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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만한 사람의 특징
자기 자랑이 많은 사람은 남보다 우월하다 느끼고 쉽게 교만에 빠집니다. 또 일이 술술 풀리고 잘되면 자기가 잘나서 그런 줄 알고 우쭐대거나 나태해지기 쉽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특히 싫어하시는 악 중에 하나가 바로 교만입니다. 이 땅의 언어가 나뉘었던 바벨탑 사건도 사람이 하나님과 겨루고자 하는 교만에서 비롯된 일입니다.
교만이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지 못하고 무시하는 것, 내가 모든 면에서 우월하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신을 제일로 여깁니다. 매사에 상대를 무시하고 얕잡아보며 가르치려 합니다. 보통 자신보다 못해 보이는 상대에게 나타나지만 심한 경우에는 자신을 가르쳐 주고 이끌어 준 사람이나 질서 상 윗사람까지도 무시합니다. 윗사람이 어떤 권면이나 지적을 해 주어도 “뭘 모르고 저렇게 말씀하시네.”라고 불평하거나 “그 정도는 나도 다 아는데.... 잘할 수 있는데.” 하며 잘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과 대화를 하면 곧잘 변론으로 이어져 다툼이 생깁니다. 심하면 서로 자기가 옳다고 혈기를 내며 싸움으로 번지기까지 하지요. 잠언 13장 10절에 “교만에서는 다툼만 일어날 뿐이라 권면을 듣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했으며, 디모데후서 2장 23절에는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 말씀합니다. 따라서 자신만 옳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얼마나 어리석고 악한지요.
교만한 사람은 자기가 제일이기 때문에 자기 뜻만 앞세우려 하고 누구든지 자기 생각에 맞지 않으면 받아들이려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누구 누구는 상대하지 못하겠다. 나와 생각이 안 맞으니까 나는 그를 받아들일 수 없다' 하며 어찌하든지 자신을 상대와
구별되게 생각하려고 합니다. 자기밖에 없는 사람, 이기적인 사람, 독선적인 사람, 타협이 없고 남을 관용해 줄 수 없는 사람, 자기의 말은 굽히지 못하는 사람, 자기의 말만 옳고
남의 말을 받아들일 줄 모르는 사람 등이 다 교만한 사람에 속하지요.
사람들은 저마다 양심이 다르고 지식도 다릅니다. 살아오면서 보고 듣고 배우며 체험한 것이 저마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지식 중에는 오류도 많고 스스로 엉뚱하게 입력한 것도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오랜 시간에 걸쳐 굳어지면 자신만의 ‘의’와 ‘틀’이 형성됩니다. 의란 자기가 옳다고 하는 것이며, 이것이 굳어지면서 틀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성격이 틀이 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이 하나의 틀이 되기도 합니다.
사람의 몸으로 치면 틀은 골격과 같아서 자기만의 모습을 만들뿐 아니라 일단 형성되면 깨지기가 쉽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생각도 대개 의와 틀에서 나옵니다. 자격지심이 많은 사람은 상대가 손가락으로 가리키기만 해도 민감한 반응을 보입니다. 또 부자가 옷깃만 여며도 옷 자랑한다 생각하고 누가 어려운 문자만 써도 자기를 무시한다고 느끼지요.
초등학교 시절, 저는 선생님에게서 자유의 여신상이 미국 서부 샌프란시스코에 있다고 배웠습니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미지의 나라를 지도까지 펼쳐 가며 배운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그 후 1990년대 초반 연합성회 인도 차 미국에 갔을 때였습니다. 뉴욕에 가니 자유의 여신상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샌프란시스코에 있어야 할 것이 왜 뉴욕에 있는지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주변에 물어보니 자유의 여신상은 원래 뉴욕에 있다는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철석같이 믿고 있던 지식이 틀렸다는 것을 안 순간 내가 옳다고 믿는 것도 틀릴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처럼 저마다 옳다고 주장하는 것 중에는 옳지 않은 것이 많지요.
교만하면 자신이 틀려도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계속 주장하다가 변론으로 이어집니다. 반면에 겸손한 사람은 설령 자신의 주장이 옳고 상대가 틀려도 변론하지 않습니다. 백 퍼센트의 확신이 있다 해도 만에 하나 자신이 틀릴 수 있다는 여지를 남겨 두지요. 굳이 상대를 누르고 싶은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겸손한 마음에는 그만큼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영적인 사랑이 있습니다. 상대가 자신보다 가난하든 배움이 적든, 힘이 약하든 진심으로 자신보다 낫게 여기지요. 설령 어린아이라 해도 그 마음을 배려해 줍니다. 모든 영혼은 예수님의 피 값으로 구원받은 하나님 자녀로서 존귀한 존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잠언 16:18-19을 보면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겸손한 자와 함께하여 마음을 낮추는 것이 교만한 자와 함께하여 탈취물을 나누는 것보다
나으니라 했고, 잠언서 18:12에는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 했습니다. 마태복음 23:1 이하에도 보면 예수님께서 잔치의 상석과 회당의
상좌와 시장에서 문안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경계할 것을 당부하시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자기가 높아지려고 해서 높아졌을 때 결국은 교만하여지고 패망의 선봉이 되는 것을 역사를 통해 잘 알 수 있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사람이 되어 웃어른을 섬길 때나, 동료를 섬길 때, 어린 소자를 섬길 때나 어떤 경우를 막론하고 동일한 섬김의 마음을 가지고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육적인 교만과 영적인 교만
대체로 눈에 띄게 자신을 뽐내고, 남을 무시하는 등 겉으로 드러나는 교만은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육적인 교만이라고 합니다. 육적인 교만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진리를 알면 버리기 위해 노력하기 때문에 비교적 쉽게 버려집니다. 반면 영적인 교만은 스스로 발견하기도 쉽지 않을뿐더러 버리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면 영적인 교만이란 무엇일까요?
신앙생활을 오래 하면 말씀을 들어 많이 압니다. 직분과 사명을 받아 위치가 높아지기도 하지요. 그러다 보면 자신이 아는 말씀을 마음에 이룬 것처럼 착각합니다.
영적인 교만이란 자신이 말씀을 들어서 안다고 하는 것으로 상대를 지적하고 정죄하며 질서를 파괴하는 것을
말합니다. 물론 자신은 자기가 배운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정당하게 시비를 가리고 진리를 논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악을 행하고도 잘못인 줄을 알지 못합니다. 즉 자신이
교만하면서도 교만한 줄을 모른다는 말이지요.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높아져서 꼭 지켜야 할 절차를 자신의 유익을 좇아 무시하기도 합니다. 명백히 질서를 거스르는 행동인데도 ‘나는 이만한 위치에 있으니 괜찮다. 나는 예외다.’라고 생각하지요. 이처럼 높아진 마음을 영적인 교만이라고 합니다.
마음이 높아져서 하나님의 법과 질서를 무시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한다.’ 말하면 이는 참이 될 수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판단, 정죄하는 마음 또한 사랑이라 할 수 없지요, 진리는 오직 좋은 것만 보고 듣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교만하면 자신이 안다고 하는 것으로 원수를 맺고, 상대를 비방하고 헤아리며 상대를 낮추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믿음 가운데 살다가도 누가 죄를
짓기라도 하면 스스로 재판장이 되어 금세 그를 정죄하고 폄론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자신은 더욱 큰 악을 행하면서도 그 악을 깨닫지 못하니 이것이 육적인 교만보다 더
무섭다는 것입니다.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약 4:11)
상대의 부족한 모습을 보았을 때 어떠한 마음이 드는지요? 아프리카 바벰바 부족 사회에는 죄짓는 사람이 생기면 기발한 방법으로 다스린다고 합니다. 저마다 하던 일을 중단하고 광장에 모여 죄인을 중심으로 돌아가며 그가 과거에 했던 좋은 일들을 진심으로 칭찬해 줍니다. 그의 장점, 선행, 미담 등을 몇 시간이고 며칠이고 칭찬이 바닥날 때까지 하는 것입니다. 그 뒤 잘못을 저질렀던 사람이 새 사람이 되었다는 의미로 축하의 잔치를 벌입니다.
그 과정을 거치면서 죄를 지은 사람은 위축된 자존심을 회복하고 이웃 사랑에 보답하겠다는 결심을 합니다. 바로 이러한 색다른 심판 때문에 이 사회에서는 범죄 행위가 거의 없다고 합니다. 상대의 잘못을 보았을 때 판단하고 정죄하는 마음이 앞서는지, 아니면 감싸주고자 하는 마음이 앞서는지 생각해 보면 얼마나 내 안에 겸손과 사랑을 이루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신앙의 연수가 오래되었다 해서 ‘내가 이만큼 이루었다’ 하고 안주 하는 일이 결코 없어야 합니다.
그러면 이러한 영적인 교만은 어떠할 때 틈타는 것일까요? 그것은 자신이 남보다 앞서 있다고 생각되거나 영의 세계를 조금 맛보았다고 인정될 때 틈타기 쉽습니다. 영계는 끝없이
넓은 무한대의 세계인데 영적인 교만이 틈타게 되면 영계의 문턱에서 안주해 버리게 됩니다. 즉 말씀을 듣고도 계속해서 행치 않거나 끊임없이 불순종해 나갈 때 생기는 신앙의 정체현상인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15-16을 보면 주님께서 신앙생활을 오래 했어도 말씀을 듣고 쉽게 흘려 버림으로 더 이상 믿음이 자라지 못하는 미지근한 신앙은 결국 구원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영적으로 교만하면 신앙이 정체되어 미지근한 신앙이 되어 버리니 쓰임받고도 결국 버림받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인 교만이 이러한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여 항상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에 이르러야 하겠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성화되기 전에는 교만해질 수 있는 속성이 있으므로 이러한 죄성을 뿌리째 뽑아 버리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불같은 기도로 온전히 뽑아 버리지 않으면 어느 순간 다시 교만한 모습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마치 잡초를 잘라내도 뿌리가 남아 있으면 다시 싹을 틔우는 것과 같습니다. 즉 죄성을 마음에서 온전히 뽑아 버린 것은 아니기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다시 교만이 틈타는 것입니다.
잠언 8:13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나는 교만과 거만과 악한 행실과 패역한 입을 미워하느니라 말씀했으니
지식과 경험의 유무나 물질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서로가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고 피차 섬김의 본을 보임으로 영적인 사랑을 온전히 이루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자신을 믿고 사는 교만한 사람들
느부갓네살은 대제국 바벨론의 황금시대를 열었던 사람입니다. 고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공중 정원’도 그의 시대에 만들어졌습니다. 그는 자신의 왕국과 업적을 오직 스스로 이루었다고 자랑하며 자신의 동상을 세워 신처럼 숭배하게 했습니다.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을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 (단 4:30)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그에게 세상 주관자가 누구인지 깨우쳐 주십니다(단 4:31~32). 결국 그는 왕궁에서 쫓겨나 소처럼 풀을 뜯어 먹고 머리를 풀어헤친 채 광야에서 7년 동안 짐승과 다름없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과연 그에게 왕좌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허락지 않으시면 한 가지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7년 후 정신이 돌아온 느부갓네살은 자신의 교만을 깨닫고 하나님을 인정합니다.
“하늘의 왕을 찬양하며 칭송하며 존경하노니 그의 일이 다 진실하고 그의 행하심이 의로우시므로 무릇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그가 능히 낮추심이니라” (단 4:37)
비단 느부갓네살 왕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중에는 “나 자신을 믿고 산다.”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그리 호락호락하지는 않지요. 살다 보면 사람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과학 기술이 발달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태풍이나 지진 등 갑작스런 천재지변 앞에서는 속수무책입니다.
또 의학으로 치료할 수 없는 병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도 사람들은 갖가지 문제를 만나면 하나님을 의뢰하기보다 자기 자신을 믿습니다. 자신의 생각, 경험, 지식 등을 의지합니다. 그러다 끝내 해결하지 못하면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교만해서 자신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인정하지 못하고 겸손히 하나님을 의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 중에도 여전히 자신과 세상을 더 의지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돕기 원하시지만 사람 편에서 교만하여 자신을 낮추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도 간섭하실 수 없습니다. 그러니 원수 마귀 사단의 훼방에서 지킴받을 수도, 형통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잠 18:12) 한대로 실패나 멸망을 부르는 것은 다른 그 무엇이 아니라 자신의 교만함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사람을 ‘어리석다’ 하십니다. 하늘을 보좌삼고 땅을 발등상으로 두시는 광대하신 하나님께 비한다면 인간은 얼마나 작고 미미한 존재입니까? 이러한 하나님 앞에서 인생들은 모두 높고 낮음이 없는 동등한 존재입니다. 또한 아무리 자랑할 것이 많다 해도 이 세상은 잠시잠깐일 뿐입니다. 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고 결국 각 사람이 하나님 앞에 겸손히 행하고 섬긴 만큼 천국에서 높은 사람이 되지요. 야고보서 4장 10절에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하신 대로 주님께서 높이시기 때문입니다.
작은 웅덩이에 고여 있는 물은 썩고 말지만 끊임없이 낮은 곳으로 흐르는 물은 끝을 알 수 없는 대양에 이르러 생명의 보고를 이룹니다. 이처럼 겸손으로 자신을 낮추어 하나님 앞에 지극히 큰 자, 존귀한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첫댓글 아멘 교만치않고 낮은 자가 되게 예수님 가르쳐 주세요
정말 은혜 받았습니다!!
주님께 갘사를 드립니다.
마라나타!!
교만한 사람은 자신의 허물엔 득달같이 성내고 그 지적에 이를 갑니다
자신이 틀려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속성이 강하지요
나를 돌아보았습니다.
교만에서 겸손의 자리로 돌아서게 하옵소서.
아멘~
아멘아멘 나를 돌아보게하시옵서서....
자기주장이 아주 강한사람도 교만한것인지요? 그리고 그런 사람이 싫고 그 사람을 마음으로 좋아하지 않는것 그리고 그런 사람의 말에 계속상처받는것도 죄가 되는지요?
네.상처를 잘 주는 것뿐만 아니라 상처를 잘 받는 것도 죄라면 죄인듯 해요. 죄라기 보단 너무 연약한거라 하더라구요. 이현숙 목사님의 바로 지난 주일설교 공의로운 심판(2) 한번 들어보세요. 저도 도움이 많이 됐답니다.
요즘 말씀을 올리신 분들의 글 내용을 보면 옳은 말씀인 듯 하면서 은연중에 비판하고 정죄하는 모습이 느껴짐은 왜일까요,,,
할렐루야 ! 아멘.
여기서 주의해야할것은,사람과 주님이 보시는 교만과 겸손의 차이가 있습니다.
겉으로 사람앞에 굽신굽신하고 겸손해보여도 주님이 보시기에 교만할수있습니다.
반대로 사람이 보기에, 당당하고 옳은말을 한다고해서 교만한것이 아니라,주님은 겸손하다하십니다.
주님은 마음을 감찰하시기때문인데, 그차이는, 결국 교만과 겸손은 주님말씀에 대한 순종/불순종여부이기때문입니다.
진리는 단순합니다.
아담과 하와이후로 선악과를 먹는 불순종을 저지른것자체가 교만이며, 모든 죄의 시작이자 근원입니다.
교만따로 음란따로가 아니라,즉 모든죄들을 연결되어있습니다.
죄의 기준은 하나님말씀이며, 그기준대로 마음을 감찰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