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미 읍내에는 순교 기념지가 여러곳이 있다. 그러나 공식 형장은 서문 밖이었던 것 같다. 다음은 옥터, 그리고 소위 생매장지라고 전해지는 조산리이다. 조산리는 해미읍에서 좀 떨어진 내 건너편 벌판에 오리나무와 버드나무 숲이 있는 곳이었다. 바로 현재 해미 성지로 조성된 곳이다. 생매장에 관한 일은 유해를 찾을 당시 70년이나 되는 옛날 일이었으므로 확인이 어려웠으나 다행이 노인들 중에 목격자나 전해들은 증언자들을 통해서 생매장 장소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들 증언에 의하여 1935년에 조산리에서 순교자의 유해를 찾게 되었다. 교우들을 묻어 죽인 구덩이 속에 흙이 썩은 것을 보면 의심없이 수십명으로 짐작되었으나 수습된 유해는 10명 가량밖에 되지 않았다. 병오년(1906) 큰 물에 봉분이 다 없어져서 무덤의 형적이 보이지 않았으나 증인의 말을 확인한 후 서산과 해미 관공서의 승낙을 얻어 발굴했다. 그 결과 유해를 많이 얻었을 뿐아니라 십자고상이 썩은 형적까지 발견했다. 발굴된 유해들은 성대한 예식을 갖추어 당시 서산 본당인 상홍리(일명 가재) 공소로 이장했다.
해미는 특히 1866년 병인년으로부터 1868년 무진년에 이르는 대박해 때에는, 수 많은 죄수들을 한꺼번에 죽이면서 시체 처리의 간편함을 위하여 생매장형이 시행되었다. 해미 진영의 서녘 들판에 십 수 명씩 데리고 나가서, 아무 데나 파기 좋은 곳을 찾아 큰 구덩이를 만들어 한마디 명령으로 산 사람들을 밀어 넣어 흙과 자갈로 덮어 묻어버렸다.
또한 생매장 형이 시행되면서 여름철 죄인의 수효가 적을 경우에는 사령들이 번거로움을 덜기 위한 방법으로 개울 한가운데에 있던 둠벙에 죄인들을 꽁꽁 묶어 물속에 빠뜨려 죽이는 수장 방법이 사용되기도 했는데 해미 지역 외인들은 천주학 죄수들을 빠뜨려 죽인 둠벙이라 해서 죄인 둠벙이라 부르고 있었으나 현재는 이름조차도 변해 진둠벙이라 불리고 있다.
교회가 이곳을 순교지로 인식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농부의 연장 끝에 걸려들어 버려지던 뼈들이 많았다고 하는데 이 때 캐어내던 뼈들은 수직으로 서있는 채 발견되었다고 한다. 바로 그것은 죽은 몸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이 묻혔다는 증거이다.
해미진영 서녘의 생매장 순교 벌판에서는 1935년도 서산 본당의 범 베드로 신부 지도하에 순교자의 유해 발굴 때 유해 일부와 유품 성물이 발굴되어 30리 밖 상홍리 공소에 임시 안장되었다가, 1995년 9월 20일 유해 발굴 터인 원 위치로 다시 안장되었고, 순교자의 유해는 별도로 보존 처리되어 유해 참배실에 보존되고 있다. 그리고 유해 발굴지 인근 하천 위에 16m 높이의 철근 콘크리트 조형물인 해미 순교탑이 세워져 있다.
이제 해미 성지는 1985년 4월에 해미 본당이 창설된 후 해미 순교선열현양회를 발족하였고 순교 성지 확보 운동을 전국 신자들에게 홍보하여 꾸준히 모금한 결과 1998년 말에 생매장 순교 성지를 약 7천 평 확보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1999년 5월부터 3천 명의 회원들로부터 성전 건립 기금을 모아 2000년 8월 기공식을 하였고, 2003년 6월 17일 기념 성전을 건립하여 순교자들의 유해를 모셔놓고 있다. 이렇게 조성된 생매장 순교지 일대는 "예수 마리아!" 기도 소리를 "여수머리"로 알아듣던 곳이 이제는 주민들의 입으로 "여숫골"이라는 이름의 땅이 되어 오늘의 순례자들을 맞이하고 있다.
■ 해미 순교와 관련된 신앙 증거 터와 순교 터
◆ 순교자들이 넘던 한티 고개
면천 고을과 예산 및 덕산 고을의 천주교 신자들을 해미 군졸들이 압송하여 넘던 고개이다. 교우들이 무리지어 살던 면천은 황무실 마을과 덕산의 용머리 마을, 배나드리 마을 등지에서는 집단으로 체포되어 넘어 오기도 하였다. 한티 고개를 넘어 붙잡혀 가던 숱한 순교자들이 고개 마루터에서 고향 마을을 마지막으로 뒤돌아보던 곳에는 잡초만이 무성하다.
◆ 벌판길과 진둠병
1790년대부터 80여 년간 시산 혈하를 이루던 서문밖 사형 터는 병인 대박해시(1866년 이후)에는 주거 인접지역인 관계로 대량의 사학죄인의 시체를 처리하기에는 협소한 장소였다. 1천여 명을 단기간 동안에 처형하기 위해 벌판에서 집행하게 되었는데 죽이는 일과 시체 처리하는 일을 한꺼번에 해치우기 위해서 십 수명씩 생매장하게 되었다. 생매장 시키러 가는 길에 큰 개울을 만나게 된다. 개울을 건너는 곳에 외나무다리가 있었고, 그 밑에는 물길에 패인 둠벙이 있었다. 두 팔을 뒤로 묶이어 끌려오는 사학죄인들을 외나무 다리 위에서 둠벙에 밀어 넣어 버리기도 하였다. 묶인 몸으로 곤두박질 당한 죄인은 둠벙 속에 쳐 박혀 죽었다. 이 둠벙에 죄인들이 떨어져 죽었다 하여 동리 사람들 입에 ‘죄인 둠벙’이라 일컬어지다가 오늘날에는 말이 줄어서 ‘진둠벙’ 이라 불리어진다.
◆ 생매장 순교지 여숫골
동구 밖 서쪽의 나무가 우거진 곳이었기에 "숲정이"라 불리던 곳이다. 현재는 논으로 가꾸어진 벌판이지만 병인년 대에는 숱한 천주학 죄인들이 산 채로 묻혀 졌던 곳이다. 이 뼈들은 수직으로 서 있는 채 발견 되었다 하는데 그것은 죽은 몸이 아닌 살아있는 사람이 묻혔다는 증거이다.
산 사람들이 묻히던 어느 날엔 함께 묻힐 동아리 가운데에 어여쁜 규수도 있었다 한다. 묻기를 명할 찰라에 형장의 눈에 들어온 규수의 자색은 그 형장의 연민을 자아내었다. 어여쁜 얼굴에 어찌 사학을 하여 죽는 몸이 되었느냐며, 살려줄 터이니 사학을 버리라고 꾀었으나 입술을 깨물고 그 규수가 먼저 구덩이에 뛰어 내리니 동아리 가운데 한 사람도 빠짐없이 함께 묻히더라는 이야기가 구전으로 전해 온다. 그날 묻히던 그 찰나에 하늘이 천둥으로 합성하고 사흘을 안개로서 생무덤을 덮어 주더라고 전해 온다. 묻히던 순교자들이 한결 같이 하늘에 외쳐대는 소리가 있었으니, "예수, 마리아!"라는 간구 였다, 허나 구경꾼들이 듣고 전하여 준 오늘까지의 동리 사람들 말로는 "여수머리"라 하여 여우 홀린 머리채로 죽어 갔다고 해서 이 숲정이를 "여숫골" 이라 부르고 있다.
◆ 무명 순교자 묘 : 서산 상홍리 묘
병인박해 시 해미 생매장 순교 현장을 목격하였던 이주필, 임인필, 박승익 등의 증언에 따라 1935년 서산 성당의 범 베드로 신부가 생매장지 일부를 발굴하여 순교자들의 유해 및 묵주, 십자가를 수습하여 서산군 음암면 상홍리 공소 뒷산에 안장하였었다. 1995년 순교자 대축일에 이를 다시 해미 성지로 이장하여 본래의 순교터(현 순교자 기념탑 앞)에 모셨다. 상홍리 순교자 묘소 자리에는 십자고상과 진토가 된 순교자 유해 일부를 모셔두고 있다.
▒ 여전히 식지 않고 (해미에서) <김영수> ▒
내포벌의 하늘이
끝없이 쪽빛으로 빛나는 것은
땅에다 뿌린 피들 있었음이요
내 아직도 꿈을 놓지 않았음입니다
결코 늙지 않는 햇살 속에서
약속 푸르게 익어 있는 노래 들으며
땅과 하늘 사이에서
슬픔으로 설렐 수 있는 것은
가슴 속에는 기도 품은 죄 있음입니다
내 속을 돌고 있는 밤의 안개는
자리를 조금씩 옮길 때마다
한 줌씩의 새벽을 남기면서
가장 깊은 슬픔의 샘에 닿아
얼굴 씻은 물소리 하나 되기를 바랍니다
눈물 어린 기도 하나 되기를 바랍니다
해미를 흐르는 바람은
여전히 식지 않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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