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센 드 뒤에프
뒤에프 가문의 조상은 프랑스의 토착세력으로 프랑스 중부의 앵드르 지방 옆 에기유라고 불리는 마을의 우두머리였으며, 후대로 내려올수록 세력이 차츰 커져서 크뢰즈 지방의 성주로서 프랑스 국왕의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에 따라, 아르센의 조부이신 퐁테 드 뒤에프 또한 크뢰즈 지방의 소영주로서 당시 부르고뉴 공령의 휘하에 있었다.
EN 243년 1월, 부르고뉴 공령으로서 퐁테 드 뒤에프의 상관이던 카를 1세가 피핀 3세와 연합해 반란을 일으키고 반왕파에 서고 내전을 일으키자, 퐁테 드 뒤에프는 카를 1세를 따라 반왕파에 서게 되었다.
당시 부르고뉴 남쪽의 랑드로크 공령은 근왕파였는데, 랑드로크는 군대를 둘로 갈라 한쪽은 아키텐 공령의 모든 전선을 일제히 치고, 주력군은 내전 당시 피핀 3세를 직접 공격할 수 있는 최단거리로서 전략적 요충지였던 크뢰즈 지방을 공격해 들어갔다.
하지만, 퐁테는 목숨을 걸고 분전하면서 크뢰즈 지방을 끝까지 사수해냈고, 더욱이 랑드로크 군대에게 수성전과 게릴라전을 적절히 구사해 랑드로크의 주력군은 랑드로크 공령 내의 마르세유에서 반란이 일어났는데도 마르세유로 후퇴할 수가 없었다.
결국 주력군을 크뢰즈 지방에 떨궈놓아버린 랑드로크 공령은 아키텐을 공격하던 군대만을 이끌고 마르세유로 철수하다가 오히려 마르세유의 반란군과 아키텐 공작의 추격군 사이에서 전멸하게 되었다.
그렇게 EN 243년 2월 10일, 파리 전투로 내전은 반왕파의 승리로 돌아갔다.
하지만, 바로 이 파리 전투에서 퐁테는 화살에 맞아 사망하게 되고,
아르센의 부친인 프랑시 드 뒤에프가 퐁테의 뒤를 잇게 된다.
프랑시는 부친 퐁테의 전공을 인정받게 되어 성주에서 남작으로 승격되고, 마르세유 공령 북쪽 랑드로크의 옛 영지 일부를 추가로 수여받아 부르고뉴 공국 휘하에서 자신의 입지를 굳혀나갔다.
그러나, EN 제 243년 4월, 프랑시에게도 위기가 닥쳐왔다.
피핀 왕가가 끊겨 새로이 왕으로 선출된 전 부르고뉴 공 카를 1세가 전국을 개편하여 영지제를 없애고 관료제로 대체시킨 것이었다. 뒤에프 가문에는 대대로 상당한 급여가 내려지긴 했지만, 영지 크뢰즈는 몰수되어 카를 1세의 직속 관료가 들어오게 되었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4년 뒤에는 삼부회가 열려 귀족의 권위가 몰락하게 되었다.
따라서, 내전시대에 퐁테를 따라 분전하며 명장으로 이름을 떨치던 프랑시는 카를 1세에 대한 실망감과 배신감에 술을 입에 대기 시작했고, EN 251년. 결국은 알콜중독자가 된 상태에서 44세의 이른 나이로 죽음을 맞게 되었다.
그리고, 몇달 뒤. 프랑시의 장례를 모두 끝낸 젊은 아들 아르센은....
첫댓글 누구신지?? 친하게 지내요~~!!
새로운 분이시군. 친하게 지냅시다- (그나저나 요즘 프랑스는 잠수인데 잘된건가..)
후암, 카를 1세가의 방탕한 생활에 새로운 군웅인가?
새로운 분이시군요. 거기다 프랑스 출신이시라니,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