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 보훈의 달 6월이다....
그래서 한국 전쟁사를 좀 써보려합니다만,
워낙 내용도 많고 자료도 많이 필요한지라,
서울중심으로 몇편써보고자 합니다.
다만 근현대사는 바라보는 시각과 관점이 다른만큼 제가 쓰는 글에 내용이 맘에 안들지 모릅니다.
그래서 논란이 되면 자삭을 하겠습니다... 라고 하고 싶으나, 글쓰니라고 공부한 시간하고 타이핑한 시간이 아까와 자삭은 하지 않으렵니다. 태클도 사절입니다. 태클 걸지 마시고, 본인도 쓰시면됩니다....
단 연도의 오류라든가, 내용상의 오류애 대한 지적질은 수용하겠습니다.
1945년 미군 정보부대는 한반도 공중투입을 위해 조선인 청년들에게 공수훈련을 시켰다.
하지만 8월15일 일본의 항복으로 사실상 이 계획은 무산되었다.
그래도 8월18일 이범석,김준엽, 장준하등 광복군의 대표들은 미군들과 함께 수송기를 타고
여의도 비행장에 도착했다. 그러나 미군은 점심식사와 맥주한잔 주고는, 일본군이 완전히 무장해지 하지 않았다며 일본군이 난색을 표하자 어쩔수없이 중국으로 다시 되돌아 갔다.
한마디로 국권이 없는 정부와 작전권과 실제적 무력이 없던 군대의 한계였다...
9월8일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의 명령으로 하지 중장이 지휘하는 24군단 소속 7사단이 인천에 상륙하여 용산의 일본군 기지를 접수하고 일본 총독부로부터 38선 이남의 일본군의항복을 받았다.
일본군중 헌병과 포로수용소 경비경들의 경우 전범 혐의에 대한 조사는 받았다. 그들이 어떠한 처벌을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무기와 탄약은 미군정 주도하에 남해 바다에 버려졌다. 예전 다큐 필름을 보니, 심지어 남한에 있던 일본군 전차까지도 바다에 버렸다. 하지만 일부는 후일 국방 경비대에 의해 사용되어 지고, 한국전쟁 초기까지 사용되어졌다.
일본군은 11월초에 대부분이 철수 하였고, 인수 인계를 위해 남은 연락부와 병기 파괴를 위한 작업대는 46년 4월26일에 떠남으러서 거의 반세기 동안 남아있던 일본의 조선 주둔군은 사라졌다.
하지만 그들이 남기고간 시설은 그대로 사용되어 졌다....
용산 기지, 남산헌병대,김포와 여의도 비행장, 태릉훈련소, 수색기지,부평 조병창등....
이시설들은 그후 서울의 도시계획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미군정의 책임자로 온 하지중장은 지금의 소공동 롯데호텔 자리에 있던 반도호텔에 숙소를 잡고, 총독부 청사에 군정청을 설립한후 정부 수립이 되기전인 48년까지 실제적인 남한의 통치자가된다.

딱봐도 누가? 하지 장군인지 아시겟지요.
여담이지만 요시기에 우리나라도 미국이나 유럽처럼 학교도 가을 학기제라는걸 시행한다.
3월에 시작하는 지금의 학기제는 일본의 잔재다. 일본의 회기 년도에 맞추어 일정시대 4월1일부터 새학년이 시작되었는데, 박정희 시절 학교의 연료비를 좀 절감하고자 한창 추운 12,1월을 가정에서 보내는 방식으로 하다보니 우리나라는 3월부터 새학기가 시작되게 되었다.
암튼 딱 3년동안 우리나라도 가을 학기제라는걸 해봤다.
자 문제는 이넘에 하지중장이라는 인물이다. 하지 중장이 우리나라에 온 이유는 그냥 간단했다.
하지중장의 24군이 오키나와에 기지가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일본에서 할거많은 맥어더가
"니가 가라 조선"
해서 조선에 조자도 모르는 하지가 우리나라에 온것인데, 이넘에 하지가 웨스트 포인트를 나온 엘리트도 아니고, 걍~ 그냥 무슨 간부 양성과정 코스를 거친놈이었다.
1차 대전 프랑스 전선에서 무공을 쌓고 과날카날전투등 태평양 여기저기 다니며 전공을 쌓은 글자그대로 '태평양의 패튼'이라 불리던그냥 용맹한 전투 지휘관이었던지라.
국제 정세와 국내의 좌, 우 대립등의 복잡한 문제를 가지고 있는 조선의 입장에서는 좌, 우 모두에게도 환영받지 못한 인물이었다.
하긴 그시절에 어느 지휘관이 아시아에 그것도 한국이라는 나라의 정서와 특수성을 이해할수 있는 지휘관이 어디 있었겠는가? 싶긴하다.
여튼 그는 김구와는 물론이고 이승만과도 사이가 나빴고, 심지어 임정요인들을 인천항에서 추방할 계획까지 세웠다.
그러나 당시 미군정청의 경무국장으로 있던 조병옥 박사의 만류로 그것만은 이루지를 못했다.

초대 경무국장을 지낸 조병옥박사.
(이분 아드님이 참 유명한 분이시죠.... 궁금합면 검색~~~)
암튼 국군 준비대라는게 생겼고, 그 훈련소는 지금의 태릉에 자리를 잡았다. 지금의 국가대표 선수촌자리쯤 되려나요?
국군 준비대의 모체는 귀환장병대였다. 귀환 장병대는 8월17일 지금의 교동 초등학교에 '귀환 장병대'현판하나 걸고 시작했다. 다시 국군준비대로 간판 바꿔 달았다가 45년 9월 태릉으로 이전을 하였다.

국군준비대 행사 사진으로 바지는 일본군의 군복으로 상의만 따로 맞추어 입엇다고 합니다.
참고로 국군 준비대는 미군정청이 주도해서 만든 단체가 아니었다, 미군정청이 주도해서 만든 군사조직이 바로 국방경비대였으니 이점도 기억해주기를 바란다.
국군준비대는 글자 그대로 나라를 방어할 군대를 양성할 목적으로 만들었는데, 대부분이 구 일본군 출신들이었다. 상시 1만5천명의 병력과 6만의 예비군을 가진 조직으로 성장했지만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우익 성향의 지도자도 많았지만 자꾸 좌익성향을 띄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보다 못한 미군정청은 46년 태릉의 국군준비대를 기습하여 지도자들을 체포하고, 국군 준비대를 해산시켜 버린다.
물론 좌익의 세가 커저서 이리되긴 했지만, 국군준비대 자체를 빨갱이 집단이라고 매도하는 시각도 맞다고 보기도 힘들었고, 실제 많은 수의 준비대 대원들이 미군정이 주도하는 국방 경비대로 들어가 다시 훈련을 받았다.
946년 태릉에 육사의 전신이 되는 군사영어학교를 설치하고 60명의 인원을 뽑았다.
1군사 영어 학교 출신들은 총 110명으로 독립군이든 일본군이든 중국군이든 간부 경험이 있었던 인원들로 후일 경력에 따라 계급이 대령부터 소위까지 차등 부과 되었다. 110명중
68명이 한국 전쟁의 무공으로 별을 달게 된다.
5월2일 미군정청은 '남조선 국방경비 사관학교'로 개명하였고 초대 교장에 이형근 참령을 임명했다. 46년 6월 15일 1기 수료생 40여명이 오늘날 소위에 해당하는 참위 계급장을 달았다.
그리고 명칭도 조선경비사관학교라고 명명하게 된다. 육군사관학교는 이렇게 그 첫발을 내딛게 된다.

여담 하나를 이야기 하자면 육사특 3기로 입대한 생도중에 김상겸 이란 생도가 있었다.
1898년 원산출생으로 육사 입학시 나이가 이미 50대에 접어들었는데, 이양반의 특이한 이력이
1913년 재정 러시아 소위에 임관된 분이다. 하르곰 사관학교애 입학 하여 16살에 러시아군 소위가 되었고,1923년 재정러시아군 해채당시에 중령의 계급을 달았다고 한다. 26살에 중령이라.. 참 진급빠르다...그것도 동양인을...
암튼 재정 러시아가 붕괴되자 김상겸시는 1924년 폴란드 군에 입대한다.것도 대령으로~~~
다시 거기서 29년 대령으로 제대한후 이후의 행적이 없었는데.... 갑자기 육사에 입교를 한것인데...
(아마도 미군정쪽에 줄을 넣어 들어온거 같은데....초대 경비대 총참모장에 임명된다 )
이경력 뻥이 아닐까? 싶지만 그래도 부인이 폴란드인이었다는 자료가 있다고 한다... 암튼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였다.
암튼 여순 사건때 무능함이 들통나고 제주도 토벌 사령관으로 좌천되었으나...
그후에 기록은 없다. 건국 초기의 어수선함속에
이상한 나라의 군대 경력에 나이든 사관생도와 지휘관을 곱게 볼리는 없엇을 것이다
다음은 국군의 건군부터 해서 떠들어 보겠습니다.
재미 있으시거나 재미가 없으면 없다고 댓글 부탁드립니다.
댓글 없으면 재미 없는지 알고 쓰다 마니까요...ㅎㅎ
첫댓글 우리나라 관련된 글이라 더 좋다.
좋은 글 계속 부탁해.
응원에 힘입어 달려보겠습니다~~~
형님 글은 언제나 재미있게 잘보고 있어욤~^^
근디 어느부분이 논란거리래요..ㅡㅡ?
아직은 없지만 논란이 생길수도 있을수 있음... 가령 아직도 남침이니 북침이니 싸우기 좋아하는 애들도 있고...
무척 재밌슈, 계속 써주세요. 열독하겠슴다.
형님의 응원에 한번 써보겠습니다.
재미 있는데요~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재미있게 읽어주세요
조병옥 박사님의 아드님은 조순 서울대 명예 교수님 입니다....
검색하지 않아도 아는 사실이었는데....이런걸 알고 있으니...연예 세포들이
다 죽지......ㅡ.ㅡ
전 조순 교수님이 쓰신 경제학책도 있어요. 그냥 재미로 읽은게 아니라...
전공 관계의 교재였지요. 그 책이 전공필수 과목이라...새빠지게 공부하기도 했고요...
조순 전 경제부총리 그분....아닌데요....검색해보셔야겠네요
@유석민 착각했네요...조순 교수님이 아니라 조순형 전 국회의원이시지요...
헷갈렸습니다...요즘은 글자나 사람들 이름이 헷갈리는 때가 많습니다.
오늘 모형 작업하다 부품 번호를 잘못 읽어 한동안 어리둥절해 하고 있었습니다.
A2번을 A3번으로 착각하고 있었지요. 흠...병원가서 진단이라도 한 번 받아봐야
겠습니다. 인지 능력에 문제가 좀 생긴건지..글자를 잘못 보기도 하고 역사 인물들이
헷갈리거나 기억이 나지 않는때도 생기고요. 얼마전에는 윤관 장군을 조선의 장군으로
착각하기도 했지요....ㅜ.ㅜ
@colonel-tun 그러지 말고 당분간 고향집에 내려가 있는건 어떤지?? 아무래도 서울에 혼자 집안에 있는거보다는 좋을듯한데..
@유석민 겨우 고담에서 벗어나서 그나마 사회생활에 적응중인데... 이양반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