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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과 물
배수아 소설
문학동네
2017
기차가 내 위를 지나갈 때
나는 할머니의 파란 양철 가방을 들고 역으로 갔다. 가방은 내 몸보다 컸다. 번득이는 태양에 팔월처럼 달구어진 가방은 완벽한 사물이 대개 그렇듯이, 뜨겁게 입을 다문 채 자신을 끌고 가라고 맹렬히 명령했고, 나는 완벽한 사물에게 예속된 존재가 대개 그렇듯이, 간절한 마음으로 거기에 순종했다. 울퉁불퉁한 노란 벽돌이 깔린 역 광장을 지나, 고장 난 에스컬레이터 옆 계단을 한 칸 한 칸 올라갔다. 벤치에 누워 잠든 사람의 커다란 맨발이 비죽 튀어나와 있었고, 나는 지나가면서 그것을 건드리는 바람에 뒤를 돌아보면서 사과했다. 나는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다. 느리게, 이마의 땀을 닦으며, 고개를 숙이고, 낡은 구두 뒤축이 닳는 걸 속으로 겁냈다. 나중에 네가 여행을 하게 되면…… 하고 할머니는 자주 이런 식으로 말을 꺼냈었다. 이런 가방을 들고 역 광장을 지나 플랫폼을 찾아가는 건 중국 식당에서 게살 수프를 먹는 것처럼 흔한 일상이 될 거야.
“내 할머니에 대해서 말하기를 주저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매우 기쁩니다. 오늘은 세계 여성의 날이니까요.”
잭은 시를 낭독하기 전에 이렇게 말했다. 그의 말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그날이 세계 여성의 날이라는 것도, 시낭독회가 세계 여성의 날을 기념하기 위한 자리라는 것도 그리고 빛 없이 깜깜한 저녁 하늘 높이 치솟은 언덕 꼭대기 테이블이 서너 개뿐인 작은 식당에서 열린 이 정체불명의 모임이 은퇴 철도 노동자들을 위한 명상 강좌가 아니라 시낭독회라는 것조차도 몰랐을 것이다. 아, 물론 나는 잭이 누군지도 몰랐고, 제대로 된 겉옷 대신 판초와 담요 등을 걸치고 모여 있는 서른 명 남짓한 사람 중 그 누구도 알지 못했으며 그들도 나를 모르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나는 어떻게 여기에 있게 되었을까?”
이런 의문이 내 머릿속에서 사라지기도 전에, 인사를 마친 잭은 놀라울 만큼 빠른 속도로 놀라울 만큼 긴 시를 숨도 쉬지 않고 읽어나갔다. 내가 단 하나의 단어도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나는 계속해서 다른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것은 시였을까? 나는 계속해서 다른 생각에 잠겨 있었다. 나는 어떻게 여기에 있게 되었을까?
잭은 입에서 튀어나오는 노란 침방울이 보일 만큼 빠르게, 쉬지 않고 시를 읽어나갔다. 그의 언어는 실제로 망치처럼 단단하고 강했으므로 음파라기보다는 물질에 가까웠고, 그래서 나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차츰 그의 말이 갖는 성질과 형체를 감지하게 되었다.
그 결과 그의 언어가 진행되는 동안 내 감각과 직관이 어렴풋하게 그려낸 내용은, 그의 할머니가 젊은 시절 서로 다른 네 가지 종류의 암을 동시에 진단받았다는 것, 그러면서 네 명의 남자와 동시에 잠자리를 가졌고, 단 한 번도 정식으로 결혼하지 않은 상태로 낳은 네 명의 아이를 각각 다른 네 양부모에게 맡겼는데, 놀랍게도 그중 한 아이만 청소년기에 강간으로 한 번 유죄판결을 받았고, 그중 한 아이만 보건소 간호사의 실수로 백신을 바꾸어 맞는 바람에 부작용으로 실명했으니 그나마 행운이라고 했다. 그리고 자신은 그 네 아이 중 한 명의 아이이며 할머니의 살아 있는 유일한 후손인데, 지금 공교롭게도 자신과 살고 있는 할머니는 머리카락도 절반밖에 남지 않았고 키도 이십 센티나 줄어들었지만, 어쩌면 자신의 할아버지일지도 모르는 그 네 명의 남자 중 한 명과 아직도 데이트를 계속하고 있다고, 왜냐하면 다른 세 명은 모두 죽었거나 감옥에 있으니까.
사람들은 발을 구르고 박수를 치고 환호성을 지르며 좋아했다. 팔십 세의 시인인 사회자는 북을 두드렸다. 사회자는 이중에서 내가 아는 유일한 얼굴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는 내가 매일 정오경 빵과 커피로 아침을 먹는 이태리풍 카페 트리에스테trieste 에서 자주 마주치던 사람이었다. 항상 붉은 벽 앞 테이블에 앉아서 에스프레소를 마시던 그는 그날 처음으로 나에게 말을 걸었고, 이 주소를 가르쳐주면서 저녁때 찾아오라고 했다. 나는 그의 설명을 더 이상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입고 있는 화려한 문양의 인디언 스웨터에 매혹된 나머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말했지만 나는 정확하게 알아듣지 못했고, 사슴을 연상시키는 어떤 단어와 매우 흡사한 소리만이 끝내 완성되지 못한 형체로 내 혀끝에 남았다.
잭은 외모가 중국인처럼 보였으나 좀 더 알려지지 않은 어떤 은밀한 민족 출신일 수도 있었다. 잭은 자신이 직업이 가수 겸 작곡가라고 했지만 아직 음반은 한 장도 내지 못했고, 노래를 한 곡 불러달라는 청중의 요청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내가 도착했을 때 이미 빈 의자는 하나도 없었으므로 나는 할머니의 푸른 양철 가방 위에 앉아서 잭의 시낭송을 들었다. 내가 기억하는 할머니의 가방은 원래 무척 튼튼했고 푸른 칠을 한 표면에는 군데군데 파도처럼 규칙적인 작은 굴곡이 있었으며 먼 바다처럼 균일하고 단단한 윤기가 흘렀다. 하지만 수십 년이 지난 어느 날 여행중에 우연히 들른 벼룩시장에서 내 눈에 들어온 그 가방은 오랜 세월 동안 이리저리 끌려다니느라 모서리는 다 달아버렸고 칠이 벗겨진 자리마다 참혹할 정도로 녹이 슬었으며, 표면의 파도 모양도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찌그러진 데다 누군가가 둥그렇게 구멍을 뚫어놓는 바람에―아마도 절단기를 가진 도둑이겠지―그 부분을 보기 흉한 흐릿한 회색으로 땜질해놓았다. 검은색 소가죽 손잡이도 한쪽이 떨어져 덜렁거리는 바람에 그걸 잡고 바닥으로 질질 끌고 다녀야만 하는 형편이었다.
나는 그 가방을 나 자신만큼이나 잘 알고 있었다. 할머니는 여행을 떠나기 전 가방을 싸는 일을 내게 맡겼고, 여행을 떠나는 날은 내가 직접 플랫폼까지 가방을 들고 갔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자주 여행을 떠났고, 한번 여행을 떠나면 한두 달은 돌아오지 않았다. 할머니가 돌아오면 나는 다시 가방을 풀어야 했다. 돌아온 할머니의 가방 안에서는 항상 특유의 묘한 냄새가 났는데, 나는 그것을 내가 모르는 나라의 냄새라고 생각했다. 고요히 발광하는, 오묘하고 경사진 달의 영토가 그 안에 있었다.
일본에서 사온 거란다. 처음 가방을 보고 그 크기와 아름다움에 놀라고 감탄하는 나를 알아차린 할머니가 말했다. 할머니의 젊은 시절, 아주 아름다운 물건은 모두 일본에서 왔다고 했다. 심지어 아주 좋은 사람도 마찬가지였다고 할머니는 말했다. 너도 아름다운 물건을 좋아하는구나, 하고 할머니는 덧붙였다. 기뻐하렴, 너에게 이 가방을 들게 해줄 테니, 나중에, 분명히 그렇게 될 텐데, 네가 먼 여행을 하게 되면……
원래 가방 안쪽은 고운 검은 비로도 천으로 감싸여 있었지만 벼룩시장에서 다시 만난 가방의 내부는 황량한 상처투성이 알몸이었고 검은 스프레이로―어쩌면 내가 잘못 읽은 걸 수도 있지만, 그러고 그럴 가능성이 더욱 크겠지만―×××놈들 다 죽어라 라고 휘갈겨져 있었다. 가방에서는 수십 년 묵은 곰팡내와 바퀴벌레 냄새가 진동할 뿐이었다.
“오늘 우리가 계획한 프로그램은 이제 전부 끝났습니다만, 우연히 이 도시를 지나가던 여행자 한 명이 방금 전 우리 낭독회를 방문해주었습니다. 그녀를 초대해서 즉석에서 이야기를 들어보는 건 어떨까요?”
잭이 시낭송을 마치자, 사회자인 사슴 시인이 갑자기 큰소리로 말했다. 그는 아침에 내가 보았던 인디언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붉은색과 노란색, 분홍과 회색이 섞인 추상적인 문양의 스웨터였다. 나는 얼마 전 인디언 기념품 상점에서 진짜 동물 털을 이용해 손으로 짰다는 그와 비슷한 스웨터를 본 적이 있었다. 당연히 가격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비쌌고, 내가 보통 스웨터를 위해서 지출할 수 있는 최대 가격보다 동그라미 두 개가 더 붙어 있었다. 여분의 동그라미들은 혹시 센트를 의미하는 것인지? 궁금해진 나는 유리창에 바싹 얼굴을 갖다 대고 살폈으나 동그라미들의 배열에서 그런 낌새를 알아챌 수는 없었다. 나는 혹시 그의 스웨터가 내가 기념품점에서 보았던 바로 그 스웨터가 아닐까 하여 낭독회 내내 사슴 시인의 스웨터만 눈으로 좇고 있었다. 물론 모양만 비슷한 물건일 가능성이 높았다. 노르웨이 관광객도 아닌 그가 인디언 기념품 상점에서 스웨터를 살 일은 없을 것이고, 게다가 그런 엄청난 가격을 지불할 만큼 부자로 보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등이 살짝 구부정했는데도 모임의 그 누구보다 키가 컸고, 마치 나를 아주 잘 아는 사람인 듯이 윙크를 날렸다.
그는 양손으로 북을 둥둥둥둥 두드렸다.
나는 그가 한 말은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로, 가슴이 쿵 내려앉는 충격을 느꼈다. 사람들이 일제히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려서가 아니라, 어느 순간 바로 옆으로 다가온 잭이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면서 주먹으로 내가 걸터앉은 할머니의 푸른 가방을 미친 듯이 빠르게 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가방이 두 동강이 날까 두려워 잭에게 그만두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어떻게 말해야 할지 방법을 몰랐다. 사회자가 두드리는 북소리에 섞여 양철 가방을 치는 소리가 좁은 식당 안에서 폭발할 듯이 울렸다. 사람들은 점점 더 요란하게 발을 굴렀다. 박수를 쳤다. 환호성을 질렀다. 손가락을 입에 넣고 찢어져라 휘파람을 불었다. 여자들이 소리 높여 웃었다. 남자들이 소리 높여 웃었다.
나중에 네가 여행을 하게 되면……
나는 흰 유리병에 든 액체 구두약과 끝이 동그란 스펀지가 달린 철사 막대를 손에 들고 있었다. 그 유리병은 목이 간절하게 좁고 길었으며 은색의 멋진 마개가 달려 있었으므로 누구나 탐을 냈다. 이웃집의 식모아이는 구두약을 다 사용하면 병을 자신에게 달라고 나와 마주칠 때마다 졸랐다. 기름병으로 사용하고 싶다는 거였다. 할머니는 검은 모슬린 장갑을 끼고 작은 초록색 구슬이 촘촘히 박힌 핸드백을 들고 방에서 나왔다. 그리고 쪼그리고 앉은 내가 철사 막대를 유리병에 넣어 스펀지에 구두약을 흠뻑 적신 다음 할머니의 구두에 흰색 액체 구두약을 꼼꼼하게 다 바르기를 기다렸다. 내가 그 일을 마치자, 할머니는 구두를 신었고, 앞서서 걸었다. 나는 가방을 들고 그 뒤를 따랐다. 하늘은 옅은 푸른빛이었고 가벼운 깃털구름이 높이 떠 있었다.
엄청나게 큰가방이로구나. 너 같은 아이가 세 명은 너끈히 들어가겠어.
누군가 내 곁을 지나가면서 그렇게 말했는데, 나를 측은히 여긴 것인지 아니면 단지 그 상황을 재미있게 여긴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당신 할머니에 대해 말하기를 주저할 필요가 없어요!”
잭이 내 귀에 입을 바싹 갖다대고 소리쳤다. 그의 뜨거운 입김이 갑자기 귓속으로 불화살처럼 쑥 들어와 박히는 바람에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미친 듯이 빅수를 쳐대고 발을 구르는데다 사회자가 여전히 큰 소리로 북을 둥둥둥둥 울려대고 있었기 때문에 잭이 그렇게 입을 갖다대지 않았다면 나는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을 것이다. 할 수 없이 나는 앞으로 나가야만 했다. 내가 움직이기 위해서는 내 몸이나 다름없는 할머니의 가방을 끌고 가야 했는데, 촘촘하게 들어찬 의자뿐 아니라 바닥에까지 빼곡하게 앉아 있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가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불쑥 튀어나와 있는 누군가의 커다란 맨발을 건드리는 바람에 사과를 하고, 뒤를 돌아보고, 느리게, 이마의 땀을 닦으며, 고개를 숙이고……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일이라면, 가능한 한 빨리 끝내는 편이 나았다. 나는 전혀 준비되지 않은 상태였고 시라고는 평생 한 편도 써본 적이 없었지만, 그리고 그 자리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 내 말을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할 것을 잘 알았지만, 주저하지 않고 입을 열었고, 오직 직관에 기대서 슬픔 없이 말하지 시작했다.
“존경하는 철도 노동자 여러분!”
왁자한 웃음이 터지면서 박수 소리.
“내가 할머니를 마지막으로 본 건 삼십 년 전이었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삼십 년까지는 날짜를 세었지만 그 이후로는 세는 걸 그만두었으니 삼십 년 플러스라고 말하는 편이 적절하겠네요. 그런데 놀랍게도 겨우 이 주일 전에, 나는 할머니의 죽음을 알리는 편지를 받았습니다.(이 말을 하면서 나는 실제로 주머니를 뒤져서 구겨진 편지지 한 뭉치를 꺼내 사람들을 향해 펼쳐 보였다. 물론 그들이 편지에 적힌 글자를 결코 읽을 수 없다는 것을 계산한 행동이었다.) 편지는 처음에 내가 사는 나라의 주소로 배달되었지만, 그곳 우체국에서 다시 이곳 여행지의 숙소로 보내졌습니다. 여러분도 보시다시피 나는 여행중인데, 여행을 떠나기 전에 고향의 우체국에 우편물 배달 전환 신청을 해두었거든요. 그런데 놀랍게도 편지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적혀 있었어요. 하지만 편지의 내용을 어느 정도 추측하는 것은 가능했습니다. 왜냐하면 일단 편지의 글자 중에는, 할머니의 이름이 들어 있었거든요. 할머니의 이름은 아무리 많은 다른 글자들과 섞여 있어도 내 눈에 금방 들어올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할머니의 이름은, 내 이름과 똑같으니까요. 봉투에 적혀 있는 수신인, 바로 그 이름말이죠. 그런데 편지 속 할머니의 이름에는 십자가 표시가 되어 있었고, 날짜와 시간이 나와 있었어요. 그래서 나는 비록 편지를 읽을 수는 없었지만 내용을 금세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할머니가 죽었고, 그래서 장례식이 열릴 예정이니 할머니의 유일한 후손인 나를 장례식에 초청하는 부고라고 말입니다. 일단 이렇게 단정하고 나자 이 편지는 내게 무척 놀라운 소식으로 보였습니다. 할머니가 죽었다는 게 아니라, 할머니가 이제야 죽었다는 것 때문이죠. 내 기억에 의하면 할머니는 삼십 년 플러스 전에도 거의 백 살은 되어 보였거든요. 물론 내가 너무 어려서 잘못 판단했을 수도 있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스물일곱 살이 넘은 어른은 모조리 노인으로 보이는 법이니까요. 사실 보시다시피 편지는 여러 장이나 되고 무척 길어서, 단순히 장례식을 알리는 것뿐만 아니라 그동안 할머니가 어디에서 어떻게 살았는지에 관한 내용일 것이 분명한데, 그 또한 마찬가지로 짐작과 상상만이 가능했죠. 오랫동안 할머니는 사라진 사람이었습니다. 매장되지 않은 죽은 자나 마찬가지였어요. 삼십 년 전에 할머니는 이 가방을 들고 여행을 떠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으니까요.(이 부분에서 나는, 연극배우 같은 몸짓으로, 발아래 놓인 양철 가방을 가리켰고, 내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한 사람들의 눈길도 일제히 가방으로 쏠렸다.) 할머니가 돌아오지 않았다면 내가 도대체 어떻게 이 가방을 갖고 있느냐구요? 그것이 놀라운데, 사실 나는 몇 년 전에 어느 여행지의 벼룩시장을 구경하다가, 그만 내 할머니의 여행가방과 정면으로 마주쳤던 겁니다. 그 순간 나와 여행가방은 동시에 놀라서 비명을 질렀죠. 절대로 잘못 본 게 아니에요. 할머니의 가방이 맞아요. 내가 직접 할머니의 여행가방을 싸고, 역 플랫폼까지 운반했기 때문에 잘 알고 있습니다. 벼룩시장의 고물상 노인에게 이 가방을 어디서 가져왔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형제들이 아시아의 벼룩시장과 고물상을 돌아다니면서 오래된 물건을 사 모은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니 이 가방도 아시아의 오래된 시장에서 발견한 거라고 말이죠. 하지만 정확히 아시아의 어디인지는 당장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형제들은 일곱이나 되는데다가, 모두 각자 흩어져서 매번 다른 나라의 고물상을 뒤지고 다니기 때문에 누가 어디서 그 가방을 가져왔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다고 했죠. 아마도 반두가 아닐까요……? 하고 그는 아쉬운 듯이 덧붙이기는 했어요. 하지만 그의 말을 그대로 믿을 수는 없었습니다. 반두가 어디 있으며 어떤 나라인지 내가 되물었을 때 그는 전혀 대답을 못했거든요. 그는 반두에 대해서 이름 말고는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어요. 가본 적이 없는 것은 당연했구요. 하지만 그가 가방을 어디서 구했건, 그건 사실 내게는 중요하지 않았죠. 난 가방을 쓰다듬었고, 그래서 그것이 정말로 할머니의 가방인 것을 확신했답니다. 그래요, 아주 좋은 시절에만 있던, 아름다운 옛날 물건이에요. 마치 낡은 캐비닛처럼 차갑고, 딱딱하고, 부딪힐 때마다 요란한 소리가 나고, 바퀴도 달려 있지 않으며, 게다가 불필요하게 크기까지 해요. 이미 오래전부터 이런 종류의 가방은 더 이상 여행자의 손에 들리지 않았고, 아주 간혹 사막 유목 부족의 텐트에서 이동식 옷 보관함으로 사용되는 것을 내셔널 지오그래픽 잡지에서 본 적이 있을 뿐이죠. 그런데도 벼룩시장의 고물상은 눈이 튀어나올 만큼 비싼 가격을 불렀습니다. 내가 이 가방을 무조건 사고 싶어 한다는 것을 쉽게 알아차렸으니까요. 여기서 문득 궁금한 것이, 가난한 여행자인 내가 무리를 해서까지 이 가방을 사야만 했던 타당한 이유가 있을까요? 설사 이것이 삼십 년 플러스 전에 사라진 진짜 내 할머니의 가방이 맞는다고 해도 말입니다. 게다가 이렇게 불편하고 번거로운데다가, 안타깝게도 더 이상 예전처럼 아름답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그 문제는 그냥 나 스스로를 위한 질문이고, 지금 이 자리의 여러분에게는 크게 중요하지 않을 테니 그냥 넘어가기로 하죠.
너는 여행을 떠나야 될 거야…… 하고 할머니는 오래전 어린 나에게 말했습니다. 할머니가 여행을 떠나던 그때는 지금처럼 많은 여자가 동시에 전 세계를 여행중인 시절은 아니었습니다. 여자들은 집에서 가족들의 양말을 빨거나 감자 껍질을 벗겼고 그 대가로 밤에는 라디오의 첼로 음악을 들으며 가정의 여왕 잡지를 읽는 호사를 누렸습니다. 그들은 자수를 놓거나 열대어 어항을 청소하면서 충분히 바쁘게 일평생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여자들은 여행을 떠나게 된 걸까요? 나는 어느 해 겨울, 낮은 밤처럼 어둡고 밤은 밤보다 더욱 검게 흘러가며, 소리도 형체도 없이 내리는 비에 으슬으슬 몸이 떨리고 축축하게 추웠던 어느 날 밤, 버스를 잘못 타는 바람에 예정에 없던 어느 고성이 있는 도시에 내려 첫 버스가 출발하는 다음날 아침까지 밤새도록 신발이 다 젖도록 돌아다닌 적이 있는데, 그동안 내가 목격한 유일한 불빛은 중국인 세례 요한의 머리 라는 이름의 식당 조명이었습니다. 커다랗고 붉은 간판, 플라스틱 구슬 커튼이 늘어뜨려진 입구, 커다란 유리창을 통해 보이는 식당 내부, 번득이는 전등 불빛 아래 훤히 드러난 흰 벽에는 날개를 펼친 금빛 용, 싸구려 테이블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십여 명의 여자, 십대 소녀와 백발의 노인을 포함한, 대부분 중년의 나이인 여자들, 혼자이거나 아니면 친구와 두셋씩 짝을 이루어 여행중인 여자들, 알록달록한 우산과 한껏 맛을 낸 레인코트, 검은 스타킹과 푸른 장화를 신고 서로 어색하게 약간의 거리를 유지하며 예의 바르게 앉아 있는 동아시아의 여자들이 있었죠. 나는 끌리듯이 그곳으로 다가갔습니다. 비에 젖은 축축하고 깜깜한 돌과 무덤의 세계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그 장소는 자신의 이름처럼 낯설고 부조리하며 이질적인 기운을 풍겼습니다. 관광버스에서 막 내린 단체 여행자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서로 모르는 관계인 그 여자들은, 아마도 그날 고성이 있는 도시를 보러 왔다가, 어둠과 빗속을 마찬가지로 천천히 돌아다니는, 같은 나라에서 온 여자 여행자들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음침한 밤을 절망적으로 헤매던 중, 유일하게 불을 밝히고 영업중인, 동양인 관광객 상대의 그 식당으로 하나둘 들어선 것 같았습니다. 수십 년 전 내 할머니도 버스를 잘못 타는 바람에 가방을 잃어버리고 그 여자들과 함께 그 식당으로 들어갔을까요? 할머니는 왜 나에게 엽서 한 장도 보내지 않았을까요? 내가 혼자인 걸 잘 알고 있었을 텐데 말이죠. 유리창에 달라붙어 기묘한 여자들을 쳐다보고 있는 나를 그 여자들 중 한 명의 일행이라고 오해한 웨이터가 나에게 식당 문을 열어주었습니다. 나는 끌리듯이 스르르 식당 안으로 들어섰겠지만, 그래서 그 여자들 사이 어딘가에 앉아서 중국식 매운 게살 스프를 주문했겠지만, 그 이야기는 할머니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고 여러분도 관심이 없을 테니 계속하지는 않겠어요.
어쨌든 중요한 것은, 할머니가 죽었고 나는 부고를 받았으며, 할머니의 장례식에 가기를 간절히 원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이 나라의 중국 대사관은 내 비자 신청을 거부했습니다. 내가 달라이 라마와 서신 교환을 했다는 것이 그 이유인데, 물론 나는 달라이 라마와 서신 교환은커녕 그에게 어떤 식으로든 편지를 보내야겠다는 생각은 꿈에서조차 해본 적이 없으므로 그들이 뭔가 오해하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이지만, 불행히도 그걸 입증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내가 무슨 수로 달라이 라마와 서신 교환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이고 나는 그저 수십 년 전 사라진 내 할머니의 손녀일 뿐인데요. 설사 나에게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고 해도 불교 신자도 아니고 티베트 독립과도 무관한 나는 달라이 라마에게 아무런 할 말이 없습니다. 하지만 중국 정부는 내 빈약한 해명 따위에는 관심도 없었습니다.
삼 년쯤 지나면 시효가 사라질 거예요. 그때까지 당신이 달라이 라마에게 다시는 편지를 쓰지 않는다는 조건이라면 말이에요. 그러면 아마도 비자가 발급될 수도 있으니, 그때 다시 한번 신청하세요, 하고 그들은 바로 오늘 오후에 내게 전화로 이렇게 알려왔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할머니의 가방을 들고 할머니의 장례식에 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편지가 지구를 반 바퀴나 돌아서 오는 바람에 시간이 오래 걸렸어요. 어차피 지금 당장 출발할 수 있다고 해도 할머니의 장례식에 참석하기란 이미 늦었습니다. 장례식은 바로 오늘이니까요. 그래서 나는 오늘밤 이 도시의 높은 언덕 위에 올라가기를 원했고, 거기서 바다 건너 중국을 바라보며, 혹시 할머니의 몸을 태우는 연기를 볼 수 있지나 않을까 기대하였습니다. 만약 내가 멀리 중국에서 피어오르는 불그스름한 연기를 볼 수 있다면, 편지가 할머니의 부고일 거라는 내 짐작은 맞는 거겠죠.
언젠가 네가 이런 가방을 들고 여행을 떠나게 된다면…… 하고 할머니는 가난한 어린 소녀이던 나에게 말했습니다.
그런데 여자들은 왜 여행을 떠나는 걸까요?
할머니는 앞서서 걸었습니다. 검은색 모슬린 장갑을 끼고 작은 초록색 구슬이 촘촘히 박힌 핸드백을 들었죠. 나는 할머니의 뒤를 열심히 따라갔지만, 가방이 너무 크고 무거웠기 때문에, 역의 에스컬레이터는 늘 그렇듯이 고장 난 상태이고 벤치마다 잠든 사람들이 커다란 맨발을 바깥으로 내뻗은 채 누워 있으며, 길은 울퉁불퉁하고 플랫폼은 아득하게 멀었기 때문에, 할머니의 모습은 점점 내게서 멀어지는 것만 같았고, 나는 울지 않으려고 입술을 깨물었습니다. 운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물이 되는 것, 형체가 사라져버리는 일이었어요. 할머니의 작고 고운 물건들이 양철 가방 속에서 은밀하게 몸을 부딪칠 때마다, 고유한 형체를 가진 것들이 서로를 건드리며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냈습니다. 리본과 구슬, 만년필, 브로치, 상아 장식품, 비단 필통, 은은하게 향기 나는 편지지, 눈부신 네글리제, 보라색 팔찌, 레이스 손수건, 보석이 박힌 머리핀, 그리고 기차에서 읽을 부인용 잡지까지, 가장 아름다운 것들의 소리, 가장 아름다운 내용을 담고 있는 가장 아름다운 형체의 소리.
엄청나게 큰 가방이로구나. 너 같은 아이가 세 명은 너끈히 들어가겠어.
필사적으로 안간힘 쓰며 가방을 들고 가는 나를 보면서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마도 나는 그냥 가방 속으로 들어가버리는 편이 나았을 겁니다. 그렇다면 어느 친절한 역무원이 가방을 통째로 들어 힘들이지 않고 할머니에게 전달해주었을 테니까요. 그렇다면 할머니의 아름다운 사물 중의 하나인 나 역시 할머니의 여행에 자연스럽게 동행하게 되었을 것이고, 어쩌면 지금까지도, 기나긴 여행을 계속하고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나는 할머니의 가방 속에서, 경사진 달의 영토, 고요히 발광하는 외국의 언덕이 되어 있을 테죠. 할머니의 가방이 되어 있을 테죠.
그런데 보세요, 지금, 저 바다 너머 멀리
붉은 연기가 피어오르는군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똑바로 가리키는 내 손짓을 따라서, 일제히 고개를 창밖으로 돌리고, 깜깜한 밤의 허공 어딘가에서 흐릿하게 수직으로 피어오르는 불그스름한 안개를 응시했다.)
저건 바다 한가운데서 붉은 고래가 뿜어올리는 물의 호흡이거나, 아니면 지금 중국 어딘가에서 타고 있는 할머니의 몸이거나 둘 중 하나예요.
벼룩시장에서 할머니의 가방을 발견한 뒤로, 나는 어디나 늘 할머니의 가방을 갖고 다녔습니다. 간혹 내가 형체를 상실한 물과 같다고 느낄 때, 나는 할머니의 가방 안에 들어가 누웠습니다. 놀라운 일이죠. 기나긴 세월이, 거의 한 사람의 반생과도 같은 세월이 흘렀는데 여전히 할머니의 가방은 내가 세 명이나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크니 말입니다. 혹은 그 의미는, 내가 그만큼이나 전혀 자라지 않았다는 뜻일까요? 어쩌면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이 편지에는 할머니가 반두 언덕의 여왕이었다고 적혀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게 무엇이든 간에, 나는 편지에 적힌 것을 그대로 다 믿지는 않습니다. 할머니의 세계는 내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달의 자연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성분의 우주로 이루어져 있는 건 맞지만, 그렇다고 해서 외국에서 온 편지를 어휘 하나하나까지 그대로 신뢰할 수는 없으니까요.
내가 가방을 플랫폼으로 끌고 갔을 때, 할머니는 이미 객실 안에 자리를 잡았고, 기차는 막 떠나려던 참이었습니다. 차창은 커튼으로 반쯤 가려져 있었는데 할머니 곁에는 제복을 입은 차장이 서 있는 것이 보였죠. 나는 가방을 들고 기차에 올라타려고 했으나 어딘가에서 번개처럼 나타난 객실 사환이 기차 안에 선 채로 손을 뻗어 내게서 가방을 받아들었습니다. 그러곤 안으로 사라져버렸어요. 벨이 울렸고, 기차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아주 느리게
나는 시선을 할머니에게 고정한 채 기차가 움직이는 방향으로 따라 걸었습니다. 할머니가 나를 봐주기를 원했습니다. 그 순간처럼 누군가가 나를 바라봐주기를 원한 적은 없었어요. 내 얼굴은 바로 그날 아침 내가 들고 있던 액체 구두약 병처럼, 간절하게 길고 좁은 모양으로 변했습니다. 할머니는 얼굴을 반대편으로 돌리고 차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기차가 점점 더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으므로 나는 곧 뛰다시피 빠르게 걸어야 했죠. 할머니는 모슬린 장갑을 벗고, 차장이 건네주는 유리잔에 든 액체를 마셨습니다. 그동안 차장은 쟁반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죠. 더운 날이었을까요? 나는 이미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으나 개의치 않고 걸음을 더욱 빨리했습니다. 할머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기 때문에 마음이 아주 급했습니다. 잠시 뒤면 플랫폼이 끝나버리고, 나는 더 이상 기차를 따라 달릴 수조차 없게 될 테니까요. 할머니는 빈 잔을 차장에게 건넸고, 차장은 허리를 굽혀 절한 다음 할머니의 객실을 나갔습니다. 할머니는 비쳐들어오는 햇살을 가리기 위해 커튼을 닫으려는 몸짓을 하다가, 기차 곁에서 달려오는 나를 발견했습니다. 그 순간 할머니의 표정이 어땠는지 지금은 생각나지 않아요. 단지 그날 하루종일 생각하고 또 생각한 말을 할머니에게 전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입술을 움직였다는 기억밖에는.
할머니, 나를 데려가줘요, 나를 가방에 넣어줘요, 그러지 않으면 난 구두약을……
난 도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었던 걸까요? 하지만 그게 무엇이든, 말 비슷한 걸 할 수 있는 순간은 아주 짧았고, 번개처럼, 입술이 한 번 달싹거리고 눈꺼풀이 반사적으로 떨리는 시간보다 훨씬 더 짧았고, 플랫폼은 끝나버렸으며 기차는 로켓처럼 빠르게 역을 떠나버렸습니다. 나는 좁고 긴 얼굴로 기차가 떠난 방향을 향해 휘청거렸습니다. 모든 것이 간절한 채로 뒤에 남겨졌죠.
예전부터 나는, 언젠가 자라서 임신을 하게 되면 기차에 뛰어들어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습니다. 소설이나 잡지를 읽으면 종종 여자들이 그렇게 하니까요. 물론 언젠가, 언젠가 먼 미래에 만약 임신을 하게 되면 말입니다.
하지만 그날, 오전의 햇살이 번득이는 환한 플랫폼 위에서 나는.
그런데 이렇게 할머니에 대해서 말을 하다보니, 내 할머니는 어쩌면 정말로 여왕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드는군요. 내가 아는 할머니라면 충분히 가능하지 않았을까요. 내 말은, 반두에 가서 여왕이 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이미 여행을 떠나기 전부터 여왕이었을 거라는 말입니다. 할머니는 몸집이 풍만하고 키가 컸으며, 흔들리지 않는 분명한 발음으로 말했습니다. 할머니의 목소리는 그 누구보다도 굽힘이 없었죠. 혹시 할머니가 머리에 관을 쓰고 손에는 왕홀을 들고 있었는데 내가 너무 어려 알아차리지 못했거나, 아니면 너무도 오랜 세월이 흘러버려 잊은 건지도 모릅니다. 할머니는 누구보다도 건강했으니 백 살이 넘게 살았다 해도 이상하지 않아요. 게다가 어쩌면 할머니는, 남달리 강인한 의지와 능력을 지닌 사람이었을지도 모르죠. 기차처럼 앞으로 나아가는 일 말입니다. 그래서 마음만 먹으면 이 세계를 구원하는 일쯤이야 쉬웠을 것이고, 또 실제로 그렇게 하려고 마음먹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우리가 아무도 모르는 사이, 할머니는 이미 그렇게 했을지도 모르죠.
나는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로 적힌 편지를 어떻게든 읽어보려고 여러 번이나 시도를 했습니다. 할머니의 이름이자 내 이름이 적힌 철자를 기준으로, 자음과 모음의 음소를 각각 분리하여, 다른 철자의 소리를 추측해보려고 했어요. 그래서 어느 정도 들어맞는 모종의 발음 규칙을 발견했다고 생각했고, 그걸 토대로 한 글자 한 글자마다 갖는 고유한 소리를 찾았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각 소리에 가장 어울리는 의미를 내 상상으로 만들어 채워넣었습니다. 그러자 그럴듯한 이야기가, 아니 그림이 완성되었어요. 그 그림에 따르면, 할머니는 매년 봄에 언덕 꼭대기에서 북을 둥둥둥둥 쳤고, 그러면 바싹 마른 암소의 몸에서 송아지들이 미친 듯이 태어났는데, 할머니는 즉시 갓 태어난 송아지들의 가죽을 벗기라고 명령했죠. 반두는 가죽 무역으로 생존하는 오아시스 도시였으니까요.
물론 외국에서 온 편지를 어휘 하나하나까지 그대로 신뢰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지금은 내가 소리를 토대로 하여 상상으로 해독한 편지의 내용을 그대로 옮길 수밖에 없군요. 그러니 설사 오류가 있다고 해도, 아마도 반드시 그렇겠지만, 이해해주기 바랍니다.
할머니는 생의 마지막까지 그곳 반두 언덕의 가장 높은 편평한 고원에서 살았어요. 살짝만 까치발을 들면 구름 속으로 고개를 집어넣을 수도 있을 만큼 높은 곳이죠. 할머니는 반두의 외로운 고원 가장자리, 노간주나무와 송아지 가죽으로 만든 오두막에 살면서, 언덕 아래 너른 골짜기와 계곡 너머 평원을, 벼랑 위의 독수리 둥지를, 물이 말라버린 강바닥과 끝없는 구릉과 낮은 언덕들, 슬픔의 혓바닥으로 암염을 핥는 말라빠진 암소들을 내려다보았다고 해요. 할머니는 왜 나에게 엽서 한 장도 보내지 않았을까요? 할머니는 그곳에서 혼자였을 텐데 말이에요. 낮에는 그늘 하나 없는 언덕 위로 정수리가 벗겨질 만큼 따가운 햇볕이 내리쬐고 밤이면 얼음덩어리로 변한 바위가 터져버릴 만큼 기후는 냉혹한데, 할머니는 매일 밤 꿈속에서 남쪽 평원 저 멀리서부터 서서히 다가오는 송아지 가죽 중개상인 무리의 자욱한 먼지구름을 보았다고 해요.
할머니는 삼십 년 플러스의 세월 동안 반두 언덕 위에서 살다가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할머니는 빈손으로 반두 언덕으로 왔고, 죽을 때도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는군요.
할머니의 몸은 노간주나무와 송아지 가죽과 함께 태워질 거예요. 반두 언덕에는 나무라고는 한 그루도 없지만, 끊임없이 몰아치는 광폭한 바람이 평원 너머 머나먼 숲에서 실어오는 노간주나무 가지들을 모아 불을 붙이는 거죠. 그러면 눈앞을 자욱하게 가리는 흰색 연기가 솟구치면서, 숨막히는 짙은 향기가 피어나요. 처음에 나무에 불이 붙을 때는 아직 남아 있는 숲의 습기와 안개와 이끼, 벌레의 알과 미생물, 짐승의 오줌과 어린 동물의 털을 태우는 독한 냄새가 은은한 사향 냄새와 섞여 풍기지만, 그것은 곧 나무껍질이 연소하는 매콤하고 달콤한 향으로 변해가고, 껍질이 속까지 타들어가기 시작하면 사이프러스 향과 흡사해지는데, 그때 노간주의 초록 이파리를 불꽃 위로 살짝 뿌려주면, 순간적으로 코를 찌르는 쑥냄새, 축축한 도마뱀과 풍뎅이 냄새, 비누 냄새가 퍼지다가, 어느 순간 기름에 담근 진한 달맞이꽃 이파리와 신경독버섯 냄새가 살짝 피어오르면서, 이때부터 사람에 따라서는 두통과 환각이 나타나기도 하고, 마침내 이 모든 냄새가 각각 따로따로 혼재하는 자욱한 연기 속 어느 특정한 지점에서, 정신이 혼미해질 만큼 관능적인 시빗 향이 한 줄기 초록 광선처럼 날카롭게 뻗어나오며, 살이 타기 시작해요. 그 향기는 수십 킬로미터 밖에서도 맡을 수가 있답니다. 독수리들이 몰려들어요. 독수리들은 기회를 노리며 공중을 빙빙 돌아요. 노간주나무 더미는 불꽃 없이 흰 연기만으로 속으로 속으로 타들어가는데, 할머니는 가방도 없이 떠나는군요. 할머니는 여왕이 되었다가,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게 세상을 구원한 다음, 연기가 되었고, 마침내 대머리독수리가 되었어요.”
사람들은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간혹 여자들이 가슴에 사무치는 한숨과 함께 낮은 소리로 소곤대며 말했다.
아아, 정말 아름다운 즉흥시로군요!
하지만 잠시 후, 잭이 홀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크게 박수를 쳤다.
“정말 멋진 할머니예요! 당신 할머니에 비하면 내 할머니 따위는 담배나 축내는 대머리 쌍년에 불과하군요!”
그러자 사람들은 다시 발을 구르고 휘파람을 불면서 즐거워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사회자의 북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우리가 돌아보자 사회자는 조명이 닿지 않는 어두운 구석의 조그만 의자에 쓰러지듯 걸터앉아, 다리를 앞으로 길게 쭉 뻗은 자세로, 인디언 스웨터 위로 고개를 푹 떨군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나는 그가 죽은 줄 알고 깜짝 놀랐으나 사실은 잠이 든 것임을 곧 알아차렸다. 그의 콧구멍이 규칙적으로 벌름거렸기 때문이다. 나는 내 낭송이 너무도 지루해서 그가 잠이 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잭이 위로하듯 내 어깨를 친근하게 두드렸다.
“당신 낭독은 문제없었어요. 그러니 걱정 말아요. 저 사람은 보다시피 나이가 너무 많아서, 스스로 잠을 조절할 수가 없는 거예요. 아무데서나 순간적으로 잠에 빠져들죠. 집으로 돌아가다가 길가의 벤치에서 잠들어버릴 때도 있다더군요. 어쨌든 덕분에 작별 인사는 따로 필요 없겠네요.”
잠시 후 나는 할머니의 가방을 들었고, 잭과 함께 숙소로 돌아갔다. 우리는 가파르게 경사진 언덕의 비탈길을 내려갔다. 잭이 가방을 들어주겠다고 제안했지만 나는 가방이 비어서 무겁지 않다고 사양했다. 둥그렇고 커다란 달이 서로 가볍게 장난치는 우리의 그림자를 말없이 따라왔다. 밤의 높은 언덕에는 흰 백합꽃 향기…… 내 귀에 달콤한 농담을 지껄이던 잭이 문득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조금 전 당신의 시낭송을 들으면서 생각한 게 있는데요……”
“그건 즉흥시였어요. 앞뒤가 맞지 않는 건 그 때문이고요.”
나는 서둘러 변명했다.
“아, 물론 그랬겠죠. 당신이 원고도 없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낭송해서, 즉흥시일 거라고 짐작은 했어요. 그런데 내 말은……”
“난 기억력이 나빠서 세 줄 이상의 긴 시는 못 외워요.”
“기억력 얘기를 하려는 건 아니에요. 당신 할머니가……”
“할머니에 대해서는, 아직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아요. 어쨌든 난 장례식에 가지 못했으니까요. 이제 할머니는 다 타버렸고, 할머니는 더이상 없어요. 할머니에 대해서 할 말도 없다는 뜻이에요.”
“내 말은, 할머니가 아니라 할머니가 살았다는 곳에 관해서인데요.”
“나는 그게 어디인지 몰라요.”
“그런데 난 알 것 같단 말입니다.”
나는 말없이 잭을 바라보았다.
“난 북경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내 아버지는 북방의 소수민족 출신이었죠. 그는 무역 일을 한다면서 주로 북쪽 지방을 떠돌아다녔어요. 단 한 번 아버지를 따라서 외몽골로 간 것이 기억나요. 너무도 어렸을 때라서 정확하지 않지만요. 아버지는 나를 데려가고 싶어서가 아니라, 내가 태어난 지 몇 달 만에 어머니가 죽는 바람에 당장 날 돌봐줄 사람이 없었고, 그래서 할 수 없이 아기인 나를 발가벗긴 채로 바구니에 넣어서 당나귀에 싣고 갔다고 해요. 물론 여행중에 내가 죽을 거라고 충분히 예상했지만, 아무도 없는 빈집에 덩그러니 남겨두어 동네 개들에게 산 채로 먹히게 할 수는 없었으니까요. 그렇게 나는, 한 달도 넘게 당나귀 등에서 흔들리고, 당나귀 젖을 먹으면서, 따가운 햇볕에 상반신 피부 껍질이 다 벗어지고, 소나기가 쏟아지면 그걸 고스란히 맞으면서 먼 길을 갔죠. 내가 그 여행에서 살아남은 건 기적이라고 해요. 다른 건 생각나지 않아요. 나무도 풀도 없는 황량한 언덕이 끝도 없이 이어졌어요. 그리고 마침내 저 멀리서, 구름 위로 높이 솟아 있는 꼭대기가 편평한 고원이 나타났는데, 사람들이 그곳이 우리가 가야 할 반두라고 말했던 기억이 나요. 뭐 물론 비슷한 다른 이름이었을 가능성도 있긴 합니다. 당시 난 혼자서 걸을 줄도 모르고 말을 배우기도 전이었으니까요. 말을 모르는데 어떻게 이름을 기억하느냐고요? 그건 나도 설명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기억에 그 이름만은 생생해요. 너무 오래 전 일이라서, 다른 건 아쉽게도 하나도 생각나지 않아요. 당신의 시에서 반두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나는 몸이 부르르 떨리는 것을 느꼈어요. 내가 알지만 오래 전에 잊은 그 무엇이, 별 모양의 유릿조각이 되어 내 언어의 중심에 와서 깊이 박히는 느낌이었죠. 나는 반두를 아는 걸까요? 나는 당신의 할머니를 만났던 걸까요? 어쩌면 내가 당신을 조금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몰라요.”
“당신이 뭘 할 수 있겠어요? 이제 할머니는 타버렸고, 지금쯤은 노간주나무 연기도 모두 사라졌을 텐데요. 설사 당신이 어린 시절에 간 곳이 정말로 할머니의 언덕이라 할지라도 말이에요.”
“그 편지.”
“뭐라구요?”
“그 편지 말이에요, 당신이 시낭송 때 꺼내 보여주었던 편지. 그걸 내가 볼 수 있다면.”
“당신은 그 편지를 읽을 수 없어요. 그건 중국어도 영어도 아니에요.”
“물론 읽을 수는 없죠. 나는 반두어를 모르니까요. 편지는 반두어로 쓰인 거겠죠? 하지만 내 말을 들어봐요. 내가 아기일 때 반두에 갔다고 말했죠? 난 거기서 최초의 말을 배웠어요. 아니 정확히 말하면, 최초의 말을 들었다고 해야겠죠. 물론 내가 그것을 들었다는 건 그냥 정황일 뿐이지 특별한 기억이 있는 것도 아니에요. 그 언어를 습득한 것도 물론 아니고요. 난 갓난아기였으니까요. 그건 마치 우리가 어머니 뱃속에서 들었던, 하지만 지금은 전혀 기억할 수 없는 말처럼, 무의식의 언어였을 뿐이에요.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북경으로 돌아왔고, 이후로 두 번 다시는 반두에 간 적도, 반두에서 온 사람을 만난 일도 없고 반두어를 듣지도 못했어요. 게다가 나는 유난히 말이 늦어서 거의 열 살이 다 되어서야 제대로 된 문장을 말하기 시작한 아이였답니다. 그래서, 오해를 피하기 위해 다시 말하는데, 지금 난 예전과 마찬가지로 반두어를 전혀 몰라요. 반두어의 음절이 어떤 소리를 갖는지, 꿈에서도 상상할 수 없죠.”
“당신 말의 의미는 알아들었어요. 우리는 아무도 반두어를 말할 수 없어요. 그건 나도 알아요.”
“아니, 당신은 내 말의 의미를 몰라요. 내가 아직 다 말하지 않았으니까요. 바로 이겁니다. 당신의 시낭송을 듣고 있다 보니 문득 기묘한 생각이 떠올랐어요. 만약 지금 다시 반두어를 듣게 된다면, 당신이 소리로 발견하고 상상으로 파악한 그 편지를 만약 내게 소리 내어 천천히 읽어준다면, 그러면 나는 마치 생의 최초에 그랬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저절로 그 의미를 이해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말입니다.”
“신비로운 이야기로군요.”
내가 말했다.
“말이란 신비하니까요.”
잭이 대답했다.
“고맙지만, 난 이제 편지 내용이 하나도 궁금하지 않아요.” 우리는 한동안 조용히 입을 다물고 나란히 걸었다. 우리는 말을 나누지 않았다. 집들과 거리는 잠든 듯이 고요했다. 몇몇 모퉁이에서 아직도 문을 연 식당의 불빛이 반짝일 뿐이었다. 우리의 눈앞에 붉은 간판의 중국 식당이 나타났다.
“중국인 세례 요한의 머리 로군요.”
잭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우리는 식당 앞 빈 벤치에 앉았고, 나는 주머니에서 편지 뭉치를 꺼냈다. 그러고서 그것을 소리 내어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잭은 한 손으로 머리를 비스듬히 받친 자세로 귀를 기울였다. 따스하고 축축하고 우유처럼 흰 이른 봄밤이었다.
나는 손을 뻗어 할머니가 탄 열차의 유리창을 두드렸다. 땀에 젖은 손바닥 때문에 유리창에 얼룩이 생겼다. 할머니가 나를 돌아보았으나 그 얼굴 표정은 기억나지 않는다. 바로 그 순간 기차가 로켓처럼 빠른 속도로 플랫폼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 반향으로 모든 사물들의 윤곽이 허물어졌고, 순식간에 터져 나온 붉은 입자들이 파국의 방향으로 산란됐다. 나는 충격을 받고 비틀거렸다. 플랫폼이 흔들렸고 나는 육체의 한 부분에 붉은 입자를 뒤집어쓴 채 홀로 남겨졌다. 나는 내가 아는 곳 그 어디로도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나는 파국을 향한 열망을 느꼈다. 나는 떨어지고 싶었다. 빌딩이나 계단이나 지붕이나 플랫폼 위에서. 생애 처음으로, 너무도 강렬하게, 추락의 열망을 느꼈다. 순식간에, 플랫폼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모든 파국적인 것에 대한 열망을 느꼈다. 오직 그런 순간을 경험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죽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았다. 분명히 알았다. 아무런 희망 없는 상태로, 할머니조차 없이, 이제 막 초경이 시작된 소녀는 임신한 여인과 마찬가지로 붉고 축축한 죽음과 가장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다음 번 기차가 지나갈 때 그 아래로 뛰어들어야지. 나는 무의식적으로 이렇게 마음먹었다. 플랫폼에서 꼼짝 않고 서서 기차를 기다렸다. 다리가 저렸으나, 울지 않으려고 애썼다. 한 시간쯤 기다렸지만 이상하게 기차는 오지 않았고, 태양이 높이 떠오르면서 햇살은 점점 더 강해질 뿐이었다. 나는 선로의 침목 사이에 들어가 눕고 싶었다. 뜨겁겠지만 그래서 더욱 내가 원하는 것에 가까워질 것이라고 믿었다. 침목 사이에서 기다리는 편이 플랫폼에 서서 기다리는 것보다 수월할 것이 분명했다. 플랫폼에는 아무도 없었고, 선로로 내려가 눕는 나를 발견하는 사람도 아무도 없었다. 너무 이른 죽음은 어리석은 결정이라고 사람들은 늘 말한다. 그런데 그들은 지금 내가 느끼는 것을 느낄까?
그런데 내 느낌이란 무엇일까? 형체가 사라지고 존재만 남은 가방과 같은 이것, 파국을 향해 산란되는 이것.
아마도 그날, 밤이었다. 나는 얼굴 위로 쏟아지듯 요란한 비가 내린다고 생각했지만, 곧 그것은 비가 아니라 소리라는 것을 알았다. 기차가 막 내 위로 지나간 것 같았다. 하지만 깜깜해서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압도적인 강철과 압도적인 소리가 나를 멀리멀리 떠밀고 간 것 같았다. 너무 이른 죽음. 나는 어느덧 일어서 있었는데, 그건 서너 명의 사람이 나를 양쪽에서 붙잡고 일으켜 세웠기 때문이다. 작업복 차림의 선로 보수 인부들이었다. 손전등 불빛이 내 얼굴을 정면으로 비추었으므로 눈이 부셔서 죽을 듯이 고통스러웠다.
얘야, 여기서 잠들면 안 돼, 하고 누군가가 말했다. 기차가 지나다니잖아, 얼마나 위험한지 모른단 말이냐?
어서 집에 가거라, 하고 다른 누군가가 거들며 뜨거운 손바닥으로 내 등을 밀었다. 잠에서 완전히 깨어나지 못한 나는 방향감각을 잃고 비틀비틀 걸었다. 그러자 그들은 내 몸을 들어 플랫폼 위로 올려주었다.
저애 얼굴이 멍투성이로군, 약이라도 발라줘야 하는 거 아닐까, 하고 뒤에서 누군가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다. 바람이 조금도 없는 덥고 습기 찬 밤이었는데도 이상하게 추웠다. 미지근한 물에 젖은 듯 몸이 덜덜 떨렸다. 어둠이 드높은 벽처럼 겹겹이 서 있었다. 좀 떨어진 곳에서 망치 소리와 침 뱉은 소리가 들렸다. 강하고 확고한 인부들의 발소리가 멀어져갔다. 수직의 검은 벽에서 물줄기가 똑바로 떨어졌다. 밤의 꽃잎이 세차게 벌어졌다. 인부들은 어두운 선로를 따라, 투명한 밤의 벽을 따라, 똑바로 떨어져내리듯 순식간에 사라졌다. 커다랗고 뜨거운 손바닥 하나가 어둠 한가운데 걸려 있었다.
그들은 지금 내가 느끼는 것을 느낄까?
“신비한 이야기군요.”
한참 만에 잭이 입을 열었는데, 그의 표정과 목소리는 과장된 들뜸과 장난스러운 기색이 완전히 사라져서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말이란 신비하니까요.”
내가 대답했다.
“내가 그 말을 이해할 수 있다니, 믿어지지 않습니다.”
잭은 여전히 충격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얼굴이었다.
“난 당신이 소리 내어 읽은 그 언어를 온전하게 이해할 수가 있었어요. 어쩌면 내게는 선험적 말이고, 말 이전의 말이었는데! 제안을 하긴 했지만, 크게 자신이 있었던 건 아니었어요. 아니 솔직히 고백하자면, 알아듣지 못하더라도 적당히 꾸며대서 당신을 웃겨볼 생각이었던 거예요. 정말로 내가 온전히 이해하리라고는 절대로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내가 정말로 이해를 했단 말입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 도저히 설명할 방법은 없지만요. 그건, 그건 당신의, 아니, 당신과 같은 이름을 가진, 어쩌면 당신 할머니일 수도 있는 소녀의,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요, 매우, 매우, 아아 답답해 미치겠네,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요, 매우 언유주얼한 이야기였어요. 그래서 더욱 놀랍습니다.”
잭은 충격과 감동으로 몸을 부르르 떨면서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는 이어서 말했다.
“놀랍게도, 우리의 경험이란, 사실 우리의 직관이 눈에 보이는 형체를 입고 나타나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건 무슨 소리인가요?”
“정말 모른단 말인가요? 방금 당신이 읽은 편지의 마지막 구절이었잖아요.”
나는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알고 싶지 않나요? 방금 당신이 스스로 읽은 편지에 담긴 이야기 말입니다. 내가 이 자리에서 그대로 다 번역해줄 수 있어요. 정말이에요.”
잭의 말투에는, 이상하게도, 이해할 수 없는 간절함과 애원이 묻어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내 앞에 무릎이라도 꿇고 싶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하지만 나는 거절했다.
“아니, 알고 싶지 않아요. 고맙지만, 이미 말했듯이 지금 나에게는 편지 내용이 뭐든 상관이 없으니까요.”
우리는 어둡고 가파른 거리를 따라 계속해서 내려갔다. 우리가 떠나자, 중국인 세례 요한의 머리 식당의 불이 꺼졌다.
그날밤, 나는 숙소의 부엌에서 할머니의 푸른 양철 가방 위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우며 유리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숨막히는 밤이었고, 이상하게도 나는 나체였다. 나는 아무 것도 설명할 수 없다. 텅 빈 거리 흐릿한 가로등 아래 벤치에 한 남자가 길게 누워 잠들어 있었다. 두 발이 벤치 밖으로 튀어나온 남자는 화려한 인디언 문양의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나는 그가 죽은 줄 알고 깜짝 놀랐으나 사실은 잠이 든 것임을 곧 알아차렸다. 사슴을 연상시키는 어떤 단어와 매우 흡사하게 들리는 이름 하나가 멀고 투명한 언덕 위에 고요히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달이 빛나는 맑은 밤인데도 불구하고 검은 자동차가 비에 젖은 듯 번득이며 지나갔다. 그리고 모든 것이, 내가 모르는 팔월처럼 번득였다. 내가 모르는 언어로 적힌 편지는 파국을 향해 붉게 산란됐지만, 그 소리의 여운은 여전히 내 혀끝에서 맴돌고 있었다. 그것은 나와 같은 이름을 가진 소녀에 관한, 길고, 늙고, 팔월처럼 번득이는, 한없이 섬뜩하고 한없이 음란한 편지였다. 나는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는 채로, 홀로 몸서리쳤다. 침실에서 잭이 라디오를 켰다. 재즈가 흘러나왔다. 잭이 찰스 밍거스의 선율에 따라 몸을 움직이는 것이, 열린 침실 문을 통해서 보였다. 나는 벤치 위에서 잠든 남자의 발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먹다 남은 살라미 샌드위치 포장지 한 귀퉁이에 담배를 눌러 껐다. 그러고 나서 푸른 양철 가방을 쓰다듬으며 잠시 궁금해 했다. 기차가 내 위를 지나갈 때 내가 느끼는 것을
지금 그도 느끼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