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 子曰 關雎 樂而不淫 哀而不傷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시경(詩經)의 관저편는 즐거워하면서도 음란하지 않고, 슬퍼하면서도 상심하게 하지 않는구나.”라고 하셨다. ○ 「關雎」, 「周南國風」詩之首篇也. 淫者, 樂之過而失其正者也. 傷者, 哀之過而害於和者也. 「關雎」之詩, 言后妃之德, 宜配君子. 求之未得, 則不能無寤寐反側之憂; 求而得之, 則宜其有琴瑟ㆍ鐘鼓之樂. 蓋其憂雖深而不害於和, 其樂雖盛而不失其正. 故夫子稱之如此, 欲學者玩其辭, 審其音, 而有以識其性情之正也. 관저는 주남 국풍으로 시경의 첫 편이다. 淫이라는 것은 즐거워함이 지나쳐 그 올바름을 잃은 것을 말한다. 傷이라는 것은 슬퍼함이 지나쳐 조화에 해가 되는 것을 말한다. 관저라는 시는 황후의 덕이 마땅히 군자와 짝 되어야 함을 말한 것이다. 구하였지만 얻지 못하면, 곧 자나 깨나 전전반측하는 근심이 없을 수가 없는 것이다. 구하여서 얻으면, 곧 금슬과 종고의 즐거움이 있는 것이 마땅한 것이다. 대개 그 근심이 비록 깊기는 하지만, 조화에 해가 되지 않고, 그 즐거움이 비록 성대하기는 하지만, 그 올바름을 잃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공자께서 이를 칭찬하기가 이와 같았으니, 배우는 자가 그 말씀을 음미하고 그 음을 살펴서 그 성정의 올바름을 알 수 있기를 바라신 것이다. 朱子曰 此詩看來是宮中人作 所以形容到寤寐反側 外人做不到此 樂止於琴瑟鐘鼓 是不淫也 若沈湎淫泆 則淫矣 憂止於展轉反側 是不償也 若憂愁哭泣 則傷矣 此是得性情之正 주자가 말하길, “이 시는 보기에 궁중의 사람이 지은 것 같다. 그래서 寤寐反側까지 형용한 것이다. 외인이라면 이렇게까지 할 수가 없다. 즐거움이 琴瑟과 鐘鼓에 그친다면, 이는 지나치지 않은 것이다. 만약 깊이 빠져서 방탕하다면, 이는 지나친 것이다. 근심이 輾轉反側에 그친다면, 마음이 상하지 않는 것이다. 만약 근심하고 걱정하여 울고불고한다면, 마음이 상하는 것이다. 이 시는 바로 性情의 올바름을 얻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問關雎 樂而不淫 哀而不傷 是時人性情如此 抑詩之詞意如此 曰 是有那情性 方有那詞氣聲音 누군가 묻기를, “관저라는 시는 즐거워하되 지나치지 않고, 슬퍼하되 마음이 상하지는 않는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시인의 성정이 이와 같다는 것입니까? 아니면 시의 말뜻이 이와 같다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말하길, “저 성정이 있어야만, 바야흐로 저 싯귀의 기운과 소리가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關雎是樂之卒章 故曰 關雎之亂 亂者樂之卒章也 故楚辭有亂 曰是也 前面須更有 但今不可考耳 관저는 악의 마지막 장이다. 그래서 (공자께서 태백 15장에서) 말하길, 관저의 亂이라 말한 것이니, 亂이라는 것은 악의 마지막 장인 것이다. 그러므로 초사에도 亂이 있으니, 이것을 말한 것이다. 앞면에 모름지기 더 있었을 것이나, 다만 지금은 상고할 수 없을 뿐이다. |
2 | 南軒張氏曰 哀樂情之爲也 而其理具於性 哀而至於傷 樂而至於淫 是則情之流而性之汨矣 樂而不淫 哀而不傷 發不踰 則性情之正也 非養之有素者 其能然乎 남헌장씨가 말하길, “哀와 樂은 情이 만드는 것이나, 그 이치는 性에 갖추어져 있으니, 슬퍼하되 마음이 傷하는 지경에 이르고, 즐거워하되 지나친 지경에 이른다면, 이는 곧 情이 흘러 빠져서 性이 잠겨버린 것이다. 즐거워하면서도 지나치지 않고, 슬퍼하면서도 마음이 상하지 않는다면, 발현됨이 도를 넘지 않아서, 성정이 올바른 것이다. 수양하기를 평소 함이 있는 자가 아니라면, 어찌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胡氏曰 觀詩之法 原其性情 玩其辭語 審其聲音而已 今性情難知 聲音不傳 惟辭語可玩味爾 然因其辭語 可以知其性情 至於播之長言 被之管弦 則聲音亦略可見矣 호씨가 말하길, “시를 살펴보는 법은 그 性情을 推原하고 그 싯구를 음미하며 그 소리를 살피는 것일 따름이다. 지금 성정은 알기 어렵고, 소리는 전해지지 않으니, 오직 辭語만 음미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辭語를 바탕으로 그 성정을 알 수 있고, 그것을 소리 높여 노래를 부름에 퍼뜨리고 관현의 악기에 입히는 지경에 이른다면, 소리 또한 대략이나마 알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慶源輔氏曰 哀樂情也 未發則性也 由性之正 故發乎情 亦正 경원보씨가 말하길, “슬퍼함와 樂즐거워함은 情이지만, 아직 발현되지 않았다면 性이다. 性의 올바름을 말미암기 때문에, 情에 발현된 것도 역시 올바른 것이다.”라고 하였다. 雙峯饒氏曰 自他詩觀之 言憂者常易至於悲傷 如澤陂之詩曰 有美一人 傷如之何 寤寐無爲 涕泗滂沱 是也 言樂者 常易至於淫泆 如溱洧之詩曰 洧之外 詢訏且樂 惟士與女 伊其相虐 贈之以芍藥 是也 惟關雎之詩 最得性情之正 쌍봉요씨가 말하길, “다른 시로부터 살펴보자면, 근심을 말한 것은 항상 슬퍼하여 마음이 상함의 지경에 이르기가 쉬운데, 예를 들자면, 택피의 시에서 말하길, ‘아름다운 저 한 사람이 있으니, 내 마음이 상함을 그 어찌하리요! 오매불망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눈물콧물 다 흘린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즐거움을 말하는 것은 항상 방탕하고 지나친 지경에 이르기가 쉬우니, 예컨대 溱洧의 시에서 말하길, ‘洧水 밖에는 매우 넓고 즐거운 곳이니, 남자와 여자가 더불어 서로 희롱하며, 작약꽃을 선물하는구나!’라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오직 關雎의 시만이 성정의 올바름을 제일 잘 터득하였다.”라고 하였다. 雲峯胡氏曰 集註於思無邪曰 使人得其性情之正 指凡詩之用而言 此則曰有以識性情之正 獨指關雎之詩而言 蓋樂不淫哀不傷 是詩人性情之正也 鄭衛之詩 樂過而淫 哀過而傷 則亦有非性正之正者矣 然讀者於此 有所懲創 則亦可以得其性情之正 集註前後可以參看 운봉호씨가 말하길, “집주는 思無邪에서 말하길, 사람으로 하여금 그 성정의 올바름을 얻게 한다고 하였는데, 이는 모든 시의 활용을 가리켜서 말한 것이다. 여기에서는 성정의 올바름을 알 수 있다고 말하였는데, 이는 관저라는 시 하나만을 가리켜서 말한 것이다. 대체로 즐거워하되 지나치지 않고, 슬퍼하되 마음이 상하지 않는 것은 바로 시인의 성정이 올바르기 때문이다. 정나라와 위나라의 시는 즐거워하되 지나쳐서 방탕하게 되고, 슬퍼하되 지나쳐서 마음이 상하게 되니, 역시 성정의 올바름이 아닌 것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독자가 여기에서 자신을 징계하여 혼내는 바가 있다면, 또한 그 성정의 올바름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집주는 앞뒤를 참고하여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勉齋黃氏曰 先生晩年再改削集註止於此章 면재황씨가 말하길, “선생(주자)께서 말년에 집주를 다시 고쳐 刪削한 것은 이 장에 그쳤다.”라고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