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동북공정의 핵심 중의 핵심은 “고구려와 발해는 중국의 지방정권”이라는 것이다. 참으로 허황되기 이를 데 없는 이론이나, 문제는 대한민국 정부가 동북공정에 대항하기 위해 설립한 동북아역사재단에서조차 제대로 반박을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 이유는 강단사학계가 중국의 동북공정과 이론이 거의 같은 일제식민사학으로 얼룩져 있기 때문이다.
발해에 대해 설명한 <중국 인터넷 백과사전>의 자료는 다음과 같다. (원문) 勃海是中国古代行政区划中的一个郡。三国时期的地名。最早设立与汉高帝五年,属幽州。东汉改由冀州管辖。北魏登国元年改勃海郡为渤海郡。治南皮,今河北南皮东北。辖今天津及河北、山东各一部分。 (번역) 발해는 중국 고대 행정구역 중 일개 군으로 삼국시기의 지명이다. 최초 설립은 한 고조 5년으로 유주에 속했고 동한 때 기주 관할로 바뀌었다. 북위가 세워진 원년에 발해군을 발해군으로 바꾸어 남피에 치소를 두었다. 지금의 하북성 남피 동북으로 지금은 천진과 하북성과 산동성의 각각 일부로 나뉘었다.
그러면서 대조영이 세운 발해국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 발해는 현 중국의 내해라 하면서 발해국의 도읍과 강역은 동만주 일대라고 설명하는 중국 인터넷백과사전 . 한국 강단사학계의 이론과 같다.
(번역) 대조영은 스스로 그 성을 대씨라 만들었고, 측천무후가 그 아비를 진국공의 진국으로 봉했으며, 대외적 호칭은 대진국이라 했다. 스스로 진국왕이라 했는데 이로써 발해국의 전신이 새로이 열린 것이다. 발해국은 중국 당나라 시기 속말말갈이 주체가 되어 건립되어 동북지구의 지방민족을 통치한 정권이다. 698년 속말말갈의 수령 대조영이 말갈국을 세워 스스로 진국왕이라 불렀다. <구당서 발해전>에 따르면, 713년 당 현종이 대조영에게 ‘좌효위원외대장군 발해군왕’으로 봉하고 그곳을 통합해 홀한주라 하여 ‘홀한주도독’을 추가로 제수했다. 그로부터 말갈이라는 이름은 없어지고 발해라 불려 전해졌으며, 진국이란 국호도 발해국으로 바뀐다. 이러한 유래로 당나라 통치구역 내의 지방민족 자치정권이 된다. 762년 당나라 조정이 발해를 나라로 인정해 최초 도읍은 구국(길림성 돈화)이다. 742년 중경현덕부(길림성 화룡)로 천도했고, 755년 상경용천부(흑룡강성 용안)로 옮겼고, 785년 다시 동경용원부(길림성 훈춘)로 옮겼고, 794년 상경용천부로 도로 천도했다. 926년 요나라에게 멸망해 15세를 전하고 역년은 229년이다. 발해는 말갈과 비슷한 음이 변음된 것이라고 인식하는 사람도 있다.
이상과 같은 발해에 관한 중국자료는 현재 대한민국 사학계가 교과서에 수록한 것과 똑같다. 어찌 동북아역사재단이 중국의 역사왜곡인 동북공정에 맞대응할 수 있으리오. 우리 스스로 대조영의 나라를 발해라 하면서 오히려 동북공정에 협조하고 있는 중이다. 중국은 대한민국 정부예산으로 동북공정을 견고하게 확실하게 굳혀주고 있는 중이다. 참으로 기막히고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 4대 문황제(대흠무)의 정혜.정효공주 비문에 '대흥보력효감금륜성법대왕(大興寶曆孝感金輪聖法大王)는 문구가 있어 대진국(발해)은 자체연호를 쓴 황제국임이 유물로 입증되었다.
고구리를 계승한 대진국은 대대로 황제국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우리 스스로 대조영의 나라를 발해로 불러서는 중국의 동북공정을 그대로 인정하는 꼴이 되고 만다. 왜냐하면 발해는 중국의 일개 지명으로 당시 하남성과 산동성 사이에 있는 대야택(大野澤)을 말하는 것으로 그 일대를 발해군(渤海郡)이라 불렀기 때문이다. 상세한 설명은 아래 글을 참조하기 바란다. (제목) 고구려와 발해는 중국의 지방정부가 맞다 http://www.greatcorea.kr/sub_read.html?uid=164§ion=sc8§ion2=
<태백일사 대진국본기>에 의하면, 668년 고구리가 망하자마자 대중상(大仲象)이 동모산(東麰山)에서 나라를 세워 후고구리(後高句麗)라 칭하고 연호를 중광(重光)이라 하여 32년간 재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뒤를 이어 즉위한 대조영이 홀한성(忽汗城)을 쌓아 도읍을 옮기고, 당나라 장수 이해고를 천문령(天門嶺)에서 대파한 후 체제를 정비하고는 새로운 국호(新國號)를 대진(大震)으로 바꾸고 연호를 천통(天統)이라 했다고 한다. 이후 대진국은 계속 황제라는 칭호를 썼으며 자체연호를 사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대진국은 중국의 지방정부가 아닌 황제국 아니겠는가!
▲ 드라마 대조영에서의 황제 등극 장면. 대조영은 대진국(발해)의 시조일까? 2대 황제일까?
당나라는 우리 스스로의 국호인 대진(大震)을 자기네 마음대로 발해(渤海)라 불렀다. 물론 713년 당나라 측천무후가 대조영을 발해군왕으로 책봉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대진국이 이를 받아들였다는 기록은 <태백일사 대진국본기> 어디에도 없다. 설사 책봉조서가 왔더라도 대조영 황제는 코웃음 치며 찢어버렸을 것임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불과 15~6년 전에 당나라 대군이 천문령에서 장수 이해고가 몸만 빠져나갔을 정도로 그야말로 참패를 당했고, 국호를 대진으로 바꾼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당나라의 일개 제후가 되라는 책봉을 받아들였을 하등의 이유가 없기 때문이며, 또한 대진국이 일본에 보낸 국서에는 국명을 발해가 아닌 고구리로 썼기 때문이다.
이는 고의적으로 첨삭[添削]한 기록임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대진국이 당나라의 책봉을 받아들여 번왕(藩王=제후)이 되었다면 이후 자체연호를 쓸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신당서>는 발해의 왕들이 자체연호를 썼다고 기록하고 있다. 예를 들어 <태백일사>에 무황제(武皇帝)라고 기록된 대조영의 아들 대무예를 <신당서>에서는 무왕(武王)이라 적으면서, 인안(仁安)이라는 연호를 섰다고 똑같이 기록하고 있다. 뭔가 앞뒤가 안 맞는 기록인 것이다.
<신당서> 발해국왕의 휘(이름)와 연호와 시호 1. 祚榮死,其國私諡爲高王。 2. 子武藝立,私改年曰仁安。武藝死,其國私諡武王。 3. 子欽茂立,改年大興。欽茂死,私諡文王。 5. 推宏臨子華璵爲王,改年中興。死,諡曰成王。 6. 欽茂少子嵩鄰立,改年正曆,死 諡康王。 7. 子元瑜立,改年永德。死,諡定王。 8. 弟言義立,改年硃雀,死,諡僖王。 9. 弟明忠立,改年太始,立一歲死,諡簡王。 10. 從父仁秀立,改年建興。仁秀死,諡宣王。 11. 子新德蚤死,孫彝震立,改年鹹和。 12. 彝震死,弟虔晃立。 13. 死,玄錫立。 14. 마지막 왕 기록은 <신당서>에 없고 <요사본기>에 나타난다.
위 <신당서> 에는 발해국은 14대 왕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위 <중국백과사전>에는 “15세를 전했다(传国十五世)” 라고 되어 있어 대조영의 부친인 대중상이 대진국(발해)를 연 시조였음이 분명하다 하겠다. 이는 대진국(발해)이 고구리를 계승한 나라라는 것을 감추기 위해 일부러 대중상이 시조라는 기록을 지워버린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신당서>에는 “측천무후가 대조영의 아비를 진국공의 진국(대진국)으로 봉했는데 이로써 발해국의 전신이 새롭게 열린 것이다(武则天封其父为震国公之“震国”对外称“大震国”(大振国)自称震国王,从此开创了渤海国的前身。”라는 기록이 남아있어 더욱 그렇다.
대한민국의 식민강단사학계는 이렇듯 <신당서>의 발해국 기록과 정확히 일치하는 <환단고기>를 위서(僞書)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신당서>는 물론 중국의 역사이론과 내용이 같은 대한민국 국사교과서도 모두 위작으로 보아야 한다. 식민사학자들이 논문 쓸 때 주로 인용하는 것이 중국의 사서들인데, 중국의 사서는 위서가 아니고 <환단고기>만 위서인 이유는 무엇인지 묻고 싶다. 아울러 중국과 일본은 없는 역사도 가짜로 만들어내는데, 왜 우리는 있는 진실된 기록도 위서라 하며 쓰레기통에 내버리고 있는지 그 까닭을 알고 싶다. 국사교과서에서 발해라는 국호를 버려야 동북공정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 KBS 드라마에서도 대진국(발해)의 시조인 대중상을 천문령에서 당장 이해고에게 죽는 일개 장수로 묘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