수리를 다스리는 일에 관해 기술하고 있다.
④ 「호전(戶典)」 - 지방을 찾는 관리에 대한 대접, 백성들에 대한 교화에 관해 기술하고 있다.
해설)부임은 지방관으로서 부임하는 과정이다.봉공은 수령이라는 직책에서 나라와 사회를 위해
일하는 자세를 서술하고 있다.호전은 수취관계-토지파악,세금매기기,환곡의 운영 전반,모든
부세와 요역의 근원인 호적,각종 잡역과 잡세에 대해 공평히 하는 일,농사를 권장하는 일 등 6항목
5. 다음의 정약용의 저서 중 가장 개혁적인 것은?(04동계)
① 목민심서 ② 흠흠신서
③ 경세유표 ④ 마과회통
6.『목민심서』 「율기」편에서 지방관의 기본자세 중 ‘절용’을 가장 강조하는 이유는?(05기말)
① 청렴하려는 자는 반드시 절약해야 하기 때문에
② 향리들에게 은혜를 베풀려면 비용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③ 객인이나 외부로부터의 청탁을 물리치려면 여유가 있어야 하므로
④ 중앙관리와의 통교에도 이용할 수 있기 때문에
7.다음 중 『목민심서』의 각 편과 그 내용의 연결이 올바른 것은?(05기말)
① 「이전(吏典)」 - 토지를 제대로 파악하여 세금을 매기는 일
② 「예전(禮典)」 - 모든 부세와 요역의 근원인 호적을 잘 정리하는 일
③ 「형전(刑典)」 - 군졸을 조련하고 병기를 닦는 일
④「공전(工典)」 - 관아의 건물, 성, 도로를 잘 닦고 관리하는 일
8. 정약용의 생애와 관련이 적은것은?(05동계)
①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 마재에서 태어났다.
② 벼슬길에 올라 규장각에 근무하면서 많은 서적을 열람하였다.
③ 노론 집안이었으므로 정권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④ 암행어사가 되어 지방 수령들의 잘못을 조사하였다.
9. 정약용이『목민심서』를 쓸 수 있었던 직접적인 요인으로 보기 어려운것은?(05동계)
① 자신의 백성들에 대한 사랑
② 목민관인 아버지의 치적을 통한 견문
③ 자신의 수령 생활을 통한 경험
④ 재상 등 권력 핵심으로서의 경력
10. 유형원의『반계수록』과 더불어 조선후기 실학 가운데서 가장 철저한 국가 체제 개혁론이라 일컬어지는 정약용의 저서는?(05동계)
①『경세유표』 ②『다산필담』
③『운곡정요』 ④『흠흠신서』
11. 목민심서가 집필된 배경에 대해 제대로 설명한 것은?(06기말)
① 외세의 침입에 대항하여 저항력을 키우기 위해
② 조선건국의 시점에서 새로운 국가체제를 정비하기 위해
③ 어려운 농촌 현실에 대한 개혁을 위해
④ 과학기술을 우리 현실에 접목하기 위해
12. 목민심서에 대한 바른 설명은?(06기말)
① 천주교를 적극 옹호하고 있다.
② 농촌현실에 대한 개혁의지와 애민사상을 담고 있다.
③ 여전제 등 보수적 토지제도를 주장하였다.
④ 유교이념의 전면 폐지를 주장하였다.
13. 다음 중『목민심서』의 각 편명과 내용이 잘못연결된 것은 무엇인가?(06동계)
①「부임(赴任)」― 육전에 상응하는 지방의 법전
②「율기(律己)」― 목민관이 스스로 갖추어야 할 일
③「봉공(奉公)」― 수령이라는 직책에서 나라와 사회를 위해 일하는 자세
④「애민(愛民)」― 백성을 대하는 목민관의 자세
주)부임은 지방관으로서 부임하는 과정이다.
14. 다음은『목민심서』의 어느 부분에 나타나는 내용인가?(06동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