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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1월 29일(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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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5 쪽 |
【논제】
【제시문 가】에 나오는 경제체제의 각 요소와 대비하여,【제시문 나】의 [1]~[4]에 제시된 각 사회의 경제적 특성을 각 요소별로 비교․분석하시오. 이러한 분석에 근거하여 【제시문 나】에 나오는 경제적 특성의 일부 또는 선택적 조합을 통해 【제시문 가】에 나오는 경제체제를 대체하거나 구조적으로 보완할 가능성이 있는지의 여부와 그 이유를 논하시오. |
서 울 대 학 교
【제시문 가】
분업이 이루어지면 노동의 생산력이 크게 증진된다. 안정된 사회에서는 분업의 결과 기술이 진보하고 생산이 늘어서 최하층 계급에까지 부가 확산될 수 있다. 자신이 노동하여 얻은 생산물만으로는 인간의 수많은 욕망 중 극히 일부를 충족시킬 수 있을 뿐이다. 인간은 늘 남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이때 단순히 남의 박애심(博愛心)을 기대하기보다는 상대편의 자애심(自愛心)을 유발시키는 편이 한결 나을 것이다. 다른 사람과 거래를 하고 싶은 사람은 누구든 다음과 같이 제안한다. “내가 필요로 하는 그것을 준다면, 네가 원하는 이것을 주겠다.” 인간의 욕망은 대부분 자기의 노동생산물 가운데 소비하고 남은 잉여부분을 다른 사람의 잉여부분과 교환함으로써 충족된다. 분업의 발생은 교환 가능성을 전제로 한다. 분업의 정도는 시장의 규모에 따라서 달라진다. 시장의 규모가 아주 작은 경우에는 누구든지 한 가지 일만 하고 살 수는 없다. 왜냐하면 자신의 노동생산물 중에서 자신이 소비하고 남은 잉여부분을 다른 사람의 잉여부분과 교환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시장에 공급되는 상품의 수량이 유효수요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에는 그 상품의 가치를 지불할 의향이 있는 수요자들 모두에게 그 상품이 공급될 수 없다. 그렇다면 그들 중 일부는 다소 높은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 상품을 사려고 할 것이다. 따라서 시장가격은 일시적으로 상품의 자연적 가치 이상으로 오를 것이다. 한편 시장에 공급되는 상품의 수량이 유효수요를 초과하는 경우에는 상품 가치 전체를 지불할 의향이 있는 수요자들에게 파는 것만으로는 상품을 다 팔 수 없으며, 일정 부분은 상품 가치보다 덜 지불하려 하는 사람에게 팔 수밖에 없다. 따라서 시장가격은 일시적으로 자연적 가격보다 떨어질 수밖에 없다. 위의 두 경우와 달리 시장에 공급되는 상품의 수량이 유효수요와 일치하는 경우 시장가격은 자연적 가격과 동일하게 된다. 공급자들은 수중에 있는 상품 전부를 이 가격으로 처분할 수 있지만 더 비싼 값을 받을 길은 없다. 한편 공급자들 사이의 경쟁 때문에 이 가격을 받아들이지만, 그 이하의 가격으로 상품을 팔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시장은 공급되는 상품의 수량을 자연적으로 유효수요에 일치시킨다. 상품이 지닌 가치의 보편적 척도는 노동이다. 바꾸어 말하면 노동은 사람들이 언제 어디서나 여러 상품의 가치를 비교할 수 있는 표준이다. 장기적으로는 노동의 양에 의해서 가장 정확하게 상품의 실제 가치를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일상의 거래에서는 화폐로 그 가치가 평가된다. 특정한 시점과 장소에서는 화폐가 모든 상품의 진정한 교환가치의 척도이다. |
【제시문 나】
[1] 사상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인 소련이 성립되고 나서 곧바로 1920년대부터 1930년대에 걸쳐 ‘사회주의 경제계산 논쟁’(이하 <논쟁>)이 있었다. 이것은 사회주의 체제 하의 경제가 과연 경제학적 합리성을 갖는가라는 문제를 둘러싸고 자유주의 입장에 선 그룹과 사회주의 입장에 선 그룹 사이에 오고 갔던 일련의 논쟁이었다. 가장 핵심적 쟁점은 경쟁적 시장가격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각종 자원의 합리적인 배분이 가능한가라는 문제였다. 1920년 「사회주의 공동체의 경제계산」이라는 논문을 발표해서 <논쟁>의 도화선에 불을 댕긴 사람은 오스트리아의 경제학자 폰 미제스였다. 그는 생산수단이 공유화되면 생산재를 교환할 시장이 없어지므로 생산재 가격이 수급균형점에서 객관적으로 결정되기 어렵고, 따라서 자원 배분이 자의적으로 될 수밖에 없기에 사회주의 경제란 논리적으로 성립 불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사회주의 입장에 섰던 경제학자들은 중앙계획당국이 시장경제의 일반 균형론 체계를 원용하여 연립방정식을 풀어감으로써 생산수단을 공유하는 사회주의 경제에서도 다양한 재화와 서비스의 가격을 합리적으로 구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폰 미제스의 제자인 하이예크는 1935년에 펴낸 『집산주의 계획경제의 이론』이라는 책에서 그때까지의 <논쟁>을 정리하였다. 그는 두 주장을 비교하면서, 사회주의 경제의 이론적 성립 가능성이라는 논점에 관해서는 사회주의 입장에 선 그룹의 분석이 더 설득력이 있다고 인정하였다. 그러나 현실의 사회주의 경제에서는 막대한 양의 통계 자료와 연립방정식이 필요하며, 이것을 푸는 것이 실제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사회주의 경제가 실행 불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그후 오스카 랑에는 분권적 사회주의 모델을 이용해서 사회주의 경제의 현실적 실행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랑에는 중앙계획당국이 모든 가격을 결정하는 대신 시장의 가격 형성 메커니즘을 적절히 받아들임으로써 사회주의 경제에서도 시행착오를 통해서 균형가격체계를 달성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실제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성립한 동유럽 여러 나라 중에 헝가리는 자영농민을 비롯한 소생산자들이 시장에서 상품을 팔 수 있도록 허용했으며, 소련에서는 1960년대에 시장 거래를 본뜬 이윤 개념을 도입하였다. |
[2] 일반적으로 화폐는 교환을 매개하는 기능을 수행한다. 그런데 원시경제에 대한 인류학자들의 분석을 통해서 시장거래와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화폐가 이용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예를 들어 남태평양에 있는 미크로네시아의 작은 섬 야프(Yap)의 사람들은, 거의 2000년 동안 중요한 물건을 구입하거나 결혼 승낙을 얻기 위한 지참금으로 커다란 돌 바퀴를 화폐로 사용해 왔다. 야프는 미국의 영토이므로 식료품 가게나 주유소에서는 달러가 통용된다. 그러나 돌 화폐는 이 섬의 전통의상인 풀로 만든 치마처럼 현재까지 계속 사용되고 있다. 돌 화폐에는 하나하나 고유의 역사가 있으며 그것에 따라 각각의 가치가 다르다. 더구나 증여가 반복되는 가운데 새로운 역사가 덧붙여지기 때문에 돌 화폐의 가치가 고정되어 있지 않다. 돌 화폐의 가치가 표준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상품의 구매수단으로서는 애초부터 부적절하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돌 화폐는 작은 것일지라도 직경이 수십 센티미터에 달하며 큰 것은 2미터를 넘기 때문에 도저히 지갑에 넣어 가지고 다니면서 사용할 수 없다. 이곳의 관습에 의하면 깨진 돌은 가치가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돌을 옮기지 않고 일정한 장소(‘돌 화폐 은행’)에 남겨둔 채 소유권만 이전한다. 이 섬 안에는 6,600여 개의 돌 바퀴가 있다.
[3] 서양의 중세 봉건사회에서는 봉신(封臣)이 주군(主君)에게 군사적 의무와 충성을 약속하고 그에 대한 대가로 주군은 봉신에게 영지(領地)를 하사했다. 봉건사회에서 지방의 제후(諸侯)는 자신의 주군인 국왕이나 더 높은 귀족에게는 봉신의 의무를 다했지만, 자신이 거느린 봉신이나 농민들에 대해서는 주군의 권리를 행사하였다. 주군이라 할지라도 영주가 자신의 영지에서 갖는 재판권이나 징세권(徵稅權)에 대해서는 간섭할 수 없었다. 장원제도는 봉건제도의 경제적 측면을 말한다. 중세의 농업 경제는 장원을 기본 단위로 하여 이루어졌다. 장원의 중심부에는 영주의 저택과 교회, 그리고 농민의 집 등이 있었으며, 토지는 경작지․목초지․삼림․황무지 등으로 나뉘어 있었다. 장원은 그 안에서 모든 생활을 자급자족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장원의 경작지는 영주 직영지와 농민 보유지로 나뉘어 있었으며, 이들 토지는 서로 경계가 없이 섞여 있었다. 영주 직영지는 농민들이 경작했으며, 장원 전체 면적의 4분의 1 내지 3분의 1을 차지했다. 장원에 사는 농민들은 토지를 받는 대가로 영주에게 공물을 제공해야 했다. 그 대신 영주는 무력을 사용하여 농민들을 지켜주고, 흉년이 들었을 때에는 자기 재산을 이용하여 농민들을 보호해 주어야 했다. 장원의 토지를 경작하는 대부분의 농민은 농노였다. 그들은 고대의 노예와는 달리 토지와 가옥 등 약간의 재산을 소유할 수 있었고, 결혼을 하여 가정을 꾸밀 수도 있었다. 그러나 중세의 농노는 거주 이전이나 직업 선택의 자유가 없었고, 재판권․징세권 등을 가진 영주의 인신적(人身的) 지배를 받았다. |
[4] 1953년 일본의 야마기시 미요즈가 제창한 공동체 운동을 야마기시즘이라고 부른다. 야마기시즘이 꿈꾸는 공동체는 한마디로 ‘돈이 필요 없는 사이좋은 마을’이다. 1958년 일본에 야마기시즘 공동체가 처음 탄생한 이후 우리나라를 비롯해 스위스, 브라질, 독일, 오스트레일리아, 미국 등 세계 각국에 40여 개가 세워졌다. 이곳에서는 환경 친화적 농법으로 먹거리를 생산한다. 우리나라에는 1984년에 최초로 야마기시즘 공동체가 생겼다. 이 마을의 홈페이지에는 “모든 생활과 경영을 일체 생활, 일체 경영, 일체 사회로서 해 나가고 있습니다. 양계가 차지하는 비율이 높고 함께 모여 살고 있기 때문에 단순한 양계장이나 공동체로 보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형태만을 본 오해이고 실제 목적은 다른 데 있습니다. 그 목적은 급료나 분배가 없는 일체 생활 속에서 사이좋게 즐겁게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저희 자신만이 아니라 전 세계가 밝고 평화로운 사회로 바뀌기를 염원합니다”라고 적혀 있다. 이 마을은 무엇보다 무소유(無所有)를 삶의 근본 가치로 삼고 있다. 무소유는 공동소유와 다르다. 이들은 마을의 재산도 주민들의 공동소유물로 보지 않을 정도로 아무것도 가지지 않는 사회를 꿈꾼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태양과 공기의 혜택을 누리고 있는 것처럼 사람들의 삶도 그러해야 된다는 것이다. 세상의 어떤 것도 그냥 존재할 뿐 누구의 소유물도 아니며 누구나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이 마을 공동체의 무소유 개념이다. 그러므로 이 마을은 돈이 필요 없는 사회이며, 필요한 물건은 누구나 무료로 사용할 수 있다. 다른 야마기시즘 공동체가 물건을 필요로 할 때에도 물론 무료로 공급해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