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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1월 22일 2박 3일 일정으로 서산과 당진 답사의 길에 나섰다. 부산향토 회원들과 함께 답사를 다니지 못한 지 벌써 10개월 째다. 코로나19의 위력이 이렇게 센줄 몰랐다. 어쩔 수 없이 단체 답사는 포기하고 남편과 함께 시간이 날 때마다 다녔다. 이 번엔 서산과 당진권역을 답사해 볼 예정으로 서산용현자연휴양림에 2박을 예약하고 부산에서 8시에 출발하였다. 물론 코로나 때문에 식사는 미리 도시락을 준비해서 차안에서 해결했다. 이제는 도시락 싸는 것은 일도 아니다. 그리고 차안에서 먹는 재미도 있다. 경치 좋은 곳에 차를 주차하고 남들 눈치 볼것도 없이 차안에서 먹으니 편하다. 덤으로 따끈한 커피까지 곁들이면 금상첨화다. 오늘도 예당호 주차장에서 점심을 먹고 예당호 출렁다리를 걸었다. 마침 출렁다리를 돌아나오는데 음악분수까지 펼쳐져 일석이조다. 아쉬움은 밤이라면 화려한 조명과 어우러져 더 멋있을 텐데 아쉽긴하다. 예당호 분수쇼를 감상하고 다시 서산으로 이동하였다. 예당호에서 서산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 주차장까지는 50분이 소요되었다. 주차장에서 산으로 난 나무데크길을 따라 올라가면 큰 바위 사면에 새겨진 마애여래삼존상을 만날 수 있다. 오르막이라 약간 힘은 들지만 마애여래삼존상의 인자한 미소를 본 순간 힘든 것은 순식간에 사라진다. '백제의 미소'라고 한 이유를 알 것 같다. 신라에는 깨어진 기와 수막새에 새겨진 '천년의 미소'가 있다면 여기는 '백제의 미소'가 있다. 이 미소를 보기 위해 부산에서 5시간이라는 시간을 달려왔다. 아깝지 않다. 마에여래의 온화한 미소의 힘일까 내려오는 길도 발걸음이 가볍게 느껴진다. 용현자연휴양림으로 가다보면 서산보원사지가 있다. 웅장한 절집은 사라졌지만 당간지주와 거대한 석조, 오층석탑이 그 옛날 의 모습을 상상하게 해준다. 예전엔 황량한 모습이었는데 발굴이 끝난 지금은 잘 정리되어 있어 기분이 좋다. 당간지주-석조-오층석탑-법인국사승탑과 탑비 등을 둘러보고 나니 어느 듯 해가 질려고 한다. 보원사지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우리의 숙소 자연휴양림에 도착하여 저녁을 먹고 하루를 마무리했다.
예산 예당호 출렁다리
2019년 4월6일 개통된 예당호 출렁다리는 예산군의 새로운 대표관광지 중 하나로
국내 최장 길이인 402m의 길이를 자랑하고 있다.
느린호수길은 2019년 10월 오픈했으며 140m 길이의 부잔교와 함께 아름다운 경관을 조성한다.
하얗고 웅장한 출렁다리의 모습이 넓은 예당호와 함께 조성된 예당호 조각공원과 어우려저
그 웅장함과 아름다움을 함께 감상할 수 있다.
2020년 4월25일부터 가동한 음악분수는 길이 96m, 폭 16m 최대 분사 높이 110m에 이르는 부력식 분수이며, 면적 1536㎡에 달해 호수에 설치된 가장 넓은 음악분수로 한국기록원 공식 기록에 올랐다.
‘한국관광공사 야간 관광 100선’에 오른 예당호출렁다리에
그러데이션 기법을 적용한 형형색색 LED 불빛을 이용한 공연이 20분간 진행된다.
서산마애삼존불로 올라 가는 길
나무데크를 설치하여 힘들지 않게 올라 갈 수 있다.
이 문을 통과하여 다시 계단을 올라가면 마애산존상을 볼 수 있다.
서산 용현리 마애삼존불상
국보 제84호. 높이 2.8m.
서산시 운산면은 중국의 불교 문화가 태안반도를 거쳐 부여로 가던 행로상에 있다.
태안반도에서 서산마애불이 있는 가야산 계곡을 따라 계속 전진하면 부여로 가는 지름길이 이어지는데, 이 길은 예로부터 중국과 교통하던 길이었다.
이 옛길의 어귀가 되는 지점에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이 있는데,
이곳은 산세가 유수하고 천하의 경승지여서
600년 당시 중국 불교 문화의 자극을 받아 찬란한 불교 문화를 꽃피웠던 것이다.
묵중하고 중후한 체구의 입상인 본존(本尊)은 머리에는 보주형(寶珠形) 두광(頭光)이 있으며,
소발(素髮)의 머리에 육계(肉髻)는 작다.
살이 많이 오른 얼굴에는 미소가 있고 눈은 행인형(杏仁形)으로 뜨고 있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없고 법의(法衣)는 두꺼워서 거의 몸이 나타나 있지 않다.
옷주름은 앞에서 U자형이 되고 옷자락에는 Ω형의 주름이 나 있다.
수인(手印)은 시무외(施無畏)·여원인(與願印)으로 왼손의 끝 두 손가락을 꼬부리고 있다.
발밑에는 큼직한 복련연화좌(覆蓮蓮華座)가 있고, 광배 중심에는 연꽃이, 둘레에는 화염문이 양각되었다.
우협시보살(右脇侍菩薩)은 머리에 높은 관을 쓰고 상호(相好)는 본존과 같이 살이 올라 있으며,
눈과 입을 통하여 만면에 미소를 풍기고 있다.
목에는 짧은 목걸이가 있고 두 손은 가슴 앞에서 보주(寶珠)를 잡고 있다.
천의는 두 팔을 거쳐 앞에서 U자형으로 늘어졌으나 교차되지는 않았다.
상체는 나형(裸形)이고 하체의 법의는 발등까지 내려와 있다.
발밑에는 복련연화좌가 있다. 머리 뒤에는 보주형 광배가 있는데, 중심에 연꽃이 있을 뿐 화염문은 없다.
좌협시보살은 통식(通式)에서 벗어나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을 배치하였다.
이 보살상은 두 팔에 크게 손상을 입었으나 전체의 형태는 충분히 볼 수 있다.
머리에는 관을 썼고 상호는 다른 상들과 같이 원만형(圓滿形)으로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다.
상체는 나형이고 목에는 짧은 목걸이를 걸쳤다. 허리 밑으로 내려온 옷자락에는 고식의 옷주름이 나 있다. 발밑에는 큰 꽃잎으로 나타낸 복련대좌(覆蓮臺座)가 있다.
머리 뒤에는 큰 보주형 광배가 있는데, 그 형식은 우협시보살의 광배 형식과 같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백제의 미소를 따라 미소를 지어 봅니다.
서산용현리마애여래삼존상에서 내려오면 주차장 건너편에 서있는 시비
방선암(訪仙岩)
조선시대 해미현(海美縣)내에 거주하던 당대 최고의 선비들이 화창한 봄날에
학을 연상케하는 주변의 노송과 명경수가 유유히 흐르는 천혜의 비경인 이 곳 마당바위에서
시회를 열어 많은 시작을 하였고, 이것을 기리기 위하여 이 바위 위에 방선암이라 새겼다.
방선암에 새겨진 윤선좌(尹善佐)는 1815년 2월 13일에 운산면 용장리 용못에서 출생하여
헌종4년(1838년)에 풍기군수와 통정대부와돈영부도정을 역임하였으며
그는 호학의 지기인 한맹유, 김진, 홍병권, 문사 등이 세상사 온갖 풍진을 잊고
호연지기의 높은 문학적 풍류의 철학적 담론을 한 곳으로 전해지고 있다.
서산 보원사지
지정면적 102,886㎡. 사적 제316호. 상왕산(象王山, 307.1m) 서남쪽 계곡의 보원마을에 있었으나,
1970년대 일대의 대대적 목장경영으로 인하여 마을주민은 다른 곳으로 이주하고 현재는 절터만 남아 있다.
절터에는 10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석조(石槽, 보물 제102호)를 비롯하여
당간지주(보물 제103호)·오층석탑(보물 제104호)·법인국사보승탑(法印國師寶乘塔, 보물 제105호)·
법인국사보승탑비(보물 제106호) 등의 유물과 초석이 남아 있다.
특히 1968년 절터에서 백제시대의 금동여래입상(높이 9.5㎝)과
통일신라시대의 금동여래입상(높이 7.5㎝)이 발견되었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당간지주
보물 제103호. 높이 4.2m. 두 지주는 원래 위치에 원래 모양 그대로 동서로 마주보며 서 있다.
안쪽면에는 아무런 조각이 없지만, 바깥쪽면에는 가장자리를 따라 넓은 세로띠가 돋을새김되었으며,
그 가운데에 다시 활모양의 세로띠를 새겼다.
옆면에도 가장자리에 세로띠를 돋을새김하고,
그 가운데에 원조(圓條)의 세로띠를 조각하여 장식적인 면을 보이고 있다.
두 지주의 정상 부분은 안쪽면 윗부분에서 바깥쪽면으로 내려오면서 활처럼 둥글게 깎았기 때문에
유려한 4분원(四分圓)을 형성하고 있다.
이러한 모습은 통일신라시대에 건립된 당간지주에서 흔히 볼 수 있다.
당간을 고정시키는 간(杆)은 위아래 2군데에 간구(杆溝)를 마련하여 장치하였다.
윗부분에는 안쪽면의 꼭대기에 네모난 간구를 파서 간을 설치하였고, 아래부분에는 지면에서 위로 1m쯤 되는 안쪽면의 마주보는 곳에 역시 네모난 간공(杆孔)을 뚫어 간을 끼우도록 하였다.
당간을 받는 간대(杆臺)는 하나의 돌로 조성하였는데, 전체가 완전하게 남아 있는 상태이다.
네모난 높은 2층 받침대 위에 둥근 원좌(圓座)를 조각하였는데,
둥근 원좌는 얕은 2단으로 주위에는 아무런 조각이 없고, 윗면 가운데에 둥근 구멍만 하나 있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보원사지 석조(보물 제102호. 높이 90㎝.)
통일신라시대 석조(石槽)의 통식(通式)을 따른 장방형 석조로서
하나의 암석을 장방형으로 다듬고 그 속을 역시 장방형으로 파내었다.
현재는 두 곳에 길이로 균열이 나 있다. 표면에 선조(線條) 등 아무 장식이 없어 오히려 장중해 보인다.
내부의 각 면에도 조식이 없으며 밑바닥면은 평평하고 한쪽에 배수공(排水孔)이 있을 뿐이다.
이 석조는 길이가 3.5m에 달하는 거대한 규모인데 이렇게 큰 석조는 드문 일이다.
이 절터에서는 백제시대의 금동여래입상이 발견된 일이 있으나 이 석조를 이 때의 것으로 볼 수는 없다.
이곳 보원사지에는 법인국사보승탑(法印國師寶乘塔, 보물 제105호)과 탑비(塔碑, 보물 제106호)·
오층석탑(五層石塔, 보물 제104호)·당간지주(幢竿支柱, 보물 제103호)·방형불대좌(方形佛臺座)·석불좌상(石佛坐像) 등이 남아 있는데 법인국사보승탑과 탑비의 건립연대가 고려 경종 3년(978)이며 이 밖에 다른 석조물들도 모두 이 시대를 전후한 시기의 조성물로 추정되고 있다.
따라서 이 석조의 조성시기 역시 고려전기로 추정된다.
보원사지 오층석탑(보물 제104호).
서산 보원사는 백제 때의 절로, 사찰에 대한 역사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절터에는 5층석탑 외에,
법인국사탑과 탑비, 당간지주, 석조 등이 남아있어 사찰의 규모가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서 2006년부터 12년 계획으로,
서산 보원사지 오층석탑 일대를 비롯한 주변 지역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고 있다.
아직까지 서산 보원사지의 초창기 건축이나 석탑의 건립 배경을 추정할 수 있는
직접적인 자료는 확인되지 않았다.
탑의 규모 및 형태로 보았을 때 서산 보원사지 오층석탑은 사찰의 주 탑일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에,
서산 보원사지의 창건 연대와 탑의 건립 시기는 동일할 것으로 추정된다.
서산 보원사지 오층석탑은 1968년과 2003년에 각각 한 번씩 모두 두 번의 해체·보수 작업이 진행되었다.
1968년 해체 복원 당시 사리 내갑(內匣)·외갑·사리병·납석소탑(蠟石小塔) 등이 출토되어
국립부여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중기단 위에 오층탑신을 형성하고 정상에 상륜을 올린 일반형 석탑이지만,
부분적으로 통일신라 탑의 특징을 보이고 있는 고려 전기의 석탑이다.
기단부는 여러 개의 판석으로 구성된 지대석 위에 이중으로 조성하였는데,
하층 기단 면석에는 우주(隅柱)와 탱주(撐柱)를 새기고,
두 개의 면석에는 각기 사자상(獅子像)을 돋을새김 하였다.
하대 갑석 상면에는 낮게 형성된 호형·각형의 2단 굄대가 중대석을 받치고 있다.
중대석에는 우주 및 탱주를 모각하고, 탱주를 중심으로 그 좌우엔 각각 2구씩,
총 8구의 팔부중상(八部衆像)이 돋을새김 하였다.
상대 갑석은 평평하며 면에는 매우 얕은 갑석 부연을 표시하였다.
갑석 상면에는 굄대를 각출하지 않고 넓은 1단의 판석을 끼워 탑신부의 옥신을 받치고 있어
고려 시대 굄석 삽입 양식을 따른 것을 알 수 있다.
탑신부에서 몸돌(옥신석)은 1층만 4매의 판석으로 구성되었으나
나머지 층은 하나의 돌로 만들어 모서리마다 우주를 조각하였다.
1층 몸돌에는 문짝 모양(門扉形)을 새겼다. 1·2층 지붕돌(옥개석)은 여러 장의 돌로 조성하였으나
3층 이상은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지붕돌의 층급 받침은 각기 4단씩 조각되었으며,
꼭대기에는 얕은 굄대를 마련하여 그 위층의 옥신석을 받치고 있다.
각 층의 옥개석은 얇고 넓게 퍼져서 백제 탑 양식을 모방하였음을 알 수 있지만,
받침부는 고려시대 식이다.
낙수면은 완만한 곡선을 보이고 네 귀퉁이 전각의 반전도 뚜렷하여
전제적으로 경쾌하고 안정감이 있어 보인다. 상륜부에는 노반(露盤 : 머리장식받침)만 남아 있고,
그 위로 노반의 무게 중심을 고정하는 철제 찰간(刹竿)이 솟아 있다.
법인국사승탑과 탑비
법인국사승탑(보물 제105호. 높이 4.7m)
고려시대 고승인 법인국사 탄문(坦文, 900∼975)의 유골을 모신 승탑으로,
탄문이 입적한 975년(광종 26)과 서산 보원사지 법인국사탑비(보물 제106호)가 건립된
978년(경종 3) 사이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탑비와 함께 부도전(浮屠殿)에 자리하고 있다.
승탑은 바닥돌부터 지붕돌까지의 단면이 8각으로,
신라 승탑의 전형적인 양식인 8각원당형(圓堂形)을 따르고 있다.
바닥돌은 4장의 널돌로 이루어졌는데, 윗면은 별다른 시설이 없이 아래받침돌을 받치고 있다.
아래받침돌은 윗단과 아랫단으로 구성되었다. 아랫단은 옆면의 각 면마다 1구씩의 안상(眼象)이 조각되었는데, 안상 안에는 각각 모습을 달리한 사자상(獅子像)이 1구씩 돋을새김되어 있다.
윗단의 윗부분에는 1줄의 띠를 둘러 덮개돌 모양을 새겼고,
아래부분에도 역시 1줄의 띠가 굽을 이루며 둘러져 있다.
다른 돌로 조성된 윗단은 아래부분에 굽을 돌려 굄대를 두었고,
옆면에는 구름 무늬와 용 무늬를 돋을새김하였다. 용 머리의 부리부리한 눈과 코, 입, 그리고 몸통의 비늘 등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었고, 8각의 모서리에는 귀꽃 장식이 서 있는 모양으로 자리하고 있다.
윗면에는 각지고 둥글면서 다시 각진 3단의 굄이 마련되어 가운데받침돌을 받고 있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하나의 돌로 조성된 가운데받침돌은 높직한 간주(竿柱) 모양인데, 8각의 각 면에는 아무 조각도 없다.
윗받침돌 역시 하나의 돌로 이루어졌는데,
맨 아래부분에는 가운데받침돌의 굄과 대칭이 되도록 3단의 낮은 받침을 새겨 놓았고,
그 바깥쪽으로는 꽃잎이 위로 솟은 앙련(仰蓮)의 연꽃 무늬 16개가 8각의 옆면에 빙 둘러 새겨져 있다.
맨 윗부분은 1줄의 띠를 둘러 덮개돌 모양을 만들고서 그 위로 높직한 굄대를두었는데,
8각 굄대의 각 모서리에는 세로로 세운 짧은 기둥인 동자주(童子柱)와 함께 동자주를 잇는 난간을 새겼고, 그 사이에는 꽃 무늬를 조각해 놓았다. 굄대의 맨 윗부분에도 1줄의 띠를 돌려 덮개돌 모양으로
조각하고서 낮은 2단의 굄을 새겨 몸돌을 받치게 하였다.
몸돌은 가운데받침돌처럼 제법 높은 편이다. 각 면에는 좌우에 모서리 기둥이 새겨져 있고,
8면 전체에는 문비(門扉), 사천왕상, 서 있는 인물상 등이 돋을새김되었다.
지붕돌은 크고 넓으면서 두꺼운 편인데, 추녀에 이르면 점차 얇아진다. 밑면에는 3단의 받침을 두었고,
그 바깥쪽으로는 목조 건물의 지붕을 모방하듯이 서까래를 조각해 놓았다.
윗면인 낙수면의 경사는 꼭대기부분만 급할 뿐, 밑으로 내려오면서 점차 완만해졌다.
기왓골의 표시는 없지만 각 모서리의 합각(合角) 머리에는 내림마루인 우동(隅棟)이 굵으면서 뚜렷하게
표현되었고, 전각(轉角)에는 서 있는 모양의 귀꽃이 장식되어 있다.
지붕돌의 맨 윗부분에는 1장의 꽃잎[單葉]이 아래로 향한 복련(覆蓮)의 연꽃 무늬를 8면에 돌려 새겼고, 그 위에 머리장식인 상륜부(相輪部)를 올렸다. 상륜부는 복발(覆鉢)과 보륜(寶輪)만 남아 있는 상태인데, 복발에도 역시 하나의 꽃잎이 아래로 놓인 복련의 큼직한 연꽃 무늬 8개가 조각되어 있다.
이 승탑은 각각의 부재가 거의 완전하게 남아 있고 보존 상태도 좋은 편이다.
가운데받침돌이 지나치게 높고 몸돌마저 높아서 전체적으로 균형미를 잃은 듯하지만,
지붕돌 각 모서리의 귀꽃과 반전 등으로 둔중함은 면하고 있다.
아래받침돌과 윗받침돌, 몸돌의 조각 수법은 우수하지만 부분적으로 약화된 경향도 나타나 있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법인국사탑비(보물 제106호)
978년(경종 3) 건립. 전체높이 450㎝, 비신높이 240㎝, 너비 116.5㎝, 두께 29㎝.
장중한 느낌을 주는 거비로 이수와 귀부의 조각은 대체로 장쾌한 수법이다.
이수의 상부에 용연(龍淵)을 파고 용이 사방에서 모이도록 한 조각이 매우 특이하다.
법인국사 탄문(坦文)은 신라말·고려초의 명승으로 고씨(高氏)이며, 968년(광종 19)에 왕사,
974년에 국사가 되었고 이듬해 보원사에서 입적하였다.
978년 왕은 ‘법인(法印)’이라 추시(追諡 : 죽은 뒤에 시호를 추증함)하고
‘보승(寶乘)’이라는 탑명을 내렸다.
비문은 김정언(金廷彦)이 짓고 한윤(韓允)이 썼으며, 김승렴(金承廉)의 각(刻)으로 세워졌다.
글씨는 2㎝ 정도의 구양순류(歐陽詢流) 해서로 필력과 짜임새가 구양순을 재현시킨 듯하다.
고려 초기에는 구양순체를 쓴 대가가 많았으나 그 중에서도 백미에 속한다.
부도전에서 위로 나 있는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서산 아라메길로 간다
보원사지 발굴 출토물들
보원사지 옆에 서 있는 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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