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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기도
(An Altar in the World)
바바라 브라운 테일러 지음 | 송경용・진영종 옮김
Content
들어가는 말
1 Vision 하느님께로 깨어나는 연습 _ 014
2 Reverence 주의를 기울이는 연습 _ 032
3 Incarnation 살을 입히는 연습 _ 051
4 Groundedness 땅 위를 걷는 연습 _ 070
5 Wilderness 길을 잃는 연습 _ 089
6 Community 낯선 이들과 만나는 연습 _ 111
7 Vocation 목적을 가지고 사는 연습 _ 132
8 Sabbath ‘아니오’ 라고 말하는 연습 _ 149
9 Physical Labor 물을 나르는 연습 _ 172
10 Breakthrough 고통을 느끼는 연습 _ 188
11 prayer 하느님께 바치는 연습 _ 212
12 Benediction 축복을 드리는 연습 _ 234
주 _ 255
옮긴이의 말 _ 258
6
Co m m u n i t y
낯선 이들과 만나는 연습(1)
지구를 즐겁게 걸어라. 그리고 모든 사람들 속에 계신 하느님께 반응하라.
조지 폭스●
● 퀘이커교 창시자.
서른 살이 되어서야 내가 내향적인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
이 사실을 알기 위해 심리학자에게 75달러를 지불했지만 아깝지는 않다.
내가 내향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알기 전까지 나는 그저 부끄러움을 많이 타고 반사회적 경향이 있는 사람인 줄만 알았다.
지인의 파티에 초대되면 나는 늘 주방에 있었다.
반대로 내가 주최한 파티에서는 나 같은 사람이 부엌에 있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에서 나는 왜 마르타가 부엌에 있었는지 알 것 같았다.
마르타에게는 부엌에서 감자를 써는 일이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보다 훨씬 덜 피곤한 일이었다. 또한 부엌에서도 사람들이 하는 말을 다 들을 수 있었고, 굳이 직접 나서서 자신의 얘기를 할 필요가 없었다.
교회에서 내향적인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은 어려울 수도 있다.
특히 당신이 성직자라면 더더욱 그렇다.
수많은 교구들은 공동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활동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은 외톨이로 지적 받는다.
이 때문에 아마 커피와 함께 쉬는 시간을 보내지 않았을 초기 기독교인들과 사막의 교부들이 그리도 부러웠나 보다.
많지는 않지만 사막의 어머니들Desert Monthers도 있었다.
그들이 실제로 그렇게 불렸는지는 모르지만 그들은 사막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기원후 4세기 경, 기독교가 로마 왕국의 국교가 되어 가고 있을 때, 이 수도자들은 그들이 살던 도시를 빠져 나왔다.
이들은 정치와 종교가 섞이면서 어떤 것이 우위에 오를지 알았고, 그 상태에서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하느님에게 더 가까워지려는 큰 소망 말고는 아주 작은 짐만 챙겨 떠난 안토니는 이집트로 길을 잡았다. 그는 교회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모든 것들을 판다는 이야기를 듣고 부모님에게서 물려받은 광활한 땅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다 팔았다.
그리고 남은 땅은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는 자신의 물건과 돈을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20년 동안 살아왔던 고장을 떠나 나일 강 건너에 있는 산
으로 향했다.
기원 후 305년, 안토니는 그와 비슷한 사람들과 함께 살던 동굴을 떠났다.
이 동굴에서 살던 사람들은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것만 소유했고 서로를 격려했다.
이 공동체를 방문했던 한 사람은 ‘그들의 텐트에서는 매일 같이 노래, 금식, 기도, 그리고 노동이 일어났다.
그리고 서로가 사랑과 평화를 나누었다’고 말했다.16
안토니의 사막 경험은 곧이어 하나의 운동이 되었다.
100년 뒤, 비슷한 운동이 이집트뿐 아니라 팔레스타인, 페르시아, 아라비아 등지에서 일어났다.
몇몇은 엄청나게 큰 운동이 되었고, 또 몇몇은 앞서 이야기한 사막의 교부들이 모여 만든 덜 조직적인 조직이 되었다.
이 거룩한 수행자들은 광주리를 만들고 하느님을 찾으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이 여정은 그들에게 각자의 영적인 야망과 씨름할 수 있는 시간을 주었다.
한 노인은 “만약 자신만의 의지를 가지고 천국을 향해 오르는 젊은 수사를 본다면 그를 땅으로 내팽개쳐라.
왜냐하면 그가 하는 일은 옳지 못하기 때문이다”17 고 했다.
이런 말은 사막의 교부에게서 나온 것들이다.
입에서 입으로 내려오다 시리아어, 라틴어, 그리스어로 쓰여졌고, 이 모든 것들은 원본의 맛을 잃어버리지 않고 전해졌다.
사막의 교부들은 신랄한 입담과 친절한 마음을 지녔지만 명성을 얻으려고 애쓰지 않았다.
확실히는 모르지만 그들은 재밌는 사람들이었다.
한 번은 같이 살던 나이든 형제가 다른 평범한 사람들처럼 말다
툼을 해보자고 했다.그들은 살면서 단 한 번도 말다툼을 해 본 적이 없어 어떻게 싸움을 시작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이들을 지켜보던 지나가던 노인 한 명이 벽돌을 주워 와서 두 사람 사이에 놓았다.
그 노인은 각자의 역할을 정해 주면서 한 명에게는 ‘이 벽돌은 내 것이다’라고 말하라고 시키고, 다른 한 명에게는 ‘아니야, 이건 내꺼야’라고 말하라고 했다.
그들은 그렇게 싸움을 시작했다.
한 명이 ‘이건 내꺼야’라고 말하면서 처음 말다툼을 시작했던 형제는 ‘내 것이 아니므로 이건 네 것이다. 가져가라’라고 말함으로써 말다툼을 끝맺었다.
내가 만약 사막에 살았다면 룸메이트를 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면에서 이집트의 수도사 아르세니우스 수사는 나와 비슷하다.
그는 스케테Scete 사막에서 살았는데 가장 가까운 이웃은 32마일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가 거기에 산다는 것을 안 수행자들이 스케테 사막으로 몰려들었고, 결국 아르세니우스 수사는 그곳을 떠났다.
그는 “세속적인 사람들이 로마를 망쳤고, 수사들이 스케테를 망쳤다”18 고 울면서 고백했다.
간혹 혼자 살던 수사들도 모여서 성찬을 기념하고 만찬을 즐겼다.
그 자리에서 그들은 각자의 공동체에 어떠한 문제들이 있는지 털어놓았다.
그들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공동체 안에 있었다.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저 육체적인 필요가 아니라 각자의 자족 능력에 안주하기 않기 위한 필요 말이다.
혼자 살고 있던 한 원로 수사는 하느님을 좀 더 가까이에서 영접
거의 뼈만 남은 정도가 되었을 때, 하느님께 성경 구절의 의미를 여쭈어 보았지만, 대답이 없었다.
크게 실망한 수사는 성경 구절의 의미에 대해서 그의 형제들에게 묻기로하고 독방 문을 열고 나왔다.
그 순간 천사가 나타나 이렇게 말했다.
“너는 70주 동안의 금식으로 하느님께 한 발자국도 가까워지지 않았지만, 이제야 네 형제를 찾아갈 만큼 너를 낮추게 되었구나.
하느님께서 성경 구절의 의미를 보이시고자 나를 보내셨다.” 19 천사는 원로 수사에게 의미를 알려 주고 되돌아갔다.
원로 수사가 그 길로 형제들에게 가서 하느님이 사기꾼이라고 성토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보면 재미있다.
결국 우리 모두는 이야기할 사람이 필요하다.
좀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우리 모두는 크든 작든 우리 자신을 잊어버리도록 도와줄 누군가가 필요하다. 위대한 세상 지혜의 전통으로 보아도, 우리 생각으로도 의미 있는 인생을 사는데 가장 큰 어려움은 자기 자신에게 몰두하는 것이다.
자신에 대해 꽤 많이 생각해 보는 친구가 있다.
그 친구는 마음속에 있는 갈등, 눈부신 통찰력, 삶의 작은 승리, 자신에 대한 잦은 의심, 나락으로 되돌아가게 만드는 스스로의 생각들에 대해 자주 이야기한다.
다행히 그는 농담도 잘하는 편이다.
하루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내게 물었다.
“그래. 내가 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건 충분하지.
너는 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보통 다른 사람을 찾는 이유는 자신에게 유익한 뭔가를 얻기 위해서라고 생각하지만, 더 깊은 진실은 다른 사람이 내 자신 밖으로 나를 끌어내 주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대화가 너무 흥미로워 시간 가는줄 모르다가 시계를 보고 깜짝 놀란 일이 있다면 이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이다.
장애인 올림픽에서 자원 봉사를 해보았거나, 휠체어를 타는 노인들의 휠체어를 미는 봉사를 해보았거나, 강이나 들에 널부러진 쓰레기를 치워 보았다면 그날 몸은 더러워지고 피곤해도 해변에서 즐긴 날보다 흐뭇한 마음으로, 묘한 생기로 가득해서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예술가나 운동선수는 ‘흐름flow’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들이 뭔가에 몰두해 있을 때는 시간이 멈춘다고 말한다.
자기 자신에 대해 깨닫는 것도 멈추게 된다.
예술가는 자신이 물감이 되고, 목탄이 되고, 진흙이 된다.
운동선수는 팀과 하나가 되고, 공이 되고, 코트가 된다.
생각이 아니라 본능에 따라 몸을 움직인다.
의식이 활짝 열리고, 더 큰 무언가의 일부가 되기 위해 닫힌 자아에서 벗어난다.
기독교 신비주의 전통에서는 이를 신성한 연합Divine Union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신과 함께 할 수도 있지만, 사람은 물론 나무와도 할 수 있다.
이는 성취한다기보다 주어지는 것이다.
대부분 찰나인 경우가 많지만, 잠시나마 완전함을 만나 작은 자아에서 벗어나는 오래 기억될 은총이다. 온전함의 빛 안에서, 하느님과 나 아닌 다른 사람 혹은 나무 사이의 의미 있는 차이점을 찾기란 불가능하다.
존재하는 모
든 것이 이 온전함 안에 있고 살아 있는 모든 것이 이 빛 안에서 살아 숨쉰다.서로 다른 모든 존재가 서로에게 닿는 하나의 공동체가 실재하게 된다.
영적인 사람일수록 고난을 찾아 헤맨다. 이 신성한 연합의 경험을 찾아 세계를 여행하는 사람도 있다. 수녀가 되거나, 가진 것을 모두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는 사람도 있다.
이런 극단적인 방법이 자기 자신을 넘어서도록 이끌어 주었다면 그 사람은 많은 것을 배웠을 것이다.
이들은 하던 일만 하면 새로움은 없으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때로는 극단적인 방법이 필요하기도 하고, 그래서 극단적인 결과가 나오기도 한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영적 행위는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일이다.
즉 상대를 이용하거나, 변화시키거나, 고치거나, 돕거나, 구하거나, 납득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사막의 교부들이 지녔던 지혜는 이렇게 통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라는 감옥에서 꺼내 줄 수 있는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이었다.
타인 속의 나, ‘저 너머’에 있는 자기 자신을 알아내면 되는 것이다.
아주 잠시 동안이라도 타인이 되어보면 타인을 위해 죽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해방이면서 동시에 두려운 일이다.
진정한 영적 훈련은 이 하나일지도 모른다.
이런 이유들로, 세계 주요 종교들은 사람들이 함께하는 공동체를 요구해 왔다.
이 공동체들은 수도원, 교회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
고, 이 실제적인 장소에서 종교의 가르침들이 시험되어 왔다.때로는 이런 가르침이 사람들의 기분을 최고조로 올려놓기도 하고 사람들의 삶을 구하기도 했다.
이러한 방식으로 종교적 가르침은 공동체를 실현하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자주 인용되는 사막의 교부인 아봇은 이렇게 말했다.
“장롱 가득 쌓여 있는 옷을 방치해 두면 그 안에서 썩는다.
우리 마음속 생각들도 마찬가지이다.
몸을 사용해서 생각을 행하지 않으면, 시간이 지나 그 생각들은 망가지고 상해 버린다.”20
물론 종교 공동체가 이웃 사랑을 행하는 유일한 형태의 공동체는 아니다.
내가 사는 작은 시골 마을에서는 주민들이 이웃 간의 유대감을 증진시키기 위해 연극회, 콘트라 댄스, 퀼팅 모임, 독서 모임, 노래 모임, 로터리 클럽, 심지어 닭싸움도 한다.
내가 보기에 이들 모임의 유일한 단점은 교회와 비슷하게,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끼리만 모인다는 점이다.
서로 다른 사람들이 얽혀 있지만 그들은 같은 신념, 헌신, 가치관, 규율을 나눈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그들은 뭉친다.
하지만 그것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을 배제시키게 된다.
동시에 마을에는 어떤 그룹에도 속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그렇다고 멀리 떨어져 사는 것도 아니다.
바로 길 건너에 사는 사람도 있다.
그들은 주유소에, 우체국에, 식료품점에, 바로 우리 앞에 있지만 우리 눈에 띄지 않는다.
그들은 너무 광범위해서 잊기 쉬운 인간 공동체에 속해 있다.
하지만 그들 안에 있는 우리 자신을 보지 못한다
면, 우리는 우리라는 감옥에 돌을 던지기 위해 더 잘 무장할 것이다.조금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자신과 아주 많이 다른 사람과 얼굴을 맞대고, 그가 하느님의 얼굴을 가졌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즐기는 일이다.
땅 위를 걷는 일, 길을 잃는 일처럼 영적인 연습은 특별한 환경이나 개인 강사, 비싼 장비가 필요 없다. 누구나 어디에서든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다.
가볍게 준비 운동을 해 보자.
식당에서 주문을 받거나 거스름돈을 건네주는 사람들처럼 내 주변에서 실질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집중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식료품 가게 계산원에게 마음을 써 보라.
점심식사에 초대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당신이 필요한 야채인 아루굴라arugula를 찾아 주는 그의 얼굴을 살펴보기만 하면 된다.
또, 당신이 어느 식당에서 아는 사람이 있는지 확인해야 할때, 이것이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어려운 일이라서 확인해 주지 않는 여자 점원이 있다고 해 보자.
그녀는 누군가의 딸이고, 어쩌면 누군가의 엄마일지도 모른다.
유니폼을 벗으면 돌아갈 집이 있고, 그녀의 집에는 아직 어제 한 저녁밥 냄새가 배어 있는 부엌이 있고, 자다가 깨서 악마들과 씨름하는 침대가 있을 것이다.
너무 멀리 가서 그사람을 소설 속 주인공으로 만들 필요도 없다.
그녀가 거스름돈을 줄때 인사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오늘 우리 백화점에서 쇼핑하신 고객님은 11달러 6센트를 절약하
그럼 당신은 “고맙습니다”라고 말하며 그녀와 눈을 맞추기만 하면 된다.
이렇게 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다.
상대방이 알아채지 못할 수도 있고, 자신이 계산원이 아닌 한 사람으로 인식되었음을 알아챘지만 신경 쓰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 조우는 이루어졌다.
당신이 느꼈기 때문에 그 사람도 이전과는 다를 것이다.
이는 간단하지만 심오한 연습이고 바보 같은 짓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막상 이것을 해 보려는 사람들은 마음속 큰 저항과 맞닥뜨리기도 한다.
고맙지만, 나는 계산대에서 다른 인간과 만나고 싶지 않아. 필요한 것만 얼른 사서 집에 가고 싶어.
‘어이, 거기. 플라스틱 봉투 말고 종이봉투에 담아.
좀 빨리 빨리 할 수 없어?’
장 보면서 만나는 사람 모두와 눈을 마주치면 끝도 없어. 물론 그 사람들도 소중한 사람이고, 가족이 있겠지.
내가 그걸 뭐라고 하는 건 절대 아니야.
하지만 나는 정말 바쁘다고.
거짓말 안하고, 오늘 여섯 시까지 끝내야 할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알기나 하냐고…….
보통 이렇게들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예수님께서는 이에 대해 직접 말씀하셨다.
특히 마태복음에서 강조하셨다.
그때 그 임금은 자기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너희는 내 아버지의 축복을 받은 사람이니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다스려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 마실 것을
주었으며, 병들었을 때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찾아 주었다’라고 할 것이다.그러면 의인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먹을 것을 드렸으며 목마른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
렸습니까?’
마태복음 25:34-37
시간이 많은 사람이 어디 있는가?
예수님은 마태복음의 이 구절과 셀 수 없는 다른 많은 구절을 통해 타인과의 조우에 대해 가르치셨다. 말씀으로만이 아니라 몸소 실천하셨다.
주님은 어떤 옷가지도 장롱에 두고 썩히지 않으셨다.
어느 랍비는 로마 백부장, 사마리아의 나병 환자들, 시리아와 페니키아의 여인들, 그리고 적대적인 유대인들과 갈릴리 출신 제자들 모두와 똑같이 눈을 마주쳤다.
그는 노예나 주인, 열두 살 소녀나 권력자, 이용 가치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모두에게 한결 같았다. 누구나 그의 눈길 안에 있었다.
하느님의 형상으로 지어진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을 나타내는 데 있어 사소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서에는 타인과의 조우를 실행하는 일이 다른 이를 대접하는 ‘영접philoxenia’ 만큼 자주 등장한다.
이 단어의 어원을 살펴보면 그리스어로 사랑을 뜻하는 네 가지 단어 중 하나인 ‘philo’와, 이방인을 뜻
하는 ‘xenia’로 이루어져 있다.
이방인 사랑, 어떻게 보면 모순으로 들린다.
우리에게는 이방인에 대한 두려움과 혐오증을 뜻하는 ‘제노포
비아xenophobia’가 더 와 닿는다.하지만 이는 성서와 어울리지 않는다.
영국 최고 랍비인 조나단 삭스는 “희랍어 성경에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은 한 번 나오지만, 이방인을 사랑하라는 명은 서른 여섯 번 등장한다” 21 고 말했다.
그러면 왜 이방인을 사랑해야 하는 걸까?
성경은 우리가 이방인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방인인 적이 없었다는 건, 집을 떠나 본 적이 없다는 말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계속해서 고향을 떠났다.
그들은 아이의 앙상한 손을 잡고 새로운 곳으로 들어섰을 때 가게 문을 닫는 자물쇠 소리를 들었다.
그들은 ‘세 놓습니다’라는 팻말을 보고 들어간 집에서 이미 방이 나갔다는 말을 듣는 일에 익숙해져 있었다.
많은 대문을 두드리지만 언제나 방은 나가고 없다.
당신이 이방인을 사랑해야 하는 첫 번째 이유는 당신이 이방인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이방인을 통해 하느님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천막에서 낯선 사람 세 명을 대접하다 하느님과 조우했다.
야곱은 얍복 강가에서 모르는 이와 밤새 씨름하다가 하느님을 만났다.
이스라엘 민족이 바빌론에서 타향살이를 하고 있을 때, 하느님은 그들을 고향으로 데려오기 위해 사이러스라는 페르시아 이방인의 머리에 기름을 부으셨다.
하느님은 시돈의 과부를 구하기 위해 엘리야를, 시리아의 나병 환자를 구하기 위해 엘리사를 보내신 일
로 인해 곤란을 겪어야 했다.
유대에도 과부와 나병 환자는 넘쳐난다는 것이었다.
우리가 왜 이방인을 사랑해야 하는가?
하느님이 이방인
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초창기 교회에서 친절한 대접은 기본적인 덕목이었다.
달리 갈 곳이 없었기 때문에 모든 기독교인들은 ‘자택학습’을 해야 했다.
그들은 다른 이의 집에서 만나 다른 이의 테이블에서 먹고 마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을 초대할 수 있는 집이 없었다.
예수님은 누구를 위해 요리하거나 침대를 내어 줄 수 없으셨기에, 남을 후하게 대접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을 수도 있다.
예수님의 이방인에 대한 사랑은 들판이나 배, 길과 산 어디에서든 행해졌을 것이다.
예수님은 어디에서 라도 자신을 이방인이라고 느끼는 누군가와 마주치면 그를 가족으로 느꼈다.
타인과의 조우를 이루어 내는 신성한 능력은 그가 가진 재능이었고, 예수님은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이 귀중한 재능을 가르치고자 최선을 다했다.
종교의 차이와 동일성이 중요시되는 세상에서, 이것은 사람을 살리는 행위이다.
뉴스를 켜면 이라크의 수니파와 시아파, 수단의 기독교와 무슬림,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지역의 유대교와 무슬림 간의 갈등과 같은, 종교가 갈등의 원인이 되는 사건들이 흘러넘친다.
나는 이들 갈등의 긴 역사나 다양한 원인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공적public enemy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공적보다 더 공동체를 강화시키는 것은 없다.
종교적인 사람들은 대적해야 할 악마를 정함으로써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기도 한다.
유대교,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교는 ‘반대파의 정체’에 특히 취약하다.
그들의 경전에 적과 싸우는 행위가 신성하다고 적혀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유일신 사상이 자신들의 진정한 신을 인정하지 않는 이들에게 자비롭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22
여기에는 중력처럼 확고한 법칙이 있다.
우리의 믿음이 우리를 인간답게 한다고 믿는 만큼, 우리와 같은 믿음을 나누지 않는 사람들의 인간성을 의심한다.
영국의 작가이자 성직자인 조너선 스위프트는 “서로를 미워하게 하는 종교는 많지만, 서로를 사랑하게 하는 종교는 부족하다”고 말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자기 중심적이기 때문에 본인이 원해서 쟁취하기보다는 조금 더 권위 있는 동기를 찾고 싶어 한다.
하느님도 같은 것을 원하신다고 우리를 납득시키면, 호전적인 신앙심에 아무 무리가 없어 보인다.
그렇게 우리 안에 하느님의 형상을 만들어 우리 적 안에 있는 하느님의 형상을 부정하면, 우리가 원해서
가 아니라 하느님의 이름으로 타인을 해치는 데 자유로워진다.
단순한 적의가 아니라 성스러움을 느끼는 것이다.
보스니아 출신 신학자 미로슬라브 볼프는 그의 책 《배척과 감싸 안기Exclusion & Embrace》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류의 미래는 우리가 정체성과 서로 다름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3 현재 지구상에서 종교가 가장 다양한 미국에 사는 사람들은 이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계명의 자녀들이고 복음의 후계자로서, 우리는 그렇게 해야 한다고 느낄 것이다.
믿음이 상반되는 사람들이 서로 위협하며 마주보는 곳에 우리는
종교적 정체성과 정치 세력이 통합되어 있는 곳에서 우리는 지배자들의 책략을 답습하지 않으며 저항해야 한다.
우리는 약한 자들을 이용해서 강한 자들을 좌절시킨다는 약속과 더불어 하느님은 우리와 다른 사람들 안에서도 나타나시리라는 약속을 시험하게 될 것이다.
랍비 삭스는 이렇게 말했다.
“최고의 종교적 도전은 우리의 형상을 하지 않은 사람들에게서 하느님의 형상을 보는 일이다.”25 이렇게 해야만 우리가 만들어 내지 않은 하느님의 거울에 비친 우리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피에드몽 대학 교수진들은 오래전에 신입생을 위한 종교학 과목으로 ‘성경개론’ 이나 ‘예수의 일생’이 아닌 인류 주요 지혜의 기본 입문이 될 ‘세계의 종교’를 필수 과목으로 채택했다.
피에드몽 대학이 교회와 관련된 학교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결정을 내린 것은, 바로 그 곳이 교회와 관련된 학교였기 때문이었다.
기독교인으로서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기 위해 이웃이 가장 신성하게 여기는 것에 대해 배우는 것보다 좋은 교육이 있을까?
1998년 내가 학교에 갔을 때, ‘세계의 종교’는 내게 일용할 양식이 되었다.
나는 이제까지 500명이 넘는 학생들에게 이 과목을 가르쳤다.
작년에는 콜롬비아 대학 신학 세미나에서 이 과목을 소개했는데, 작년 가을에 특히 기억에 남는 일이 있었다.
나와 학생 30여 명은 아
틀랜타 지역의 예배소 다섯 군데를 방문했다.금요일 하루 동안 우리는 세미나의 아침 성찬례로 시작해, 아틀랜타 알 이슬람al-Islam의 회교성전Masjid에서 기도회를 가진 다음, 하다쉬Hadash 성전에서 토라 축하의식Celebration of Simchat Torah을 드렸다.
성전의 어떤 유대인은 많은 이방인들이 지켜보니 더 열정적으로 춤을 추게 되었다고 말했다.
주최 측의 한 명이 우리를 집으로 초대해 호화로운 코셔kosher 안식일 식사를 대접했고 우리는 이방인으로서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 받았다.
바로 이런 것이 필요했다.
우리가 사는 곳에서 우리는 힘 있는 편의 일원이다.
우리 중 어떤 이들은 오랫동안 목회에 종사해 왔고, 교회에서 비슷한 식사를 대접해 왔다.
하지만 그 순간 우리는 성직자가 아니었다.
우리는 뻘쭘한 손님으로, 뭔가 넘어뜨리지나 않을까 어색하게 손을 모으고 서 있었다.
테이블에는 할라 빵 두 덩이와, 촛불, 와인 한 병, 물 한 그릇, 그리고 솜덩이가 한 접시에 놓여 있었다. 주인은 우리를 어린 아이처럼 대했다.
식사에 대해 하나 하나 설명했고, 질문이 있는지 물었다.
나는 솜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일단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때 안주인이 손을 씻으면 식사가 시작된다고 설명했다.
그렇지만 우리 인원이 너무 많아서 정식으로 하기 힘들기 때문에 솜에 물을 적셔서 손을 닦는 것으로 의식을 대신한다고 했다.
그녀는 세균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 깨끗한 마음으로 서는 것을 의미한다고 덧붙였다.
처음 접한 이런 의식에 매력을 느낀 나는 물그릇에 솜을 담그고는 비켜서서 다음 사람에게 자리를 내 주었다.
우리 기독교인들이 모두 유대인들과 함께 손을 닦는 동안, 나는 이것이 마태복음에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딴지를 걸었던 부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후 예루살렘에서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께 와서 “당신의 제자들은 왜 조상들의 전통을 어기고 있습니까?
그들은 음식을 먹을때에 손을 씻지 않으니 어찌 된 일입니까?” 하고 물었다.
마태복음 15:1-2
우리가 하고 있는 긍정적인 행위와 성경 이야기의 부정적인 연상을 연결시키는 일은 불가능했다.
그 자리에 있어야만 알 수 있는 새로운 사실이었다.
나는 성경 공부 모임에서 손 씻는 의식에 대해 읽고 토론하는 것이 아니라, 조상들의 전통을 지키기 위해 삶을 바친 마음 아프도록 관대한 사람들과 함께 손을 씻고 있었다.
나 역시 그 안에 있는 삶을 발견했다.
그것이 내가 발견한 새로운 사실의 본질이었다.
마태 시대부터 지금까지, 가장 중요한 것은 손 씻기 의식 자체가 아니라 누가 어떻게 만났는가 하는 것이었다.
사랑을 가지고 혹은 적의를 가지고 만났는가, 포용하기 위해 혹은 분열시키기 위해 만났는가 하는 것이다.
논점은 의식이 아니라 관계이다.
손 씻기 의식은 내가 기독교인임을 부정하지도, 나를 유대인으로 만들지도 않았다.
그 순간은 단지 자신들 전통의 경계선에서 나에게 손을 뻗은 사람들의 손을 잡기 위해 나의 전통의 경계로 향하는 길이었다.
우리가 나누고 있는 가장 큰 공통점은 종교가 아니라 인류애이다.
나는 이것을 종교에서 배웠다.
나의 종교는 타인과의 조우가 하느님과 가까워질 수 있는 일이라고 가르쳤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하느님을 만나는 일은 목적이 아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을 마음에 품고, 내 앞에 서 있는 그 사람을 보는 것이 목적이다.
그의 삶은 풀 수 없는 신비 그 자체이다.
그 사람을 내가 만든 이야기 속 등장인물로 만드는 순간, 조우는 끝난다.
* 주
16. Lesser Feasts and Fasts(New York: Church, 2003), 127.
17. Thomas Merton, The Wisdom of the Desert(New York: New Directions, 1970), 47. Merton is my source for the stories in this chapter; his small book contains the best introduction to the sayings of the Fathers that I know.
18. Merton, Wisdom of the Desert, 49.
19. Merton, Wisdom of the Desert, 54.
20. Merton, Wisdom of the Desert, 42.
21. Jonathan Sacks, The Dignity of Difference(New York : Continuum, 2002), 58.
22. Sacks, The Dignity of Difference, 46.
23. Miroslav Volf, Exclusion & Embrace(Nashvill: Abingdon Press, 1996), 20.
24. A phrase borrowed from John Courtenay Murray, as cited in Religion in American Public Life, ed. Martin Marty(New York : Norton, 2001), 129.
25. Jonathan Sacks, The Dignity of Difference, 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