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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어서 본 ‘상윳따니까야(Saṃyutta Nikāya)’ 21강
사밋디숫땅-1부
samiddhisuttaṃ
사밋디경(S1:20)-1부
1. 에왕 메 수땅 에깡 사마양 바가와 라자가헤 위하라띠 따뽀다라메.
Evaṃ me sutaṃ ekaṃ samayaṃ bhagavā rājagahe viharati tapodārāme.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 라자가하의 따뽀다 온천의 승원에 머무셨다.
2. 아타 코 아야스마 사밋디 랏띠야 빳쭈사사마양 빳쭛타야 예나 따뽀다
Atha kho āyasmā samiddhi rattiyā paccūsasamayaṃ paccuṭṭhāya yena tapodā
뗀누빠상까미 갓따니 빠리신지뚱. 따뽀데 갓따니 빠리신찟와 빳쭛따릿와
tenupasaṅkami gattāni parisiñcituṃ. Tapode gattāni parisiñcitvā paccuttaritvā
에까찌와로 앗타시 갓따니 뿝바빠야마노.
ekacīvaro aṭṭhāsi gattāni pubbāpayamāno.
2. 그때 사밋디 존자는 밤이 지나고 새벽이 되었을 때 일어나 온천으로 목욕을 하러 갔다. 온천에서 목욕을 하고 나와서 옷 한 벌만을 입고 몸을 말리고 있었다. 그때 어떤 천신이 밤이 아주 깊었을 때 아주 멋진 모습을 하고 온 온천을 환하게 밝히면서 사밋디 존자에게 다가갔다. 다가가서는 허공에서 게송으로 말했다.
3. 아타 코 안나따라 에와따 아빅깐따야 랏띠야 아빅간따완나 께와라깝빵
Atha kho aññatarā devatā abhikkantāya rattiyā abhikkantavaṇṇā kevalakappaṃ
땁뽀당 오바셋와 예나 아야스마 사밋디 데누빠상까미, 웁빠상까밋와 웨하상
tapodaṃ obhāsetvā yena āyasmā samiddhi tenupasaṅkami, upasaṅkamitvā vehāsaṃ
티따 아야스만땅 사밋딩 가타야 앗자바시.
ṭhitā āyasmantaṃ samiddhiṃ gāthāya ajjhabhāsi.
3. 그때 어떤 천신이 밤이 깊었을 때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온천 숲을 두루 밝히며 사밋디 존자가 있는 곳으로 찾아갔다. 가까이 다가가서는 허공에서 게송으로 말했다.
데와다(Devatā)
천신
4. 아부뜨와 빅카시 빅쿠, 나 히 붓와나 빅카시,
Abhutvā bhikkhasi bhikkhu, na hi bhutvāna bhikkhasi,
부뜨와나 빅쿠 빅캇수, 마 땅 까로 우빳짜가띠.
Bhutvāna bhikkhu bhikkhassu, mā taṃ kālo upaccagāti.
4. 비구여, 그대는 즐기지 못하고 걸식하고 있으니, 그대는 즐긴 뒤에 걸식할 줄 모르고 있습니다. 비구여, 그대는 즐긴 뒤에 걸식을 하십시오. 세월이 그대를 지나치게 하지 마십시오.
사밋디(Samiddhi)
사밋디 존자
5. 까랑 오항 나 자나미, 찬노 까로 나 딧사띠,
Kālaṃ vohaṃ na jānāmi, channo kālo na dissati,
따스마 아뿌뜨와 빅카미, 마 망 까로 우빳짜가띠.
Tasmā abhutvā bhikkhāmi, mā maṃ kālo upaccagāti.
5. 그대가 말하는 세월을 나는 모릅니다.
나의 세월이란 감춰져서 보이지 않습니다.
나는 그 때문에 즐기지 않고 걸식합니다.
세월이 나를 지나치지 않게 합니다.
6. 아타 코 사 데와따 빠타위양 빠띳타힛와 아야스만땅 사밋딩 에따다오짜,
Atha kho sā devatā pathaviyaṃ patiṭṭhahitvā āyasmantaṃ samiddhiṃ etadavoca,
다하로 뜨왕 빅쿠, 빱바지또 수수 까라께소, 바드레나 욥바네나 사만나가또,
daharo tvaṃ bhikkhu, pabbajito susu kāḷakeso, bhadrena yobbanena samannāgato,
빠타메나 와야사, 아닉끼리따위 까메수. 분자, 빅쿠, 마누사께 까메,
paṭhamena vayasā, anikkīḷitāvī kāmesu. Bhuñja, bhikkhu, mānusake kāme,
마 산딧티깡 힛와 까리깡 아누다위띠.
mā sandiṭṭhikaṃ hitvā kālikaṃ anudhāvīti.
6. 그러자 그 천신은 땅 위에 내려와 사밋디(Samiddhi)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대 젊은 비구여, 그대는 젊고 머리카락이 검고 잘 갖추어진 처음인 청춘을 가지고 최상의 세월에 감각적 쾌락을 아직 즐기지 않고 출가를 했습니다. 비구여, 사람의 욕망을 즐기십시오. 현재를 버리고 다가오는 시간을 쫓지 마십시오.
사밋디(Samiddhi)
사밋디 존자
7. 나 끄와항, 우소, 산딧티깡 힛와 까리깡 아누다와미, 까리깐짜 끄와항,
Na khvāhaṃ, vuso, sandiṭṭhikaṃ hitvā kālikaṃ anudhāvāmi. Kālikañca khvāhaṃ,
아우소, 히뜨와 산딧티깡 아누다와미. 까리까 히 아우소,까마 웃따 바가와따
āvuso, hitvā sandiṭṭhikaṃ anudhāvāmi. Kālikā hi āvuso kāmā vuttā bhagavatā
바후둑카 바후빠야사, 아디나보 엣타 비이요. 산닷티꼬 아양 담모 아까리꼬
bahudukkhā bahupāyāsā, ādīnavo ettha bhiyyo. Sandiṭṭhiko ayaṃ dhammo akāliko
에히빳시꼬 아빠네이이꼬 빳짯땅 웨디답보 윈누히띠.
ehipassiko opaneyyiko paccattaṃ veditabbo viññūhīti.
7. 벗이여, 나는 절대로 지금 여기 보이는 세계를 제쳐두고 시간이 걸리는 것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벗이여, 나야말로 시간을 걸리는 것을 제쳐두고 현세의 이익을 추구합니다. 왜냐하면 세존께서는 감각적 욕망이란 시간이 걸리는 것이고 괴로움과 절망이 가득하며 거기에는 많은 위험이 따른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법은 세존에 의해 잘 설해졌고, 지금 이곳에서 경험할 수 있고,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와서 보라고 할 수 있고, 열반으로 이끌어 주고, 현명한 사람들에 의해 직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데와다(Devatā)
천신
8. 까탄짜 빅쿠 까리까 까마 웃따 바가와따 바후둑카 바우빠야사, 아디나요 엣타 비이요
Kathañca bhikkhu kālikā kāmā vuttā bhagavatā bahudukkhā bahupāyāsā, ādīnavo
엣타 비이요. 까탕 감직티꼬 아양 담모 아까리꼬 에히빳시꼬 오빠네이이꼬
ettha bhiyyo. Kathaṃ sandiṭṭhiko ayaṃ dhammo akāliko ehipassiko opaneyyiko
빳짯땅 웨디땁보 윈누히띠.
paccattaṃ veditabbo viññūhīti.
8. 비구여, 어떻게 해서 세존께서는 감각적 쾌락이 시간이 걸리며 괴로움이 많고 아픔이 많고 더 많은 위험이 따른다고 하셨습니까? 어떻게 해서 이 성스러운 법이 세존에 의해 잘 설해졌고, 지금 이곳에서 경험할 수 있고,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와서 보라고 할 수 있고, 열반으로 이끌어 주고, 현명한 사람들에 의해 직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사밋디(Samiddhi)
사밋디
9. 아항 코 아우소, 나오 아찌라빱바지또 아두나가또 이망 담마위나양.
Ahaṃ kho, āvuso, navo acirapabbajito adhunāgato imaṃ dhammavinayaṃ.
나 끄와항 삭꼬미 윗타레나 아찍키뚱. 아양 소 바가와 아라항
Na khvāhaṃ sakkomi vitthārena ācikkhituṃ. Ayaṃ so bhagavā arahaṃ
삼마삼붓도 라자가헤 위하라띠 따뽀다라메. 땅 바가완땅 우빠상가밋와
sammāsambuddho rājagahe viharati tapodārāme. Taṃ bhagavantaṃ upasaṅkamitvā
에따맛탕 뿟차. 야타 떼 바가와 브야가로ㄸ 따타 낭 다레이야시띠.
etamatthaṃ puccha. Yathā te bhagavā byākaroti tathā naṃ dhāreyyāsīti.
9. 벗이여, 나는 출가한지 얼마 되지 않았고 근래에 이 법과 율을 들은 신참입니다. 그래서 나는 법과 율을 자세하게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그분 세존. 아라한. 정등각자께서는 라자가하에서 빠뽀다 원림에 머물고 계십니다. 그분 세존께 이 뜻을 여쭈어 보십시오. 그래서 세존께서 그대에게 설명해 주시는 대로 받아서 지니십시오.
이상이 사밋디 경(samiddhisuttaṃ)의 1부 내용입니다. 사밋디 경은 내용이 길어서 2회에 걸쳐 나누어서 공부하시겠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사밋디 경의 1부입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사밋디 경의 1부의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사밋디 경(samiddhisuttaṃ)의 구성은 존자와 천신과 부처님과 세 분의 대화로 진행된 경입니다. 사밋디(Samiddhi) 존자의 대화로 이루어진 경이 3개가 있습니다.
사밋디 존자(āyasmā Samiddhi)는 라자가하 지방에 있는 장자의 집안에서 태어나셨고 사리뿟따 존자의 제자입니다. 그가 태어나면서 가문이 번창하게 되어 번영이라는 뜻을 가진 사밋디(Samiddhi)로 이름을 지었습니다. 사밋디 존자는 경전에서 자주 나옵니다. 사밋디 존자와 관련된 모든 이야기는 라자가하 왕사성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이 경은 아주 중요한 내용을 가진 경입니다. 사밋디 존자가 부처님께 직접 물어보고 답을 받았던 내용들이 많이 나옵니다. 지난번 강의에서 ‘오온은 세계다. 마라(mara)는 안, 이, 비, 설, 신이다’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부처님께서 답한 사밋디 경도 있는데 그 몇 가지 경을 사밋디 1. 2. 3으로 이름을 붙였습니다. 사밋디 존자는 마하깟짜나(Mahākaccāna) 존자와의 법담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상세하게 설명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부처님께 많은 질문을 던지고 사리뿟따(Sāriputta) 존자를 형이상학적 질문으로 시험하기도 합니다.
게송 본문으로 들어가서 내용을 하나하나 살펴보겠습니다.
지금까지는 남성 신들이 나왔는데 여기 사밋디 경에 나오는 천신은 여신입니다. 이 여신은 욕계천상에 사는 천신이 아니고 인간계의 숲에서 사는 천신입니다.
다음은 경전 본문의 게송입니다.
1. 에왕 메 수땅 에깡 사마양 바가와 라자가헤 위하라띠 따뽀다라메.
Evaṃ me sutaṃ ekaṃ samayaṃ bhagavā rājagahe viharati tapodārāme.
1.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세존께서 라자가하의 따뽀다 온천의 승원에 머무셨다.
라자가하(rājagaha)는 한역(漢譯)으로 왕사성(王舍城)입니다. 부처님 당시에 마가다국이 수도였습니다. 지금은 라즈길(Rājgir)이라고 하는데 비하르(Bihār)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2. 아타 코 아샤스마 사밋디 랏띠야 빳쭈사사마양 빳쭛타야 예나 따뽀다
Atha kho āyasmā samiddhi rattiyā paccūsasamayaṃ paccuṭṭhāya yena tapodā
떼누빠상까미 갓따니 빠리신찌뚱. 따뽀데 갓따니 빠리신찌뜨와 빳쭛따릿와
tenupasaṅkami gattāni parisiñcituṃ. Tapode gattāni parisiñcitvā paccuttaritvā
에까찌와로 앗타시 갓따니 뿝바빠야마노.
ekacīvaro aṭṭhāsi gattāni pubbāpayamāno.
2. 그때 사밋디(Samiddhi) 존자는 밤이 지나고 새벽이 되었을 때 일어나 온천으로 가서 상의를 벗고 목욕을 했다. 온천에서 목욕을 하고 일어나서 가사 한 벌만을 입고 몸을 말리기 위해 서있었다.
‘아타 코 아야스마 사밋디(Atha kho āyasmā samiddhi)’에서 아타 코(Atha kho)는 ‘이제’, ‘그런데’입니다. 그러나 ‘그때’로 번역했습니다. 다음 아야스마(āyasmā)는 ‘존경할만한’, ‘존귀한’, ‘장로’, ‘존자(尊者)’입니다. 그래서 ‘그때 사밋디 존자는’입니다.
다음은 ‘랏띠야 빳쭈사사마양 빳쭛타야 예나 따뽀다 떼누빠상까미 갓따니 빠리신찌뚱(rattiyā paccūsasamayaṃ paccuṭṭhāya yena tapodā tenupasaṅkami gattāni parisiñcituṃ)에서
랏띠야(ratti)는 ‘밤’이고, 빳쭈사사마양(paccūsasamayaṃ)은 ‘이른 아침에’, ‘아침시간에’이고,
빳쭛타야(paccuṭṭhāya)는 ‘일어나’이고, 예나(yena)는 ‘그것을 가지고’, ‘그것으로부터’, ‘~인 곳에서’, ‘~인 곳에’입니다. 따뽀다(tapodā)는 ‘온천’입니다. 떼누빠상까미(tenupasaṅkami)는 ‘상의를 벗고’이고, 다음에 갓따니(gattāni)의 어원은 가띠(gati)입니다. 가띠(gati)는 ‘가다’, ‘다른 존재로 나아감’, ‘운명’, ‘행위’, ‘취’, ‘윤회’ 등의 뜻입니다. 다음에 빠리신찌뜨와(parisiñcitvā)는 ‘물을 뿌리다’, ‘목욕하다’입니다. 그래서 ‘밤이 지나고 새벽이 되었을 때 일어나 온천으로 가서 상의를 벗고 목욕을 했다.’입니다. 그러나 이 글이 의미하는 내용은 정진력이 있어 부지런히 수행하시는 스님을 말합니다.
다음은 ‘따뽀데 갓따니 빠리신찌뜨와 빳쭛따릿뜨와 에까찌와로 앗타시 갓따니 뿝바빠야마노(Tapode gattāni parisiñcitvā paccuttaritvā ekacīvaro aṭṭhāsi gattāni pubbāpayamāno)에서 ’따뽀데 갓따니 빠리신찌뜨와 빳쭛따릿뜨와(Tapode gattāni parisiñcitvā paccuttaritvā)‘는 ‘온천에서 목욕을 하고 일어나서’입니다. 다음에 ‘에까찌와로 앗타시 갓따니 뿝바빠야마노(ekacīvaro aṭṭhāsi gattāni pubbāpayamāno)’에서 에까찌와로(ekacīvaro)는 ‘가사 한 벌’입니다. 아따시(aṭṭhāsi)는 ‘서다’, ‘머물다’, ‘살다’라는 뜻입니다. 다음에 뿝바빠야마노(pubbāpayamāno)는 ‘몸을 말리다’입니다. 그래서 ‘온천에서 목욕을 하고 일어나서 가사 한 벌만을 입고 몸을 말리기 위해 서있었다.’입니다. 여기서 가사 한 벌만 입었다는 것은 비구의 가사가 상의와 하의를 합쳐서 한 벌인데, 이때 상의는 벗고 하의를 말리기 위해서 서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밋디 스님은 가사를 한 벌만 가지고 있는데 가사를 빨아서 마를 때까지 기다리고 계셨던 것입니다. 원래 비구들은 목욕을 할 때도 가사를 몸에서 분리하지 않습니다. 비구의 가사는 상의와 하의 두 개의 천인데 하의는 치마처럼 입습니다. 그래서 목욕을 할 때는 상의는 벗고 하의는 그대로 입고 목욕을 합니다. 그러나 가사가 한 벌 일 때는 갈아입을 가사가 없어서 목욕을 한 뒤에 서서 하의를 말립니다. 인도의 전통 힌두교 사원에서는 윗옷을 벗는 것이 전통입니다. 대통령이 와도 윗옷을 벗어야 합니다. 스님들은 한쪽 어깨 위에다 가사를 걸치십니다. 그러나 사밋디(Samiddhi) 존자는 가사가 한 벌밖에 없어서 가사를 빨아서 마를 때까지 윗옷을 벗고 있었는데 여신이 이런 사밋디(Samiddhi) 존자의 이런 모습을 본 것입니다. 이때 여신이 비구한테 반해서 짝사랑하는 것 같습니다. 목욕할 때 원래 가사는 잘 접어서 가지런히 놓고 허리띠도 잘 놓아야 합니다.
그때 당시 인도에서는 가사를 많이 훔쳐갔습니다. 가사가 돈이 되기 때문입니다. 가사 세 벌이 21m인데 그때 당시 21m의 가사를 가진다는 것은 부자에 속합니다. 그래서 초기에는 부처님께서 가사 한 벌만 허락하셨고 시간이 가면서 3벌까지 허락하셨습니다. 사밋디(Samiddhi) 존자가 한 벌의 가사를 가진 것으로 봐서 부처님 시대의 초기로 보입니다. 그때 당시에 스님들은 낮은 호수나 강에서 목욕을 하시는데 배까지 물이 닿는 곳에서 목욕을 합니다. 그래서 가사를 벗어놓고 목욕을 하면 가사를 가지고 가는 사람도 있었기 때문에 가사를 지키면서 목욕을 하고 가사가 마를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부처님께서 가사를 훔쳐가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우리가 말하는 분소의라는 뜻의 조각천을 이어서 논밭처럼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가사가 논두렁처럼 만들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가사의 가치를 없애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도 가사를 가지고 가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인도에는 지금도 성지 순례하는 사람들이 부처님께 가사를 올리면 바로 가져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때도 가사를 가지고 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상좌불교의 비구들은 항상 가사를 어깨에 걸치고 있습니다.
첫 문장에서 나오는 따뽀다라메(tapodārāme)는 ‘따뽀다 온천’이라고 했는데, 따뽀(tapo)는 ‘온천’이고 아라마(ārāma)는 ‘사찰’입니다. 자이나교에서도 사원이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보통 사원이나 사찰을 말할 때 수행처라는 뜻으로 아라마(ārāma)나 위하라(vihara)를 사용합니다. 보통의 사찰이라고 할 때는 위하라(vihara)를 사용하고 숲에 있는 수행처는 아라마(ārāma)라고 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따뽓아라메(tapodārāme)는 라자가하(rājagaha)의 웨바라(vebhāra) 산 아래에 있는 따뽀다 호수 부근에 있었던 승원입니다.
스리랑카에서 제가 출가한 사찰은 수담마 아라마(Sudhamma ārāma)인데 수담마(Sudhamma)는 ‘잘 설법하는’이라는 뜻입니다. 사원이 온천 근처에 있어서 이런 단어가 붙여졌습니다. 스리랑카에도 자연 온천이 몇 군데가 있습니다. 관광객들이 많이 갑니다. 인도에도 사원근처에 온천이 있었습니다. 한국 사람들처럼 사밋디(Samiddhi) 존자도 온천을 굉장히 좋아하는 것으로 나옵니다. 인도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온천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 온천을 향해 용(nāga)이 모여 있다고 합니다. 물을 향해 용들이 있다는 것은 힌두교 사상입니다. 나가(nāga)는 두 가지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코끼리를 뜻하고, 또 하나는 코브라 뱀을 뜻합니다. 여기서는 일반 뱀이 아니고 코브라 뱀을 말합니다. 코브라가 있다는 것은 물이 깨끗하다는 것입니다. 코브라는 아주 맑은 물에서만 삽니다. 한국에서는 뱀을 무섭고 징그럽게 생각하는데 인도에서 뱀은 깨끗하고 힘이 있다는 뜻으로 알려져 좋은 인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처님 시대에 온천이 있는 사원은 이 사원 하나만 나옵니다. 사밋디 존자가 잘 생겼고 아침에 걷기 명상을 하면서 매일 2-3km를 걸었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다니기 전에 따뜻한 온천에 목욕을 하셨습니다.
위 문장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때 사밋디 존자는 밤이 지나고 새벽이 되었을 때 일어나 온천으로 가서 상의를 벗고 목욕을 했다. 온천에서 목욕을 하고 일어나서 가사 한 벌만을 입고 몸을 말리기 위해 서있었다.
다음 경전 게송을 살펴보겠습니다.
3. 아타 코 안냐따라 에와따 아빅깐따야 랏띠야 아빅간따완나 께와라깝빵
Atha kho aññatarā devatā abhikkantāya rattiyā abhikkantavaṇṇā kevalakappaṃ
땁뽀당 오바셋세뜨와 예나 아야스마 사밋디 뗀누빠상까미, 우빠상까미뜨와 웨하상
tapodaṃ obhāsetvā yena āyasmā samiddhi tenupasaṅkami, upasaṅkamitvā vehāsaṃ
티따 아야스만땅 사밋딩 가타야 앗자바시.
ṭhitā āyasmantaṃ samiddhiṃ gāthāya ajjhabhāsi.
3. 그때 어떤 천신이 밤이 깊었을 때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온천 숲을 두루 밝히며 사밋디 존자가 있는 곳으로 찾아갔다. 가까이 다가가서는 허공에서 게송으로 말했다.
‘아타 코 안냐따라 데와따(Atha kho aññatarā devatā)’는 ‘그때 어떤 천신이’입니다. 안냐따라(aññatarā)는 ‘둘 중의 하나’, ‘어떤’입니다. ‘아빅깐따야 랏띠야(abhikkantāya rattiyā)’는 ‘밤이 깊었을 때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입니다. 다음은 ‘께와라깝빵 따뽀당 오바세뜨와 예나 아야스마 사밋디 떼누빠상까미(kevalakappaṃ tapodaṃ obhāsetvā yena āyasmā samiddhi tenupasaṅkami)’은 ‘온천 숲을 두루 밝히며 사밋디 존자가 있는 곳으로 찾아갔다.’입니다.
다음 문장은 ‘우빠상까미뜨와 웨하상 티따 아야스만땅 사밋딩 가타야 앗자바시(upasaṅkamitvā vehāsaṃ ṭhitā āyasmantaṃ samiddhiṃ gāthāya ajjhabhāsi)’입니다. 이 문장은 ‘온천 숲을 두루 밝히며 사밋디 존자가 있는 곳으로 찾아갔다.’입니다.
이상의 문장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때 사밋디(Samiddhi) 존자는 밤이 지나고 새벽이 되었을 때 일어나 온천으로 가서 상의를 벗고 목욕을 했다. 온천에서 목욕을 하고 일어나서 가사 한 벌만을 입고 몸을 말리기 위해 서있었다.
그때 어떤 천신이 밤이 깊었을 때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온천 숲을 두루 밝히며 사밋디 존자가 있는 곳으로 찾아갔다. 가까이 다가가서는 허공에서 게송으로 말했다.
천신이 사밋디 스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4. 아부뜨와 빅카시 빅쿠, 나 히 부뜨와나 빅카시,
Abhutvā bhikkhasi bhikkhu, na hi bhutvāna bhikkhasi,
부뜨와나 빅쿠 빅캇수, 마 땅 까로 우빳짜가띠.
Bhutvāna bhikkhu bhikkhassu, mā taṃ kālo upaccagāti.
4. 비구여, 그대는 즐기지 못하고 걸식하고 있으니, 그대는 즐긴 뒤에 걸식할 줄 모르고 있습니다. 비구여, 그대는 즐긴 뒤에 걸식을 하십시오. 세월이 그대를 지나치게 하지 마십시오.
여기에 나오는 여신은 하늘에 있는 신이 아니고 땅을 의지해 사는 신입니다. 신들이 나무나 바위나 땅을 의지해서 하는 신들이 있습니다. 원래 사천왕천의 천신으로 태어났지만 사천왕천까지 가지 못하고 숲에서 사는 천신입니다. 사천왕천까지 못 가는 이유가 있습니다. 여신이므로 그냥 온 것이 아니고 엄청 예쁘게 하고 왔습니다. 본인이 가지고 있는 온갖 재주를 부리면서 왔습니다. 이것을 볼 때 여신이 스님을 매우 좋아하고 여기에 나오는 사밋디 스님은 20대 초반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젊은 나이인데 재미있게 살아라’ 하는 것은 천신이 스님께 이성으로 관심을 나타내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보아 스님을 좋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즘 같으면 향수를 많이 뿌리고 온 것 같은 것입니다. 여신은 허공에서 말했습니다. 원래는 천신이 스님께 여쭤볼 때 땅에 내려와서 합장하고 말해야 하는데 허공에서 말을 했다는 것은 정중하지 않고 약간 가벼운 모습을 나타내 보인 것입니다.
아부뜨와(abhutvā)는 아(a)와 부뜨와(bhutvā)의 합성어입니다. 아(a)는 ‘부정’이고 부뜨와(bhutvā)는 ‘먹다’, ‘즐기다’, ‘향유하다’, ‘이용하다’는 뜻입니다. 아부뜨와(abhutva)는 ‘먹지 않고’이지만 부뜨와(bhutva)는 먹고, 즐기고 향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부뜨와(abhutvā)는 ‘즐기지 못한다’, ‘누리지도 못한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즐기지도 못한다는 것은 다섯 가닥의 감각적 욕망인 오욕락을 즐겨보지도 못하고 출가했다는 뜻입니다. 여자 천신이 비구를 보고 감각적 욕망을 즐기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본 것입니다.
아부뜨와(abhutvā)는 즐기지도 못하다는 뜻인데 다섯 가지 감각적 욕망을 즐기지도 못하고 출가했다는 말입니다. 다섯 가지 감각적 욕망을 오욕락(五欲樂)이라고 하는데 안, 이, 비, 설, 신이라는 육체적 감각기관을 통해서 일어나는 욕망을 말합니다. 여기서 즐기지도 못한다는 원어 아부뜨와(abhutvā)의 동사는 분자띠(bhuñjati)인데 이는 먹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문장으로는 먼저 먹은 뒤에 걸식을 하라는 말입니다. 이때의 걸식이 바로 빅카시(Bhikkhasi)입니다. 원래 빅쿠(Bhikkhu)는 걸식하는 수행자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먹고 즐기라는 뜻보다는 감각적 욕망을 즐기고 먹으라는 뜻입니다. 까라(kāla)라고 하는 세월은 다섯 가지 감각적 욕망을 즐길 수 있는 청년시절을 말합니다. 나이가 들어 늙으면 지팡이를 짚고 다니고 검은 머리가 하얗게 변하면 감각적 욕망을 즐기고 싶어도 즐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까로 우빳짜가띠(kālo upaccagāti)에서 까로(kālo)는 두 가지 뜻이 있는데 첫 번째는 ‘어두운’, ‘검은’이고, 두 번째는 ‘때’, ‘정시’, ‘적당한 시간’입니다. 다음 우빳짜가띠(upaccagāti) 는 ‘지나갔다’, ‘갔다’, ‘도망쳤다’입니다. 그래서 까로 우빳자가띠(kālo upaccagāti)는 ‘적당한 시간이 지나갔다’, ‘세월이 도망쳤다’, ‘때를 놓쳤다’다는 뜻입니다. 이는 무상의 성품을 알아 집착을 끊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무상하기 때문에 더 늦기 전에 감각적 욕망을 즐기는 것이 필요하다는 천신의 생각입니다. 빅캇수(bhikkhassu)는 ‘비구가 걸식한다’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원래 비구(bhikkhu)는 ‘걸식하는 수행자’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젊고 한창 좋은 나이에 비구가 걸식이나 하고 있으니 여자 천신이 안타깝게 본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문장은 ‘비구여, 그대는 즐기지 못하고 걸식하고 있으니, 그대는 즐긴 뒤에 걸식할 줄 모르고 있습니다. 비구여, 그대는 즐긴 뒤에 걸식을 하십시오. 세월이 그대를 지나치게 하지 마십시오.’입니다.
사밋디(Samiddhi)
사밋디
5. 까랑 오향 나 자나미, 찬노 까로 나 딧사띠,
Kālaṃ vohaṃ na jānāmi, channo kālo na dissati,
따스마 아부뜨와 빅카미, 마 망 까로 우빳짜가띠.
Tasmā abhutvā bhikkhāmi, mā maṃ kālo upaccagāti.
5. 그대가 말하는 세월을 나는 모릅니다.
나의 세월이란 감춰져서 보이지 않습니다.
나는 그 때문에 즐기지 않고 걸식합니다.
세월이 나를 지나치지 않게 합니다.
까랑 오향 나 자나미(Kālaṃ vohaṃ na jānāmi)에서 까랑(kālaṃ)는 ‘세월’이고, 오항(vohaṃ)은 ‘말’, ‘표현’이고, 나(na)는 ‘부정’이고, 자나미(jānāmi)는 ‘인간’입니다. 그래서 ‘그대가 말하는 세월을 나는 모릅니다.’입니다. 다음에 ‘찬노 까로 나 딧사띠(channo kālo na dissati)’는 ‘시간은 숨겨져 있다’입니다. 찬나(channa)는 사람이름이기도 하지만 ‘덮여진’, ‘숨겨진’, ‘가려진’, ‘비밀의’란 뜻입니다. 딧사띠(dissati)는 ‘보이다’, ‘발견되다’, ‘나타나다’입니다. 그래서 ‘시간은 숨겨져서 보이지 않는다’입니다. 우리가 세월이 흐르는지 알고 있지만 사실은 매 순간 이렇게 흐르는 시간을 인식하며 살지 못합니다. 그러니 흐르는 세월을 숨겨져 있으므로 살아있을 때 충분히 감각적 욕망을 즐겨야 한다는 것이 천신의 생각입니다. 그래서 시간이 빨리 지나갑니다. 시간이 너무 짧습니다. 인생이 길어야 80년에서 100년을 산다는 뜻입니다.
다음 ‘따스마 아부뜨와 빅카미(Tasmā abhutvā bhikkhāmi)’에서 따스마(Tasmā)는 ‘그로부터’, ‘그러므로’, ‘그 때문에’, ‘그 후에’입니다. 아브뜨와(abhutvā)는 ‘먹지 않고’, ‘즐기지 않고’입니다. 빅카미(bhikkhāmi)는 ‘걸식하는 수행자’입니다. 그래서 ‘나는 그 때문에 즐기지 않고 걸식합니다.’입니다.
여기서 까랑(kālaṃ)은 ‘때’, ‘세월’이란 죽는 시간을 말합니다. 누구나 언젠가는 죽는데 이 죽는 시간을 마라나 까라(maraṇa kāla)라고 합니다. 세월이 흘러가는 것을 모르고 사는 것은 죽는 시간을 모르고 사는 것입니다. 마 망 까로 우빳짜가(mā maṃ kālo upaccagā)는 ‘세월이 나를 지나치게 한다’는 뜻으로 사문의 법도를 실천하는 시기를 말합니다. 즉, 경전독송하고 계율을 익히고 수행을 배우고 익히는 등의 여러 가지를 말합니다. 우리는 ‘부처님의 법을 듣고 행하는 좋은 시기가 젊은 시기이다’라고 말합니다. 이때는 정진의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신과 같은 경우는 오온을 누리기 좋은 시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스님은 스님으로 수행을 하면서 지내기가 좋은 시기라고 서로 상반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사밋디 존자는 비구로 수행을 해서 세월이 나를 지나치게 하지 않는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주석서에서는 사문의 법도는 젊었을 때 실천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노년에는 법을 배우거나 두타행을 하거나 수행을 위해 엄격한 삶을 살거나 숲에 머물러서 집중을 하는 것이 힘들다고 말합니다. 수행자가 젊을 때는 ‘어떤 수행이든 경험해 볼 수 있는 시기이다’라고 말합니다. 젊으니까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볼 수 있는 시기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어서 출가하면 경전독송을 하고 이것저것을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이 없습니다. 스님께서 죽는 시간을 수행의 시간으로 말하니 여신이 좀 창피함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천신은 이제야 허공에서 땅으로 내려와서 ‘그대는 감각적 욕망을 즐기지도 못한 채 어린 나이로 출가했습니다. 감각적 욕망을 즐기십시오.’라고 유혹합니다. 천신이 땅으로 내려왔다는 것은 보다 적극적으로 관심을 표시한 것입니다.
우리가 미리 알 수 없는 것이 다섯 가지가 있습니다.
1. 삶 2. 병 3. 시간 4. 죽음 5. 다음 생입니다. 부처님께서 죽음을 항아리로 표현하셨습니다. 사람들의 죽음은 미리 알 수가 없습니다. 엄마 뱃속에서도 죽고, 어릴 때도 죽고, 사고로도 죽고, 늙어서도 죽습니다. 도공이 만든 도자기는 4가지 경우에 없어진다는 비유를 들어 설명하십니다.
도자기를 구울 때(뱃속 있을 때) 부서지고, 꺼낼 때(어릴 때)에 부서지고, 시장에서 팔 때(젊을 때) 부서지고, 시장에서 사가지고 집에서 쓰다가(늙어서) 깨집니다. 삶이 이렇게 무정하고 무상합니다. 어떤 병에 걸려서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몸이 어디에서 죽어 가는지 모릅니다. 내 목숨을 다하는 공간도 모릅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내가 3개월 후에 윤회가 끝나는 반열반인 빠리닙바나(parinibbāna)에 드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상의 문장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그대가 말하는 세월을 나는 모릅니다.
나의 세월이란 감춰져서 보이지 않습니다.
나는 그 때문에 즐기지 않고 걸식합니다.
세월이 나를 지나치지 않게 합니다.
다음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6. 아타 코 사 데와따 빠타위양 빠띳타히뜨와 아야스만땅 사밋딩 에따다오짜.
Atha kho sā devatā pathaviyaṃ patiṭṭhahitvā āyasmantaṃ samiddhiṃ etadavoca.
다하로 뜨왕 빅쿠 빱바지또 수수 까라께소, 바드레나 욥바네나 사만나가또,
daharo tvaṃ bhikkhu, pabbajito susukāḷakeso bhadrena yobbanena samannāgato,
빠타메나 와야사 아닉끼리따위 까메수. 분자 빅쿠 마누사께 까메,
paṭhamena vayasā, anikkīḷitāvī kāmesu. Bhuñja bhikkhu mānusake kāme,
마 산딧티깡 히뜨와 까리깡 아누다위띠.
mā sandiṭṭhikaṃ hitvā kālikaṃ anudhāvīti.
6. 그러자 그 천신은 땅 위에 내려와 사밋디(Samiddhi) 존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대 젊은 비구여, 그대는 젊고 머리카락이 검고 잘 갖추어진 처음인 청춘을 가지고 최상의 세월에 감각적 쾌락을 아직 즐기지 않고 출가를 했습니다. 비구여, 사람의 욕망을 즐기십시오. 현재를 버리고 다가오는 시간을 쫓지 마십시오.
여기서 천신은 젊은 비구를 부를 때 다하로 뜨왕 빅쿠(daharo tvaṃ bhikkhu)라고 불렀습니다. 다하로(daharo)는 ‘어린’, ‘젊은’, ‘소년’입니다. 뜨왕(tvaṃ)은 ‘너’, ‘그대’, ‘자네’입니다. 그래서 ‘다하로 뜨왕 빅쿠(daharo tvaṃ bhikkhu)’는 ‘그대 젊은 비구여’입니다. 이는 천신이 젊은 비구에게 호감을 가지고 친근하게 부른 명칭입니다.
빱바지또(pabbajito)는 ‘집을 떠나 수행생활에 드는 것’, ‘출가(出家)’입니다. 수수(susu)는 ‘아동’, ‘소년’, ‘젊은이’입니다. 까라께소(kāḷakeso)는 ‘검은 머리’입니다. 여기서 검은 머리는 검은 머리카락을 의미하는 것으로 젊은 사람의 머리카락이라는 뜻입니다. 다음에 욥바네나(yobbanena)는 ‘젊음’, ‘청춘’입니다. 사만나까또(samannāgato)는 ‘수반된’, ‘잘 갖추어진’, ‘구족한’입니다. 구족(具足)은 빠짐없이 두루 갖추었다는 뜻입니다.
빠타메나 와야사(paṭhamena vayasā)에서 빠타메나(paṭhamena)는 ‘첫 번째’, ‘최초’, ‘처음’이고 와야사(vayasā)는 ‘청춘’입니다. 그래서 ‘처음인 청춘’이지만 한번밖에 맞이할 수밖에 없는 그래서 두 번 다시 오지 않는 청춘임을 강조한 것입니다.
아닉끼리따위(anikkīḷitāvī)는 ‘감각적 쾌락을 아직 즐기지 못한’입니다. 다음에 ‘분자 빅쿠 마누사게 까메(Bhuñja bhikkhu mānusake kāme)’에서 분자(Bhuñja)는 ‘먹다’ ‘즐기다’, ‘향유하다’이고, 마누사께(mānusake)는 ‘사람’, ‘인간’이고, 까메(kāme)는 ‘욕망’, ‘쾌락’입니다. 그래서 ‘비구여, 사람의 욕망을 즐기십시오.’입니다.
다음 문장은 ‘마 산딧티깡 히뜨와 깔리깡 아누다위띠(mā sandiṭṭhikaṃ hitvā kālikaṃ anudhāvīti)’입니다. 마(mā)는 ‘하지마라’, ‘금지’, ‘강한결의’, ‘부정적 원망’입니다. 다음 산딧티깡(sandiṭṭhikaṃ)은 ‘지금 여기 있는’, ‘눈에 보이는’, ‘현세의’, ‘현재에 유익한’입니다. 다음에 히뜨와(hitvā)는 ‘버리다’, ‘포기하다’인데 자하띠(jahāti)와 같은 뜻입니다. 깔리깡(kālikaṃ)은 ‘때’, ‘시간’,‘세월’이고 아누다위띠(anudhāvīti)는 아(a)와 누다위띠(nudhāvīti)의 합성어입니다. 아(a)는 부정을 뜻하고 누다위띠(nudhāvīti)는 ‘~을 쫓다’, ‘추구하다’입니다. 그래서 ‘현재에 유익한 것을 버리고 다가오는 시간을 쫓지 마십시오.’입니다. 여기서 ‘젊고 머리카락이 검다’는 것은 젊은 사람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말입니다. ‘현재에 유익한 것을 버리고 다가오는 시간을 쫓지 마십시오’라는 말은 현재의 감각적 쾌락을 무시하고 다음 생에 오는 것을 바라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석서에 7가지를 갖춰야 훌륭한 젊은이라고 합니다.
1. 잘 생기고 2. 젊음 3. 아름다운 외모 4. 누가 봐도 집착하게 되는 젊고 끌리는 멋 5. 재산, 요즘 같으면 외제차 등을 가진. 여기서는 여신이기 때문에 신의 아들처럼 보이는 것 6. 금 같은 장식들 7. 신의 아들처럼 갖추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 당시의 인도 사상입니다. 이 모든 것을 사밋디 스님이 갖추고 계셨습니다. 여기 나오는 여신은 약간 무엇인가 미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스님은 최고의 용모를 갖춘 젊은 분이셨습니다. 그래서 스님께서는 왜 감각적 욕망을 즐겨보지도 못하고 출가했습니까? 모든 것을 다 갖추고도 왜 어린나이에 출가했냐고 약간 공격적인 발언을 합니다.
사람들은 다음 생을 생각하면서 공덕을 짓습니다. 그래서 항상 미래를 걱정하면서 삽니다. 천신은 스님이 다음 생을 위해서 수행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금생에서 누릴 수 있는 감각적 욕망을 즐겨야 한다고 권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현재를 버리고 다가오는 시간을 쫓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은 비구가 수행을 하는 것은 현재의 괴로움을 소멸시키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결과로 다음 생의 과보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음 생을 위해서 수행하다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다음은 천신의 게송입니다.
7. 나 끄와항 아우소 산딧티깡 히뜨와 까리깡 아누다와미. 깔리깐짜 끄와항
Na khvāhaṃ āvuso sandiṭṭhikaṃ hitvā kālikaṃ anudhāvāmi. Kālikañca khvāhaṃ
아우소 히뜨와 산딧티깡 아누다와미. 깔리까히 아우소 까마 웃따 바가와따
āvuso hitvā sandiṭṭhikaṃ anudhāvāmi. Kālikāhi āvuso kāmā vuttā bhagavatā
바후둑카 바우빠야사 아디나오 엣타 비이요. 산딧티꼬 아양 담모 아까리꼬
bahudukkhā bahupāyāsā ādīnavo ettha bhiyyo. Sandiṭṭhiko ayaṃ dhammo akāliko
에히빳시꼬 오빠네이이꼬 빳짯땅 웨디땁보 윈뉴히띠.
ehipassiko opaneyyiko paccattaṃ veditabbo viññūhīti.
7. 벗이여, 나는 절대로 지금 여기 보이는 세계를 제쳐두고 시간이 걸리는 것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벗이여, 나야말로 시간을 걸리는 것을 제쳐두고 현세의 이익을 추구합니다. 왜냐하면 세존께서는 감각적 욕망이란 시간이 걸리는 것이고 괴로움과 절망이 가득하며 거기에는 많은 위험이 따른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법은 세존에 의해 잘 설해졌고, 지금 이곳에서 경험할 수 있고,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와서 보라고 할 수 있고, 열반으로 이끌어 주고, 현명한 사람들에 의해 직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나 끄와항 아우소 산딧티깡 히뜨와 까리깡 아누다와미(Na khvāhaṃ āvuso sandiṭṭhikaṃ hitvā kālikaṃ anudhāvāmi)에서 나(Na)는 ‘없다’, ‘아니다’이고, 끄와항(khvāhaṃ)은 ‘나는 정말로’이고, 아우소(āvuso)는 ‘존자여’, ‘벗이여’입니다. 아우소(āvuso)는 비구들 사이에서 대화할 때 사용하는 정중한 표현입니다. 또는 동료나 아랫사람에게 사용하는 호칭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아우소(āvuso)는 여신을 말합니다. 천신인 여신을 사밋디(Samiddhi) 존자는 벗이여, 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다음에 산딧티깡(sandiṭṭhikaṃ)은 ‘지금 여기 보이는 세계’, ‘현세’, ‘현세의 이익’이고, 까리깡(kālikaṃ)은 ‘제때에’입니다. 다음 아누다와미(anudhāvāmi)는 ‘쫓지 않는다’, ‘추구하지 않는다’입니다. 그래서 ‘벗이여, 나는 절대로 지금 여기 보이는 세계를 제쳐두고 시간이 걸리는 것을 추구하지 않습니다.’입니다.
깔리깐짜 끄와항 아우소 히뜨와 산딧티깡 아누다와미(Kālikañca khvāhaṃ āvuso hitvā sandiṭṭhikaṃ anudhāvāmi)는 ‘벗이여, 나야말로 시간을 걸리는 것을 제쳐두고 현세의 이익을 추구합니다.’입니다. 다음에 ‘깔리까 아우소 까마 웃따 바가와따 바후둑카 바우빠야사 아디나오 엣타 비이요(Kālikāhi āvuso kāmā vuttā bhagavatā)’는 ‘왜냐하면 세존께서는 감각적 욕망이란 시간이 걸리는 것이고 괴로움과 절망이 가득하며 거기에는 많은 위험이 따른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음에 ‘산딧티꼬 아양 담모 아까리꼬 에히빳시꼬 오빠네이이꼬 빳짯땅 웨디땁보 윈뉴히띠( Sandiṭṭhiko ayaṃ dhammo akāliko ehipassiko opaneyyiko paccattaṃ veditabbo viññūhīti)’는 ‘그러나 이 법은 세존에 의해 잘 설해졌고, 지금 이곳에서 경험할 수 있고,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와서 보라고 할 수 있고, 열반으로 이끌어 주고, 현명한 사람들에 의해 직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법입니다.’
산딧티꼬(Sandiṭṭhiko)는 ‘금생에서 이익을 얻는 법’입니다. 그래서 지금 여기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이 법입니다. 이때의 시제는 현재라는 의미가 중요합니다. 수행자는 항상 지금 여기에서 라는 의식이 필요합니다.
아까리꼬(akāliko)는‘자체되지 않는’, ‘현세의’, ‘즉시의’, ‘시간에 매이지 않는’, ‘때 아닌 때의’입니다. 그래서 지체 없이 결과를 주는 법입니다. 경전 결집을 할 때 계율이 바뀐 것이지 법이 바뀐 것이 아닙니다. 세월 따라 바뀌는 것은 부처님 법이 아닙니다. 아까리까(akālika)는 무시간적(無時間的)인 뜻으로 시간에 매이지 않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청정도론 주석서를 쓴 붓다고싸(Buddhaghosa)는 누구나 성스러운 길을 실천하면 그 결과가 즉시 나타난다는 의미에서 아까리까(akālika)를 즉시 효과가 나타나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시간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즉시 효과적인 것, 또는 시간을 초월하는 것이라는 두 가지 의미가 모두 함축된 말이라고 합니다. 원인과 결과의 원리에서 보면 무시간성은 동시적인 것과 시간지연을 모두 함축할 수 있습니다.
에히빳시꼬(ehipassiko)는 ‘와서 보라’는 뜻입니다. 에히빳시꼬(ehipassiko)에서 에히(ehi)는 ‘오다’이고, 빠시꼬(passiko)는 ‘보다’의 단수 이인칭 명령입니다. 이 두 가지가 근본접미사와 결합하여 복합어를 만든 것입니다. ‘와서 보라’는 뜻은 매우 중요한 말입니다. 예를 들면 괴로움이 있을 때 이 괴로움은 ‘지금 여기 괴로움이 있으니 와서 보라’고 나타난 것입니다. 와서 보라는 것은 하나의 대상으로 알아차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즉기 괴로움이 하나의 법으로 분리됩니다. 부처님께서는 괴로움을 해결하는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을 말씀하셨는데 이것이 ‘와서 보라’는 하나의 근엄한 명령인 것입니다.
다음에 오빠네이이꼬(opaneyyiko)는 ‘열반으로 연결되어 있는 법’입니다. 뻣짯땅(paccattaṃ)은 ‘성인들이 아는 법’입니다. 웨디땁보(veditabbo)는 ‘지혜로써 스스로 증명하는 법’입니다. 여기서 깔리깡(kālikaṃ)은 ‘제때의’라는 말인데 세월과 시간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 말은 나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서 비구가 되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스님께서는 지금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을 위해서 수행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부처님의 법이 어떤 것인지 담마(Dhamma)의 6가지 공덕을 말해줍니다.
다음은 천신의 게송입니다.
8. 까탄짜 빅쿠 까리까 까마 웃따 바가와따 바후툭카 바우빠야사
Kathañca, bhikkhu kālikā kāmā vuttā bhagavatā bahudukkhā bahupāyāsā
아디나오 엣타 비이요. 까탕 산딧티꼬 아양 담모 아까리꼬 에히빳시꼬
ādīnavo ettha bhiyyo. Kathaṃ sandiṭṭhiko ayaṃ dhammo akāliko ehipassiko
빳짯땅 웨디땁보 윈누히띠.
paccattaṃ veditabbo viññūhīti.
8. 비구여, 어떻게 해서 세존께서는 감각적 쾌락이 시간이 걸리며 괴로움이 많고 아픔이 많고 더 많은 위험이 따른다고 하셨습니까? 어떻게 해서 이 성스러운 법이 세존에 의해 잘 설해졌고, 지금 이곳에서 경험할 수 있고,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와서 보라고 할 수 있고, 열반으로 이끌어 주고, 현명한 사람들에 의해 직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다음은 사밋다 존자의 게송입니다.
9. 아항 코 아우소 나오 아찌라빱바지또 아두나가또 이망 담마 위나양.
Ahaṃ kho āvuso navo acirapabbajito adhunāgato imaṃ dhamma vinayaṃ.
나 끄와항 삭꼬미 윗타레나 아찍키뚱.
Na khvāhaṃ sakkomi vitthārena ācikkhituṃ.
아양 소 바가와 아라항 삼마삼붓도 라자가헤 위하라띠 따보다라메.
Ayaṃ so bhagavā arahaṃ sammāsambuddho rājagahe viharati tapodārāme.
땅 바가완땅 우빠상가미뜨와 에따맛탕 뿟차.
Taṃ bhagavantaṃ upasaṅkamitvā etamatthaṃ puccha.
야타 떼 바가와 브야까로띠 따타 낭 다레이야시띠
Yathā te bhagavā byākaroti tathā naṃ dhāreyyāsīti.
9. 벗이여, 나는 출가한지 얼마 되지 않았고 근래에 이 법과 율에 들어온 신참입니다. 그래서 나는 법과 율을 자세하게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 그분 세존. 아라한. 정등각자께서는 라자가하에서 빠뽀다 원림에 머물고 계십니다. 그분 세존께 이 뜻을 여쭈어 보십시오. 그래서 세존께서 그대에게 설명해 주시는 대로 받아서 지니십시오.
나오(navo)는 ‘새로운’, ‘깨끗한’, ‘젊은’, ‘신참’입니다. 그래서 새롭게 출가한 비구입니다. 비구가 돼서 5년이 되면 맛지마빅쿠(Majjihimabhikkhu)라고 합니다. 맛지마(Majjihima)는 ‘중간의’, ‘중앙의’입니다. 그래서 5년 이내의 비구는 신참입니다. 10안거를 지내면 테라(Thera)입니다. 테라(Thera)는 ‘장노’ ‘상좌’, ‘연장자’입니다. 어떤 곳은 10안거까지를 신참이라고 합니다. 10안거를 지나야 법문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곳에서는 20안거를 지나면 테라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두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마하 테라는 20안거를 지나야 합니다.
다음 시간에 사밋디 경을 계속 공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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