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랑캐꽃
윤기정
‘무찌르자 오랑캐 몇 백만이냐?/ 대한 남아 가는데 초개로구나/나가자 나아가 승리의 길로’‘오랑캐’자리에 ‘공산당’이나 ‘중공군’을 넣어 부르기도 했다. 사내아이들이 콧물 말라붙은 소매를 번쩍이며 뛰어다닐 때, 소녀들은 어디선가 주워들은 군가를 부르며 고무줄놀이에 정신 팔았다. 전후 서울의 골목은 아이들과 아이들의 새된 소리가 종일토록 넘쳤다.
‘오랑캐’는 예부터 우리 땅 북쪽, 만주에 살던 사람들을 이르는 말이었다. 물론 6.25 전쟁 당시에는 북한군을 지원한 중공군을 가리켰다. 그 오랑캐 나라는 세계 초강대국의 한 나라가 되었고, 그 옛날의 오랑캐 땅은 그 나라의 한 지방이 되었다. 전쟁이 끝난 지 오래고, 오랑캐 나라는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는 나라가 되었다. 지금도 ‘오랑캐’라고 부르는 이가 없지는 않지만, 그때의 오랑캐 나라는 아니다. 골목을 울리던 맨발 소녀들의 외침처럼 ‘무찔렀다고 말하기는 그렇지만, 세상이 달라졌으니 꿈이 이루어졌다고나 할까.
오랑캐 족속의 대표적 용모가 ‘변발’이다. 변발은 뒷머리 일부분만 길게 땋아 늘어뜨리고, 나머지는 모두 밀어버리는 독특한 유목민의 머리 모양새다. 머리 모양이 제비꽃을 닮은 까닭에 제비꽃은 ‘오랑캐꽃’이라는 억울한 별명 하나 얻었으니, 이용악의 시에서 그 사연을 들어보자.
- 긴 세월을 오랑캐와의 싸움에 살았다는 우리의 머언 조상들이 너를 불러 '오랑캐꽃'이라 했으니 어찌 보면 너의 뒷모양이 머리채를 드리운 오랑캐의 뒷머리와도 같은 까닭이라 전한다 -
………………………… 중략…………………………
너는 오랑캐의 피 한 방울 받지 않았건만
오랑캐꽃
너는 돌가마도 털메투리도 모르는 오랑캐꽃
두 팔로 햇빛을 막아 줄게
울어 보렴. 목 놓아 울어나 보렴. 오랑캐꽃 - 이용악, 「오랑캐꽃」
이름이 억울해서 이 땅 떠나지 못하고, 해마다 봄이면 지천으로 피어난다. 보랏빛 꽃도 색색으로 변장하여 피어나건만, 튀는 자태에 본색을 숨기지 못한다. 제비꽃. 우리 집 꽃밭에도, 잔디밭에도 쳐들어온다. 우리 머언 조상들 마을에 숨어들던 오랑캐처럼 어느새 집안에 스며들어 변발을 세운다. 현관 앞 지키는 둥근 주목 밑까지 변발이 섰다.
나들이 길, 한발 앞선 아내의 눈에 주목 그늘에 숨은 변발 두어 송이가 눈에 띄었나 보다. ‘무찌르자. 오랑캐’ 유전자가 동하더란다. 잔디밭 점령을 목표로 삼은 오랑캐꽃의 척후병으로 보이더란다. 뿌리째 뽑아 들고, 뒷걸음으로 나무 그늘 빠져나오던 아내가 잔디밭에 징검다리처럼 깔아놓은 디딤돌 모서리에 발뒤꿈치가 걸리며 공중제비하고 떨어졌다. 압박 골절 - 열세 번째 등뼈가 밟힌 우유갑처럼 찌그러졌단다. 억울한 오랑캐꽃의 반격이었다. 그 뒤 두어 달 여를 아내는 갑옷 같은 보정기를 입고 로마 병정처럼 가슴 활짝 펴고 걸었다.
초등학교 음악 교과서에 ‘제비꽃’이라는 노래가 있다. 노랫말이 깨끗하다.
‘시냇가에 제비꽃
한들한들 제비꽃
흘러가는 맑은 물에
제 얼굴을 비쳐 보네’
제비꽃을 오랑캐꽃이라 부른 적이 없다.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대접했는데 아내를 다치게 하다니! 오랑캐꽃이란 이름이 퍽 억울하고 서러웠던 모양이다.
의사가 스탠트 삽입 시술은 잘 끝났다는데 떨어진 혈압은 움직일 줄 모른다. 제비꽃에 화풀이하면 혈압 좀 오르려나. 이제부터 너는 오랑캐꽃이니라. 잔디 사이로 머리 내민 제비꽃 아니 오랑캐꽃? 그놈 뽑으려 잔디밭으로 내려선다. 내겐 두 팔로 햇빛 막아 줄 자비도 없구나. 미리‘목 놓아 울어나 보렴. 오랑캐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