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요? 제 삶도 함께 돌본 겁니다.
“제가 꼴통이었어요. 전쟁 후에 집이 망하기 전까지는 부자여서 배운다고 하면 얼마든지 배울 수 있었는데 공부 안 하고 놀러 다니고 그랬어요. 그런데 친구들이 다 학교 가서 뭔가를 배우는데 저는 할 일이 없는 거예요.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군대를 갔어요. 철모르고 군대 가서 고생 죽어라고 했지요. 그런데 문제는 제대하고 고향에 왔는데 막상 할 일이 딱히 없었다는 거예요.”
인생을 바꾼 한 마디,“ 병원으로 와”
홍인표씨가 처음부터 병원 일에 관심을 둔 것은 아니었다. 갓 제대를 하고 고향으로 왔을 당시 그는‘ 무엇을 하고 살지’에 대한 고민 같은 것이 없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부모님의 농사일을 거들었다. 작은 키에 지게지기도 어려웠지만 성실히 도왔다. 그를 병원으로 이끈 사람은 다름 아닌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리던 쌍천 이영춘 박사였다. 가까운 이웃으로 홍인표씨의 아버지와도 잘 알았던 이영춘 박사가 개정병원의 일을 맡아줄 사람이 필요했던 차에 소식을 듣고 그를 부른 것이다.
1963년, 그가 23살 되던 해였다.“ 이 박사님이 지금으로 말하자면 굉장히 무뚝뚝한 사람이었어요. 그냥 날 보고는 ‘내일부터 병원으로 와’하시고는 끝이었어요. 학교를 나온 사람들이 드문 시절이어서 그랬는지도 몰라요.” 그를 돕다보니 자연스럽게 병원은 그의 직장이 되었다. 그러면서 자신도 무엇인가를 하고 싶은 욕심도 생겨 틈틈이 영어공부를 하며 의학용어를 익혔고 모르는 일은 박사님께 물었다.
그렇게 10년이 흘렀다. 이영춘 박사가 어느 날 그를 불렀다. 그리고는 다짜고짜로 병원에 파견된 유니세프 직원들이 사용하던 자전거를 주고는“ 오늘부터 너는 병원 끝나면 마을을 돌면서 집집마다 어떻게 사는지 조사해 와”하고는 끝이었다. 그때부터 그는 개정면을 포함한 옥구군을 돌며 호구조사를 벌였다. 말이 좋아 호구조사지 동네사람들 숟가락 개수까지 셌다. 그렇게 몇 날 밤을 새워 통계 자료를 만들고 문서를 꾸몄다.
우리나라 의료보험의 전신격인 ‘옥구 청십자 의료보험조합’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그는 점점병원을 찾는 환자들과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환자를 상대하는 일을 더 잘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그는 조금 더 전문적인 의료인이 되기 위해 간호대학을 가기로 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반대에 부딪혔다. 당시‘ 간호사는 여자나 하는 것’이라는 사회적 인식이 너무 강했던 탓이다. 아버지는 간호사가 되려한다는 그의 말에 “안 돼”하는 한마디만 남겼다고 한다.“
인생을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시키고 싶었는데 그게 안 됐지요. 결국 아버지 돌아가실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었어요. 이상하게도 아버지 돌아가시면 될 줄 알았더니 또 그게 안 되더라고요.” 이번에는 대학에서 난감함을 표했다. 간호대학에 간다는 남학생을 본 것은 대학으로서도 처음이었고 선례가 없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다른 학생들이 어려워 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결국 그는 간호대학을 포기해야 했다. 70년대 중반의 일이었다.
그 사이 그에게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병원에서 받는 급여로는 커가는 아이들의 양육이 힘들다고 여겨 1978년 현대건설 사우디아라비아 주바일 SNOS해군기지 배후시설 의무실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1년 후 귀국하자 이영춘 박 사가 다시 그를 개정병원으로 불렀다. 하지만 1980년 이영춘 박사가 돌아가신 후 1983년 정우개발을 시작으로 삼성건설, 동아건설 등 해외 개발 현장을 돌았다. 1992년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여러 병원을 거쳐 지금의 동군산병원까지 간호조무사 일을 계속해오고 있다.방황하던 그가 아무 생각 없이 내딛었던길에서 어느덧 50년이 흐른 것이다.
“이 일이 참 좋아요. 제가 돌본 사람들이 건강해져서 나가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요. 그러니 이 일이 저한테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돌이켜보면 꼴통, 철부지를 철들게 해 준 일이예요. 사람들도 돕고 저도, 제 가족도 돌보게도 해줬어요.그래서 이제는 제가 받은 것들 모두 다시 환자들에게 돌려주고 싶어요.”
그래서인지 병원에서 현장근무는 그만하고 사무장을 맡으라고 제안했을 때 그는 한사코 거절했다고 한다. 아직은 더 하실 수 있을 만큼 젊기 때문이고, 아직은 그가 받은 만큼 다 돌려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언제 그만 둘 거냐고 묻자‘ 딱 3년’만 더 할 거라며 웃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