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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8차 간산 및 2015년 시산제(2015년 3월 29일 서천지역)
이번 우리 연구소에서 실시하는 제 48차 정기 간산 및 2015년 시산제는 충청남도일대에 기를 불어넣는 금북정맥(錦北正脈)이 서쪽으로 진행하다가 정맥의 말단처(末端處)인 서천 땅으로 마지막 기운을 쏟아내는 한산면 일대에서 실시할 예정입니다.
서천군의 입지는 동쪽은 부여군, 북쪽은 보령시와 접하고, 남쪽은 금강을 경계로 전라북도 군산시와 마주하며, 서쪽은 서해바다로 열려 있으며, 금북정맥의 용진처(龍盡處)가 군 중앙부까지 뻗어 내려오고, 남쪽은 준 평원화된 평탄한 내포(內浦), 호남평야와 연결되며, 원진산(遠進山)에서 발원한 석마천(席馬川)이 봉선지(鳳仙池)에서 한산내[韓山川]와 합류하여 군의 중앙을 관통하면서 남류하여 길산천(吉山川)을 이루고, 금강과 몸을 섞습니다.
판천(板川)은 판교면(板橋面) 북동부에서 발원하여 흥림(興林)을 거쳐 남류하다가 남산(南山)들에서 서류하여 서해의 장구만(長久灣)으로 유입하는데, 이 하천유역은 전망이 넓은 대평야를 이루면서 주요 쌀 생산지가 되었습니다.
우리 연구소 시산제가 예정된 한산면은 군의 남동부에 위치하면서, 한산이씨[韓山李氏] 시조인 호장공(戶長公) 이윤경(李允卿)의 자손들이 800여 년 동안 정착하면서 쌓아놓은 고고한 삶의 흔적이 살아 숨 쉬는 한산이씨의 터전이기도 합니다.
풍수인들이 자주 접하는 간산과 관련하여 《설심부(雪心賦)》에 “부귀한 조상의 무덤을 본다는 것은 반드시 산천의 정기(正氣)를 얻는 것이고, 선적(仙跡)을 추심(追尋)하여 격(格)을 보는 것이, 오히려 책을 보는 것보다 낫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의룡경(疑龍經)》에 “그대에 권하건대 옛 무덤을 가서 살펴봐라. 천권(千卷)의 감룡문(撼龍文)을 읽는 것보다 더 좋다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격(格)을 많이 보면 마음이 쉽게 밝아지는데, 많이 본다는 것은 귀로 천 번 듣는 것보다 낫다” 하였습니다.
이번 간산에서 나지막한 산자락이 너울대는 평강룡(平岡龍)과 평양지(平洋地) 풍수의 진수(眞髓)를 느껴보시기 바라며, 특히 풍수에는 관심이 없지만 역사나 유적지에 호기심이 많으신 분들의 참여도 가능하며, 회원 여러분의 많은 동참을 부탁드립니다.
1. 간산 일시
- 2015년 3월 29일(일요일)
▶ 태릉역: 07:00, 지하철 6, 7호선 태릉역 1번 출구로 나오시면 관광버스가 대기하고 있습니다.
▶ 양재역: 08:00, 지하철 3호선 양재역에서 하차하여 1번 출구로 나와 50m 정도 걸어오시면 서초구청 맞은편에 관광버스 대기(수도권에서 참여하시는 분들의 편의를 제공하고자 최대한 시간을 늦췄습니다)
2. 집결지
▶ 서울 : 양재동 서초구청 맞은편(수협은행 앞)
- 지하철 3호선 양재역 1번 출구에서 걸어오시면 수협은행 앞 도로에 관광버스가 대기하고 있습니다. (08:00 까지)
※ 태릉역에서 출발하실 회원께서는 07:00까지 지하철 6, 7호선 태릉역 1번 출구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3. 회비: 50,000원(교통비, 중식, 입장료, 기타비용 등)
4. 답사 경유지 및 간산지 안내
서울 양재역 출발(08:00)→ 죽전 임시정류소(08:20) → 천안IC(09:00) → 유성IC(10:00) → 한산이씨 시조 호장공 음택(12:00) → 시산제 (건지산下 산신단) → 이상재 생가 → 목은 음택 (문헌서원) → 이곡 음택 → 서울 귀경
※ 다른 장소에서 합류를 희망하실 분은 김명식 고문(010-2212-3494), 정철화 부소장(010-3475-2357)에게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5. 답사지 안내(답사지는 현지사정에 따라 장소와 순서가 바뀔 수 있습니다)
1) 金鷄抱卵形의 터를 점한 韓山李氏 시조 戶長公 李允卿 음택
소재지: 서천군 한산면 지현리 산2-1
한산이씨 시조인 호장공의 음택은 고려 중엽에 조성되어 거의 1,000여 년이 다 된 묘소로 알려지고 있다.
한산이씨 대종회에 의하면 이 터는 원래 고려시대 한산군의 관아가 있었던 자리인데, 당시 한산군수를 지냈던 분이 풍수지리에 밝은 유명한 명사였다고 한다. 일이 없을 때면 호장공을 대동하여 관아 뒤로 올라가 나침반을 놓아보며, 천하에 둘도 없는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의 일등 명당이라 하면서, 감탄을 하였다고 한다.
하루는 군수가 계란 3개를 주면서 관아 대청마루 밑에 묻어놓으면 계란이 병아리로 부화 되어 나올거라 하였다. 그러자 호장공은 곯은 계란하고 바꿔치기를 하였는데, 이십 여일 후에 계란을 꺼내보니 모두 썩어 있었다. 군수는 자기 지식이 부족함을 탄식하였는데, 그 후 타 군으로 전근을 갔고, 호장공은 기회를 잡아 부친의 유골을 대청마루 밑에 땅을 파고 모셨다고 한다.
그 후 그 터는 계속 한산군의 관아로 사용되면서, 유구한 세월이 흘러오는 동안 한산이씨 문중 대대로 관아의 장내에 묘소가 있다는 것이 전해져 내려왔다. 그러다가 1876년(高宗 13)에 관아 내사가 퇴락하자 후손으로 현감(縣監)을 지내던 승우(承佑), 회재(晦在), 승대(承大)씨가 주선하여 한산군의 관아를 현 한산면사무소 터로 이전시키기로 하고, 4〜5일을 찾은 끝에 해좌(亥坐)라는 석곽(石槨)을 발견하여, 그곳에 봉분을 조성했다고 한다. 그 후 1883년에 후손인 충청도 관찰사 승오(承五)씨가 묘비문을 짓고 묘비를 세웠다.
설에 의하면 호장공의 후손들은 누대에 걸쳐 호장벼슬을 하면서 세상의 적덕지가로 칭했다고 한다. 군민들한테 세금을 징수하면서 벼 한 가마에 열 말을 되고, 떨어지는 곡식 이름을 색락이라 불렀는데, 그 색락을 곡주에게 돌려주었다고 한다. 그 색락을 군민들에게 돌려 준 것이 큰 적덕을 쌓은 것이라고 한다. 이곳에 묘소를 쓴 것도 적덕을 지은 것이 원인이 되어, 천신지지(天神地祗)의 도움을 받은 것이다.
그 후 군민들은 호장공 묘소 뒤쪽에 성황당(城隍堂)을 건립하여 목우상(木偶像)을 안치하고, 매년마다 적덕지가를 위한 축제를 올렸는데, 일제의 강압으로 성황당이 파괴되면서 목우상은 비인면 동백정(冬栢亭)으로 보내졌다고 한다.
묘소의 전후좌우를 포진하는 산천이 수려하여 천연적으로 생긴 난봉(卵峯)이 세 개가 있고, 남쪽의 먼 방에는 취봉(鷲峯, 수리봉)과 남산(南山) 12봉이 있으며, 북으로는 수 백리를 위이굴곡(逶迤屈曲)으로 뻗어 내려오는 건지산(乾止山)을 일으킨 주봉들이 호장공의 묘소와 한산읍을 호종(護從)한다.
여기까지가 대종회에서 세워놓은 표지판의 유래내용이다.
이곳 호장공의 후손으로는 고려 말 3은(三隱)의 한 사람인 목은(牧隱) 이색(李穡)을 비롯하여, 사육신의 한 사람인 이개(李塏), 대문장가이면서, 영의정을 지낸 이산해(李山海), 토정비결로 유명한 토정(土亭) 이지함(李之函) 등이 배출되었으며, 조선시대에만 상신(相臣: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정1품 정승) 4명, 대제학(大提學: 홍문관, 예문관의 정2품 文衡) 2명, 청백리(淸白吏) 5명, 공신 12명과 문과급제자 195명을 배출한 것으로 전한다.
금계포란형으로 알려지고 있는 호장공의 묘소는 금성체(金星體)를 이루는 건지봉(乾止峰)에서 진방(震方)으로 낙맥(落脈)하여 지현굴곡(之玄屈曲)으로 행도하다가 묘소가 있는 용진처(龍盡處) 어름에서 양변(兩邊)으로 순각(順脚)의 제어각(制御脚)을 일구고, 음척(陰脊)에서 평기(平氣)로 변화하는 상교처(相交處)에 터가 소점(所占)되었다.
중출(中出)로 진행하는 용맥(龍脈)이 양명(陽明)하고, 탱탱하며, 전방으로 나열하는 크고 작은 산봉들이 팔을 벌려 묘혈(墓穴)을 응기(應氣)한다. 갈형론(喝形論)에서 말하는 금계포란이란 마치 암닭이 알을 품고 있는 모습으로 주산(主山), 또는 주성(主星)의 모습은 금수(金水)의 기운을 합쳐놓은 형상을 이룬다. 혈처는 대부분 둥근 모양의 유혈(乳穴)을 이루지만, 때로는 와중(窩中)에 미돌(微突)을 띠기도 한다. 주변의 사격(砂格)으로는 웅계(雄鷄, 수닭), 란(卵, 계란), 취봉(鷲峰, 수리봉) 등의 사(砂)들이 구비되거나, 조응(照應)해야 기운이 배가된다.
발복(發福)이 되면 오랫동안 자손이 번성하며, 귀부(貴富)를 겸전(兼全)한다.
이곳 묘소의 좌향은 봉침(縫針), 건좌손향(乾坐巽向)에, 우선수(右旋水) 을진파(乙辰破)가 되어, 88향법의 자생향(自生向)을 놓았다.
※ 금북정맥이 일군 건지산(乾止山)의 용진처(龍盡處)인 이곳 묘역의 산신제단 위쪽에서 2015년도 연구소 시산제를 거행할 예정입니다.
2) 월남 이상재 생가
소재지: 서천면 한산면 종지리 190-1
충청남도 기념물 제84호인 생가는 안채와 사랑채로 이루어져 있으며, 모두 목조 초가집이다. 규모는 정면 4칸, 측면 2칸이며 앞에 솟을대문이 있다. 안채는 1800년경에 건립되었고, 사랑채는 1926년에 세워진 것으로 전한다. 광복 전에 안채가 허물어졌으나 1981년에 안채와 담장을 복원하였다.
선생의 본관은 한산이며, 목은 이색의 16대 손이다. 아버지 이희택과 어머니 밀양박씨(密陽朴氏)사이에서 1850년 10월 26일에 태어나 어려서부터 한학교육을 받고 자랐으며, 1864년(고종 1) 강릉유씨(江陵劉氏)와 결혼하였다.
1867년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부패한 관리들의 매관매직 때문에 낙방하자, 이를 개탄하고 낙향하여 세상을 등지고 살고자 하였으나, 친족 장직(長稙)의 권유로 당시 승지였던 박정양(朴定陽)의 집에서 1880년까지 개인 비서일을 보았다.
1881년 박정양의 추천으로 박정양, 어윤중(魚允中), 홍영식(洪英植), 조준영(趙濬永), 김옥균(金玉均) 등 10여 명으로 구성된 신사유람단의 수행원으로 유길준(兪吉濬), 윤치호(尹致昊), 안종수(安宗洙), 고영희(高永喜) 등 26명과 함께 일본에 갔다.
이때 일본의 신흥문물과 사회의 발전상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으며, 홍영식과 두터운 교분을 쌓고 귀국한 뒤 개화운동에 참가할 수 있는 소지가 마련되었다. 그래서 1884년 신관제에 의해 개설된 우정총국(郵政總局)의 총판(總辦) 홍영식의 추천으로 주사로 임명되었으나, 그 해 12월 갑신정변의 실패로 낙향하였다.
1887년 박정양에 의해 친군영(親軍營)의 문안(文案)으로 임명되었으며, 그 해 6월 박정양이 초대주미공사로 갈 때 2등서기관으로 채용되었다. 이 때 청나라가 우리나라와 미국이 직접 외교관계를 맺지 못하도록 국서(國書)의 수교를 방해하였으나, 이상재는 청국공사와 단판을 벌여 박정양으로 하여금 단독으로 국서를 전달하게 하였다.
귀국한 뒤 낙향하였으나, 1892년에 전환국위원, 1894년에 승정원우부승지 겸 경연각 참찬, 학부아문참의 겸 학무국장이 되었다. 이 때 신교육제도를 창안하여 사범학교, 중학교, 소학교, 외국어학교를 설립하여 한때는 외국어학교교장을 겸하기도 하였다.
1896년 내각총서(內閣總書)와 중추원1등 의관이 되고, 다시 관제 개편에 따라 내각총무국장에 올라 탐관오리의 구축 등 국운을 바로잡는데 힘썼다. 이 해 7월 서재필(徐載弼), 윤치호 등과 독립협회를 조직하였으며, 독립협회가 주최한 만민공동회 의장 또는 사회를 맡아보았다.
만민공동회가 종로에서 개최되었을 때, 척외(斥外), 황권(皇權) 확립 등의 6개 조항을 의결하고 두 차례 상소문을 올렸다. 이 때문에 16명과 함께 경무청에 구금되었으나 참정 심상훈(沈相薰)의 간곡한 상소로 10일 만에 석방되었다.
그러나 1898년 12월 25일 독립협회가 정부의 탄압과 황국협회의 방해로 해산되자, 모든 벼슬을 버리고 초야에 묻혀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며, 탐관오리의 부패상과 비정을 탄핵하였다.
때문에 정부대신들의 미움을 받아, 1902년 6월 국체개혁(國體改革)을 음모하였다는 이른바 개혁당사건에 연루되어 둘째 아들 승인(承仁)과 함께 다시 구금되었다가 1904년 2월 석방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된 뒤 고종의 애절한 하명을 거절할 수 없어 잠시 의정부참찬에 머물렀고, 1907년 법부대신의 교섭을 받았으나 사양하였으며, 군대해산이 있은 뒤 관계를 떠났다.
1922년 조선교육협회를 창설하여 회장으로 취임하였고, 조선민립대학기성회를 조직하여 회장이 되었다. 1924년 조선일보사 사장, 1925년 제1회 전국기자대회 의장으로 한국 언론의 진작 및 단합에 크게 기여하였다. 한편, 공산주의사상에 물들어가는 지식인과 언론인들을 민족주의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하였다. 1927년 2월 15일 민족주의진영과 사회주의진영에서 이른바 민족의 단일전선을 결성하고, 공동의 적인 일본과 투쟁할 것을 목표로 신간회(新幹會)를 조직할 때, 창립회장으로 추대되었으나 두 달을 채우지 못하고 사망하였다. YMCA를 비롯한 243개의 시회단체가 주도한 최초의 사회장으로 치러진 그의 장례식에는 무려 10만 명의 인파가 몰려들었다.
유해는 한산의 선영에 안치되었으나, 1957년에 양주군 장흥면 삼하리(현재, 양주시 은현면 선암리 산45-1)로 이장되었다.
평양지에 터를 정한 이곳 생가는 중부지방의 전통적 농가 분위기를 연출하면서, 예전의 우리네 삶과 향수를 느끼게 한다. 안채와 사랑채를 둔 초가집으로 앞면 4칸, 옆면 2칸 규모이며, 대문은 솟을대문을 두었다. 안채는 1800년경에, 사랑채는 1926년경에 지어진 것으로 전하나, 원래 건물은 1955년에 없어지고 지금 있는 건물은 1972년과 1980년 두 차례에 걸쳐 복원되었다.
특징은 안채와 사랑채를 구분 짓는 내외 담이 생략되면서, 남향판의 문로(門路)를 통해 마당으로 들어서면 안채가 훤히 개방되어, 양반이면서도 서민적인 냄새가 물씬 베어나는 민초의 생가지다.
밖에서 전방(前方)을 조망하면 아스라이 펼쳐지는 올망졸망한 산자락들이 이곳 터를 응기하고, 이상재 선생의 시조인 호장공의 유택을 품안으로 보듬는 중후한 건지산의 옆모습이 곤방(坤方)에서 정다운 모습으로 손짓한다.
3) 목은(牧隱) 이색(李穡) 음택
소재지(문헌서원): 서천군 기산면 영모리 10(麒麟山 下)
☞ 목은(牧隱)의 가계
▶ 시조- 이윤경(李允卿, 戶長公)
▶ 2 세- 이인간(李仁幹): 호장공 子- ①충진(忠進) ②효진(孝進)
▶ 3 세- ② 이효진(李孝進): 비서랑
▶ 4 세- 이창세(李昌世): 판도판서
▶ 5 세- 이자성(李自成): 찬성사 子- ①배(培) ②축(蓄) ③곡(穀)
▶ 6 세- ③ 이 곡(李 穀): 도첨의찬성사, 문효공 <배위: 咸昌金氏>
▶ 7 세- 이 색(李 穡): (중시조), 문하시중, 문정공, <배위: 安東權氏>子- ①종덕(種德) ②종학(種學) ③종선(種善),
▶ 8 세- ① 이종덕(李種德): 동직밀직사, 子- ①맹유(孟㽥) ②맹균(孟畇) ③맹준(孟畯) ④맹진(孟畛)
▶ 9 세- ② 이맹균(李孟畇): 대제학, 좌찬성, 문혜공
▶ 9 세- ④ 이맹진(李孟畛): 판중추원사
▶ 10 세- ① 이맹유(李孟㽥) 子- 이연기(李衍基): 판제용감사
▶ 11 세- ④)이 순(李 淳): 청도군수
▶ 12 세- ①)이수창(李壽昌): 진사
▶ 13 세- ①)이정란(李庭蘭): 군자감정
▶ 14 세- ①)이 곤(李 菎): 참봉
▶ 15 세- ①)이영원(李榮元): 참봉
▶ 16 세- 이응경(李應璟): 통덕랑
▶ 17 세- 이필형(李苾亨): 별검
▶ 18 세- ③)이익태(李益泰): 한성부좌윤
▶ 19 세- ③)이덕한(李德漢): 사마
▶ 20 세- ③)이동환(李東桓):
▶ 21 세- ②)이경만(李慶萬):
▶ 22 세- ②)이희택(李羲宅): 감역
▶ 23 세- ①)이상재(李商在): 호-월남, 내각 총무국장, 민권운동가
《기 타》
◈ 8 세- ③)이종선(李種善): 지중추원사, 양경공, 子- ①계주(季疇) ②계린(季疄) ③계전(季甸) ④계원(季畹) ⑤계정(季町)
◈ 9 세- ①)이계주(李季疇): 정랑
◈ 10 세- 이 개(李 塏): 직제학, 충간공, 사육신
◈ 9 세- ③)이계전(李季甸): 대제학, 영중추원사, 문열공, 子- ①육(堉) ②우(堣) ③파(坡) ④봉(封), 묘- 경기도 여주군 점동면 사곡리 371(당초 영릉 터에 있었으나, 세종대왕릉이 遷葬하면서 移葬 됨)
◈ 10 세- ②)이 우(李 堣): 대사성, 子- ①장윤(長潤) ②세윤(世潤)
◈ 11 세- ①)이장윤(李長潤): 봉화현감, 한원군, 子- ①질(秩) ②치(穉) ③온(穩) ④정(程)
◈ 12 세- ①)이 질(李 秩): 오위도총관, 한성군, 子- ①지훈(之薰) ②지란(之蘭) ③지숙(之菽)
◈ 13세- ③)이지숙(李之菽): 종묘서령, 한평군, 子- ①원(垣) ②증(增) ③보(堡) ④경(坰)
◈ 14 세- ②)이 증(李 增): 예조판서, 좌참찬, 아천군, 의간공, 子- ①경홍(慶洪) ②경함(慶涵) ③경심(慶深) ④경류(慶流) ⑦경황(慶滉) ⑧경하(慶河)
◈ 15 세- ④)이경류(李慶流): 병조좌랑
◈ 16 세- 이 제(李 穧): 대구부사, 子- ①정기(廷夔) ②정룡(廷龍)
◈ 17 세- ②)이정룡(李廷龍): 김제군수
◈ 12 세- ②)이 치(李 穉): 우봉현령, 子- ①지영(之英) ②지번(之蕃) ③지무(之茂) ④지함(之菡)
◈ 13 세- ②)이지번(李之蕃) : 군수, 한천부원군, 子- ①산해(山海) ②산광(山光)
◈ 13 세- ④)이지함(李之函): 포천현감, 아산현감, 토정비결 저자
◈ 14 세- ①)이산해(李山海): 영의정, 아성부원군, 子- ①경백(慶伯) ②경전(慶全) ③경신(慶伸)
◈ 15 세- ②)이경전(李慶全): 형조판서
☞ 문헌서원 경내의 목은 및 배위, 조부, 손자 묘소
▶ 문헌서원: 서천군 기산면 영모리 10 (麒麟山 下)
◆ 목은 묘소
縫針 子坐午向, 左旋水 丁未破 (自旺向)
※下壇 목은 3 子(李種善) 묘소
◆ 목은 조부 묘소
縫針 巽坐乾向, 右旋水, 坤申破 (沐浴消水)
※下壇 목은 配位(安東權氏) 묘소
◆ 목은 장손(李孟㽥) 묘소
縫針 甲坐庚向(서원 위쪽에 소재하여 山水同去의 형세를 이룬다)
이색(1328〜1396)의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영숙(潁叔), 호는 목은(牧隱)이며, 아버지는 찬성사 곡(穀)다. 그는 외가인 영덕군 영해(현 영양 남씨 집성촌 괴시리 마을)에서 이곡(李穀)의 외아들로 태어나, 두살 때 선조들의 고향인 한산으로 돌아온다.
15세에 부음(父陰)으로 별장(別將)의 직을 얻어, 1341년(충혜왕 복위 2) 진사가 되었다. 1348년(충목왕 4) 아버지가 원에서 중서사전부(中瑞司典簿)가 되자 조관(朝官)의 아들로 원나라 국자감의 생원이 되었다. 이색은 이제현(李齊賢)을 좌주(座主)로 하여 주자성리학을 익혔고, 이 시기 원나라의 국립학교인 국자감에서 수학하여 주자성리학의 요체를 파악하는 계기가 되었다. 1352년(공민왕 1) 아버지가 죽자 귀국하여 토지문제, 왜구대책, 학교교육론, 이단배척 등의 상소를 올렸다.
1353년 고려의 과거에 합격하였으며, 이듬해 정동행성(征東行省) 향시(鄕試)에 1등으로 합격하고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원나라에 들어가 회시(會試), 전시(殿試)에 합격하여 응봉한림문자 승사랑 동지제고(應奉翰林文字承事郞同知制誥) 겸 국사원편수관(國史院編修官)을 지냈다. 이어 고려에 돌아와 전리정랑(典理正郞), 내서사인(內書舍人)을 지냈다. 1355년 공민왕의 개혁정치가 본격화되자 왕의 측근세력으로 활약하면서 〈시정8사 時政八事〉를 올렸는데 그중 하나가 정방(政房)의 혁파였다. 이 일로 이부시랑 겸 병부시랑에 임명되어 문무(文武)의 인재를 채용하는 전선(銓選)을 장악하기도 하였다.
이색은 조선왕조가 개창되면서 고려 말에 결당모란(結黨謀亂)한 자로 지목되면서 우현보 등 56명과 더불어 논죄되어, 직첩을 빼앗기고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어 해도(海島)로 유배되었다. 장흥에서 석방된 그는 3년간 한산에서 지내고, 1394년(태조 3) 오대산에 들어갔다가 이듬해 서울로 돌아왔다. 1396년 여주 신륵사(神勒寺)로 가는 도중에 간신들에 의해 임금이 하사한 어주(御酒)를 마시고 죽었다는 설과, 배에서 폭사(暴死)했다는 설이 전한다.
이색이 19세의 나이에 장가를 들었는데, 당시 최고 명문 집안에서 서로 사위로 삼고자하여 혼례 당일까지도 다투었을 지경이었다고 한다. 결국 당대 제일 명문 집안 중의 하나인 안동권씨 복야공파인 우정승 일제 권한공(右政承 一齋 權漢功)의 손녀에게 장가를 들었는데, 그 장인 화원군(花原君) 권중달(權仲達)은 영의정 권중화(權仲和)의 형이다.
목은(牧隱) 이색은, 포은(圃隱) 정몽주, 야은(冶隱) 길재와 더불어 여말삼은(麗末三隱)으로 부르며, 이곳 문헌서원에 그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이곳 묘소의 표지판에는 당시에 친분관계가 있었던 무학대사가 소점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기린이 아래로 내려와 풀을 뜯어먹는 기린하전(麒麟下田)’ 이란 형국 명과 함께, 설명을 달아 놓았다.
그러나 기린(麒麟)이란 상상의 동물로, 성인(聖人)이 나와 왕도(王道)가 행해지면 출현한다는 귀한 영물(靈物)의 대상이지, 일반적으로 분류되는 목이 긴 기린이란 동물이 밭으로 내려와 풀을 뜯어먹는다는 해석은 어불성설이라 할 수 있다.
《인자수지(人子須知)》에서 지적하기를 “제가(諸家)의 혈법(穴法)은 비록 여러 설이 전해지고 있으나, 횡설수설하여 표준으로 삼기에는 문제가 많다" 하면서, 여러 혈법 중에서
첫째는 혈형(穴形)을 판단해야 하는데, 내맥(來脈)이 볼록한 음맥(陰脈)으로 들어오면 오목하거나, 평평한 양처(陽處)에서 구하고[陰來陽受], 밋밋하고 오목한 양맥(陽脈)으로 진행하면 음(陰)으로 받는[陽來陰受] 음양(陰陽)의 이치를 꼼꼼하게 헤아린 연후에, 양균송(楊筠松)이 말한 와겸유돌(窩鉗乳突)의 사상(四象)으로 형(形)을 삼아야 한다 하였다. 그런데, 이곳 묘소는 직룡(直龍)으로, 내리꽂듯이 급하게 굴러 떨어지는 음맥(陰脈)의 척상에 묘소가 조성되면서 맥척(脈脊)에서 양기(陽氣)로 전환되는 상교(相交)의 변화나, 개수(開手)나 개각(開脚)을 이루어 내맥을 멈추도록 하는 제어각(制御脚)이 전무하다.
그리고 《담자록(啖蔗錄)》에 ‘세(勢)가 급(急)하고, 맥(脈)이 크면, 부드럽고 완만한 곳에 혈(穴)이 있으며, 세(勢)가 완만(緩慢)하고, 맥이 움츠리면 혈은 급한 곳에 있다’ 하였는데, 이곳 당판은 그러한 조건을 일탈하여, 아래로 굴러가는 형세를 이룬다.
둘째는 혈성(穴星)인데, 혈(穴)을 일으킨 주성(主星)이나 만두(巒頭)의 목화토금수(木火土金水)의 오성체(五星體)가 진기(眞氣)로 응결되었는지 유무(有無)를 살피는 것으로, 구성(九星)에서 말하는 성(星)이 아니다. 이곳의 혈성은 기린봉에서 낙맥하는 척상(脊上)에서 측뇌(側腦)를 이루면서, 물이 아래로 흐르는 듯한 변체(變體)의 수성(水星)이 되어, 목유(木乳)의 혈상(穴象)을 이루어야 하는데, 유(乳)를 이루는 당판이 격에 미치지 못하다.
셋째는 혈증(穴證)이니, 전후좌우의 호종사(護從砂)와 명당(明堂)이 터로 응향(應向)하는 증좌(證佐)가 명백하고, 혈적(穴的)해야 한다. 이른바 증좌란 전방(前方)의 조안(朝案)이 아름다워야 하고, 명당(明堂)이 평탄원만(平坦圓滿)하여 명당 안으로 모여드는 물이 수취천심(水聚天心)해야 하는데, 이곳 묘소의 여건은 위에서 쏟아 내지르는 형세가 되어 수취(水聚)와는 거리가 멀다.
또한 측뇌(側腦)를 이루는 혈성의 격은 낙산(樂山)이 솟아야 하고, 좌우(左右)를 기준하여 혈을 구한다면 용호(龍虎)가 유정(有情)하고, 전호(纏護)가 완벽해야 한다. 또 혈 아래는 순전(脣氈)이 완만하여 바르게 뻗어야 하며, 또 사방(四方)에서 구한다면 사방십도(四方十道)가 온전해야 하고, 계수(界水)에서 구한다면 분합(分合)이 명백해야 한다.
넷째는 혈기(穴忌)로, 산이 거칠거나, 악(惡)하며, 준급(峻急)하고, 옹종(擁腫), 허모(虛耗), 단한(單寒)하거나, 참암(巉巖), 두사(陡瀉), 요결(凹缺), 유냉(幽冷), 완경(頑硬) 등은 풍수에서는 대표적인 흉상으로, 혈지소기(穴之所忌)라 하는데, 이곳 묘소의 내맥을 보면 준급하면서, 완경한 모습으로 진행하는 것을 지적할 수가 있다.
담자록에 혈후(穴後)가 뒤로 물러가듯 퇴락(退落)해야 기가 화(氣和)하는데, 만약 혈후(穴後)가 연이어져 곧게 떨어지면(連直) 살기가 무성한 살치(殺熾)와 같다 하였다.
또한 《발사경(撥砂經)》에 혈 뒤의 당배(當背)와 일절룡(一節龍)은 관계가 극대(極大)하므로 반드시 퇴락을 요하고, 점차 평복(平伏)해야 결혈(結穴)이 귀(貴)하다 하였고, 만약 끌고 이어짐(牽連)이 직(直)으로 이어지거나, 아름답게 구르는 완전(婉轉)의 형상과 굴곡(屈曲)의 정(情)이 없다면 그 용의 기운은 강건(剛)하여 쓸모가 없다 하였다.
즉, 혈을 찾을 때는 그 형(形)을 연구하고, 오성(五星)을 살피며, 혈의 증적(證迹)과 용의 행지(行止), 제어(制御)를 헤아릴 줄 알고, 그 꺼리는 것을 피할 줄만 안다면 혈의 융결(融結)여부와 진가(眞假)는 자연히 목력(目力)으로 체득할 수 있다.
이곳 묘소는 이기(理氣)상, 봉침(縫針), 자좌오향(子坐午向)에 좌선수(左旋水), 정미파(丁未破)로 격침(格針)되면서, 88향법의 자왕향(自旺向)을 놓았다.
4) 가정(稼亭) 이곡(李穀) 음택
소재지: 서천군 기산면 광암리 8 (빛 고개, 한산장례식장 입구)
이곡(1298~1351)의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중보(仲父), 호는 가정(稼亭). 아버지는 찬성사(贊成事) 이자성(李自成)이고, 어머니는 흥례이씨로 이춘년(李椿年)의 딸이다. 부인은 함창김씨로 향교대현(鄕校大賢) 김택(金澤)의 딸이다.
시조 이윤경(李允卿)의 6대손이며, 증조할아버지는 비서랑(秘書郞) 이효진(李孝進)이고, 할아버지는 판도판서(版圖判書) 이창세(李昌世)이며, 아들이 목은(牧隱) 이색(李穡)이다.
1317년(충숙왕 4) 거자과(擧子科)에 급제한 뒤 예문관검열이 되었다. 원나라로 가서 1332년(충숙왕 복위 1) 정동성(征東省) 향시에 수석, 전시(殿試)에 차석으로 급제하였다. 이때 지은 대책(對策)은 독권관(讀卷官)이 감탄한 명문장이었다. 재상들의 건의로 한림국사원검열관(翰林國史院檢閱官)이 되어 원나라 문사들과 교유하였다.
1334년 본국으로부터 학교를 진흥시키라는 조서를 받고 귀국하여 전의부령(典儀副令)에 이어 직보문각(直寶文閣)에 제수되었다. 이듬해에 다시 원나라로 가서 휘정원관구(徽政院管勾), 정동행중서성좌우사원외랑(征東行中書省左右司員外郎)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1345년(충목왕 5) 밀직부사, 이듬해 지밀직사사를 거쳐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되고, 1348년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가 되었다.
이제현 등과 함께 민지(閔漬)가 편찬한 『편년강목(編年綱目)』을 중수하고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의 실록을 편수하였다. 한때는 시관이 되었으나 사사로운 정리로 선발하였다는 탄핵을 받아 다시 원나라에 가서 중서성감창(中書省監倉)으로 있다가 귀국하였다. 공민왕의 옹립을 주장하였으나 충정왕이 즉위하자 신변에 불안을 느껴 관동 지방을 주유하기도 하였으며, 1351년 향년 5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며 백이정. 우탁. 정몽주와 함께 경학(四書五經을 연구하는 학문)의 대가로 꼽힌다.
한산의 문헌서원(文獻書院), 영해의 단산서원(丹山書院)에 배향되었으며, 문집으로는 『가정집』 4책 20권이 전한다. 관동 지방을 주유하면서 많은 시와 기(記)를 남겼으며, 조선시대에 편찬한 『동문선』에는 100여 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고, 『가정집』과 『동문선』에 가전체 문학 작품인「죽부인전(竹夫人傳)」이 실려 있다.
이곳 묘소는 그의 아들인 목은의 유택이 있는 문헌서원의 기린봉에서 신방(申方), 낙맥(落脈)한 용맥이 오방(午方)으로 전변(轉變)하여 진행하다가 수차례 기복굴곡(起伏屈曲)과 박환(剝換)을 거듭하며, 수 십 리를 남쪽과 동쪽, 서쪽을 향해 갈지자로 행도(行度)하다가 나지막한 평강룡(平岡龍)의 끝자락인 횡결맥(橫結脈)으로 터를 일구었지만, 천혈(扦穴)에는 실기(失機)하였다.
즉, 횡결맥의 조건인 낙산(樂山)과 귀성(鬼星)은 모두 갖추었지만 묘소 위쪽의 정혈처를 지나쳐 아래쪽으로 용사되었다.
이기적(理氣的)으로는 봉침(縫針), 임좌병향(壬坐丙向)에, 우선수(右旋水), 을진파(乙辰破)의 당국을 이룬다.
이곳 묘소 진입로 입구에는 배위(配位), 함창김씨(咸昌金氏) 음택이 자리를 잡고 있다.
《담자록(啖蔗錄)》에 지혜가 높은 상지(上智)라면 척상(脊上)에서 용(龍)을 찾고, 먼저 출맥(出脈)이 어떠한지를 보아야 한다. 그러나 장인이 거친 조공(粗工)이라면 다리사이인 각간(脚間)에서 혈(穴)을 잡고는 단지 낙수(落首)가 어떠한지를 본다 하였다.
『上智尋龍于脊上。先觀出脈何如。粗工緝穴于脚間。只看落首奚似』
《심룡기(尋龍記)》에 “요컨대 심룡(尋龍)의 지극한 묘법(妙法)을 알고자 한다면 가장 높은 봉우리의 정상을 밟아야 한다. 용척(龍脊)을 좇아 머문 곳을 구하면 대물(大物)을 엿볼 수 있지만, 산각(山脚)을 좇아 종적을 살핀다면 소강(小康, 조금 나은 혈)을 얻을 뿐이다.
혈을 찾는 심혈(尋穴)은 반드시 양식과 신발을 챙겨 조종(祖宗)을 찾아 마디마디마다 용을 걸어보고, 그 어느 것이 장막인지 보아야 하고, 어느 것이 전산(纏山)이고, 어느 곳에서 분수(分水)되며, 어느 곳에서 합(合)하고, 어느 곳이 혈장(穴場)이며, 어느 곳이 여기(餘氣)인지를 보아야 진룡(眞龍)과 정혈(正穴)을 얻는다. 만약 산각(山脚)에서만 혈을 찾는다면, 얻은 것 또한 소강(小康)의 혈(穴)일 뿐이고, 대물(大物)은 아니다 ” 고 적시하였다.
『尋龍記。要識尋龍至妙法。最高峯頂踏。循龍脊以求止。則大物可窺。循山脚以察踪。而小康亦得。凡尋穴。必裏糧攝履。問祖尋宗。節節步龍。看其何者是帳。何者是纏山。何處分水。何處合。何者是穴場。何者是餘氣。則真 龍正穴可得。若但于山脚上尋之。則所得者亦小康之穴而已。非大物也』
6. 지참물
산행을 할 수 있는 간단한 복장과 나경패철, 필기도구, 간식 등
(우천 시도 예정대로 간산을 진행할 예정이오니, 비가 오면 우산이나 우의 등을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7. 신청방법
참가를 희망하시는 분은 반드시 이름과 연락처를 아래 신청 등록란에 꼬리말로 달아주시기 바랍니다.
(이번 간산은 연구소 시산제 행사와 정기답사를 겸하기 때문에 조기 마감될 수 있으니 반드시 리필을 요합니다)
8. 연락처
서울, 경기, 전국 : 정철화(010-3475-2357), 김명식(010-2212-3494)
충남 : 정수일(011-9823-2588)
대전 : 정부연(011-9800-0307)
충북 : 김홍길(010-8001-0020, 한국자연풍수지리연구소 충북 지부장)
경북, 경남 : 박정수(011-530-2847, 한국자연풍수지리연구소 상주 지부장)
전북 : 장원기(010-5638-6905, 한국자연풍수지리연구소 전북 지부장)
전남 : 손인호(010-6471-1040, 한국자연풍수지리연구소 전남 지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