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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지 글이 잘 안써진다. 필자의 게으름 때문이리라. 조선에 대해 사람들에게 알려주겠다고 결심을 했지만,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아무 소득없이 다시 내리길 수차례. 부담이 가는 것일까. 하지만 오늘 뉴스를 본 바, 이왕 시작한 것, 끝까지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만주연방과 조선의 상호방위조약 체결 소식 말이다.
굳이 말하자면, 필자는 반중국 전쟁에서 중국측 입장에 대해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다. 청의 정통성을 가진 중국 입장에서, 만주와 티벳은 그들이 수복해야 할 토지일 '수' 있다. 청 때와는 달리 다스리는데 필요한 기술이 갖춰졌으며, 그 외에도 수백년간 쌓아온 통치의 기술도 있었다. 그들이 만주와 티벳을 탐내는 것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다만, 그들의 목표는 10년도 안된 헤게모니 전쟁 당시 중국을 도운 조선과의 의리를 배반하는 것이었으며, 러시아의 몰락으로 한창 신경이 곤두세워진 유럽, 미국을 자극했다. 결과적으로 반중국 전쟁, 별칭으로 '진정한 마지막 대전'-세계의 염원이 담긴 명칭을 보라!-이라 불리는 전쟁이 끝난 후, 중국은 연방형식으로 잘려나갔으며, 아직도 일정 수준 이상의 군사력을 보유 못하고 있다.
그런데 그들이 몇십년 전을 다시 왜곡하고 있으니, 이 것이 얼마나 무서운가. 40년대의 전쟁과 합쳐 동아시아를 유럽 열강에게서 구원하려 했다는, 사람들을 거의 100년 전에나 통했을 법한 말로 선동하며, 중국을 다시 하나의 정부로 모으자는둥, 조선마냥 고토회복을 부르짖는 소리도 차츰 커지고 있다. 문제는, 50년간 웅크렸던 그들은 정말 그만한 힘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이다. 오늘 만주연방과 조선 사이에 이뤄진 조약은 바로 이런 급박한 세태를 보여주는 것이리라.
하지만 아직도 조선의 일부...아니 많은 사람들-네티즌을 본다면 말이다-은 만주 연방과의 이 조약을 전면 반대하고 있다. 상호방위조약 체결 소식 이후 나온 반대 시위는 필자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들이 시위하는 것은 어째서일까. 우월감 때문일까. 조선이 그동안 느껴온 중국의 공포를 그들이 몰라서 그럴까. 그렇게 바라보던 필자는 어떤 현수막들을 본 순간 한숨이 터져나왔다. '찬탈자들', '영광의 땅', ' 수복'. 그렇다. 필자가 이 글을 쓴 이유가 반대 시위에 등장한 것을 본 순간, 이 글을 끝까지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교육이 어떤 상황이길래 이런 글이 버젓이 올라오는 것일까. 조선의 역사의식은 이런 식으로 독선적으로 터져나오는 수준 밖에 안되었던가. 과거의 영광에 눈을 뺏긴채 걸어가지못하는 자들이여. 이 글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길, 다시 간절히 바란다.
지난번 글은 조선이 행정을 개혁했다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일본이 세계에서 알아주는 열강이 된 후, 조선이 취한 첫 태도는 경계였다.
일본이 스스로 공장을 설립할 수 있는 여력이 생겼다는 것은, 조선에게 대체로 희소식이었을 것이다. 사실 같은 배를 탄 동지 아닌가, 이 둘은. 미국-유럽 열강을 따라잡으려고 하는 국가들. 그런데 고종을 포함한 조정은 어째서 그동안 돈독했던 동지를 버리려 한 것일까.
이는 조정과 고종의 대화가 적힌 실록에서 나타난다. 당시 고종은 일본이 위협적이기는 하나, 순망치한이라, 가까운 사이인 만큼 동맹을 통해 유럽과 미국을 경계하자고 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에 대한 신하, 박영환의 답이 인상적인데, 그가 댄 것은 원교근공이었다. 그의 눈에 일본은 동지가 아닌 '가까이에 있는 적'이었다. 그가 친미파였다는 것도 이유일 수 있겠지만, 그는 당시 일본의 상태를 떠오르는 태양으로 묘사하며, 동에서 뜨는 해는 가까운 곳부터 빛으로 집어삼킨다 표현하였다. 박영환의 생각에, 일본의 첫 상대는 가장 가까운 서쪽의 나라, 조선이었다.
앞으로 보면 알겠지만, 그의 생각은 옳았다.
다만 고종의 생각에도 유의할 점은 있으니, 당시부터 낌새가 보이기 시작한 반동주의 반란군이었다. 외부의 적보다 무서운 것은 내부의 적이니, 자신의 권력기반인 근대화를 무너뜨릴 수 있는 그들이 일본군보다 무서운 것은 왕으로서 어쩔 수 없었으리라.
그러나 그의 걱정과는 별도로, 몇년간 미국과 교섭해온 이야기는 성공하여,
1870년 5월 12일, 조선은 첫 근대화 공장이며 앞으로 조선을 웃기고 울릴 시멘트공장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이 시기와 행정 개혁을 한 시기 사이를 보면 묘한 부분을 볼 수 있는데, 행정 개혁을 실시한 때 외에는 이 개혁에 대한 부분이 제대로 묘사되어 있지 않으며, 결정적으로 공장이 지어진 때를 보면 '고종이 공조판서에게 비단 20필을 하사하였다.'식으로 구식 행정이 아직 바뀌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를 보면 당시 행정개혁은 없었거나, 혹은 있더라도 구체적인 행보는 거의 없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추진력이 강했던 고종이 어째서 이런 실수를 벌였을까. 워낙 오랫동안 나라를 다스렸기에 힘이 빠진 것일까. 혹은 그 나이 때까지 생기지 않은 자식 때문에 마음이 약해진 것일까.
어쩌면, 반란을 더 크게 하기 싫어서일 수도 있겠다. 혹여나 정부가 어지러운데 반란이 일어난다면, 그것도 이런 변화를 싫어하던 반동주의자들이 반란을 일으킨다면, 조선에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추측일 뿐이다.
1871년 2월, 조선에는 근기지방의 사족들을 중심으로 반동주의 반란을 일으켰다. 위정척사라 부르짖던 이들의 반란은 전국적으로 호응을 얻어 도합 이만 사천여명이 그들에게 가담했다 알려졌다.
이들이 전투에서 승리한다면, 고종은 자신이 순조에게 그랬듯 권좌에서 밀려날 것이리라.
그러나 조척을 비롯해
조선 무관들이 그간 서구에 받은 영향은 지대했다.
반동주의자들의 첫 반란은 두달여만에 진압되었다. 이 반란은 당시 조선 사람들의 마음을 알 수 있는 계기이기도 했으나, 진압됨으로 조정이 반란의 걱정 없이 사회변화를 적극적으로 하는 계기가 되었다.
1873년 1월 6일, 고종이 승하하였다. 향년 56세. 나라의 개혁을 위해 모든 것을 불사른 자의 죽음이었다. 그의 찬탈에서 승하까지, 조선에는 수많은 일이 있었으며, 변화가 있었다. 그리고 당시의 그들은 몰랐겠지만, 그의 결정은 이후 조선이 열강에 잠식당하는 일을 막아주었다.
그의 승하 후, 신하들은 오래 재위하며 나라를 오랫동안 지켰다하여 고종이라 시호하였다.
그 후 그들은 새로운 문제에 직면해야했다.
고종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전계대원군-고종계열은 끝났다. 이 후 조선의 권좌를 차지한 자는
전계대원군의 삼남인
전계대원군-흥선대원군-광종계열이었다.
형만큼은 아니었지만 좋은 정치력을 갖춘 흥선대원군이었으나, 그는 차남도 아니며, 나이도 형인 고종과 댓살도 차이 안난다는 단점이 있었다. 다만 차남은 이미 골골했으며, 무엇보다 차남도 자식이 없었다. 이에 흥선대원군은 고종의 비였던 인헌대비를 찾아가 자식을 양자로 들이게 하니, 그가 바로 현재 광종으로 알려진 이준이다.
다만, 문제는 그가 고종에게 먼저 말했다든지 하는 기록이 없었기에 권력을 위해 형을 버렸단 비난을 받아야 했으며, 광종의 입지도 그에 따라 약했다.
그러나, 오호라, 조선은 당시 축복받은 것이나 마찬가지니, 고종을 이은 그도 당시 민첩하게 행동하였다.
1873년 6월 19일, 그는 두가지 일을 동시에 해낸다. 우선 고종 때 미처 제대로 못한 행정개혁을 마무리 지었으며, 이에 불만을 가진- 아예 개혁을 바라지 않는 보수주의, 권력을 빼앗긴 왕당파- 다른 파벌들을 쥐기 위해,
아예 권력의 중추를 반동주의에게 옮겨 왕당파와 대원군파에게 위기의식을 느끼도록 하였다.
광종은 왕당파에 순순히 동조할 마음이 없었다. 그리고,
보수주의와도 결탁할 마음은 없었다.
1873년 6월 19일, 광종은 세계에 조선이 서구와 대등한 수준임을 천명했으며, 동시에 조선이 청에 종속된 국가가 아닌, 하나의 대등한 국가임을 알리며 문서에 '왕' 대신 '제'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후에 광종, 혹은 무제라 불리는 자의 기운찬 첫 걸음이었다.
그렇다. 이렇게 그가 그 명석한 머리와 시기가 맞아떨어졌다면, 파시스트들이 하는 말대로 그는 가장 위대한 조선의 황제로 남아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현실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광종이 근대화 선언 이후 제일 먼저 한 것은 해군과 육군 편성이었다.
여기서 광종이 준비한 육군이 그동안 조선이 애용해온 구식 장비가 아닌 신식 장비를 갖췄다는 것은 특기할 만하다.
그리고 조선은 제2차 조선철도건설계획을 시행했다.
이 무렵, 조선철도건설합동을 공식적인 '조선토목건설회사'로 다듬은 권동열이 이 일을 전부 도맡을 수 있었으며, 그가 당시 상상도 못한 돈을 벌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겠다. 이에 대해 궁금한 사람에게는 '평양 권씨 일족'(권동열이 시조다.)를 읽어보시길. 필자 감상으론 '록펠러가문 사람들'만큼 재밌었다.
일단 근대화가 끝나자, 조선사회는 빠르게 변화해갔다. 당시를 살펴보면 합리주의 같은 이론이 조선에 물밀듯 들어왔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최초의 철강회사이자 지금도 수많은 공대생이 들어가고 싶어하는 'PS(구 평양철강)'이 지어진 것도 이무렵이다.
뭐, 'PG(구 부산유리)'도 이시기에 지어진 것은 사실이다. 지금 PG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누가 세계에서도 알아주던 근대 부산유리를 생각할 수 있을까.
발전은 계속됐다.
사족에게 이런 변화가 달갑지 않다고는 해도.
결국 위정척사의 2차 반란이 대두하자, 광종은 이 일을 계기로 다시 왕당파와 정국을 이끌 것을 선언했다. 이후 연립정권 이전까지 반동주의가 권력을 잡는일은 없게 된다.
2차 반란이 성공적이었던 것도 아니다.
반동주의는 앞으로도 발악하게 되지만, 이에 대한 것은 시간이 되면 자세하게 다루자.
그리고 공장들이-정부의 돈을 축내기도 하지만- 정상적으로 돌아가자,
그제야 조선은 세계를 돌아볼 여유를 가지게 된다. 열강들로 범벅이 된 세상을.
사실 그들이 마음만 먹는다면 아직도 낄 자리는 많았지만, 당시만 해도 그들은 지금까지 살아온 땅을 벗어날 생각은 거의 없었다. 당시만 해도 말이다.
어쨌든 '조용한 동방의 나라'는 그 시기에도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그 명성에 걸맞는 행동을 했다 할 수 겠다.
당시 유럽이 촉각을 곤두세운 다뉴브지방 크라이시스에도 조선이 무엇을 했다는 기록이 없는 것을 보면 말이다.
일본의 간섭이 있기 전까지는.
마침 유럽이 다뉴브지방으로 인해 대규모 접전을 시작하면서, 미국이 동아시아를 돌볼 여유는 사라지다시피했다. 일본은 그 사이를 교묘하게 파고들었다.
사실 조선의 미국과 일본의 간섭이 절묘하게 맞아들어간 시기, 조선은 전보다 더 여유로운 생활이 가능했다. 시멘트, 유리, 술 등은 어디에 내놔도 늘 사용되는 것이기에, 수출용으로도, 내수용으로도 적절했다. 당시 조선이 호황을 누렸다는 사실은 그 시기 회사들의 회계장부나 실록 어디를 펴도 알 수 있다.
이런 호황으로 조정이 자신감이라도 붙은 것일까. 그들은 피스톤 엔진을 개발한 후 바로 다른 산업기반 쪽 기술을 연구하며 장밋빛 산업국가로의 발전을 꿈꾸고 있었다.
반란군들도
그들을 못막는 형국이니, 사실상 그들은 조선을 막을 수 있는 자들은 없다고 생각했으리라.
일본이 마침내, 미국인사와 친미파들의 무수한 견제를 뚫고 조선 정부에 간섭할 수 있게 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1877년 말, 일본 대사관 인물이 조선 회의에 얼굴을 내비치며, 지금도 조선인들이 역사공부를 하면서 치를 떠는 '일본 간섭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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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름 탓에 이제야 썼습니다.(..) 이런 게으름뱅이 같으니라고. 쓸때는 정성들여 썼다고 생각했지만, 날림이나 어거지로 보이는 부분이 있으면 죄송합니다 ㅜㅜ
저번에 글 쓸 때는 '여기까지 쓰고 그만 써야지 ㅎㅎ'라고 생각해서 몰랐는데, 알고보니 행정개혁 부분에서 세이브 안했다가 로드 했더군요(..) 어제 스샷 올리고 멘붕왔다가, '아 어차피 액자형 구성이나 마찬가지인데, 대충 퉁쳐야지 ㅎㅎ'했습니다.(...) 이상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OTL
생각해보니 상,하라는 좋은 표현이 있어서 제목을 바꿨습니다. 좀더 나은것 같네요 ㅎㅎ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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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힘내세요!!재밌게 읽고있습니다~
감사합니다 ㅎㅎ
잘 보고 있습니다 ㅋㅋ 액자식 구성도 신선하네요
그나저나 조선으로 열강진입이라니 고행을 자처하신ㅋㅋ
그래도 조선이 매력적인 국가긴 하더라고요 ㅎㅎ
조선-일본 전쟁 나도 재밌겠네요.(플레이어라면 이기지만)
이길 수 있는 상대였나요 ㄷㄷ
왠지 나중에 폭망할듯한데요 무섭
그래도 조선 제국인데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