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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六十回 智武子分軍肆敵 偪陽城三將鬪力
제60회: 지무자(순앵)가 군사를 나누어 적군을 지치게 하고, 복양성 싸움에서 세 장수가 힘을 다투다.
話說,周簡王十三年夏四月,楚共王用右尹壬夫之計,親統大軍,同鄭成公伐宋。以魚石等五大夫為嚮導,攻下彭城。使魚石等據之,留下三百乘,屯戍其地。共王謂五大夫曰:「晉方通吳,與楚為難,而彭城乃吳晉往來之徑。今留重兵助汝,進戰則可以割宋國之封,退守亦可以絕吳晉之使。汝宜用心任事,勿負寡人之託!」共王歸楚。是冬,宋成公使大夫老佐帥師圍彭城。魚石統戍卒迎戰,為老佐所敗。楚令尹嬰齊聞彭城被圍,引兵來救。老佐恃勇輕敵,深入楚軍,中箭而亡。嬰齊遂進兵侵宋。宋成公大懼,使右師華元至晉告急。
한편, 주간왕 13년(기원전 572년) 여름 4월에 초공왕은 우윤 공자 임부의 계책을 받아들여 친히 대군을 거느리고 정성공과 함께 송나라를 쳤다. 어석 등 송나라 다섯 대부를 향도로 삼아 팽성(彭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초공왕은 어석 등에게 전차 300 대를 주어 팽성을 지키게 했다. 초공왕이 다섯 대부에게 말하기를, “진(晉)나라가 오나라와 국교를 맺어서 초나라로서는 참기 어려운 일이다. 팽성은 오나라와 진나라가 왕래하는 길목이다. 지금 많은 군사를 주둔시켜 그대들을 돕게 하였으니, 앞으로 나아가 싸우면 송나라 땅을 잘라서 봉읍을 만들 수 있고, 물러나서 지키면 또한 오나라와 진나라의 왕래를 막을 수 있다. 그대들은 마땅히 마음을 써서 일을 맡아 과인의 부탁을 저버리지 말라!” 하고 초공왕은 초나라로 돌아갔다. 그해 겨울 송성공(宋成公)은 대부 노좌(老佐)를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팽성을 포위했다. 어석이 수비병을 거느리고 송나라 군사를 맞아서 싸웠으나 노좌에게 패했다. 초나라 영윤 공자 영제가 팽성이 포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초군을 이끌고 구원하러 왔다. 노좌는 용맹을 믿고 적을 얕잡아 보고 초군 진영에 깊이 들어갔다가 화살에 맞아 죽었다. 영제가 마침내 군사를 진격시켜 송나라 도성으로 쳐들어갔다. 송성공이 크게 놀라 우사 화원을 진나라에 보내 위급함을 고했다.
韓厥言於悼公曰:「昔文公之伯,自救宋始。興衰之機,在此一舉,不可以不勤也。」乃大發使,徵兵於諸侯。悼公親統大將韓厥、荀偃、欒黶等,先屯兵於台谷。嬰齊聞晉兵大至,乃班師歸楚。周簡王十四年,悼公帥宋、魯、衛、曹、莒、邾、滕、薛八國之兵,進圍彭城。宋大夫向戌使士卒登轈車,向城上四面呼曰:「魚石等背君之賊,天理不容!今晉統二十萬之眾,蹂破孤城,寸草不留。汝等若知順逆,何不擒逆賊來降?免使無辜被戮。」如此傳呼數遍,彭城百姓聞之,皆知魚石理虧,開門以納晉師。
한궐이 진도공에게 말하기를, “옛날 진문공(晉文公)께서 방백이 된 것은 송나라를 구원하고부터였습니다. 흥망성쇠의 계기도 지금 이 거사에 달려 있으니 힘쓰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했다. 이에 사자들을 각국에 보내어 제후들에게 군사를 소집하게 했다. 진도공이 친히 대장 한궐, 순언, 난염 등을 거느리고 먼저 태곡(台谷)에 진을 쳤다. 공자 영제는 진(晉)나라 군사가 대거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고 곧 군사를 거두어 초나라로 돌아갔다. 다음 해 주간왕 14년에 진도공이 송(宋), 노(魯), 위(衛), 조(曺), 거(莒), 주(邾), 등(滕), 설(薛) 등 여덟 나라의 군사를 거느리고 출동하여 팽성을 포위했다. 송나라 대부 상술(向戌)이 사졸을 시켜 망루 차에 오르게 해서 성 위의 사면를 향해 외치게 하기를, “어석 등 군주를 배반한 도적놈들을 하늘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 진나라 20만 대군이 외로운 성을 밟아 깨뜨려서 풀 한 포기도 남기지 않을 것이니, 너희들이 만약 하늘의 순리를 안다면 어찌 역적을 잡아서 항복하여 무고하게 도륙당함을 면하지 않느냐?” 했다. 이렇게 성 주위를 몇 바퀴 도니, 팽성의 백성들이 이 말을 듣고 어석의 잘못을 알아서 성문을 열고 진나라 군사에게 항복했다.
時楚戍雖眾,魚石等不加優恤,莫肯效力。晉悼公入城,戍卒俱奔散。韓厥擒魚石,欒黶荀偃擒魚府,宋向戌擒向為人向帶,魯仲孫蔑擒鱗朱,各解到晉悼公處獻功。悼公命將五大夫斬首,安置其族於河東壺邱之地。遂移師問罪於鄭。楚右尹壬夫侵宋以救鄭,諸侯之師還救宋,因各散歸。是年,周簡王崩,世子泄心即位,是為靈王。靈王自始生時,口上便有髭鬚,故周人謂之髭王。髭王元年夏,鄭成公疾篤,謂上卿公子騑曰:「楚君以救鄭之故,矢及於目,寡人未之敢忘。寡人死後,諸卿切勿背楚!」囑罷遂薨。公子騑等奉世子髡頑即位,是為僖公。
이때 초나라 수비군이 비록 많았지만, 어석 등이 잘 보살피지 않아서 아무도 힘을 다하려고 하지 않았다. 진도공이 성안으로 들어가자 성을 수비하던 군사들이 모두 흩어져 달아났다. 한궐은 어석을 사로잡고, 난염과 순언은 어부(魚府)를 생포했으며, 송나라 상술은 상위인(向爲人)과 상대(向帶)를 사로잡았고, 노나라의 중손멸(仲孫蔑)은 인주(鱗朱)를 잡아서 각기 끌고 와 진도공에게 바쳤다. 진도공이 다섯 대부를 참수에 처하고, 그 족속들은 황하 동쪽의 호구(壺邱)라는 땅에 안치했다. 마침내 군사들을 정나라로 이동시켜 그 죄를 묻고자 했다. 초나라 우윤 임부(任夫)가 정나라를 구하려고 송나라를 공격하자, 제후들의 연합군이 돌아와 송나라를 구했고, (초나라 군사가 퇴각하자) 그로 인해 각기 흩어져 자기 나라로 돌아갔다. 그해에 주간왕이 죽고, 세자 설심(泄心)이 즉위하니. 이가 주영왕(周靈王)이다. 주영왕은 태어날 때부터 콧수염이 있어서 주나라 사람들이 그를 자왕(髭王)이라고 불렀다. 자왕 원년(기원전 572년) 여름에 정나라 성공의 병이 위독하여 상경 공자 비(公子騑)를 불러 당부하기를, “초나라 군주가 우리나라를 구하려다가 한쪽 눈을 잃었소. 나는 그 은혜를 감히 잊을 수가 없소. 내가 죽은 후에도 경들은 절대로 초나라에 등을 돌리지 마시오!” 하고, 죽었다. 공자 비 등이 세자 곤완(髡頑)을 받들어 정나라의 군주 자리에 앉혔다. 이가 정희공(鄭僖公)이다.
晉悼公以鄭人未服,大合諸侯於戚以謀之。魯大夫仲孫蔑獻計曰:「鄭地之險,莫如虎牢,且楚鄭相通之要道也。誠築城設關,留重兵以偪之,鄭必從矣。」楚降將巫臣獻計曰:「吳與楚一水相通,自臣往歲聘吳,約與攻楚,吳人屢次侵擾楚屬,楚人苦之。今莫若更遣一介,導吳伐楚,楚東苦吳兵,安能北與我爭鄭乎?」晉悼公兩從之。時齊靈公亦遣世子光,同上卿崔杼來會所,聽晉之命。悼公乃合九路諸侯兵力,大城虎牢,增置墩臺。大國抽兵千人,小國五百三百,共守其地。鄭僖公果然恐懼,始行成於晉。晉悼公乃還。
진도공은 정나라가 복종하지 않자 제후들을 척(戚)에 초청하여, 이 일을 상의했다. 노나라 대부 중손멸(仲孫蔑)이 계책을 내놓기를, “정나라에서 제일 험한 땅은 호뢰(虎牢)인데 초나라와 정나라가 서로 왕래하는 중요한 길목입니다. 이곳에 성을 쌓고 관문을 설치한 후에 많은 군사를 주둔시켜 압박을 가하면 정나라는 틀림없이 복종할 것입니다.” 했다. 초나라의 항장 무신도 계책을 내어 말하기를, “오나라와 초나라는 하나의 강물로 서로 통합니다. 신이 지난날 오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우리와 같이 힘을 합하여 초나라를 공격하기로 약조했습니다. 오나라 사람이 여러 번 초나라의 속국들을 침략하여 초나라 사람이 고초를 받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만약 다시 사신을 보내 오나라로 하여금 초나라를 치게 한다면 초나라는 동쪽으로 오나라 군사를 괴로워할 것이니, 어찌 북쪽으로 우리와 정나라를 놓고 다툴 수 있겠습니까?” 했다. 진도공은 두 사람의 계책을 받아들였다. 그때 제나라 영공(靈公)은 자기 대신 세자 광(光)과 상경 최저(崔杼)를 함께 척 땅의 회맹에 참석시켜 진나라의 명을 듣게 했다. 진도공은 아홉 나라 제후들의 군사를 규합하여 호뢰에다 큰 성을 쌓게 하고 돈대(墩臺)를 돋우었다. 제후국들 중에서 대국은 1000명, 소국은 500에서 300명씩 군사들을 차출하여 호뢰성을 함께 지켰다. 정희공이 과연 두려워하여 진(晉)나라에 비로소 화친을 청했다. 진도공은 정나라와의 화친을 허락하고 본국으로 귀환했다.
時中軍尉祁奚年七十餘矣,告老致政。悼公問曰:「孰可以代卿者?」奚對曰:「莫如解狐。」悼公曰:「聞解狐卿之仇也,何以舉之?」奚對曰:「君問可,非問臣之仇也。」悼公乃召解狐,未及拜官,狐已病死。悼公復問曰:「解狐之外,更有何人?」奚對曰:「其次莫如午。」悼公曰:「午非卿之子耶?」奚對曰:「君問可,非問臣之子也。」悼公曰:「今中軍尉副羊舌職亦死,卿為我并擇其代。」奚對曰:「職有二子,曰赤,曰肹,二人皆賢,惟君所用。」悼公從其言,以祁午為中軍尉,羊舌赤副之。諸大夫無不悅服。
그때 중군위(中軍尉) 기해가 나이 칠십여 세라 은퇴를 하겠다고 했다. 진도공이 묻기를, “누가 경을 대신할 수 있습니까?” 하니, 기해가 대답하기를, “해호(解狐)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했다. 진도공이 말하기를, “내가 듣기에 해호는 경의 원수라고 하던데 어찌하여 그를 천거하시오?” 하니, 기해가 대답하기를, “주군께서는 적임자를 물으셨지, 신의 원수를 묻지 않았습니다.” 했다. 진도공이 이에 해호를 불렀으나, 관직에 임명하기 전에 병으로 죽었다. 진도공이 다시 기해에게 묻기를, “해호 말고 또 누가 있습니까?” 하니, 기해가 말하기를, “그다음은 기오(祁午)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했다. 진도공이 말하기를, “기오는 경의 아들이 아닙니까?” 하니, 기해가 대답하기를, “주군께서는 적임자를 물으셨지, 신의 아들을 묻지 않았습니다.” 했다. 진도공이 말하기를, “지금 중군 부위 양설직(羊舌職)도 죽었으니, 경이 그를 대신할 사람도 선택하시오.” 하니, 기해가 말하기를, “양설직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적(赤)과 힐(肹)이라고 합니다. 둘 다 모두 어질어서 주군께서 쓸 수 있습니다.” 했다. 진도공이 그 말에 따라 기오를 중군위로 하고, 양설적(羊舌赤)을 중군 부위로 임명했다. 여러 대부가 기뻐하며 승복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話分兩頭。再說,巫臣之子巫狐庸,奉晉侯命,如吳見吳王壽夢,請兵伐楚。壽夢許之,使世子諸樊為將,治兵於江口。早有諜人報入楚國。楚令尹嬰齊奏曰:「吳師從未至楚,若一次入境,後將復來。不如先期伐之。」共王以為然。嬰齊乃大閱舟師,簡精卒二萬人,由大江襲破鳩茲,遂欲順流而下。驍將鄧廖進曰:「長江水溜,進易退難。小將願率一軍前行,得利則進,失利亦不至於大敗。元帥屯兵於郝山磯,相機觀變,可以萬全。」嬰齊然其策,乃選組甲三百人,被練袍者三千人,皆氣強力大,一可當十者,大小舟共百艘,一聲砲響,船頭望東進發。早有哨船探知鳩茲失事,來報世子諸樊。
이야기가 두 갈래로 나뉜다. 한편, 무신(巫臣)의 아들 무호용(巫狐庸)은 진도공의 명을 받아 오나라에 가서 오왕 수몽(壽夢)을 만나 오나라가 군사를 일으켜 초나라를 정벌하도록 청했다. 수몽이 허락하여 세자 제번(諸樊)을 대장으로 삼아 강구(江口)에서 수군을 훈련시켰다. 첩자가 이 사실을 초나라에 보고했다. 초나라 영윤 공자 영제가 아뢰기를, “오나라 군사가 초나라를 침범한 적은 아직 없었습니다. 만약 한 번 우리나라 경계를 침범하면 후에 다시 올 것입니다. 먼저 오나라를 정벌하는 것이 낫습니다.” 하니, 초공왕이 그렇다고 생각했다. 공자 영제가 수군을 크게 사열한 후에 정예병 2만 명을 뽑아 장강을 거쳐 구자(鳩玆)를 습격하여 점령하고 마침내 장강을 따라 하류로 내려오려고 했다. 사납고 용감한 장수 등요(鄧廖)가 나아가 말하기를, “장강은 물살이 세차서 나아가기는 쉽지만 물러나기는 어렵습니다. 소장에게 한 무리의 군사를 주시면, 앞서가서 싸움에서 이기면 진격하고 져도 크게 꺾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원수께서는 학산기(郝山磯)에 주둔하고 있다가 기회를 보아 변화에 응하면 만전을 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했다. 공자 영제가 그 계책을 옳게 여겨, 무장병 300명과 명주 전포로 무장한 군사 3000명을 골라 주었는데, 모두 용감하고 힘이 세어 혼자서 열 명을 감당할 수 있는 자들이었다. 크고 작은 배 100척이 한 번 포 소리를 울리면서 뱃머리를 동쪽으로 향하여 나아갔다. 어느새 오나라 정탐선이 구자가 함락된 소식을 오나라 세자 제번에게 보고했다.
諸樊曰:「鳩茲既失,楚兵必乘勝東下,宜預備之。」乃使公子夷昧,帥舟師數十艘,於東西梁山誘敵﹔公子餘祭,伏兵於采石港。鄧廖兵過郝山磯,望梁山有兵船,奮勇前進。夷昧略戰,即佯敗東走。鄧廖追過采石磯,遇諸樊大軍,方接戰,未十餘合,采石港中砲聲大振,餘祭伏兵從後夾攻,前後矢發如雨點,鄧廖面中三矢,猶拔箭力戰。夷昧乘艨艟大艦至,艦上俱精選勇士,以大槍亂擣敵船,船多覆溺。鄧廖力盡被執,不屈而死。餘軍得逃者,惟組甲八十,被練甲者三百人而已。嬰齊懼罪,方欲掩敗為功。誰知吳世子諸樊乘勝,反進兵襲楚,嬰齊大敗而回,鳩茲仍復歸吳。嬰齊羞憤成疾,未至郢都,遂卒。
제번이 말하기를, “구자가 이미 함락되었으니 초나라 군사가 반드시 승세를 타고 동진해 올 것이다. 마땅히 미리 준비해야겠다.” 하고, 이에 공자 이매(夷昧)를 시켜 전선 수십 척을 거느리고 양산(梁山)의 동쪽과 서쪽에서 적을 유인하게 하고, 공자 여제(餘祭)는 채석항(采石港)에 매복하게 했다. 등요의 초나라 군사가 학산기를 지나 양산 쪽에 전선이 있는 것을 바라보고. 앞을 향해 용감하게 나아갔다. 이매가 싸우는 척하다가 곧 거짓 패하여 동쪽으로 달아났다. 등요가 추격하여 채석기(采石磯)를 지나자 제번의 대군과 만나 곧바로 접전했다. 십여 합이 되지 않아서 채석항 속에서 포성이 크게 울리며 여제의 복병이 뒤에서 협공을 해와, 앞뒤에서 화살이 빗발같이 쏟아졌다. 등요는 얼굴에 화살을 세 발이나 맞았으나 뽑아버리고 힘을 다해 싸웠다. 이매가 큰 전선을 타고 이르러 함상의 정예 용사들이 큰 창으로 적선을 짓찧어 배들이 많이 전복되어 가라앉았다. 등요는 힘이 다하여 잡혔으나 굴복하지 않고 죽었다. 나머지 초나라 군사 중 도망간 자는 오직 무장병 80명과 명주 전포를 입은 군사 300명뿐이었다. 공자 영제는 패전의 죄를 받을까 두려워서 패전을 숨기고, 구자의 승리를 공으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누가 알았으리오. 오나라 세자 제번이 승리의 여세를 몰아 오나라 군사들을 이끌고 진격하여 구자의 초나라 본영을 습격하니, 공자 영제가 대패하여 돌아가고, 구자는 다시 오나라의 영토가 되었다. 공자 영제가 부끄럽기도 하고 분하기도 해서 병을 얻어 영도(郢都)에 도착하기도 전에 마침내 죽었다.
史臣有詩云:「乘車射御教吳人,從此東方起戰塵。組甲成擒名將死,當年錯著族巫臣。」共王乃進右尹壬夫為令尹。壬夫賦性貪鄙,索賂於屬國。陳成公不能堪,乃使轅僑如請服於晉。晉悼公大合諸侯於雞澤,再會諸侯於戚。吳子壽夢亦來會好,中國之勢大振。楚共王怒失陳國,歸罪於壬夫,殺之。用其弟公子貞,字子囊者代為令尹。大閱師徒,出車五百乘伐陳。時陳成公午已薨,世子弱嗣位,是為哀公。懼楚兵威,復歸附於楚。晉悼公聞之大怒,欲起兵與楚爭陳。忽報無終國君嘉父,遣大夫孟樂至晉,獻虎豹之皮百個。
사관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오나라 사람에게 전차전과 궁술을 가르쳐서, 이로써 초나라 동쪽에서 전쟁이 일어났다. 초나라의 무장병이 포로가 되고 명장이 죽은 것은, 지난날 무신의 종족들을 무고하게 죽였기 때문이었다.” 했다. 초공왕은 이에 우윤 임부(任夫)를 올려 영윤으로 삼았다. 임부는 천성이 탐욕스럽고 비루하여 초나라의 속국에 재물을 요구했다. 진성공(陳成公)이 참지 못하고 원교(轅僑)를 진(晉)나라에 사자로 보내 복속하기를 청했다. 진도공이 계택(鷄澤)에서 제후들과 회맹하고, 다시 척(戚)에서 제후들과 재차 회맹했다. 오나라 군주 수몽도 그 회합에 참석했다. 이로써 진(晉)나라를 중심으로 한 중국의 위세는 크게 떨쳤다. 초공왕은 진(陳)나라가 초나라를 등진 것에 분노하여 그 죄를 임부에게 물어 죽였다. 초공왕은 그 동생 자낭(子囊) 공자 정(公子貞)을 영윤으로 삼아 그 뒤를 잇게 했다. 초공왕은 군사를 대대적으로 사열하고 전차 500대를 동원하여 진(陳)나라를 정벌했다. 그때 진성공(陳成公) 오사(午巳)가 죽고, 세자 약(弱)이 뒤를 이으니, 이가 진애공(陳哀公)이다. 진애공은 초나라 군사의 위세에 겁을 먹고, 다시 초나라에 돌아와 붙었다. 진도공(晉悼公)이 그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하여 군사를 동원하여 진나라를 얻기 위해 초나라와 싸우려 했으나, 그때 갑자기 무종국(無終國) 군주 가보(嘉父)가 대부 맹락(孟樂)을 진(晉)나라에 사신으로 보내 호랑이와 표범 가죽을 각각 100장씩을 바쳤다.
奏言:「山戎諸國,自齊桓公征服,一向平靖。近因燕秦微弱,山戎窺中國無伯,復肆侵掠。寡君聞晉君精明,將紹桓文之業,因此宣晉威德,諸戎情願受盟。因此寡君遣微臣奉聞,惟賜定奪。」悼公集諸將商議,皆曰:「戎狄無親,不如伐之。昔者,齊桓公之伯,先定山戎,後征荊楚,正以豺狼之性,非兵威不能制也。」司馬魏絳獨曰:「不可,今諸侯初合,大業未定,若興兵伐戎,楚兵必乘虛而生事,諸侯必叛晉而朝楚。夫夷狄,禽獸也。諸侯,兄弟也。今得禽獸而失兄弟,非策也。」悼公曰:「戎可和乎?」
그리고 아뢰기를, “산융의 여러 나라는 제환공이 정복한 이래 지금까지 평온했으나, 요즘 연나라와 진(秦)나라의 국력이 약해지자 산융이 중원에 방백이 없어진 틈을 타서 다시 침략을 자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저희 군주께서는 진(晉)나라 군주께서 영명하시어 장차 제환공과 진문공의 패업을 계승하셨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진(晉)나라의 위엄과 덕을 선전한 결과 융족의 여러 나라가 진정으로 맹약에 참여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런 까닭으로 저희 군주께서 저를 귀국에 보내어 군주님의 명을 받들게 하였으니 부디 가부간 결정을 내려 주시기 바랍니다.” 했다. 진도공이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 상의하니 모두가 말하기를, “융적(戎狄)은 친할 수가 없으니, 정벌함이 옳습니다. 옛날 제환공이 방백으로 있을 때 먼저 산융을 정벌하고, 그 후에 다시 남쪽 초나라를 평정하였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승냥이 같은 성정을 갖고 있어 무력이 아니면 제압할 수 없어서였습니다.” 했다. 그러자 사마 위강(魏絳)이 홀로 말하기를, “그건 안 됩니다. 지금 제후들과 회맹한 지도 얼마 되지 않아서 패업이 공고해지지 않았는데, 만일 군사를 일으켜 융족을 정벌한다면 초나라 군사가 반드시 빈틈을 타서 중원의 여러 제후국을 침략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제후들은 우리나라를 배반하고 초나라에 붙게 됩니다. 이적(夷狄)들의 나라는 짐승과 같으며, 제후국들은 우리의 형제들입니다. 지금 금수의 나라를 얻고, 형제의 나라를 잃는다면 그것은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하니, 진도공이 말하기를, “융족들과 화의를 맺을 수 있겠는가?” 했다.
魏絳對曰:「和戎之利有五:戎與晉鄰,其地多曠,賤土貴貨,我以貨易土,可以廣地,其利一也﹔侵掠既息,邊民得安意耕種,其利二也﹔以德懷遠,兵車不勞,其利三也﹔戎狄事晉,四鄰震動,諸侯畏服,其利四也﹔我無北顧之憂,得以專意於南方,其利五也。有此五利,君何不從?」悼公大悅,即命魏絳為和戎之使。同孟樂先至無終國,與國王嘉父商議停當。嘉父乃號召山戎諸國,並至無終,歃血定盟:「方今晉侯嗣伯,主盟中華,諸戎願奉約束,捍衛北方,不侵不叛,各保寧宇。如有背盟,天地不佑!」諸戎受盟,各各歡喜,以土宜獻魏絳,絳分毫不受。諸戎相顧曰:「上國使臣,廉潔如此!」倍加敬重。魏絳以盟約回報悼公,悼公大悅。
위강이 대답하기를, “융족과 화의를 맺게 되면 다섯 가지 이득이 있습니다. 융족과 진(晉)나라는 국경을 접하고 있는데 그 땅이 광활하여 땅은 천하고 재물은 귀합니다. 우리가 재물로 땅과 바꾸어 영역을 넓힐 수 있습니다. 그것이 첫 번째 이로움입니다. 융족이 침략하지 않으면 변경에 사는 백성들이 안심하고 농업에 전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두 번째 이로움입니다. 덕을 멀리까지 베풀면 군사를 동원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것이 세 번째 이로움입니다. 융적이 진(晉)나라를 섬기게 되면 천하가 진동하게 되어 제후들이 두려워하여 복종하게 됩니다. 그것이 네 번째 이로움입니다. 우리는 북쪽을 근심할 필요가 없고 남쪽에만 전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다섯 번째 이로움입니다. 이런 다섯 가지 이로움이 있는데 주군께서는 어찌하여 따르지 않으십니까?” 했다. 진도공이 크게 기뻐하여 즉시 위강을 사신으로 삼아 융족과 화의를 맺도록 했다. 위강은 맹락(孟樂)과 함께 먼저 무종국으로 가서 그 국왕 가보(嘉父)와 일 처리를 상의했다. 가보는 이에 산융의 여러 나라 군주들을 불러 무종국으로 모이게 하여 삽혈의 의식을 행하며 맹약하기를, “요즘에 진(晉)나라 군주가 중원의 맹주로서 패업(覇業)을 이어받았다. 여러 융족의 나라는 진(晉)나라 군주와 한 약속을 잘 받들고, 북방을 방위하며, 침략하지도 배반하지도 않을 것이며, 각자 자기 나라의 안전을 도모하기로 한다. 만일 이 맹약을 배반한다면 천지신명께서 돕지 않을 것이다!” 했다. 여러 융족의 군주들이 맹약을 맺고 모두가 기뻐했다. 그들은 토산물을 위강에게 선물로 바쳤으나, 위강은 하나도 받지 않았다. 융족의 군주들이 서로 돌아보며 말하기를, “상국의 사신이 참으로 청렴하구나!” 하고, 더욱 존중했다. 위강이 맹약하고 돌아와 진도공에게 보고하니, 진도공이 크게 기뻐했다.
時楚令尹公子貞已得陳國,又移兵伐鄭。因虎牢有重兵戍守,不走汜水一路,卻由許國望潁水而來。鄭僖公髡頑大懼,集六卿共議。那六卿:公子騑字子駟,公子發字子國,公子嘉字子孔,三位俱穆公之子,於僖公為叔祖輩﹔公孫輒字子耳,乃公子去疾之子,公孫蠆字子蟜,乃公子偃之子,公孫舍之字子展,乃公子喜之子,三位俱穆公之孫,襲父爵為卿,於僖公為叔輩。(這六卿都是尊行,素執鄭政。)僖公髡頑心高氣傲,不甚加禮,以此君臣積不相能。上卿公子騑尤為鑿柄。今日會議之際,僖公主意,欲堅守以待晉救。
그때 초나라 영윤 공자 정이 이미 진(陳)나라의 항복을 받고, 다시 그 군사를 움직여 정나라를 쳤다. 그러나 호뢰(虎牢)에 많은 군대가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사수(汜水)를 건너가는 길을 택하지 않고, 허나라를 거쳐 영수(潁水)를 건너 쳐들어갔다. 정희공(鄭僖公) 곤완(髡頑)이 크게 두려워하여 육경을 모아서 함께 의논했다. 그 육경은 자사(子駟) 공자 비(公子騑), 자국(子國) 공자 발(公子發), 자공(子孔) 공자 가(公子嘉) 세 사람은 모두 정목공의 아들로서, 정희공의 할아버지뻘이며, 자이(子耳) 공자첩(公孫輒)은 공자거질(公子去疾)의 아들이고, 자교(子蟜) 공손 채(公孫蠆)는 공자 언(公子偃)의 아들이고, 자전(子展) 공손 사지(公孫舍之)는 공자 희(公子喜)의 아들인데, 이 세 사람은 모두 정목공의 손자로 아버지의 작위를 이어받아 경이 되었으며, 정희공의 아저씨뻘이었다. (이 육경들은 모두 정희공보다 항렬이 높았고 이전부터 정나라의 정권을 잡고 있었다.) 정희공의 성격이 오만무례했으므로 그들을 별로 대우하지 않았으며 그래서 군주와 신하가 서로 불만을 갖고 있었다. 상경 공자 비와는 특히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날 회의를 할 때 정희공은 굳게 지키며 진(晉)나라 구원군이 올 때까지 기다리자고 주장했다.
公子騑開言曰:「諺云『遠水豈能救近火?』不如從楚。」僖公曰:「從楚則晉師又至,何以當之?」公子騑對曰:「晉與楚誰憐我者?我亦何擇於二國?惟強者則事之。今後請以犧牲玉帛待於境外,楚來則盟楚,晉來則盟晉。兩雄並爭,必有大屈。強弱既分,吾因擇強者而庇民焉,不亦可乎?」僖公不從其計,曰:「如駟言,鄭朝夕待盟,無寧歲矣!」欲遣使求援於晉。諸大夫懼違公子騑之意,莫肯往者。僖公發憤自行,是夜宿於驛舍。公子騑使門客伏而刺之,託言暴疾。立其弟嘉為君,是為簡公。使人報楚曰:「從晉皆髡頑之意,今髡頑已死,願聽盟罷兵!」楚公子貞受盟而退。
공자 비가 입을 열어 말하기를, “속담에 이르기를, ‘멀리 있는 물은 가까이 있는 불을 끌 수 없다’라고 했습니다. 초나라를 따르는 게 낫습니다.” 하니, 정희공이 말하기를, “초나라를 따르면 진(晉)나라 군사가 또 올 것인데,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했다. 공자 비가 대답하기를, “진나라와 초나라 중에서 어느 나라가 우리를 더 사랑하겠습니까? 우리나라 역시 두 나라 중 어느 한 나라만을 선택해 섬길 것입니까? 오직 강한 나라만 섬기면 됩니다. 이제부터 희생과 옥과 비단을 가지고 국경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초나라 군사가 오면 초나라와 맹약을 맺고, 진나라 군사가 오면 진나라와 맹약을 맺으면 됩니다. 두 강대국이 서로 다투면 반드시 한쪽이 크게 꺾이게 됩니다. 강약이 이미 나뉘면 우리는 강한 나라를 택하여 섬겨서 백성들은 보호할 수 있습니다. 이 또한 옳지 않습니까?” 했다. 정희공이 그 계책을 따르지 않고 말하기를, “자사(공자 비)의 의견을 따르게 된다면 정나라는 아침저녁으로 맹약만을 맺느라 하루도 편안한 날이 없지 않겠소?” 했다. 정희공은 사신을 진나라에 보내 구원을 요청하려고 했으나, 여러 대부는 공자비의 뜻을 어기는 것을 두려워하여, 기꺼이 가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정희공이 분노하여 자기가 직접 진나라로 길을 나서 그날 밤에 역사에서 잤다. 공자 비가 문객을 매복시켜 정희공을 찔러 죽이고 갑자기 병이 나서 죽었다고 둘러댔다. 공자 비는 그 동생 공자 가(嘉)를 군주로 세웠다. 이가 정간공(鄭簡公)이다. 그리고 사람을 초나라 군영에 보내어 알리기를, “우리가 진나라를 섬긴 것은 곤완의 뜻이었다. 지금 곤완은 이미 죽었고, 원컨대 상국을 섬기고자 하니 군사를 물리쳐 주십시오.” 했다. 초나라 공자 정이 정나라의 화의를 받아들여 맹약을 맺고 물러갔다.
晉悼公聞鄭復從楚,乃問於諸大夫曰:「今陳鄭俱叛,伐之何先?」荀罃對曰:「陳國小地偏,無益於成敗之數。鄭為中國之樞,自來圖伯,必先服鄭。寧失十陳,不可失一鄭也。」韓厥曰:「子羽識見明決,能定鄭者必此人,臣力衰智耄,願以中軍斧鉞讓之。」悼公不許,厥堅請不已,乃從之。韓厥告老致政,荀罃遂代為中軍元帥,統大軍伐鄭。兵至虎牢,鄭人請盟,荀罃許之。比及晉師返旆,楚共王親自伐鄭,復取成而歸。悼公大怒,問於諸大夫曰:「鄭人反覆,兵至則從,兵撤復叛,今欲得其堅附,當用何策?」
진도공이 정나라가 다시 초나라를 따른다는 소식을 듣고 여러 대부에게 묻기를, “지금 진(陳)나라와 정나라가 모두 우리를 배반하니 어느 나라부터 정벌해야 하겠소?” 하니, 순앵이 대답하기를, “진(陳)나라는 작고 땅이 치우쳐 있어 패업의 성패에는 무관한 곳입니다. 그러나 정나라는 중원의 중추에 있습니다. 자고로 패업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정나라를 굴복시켰습니다. 차라리 열 개의 진(陳)나라를 잃어도, 한 개의 정나라를 잃어서는 안 됩니다.” 했다. 한궐이 말하기를, “자우(子羽 ; 순앵)의 식견이 매우 훌륭합니다. 정나라를 평정할 사람은 틀림없이 이 사람입니다. 신은 기력이 이미 쇠하고 지력도 늙었으니 중군의 부월(斧鉞)을 순앵에게 넘겨주고 싶습니다.” 했다. 진도공이 불허하자 한궐이 완강하게 청해 마지않았다. 이에 한궐의 청을 받아들였다. 한궐이 나이가 많다고 정사에서 물러나자, 순앵이 한궐의 뒤를 이어 중군 원수가 되어 대군을 통솔하고 정나라를 쳤다. 군사가 호뢰에 이르니, 정나라 사람이 맹약을 청했다. 순앵이 화의를 받아들이고 군대를 철수시키자, 초공왕이 친히 정나라를 쳤다. 정나라가 다시 화의를 청하자 초나라 군사가 돌아갔다. 진도공이 대로하여 여러 대부에게 묻기를, “정나라 놈들이 반복하여 군대가 가면 복종하고 군대가 철수하면 다시 배반하니 지금 정나라를 단단하게 붙들어 놓으려면 어떤 계책을 써야 하겠소?” 했다.
荀罃獻計曰:「晉所以不能收鄭者,以楚人爭之甚力也。今欲收鄭,必先敝楚,欲敝楚,必用『以逸待勞』之策。」悼公曰:「何謂『以逸待勞』之策?」荀罃對曰:「兵不可以數動,數動則疲,諸侯不可以屢勤,屢勤則怨。內疲而外怨,以此禦楚,臣未見其勝也。臣請舉四軍之眾,分而為三,將各國亦分派配搭。每次只用一軍,更番出入,楚進則我退,楚退則我復進,以我之一軍,牽楚之全軍。彼求戰不得,求息又不得,我無暴骨之凶,彼有道塗之苦。我能亟往,彼不能亟來,如是而楚可疲,鄭可固也。」悼公曰:「此計甚善!」即命荀罃治兵於曲梁,三分四軍,定更番之制。
순앵이 계책을 바쳐 말하기를, “우리가 정나라를 붙들어 놓을 수 없는 까닭은 초나라와 힘을 다투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정나라를 거두어들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초나라를 제압해야 합니다. 초나라를 제압하기 위해서는 ‘이일대로(以逸待勞 ; 편안함으로써 피로해지기를 기다린다)’의 계책을 써야 합니다.” 했다. 진도공이 말하기를, “‘이일대로’의 계책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이오?” 하니, 순앵이 대답하기를, “군사란 자주 움직이면 안 되는데, 자주 움직이면 피로하게 됩니다. 제후들도 자꾸 소집하여 부르면 안 됩니다. 자꾸 소집하면 원망을 듣게 됩니다. 안으로는 피로하게 되고 밖으로는 원망을 듣게 되면, 이렇게 초나라와 싸워서는 이기기 힘들게 됩니다. 신이 청하건대 우리 사군(四軍)의 군사들을 삼군(三軍)으로 나누고, 다시 제후들의 군사를 나누어서 배합합니다. 출정할 때마다 다만 일군(一軍)만 출동시키고 순번을 바꾸어 출입하여 초나라 군사가 진격하면 우리는 퇴각하고 초군이 퇴각하면 우리가 다시 진격해서 우리의 일군이 초나라의 전군를 견제합니다. 그러면 초군은 싸우고 싶어도 싸울 수 없으며 또한 쉬고 싶어도 쉴 수 없게 됩니다. 우리가 들판에 뼈를 버리지 않아도 초군은 길 위에서 고생에 시달릴 것입니다. 우리는 빨리 이동할 수 있지만, 초군은 빨리 움직일 수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초군은 피곤하게 되고 정나라를 굳게 붙들 수 있습니다.” 했다.진도공이 말하기를, “그 계책이 참으로 훌륭하오!” 하고, 즉시 순앵에게 명해 곡량(曲梁)에서 군사를 집합시켜 사군 체제를 삼분하여 윤번제로 개편했다.
荀罃登壇出令,壇上豎起一面杏黃色大旆,上寫「中軍元帥智」(他本荀氏,為何卻寫「智」字?因荀罃荀偃叔姪同為大將,軍中一姓,嫌無分別。罃父荀首食采於智,偃父荀庚自晉作三行時,曾為中行將軍,故又以智氏,中行氏別之。自此荀罃號為智罃,荀偃號為中行偃,軍中耳目,就不亂了。這都是荀罃的法度。)壇下分立三軍:第一軍,上軍元帥荀偃,副將韓起,魯、曹、邾三國以兵從,中軍副將范匄接應﹔第二軍,下軍元帥欒黶,副將士魴,齊、滕、薛三國以兵從,中軍上大夫魏頡接應﹔第三軍,新軍元帥趙武,副將魏相,宋、衛、郳三國以兵從,中軍下大夫荀會接應。
순앵이 단상에 올라가 명령하기를, 단상에 ‘중군 원수 지’라고 쓴 적황색의 큰 깃발을 한쪽에 세우게 했다. (순앵은 본디 순씨이나 중군 원수기에 왜 지(智)를 썼는가? 그 이유는 순앵과 순언은 숙질간으로서 모두 대장이므로 군중에서 같은 성을 군사들이 분별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순앵의 부친 순수는 식읍이 지(智)였고 순언의 부친 순경(荀庚)은 지난날 진나라 군제를 삼군 삼행으로 증편했을 때, 중행 원수에 임명된 적이 있어서, 지(智)씨와 중행(中行)씨로 구별하게 된 것이다. 이때부터 순앵을 지앵(智罃)으로 부르고, 순언을 중행언(中行偃)으로 부르게 하여, 군사들이 서로 혼동하는 일이 없게 했다. 이것은 모두 순앵이 군사를 지휘하는 방법이었다.) 단 아래에는 삼군이 나누어 서고, 제1군은 상군 원수 순언, 부장 한기(韓起)와 노(魯), 조(曹), 주(邾) 세 나라 군사들을 속하게 하고, 중군 부장 범개가 지원했다. 제2군은 하군 원수 난염, 부장 사방(士魴)과 제(齊), 등(縢), 설(薛) 세 나라 군사들을 속하게 했으며, 중군 상대부 위힐(魏頡)이 지원했다. 제3군은 신군 원수 조무, 부장 위상(魏相)과 송(宋), 위(衛), 예(郳) 세 나라 군사들을 속하게 하고, 중군 하대부 순회(荀會)가 지원했다.
荀罃傳令:第一次上軍出征,第二次下軍出征,第三次新軍出征。中軍兵將,分配接應,周而復始。但取盟約歸報,便算有功,更不許與楚兵交戰。公子楊干,乃悼公之同母弟,年方一十九歲,新拜中軍戎御之職,血氣方剛,未經戰陣。聞得治兵伐鄭,磨拳擦掌,巴不得獨當一隊,立刻上前廝殺。不見智罃點用,心中一股銳氣,按納不住,遂自請為先鋒,願效死力。智罃曰:「吾今日分軍之計,只要速進速退,不以戰勝為功。分派已定,小將軍雖勇,無所用之。」楊干固請自效。荀罃曰:「既小將軍堅請,權於荀大夫部下接應新軍。」
순앵이 명령하기를, 제1군, 제2군, 제3군의 순서로 출정한다고 했다. 중군의 장병들도 셋으로 나뉘어 윤번제로 지원하며 계속 반복하여 출정하게 했다. 다만 정나라의 맹약을 받아 돌아오는 것을 전공으로 치고, 초군과의 교전을 허락하지 않았다. 공자 양간(楊干)은 진도공의 동모제(同母弟)로 나이가 19세였다. 새로 중군 원수의 융어(戎御 ; 원수의 전차를 모는 사람)로 임명되어, 혈기가 방장하고 전장에 나간 경험이 없었다. 그는 진나라 군사가 정나라를 정벌한다는 소리를 듣고 공을 세우려고 잔뜩 벼르고 있었다. 당장 한 떼의 군사를 단독으로 지휘하여 앞으로 나아가 싸우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지앵(智罃)이 자기를 써 주지 않자 마음속에 한줄기의 혈기가 끓어올라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선봉이 되어 힘을 다해 싸우겠다고 자청했다. 지앵이 말하기를, “내가 지금 군대를 나눈 계책은 다만 빨리 나아가고 빨리 퇴각하기 위해서이지, 싸워 이겨서 전공을 세우자는 게 아니오. 군사를 나누기로 이미 정했으니 소장군이 비록 용감하지만 쓸 곳이 없습니다.” 했다. 양간이 선봉에 서기를 고집하니, 순앵(지앵)이 말하기를, “소장군의 청이 간곡하니, 임시로 중군 하대부 순회(荀會)의 아래에서 신군을 지원하시오.” 했다.
楊干又道:「新軍派在第三次出征,等待不及,求撥在第一軍部下。」智罃不從。楊干恃自家是晉侯親弟,逕將本部車卒,自成一隊,列於中軍副將范匄之後。司馬魏絳奉將令整肅行伍,見楊干越次成列,即鳴鼓告於眾曰:「楊干故違將令,亂了行伍之序,論軍法本該斬首。念是晉侯親弟,姑將僕御代戮,以肅軍政。」即命軍校擒其御車之人斬之,懸首壇下,軍中肅然。楊干素驕貴自恣,不知軍法﹔見御人被戮,嚇得魂不附體,十分懼怕中,又帶了三分羞,三分惱。當下駕車馳出軍營,逕奔晉悼公之前,哭拜於地,訴說魏絳如此欺負人,無顏見諸將之面。
양간이 또 말하기를, “신군은 세 번째로 출병을 하는데 기다릴 수 없으니, 제1군에 넣어 주기 바라오.” 하니, 지앵이 들어주지 않았다. 양간이 자기가 진도공의 친동생이라는 것을 믿고 곧바로 본부의 전차병이 있는 곳으로 가서 직접 한 부대를 편성하여 중군 부장 범개의 뒤에 열을 지어 섰다. 그때 사마 위강이 지앵의 장령을 받들어 대오를 엄하게 단속하다가 양간이 순서를 뛰어넘어 열을 지은 것을 보고 즉시 북을 울려 여러 장병에게 알리기를, “양간이 일부러 장령을 위반하여 대오를 어지럽게 만들었다. 군법을 논하면 이것은 참수형에 해당하는 죄이다. 주군의 친동생이라는 점을 참작하여 그 마부를 대신 참하여 군정을 엄숙히 하겠다.” 하고, 즉시 장교에게 명하여 양간의 마부를 붙잡아 참수하고 그 목을 단상 아래에 거니, 군중이 숙연해졌다. 양간이 교만 방자하여 군법을 몰랐다. 자기의 마부가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서 혼비백산했다. 그는 십분 겁이 났으나, 곧 수레를 몰아 군영을 나가서 진도공 앞으로 달려가 땅에 엎드려 통곡하며 위강이 이렇게 사람을 업신여겨 여러 장수들을 대할 면목을 잃게 만들었다고 호소했다.
悼公愛弟之心,不暇致詳,遂拂然大怒曰:「魏絳辱寡人之弟,如辱寡人。必殺魏絳,不可縱也!」乃召中軍尉副羊舌赤往取魏絳。羊舌赤入宮見悼公曰:「絳志節之士,有事不避難,有罪不避刑,軍事已畢,必當自來謝罪,不須臣往。」頃刻間,魏絳果至,右手仗劍,左手執書,將入朝待罪。至午門,聞悼公欲使人取己,遂以書付僕人,令其申奏,便欲伏劍而死。只見兩位官員,喘吁吁的奔至,乃是下軍副將士魴,主侯大夫張老。見絳欲自刎,忙奪其劍曰:「某等聞司馬入朝,必為楊公子之事,所以急趨而至,欲合詞稟聞主公。不識司馬為何輕生如此?」
진도공이 동생을 생각하는 마음에서 자세하게 알아보지도 않고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위강이 내 동생을 모욕한 것은 나를 모욕한 것과 같다. 반드시 위강을 죽여야지 그대로 두지 않겠다.” 하고, 즉시 중군 부위 양설적을 불러 위강을 잡아오라고 명했다. 양설적이 입궁하여 진도공을 뵙고 말하기를, “위강은 지조와 절개가 있는 사람입니다. 일이 있으면 어려움을 피하지 않으며, 죄가 있으면 형벌을 피하지 않습니다. 군사를 점검하는 일이 이미 끝났으니 반드시 스스로 와서 자기의 죄를 고할 것입니다. 신이 갈 필요는 없습니다.” 했다. 조금 지나자 과연 위강이 도착하여 오른손에 장검을 쥐고 왼손에 상주문(上奏文)을 들고 조당으로 들어가 대죄하려고 했다. 오문(午門 ; 남문)에 이르러 진도공이 사람을 시켜 자기를 잡아오게 했다는 말을 듣고, 즉시 상주문을 종복에게 주어 진도공에게 올리라 명하고는 곧 칼로 자살하려 했다. 바로 그때 두 관원이 헐레벌떡 달려왔는데, 하군 부장 사방(士魴)과 주후대부(主侯大夫) 장로(張老)였다. 위강이 스스로 목을 찌르려는 것을 보고 황급히 칼을 빼앗으면서 말하기를, “사마가 입조한 소식을 듣고, 틀림없이 양간 공자의 일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해서 급히 쫓아온 것이오. 우리가 함께 주공께 아뢸 것이오. 사마는 어찌 목숨을 이처럼 가볍게 여깁니까?” 했다.
魏絳具說晉侯召羊舌大夫之意。二人曰:「此乃國家公事,司馬奉法無私,何必自喪其身?不須令僕上書,某等願代為啟奏。」三人同至宮門,士魴張老先入,請見悼公,呈上魏絳之書。悼公啟而覽之,略云:「君不以臣為不肖,使承中軍司馬之乏。臣聞:「三軍之命,繫於元帥﹔元帥之權,在乎命令。」有令不遵,有命不用,此河曲之所以無功,邲城之所以致敗也。臣戮不用命者,以盡司馬之職。臣自知上觸介弟,罪當萬死!請伏劍於君側,以明君侯親親之誼。」悼公讀罷其書,急問士魴張老曰:「魏絳安在?」魴等答曰:「絳懼罪欲自殺,臣等力止之,見在宮門待罪!」
위강은 진도공이 양설적을 부른 것을 이야기하니, 두 사람이 말하기를, “이 일은 국가의 공적인 일입니다. 사마가 군법을 집행한 일은 사사로운 감정으로 한 일이 아닙니다. 어찌 반드시 자기의 몸을 버리려고 합니까? 종복에게 상주문을 올리게 할 필요 없이 우리가 같이 들어가서 주청을 드리겠습니다.” 했다. 세 사람이 함께 궁문에 이르자, 사방과 장로가 먼저 들어가서 진도공께 뵙기를 청하고, 위강의 상주문을 받쳤다. 진도공이 열어서 보니, 대략 이르기를, “주군께서 신을 불초하게 여기지 않고 중군 사마의 빈자리를 이어받게 하셨습니다. 신은 ‘삼군에 대한 명령은 원수만이 내릴 수 있으며 원수의 권한은 명령을 내리는 데 있다’라고 알고 있습니다. 명령이 내렸는데 지키고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하곡(河曲)에서는 공을 이룰 수 없었고, 필성(邲城)에서 패했습니다. 신이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를 군법으로 처단한 행위는 사마의 직책에 충실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신은 주군의 동생 되는 사람을 욕보여 그 죄가 만 번 죽어 마땅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원하옵건대 주군 앞에서 스스로 죽을 수 있도록 허락하시어 주군의 동기간 정을 밝히기 바랍니다.” 했다. 진도공이 상주문을 다 읽고 나서, 사방과 장로에게 급히 묻기를, “지금 위강은 어디 있소?” 하니, 사방 등이 대답하기를, “위강이 지은 죄를 두려워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하여, 신 등이 말려 궁문 밖에서 대죄하고 있습니다.” 했다.
悼公悚然起席,不暇穿履,遂跣足步出宮門,執魏絳之手,曰:「寡人之言,兄弟之情也﹔子之所行,軍旅之事也。寡人不能教訓其弟,以犯軍刑,過在寡人,於卿無與,卿速就職。」羊舌赤在旁大聲曰:「君已恕絳無罪,絳宜退!」魏絳乃叩謝不殺之恩。羊舌赤與土魴張老,同時稽首稱賀曰:「君有奉法之臣如此,何患伯業不就?」四人辭悼公一齊出朝。悼公回宮,大罵楊干:「不知禮法,幾陷寡人於過,殺吾愛將!」使內侍押往公族大夫韓無忌處,學禮三月,方許相見。楊干含羞鬱鬱而去。髯翁有詩云:「軍法無親敢亂行,中軍司馬面如霜﹔悼公伯志方磨勵,肯使忠臣劍下亡?」
도공이 두려워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신발도 신지 않고 맨발로 궁문 밖으로 나가 위강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과인이 한 말은 형제지간의 사사로운 정이고, 그대의 행동은 군사에 관한 공적인 행위요. 내가 동생 교육을 잘못시켜서 군법을 범하게 했으니 과실은 나한테 있지, 경과는 무관한 일이라 하겠소. 경은 속히 일어나 직책을 다하도록 하시오!” 했다. 양설적이 진도공의 옆에 서 있다가 큰 소리로 말하기를, “주군께서 이미 위강이 죄가 없다고 하셨으니 위강은 속히 물러가시오!” 했다. 위강이 즉시 머리를 조아려 죽이지 않은 은혜에 감사했다. 양설적과 사방, 장로가 동시에 머리를 조아려 축하하며 이르기를, “주군께서 이같이 법을 지키는 신하를 두셨으니 어찌 패업이 이루어지지 못할까 걱정하겠습니까?” 했다. 네 사람이 일제히 진도공에게 인사를 하고 조당을 나갔다. 진도공이 궁으로 돌아와서 양간을 크게 꾸짖기를, “네가 예법을 알지 못하여 하마터면 나를 과실에 빠뜨려서 훌륭한 장수를 죽일 뻔했다.” 하고, 내시를 시켜 양간을 공족대부(公族大夫) 한무기(韓無忌)에게 압송하여 석 달 동안 예를 배운 후에 상면할 것을 허락했다. 양간이 부끄러운 기색을 띠고 물러났다. 염옹이 시를 지어 이르기를, “군법에는 육친도 없거늘 감히 어지럽히려 했으니, 중군 사마의 얼굴이 추상같았다. 진도공이 패업을 이루려고 애를 썼으니, 충신이 칼 아래 죽도록 했겠는가?” 했다.
智罃定分軍之令,方欲伐鄭。廷臣傳報:「宋國有文書到來。」悼公取覽,乃是楚鄭二國相比,屢屢興兵,侵掠宋境,以偪陽為東道,以此告急。上軍元帥荀偃請曰:「楚得陳鄭而復侵宋,意在與晉爭伯也。偪陽為楚伐宋之道,若興師先向偪陽,可一鼓而下。前彭城之圍,宋向戌有功,因封之以為附庸,使斷楚道,亦一策也。」智罃曰:「偪陽雖小,其城甚固,若圍而不下,必為諸侯所笑。」中軍副將士匄曰:「鼓城之役,我方伐鄭,楚則侵宋以救之。虎牢之役,我方平鄭,楚又侵宋以報之。今欲得鄭,非先為固宋之謀不可。偃言是也。」
지앵이 군사를 나누어 바야흐로 정나라를 치려고 했다. 궁정의 신하가 보고하기를, “송나라에서 국서를 보냈습니다.” 했다. 진도공이 받아서 보니, 초나라와 정나라가 서로 합심하여 여러 번 군사를 일으켜 송나라 경계를 침략하고, 복양(偪陽)을 동쪽 길로 삼았다고 위급함을 알려온 것이었다. 상군 원수 순언이 청하기를, “초나라가 진(陳)나라와 정나라를 얻어 다시 송나라를 침범하니 그 뜻은 진(晉)나라와 방백을 다투려는 데에 있습니다. 복양은 초나라가 송나라를 정벌하는 길목입니다. 만약 우리가 군사를 일으켜 먼저 복양으로 진격하면 한번 북을 쳐서 함락할 수 있습니다. 지난날 팽성을 공격할 때 송나라의 상술(向戌)이 공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를 그곳에 봉해 송나라의 부용(附庸)으로 삼아, 그를 시켜 초나라의 길을 차단하게 하는 것도 한 가지 계책입니다.” 하니, 지앵이 말하기를, “복양은 비록 작지만 그 성이 매우 견고하여 만약 포위해도 함락되지 않는다면 틀림없이 제후들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오.” 했다. 중군 부장 사개(범개)가 말하기를, “팽성의 싸움은 우리가 정나라를 정벌하자 초나라가 송나라를 침략하여 정나라를 구하려고 했기 때문에 일어났습니다. 호뢰(虎牢)의 싸움은 우리가 정나라를 평정하자 초나라가 다시 송나라를 침입하여 그 원수를 갚으려고 해서 일어난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정나라를 얻고자 한다면 먼저 송나라를 단단히 해놓아야 합니다. 순언의 말이 옳습니다.” 했다.
荀罃曰:「二子能料偪陽必可滅乎?」荀偃士匄聲應曰:「都在小將二人身上。如若不能成功,甘當軍令!」悼公曰:「伯游倡之,伯瑕助之,何憂事不濟乎?」乃發第一軍往攻偪陽,魯、曹、邾三國皆以兵從。偪陽大夫妘斑獻計曰:「魯師營於北門,我偽啟門出戰,其師必入攻﹔俟其半入,下懸門以截之。魯敗,則曹邾必懼,而晉之銳氣亦挫矣。」偪陽子用其計。卻說,魯將孟孫蔑率其部將叔梁紇、秦堇父、狄虒彌等攻北門,只見懸門不閉,堇父同虒彌恃勇先進,叔梁紇繼之。忽聞城上豁喇一聲,將懸門當著叔梁紇頭頂上放將下來。紇即投戈於地,舉雙手把懸門輕輕托起。
순앵(지앵)이 말하기를, “두 사람은 복양을 틀림없이 함락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하니, 순언과 사개가 대답하기를, “모든 책임은 우리 두 사람이 지겠습니다. 만약 성공하지 못하면 군령을 달게 받겠습니다!” 했다. 진도공이 말하기를, “백유(순언)가 주장하고 백하(사개)가 도우면 어찌 일이 안 될까 걱정하겠는가?” 했다. 즉시 제일군을 복양으로 가서 공격하게 하고, 노(魯), 조(曹), 주(邾) 3국의 병사들도 모두 그 뒤를 따랐다. 한편, 복양 대부 운반(妘斑)이 계책을 올려 말하기를, “노나라 군사가 북문 밖에 영채를 세웠습니다. 우리가 문을 열고 나가서 싸우는 척하면, 그 군사들이 반드시 공격하여 성안으로 들어올 것입니다, 그들이 반쯤 들어오기를 기다려서 현문(매달린 성문)을 떨어뜨려 노나라 군사를 반으로 자르겠습니다. 노나라 군사가 패하면 조나라와 주나라 군사도 틀림없이 두려워할 것이고, 그러면 진(晉)나라의 예기가 꺾일 것입니다.” 하니, 복양의 군주가 그 계책을 따랐다. 한편, 노나라의 장군 맹손멸(孟孫蔑)은 그 부장 숙량흘(叔梁紇), 진근보(秦菫父), 적사미(狄虒彌) 등을 인솔하여 복양성 북문을 공격하니 현문이 닫히지 않아서 진근보와 적사미가 용감하게 먼저 진격하고, 숙랼흘이 뒤를 이었다. 갑자기 성 위에서 큰 소리가 나면서 현문이 숙량흘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려왔다. 숙량흘이 즉시 과를 땅에 던지고 두 손을 들어 현문을 가볍게 떠받쳤다.
後軍就鳴金起來。堇父虒彌二將,恐後隊有變,急忙回身。城內鼓角大振,妘斑引著大隊人車,尾後追逐。望見一大漢,手托懸門,以出軍將。妘斑大駭,想道:「這懸門自上放下,不是千斤力氣,怎抬得住?若闖出去,反被他將門放下,可不利害!」且自停車觀望。叔梁紇待晉軍退盡,大叫道:「魯國有名上將叔梁紇在此!有人要出城的,趁我不曾放手,快些出去!」城中無人敢應。妘斑彎弓搭箭,方欲射之。叔梁紇把雙手一掀,就勢撒開,那懸門便落了閘口。紇回至本營,謂堇父虒彌曰:「二位將軍之命,懸於我之兩腕也。」
후군이 징을 울리자 진근보와 적사미 두 장군이 후대에 변고가 있는 줄 알고 두려워하여 급히 방향을 돌렸다. 그러자 성안에서 북소리와 나팔 소리가 크게 진동하더니 운반이 한 무리의 병졸과 전차를 이끌고 뒤를 추격해 왔다. 멀리 쳐다보니 한 거인이 현문을 손으로 받치고 노나라의 군졸들과 장수들을 밖으로 내보내고 있었다. 운반이 크게 놀라 생각하기를, ‘저 현문은 위에서 떨어뜨리는 것이라 천근의 힘이 아니면 어떻게 버티겠는가? 만약 밀고 나갔다가 도리어 저 장수가 문을 내려놓으면 이로울 게 없다.’ 하고, 잠시 전차를 멈추고 관망했다. 숙량흘은 진나라와 노나라 군사가 모두 성 밖으로 빠져나오기를 기다려 큰소리로 외치기를, “노나라의 유명한 상장 숙량흘이 여기 있다. 성 밖으로 나가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내가 손을 떼기 전에 빨리 나가라!” 했다. 그러나 성안의 아무도 그 말에 감히 반응하지 않았다. 운반이 활에 화살을 장전하여 숙량흘을 향하여 쏘려는 순간 숙량흘은 두 손을 놓으니, 현문이 땅으로 떨어져 문이 닫혔다. 숙량흘이 본영으로 돌아와 진근보와 적사미에게 말하기를, “두 분 장군의 목숨은 저의 양팔에 달려 있었소,”했다.
堇父曰:「若非鳴金,吾等已殺入偪陽城,成其大功矣。」虒彌曰:「只看明日,我要獨攻偪陽,顯得魯人本事。」至次日,孟孫蔑整隊向城上搦戰,每百人為一隊。狄虒彌曰:「我不要人幫助,只單身自當一隊足矣。」乃取大車輪一個,以堅甲蒙之,緊緊束縛,左手執以為櫓﹔右握大戟,跳躍如飛。偪陽城上,望見魯將施逞勇力,乃懸布於城下,叫曰:「我引汝登城,誰人敢登,方見真勇。」言猶未已,魯軍隊中一將出應曰:「有何不敢!」此將乃秦堇父也。即以手牽布,左右更換,須臾盤至城堞。
진근보가 말하기를, “만약 징을 울리지 않았으면 우리가 복양성 안으로 쳐들어가서 큰 공을 이루었을 것이오.” 했다. 적사미도 말하기를, “내일 내가 혼자서 복양을 공격하여 노나라 사람의 본때를 보여 줄 테니 잘 보시오.” 했다. 다음 날이 되자 맹손멸이 대오를 다시 정비하여 백 명씩을 일대로 하여 성 위를 향하여 싸움을 걸게 했다. 적사미가 말하기를, “제가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단신으로 공격해 보이겠습니다.” 하고, 이에 큰 전차 바퀴 한 개를 뽑아서 그 위에 갑옷을 둘러씌워 단단히 묶어서 방패로 삼아 왼손에 들고 오른손에는 자루가 긴 창을 잡은 후에 날 듯이 뛰어올랐다. 복양성 위에서 노나라 장군이 용력을 뽐내는 것을 보고 베 한 필을 풀어서 내려뜨리고 외치기를, “우리가 너희들을 성에 오르게 끌어주겠다. 누가 감히 오른다면 진정한 용기를 보여 주는 것이다.” 했다. 말이 미처 끝나기 전에 노나라 군사 중에서 한 장군이 응해 나서면서 말하기를, “어찌 감히 할 수 없겠는가?” 했다. 그 장군은 바로 진근보였다. 곧 손으로 베를 끌어 잡고 손을 좌우로 바꿔 가며 삽시간에 성가퀴에 이르렀다.
偪陽人以刀割斷其布,堇父從半空中蹋將下來。偪陽城高數仞,若是別人,這一跌,縱然不死,也是重傷。堇父全然不覺。城上布又垂下,問道:「再敢登麼?」堇父又應曰:「有何不敢!」手借布力,騰身復上。又被偪陽人斷布撲地,又一大跌。纔爬起來,城上布又垂下,問道:「還敢不敢?」堇父聲愈厲,答曰:「不敢不算好漢!」挽布如前。偪陽人看見堇父再墜再登,全無畏懼,倒著了忙。急割布時,已被堇父撈著一人,望城下一摔,跌個半熟。
복양성의 군졸이 칼로 베를 자르자 진근보가 허공에서 곤두박질쳐서 떨어 졌다. 복양성 높이가 여러 길이라 다른 사람 같으면 한번 떨어져 죽지 않았더라도 중상을 입었을 것이었다. 그러나 진근보는 전연 아무렇지 않았다. 성 위에서 다시 베를 늘어뜨리면서 묻기를, “감히 다시 올라오겠느냐?” 하니, 진근보가 또 응하여 말하기를, “어찌 감히 오르지 못하겠는가.” 하고, 손으로 베를 잡고 성을 다시 올라갔다. 다시 복양성 군사들이 베를 잘라 진근보가 땅에 떨어졌다. 또 넘어졌지만 곧 다시 일어났다. 성 위에서 베를 또 늘어뜨리며 묻기를, “다시 감히 해 보겠느냐?” 하니, 진근보가 더욱 큰 소리로 대답하기를, “감히 하지 못한다면 사내가 아니다.” 하고, 전처럼 베를 잡고 올랐다. 복양성의 군사들이 진근보가 다시 떨어졌다가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다시 오르는 것을 보고 당황하여 급히 베를 잘랐다. 그러나 그때 이미 진근보가 군사 한 사람을 붙잡아 성 아래로 던져 버리니, 반죽음이 되었다.
堇父亦隨布墜下,反向城上叫道:「你還敢懸布否?」城上應曰:「已知將軍神勇,不敢復懸矣。」堇父遂取斷布三截,遍示諸隊,眾人無不吐舌。孟孫蔑嘆曰:「詩云:『有力如虎。』此三將足當之矣!」妘斑見魯將兇猛,一個賽一個,遂不敢出戰,吩咐軍民竭力固守。各軍自夏四月丙寅日圍起,至五月庚寅,凡二十四日,攻者已倦,應者有餘。忽然天降大雨,平地水深三尺,軍中驚恐不安。荀偃士匄慮水患生變,同至中軍來稟智罃,欲求班師。
진근보도 역시 잘린 베와 함께 성 밑으로 떨어졌으나, 도리어 성 위를 향해 외치기를, “다시 베를 드리워 줄 테냐?” 하니, 성 위에서 응답하기를, “장군의 뛰어난 용기를 알게 되었습니다. 감히 베를 다시 내릴 수 없습니다.” 했다. 진근보는 곧 잘린 베 세 자락을 들고 와서 군사들에게 보여 주니, 군사들이 혀를 내두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맹손멸이 찬탄하기를, “<시경>에 이르기를, ‘힘이 호랑이 같다.’라고 했는데, 이 세 장군에게 족히 해당하는 말이다!” 했다. 운반이 노나라 장수들이 하나같이 흉맹함을 보고, 감히 성 밖으로 출전하지 못하고 군민들에게 힘을 다해 굳게 지키라고 분부했다. 각 제후의 군사들이 4월 병인(丙寅) 일에 포위하여 5월 경인(庚寅) 일까지 무릇 24일이 되니, 공격하는 측은 이미 지쳤으나 수비하는 측은 여유가 있었다. 갑자기 하늘에서 큰비가 내려 평지의 물 깊이가 석 자가 되니 군사들이 놀라서 불안해했다. 순언과 사개는 물난리로 무슨 변이 생기지나 않을까 걱정하여 함께 중군 원수를 찾아가 지앵(순앵)에게 회군하기를 청했다.
不知智罃肯聽從否,再看下回分解。
지앵이 기꺼이 듣고 따를지 모르겠구나. 다음 회를 보면 풀릴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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