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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2. 1864년∼1910년대의 조선
1864∼1910년의 시기는 한국사의 일대 변혁기였다. 중국 중심의 세계 질서로부터 이탈해 근대적 국제 질서 속에 편입된 조선은 서구 열강과 그것을 모방한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에 대처하고, 또 국내의 모순을 해결하면서 근대 민족국가를 건설해야 하였다.
따라서, 이 시기 역사는 전통 사회의 해체, 제국주의의 침략과 그것에 대응하는 보수·개화의 상호 작용으로 빚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그 상호 작용은 자주적 근대 민족국가 건설로 승화되지 못하였다. 때문에 이 시기의 한국사는 조선 왕조가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굴복해 식민지로 전락해 가는 과정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유례없는 변혁기를 통해서 한국 민족은 근대적 민족국가 건설의 이상을 추구하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일제식민지 치하에서의 거족적인 3·1운동과 상해 임시정부의 수립은 바로 이러한 노력의 결실이었다.
견제와 균형이 이루어졌던 조선 왕조의 양반정치 체제는 19세기에 들어와 무너져갔다. 순조·헌종·철종 등은 모두 어린 나이에 즉위, 오랫동안 외척 세력이 정치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이러한 척족의 세도정치 하에서 과거제도는 문란해졌고 중앙 관리들도 부패하였다. 뇌물로 관직을 획득한 지방관들의 탐학은 농민의 부담을 무겁게 하였다.
국가의 재정적 원천인 삼정(三政)의 문란으로 농민들의 피폐상은 극도에 달하였다. 이에 19세기 초반에는 홍경래(洪景來)의 난, 진주민란 등의 민란이 전국적으로 만연하였다. 이러한 대내 문제의 해결을 위해 삼정구폐책(三政救弊策)이 자주 건의되었으나, 효과적으로 실시되지는 못하였다.
조선 정부는 한편으로 서구 열강의 위협이라는 대외 문제에도 직면, 만성적인 외우내환을 겪고 있었다. 19세기에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물결을 따라 서양 선박이 해안에 자주 출몰해 통상을 요구하였다.
조선 정부는 이와 같은 서구 세력의 침투에 대비해서 효과적인 대응책을 수립하지 못하고 천주교에 대한 박해만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정계에 등장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대원군은 1863년 고종의 즉위를 계기로 실권을 장악, 대내적으로는 세도정치의 폐단을 일소하고 일원화된 명령 계통 하에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구축하였다. 또, 대외적으로는 서양 세력의 침투를 방지하기 위해 천주교를 탄압하면서 쇄국정책(鎖國政策)을 강행하였다.
1866년의 제너럴셔먼호 사건·병인양요(丙寅洋擾), 1868년의 남연군묘도굴 사건(南延君墓盜掘事件), 1871년의 신미양요(辛未洋擾) 등을 통해서 나타난 대원군의 강력한 쇄국 의지는 위정척사사상에 젖어 있던 양반 유생과 국민들의 지지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이 무렵 1868년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단행해 천황제로 복귀한 일본은 대마도주를 중개로 한 전통적인 한일외교의 통상 관계를 근대적 외교 관계로 전환시키기 위해 교섭하였다.
그러나 서양이나 일본의 실정에 무지, 무관심했던 조선 정부는 일본측이 외교문서에서 ‘황상(皇上)’·‘조정(朝廷)’ 등 중국에만 사용할 수 있는 용어를 사용했고, 종래에 조선 정부가 만들어준 도서(圖書: 인장)도 사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일본 사절과의 협상을 거부하였다.
이는 구교(舊交)의 지속을 지향하는 조선과 근대적인 신교(新交)를 노리는 일본과의 외교 정책에서 빚어진 국서(國書)의 거부였다. 이를 계기로 일본 정부 내에서는 정한론(征韓論)이 대두되기도 하였다.
대원군의 대외 정책은 국민의 지지를 받았으나, 개혁 정치는 문제점도 있었다. 삼정 개혁은 성공적이지 못했으며, 화폐 정책은 유통 질서를 혼란시켰다. 또, 과감한 서원 철폐는 유림들의 많은 원성을 샀다.
때문에 고종이 성년이 되면서 정계에 등장한 민씨 척족들은 대원군의 전제에 불만을 품게 되었다. 민비(閔妃, 명성황후)를 중심으로 한 반대원군 세력은 유림들의 불만을 이용해 1873년(고종 10) 대원군을 하야시키고, 고종의 친정 체제(親政體制)를 출범시켰다.
정권을 장악한 민씨 척족은 조세를 탕감하고 청나라 전(錢)의 사용을 금지시키는 등 대내적으로 개혁 정책을 펼침과 동시에, 일본에 대해서는 쇄국 정책을 포기하고 유화 정책(宥和政策)으로 전환하였다.
조선의 정치 변화를 알아차린 일본도 다시 통교 교섭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조선측이 여전히 의전 문제(儀典問題)로 일본이 원하는 교섭을 거부하자, 일본은 협상을 중단하고 포함외교(砲艦外交)라는 수단을 동원하기로 결정하였다.
즉, 일본은 1875년에 운요호사건(雲揚號事件)을 유발해 이를 구실로 이듬해 2월에 군함 수척을 강화도로 몰고와 무력 위협을 하면서 강제로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 일명 강화도조약)를 체결하였다.
일본과 조약으로 개항 정책을 취하게 된 조선은 1880년대에 접어들면서 개화당의 주장과 청나라의 권도(勸導)에 따라 구미 여러 나라와도 통교하게 되었다. 이 때 조선의 위정자들은 균세 정책(均勢政策)으로써 어느 한 열강이 조선에 대해 독점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을 견제하면서 자강을 도모하였다.
그 결과 조선은 1880년대에 미국·영국·독일·러시아·프랑스 등 구미 각국과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다. 문호 개방 이후 조선 내에서는 박규수를 중심으로 새로운 국제정세에 대응하면서 나라의 부강을 꾀하자는 개화사상이 형성되었다.
조선 정부는 일본과 조약을 체결한 뒤, 수신사를 파견해 일본의 근대 문명을 견학하고 부국강병술을 배우려고 하였다. 특히, 1881년에는 의정부 밑에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을 설치해 개화·자강운동을 총괄하게 하는 한편, 일본에 조사일본시찰단(朝士日本視察團, 일명 紳士遊覽團)을, 청나라에는 영선사(領選使)를 파견해 각종 근대 시설을 시찰하도록 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 뒤 일본에 제3차 수신사를 파견하였다. 또 미국과의 조약 체결 뒤인 1883년에는 미국에 보빙사(報聘使)를 파견하였다. 이러한 근대문명 시설의 시찰과 서양소개 서적의 전래로 개화사상이 널리 퍼지면서 개화당이라는 개화 세력이 점차 형성되었다.
개항 후 개화·자강 정책이 추진되는 가운데 외국 상인이 조선 시장에 침투하기 시작하였다. 조일수호조규로 치외법권·무관세무역권·조계설치권 등을 획득한 일본은 1876년 부산, 1879년 원산, 1881년 인천 등을 차례로 개항시켰다.
그리고 이들 개항장을 통해 조선의 미곡 및 금을 싼 가격으로 수입해가고, 영국산 면제품을 비싼 값으로 조선에 수출하는 중개 무역으로 경제적인 침투를 시작하였다.
일본은 조선이 1883년 관세권을 회복할 때까지 7년 간 항세(港稅)와 상품의 수출입세를 부담하지 않고 조선의 대외 무역을 독점하였다. 미곡이 일본으로 대량 유출되는 배경 하에서 1881년에 신식 군대인 별기군(別技軍)이 창설되자 이에 불만을 품은 구식 군인들은 마침내 녹봉미 문제를 계기로 폭발하였다.
1882년 7월 겨와 모래가 섞인 녹봉미를 지급받은 구식 군인들은 이를 구실로 대원군의 은밀한 지원 하에 임오군란을 일으켰다. 이 군란은 황준헌(黃遵憲)이 쓴 『조선책략』의 전래를 계기로 1881년에 일어난 유생들의 위정척사운동과 맥을 같이하고 있었다. 임오군란으로 대원군은 일시 정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오장경(吳長慶)이 거느린 청나라 군대가 개입해 군란은 진압되고 대원군은 청나라로 끌려갔다. 군란 때 피해를 본 일본은 청나라보다 늦게 군대를 파견하고, 조선측에 배상을 요구하면서 제물포조약(濟物浦條約)을 체결하였다. 일본은 이 조약을 통해 배상은 물론 외교권과 상권을 확장하였다.
한편, 개항 이후 일본 세력의 독점적 진출에 불안을 느껴왔던 청나라와 민씨 척족정권은 1882년 10월에 조중상민수륙무역장정(朝中商民水陸貿易章程)을 체결하였다. 청나라는 이 조약으로 조선에 대한 종주권(宗主權)을 강화하고 무역을 증대, 적극적으로 정치 간섭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친청보수 노선으로 기울어진 민씨 척족정권은 친일개화파를 정권에서 축출하려 하였다. 이 때 조선 정부는 균세 정책을 계속 추구해 미국·영국·독일 등 구미 각국과 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
청나라와 민씨 척족정권의 의도가 어떠하던 간에, 1880년대 구미 각국과의 통교와 임오군란으로 인한 청나라의 군사 개입으로 조선 내에서는 개화 세력과 보수 세력의 대립이 더욱 첨예화되었다.
개화사상과 반청민족주의사상에 불타는 김옥균(金玉均) 등 급진개화파는 1884년 12월 4일 우정국(郵政局) 개국 축하연을 이용, 쿠데타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갑신정변(甲申政變)은 개화당의 국제 정세 오판, 국내 지지세력 기반의 취약성, 그리고 청나라의 즉각적인 군사 개입 등의 이유로 실패하고 말았다.
정변 후인 1885년에 청·일 양국은 양국 군대의 철수, 제3국 군사교관의 추천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톈진조약(天津條約)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의 체결로 조선에서는 청·일간에 세력 균형이 이루어진 듯했으나, 그것은 표면에 불과하였다.
청은 그 뒤 정치적·군사적으로 조선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였다. 동시에 조선 시장에서 청·일간의 상권 다툼은 격화되었다.
청나라의 고압 정책과 청·일간의 경쟁에 불안을 느낀 조선 국왕과 정부 일각에서는 러시아 세력에 영합해 난국을 타개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것이 곧 2차에 걸친 한로밀약사건(韓露密約事件)인데, 러시아의 미온적 태도와 청나라에 의한 사전봉쇄 외교 때문에 결국 실패로 끝났다.
1885년 이후 청은 위안스카이(袁世凱)를 주차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駐箚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로 서울에 파견, 조선의 정치를 감독하게 하였다. 1885∼1894년 간 위안스카이에 의해 추진된 청의 노골적 간섭 정책은 전통적 종속 관계를 강화해 속국화(屬國化)하려는 것이었다. 때문에 개화파의 개화운동, 자주적 외교수립 노력, 외국에서의 차관도입 시도 등 조선의 자주적 개혁 움직임을 억압하였다.
임오군란 및 갑신정변 등을 계기로 조선을 둘러싼 청·일간의 대립이 심화되는 가운데, 개항 이후 서서히 증가 추세를 보여온 조선의 대외무역량은 1890년대에 접어들면서 새로운 수준으로 비약하였다. 이것은 처음 개항장에 집중되었던 외국 상권이 내륙의 지역까지 뻗어나감으로써 가능했던 현상이었다.
외국 상인, 특히 일본 상인들의 수법은 처음 객주(客主)·여각(旅閣) 등 토착 상인을 중개로 한 간접무역 방식에 의존하였다. 그러나 나중에는 조선인 거간(居間)을 기용, 조선인 생산자와 소비자를 직접 상대하는 직접무역 방식으로 바뀌었다. 이에 따라 국민들은 외국 상인의 침투를 피부로 실감하게 되었다.
자국 정부의 정책적 보호 하에 진출해온 청·일 양국 상인들을 상대로, 조선인 민간 상인들 중에는 상회사(商會社)라는 일종의 동업조합을 결성, 청·일의 상권 침략에 대항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정부는 이러한 청·일 양국의 경제 침투와 그에 따른 경제 침해에 효과적인 대책을 마련하지 못하였다.
중앙정부 관리들은 오히려 매관매직으로 인사 및 과거제도를 문란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증대하는 국가 경비의 염출을 위해 농민을 가일층 수탈하였다. 지방관들도 상품, 특히 쌀의 유통을 촉진시키면서 중간 수탈을 하는 데 급급하였다. 따라서, 조세부담 증가와 관리들의 탐학에 대한 농민들의 불만은 고조되고 있었다.
한편, 미곡 수출을 위한 상업적 농업의 전개로 농촌 경제 내부에서는 부농과 빈농간의 격차가 심화되었다. 또한 일본 상인에 의한 대량의 면포 공급과 근대적 생활 잡화의 유입으로, 농촌의 수공업적 면포 생산이 위축되었다. 동시에 경제 부담의 증가로 농촌 사회의 경제 사정은 더욱 어려워지기만 하였다.
1890년대의 농촌은 이러한 여러 모순들이 혼합되어 긴장의 도가 극한까지 이르고 있었다. 이와 같은 농민의 불만은 1894년 전라도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의 탐학을 계기로 민란으로 표출되었다.
고부민란(古阜民亂)에 가담한 농민들의 항거는 동학이라는 종교 조직을 통해 조직화되어 대규모적인 동학농민의거로 발전되었다.
전봉준(全琫準)이 지도한 동학농민군은 정부군보다 우세해 한때 전주성(全州城)을 점령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정부의 요청에 의한 청군의 개입과 이를 악용한 일본군의 출동으로, 이 내란은 곧 국제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동학농민군은 청·일 양국 군대의 개입으로 사태가 복잡하게 되자 폐정개혁안(弊政改革案)을 제시하고 정부측과 전주화약(全州和約)을 맺은 다음 자진 해산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은 철병도 하지 않고 계속 주둔하면서 조선의 내정 개혁을 구실로 청일전쟁을 일으키고, 7월 23일에 친일개화파로서 구성된 김홍집(金弘集)내각을 수립하였다.
1894년 7월부터 1896년 2월 아관파천(俄館播遷)에 이르기까지 김홍집과 박영효(朴泳孝) 등의 친일정권 하에서 추진된 일련의 근대적 개혁을 갑오경장이라고 한다. 그러나 좁은 의미의 갑오경장은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가 추진한 1894년 7∼12월간의 개혁을 의미한다.
갑오경장은 일본의 정치적·군사적 엄호 하에서 수행된 것이었으나, 추진 주체는 조선의 개화파 관료였다. 때문에 그들의 정책 구상과 동학농민군의 폐정개혁 요구가 반영된 점에서 제한된 의미에서나마 자율적인 개혁이었다.
군국기무처가 추진한 개혁은 청나라에 대한 독립 선양, 왕실과 의정부를 분리시킨 근대적 내각제도의 도입, 양반중심 신분제도의 철폐, 재정의 일원화, 과거제도의 폐지 등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또한, 일본 화폐의 유통을 합법화시키는 등 일본의 이익을 뒷받침해주는 개혁안도 포함되어 있었다.
청일전쟁이 유리하게 전개되자 일본은 친일 정권에 대해 적극적인 간섭 정책을 취하였다. 그에 따라 초기 갑오경장의 자율성은 퇴색해갔다. 게다가 갑오경장 추진 세력은 반외세·반침략을 위해 궐기한 동학농민의병(제2차 동학농민의거)을 일본군과 함께 진압하기까지 하였다.
갑오경장 기간 중에 선포된 「홍범14조 洪範十四條」에 나타난 바와 같이, 조선은 청일전쟁을 계기로 청나라와의 전통적인 종속 관계를 끊고 독립하였다.
동시에 조선은 정치·경제·문화 등 다방면에 걸쳐 일본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되었다.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조선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들 것을 목표로 적극적으로 간섭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일본의 기도는 러시아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한편, 조선의 집권층 내부에서는 친러파·친미파가 형성되었다. 삼국 간섭 후 민비를 중심으로 한 조선 정부는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여 일본 세력을 몰아내려는 ‘인아거일책(引俄拒日策)’을 추진하였다.
이에 당황한 일본은 1895년 10월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일으켜 민비를 시해하였다. 이 사건으로 일반 민중들의 반일 감정은 고조되었고, 친일 내각 김홍집 정권의 위신은 실추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제3차 김홍집 내각이 실시한 1895년 말의 단발령(斷髮令)은 국민들을 더욱 격분시켜, 결국 유생 중심의 의병 투쟁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의병 봉기로 인한 혼란을 틈타 고종은 1896년 2월에 러시아 공사관으로 망명하였다. 이를 아관파천이라고 하는데, 이후 성립된 정권은 의정부의 부활, 지방 관제의 개혁 등 복고적인 정책을 실시하였다.
또한, 친일파들을 제거하고 러시아의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을 초빙하는 등 친러노선을 취하였다. 이후 조선에서 일본의 정치적 영향력은 격감하고 그 대신 러시아 세력의 침투가 활발해졌다. 따라서 조선을 둘러싼 러·일간의 세력 다툼이 심해졌는데, 이러한 상황 하에서 대한제국(大韓帝國)이 성립되었다.
아관파천 뒤 1년만인 1897년 경운궁(慶運宮)으로 환궁한 고종은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구본신참(舊本新參)’의 원칙 아래 개혁을 계속하였다. 대한제국은 왕을 황제로 격상시키고 ‘광무(光武)’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는 등 자주독립국의 면모를 세우려고 하였다.
그러나 대한제국의 헌법이라고 할 수 있는 9개조의 「대한국국제 大韓國國制」는 전제왕권을 강화하고 의회정치를 부인하며, 민권이나 사법권을 무시한 전제주의적인 것이었다. 즉, 대한제국이 추진한 광무개혁은 정치적인 면에서 전제군주 국가 체제를 재확인하려는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그러나 대한제국이 추진한 상공업·농업 등의 경제 정책은 근대적 성격을 가지는 것이어서 광무연간에는 민족 자력에 의한 철도 건설, 회사·기업·금융기관 등의 설립 운동이 전개되고, 근대적 토지 소유에 입각한 농촌경제 개혁을 위해 양전지계사업(量田地契事業)이 실시되었다.
대한제국시기에 재야(在野)에서는 독립협회(獨立協會)가 중심이 된 자유민권의 개혁 운동이 전개되었다. 1896년 창설된 독립협회는 처음에 관민 합동으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대한제국의 정책이 보수적으로 흐르고 외국에 각종 이권을 계속 양도하는 데 자극 받아, 협회의 지식인·소시민·학생 등이 자주국권 회복운동을 벌이게 되었다. 이에 고급 관료들은 탈퇴하고 민중들이 주도하게 되었고, 따라서 독립협회의 정치계몽운동은 활발해졌다.
1898년 독립협회는 도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중심으로 열강의 이권 침탈을 반대하고 의회 개설을 요구하는 등, 민권 신장에 바탕을 둔 입헌군주제(立憲君主制)를 지향하면서 자주적 근대 민족국가 건설을 목표로 대중 운동을 폈다.
그러나 독립협회 운동에 위협을 느낀 친러보수정권은 군대와 황국협회(皇國協會)를 앞세워 1898년 말에 독립협회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아관파천 후 조선에서의 일본의 영향력은 감퇴했지만, 그들의 경제적 침략은 착실히 진행되고 있었다. 일본은 몇 차례에 걸친 협상 끝에 러시아로부터 한국에서의 경제적 우위를 인정받았다.
따라서 일본은 대한제국 시기에 추진된 철도 부설, 금융제도의 개혁 등 일련의 주체적인 민족자본 축적운동을 방해하는 한편, 러시아 세력의 확대를 견제하기 위해 영국·미국 등과 제휴하는 외교 교섭을 벌였다.
결국, 일본은 1902년에 영일동맹(英日同盟)을 체결하고, 1904년에는 러일전쟁을 일으켜 러시아 세력을 한반도에서 축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러일전쟁의 승리를 계기로 영국과 미국으로부터 조선에 대한 보호국설치권을 인정받은 일본은 1905년 11월에 을사조약(乙巳條約)을 강제로 체결, 우리 나라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정치(統監政治)를 실시하였다.
이후 일본은 1907년 헤이그특사사건을 계기로 고종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 丁未七條約)을 체결, 이른바 ‘차관정치(次官政治)’를 실시하다가 군대마저 해산시킨 뒤, 1910년 8월에 조선을 강점하였다.
러일전쟁이 발발한 뒤 국권이 위태롭게 되자 개화파의 전통을 이은 지식인과 변법자강사상(變法自强思想)을 받아들인 개신유학자(改新儒學者)들이 중심이 되어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지주·기업가 등 민족자본가들의 후원을 얻은 이들은 보안회(輔安會)·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대한협회(大韓協會) 등 정치·사회 단체를 만들어 이 운동을 추진하였다.
이 단체들은 일제의 정치적·군사적·경제적 침략상을 규탄하고 일제 침략의 앞잡이 구실을 하는 이완용(李完用) 등 친일내각을 비판하면서 주로 신문과 잡지를 통해 국민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또 교육과 산업의 진흥으로써 국민의 실력을 양성, 부국강병(富國强兵)을 꾀하고 근대적 국민국가를 건설하려고 하였다. 따라서 이 운동을 통해 각종 학회 및 학교가 설립되었고, 근대적 기업이 설립, 운영되었다.
그러나 일제통감부는 1907년 「보안법 保安法」·「신문지법 新聞紙法」, 1909년 「출판법 出版法」 등을 제정해 이들의 정치 활동을 탄압하였다.
이에 따라, 애국계몽운동의 성격은 초기의 국권회복운동적 성격에서 나중에는 문화운동적인 것으로 변질되었다. 그렇지만 1907년 비밀리에 조직된 신민회(新民會)는 표면적으로 계몽 활동을 펴면서 꾸준히 항일 투쟁을 준비하다가 1911년에야 해산되었다.
서울·평양 등 주요 도시에서 애국계몽운동이 전개되는 동안, 지방에서는 일제 침략에 항거하는 의병 투쟁이 치열하게 일어났다. 보호조약체결 이후 주로 위정척사파의 유생들이 조직, 지도한 초기 의병은 항일투쟁 정신이 격렬하기는 했지만 보통 50∼100명 정도의 소규모였고, 각각 독자적인 지역을 기반으로 전투를 전개한 분산성을 띠고 있었다.
또 장비면에서도 구식 화승총(火繩銃)이 주무기였다. 따라서 군사 조직이나 무기면에서 일본군에 비하면 아주 미약한 것이었다. 그러나 군대 해산 이후 해산 군인들이 의병 대열에 참여함으로써 의병의 규모와 전투 능력이 향상되었다. 또한 평민의병장의 진출이 눈에 띠게 두드러지는 등 의병의 신분 구성도 다양해졌다.
의병군은 십삼도창의군(十三道倡義軍)이라는 의병 연합전선을 형성, 서울진공작전까지 시도하였다. 이 때의 의병은 애국애족사상과 반침략사상이 투철해 일제에 대한 철저한 저항 정신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유교적 세계관과 윤리를 중시하는 사상적 한계성, 국제 원조의 결여, 무기 및 조직의 열세 등으로 상대적으로 우세한 일본 군대의 조직적인 토벌 작전에 따라 결국 진압되고 말았다. 1909년 일제가 실시한 대규모의 남한 대토벌작전으로 의병들의 활동 무대는 축소되었다.
반일 세력을 무력으로 탄압한 일제는 1910년 친일매국단체인 일진회(一進會)를 이용하면서 이완용 내각을 상대로 소위 한일합병조약(韓日合倂條約)을 체결, 500여 년 역사를 자랑하는 유서 깊은 조선 왕조를 식민지로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