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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9 0 7 1 2 제주 국제 아이언맨 대회. 120Km 지점 돈내코 언덕을 오르는 모습
TOTAL 16:28:32. SWIM 1:45:51. BIKE.7:49:29. RUN 6:35:27
창밖으로 애메랄드 빛 푸른 바다가 보였다.
보석처럼 반짝이는 수면위에 작은 조각배가 하나 떠 있었다.
비행기가 착지를 끝내자 금연 사인이 꺼지고 스피커에서 승무원의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나는 좌석 벨트를 풀고 일어나며 다시 창밖을 보았다.
1998년 여름이 그대로 창밖에 있었다.
11년이란 세월이 과거로 흘러가버린 지금에도 나는 그 초원의 풍경을 그대로 기억해 낼 수 있었다.
며칠인가 계속된 비로 그동안 쌓여 있던 먼지를 싹 씻어 낸 산등성이는 깊고 청명한 푸르름을 띠고,
여기저기 돋은 억새풀은 8월의 바람에 흩날리고, 길고 가느다란 구름이 얼어붙을 듯 푸른 산꼭대기에 착 걸려 있었다.
하늘은 높아, 지그시 바라보고 있노라면 눈이 아파질 정도였다.
바람은 초원을 질러,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볍게 나부끼며 나무 사이로 빠져나갔다.
기억이라고 하는 것은 왠지 불가사의한 것이다.
그 당시 내게는 풍경 같은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는 그런 것이었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하여 생각하고, 그때 내 옆을 나란히 걷고 있던 한 예쁘장한 여자애에 대해 생각하고,
나와 그녀를 생각하고, 그리고 또 나 자신을 생각했다.
그것은 무엇을 보아도 무엇을 느껴도 무엇을 생각해도,
결국은 모든 것이 부메랑처럼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그런 시절이었던 것이다.
......
숙소에 도착해 짐을 풀고 서둘러 수영도구를 챙겨 바다로 나왔다.
이글거리는 태양, 바람 한점 없는 날씨, 용광로처럼 달궈진 백사장을 까치발을 세우고 엉거주춤 걸었다.
온몸에 비 오듯이 땀이 흘렀다.
설레이는 가슴으로 바다를 바라보았다.
3.8Km.
돌아와야 할 부표가 보일 듯 말 듯 까마득하다.
수영이 끝나면 악마 같은 마의 코스를 사이클(180.2Km)로 통과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 42.195Km를 달리면 대회가 끝난다.
나는 다음 날 있을 대회를 생각하며 출발부터 마지막까지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바다에서의 수영은 자연과의 솔직한 교감이다.
사이클은 인간이 만든 가장 친화적인 기계(물질)와 또 다른 교감이다,
그리고,
달리기는 순수한 나 자신과의 기나긴 싸움이다.
바다가 나에게 물었다.
"이렇게 힘든 운동을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가 대답했다.
"지은 죄가 많아 속죄하는 겁니다."
"무슨 죄를 그리 많이 지었습니까?"
"자동차를 타고 다니면서 공기를 오염시켰습니다"
"돈을 벌었으면서도 이웃을 돕지 않았습니다."
"정의를 위해 용감하지 못하고 때론 비겁했습니다."
"질서를 지키지 않고 교통신호를 무시했습니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 가족을 소홀히 했습니다."
"세상의 유혹에 빠져 자신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시간을 낭비했습니다."
하얀 이를 드러낸 파도가 모든 것을 삼켜버릴 듯이 끊임없이 달려들고 있었다.
준비는 되었다.
출발이 중요하다.
다시 올 수 없을 지도 모르는 마지막 축제
모든 것을 내던지고 신명나게 한판 즐기며 노는 거다.
그렇게 생각했지만,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으르렁거리며 포효하는 파도소리에 좀처럼 긴장이 멈추지 않았다.
하나 둘 셋...
숫자를 세며 호흡을 다듬었다.
그러자 마음속에 길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긴장되었던 마음이 풀리면서 편안해지는 것 같았다.
파도를 향해 걸어나갔다.
큰 파도가 올 때까지 멈추지 않고 계속 나갔다.
파도를 뚫어야만 앞으로 나갈 수 있다.
파도 속으로 들어가는 거야.
주문을 외우듯이 중얼거리며 큰 파도가 올 때 까지 계속 앞으로 진격했다.
물이 허리쯤 찼을 때 드디어 집채만한 파도가 불쑥 솟아올랐다.
삼켜버릴 듯이 달려드는 파도를 행해 몸을 던졌다.
믈랙홀에 빨려 들어가버린 것처럼 파도는 순식간에 몸을 훑고 지나갔다.
짧은 시간에 여러 가지 압축된 영상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타임머신을 타면 이런 느낌일까?
부서진 파도가 발끝을 스치고 나면 파도는 다시 밀려왔다.
정신없이 그렇게 가고 있을 때 해파리가 여유롭게 유영하는 모습이 보였다.
어느새 수심이 깊어지고 해변에서 멀리 나와 있었다.
바다 밑은 봄의 새싹 같은 푸른 색이었다.
물 위와 다를 것이 없었지만 고요했다.
햇빛을 받은 모래가 반짝이면 무지게가 보였다.
작은 물고기떼가 함께 모여 다니는 모습이 평화로웠다.
두 번째 코너를 돌 때까지 앞에 가는 선수의 뒤를 따랐다.
손이 몇 번 발에 닿았지만 추월하지 않았다.
최대한 힘을 아낄 생각이었다.
해변이 가까워지자 하이얏트호텔쪽으로 조류가 빠르게 흐르고 있었다.
레인을 따라서 가야지 하고 생각을 하는 순간 파도가 몸을 덮쳤다.
순식간에 쓸리더니 어느새 조류에 밀리고 있었다.
결국, 코스에서 떨어져 하이얏트쪽 해변으로 나와야 했다.
50분.
드래프팅 효과를 본 것일까?
만족한 기록이었다.
두 번째 바퀴는 레인에 가까이 붙어 출발했다.
언제나 그랬듯이 수영이 약한 선수들이 레인에 가까이 있었다.
추월하지 않고 뒤를 따라가다 보니 속도가 나지 않았다.
발끝에 손이 닿기를 몇 번 과감하게 추월을 시도했다.
역시 숨이 차올랐다.
무리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파도가 좀처럼 잦아들지 않고 점점 거칠어지고 있었다.
코스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 계속 레인을 보며 가까이 붙었다.
바다 깊이 잠겼던 레인이 수면위로 솟구치며 요동쳤다.
해변 가까이엔 성난 파도가 이미 진군해 있었다.
조류도 처음과 달리 빠르게 흐르고 있었다.
조류를 뚫어야만 밀리지 않고 해변에 닿을 수 있었다.
따라오는 파도에 몸을 내주기를 몇 번 순간 기적처럼 해변에 닿아있었다.
지옥 같은 바다에서 사투 끝에 드디어 탈출하는 순간이었다.
1시간 45분.
1시간 40분을 목표로 했지만, 파도를 가만하면 만족한 기록이었다.
기록보다도 소중한 건 바다수영의 느낌을 알게 된 것이다.
이젠 아무리 파도가 높고 너울이 심해도 겁내지 않고 수영할 수 있다는 자신이 생겼다.
기록보다 더 큰 수확이었다.
"춘천에 도착하면 저하고 커피나 한잔하실까요."
남자는 반드시 여자와 춘천에 도착하면 커피를 한잔 마셔야만
국가발전을 도모할 수 있다고 굳게 확신하고 있는 사람 같았다.
그러나 여자는 묵묵부답이었다.
나는 남자에게 자리라도 양보해 주어야 할 것 같은 부담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남자는 이제 고장 난 녹음기처럼 자꾸 같은 대사를 되풀이하고 있었다.
"춘천에 도착하면 저하고 커피나 한잔하실까요."
정말로 끈질긴 근성을 가지고 있는 남자였다.
"춘천에 도착하면 저하고 커피나 한잔하실까요."
아직도 목소리는 자신감을 잃지 않고 있었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가 있다면 전기톱으로 잘라서라도 넘어뜨리고야 말겠다는 태세였다.
여자는 그제서야 피곤한 표정으로 남자를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무어라는 물고기를 아세요.”
여자가 남자에게 물었다.
“문어 말입니까.”
남자가 어눌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문어가 아니라 무어예요.”
“그런 물고기도 있습니까.”
“모르시는군요. 만약에 무어라는 물고기를 아신다면 커피를 백 잔이라도 같이 마셔 드릴 작정이었는데요."
"어떻게 생긴 물고기입니까.”
“춘천에만 살고 있는 물고기인데, 평소에는 물 속을 헤엄쳐 다니지만
안개가 짙은 날은 안갯속을 헤엄쳐 다니지요.
아시다시피 춘천에는 세 개의 댐이 축조되어 있어요.
물론 전자제품을 팔아먹는 사람들은 댐을 좋아하시겠지요,
전기를 생산해 내는 축조물이니까요.
하지만, 댐은 물고기들의 입장에서 보면 종신형 감옥이에요.
댐이 생기기 전에는 모든 물고기가 여러 갈래의 강줄기를 상하류로 자유롭게 헤엄쳐 다닐 수가 있었지만,
댐이 생기고 나서부터는 한정된 수역 속에서만 살게 되었죠.
의암호에서 사는 물고기는 종신토록 의암호에서만 살아야 하고,
춘천호에서 사는 물고기는 종신토록 춘천호에서만 살아야 하고,
소양호에서 사는 물고기는 종신토록 소양호에서만 살아야 해요.
하지만, 무어는 달라요. 모든 댐을 넘나들면서 살 수가 있지요.
안갯속을 헤엄쳐 다니는 특성을 지니고 있으니까요.”
이외수 장편소설 '황금비늘' 중에서
수영 출발. 10년 만에 가장 높았다는 파도를 뚫고...
작가는 소설 속에서 무원동에는 '금선어'라는 물고기가 살고 있다고 했다.
무원동은 천지의 기운만으로도 모든 생명체가 불로장생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이곳에 사는 동식물은 세속에 나오면 대부분 바스라져 버리거나 기화되어 버린는데 이는 서로 기운이 조화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세속에서도 그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금선어라는 물고기였다.
금선어는 안갯속을 헤엄쳐 다니는 물고기였다.
안개가 짙은 날에는 이따금 무원동 바깥으로 헤엄쳐 나오기도 하지만, 절대로 인간들 앞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세속의 인간들이 발산하는 기운을 가장 꺼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혼이 투명한 인간 앞에는 자주 나타난다고 했다.
나는 금선어를 꼭 한번 만나고 싶었다.
오늘처럼 짙은 안개가 부유하는 날이면 어디선가 황금빛을 반짝이며 안갯속을 헤엄치는 금선어를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은 내 영혼이 맑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이기도 했다.
출발은 좋았다.
성산까지 이어지는 뒷바람에 실려 마치 하늘은 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 기분도 잠시 한라산 방향으로 방향을 틀자 이곳은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맞바람과 옆바람이 몸을 날려버릴 듯이 불어닥쳤다.
속도는 고작 17에서 18에 머물러 있었다.
순간 당황이 되었으나 지난해 와는 달랐다.
힘이 남아 있었다.
바람을 이기려 하지 말자.
후반을 위해 힘을 아껴야 해.
기아를 올리고 천천히 페달을 밟았다.
속도가 느려지자 한결 마음이 여유로웠다.
지옥 같았던 바다의 기억에서 조금씩 깨어나고 있었다.
스페셜 푸드지점에서 체력을 보충하니 다시 날아갈 것 같았다.
여유롭게 담배를 피고 있는 창호 씨를 뒤로 하고 쌩하고 달렸다.
페달이 가벼웠다.
기분이 좋았다.
마의 돈내코 언덕을 편안하게 올랐다.
2004년 언덕 정상에서 긴장을 푸는 순간 다리에 쥐가 나 사이클과 함께 쓰러진 기억이 났다.
언덕 중간에서 응원을 하며 사진을 찍는 혜연에게 환한 미소를 보여주는 여유를 보였다.
돈내코를 지나고 롤러코스터가 시작되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은 하늘로 솟아 있었다.
거센 바람이 불었다.
물고기 냄새가 나는 짙은 안개가 부유하고 있었다.
어쩌면 이곳에서 금선어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황금비늘을 달고 안갯속을 헤엄쳐 다니는 물고기.
그를 볼 수 있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소망하며 페달을 저었다.
앞을 분간할 수 없는 짙은 안갯속으로 몸이 날아갈 것만 같은 바람이 불었다.
그때 작은 불빛 하나가 보였다.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황금빛을 반짝이며 점점 선명한 모습으로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사이클을 마친 선수들이 달리기를 하고 있었다.
달리는 풍경은 고장 난 속도계처럼 모든 것이 느리게 작동하고 있었다.
편안하고 여유로웠다.
피니쉬 지점을 향해 질주하는 나의 사이클은 상대적으로 빛의 속도였다.
이렇게 빠르게 느껴본 적은 처음이었다.
오르막을 오를 때는 그렇게도 힘이 들었는데
피니쉬 지점을 몇 키로 남기자 처음 출발 할 때 처럼 갑자기 힘이 솟았다.
묘한 일이다.
그러고 보면 긍정과 희망 앞에서 보이지 않는 능력이 발휘되는 모양이다.
그러니 매사에 포기하지 말고 최선을 다 해야 할 것이다.
K가 알려준 대로 보급소마다 물 두 통을 받아 머리와 등 뒤 가슴과 양쪽 허벅지에 뿌렸다.
열을 식혀주니 좋았다.
하지만 오른쪽 신발에 문제가 있었는지 발이 물에 불자 물집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런을 시작할 때는 생각보다 몸이 가볍게 느껴졌다.
웬일일까 하며 달려나가는데 예상했던 대로 양쪽 허벅지에 고압의 전류가 흘렀다.
쥐가 풀릴 때까지 천천히 걸었다.
피니쉬 가까이 오면 근전환을 하며 천천히 타야 했는데 빨리 달린 것이 원인이었다.
달리기를 하는 동안 수영과 사이클에서 볼 수 없었던 반가운 얼굴들과 마주쳤다.
하니파이브를 하며 달리니 기운이 다시 솟는 듯 했다.
무어는 보이지 않았다.
한쪽 눈을 잃고 겁을 잔뜩 먹은 채로 비상등을 깜빡이며 엉금엉금 기어오는 자동차였다.
기대가 꺽이는 순간 몸에서 힘이 빠지고 있었다.
트라이에슬론을 시작한지 어느덧 7년이 되었다.
수행을 하듯 수없이 많은 땀을 흘리며 몸과 영혼이 맑아지기를 바랬었다.
하지만, 아직도 부족했던 모양이다.
롤러코스터를 지나고 민가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자 천천히 안개가 걷히기 시작했다.
끝내 무어는 볼 수 없었다.
해가 조금씩 기울더니 날이 어두워졌다.
이번에도 9시 뉴스는 보기 힘들 것 같다.
보급소에서 용식 씨를 따라 물을 뒤집어 쓰니 더위가 모두 달아나는 듯 했다.
물을 한잔 마신 후 그와 함께 뛰려했지만 10년의 배테랑과의 거리는 점점 멀어졌다.
불어 있는 발에 물이 들어가자 물집이 반란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발이 불어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물을 뒤집어 쓴 것이 실수였다.
신발을 벗어 젖은 양말 짜기를 몇 번 하다 보니 레이스의 흐름이 끊겨버렸다.
결국, 뛰다 걷기를 반복했다.
고통 속에서 정화되는 카타르시스는 이제 느낄 수 없었다.
아침 7시부터 시작한 레이스는 어느덧 자정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남은 시간은 1시간.
남은 거리는 3Km.
주로엔 패잔병처럼 걷는 사람뿐이었다.
자정이 가까워질 무렵 피니쉬라인을 통과했다.
생각했던 기록보다 2시간이 넘은 시간이었다.
사이클을 타는 동안 앞을 볼 수 없었던 짙은 안개와 물집 때문에 런에서 걸은 것이 원인이었다.
대회 다음날 한라산을 올랐다.
영실로 가는 동안 도로는 안개로 꽉 차 있었다.
숲에서 툭 튀어나온 이정표는 짙은 안개에 가려 분간할 수 없었다.
청각을 꼿꼿이 세우고 가끔 들리는 안내방송에 귀를 기울였다.
제주는 바람도 많지만, 안개도 많은 섬이라는 생각을 했다.
해발 1500미터쯤 오르자 앞이 보이지 않는 안갯속에서 몸이 날아갈 것만 같은 바람이 불었다.
몸을 가눌 수 없었다.
머리카락이 채찍처럼 따갑게 얼굴을 때렸다.
이 엄청난 자연 앞에서 우린 그저 바람에 날리는 풀과 나무와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을 했다.
정상으로 올라갈수록 더욱 강한 바람이 불었다.
태어나서 이렇게 강한 바람은 처음이었다.
충분히 사람을 날려버릴 수 있는 세기의 바람이었다.
바람과 사투를 벌이며 함께 오르던 여대생은 결국 포기하고 하산을 했다.
듬직하게 앞서 나가는 찬호 뒤를 묵묵히 따랐다.
자연의 위대함을 절실히 느끼며 우리는 그중에 아주 작은 하나라는 것을 생각했다.
윗세오름 산장에 오르자 바람이 조금 숙어 들었다.
산장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물에 빠진 생쥐 꼴이었다.
안개에 흠뻑 젖어 있었다.
갑자기 추위가 느껴졌다.
컵라면과 커피를 마시며 추위를 달랬다.
어리목으로 내려오는 하산길엔 가끔 햇빛을 볼 수 있었다.
안갯 속에서 순간 해가 비칠 때는 콧잔등에 내려앉은 이른 봄날의 햇볕처럼 따뜻하고 포근했다.
산 깊은 곳에 지천으로 깔린 현무암은 처음 보는 낯선 풍경이었다.
바람과 안개 억새풀로 옷을 입은 산.
자욱한 안갯 속에 신비한 모습으로 숨어 있는 산.
시골처녀처럼 수줍은 듯 산은 더 이상 다른 모습을 보여주려 하지 않았다.
꿈을 꾼 것 같았다.
꿈 같은 시간이었다.
몽환처럼 부유하던 안개.
집착하듯 끊임없이 따라다니던 바람
늘 성을 내는 바다.
그리고
끝없이 하늘로 이어지는 길.
창밖을 다시 바라보았다.
2009년 여름이 금속처럼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0 9 0 7 2 2 섬
10년 만에 가장 높은 파도였다는 지옥 같은 바다에서 살아나왔다.
심장이 뛰는 소리는 파도보다 크게 들리는데 어떻게 이런 무표정한 모습이 카메라에 담겼을까?
그렇다. 모든 것을 내던진 후 의식이 부재한 무아의 상태였다.
오로지 바다와 하나가 되어보려 했던 그 경지에 있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