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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마을 그림순례(23)] 가을비 속의 정자와 솔숲 포항 침곡산 덕동문화마을 | ||||||||||||||||||
“이 선생, 곧 폭풍이 온다는데 어쩌지요?” “관장님 염려 마세요. 반드시 제 날짜에 가야 합니다. 부탁한 숙소나 준비해 주세요.” 사정인즉 배낭 매고 홀로 떠남을 원칙으로 세운 수년간의 마을 순례에 특별한 동행이 있으니 그분의 스케줄을 위해서도 착오가 있어서는 안 된다. 10년 전(1996년)부터 한결같이 내 작품에 관심을 보여주신 이인호(李仁浩·전 핀란드·러시아 대사·한국국제교류재단 이사장·현 명지대 석좌교수) 교수님과 함께 떠나야하기 때문이다. 첫 여성 대사로서 세계를 두루 여행하였으나 정작 국내여행은 아쉽다며 꼭 한 번 화가를 따라 가고 싶다고 청한 지가 여러 차례였다. 따라서 이참에 동참할 수 있는 지역 지인에게 차편을 부탁하고 마을에 알린 후 열차에 올랐다. 한편 정병모 교수(경주대학 문화재학과)를 한 열차칸에서 만나 함께 동대구역에 내렸다. 그리고 상경시 미리 주차해 놓은 그의 차로 경주로 내달린다. 경주로 향하는 목적은 정 교수도 참여한 ‘천년의 황금도시 경주’ 전(경주국립박물관 2006. 9. 5~ 9. 28)이 열리고 있기 때문이다. 내 출품작 4점 중 2점은 안강의 양동마을과 옥산서원(玉山書院)을 그린 것인데, 마을 입향조인 회재(晦齋) 이언적(李彦?·1491-1553) 선생이 태어나고 머문 곳이다. 그런데 목적지인 포항시 북구 기북면 덕동마을 또한 사료를 보니 회재 선생의 집안인 여강이씨(驪江李氏) 집성촌이 아닌가. 하여 작품 관람 또한 마을 들머리의 물안개와 바람, 물소리가 될 수 있는 터였다. 어쨌든 우연 치고는 한 집안의 350년 역사와 뿌리를 세 차례나 더듬는 화첩기행이 되고 있는 줄이야. 정 교수의 후의로 토속음식을 대접받고 함께 떠나니 안강의 양동 마을 입구에서는 이재란 선생(포항 신흥중 음악교사)이 차에서 기다리고 있다. 이 선생은 경주는 물론 방학 때마다 세계 문화기행을 하는 분인데 동행을 권하자 흔쾌히 응한 것이다. 이 만남 덕분에 졸작으로 보았던 설창산 양동마을을 잠시 둘러볼 수 있는 행운을 가지며 향단(香壇·보물 제412호) 마루에 올라 기념사진도 찍었다. ‘사계절 변함없는 만상의 조화’ 오전 내 일기예보를 비웃었으나 마침내 먹구름이 짙어지고 가랑비가 비낀다. 서둘러 포항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또 한 분의 동행이 합류하니 마을소개를 자청한 이점동 선생이다. 이재란 선생의 청이 있었던 모양이다. 들녘은 그야말로 황금물결, 사과밭이 알알이 붉은 등을 달았고, 코스모스 행렬과 억새가 비껴간다. 농부가 아닌 여행자에겐 가을 바람 속에 너울너울 춤추는 허수아비마저 낭만과 향수를 자극한다.
가랑비와 바람 속에서 덕동 마을(기북면 오덕1리)에 이르는 길은 실로 옛길 정취로 그윽하다. 솔숲과 활엽수가 둘린 마을 입구의 청소년수련관은 폐교(덕동초교)를 활용한 공간이다. 비 맞는 교적비엔 1961년 개교 후 1,394명의 졸업생을 내고 1992년에 폐교되었다고 씌어 있다. 고작 30년 역사이니 거반 생존해 있을 마을의 증인들은 다 어디로 흩어졌을까. 마을에 당도했음을 알리는 도하송(到下松)을 지나자 마을회관 옆 전시관에서 손짓하며 반기니 이동진(李東震·76) 덕동민속전시관장과 주민들이다. 곧 바로 덕동 마을의 상징인 용계정(龍溪亭)으로 일생을 안내하니 정자방에서 마을 어른들이 둘러 앉아 있다. 함께 맞절을 나누자 낯선 얼굴이 금세 친숙해진다. 여장을 풀고 정자마루 기둥에서 내다보자 계곡 암반이 기괴한데 연어대(鳶漁臺)란 글씨가 선명하다.
용계천이 흐르는 정자 주변은 푸른 이끼와 석벽이 병풍처럼 둘렸고, 연못과 솔숲이 수려한 경관을 이루었다. 이곳의 솔숲은 ‘생명의 숲’에서 아름다운 숲으로 지정할 예정이다. 2003년 마을숲 복원 대상지였으며, ‘전통의 복원과 숲문화 회복’이라는 의미로 지원할 계획이다. 마을숲은 입구의 송계숲, 용계정 위쪽의 섬솔(도송)밭과 용계천 석벽 너머의 정계숲을 포함한다. 금년에 이 숲에서 ‘덕동문화마을 전통숲 제례 및 써레치 복원’ 행사가 있었다(2006. 8.15). 써레치란 농민들이 농기구 씻는 행위로, 8월 중순께 머슴들에게 술과 음식을 제공하고 푹 쉬게 한 데서 비롯된 400여 년간 이어져온 풍습이다. 우중관계로 우선 마을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덕동민속전시관에 들어서니 마을에서 수집, 관리해온 애장품으로 가득하다. 천장 위에 벌이 살고 있어 벌떼소리 가득한 전시관엔 옛 숨결이 오롯하다. 마을은 사전에 살폈듯이 여강이씨 집성촌인데, 회재의 아우 농재(聾齋) 이언괄(李彦适)의 4대손 사의당(四宜堂) 이강(李?·1621-1688) 선생이 안강의 양동 마을에서 거처를 옮김으로 비롯되었다. 이로써 입향조 사의당의 호가 용계정 전에 씌었음을 살필 수 있다.
하여 정 교수는 혹 이곳에 옛 화가들이 다녀간 기록을 찾고자 하나 이 관장이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니 아쉬워한다. 하지만 세덕사 현판은 시서화(詩書畵)의 대가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이 써서 남겼고, 명흥당(明興堂)은 승지를 지낸 이익회(李翊會), 입덕문(入德門)은 입암인(立岩人) 권신추(權愼樞)의 글씨로 남았다. 마당 깊은 곳에서 출토된 망와(기와)의 문양은 다양하고 아름다워 당시 건축문화의 기품을 보게 한다. 닥종이를 꼬아 만든 바랑, 거북이 등판 비석처럼 새긴 원목의 등잔도 눈에 띄는 우수한 생활공예품이다. 마침내 참관을 마친 후 일행에게 방명록을 권하여 붓을 드니 오늘의 인연 또한 미래에 한 자취로 남을 양인가. 마을숲 복원대상인 섬솔밭·송계숲·정계숲
조경과 함께 경관 예찬은 일찍이 구곡(九曲), 삼기(三奇), 팔경(八景)으로 나뉘었으며, 덕연구곡(德淵九曲)의 비석으로 세워져 있다. 그 마당에 마모가 심한 석조비로자나불상은 주변 덕인사지에서 출토된 것을 옮겨온 것이다. 일행은 이제 계곡 위의 솔밭으로 갔다. 섬솔(도송)밭은 풍치와 방풍림 역할을 동시에 지녔다. 한편 원래 산에서 내려오는 두 줄기의 물 중 한 곳을 늪으로 만든 친환경숲-바이오톱(Bio Top) 조성지인데, 다양한 수생식물 중 노랑어리 연꽃이 늪에 수를 놓았다. 이로써 덕동 마을은 옛문화와 함께 생태마을 자원으로 충만하다. 하지만 대체 바이오톱이 무엇이란 말인가.
때마침 도착한 포항 생명의 숲 사무국장 장정선씨와 이 관장 댁에서 차를 나누며 일행이 이의를 제기하자 그이도 공감한다. 문제는 관계당국이 마을분들과는 협의 없이 안내판을 임의로 제작, 세우고 간 것이다. 이에 개명 제안으로 ‘생명의 늪, 생명의 땅’ 등이 나왔다. 모쪼록 자연친화는 가장 쉽고 이해가 우선해야 할 것이다. 날이 어두워져 사정이 있는 정 교수와 이점동 선생, 장 국장은 되돌아가고 셋만 남았다. 남녀유별이라 이 선생댁에서 여성이 자고 길손은 홀로 정자에 머물라는 것이다. 그러나 어찌 고색창연한 정자의 운치와 경관, 그리고 풍류의 기회를 놓칠 분들인가. 씻기와 뒷일이 불편하다는 주인의 염려를 떼고 정자 방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로 합의했다. 정자는 평면 열 칸 중 여섯 칸은 대청이고 온돌방인데 방은 십여 명의 숙소가 될 만큼 넉넉하다. 뜻밖에도 정성껏 준비해온 이재란 선생의 다례(茶禮)와 깊은 맛의 와인 한 잔이 깃들인 밤. 흐르는 계곡물과 떨어지는 빗소리를 듣는 시간이라니. 한여름 저녁불을 끄고 대청에 누우면 스치는 솔바람과 밝은 달빛이 세속을 잊게 하고 사위에서 들리는 물소리, 벌레소리가 선경(仙境)에 이른다지만 오늘의 인연도 특별하다. 누가 가을밤 빗소리 듣는 정자 속의 다담(茶談)을 쉽게 경험할 수 있으랴. 믿건대 이곳 조상의 음덕이 길손들의 염원을 받아주고 열어준 행운이리. 평균연령 70대…미래 걱정된다 이튿날 아침, 밤새 추적이는 비는 태풍경보를 타고 드세진 느낌이다. 이 관장댁에서 부인(이옥주·70)이 마련한 아침상은 추어탕과 직접 심고 가꾼 채소로 자연채식의 무공해 별미를 맛보게 해 준다. 그런데 부부의 모습이 최소 10년 이상은 젊게 보인다. 일행 모두의 공감에 건강비결은 검약(儉約)과 소식(小食)이며 특히 물이 중요한 것 같다고 하나 자족하는 생활과 노동이 조화를 이룬 듯하다. 슬하의 5남매가 대구, 포항 근교에 살림을 냈으므로 항시 발걸음이 잦고 손자와 문자 메시지를 주고 받는다는 노부부는 실로 다정다감하다. 이제 길손은 서두르기로 했다. 태풍 소식에 비 그치기를 기대할 수 없는 이상 며칠을 머물 이유가 없으므로 우산을 쓰고라도 화첩기행을 단행해야했다. 그런데 고깔에 우비를 쓰고 나타난 이희섭(李熙燮·57·용계정 유사)씨는 내 우산을 잡아채며 “공휴일엔 사람들이 많이 오는데 오늘은 비가 와서 한가하고 마침 할 일도 없으니 안심하고 그림 그리소” 하며 내 사정을 헤아려준다. 마을 입구로 다시 내려가서 금줄이 둘린 당산나무를 만나니 귀목나무라고 부른다. 그런데 제단의 소나무와 함께 붙어있고, 주변 솔밭으로 금줄이 연결되어 있다. ‘전통마을 숲 복원’은 숲속전통제례의식으로 이곳에서 이루어졌는데, 정월 대보름에서 해방 이후 8월15일로 일정이 변경되었으며, 제례를 지원하는 송계부가 기록 보존되어 왔다. 그리고 마을숲은 현재 200여 년 된 소나무가 주종을 이룬다. 또 마을 길목으로 오르자 유일한 점방(가게) 문에 ‘행복을 여세요’라는 어여쁜 글씨가 돋보여 마음이 기쁘나 상품진열대가 텅 비어있어 안타깝다. 이 가게 주인이 지금 내게 우산을 받쳐주는 이씨다.
이원돌(李源乭) 가옥 여연당(與然堂) 또한 초가가 딸린 ㅁ자형 집인데, 벌꿀을 치고 있다. 밑그림을 그리는 동안 주인이 벌꿀차를 내와 비에 젖은 기분이 한결 가뿐하다. 온갖 먹거리와 농기구가 벽에 걸려있어 산골 농가의 현실이 실감난다. 그리고 바로 옆 담장으로 이어진 사우당(四友堂) 이희국씨 집은 옛 사대부의 권위와 상징처럼 마루가 높고 긴 一자형 건물로 앞산을 바라보고 앉았다. 그 길목 앞의 덕계서당(德溪書堂)은 추억의 비를 맞으며 비어있어 쓸쓸하다.
점심은 어제 만난 이점동 선생 집에서 일행을 초대해와 근교의 과수원집에서 정성어린 대접을 받았다. 이제 마을에 돌아온 후 다시 화첩을 챙기는 것은 마을 전경을 살펴야 하는 일이 남은 까닭이다. 가을비 내리는 마을을 돌아다니며 바라본 자금산(紫金山) 자락과 천재봉(天癸峰), 그 아래로 펼쳐지는 솔숲의 경관은 천혜의 비경이요, 한 폭의 그림이다. 그 솔숲 뒤로 휘돌아가는 황금빛 논 앞으로는 계곡과 늪지가 마을을 품었다. 마을집들은 모두 계곡 넘어 동남쪽으로 앉았기에 마을을 감싸고 있는 주산(主山)은 실제 뒷산인 침곡산(針谷山·720m)이 된다.
그러나 한편 이 아름다운 풍광과는 달리 마을에는 현재 27가구에 44명이 거주하는데 빈집이 늘어가는 추세다. 평균 연령이 칠십대인 노인들이 꾸려가는 현실과 미래는 불투명하다. 이에 젊은 출향인(出鄕人)과 문화재 당국의 관심이 요청되고 있다. 아무리 산천이 의구하되 마을은 생기가 돌아야 미래를 기약할 수 있다. 샘이 솟듯 흐르는 물만이 썩지 않고 강으로 흘러감으로. 글·그림= 이호신 한국화가 lhs1957@lycos.co.kr |
첫댓글 淸天님의 블로그(http://blog.joins.com/rpwhrtks)에서 퍼온 글인데, 그림으로 재구성한 덕동마을은 더욱 운치가 있어 보입니다.
그림과 곁들여 보니 그제 본 정경들이 정리도 되고 참 좋습니다. 이 분, 그림도 그림이지만 글도 좋군요.
침곡산을 너머 학교에 등교하던 동무들이 있었는데 기억이 아련하네요. 비가많이 오거나 눈이 많이 내린 날, 바람이 많이 부는 날에도 대 여섯명이 함께 산너머 학교를 다녔지요. 그 동무들이 보고 싶네요. 관장님 부부의 다정한 모습도 참 보기 좋습니다. 그림과 함께 보니 더욱 좋습니다요.
저도 이호신 화백의 그림과 글들이 담긴 책들을 죄다 읽었는데,,,, 진경 산수화가 정말 일품이에요. 이런 일도 있었군요. 민속관에 이 그림들 모사본이라도 내걸면 더욱 마을이 빛날텐데 말예요.
그림으로 다시 보니 더 운치있고 가까이에 이런곳이 있다는 게 자랑입니다. 선선해지면 아이들 데리고 소풍을 가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