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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로스차일드 가문 (Rothschilds)
사람들은 대통령이나 수상이 권력을 잡고 있다고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그러나 실제로 현대 사회에서 진정한 권력은 소수의 엘리트 집단이 갖고 있다.
유럽대륙의 워털루 전쟁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가문이 있었다. 이 가문은 금융황제를 배출하기도 했다. 이 가문 출신의 네이선은 19세기 채권시장에서 진정한 황제였다. 엄청난 부를 소유했던 그는 자신이 전쟁과 평화의 중재자라고 큰소리 쳤으며, 또한 국가의 신용이 자신의 손에 달렸다고도 했다.
이들은 유럽 전역에 41채나 되는 저택을 소유했을 만큼 큰 부자였다. 이들이 바로 로스차일드 가문이다.
1. 가문의 역사
18세기 이후 250년간 유럽의 숨은 지배자는 로스차일드(독일어로는 로트쉴트, Rothschild : rot 붉은색, schild 방패) 가문이다. 이 가문의 조상은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유대인 거주지역 게토에서 고물상을 하면서 '붉은 방패(로트쉴트)'를 집 앞에 내걸었다.
로스차일드 가문의 시조는 프랑크푸르트의 게토 출신인 마이어 암셀(1744~1812년, 로스차일드 1세)이다. 그의 아버지는 어린 시절부터 두뇌가 명석한 마이어를 랍비로 키우기 위해 유대 신학교에 보내 탈무드를 공부하게 했다. 그리고 그는 아버지로부터 장사를 배웠다. 하지만 마이어는 12세 때 부모가 사망하는 바람에 학업을 중단하고 유대인이 경영하던 오펜하임 은행에 견습생으로 들어갔다. 이러한 일련의 일들과 관련된 ‘탈무드'와 '은행'은 250년의 번영을 자랑하는 로스차일드 집안을 탄생시켰다고 할 수 있는 유대인다운 배합이었다.
마이어는 유대 신학교에서 탈무드를 공부하여 중동과 유럽의 역사와 어학에 상당한 지식이 있었다. 그러던 중 옛날돈(古貨)에 흥미를 느껴 수집하기 시작했다. 마이어는 20세가 되자 오펜하임 은행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 화폐수집상이 되었는데 그것이 세계 최대의 금융왕국을 건설하는 첫걸음이었다. 그는 환전상 '프랑크푸르트 로스차일드상사'를 운영하였다. 고철장사, 고리대금으로 기초를 닦으며 사업수완을 기르던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마이어는 옛날돈의 유래를 설명한 안내서를 만들어 고객이 될만한 지배층 사람들에게 우송했다. 흥미가 없는 사람한테는 옛날돈을 공짜나 다름없이 사들여서 부유한 귀족들에게 팔러 다니다가, 프로이센 왕 헤센 후작 프리드리히 대왕의 아들인 빌헬름 황태자와 직접 거래하게 되었다. 유대인에 대한 박해가 심했던 그 시절에 프랑크푸르트에서 한낱 상인에 지나지 않던 유대인 청년이 영주와 귀족을 직접 만나 거래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대단한 일이었다. 그 당시 빌헬름 공은 군대를 양성하여 영국 등에 용병으로 빌려주는 장사를 하여 수많은 왕족들이 빚에 허덕이는 가운데서도 유럽에서 손꼽히는 부자가 되어 있었다.
마이어는 프랑크푸르트 영주인 헤센 후작가(家)의 빌헬름 공과 고철 및 금화 거래를 계기로 ‘어용상인’에 등록되었다. 화폐 수집상뿐만 아니라 환전상도 겸했던 마이어는 빌헬름 공의 재정담당에게 줄을 넣기 위해 애쓴 끝에 런던에서 보내오는 환어음을 현금화하는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는 후에 헤센가의 재정과 국제적인 자금조달, 그리고 관리에 깊이 개입하였다. 즉 궁정유대인(호프 유우겐)이 되어 비밀자금을 관리하는 등의 일로 돈줄을 주무르게 된 것이다. 더욱 운이 좋았던 일은 1785년 빌헬름 공이 프리드리히 대왕의 뒤를 이어 빌헬름 9세로 즉위하자 그의 자산이 더욱 늘어났다는 것이다. 빌헬름 9세는 당시 유럽 최대 사유재산인 4천만 달러를 상속 받았으며, 마이어 암셀은 1801년 헤센 후작가의 ‘은행사무변리인’에 임명되어 유럽 최대 자본국의 금고관리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그는 국가재정에까지 관여하게 되었다. 1806년 나폴레옹 1세의 유럽원정으로 빌헬름 9세가 망명하게 되면서 마이어에게 재산을 안전하게 보관하도록 명을 했는데, 그는 이 재산을 안전지대인 런던의 셋째 아들 네이선에게 보내 관리케 하였다.
마이어 암셀에게는 암셸, 잘로몬, 나탄(네이선), 카를, 야콥(후에 개명하여 제임스), 다섯 명의 아들이 있었다. 그는 이 다섯 아들들을 엄격한
이때 영국은 산업혁명으로 섬유의 대량생산이 시작되었고, 프랑스혁명으로 독일에서는 면제품 가격이 급등하고 있었다. 이에 주목한 로스차일드상사는 빌헬름 9세가 영국에서 용병대금으로 받은 수표를 단순히 현금화에 그치지 않고, 수표를 바로 영국에서 구입한 면제품의 지불에 충당했다. 또한 다시 주식과 채권에도 투자하여 막대한 이익을 거두기 시작했다. 유럽 최대의 갑부인 빌헬름 9세의 제1금고지기가 된 마이어는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보다 더 가문을 위한 일로서 국경을 초월한 금융네트워크를 구상했다. 로스차일드는 유럽 주요도시에 포진한 다섯 아들들의 견고한 협력체제하에서 19세기 유럽 최강의 금융기관으로 성장해갔다. 이들은 유럽 전역에 은행을 설립하여 아버지의 발판을 밑천 삼아 유럽전역의 금융을 주무르게 되었다. 마이어는 이 다섯 아들을 어릴 때부터 금융인으로 대성시키려는 목표로 키웠다. 아이들을 천대받는 게토의 유대인이 아니라 고관대작 집의 자제와 같이 때로는 왕국의 사관생도를 교육시키듯 귀족생활, 사교, 고객관리 등을 가르쳤다. 이러한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파리의 5남(나중에 3세가 됨)과 빈의 차남이 협력하여 유럽전체를 커버하는 ‘통신과 마차 수송 네트워크’를 만들었으며, 이 네트워크를 이용한 빠른 정보는 엄청난 이득을 가져왔다. 당시의 수송 네트워크는 오늘날 인터넷에 의한 네트워크만큼이나 획기적인 시스템이었다. 남보다 한발 빠른 정보를 이용하여 런던의 네이선은 금과 통화의 투기로 엄청난 이익을 얻었다. 이것은 형제들끼리만이 가능한 제휴 플레이였다. 1810년에 런던 증권거래소의 지배자 베어링이 죽자 네이선이 새로운 지배자로 부상하여 ‘세계 제일의 금융왕’이 되었다.
마이어는 다섯 아들들에게 사랑 받기 보다는 사람들이 너희들을 두려워하게 만들라고 당부했다. 그리하여 로스차일드 가문은 사람들에게 존경보다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유대인이라고 하여도 궁핍한 유대인은 절대 패밀리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돈으로 열리지 않는 문은 없다”
“금화소리를 들으면 욕설은 조용해진다”
이러한 돈은 유태인의 생존철학이자 로스차일드 가문의 제 1의 교훈이다.
마이어 암셀의 유언:
1. 장남이 집안의 대권을 승계할 것.
2. 사촌끼리 결혼으로 자본의 분산을 막을 것(족내혼 권장).
3. 일족의 재산을 통합해 비밀로 관리하라.
4. 딸과 사위는 경영에 관여치 않게 하라.
2. 주요 사건과 로스차일드 가문
(1) 대륙 봉쇄령
나폴레옹전쟁 뒤 로스차일드 가문은 사실상 유럽의 숨은 지배자가 되었다. 전쟁 중에 로스차일드 가문은 영국의 전비를 조달하기 위한 국채를 대량으로 매입하는가 하면, 이베리아 반도에 진출한 영국군의 자금 조달에도 크게 기여했다. 나아가 네이선은 영국을 겨냥한 나폴레옹의 대륙 봉쇄령을 뚫고 영국 상품의 비밀교역을 주도했다. 결국 세계 최강대국 영국의 재정을 비롯한 금융시장은 네이선이 사실상 좌지우지하게 됐고, 막내 제임스도 프랑스에서 국왕 루이 필립과의 친교를 바탕으로 엄청난 부와 영향력을 과시하는 지위에 올랐다. ‘로스차일드의 지원이 없으면 유럽의 어느 왕도 전쟁을 일으킬 수 없다.’ ‘고대 유대인은 한 왕에게 복종했다는데, 지금은 여러 왕들이 한 유대인에게 머리를 조아린다.’ 이런 이야기까지 나올 지경이었다.
(2) 워털루 사건
네이선은 영국으로 건너가 솜, 털실, 담배, 설탕 등의 상품 거래에 손을 대어 잠깐 동안에 큰 부를 쌓았다. 이 전설적인 사나이는 겨우 몇 시간의 채권 매매로 그때 돈으로 수백만 파운드라는 천문학적 벌이를 했다. 여기에는 여느 때처럼 그 가문만의 비기가 있었다.
1815년 3월 나폴레옹은 유배지 엘바섬을 탈출해 파리로 돌아왔다. 네이선의 임무는 유럽 대륙에서 금과 은을 최대한 많이 모아 프랑스 남부를 진격중인 웰링턴 공작에게 전달하는 것이었다. 영국 정부는 채권 판매로 엄청난 양의 현금을 보유하고 있었다. 하지만 웰링턴 공작에게는 현금은 쓸모가 없었다. 군인들에게 급여를 주고 동맹군들에게 사례금을 주려면 언제 어디서나 지불 가능한 통화가 필요했다. 결국 네이선은 채권 시장에서 빌린 돈을 금으로 바꿔 웰링턴 공작에게 전달했다. 네이선은 유럽 전역에 뻗어 있던 로스차일드 가문의 신용 네트워크를 이용해서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이 가문은 영국 정부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만큼의 중요한 존재로 부상했다. 영국군 총사령관은 이런 말을 남겼다. "네이선 로스차일드는 자신의 임무를 존경스러울 만큼 훌륭하게 수행했다. 그가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를 믿는다." 전쟁 중에 많은 양의 금을 운반하려면 그만큼 위험부담이 컸다. 하지만 로스차일드 가문은 위험한 만큼 고액의 수수료를 받을 수 있어서 괜찮은 거래라고 생각했다. 로스차일드는 가족 중심의 은행 네트워크를 구축해 전쟁자금을 지원했다. 셋째 아들 네이선은 런던에, 장남 암쉘은 프랑크푸르트에, 막내 제임스는 파리에, 넷째 칼은 암스테르담에 있었고, 둘째 잘로몬은 유럽을 오가며 작전을 도왔다. 예를 들어 파리의 금값이 런던보다 비쌀 때는 파리의 막내 제임스는 금을 판다. 그 다음에는 런던에 있는 네이선이 사는 식이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금괴와 은괴, 동전들을 사 모으기 시작했다. 나폴레옹이 주도한 이전의 전쟁들이 그랬듯 장기전이 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사람들은 금을 찾을테고, 당연히 가격도 오를테니까! 하지만 이는 엄청난 계산착오였다.
6월 20일 네이선은 드디어 승부수를 띄웠다. 로스차일드의 기둥에 나타난 네이선은 엄지 손가락을 아래로 향하는 매각 사인을 냈고, 이것은 곧 전쟁에서 영국이 패했음을 의미했다. 네이선은 로스차일드의 기둥에 기대어 천천히 영국 공채를 팔기 시작했다. "제1 작전! 네이선이 팔았다!" 뉴스가 거래소 안에 일제히 퍼졌다. 주는 매도세다! 영국군이 패했다! 추종자들이 뒤따랐다. 영국 공채는 크게 폭락했다. 네이선은 더욱 투매를 계속했다. 네이선의 얼굴은 여느 때처럼 무표정했다. 그의 손가락이 팔라는 신호를 보낼 때마다 주가는 뚝뚝 폭락했다. 그리하여 값이 극한까지 폭락하여 마지막 한계선까지 내린 순간, 네이선의 손가락은 별안간 바뀌어 대량 매입 신호를 되풀이했다. 한 순간 거래소는 숨을 죽였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시세차 따먹기인가? 조금후 추종자들이 조심조심 그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네이선은 사고 또 샀다. 대폭락한 공채를 바닥값으로 마구 사들였다. 채권을 팔라는 형제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네이선은 고집을 부렸다. 아무래도 단순한 시세차익 챙기기가 아닌 것 같았다. 사람들이 눈치를 챔과 거의 동시에 거래소에 정부 소식통으로부터 '워털루전투 영국군 대승리'라는 뉴스가 들어왔다. 공채는 대뜸 폭등세로 돌아섰고 그리고 계속 이어졌다. 네이선은 이 모양을 로스차일드의 기둥에 기댄채 묵묵히 구경하고 있었다. 런던의 언론은 네이선이 공채를 대량으로 매입했다고 전했다. 워털루 전투의 '나폴레옹 승리'라는 가짜 소스를 흘려 대폭락한 채권을 긁어 모아 거래소 상장 전체 채권의 62%를 소유하였다. 그리고 채권의 가격이 40%까지 상승하자 네이선은 채권을 되팔았다. 나폴레옹 패배라는 진짜 정보로 주식이 반등하여 재산을 2,500배로 불렸다. 당시에 시세차익을 현재로 치면 약 6억 파운드에 이른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채권을 사고 팔아 이익을 남길 수 있다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또한 돈은 곧 권력이라는 사실도 증명했다. 이날 영국의 명문 재산가 대부분이 파산하였다. 이때부터 로스차일드가의 무자비한 이윤추구 방식, 정경유착은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만일 영국이 워털루 전투에서 패했더라면 네이선은 한푼 없는 빈털터리가 되었으리라. 분명히 네이선은 큰 도박을 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큰 도박이라기보다는 로스차일드 가문 특유의 어마어마한 계산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네이선에게는 큰 도박이라기보다는 냉정한 계산에 의한 승리였다. 워털루 전투에서 이기면 공채는 폭등하고 패하면 폭락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었다. 때문에 사람들은 영국 정부측의 정보를 한시라도 빨리 손에 넣으려고 다투었다. 다만 네이선 혼자만 달랐다. 그는 정부를 앞지를 생각이었다. 이것이 네이선의 비범한 점이다. 그는 영국 정부보다 빨리 전황을 알기 위해 정보 네트워크를 자기 스스로 만들어 놓았다.
이 정보력을 바탕으로 영국 정부의 국채를 몇 시간 일찍 무더기로 사들이는 등의 방법으로 무려 6억파운드의 이익을 얻었다. 그 후 다섯 아들 모두가 유럽의 중심국가 오스트리아제국으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았다. 작위를 받으며 5발의 화살을 쥔 손이 그려진 문장을 사용한 것을 계기로 형제에게는 ‘5발의 화살’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3) 산업혁명
스티븐슨이 증기기관을 발명하자 영국에서는 철도의 장래성이 화제가 되었다. 그러나 그 무렵 철도사업이란 미친 짓이며 네이선 같은 사람도 마차보다 나은 수송 수단은 없다고 믿고 있었다. 네이선의 예상과는 달리 영국에서는 철도가 순조롭게 발전해서 그 장래성이 확실해졌다. 그러나 이때는 이미 네이선이 영국 철도에 손을 내밀 기회를 잃은 상태였다.
네이선에게 정보를 얻은 잘로몬은 즉시 이 아이디어를 검토했다. 그러나 무슨 일에 대해서도 보수적인 오스트리아제국에서 '말(馬) 없는 탈 것'이라는 이야기는 엉터리 정보라고 믿었다. 철도 소문을 들은 일이 있는 지식층조차도 철도는 악마의 강철기계라고 생각했다. 이런 분위기 아래서 철도사업을 추진하다가는 세상의 몰매를 맞을 것은 뻔한 일이었다. 하물며 유대인이 하려 하다니. 잘로몬은 조용히 일을 진행시켰다. 영국에 조사단을 파견하고 철도사업을 기술과 금융 면에서 검토시켰다. 운수사업에 침투하기 위해 오스트리아 여러 곳의 역마차 사업을 매수했고, 운송노선 예정지들을 도보로 조사시켰다. 한편 신문에 철도에 관한 계몽 기사를 계속 연재했다. 5년 동안 이와 같은 신중한 준비 기간을 거쳐 잘로몬은 오스트리아 황제 페르디난트 1세에게 빈에서 보호냐까지 100킬로미터에 걸친 유럽 대륙 최고의 대규모 철도건설 사업을 신청했다. 이미 메테르니히 재상에게는 충분히 사전 교섭을 했으므로 잘로몬은 별다른 어려움 없이 황제로부터 면허를 취득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계획이 발표되자 잘로몬에게 심각한 비난이 쏟아졌다. 빈의 신문들은 잘로몬의 반대편에 섰다. 이것은 이제까지의 신중한 준비를 파산으로 전락시킬 수도 있었다. 빈의 신문들에는 의사와 전문가들의 투고가 계속되었다. 더 큰 문제는 오스트리아 금융업자들이 외국인의 철도투자는 위험하다고 강조하면서 잘로몬을 적대시하는 일이었다. 잘로몬은 메테르니히 재상과는 물론 오스트리아 정부의 고위층과도 친밀한 인간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한 번에 중앙 돌파를 하는 것도 가능했다. 하지만 잘로몬은 먼저 부드러운 방법으로 여론의 반대에 대처하였다. 주식의 인기를 부추기는 일이었다. 그는 철도건설 자금을 충당하기 위하여 주식을 1만 2000주 발행하여, 8000주는 로스차일드 집안이 보유하고 나머지 4000주는 선착순으로 모집하였다. 잘로몬의 계산대로 철도에 반대하던 자들도 막상 로스차일드 집안이 나선다고 하니까 서로 앞 다투어 신청하였다. 잘로몬의 철도건설에 반대하던 금융업자들도 몰려들어 응모하였다. 결과는 대성공이었고, 4000주의 공모에 8배 가까운 신청이 쇄도했다. "금화가 소리를 내면 욕설은 조용해진다." (로스차일드
이 대성공의 그늘에는 은밀히 잘로몬의 눈에 보이지 않은 황금의 손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꼭두각시를 써서 응모하게 함으로써, 주식의 인기를 최대한으로 부추겨 올렸다. 세상은 이 같은 사실을 알지 못했다. 이 성공으로 반대운동은 약간 수그러들었지만 그 힘은 아직 가볍게 보기 어려웠다. 교섭의 천재 잘로몬은 절묘한 아이디어를 생각해냈다. 오스트리아 황제를 받들어 모시기로 한 것이었다. 그는 황제에게 빈―보호냐 철도의 정식명칭을 '페르디난트 황제 북방철도'로 하겠다는 허가를 얻었다.
이것이 역전의 아이디어가 되었다. 유럽 최초, 최대 철도에 자신의 이름을 붙이면 자신의 이름은 영원한 것이 된다. 지도, 역, 차량마다 모두 페르디난트 황제의 명칭이 붙는 것이다. '페르디난트 황제 북방철도'라는 명칭은 마치 로스차일드 집안의 철도에서 오스트리아제국의 철도가 된 듯 한 인상을 주었다. 아무도 이 황제의 명칭을 받드는 철도건설에 반대할 수가 없었다. 4년 뒤 철도 일부가 개통되고, 오스트리아는 당당하게 유럽 다른 어떤 제국보다 앞선 명예를 누릴 수 있었다.
(4) 기타 주요 사건
로스차일드 가문은 남아프리카의 다이아몬드 광산개발권을 획득하였고, 러시아의 바크유전 이권획득, 석유회사 ‘로열 더치 쉘’ 등, 정보, 교통, 에너지, 귀금속 등 당시 첨단 산업중심으로 팽창하였다. 1814년 동인도회사의 인도무역 독점권이 폐지되자 그 이권을 지배하였고, 1862년에는 나폴레옹 3세와 금융 제휴하였고, 1870년에는 바티칸에 융자하여 가톨릭을 금융으로 지배한다는 눈총을 받았다.
1871년에는 프랑스를 꺾은 비스마르크의 독일이 전쟁배상금 50만 프랑을 2년 안에 상환토록 하는 불리한 조약을 강요하였으나, 제임스가 이 돈을 프랑스정부에 대부하여 독일군을 프랑스에서 물러나게 했다.
1875년에는 영국정부의 수에즈운하 주식 매입에 개입, 매입자금을 공급하여 영국정부는 물론 유럽왕실과의 유착을 강화하였다. 수에즈운하는 1859~1869년 프랑스 외교관 레셉스가 건설하였는데, 운영권은 프랑스와 이집트가 공동소유하고 있었다. 이 중에서 이집트의 몫(1/2)을 프랑스 몰래 사들여 아시아, 아프리카로의 진출 해상통로를 확보함으로서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 식민지 정책의 기반을 조성하였을 뿐만 아니라, 수에즈운하 보호 명목으로 결국 이집트를 보호국화하였다. 그 후 영국은 1918년 오일로드를 확보하기 위해 팔레스타인을 점령하였고, 이후 ‘벨푸어 선언’으로 이스라엘이 독립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였다. 수에즈운하를 비밀리에 매입하는 일을 추진한 영국 재상은 유대인 ‘벤자민 디즈레일리’였다.
1880년에는 세계3대 니켈자본인 ‘르 니켈’을 창설하였고, 1881년에는 아연. 납. 석탄 발굴회사인 ‘페나로야’를 창설하는 등, 스페인, 프랑스, 이탈리아, 유고슬라비아, 북부아프리카, 남아프리카로 사업을 확대하였다.
1888년에는 세계최대 다이아몬드 신디케이트인 ‘데비아스’사를 창설하였다. 오늘날도 남아프리카 저개발국의 내전에는 전쟁자금, 즉 다이아몬드를 둘러싼 잔혹한 살상이 끊이지 않는다. 이들 세계적인 다이아몬드 회사들은 독점을 통한 수급조절로 값이 하락하는 것을 막고 막대한 이윤을 추구하고 있다.
1917년 ‘벨푸어 선언’도 로스차일드가 출신인 라이오넬이 제언하여 영국정부를 움직여 성사시켰다. ‘벨푸어 선언’이란 영국이 팔레스타인 땅을 유대인에게 양도하여 유대국가를 건설키로 한 약속을 말한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건국시 파리가에서만 7천만 프랑을 건국자금으로 지원하였다. 즉 돈으로 유대인 2천년 역사의 한을 풀었던 것이다.
(5) 아시아 금융위기
IMF는 세계은행과 함께 브랜트우즈 협정에 의해 만들어진 국제금융자본의 꼭두각시 기관이며, 이러한 기관은 모두 소로스나 로스차일드 등의 유대인의 밑에 있다는 설이 많다.
1997년 하반기 아시아 금융위기가 한창이던 때에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수상은 아시아 경제위기의 주역으로 조지 소로스를 꼽았다. 아시아 위기가 금융파생상품 헤지펀드 등을 앞세워 세계 금융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소로스의 손에 의해 연출됐다는 것이다. 또한 일본 대장성의 전직 관리인 사사키 바라는 '한국이 IMF 관리체제에 들어간 것은 세계 핫머니 시장을 주무르고 있는 헤지펀드들의 작전일지도 모른다'고 주장하였다. 특히 그는 세계 헤지펀드 시장의 대부인 조지 소로스가 한국 금융시장 교란을 겨냥한 작전을 벌였을지도 모른다는 내용의 주장을 해 비상한 관심을 모았다. 한국을 표적으로 삼는 이유는 인도네시아에 빌려준 돈이 가장 많은 곳이 한국은행들이고 그 대부분이 단기자금이기 때문이라고 소로스가 설명했다는 것이다. 당시 홍콩회의에는 한국대표단도 참석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런 낌새를 알아차린 사람은 없었다.
세계경제를 둘러싼 대형 사건들은 바로 이 같은 유태계 거대 자본이 소로스를 앞세워 실행하고 있는 세계지배 전략의 하나라는 주장이다. 소로스 혼자의 힘으로 천문학적인 돈을 벌 수는 없었다는 말이다. 배후가 있다는 이야기다. 배후는 다름 아닌 유태계 재벌인 로스차일드 가문이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이미 19세기에 전 유럽에 걸쳐 신속한 정보망을 갖추고 나폴레옹전쟁을 기회로 시장조작 수법을 이용 천문학적인 부를 손에 넣었다. 막대한 부를 얻은 유대 자본은 유럽의 각 왕실에 돈을 빌려주면서 왕실과 결탁하고 왕실의 신임을 얻어 사회적 신분을 높이는데 성공한다. 그 끈끈한 관계는 현대에 이르기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유대계 자본의 지원을 받는 유럽왕실은 식민지를 통한 무자비한 영토 확장과 세계 곳곳의 수탈을 통해 이미 천문학적인 부를 스위스 은행에 넣고 세계인류를 움직이려 한다는 것이다.
(6) 현재의 로스차일드 가문
1940년 당시 로스차일드 가문은 약 5천억 달러 (당시 미국 전 자산의 2배, 전세계 부의 50%를 지배)를 보유하기도 했다. 사람들이 그들 자산에 접근 자체가 불가능한데, 재산을 철저히 베일 속에 감출 수 있는 이유는 세계 유명 금융기관(FRB 미연방준비제도이사회, 영국과 프랑스의 중앙은행. 신용평가사 무디스 등)이 모두 그들의 손아귀에 있기 때문이다. 자산을 비밀로 관리하는 이유는 그들 재산을 쉽게 주인이 수시로 변하는 정치권력으로부터 불필요한 공격을 받지 않으려는 것이다. 그들의 자산은 알 수 없는 펀드나 채권 등의 형태로 운용되고 있다고 한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금융업을 기본으로 석유, 다이아몬드, 금, 우라늄, 레저산업, 백화점 등의 분야에서 여전히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런던의 로스차일드 은행은 잉글랜드 은행의 대리점으로서 국제 금가격을 결정하는 역할까지 맡고 있다. 프랑스의 최고급 포도주 가운데 하나인 보르도의 샤토 무통, 샤토 라피트 등을 생산하는 포도원도 이 가문의 소유이다. 현재 표면적으로는 로스차일드 가문의 10명이 약 15억달러 자산을 소유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실제 자산은 그보다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나아가 가문의 국제적 명성과 신용은 여전히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현재 로스차일드 가문은 창업자 격인 마이어 암셀로부터 대략 8대째에 이르고 있다. 사람들은 로스차일드 가문이 초기의 활력을 따라가지 못하는 것과 관련한 이유를 2가지 정도 꼽는다. 첫째 1800년대 후반 정세 판단을 잘못해 미국에 진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미국 진출에 대해선 ‘5발의 화살’ 형제 가운데 네이선 못지않게 사업을 잘한 것으로 평가 받는 야콥(제임스)이 자신의 장남이 낸 미국 진출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나친 유럽중심주의에 사로잡혀 있었던 셈이다.
둘째로, 세대가 내려갈수록 선조들만큼 뛰어난 경영인이 나오지 않는 것과 관련해서는 가문 내부의 근친결혼설을 거론하는 의견도 나온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파리상회의 창업자 격인 제임스가 조카딸과 결혼하고 그 딸이 다시 사촌과 결혼하는 등, 근친결혼이 매우 빈번하게 일어났다.
초지배계층이라고 불리는 유럽의 7대 왕실과 로스차일드 가문은 막대한 부를 가지고 다시 한 번 세계를 지배해 보겠다는 야심을 가졌다고 한다. 이런 목적을 위해서 이들은 일명 ‘뉴 월드 오더 계획’이라는 것을 세우고 행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항상 베일에 싸여 있었으나 1954년 5월에 네덜란드 오스텔벡에 있는 빌더버그 호텔에서 회견 자리를 만들었고, 모인 장소에서 연유하여 ‘빌더버그 그룹’ 이라고 칭하였다. 이들은 여전히 매스컴을 차단한 후에 인류의 운명을 결정하고 있으며, 만일 기자가 출입해도 절대로 비밀을 발설하지 않는다는 서약을 받는다고 한다. 이 그룹은 후일에 자원의 고갈로 세계가 멸망될 것에 대비하여 만든 것으로서, 세계통일국가를 구축한 후 다스린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3. 유대인이 세계를 지배하기 위한 5가지 전략
(1) 세계 최대의 정치력과 군사력을 가진 국가의 지배
- 즉 미국의 지배. 미국은 세계를, 미국은 유대인이 지배한다.
(2) 세계 에너지 시장의 지배
- 로얄 더치 셀 (로스차일드)
- 엑슨. 모빌. 스탠다드 (록펠러)
- 텍사코 (노리스가)
- 영국의 브리티시 페트로리엄 (영국 유대자본)
(3) 세계 식량 시장의 지배
- 정기적으로 곡물을 수출하는 나라는 미국. 캐나다. 아르헨티나. 호주, 이들 세계 식량공급 5개 메이저 대부분을 아슈케나지 유대인이 장악.
콘티넨탈-그레인. 카길. 루이-드레픽스. 콘티넨탈 그레인과 카길사에서 미국 곡물수출의 85%를 담당하고 있다.
(4) 세계 금융 시장의 지배
- 미국 최대 5개 은행 중 체이스 맨하탄, JP모건, 유대인 직영
- 뱅크 오브 아메리카(BOA)는 영국 로스차일드와 전략적 제휴
- 그 외, 메린린치, 솔로몬-브러더스, 모건–스탄, 제이, 파스트-보스톤, 골드만 삭스 등을 유대인이 경영
- FRB, IBRD, IMF 등은 유대인이 배후에서 지배
* FRB는 록펠러가 지배하고 있으나 그 배후에 창설자인 로스차일드 가문이 있다
* 세계금융시장은 유대자본이 거의 장악
(5) 세계 정보 통신망의 지배
- AP, UPI통신, IBM(세계 컴퓨터 시장 50% 점유)
로스차일드 가문은 영화, 패션, 각종 연구소 학술에 공헌하였으나, 비즈니스가 국제정부기관, 각국의 왕실, 국제보도기관, 국제첩보기관 등과 밀접하게 결부되어(특히 군수기업과 유착) 비난을 받고 있다. 전 세계를 상대로 무기, 탄약을 판매하는 무기상(죽음의 상인)의 상당수는 로스차일드와 관계가 있다. – 전쟁 있는 곳에 로스차일드가 관여하고 있다. 나폴레온전쟁 이후 유대인은 전쟁을 비즈니스로 취급하고 있다.
이스라엘 건국 자금은 주로 서유럽에 거주하던 스파라디계 유대인이 제공하였다. 당시에는 15% 정도인 스파라디계 유대인이 더 잘 살았고, 아슈케나지계는 러시아 폴란드에서 궁핍과 박해에 시달렸다. 가나안으로 돌아가려는 시오니즘은 아슈케나지계가 주도하였다 (벤구리온, 골다메이어 등). 그들은 팔레스타인에서 러시아 혁명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다. 이스라엘의 키부츠, 사회보장제도 등 사회주의 요소는 러시아 혁명의 영향을 받았다. 이스라엘 인구는 460만으로 세계인구의 1/1200 이지만 미국 대외원조의 1/5이 이스라엘에 간다. 미국의 중동정책은 워싱턴이 아닌 예루살렘에서 만들어진다는 말은 유대인의 역량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만약 유대인이 유럽과 미국에 없었더라면 근대자본주의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 통설이다. 그만큼 유대인의 이윤추구 방식은 자본주의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는 말이며, 자본주의가 점령한 현 세계의 헤게모니 속에 녹아 있다. 돈벌이 자체가 선(善)인 유대인에게 자본주의, 더구나 거기에 인종, 종교의 장벽이 없는 미국은 유대인에게 날개를 달아준 것과 같았다.
유대인에게 비즈니스는 돈벌이만이 목적이 아니다. 그들 민족과 종교가 살아남기 위한 전쟁이다. 그들은 사회가 금기시하는 고리대금, 징세인, 국왕 귀족의 재산관리인, 유통업 등의 직업으로 세인의 반감과 원망을 받았다. 그러나 비밀리에 돈을 움직이는 기술로 실력자의 비밀을 장악함으로써 배후에서 국가를 조종하는 방법을 터득했다. 탈무드는 자기를 지키기 위한 방법은 오직 지력(智力)과 재력(財力)뿐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특히 그리스도교권 문화에서 예수를 박해한 유대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재력은 그들이 생존하기 위한 절대조건이었다.
4. 로스차일드 가문에 얽힌 그밖의 이야기들
(1) 로스차일드그룹, 212년 전통 깨고 가문 밖에서 사장 임명
세계 금융계의 거물 로스차일드(Rothschild) 가문도 금융위기의 파장을 피해 가긴 어려웠던 모양이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10일, 로스차일드그룹이 로스차일드가(家) 출신이 아닌 나이젤 히긴스(Higgins)를 사장에 임명한다고 보도했다. 가문 외의 사람이 로스차일드의 총수 자리에 오르는 것은 회사 설립 후 212년 만에 처음이다.
FT는 이번 인사가 "금융위기에 유연하게 대처하기 위한 조치"라고 진단했다. 현 사장이자 창업주의 직계 후손인 다비드 드 로스차일드는 FT와의 인터뷰에서 "변화하지 않고 정체하는 기업은 발전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는 이번 달을 끝으로 사장직을 히긴스에게 넘겨주고 회장으로 물러앉는다. 현직에 남아 있는 로스차일드 가문은 이제 그의 아들뿐이다.
FT에 따르면 사장에 내정된 히긴스는 로스차일드그룹에서 27년간 근무했다. 지난 10년 동안은 로스차일드 국제투자은행 공동 행장직을 수행해왔다. 히긴스는 "혁명적인(revolutionary) 인사가 아니라 발전적인(evolutionary) 인사"라며 "(경영 부담을 덜게 된) 로스차일드 사장이 더 새로운 기회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http://blog.naver.com/sangtakk/100091575870..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