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월면 도곡리道谷里 유래
근원을 둔 맑은 샘물이 흐르고 일월산 월자봉(月字峰)으로 올라 가는 중간 쯤에 있는 마을이다. 계절 따라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는 전형적인 산촌 마을이다. 특산물로서는 고추와 담배를 들 수 있다.원래 영양군 북이면(北二面)의 지역으로서 신당(神堂)이 있어 다니는 사람이 많이 있고 일명 구도실이라고 하였다. 1914년에 행정 구역을 고칠 때 상부곡(上部曲)을 합하여 도곡리라고 하여 일월면에 들게 되었다.
[마을의 특징]
마을에서 널리 알려져 있는 것으로는 집적 바위와 장군천(壯軍川) 이야기가 전해 온다. 접적바위는 구도실 앞들에 있는 바위로서 넓이가 한 평 남짓하고 높이는 한 자 정도로 열십자 모양으로 갈라졌는데 그 아래에 돌탑이 들어 있다고 한다. 장군천의 이야기는 의병대장 오삼달(吳三達)과 걸림을 둔 냇물 이름의 사연에 근거하는데, 사연은 다음과 같다. 때는 조선조 영조 4년(1728) 무신(戊申)의 해에 이인좌(李麟佐)ㆍ정희량(鄭希亮) 등이 나라에 불만을 품고서는 난리를 일으켰는데, 그 세력이 자못 큰지라 전국적으로 이를 대처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영양에서는 경상도 호소사(慶尙道號召使) 조덕린(趙德隣) 장군이 의병을 일으켜서 반란군을 무찌르는 데 힘을 쏟고 있었다. 이 때에 일월면 도곡동에서는 취은당(醉隱堂) 오삼달 선생이 장군으로 추대되었다. 오 장군은 본군에서 많은 의병을 모았다. 당시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다닐 만한 길이 별로 없어서, 많은 의병을 거느리고 행진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오 장군은 냇가를 따라서 가곡동과 주곡동 앞으로 다녔다고 한다. 때로는 진(陣)을 치기도 하였는데, 큰 구경거리가 아닐 수 없었기에 마을 사람들은 누구라도 나와 보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향토의 의병을 지휘하던 오 장군의 호령 소리하며 그의 활쏘는 솜씨는 널리 알려졌다.지금도 주곡리의 동구 하천변에는 장수터라고 부르는 바위가 있는데 사람이 누워서 잠을 잔 듯한 곳이 있어서 이를 오 장군이 잠을 잔 터라고 하고, 해서 이 냇물을 일러 장군천이라고 했다는 것이다.그 이전에는 주곡동 앞으로 흐른다고 하여 주계천(注溪川)이라고도 하였는데, 혹은 매화피는 도계동의 이름을 따서 매화천(梅花川)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 뒤 영조 4년에 일어난 이인좌의 난이 평정되고 난 뒤로는 '장군천'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자연부락의 이름과 유래]
*구도실(求道室)ㆍ도곡(道谷)약 400년 전 불자들이 마을 안에 절을 짓고 마을을 개척하였으며 심신 수련의 도를 닦은 마을이라 해서 구도실이라고 불렀다 하며 일설에는 구씨(具氏)들이 도를 닦은 곳이란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이남연(64) 제보).물론 보기에 따라서는 여러 가지의 풀이를 할 수는 있다. 도곡동에 신을 모시는 신당(神堂)이 있어 신당에 다니는 이들이 많이 있던 것으로 보아 불교가 들어오기 이전부터 산신이 있다고 본다. 구도-굳-굿으로 걸림을 둘 때 굿을 하는 종교 공간이 예로부터 있었던 것으로 풀이하는 게 좋을 것으로 본다. 본래 '굿'이라 함은 오늘날에 와서 무당이 노래하고 춤을 추는 연희행위 일체를 통틀어 말하지만 옛말로라면 이는 굴 곧 종교 공간을 이르는 말이다. 도곡의 '도(道)'가 뒤를 뜻함을 함께 고려한다면 물의 북쪽에 있는 뒷골 마을로서 신당을 모시는 굿을 하던 곳으로 보면 좋을 듯하다.
*옛구도실(옛求道室)ㆍ고도실(古道室)
옛날 이 지방에 불교가 처음 들어 올 당시 제일 먼저 불도가 기거하던 마을을 구도실이라 하고 마을이 점점 넓어져 구도실 마을을 구분하여 구도실과 옛 구도실이라 부르나 구도실이 원래의 마을이다(이남연(64) 제보).
*서원골(書院谷)
도곡리 동쪽 음지 마을 상단부에 작은 골이 있으니 이름하여 서원 고을이라고 한다. 이 곳은 조선조 중엽에 병조 참판을 지낸 야성 정씨(野城鄭氏) 정담(鄭湛)선생의 후손이 집성촌을 이루고 살면서 후학의 양성을 목적으로 서당을 지으니 명고서당(明皐書堂)이라고 하였다.그 뒤 순조 28년에 영해의 향현사(鄕賢祠)의 정담 선생의 위패(位牌)를 봉안하여 서원으로 승격하게 되었으며 봄 가을로 제향을 올렸다. 고종 7년(1868)에 서원 훼철령에 따라 앞에 있는 논들을 서원앞들이라고 한다(정재흥(59) 제보).
*웃가마실ㆍ상부곡(上釜谷)
가곡동의 가마실에 이어진 촌락으로서 도곡동의 양지마와 음지마를 합하여 웃가마실이라 한다. 가마실 북쪽이며 위치상 상단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이남연(64) 제보). 가마실을 한자의 뜻을 빌려 적으면 부곡(釜谷)이 된다. 가마-감은 북쪽이니 산의 남쪽 양지 바른 마을을 이른다.
*무곡(茂谷)ㆍ이촌(李村)
마을 앞에 큰 느티나무가 무성하여 마을 전체를 둘러 싸고 있어 마을의 경치가 매우 아름다웠다 하여 무곡이라 부르며 지금으로부터 약 130년 전 영천 이씨(永川李氏)가 처음 마을에 정착하여 살았다고 이촌이라 부른다(이남연(64) 제보).
*월간(月澗)
구도실에서 일월산 월자봉(月字峰)으로 올라가는 중간 지점에 위치하는 마을로서, 달밤에 나무를 몰래 베어 가 간수가 지키고 있으면서 나무를 못 베도록 감시를 하는 마을이라고 월간이라고 불러 온다(이남연(64) 제보).월간(月澗)을 우리말로 뒤치면 달내가 된다. 땅 이름의 분포로 보면 달내는 상당수에 이른다. 가령 충주의 달내강은 그 본보기에 값한다고 하겠다. 새로 물길을 연 강물이거나 아니면 높은 지역을 흐르는 강이란 풀이가 된다.
*갈골ㆍ갈곡(葛谷)
북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일월산 골짜기에 칡이 무성하여 여름철이면 칡넝쿨이 산 전체를 덮어 산보다 칡잎만 보인다고 하였다. 가을에 한약재로 쓰기 위하여 칡을 캐는 사람들로 골짜기가 꽉 찼다고 하여 갈골이라 부른다(이남연(64) 제보).소리의 비슷함으로 말미암아 칡갈과 갈골의 갈에 같은 의미 부여를 한 것이다. 낱말 겨레라는 관점에서 보면 갈-갇-갓으로 마을과 마을이, 아니면 산으로 하여 한 지역과 다른 한 지역이 갈리는 경계를 이르는 것으로 볼 개연성이 크다고 본다.
*권촌마(權村-)
이 마을은 근세에는 다른 성씨는 살지 않고 권씨(權氏)들로만 마을을 이루고 서로 도와가면서 생활의 터전을 닦아 권촌마라 한다(이남연(64) 제보).권촌 마을은 원래 안마을이라고 하였으며 권촌 마을이란 이름은 오래 되지 않는다. 조선 왕조 효종 때 병조 참판을 지낸 야성 정씨 정담(鄭湛) 선생의 증손자인 희주(希週)가 영해에서 가곡으로 이주하여 그 아들 해(垓)가 이 곳에 정착하였고, 해(垓)의 손자인 덕운(德運)이 독성재(獨醒齋)라고 당호를 지어 불렀으며, 그의 자손들이 200여 년간을 살다가 일백여 년 전(1890년대)에 양지뫁으로 사당을 짓고 이주를 한다. 안동 권씨가 안동의 와룡에서 이 곳으로 이주하여 문호가 번창하였는데 오늘날에 이르러 권촌뫁이라고 부른다(정동춘(66) 제보).
*양지마ㆍ양촌(陽村)
양지마 건너편에 있는 마을로 아침 일찍 잠깐 햇빛이 들고 오후가 되면 해가 일찍 져서 어둠이 빨리 오는 촌락인데 마을을 점차 양지 가까운 곳으로 넓혀 가고 있다(이남연(64) 제보). 본래 산의 북쪽을 일러 음(陰)이라고 하는 바 양지쪽의 반대편이 된다.
*음지마ㆍ음촌(陰村)
북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일월산 골짜기에 칡이 무성하여 여름철이면 칡넝쿨이 산 전체를 덮어 산보다 칡잎만 보인다고 하였다. 가을에 한약재로 쓰기 위하여 칡을 캐는 사람들로 골짜기가 꽉 찼다고 하여 갈골이라 부른다(이남연(64) 제보). 소리의 비슷함으로 말미암아 칡갈과 갈골의 갈에 같은 의미 부여를 한 것이다. 낱말 겨레라는 관점에서 보면 갈-갇-갓으로 마을과 마을이, 아니면 산으로 하여 한 지역과 다른 한 지역이 갈리는 경계를 이르는 것으로 볼 개연성이 크다고 본다.
*샘물내기
새방골 북쪽에 있는 마을로, 일월산에서부터 근원을 둔 맑은 샘물이 흘러 나와 사람들 모두가 이 물을 식수원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산에서 나온 물을 마셔서 그런지 모두가 장수하며 살고 있다 한다(이남연(64) 제보).
[ 참고문헌 ; 영양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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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집어 보는 영양말(사투리)※ 댕기는, 여불때기, 쬐메, 낭글, 높따라한, 게락, 마뜩. ----------------------------------
(영양말캉 마실소개 /144, 223) 일월면 도곡리(道谷里)가 궁금니껴?
도곡(道谷)는 일월산(월자봉)으로 올라 가는 산이 시작하는데 있는 마실이시더.
본새 북이면(조선시대 1895년)땅으로 심신 수련의 도(道)를 닦떤 데라 케가꼬 구도실(求道室)이라 카니더.
옛날에는, 신당(神堂)이 있어 가꼬 찿아 댕기는 사람들이 디게 많았니더.
1914년에 행정구역 바낄때 기존 도곡(구도실)에다 상부곡(上部曲)까지 엄체 도곡이라 카고 일월면에 속하게 됬니더.
(구도실ㆍ도곡) 도곡리 중심지 마실로 1600년경 불자들이 절캉 집을 맹글고 심신 수련의 도(道)를 닦았떤 데라꼬 구도실(求道室)이라 켔따카기도 하고. 구씨(具氏)들이 도(道)를 닦떤데라 케가 구도실이라 켔따카기도 하고. 옛부터 굿을하던 마실이라꼬 구도실 켔따 카기도 카니더. 도곡(道谷)은 물 북쪼구를 뜻하는 도(道)캉 마실을 뜻하는 곡(谷)의 합성어로 물 북쪽에 있는 뒤쪽 마실이라는 뜻이시더.
(옛구도실ㆍ고도실) 마실(구도실)이 자꾸 크지게 되가꼬 여불때기에 더 크고 새로 맹글어진 마실 (지금의 구도실)캉 구분할라꼬 옛구도실 혹은 고도실(古道室)이라 카니더.
(서원골) 동쪽 언덕 우(위)에 있는 쬐메한 마실이시더. 조선 중엽 병조 참판을 지낸 정담(鄭湛)선생 후손인 아릿때들이 집들을 맹근뒤 서원(명고서원)이 있는 데라케가꼬 서원꼴(書院谷)이라 카게 된니더. 글코, 그 앞에 있는뜰은 서원뜰이라 카니더.
(웃가마실ㆍ상부곡) 가곡의 가마실이 여어까지 이까져 있니더. 양지마캉 음지마를 엄체 웃가마실이라 카고 가곡의 가마실 우(위)에 있따꼬 웃가마실 또는 상부곡이라 카니더. 부곡(釜谷)은 가마실을 한자로 쓴거고 상부곡(上釜谷)은 웃가마실을 한자로 쓴거시더.
(무곡ㆍ이촌) 마실 앞에 느티낭기 디게 무성하다 케가 무곡(茂谷)이라 카기도 하고 물이 넉넉한 마실이라꼬 무곡(茂谷)이라 켔따 카기도 카니더. 그뒤, 영천이씨(永川李氏)들이 정착 하면서 이촌(李村)이라꼬 바까 부르게 된니더.
(월간) 구도실서 일월산 월자봉(月字峰)으로 가는 중간에 있는 쪼메한 마실이시더. 산에 낭글 베가지 못하도록 감시하고 지키는 간수(看守)가 있었따꼬 월간(月澗)이라 겠따 카기도 하고 높따라한 지역인데도 불구하고 그랑이 있따꼬 월간(月澗)이라 카게 됬따 카기도 카니더.
(갈골ㆍ갈곡) 북쪼구 골짜기 마실로 칠기(칡) 넝쿨이 온 산천을 덮을 정도로 게락난 골짜기라꼬 갈곡(葛谷)이라 카기도 카고 갈림길이 있꼬 경계가 되는 지역이라케가 갈곡(葛谷)이라 부르게 됬따 카기도 카니더.
(권촌마) 야성정씨들이 모데 살때는 안마실(안마) 이라켔찌만 마카다 양지뫁으로 이사를 했뿐 뒤. 안동(와룡)에서 안동권씨(權氏)들이 여어 이사를 와가 집성촌을 이루게 되면서 부터 권촌(權村)마라 부르게 된니더.
(양지마ㆍ양촌) 가마실 우(위)쪼구에 있는 마실로 양지바른데 있따케가꼬 양지마 혹는 양촌(陽村)이라 카니더.
(음지마ㆍ음촌) 양지마 건너편에 있꼬 해가 짧아 어둠이 디게 일찍오는 마실이라 케가 음지마 또는 음촌(陰村)이라 카니더.
(샘물내기) 새방골 북쪼구에 있는 쬐메한 마실로 일월산 마뜩은 샘물이 솟꾸처 흘러 식수로 사용했따 케가 샘물내기라 카니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