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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울산대체의학봉사회 원문보기 글쓴이: 천부쥬신
우리 역사가 왜곡된 것은 기정 사실인데 그중에서도 지명에 관한 것이 그 단초를 제공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중국 땅은 넓은데다 같은 한자 문화권이어서 우리와 같거나 유사한 지명이 많다. 우리나라 모든 지명이 중국 지도에 찾아보면 거의다 있을 정도이다. 이것이 역사왜곡의 빌미가 됐다. 일본의 역사 학자들이 역사 조작을 하는데 중국과 우리나라에 같은 지명이 많이 있는 것을 기화로 우리의 강역을 한반도로 축소시켜 버렸고 우리의 식민사관 학자들이 그것을 그대로 답습하므로 해서 역사 조작이 이루어졌다.그런데 묘하게도 동일지명이 여러군데 있는 곳이 많다.예를 들면 한웅이나 단군께서 개국한 '태백산'이란 산은 중국에 몇군데가 있고 우리나라에도 몇군데나 된다. 낭랑성 ,평양성,패수,대방,해성 약수,살수,왕검성,국내성등 그당시 영역을 나타내는 중요 지명들이 여러 군데 있어서 그판별이 아주 어렵게 되어있다.거기다 '요동' 이나 '요서',요하강 등은 상고시대부터 지역을 달리하면서 같은 지명을 사용하고 있어서,시대 별로 위치를 다시 판별하여야만 그정확한 위치를 알수가 있는 것이다.그래서 요동지방을 현재의 요동성으로만 생각을 굳히면 지금의 만주땅으로만 인식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그리고 오랜세월이 흐르는 동안 지명이 여러번 바뀐곳이 많다.왕조나 지배자가 바뀔 때마다 바뀐곳도 있고 자연 재해등으로 형질이나 모습이 변하여 지명이 바뀐곳도 있다. 그야말로 숨은 그림 찾기 이상으로 찾기 힘들도록 우리의 역사는 숨어 버렸다. 거기다가 옛지명들이 대개 자연 형상이나 모양 색깔등에 연유하여 지은 지명이 많아 판별이 애매한곳이 많다.압록강은 강물의 색깔이 오리머리의 검푸른 색을 닮았대서 붙여진 이름이라는데 깊은 강물의 색이 대개 검푸른색이라 애매하기 짝이없다. 평양이란 지명은 고유명사가 아니라 큰도시,수도,또는 서울을 가르키는 보통명사란 주장도 있다. 우리 사서에 평양은 여러번 나오지만 그때 마다 위치가 다르다. 이걸 지금의 평양으로만 해석하려고 하는 것이 식민사관 학자들이다.또한 중국의 사서들의 지명에 대한 설명이 애매해서 어디라고 딱꼬집어내기가 아주 어렵다. 여기도 같고 저기도 같고 헷갈리기만 한다. 인터넷에 여러 역사 사이트에 재야 학자나 역사 탐구하시는 분들이 나름대로 분석을 하고 사서들을 근거로 주장하는곳이 여러군데 있지만 좀 미안한 이야기지만 어디 한군데라도 정확게 입증될 만한곳이 없다.아니 입증이 된다고해도 역사학계에서 인정하지 않을 것이 뻔한다.그들은 죽기로 우리역사를 반도로 고집하니까.인정할리가 없지 않겠는가.그나마 어디 한군데라도 입증이 되면 그곳을 근거로 다른곳들도 추정을 해보겠는데 그것이 도대체 안되니 답답하다.확인 방법은 주요 지역 유물 유적을 탐사해서 확인해 보는 길인데 비용이 많이드는 일이니까 각대학이나 연구소 또는 정부에서 예산을 편성해서 해야 할 일이다.개인이 하기 어려운 일이다.그런데 대학에 교수라고 앉아 있는사람들이 식민사관 군단이다 보니 아예 할 생각도 필요성도 못느끼고 있다.우리 역사는 한반도 안에서만 이루어 졌으니 거길 뭐하러 가느냐는 것이다. 이사람들이 전문가랍시고 우기고 있으니 관리들이야 뭐 더 나설일이 뭐 있겠는가. 그런데 KBS 역사 스페셜을 보면 중국에 우리 고대 역사 유적들이 심심치 않게 나온다.안찾아서 그렇지 찾으면 나오게 돼있다. 그나마 이런 프로가 있다는 것이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KBS에 큰 찬사를 보낸다.이프로에서 한단고기에 관련내용을 1999년 10월 2일 개천절 특집으로 방영(KBS홈페이지에서 다시볼 수 있다) 한적이 있는데 역사학계(식민사관학자들)에서 엄청난 압력을 넣더라는 것이다.한단고기는 위서라 믿을수 없으니 방영해선 안된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관련 내용 인터뷰도 일절 거부했다는 것이다.이들이 하고 있는 짓거리는 자기 개인 적인 역사관에 의해서 사고하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들의 범위를 정해놓고 그범위를 넘는 발언이나 주장은 떼로 무리를 지어 공격을 퍼붓는 것이다.참으로 한심한 인사들이다. 그래서 이들을 그 자리에 놓아둔채로는 이나라 역사복원이고 민족의 얼이고 혼이고 아무것도 찾을수가 없으니까 필자가 역사 광복운동을 부르짖는 것이다. 먼저 이들을 몰아 내야만 무엇이라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진시왕 정이 중원 대륙을 통일하기전 이천년의 장구한 세월 중원대륙을 호령하던 단군제국이 무너지고 지나족들이 주인공이 되면서부터 중원 대륙은 지나족들이 고대로부터 저희들이 혼자 지배해 왔던 것 처럼 기자라는 인물을 내세워 우리 단군조선의 자취를 가려버렸다. 그와 함께 그시절 역사가 담긴 사서들을 철저하게도 흔적을 없애 버렸다. 그리고는 저들 사서엔 단군조선의 이천년 역사를 아예 빼버리고 기재하지 않았다.공자의 춘추로부터 사마천의 사기 이후 모든 사가들이 다그랬다. 저희 변방의 먼 오랑캐 나라로 왜곡 축소 시켜 버렸다. 그리고 고구려 패망이후 1,300년 동안 그게 사실로 받아들여졌다.지금의 중국의 지명사전을 봐도 우리 단군제국에 관련된 설명은 거의 없다.하.은.주 시대에 우리는 여러 제후국을 거느린 종주국으로서 중원 대륙에 제국을 건설하였지만 지나족은 소수 민족 작은 소국에 불과했다.한단고기에는 하.은.주 시대에 단군 조선에 조공한 기사가 여러번 나온다.그런데도 지나족들은 그런사실을 은폐하기위해 일만년 전의 환인시대 부터 환웅천왕의 배달국 단군조선의 7,000년 역사를 지워 버렸다.그리고는 우리 분파인 복희 신농 수인의 삼황을 저희 시조로 여기면서 이또한 신화로 취급하고 황제이후의 요.순까지의 5제부터 역사로 기술하고 있다(사마천의 사기가 오제본기 五帝本紀 에서부터 시작한다). 저희 조상들이 우리 동이에서 분파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신화가 아니다.우리 민족에서 분파되었음을 감추기 위해서 신화로 간주해 버린 것이다.
결국 지명을 비롯한 우리 역사(상고사) 연구는 너무 오랫동안 왜곡돼온 데다 작금의 역사학계의 직무 유기로 아주 힘들게 되어있다.자기들은 안할려고 하고 남이할려 그러면 방해만 놓고 어귀짝만 놓고 있다.그래서 이들을 몰아내는 것이 역사 회복의 지름길이다.그래서 역사광복을 외치는 것이다.이들이 사라져야 만이우리 역사를 다시 복원할 수 있다. 이들은 만고의 역적이요 민족 반역자들이다.이완용이보다 더나쁜 사람들이다.이완용이 팔아먹은 나라는 35년뒤에 되찾았지만 이 사람들이 웅켜진 우리의 역사는 광복 55년이지난 21세기 오늘 까지도 제모습과 얼을 찾지 못한채 갈길을 모르고 헤매고 있다.머리를 잘린 이나라 역사가 이들 손아귀에서 놀아나고 있는 것이다.만고의 역적이다.대한민국 역사학계 인사들.
대방의 진실 - 대방은 어디에 있었는 가 ?
▣ 대방은 요동군에서 분리되고 하북성 석문에 접하여 있었다 ! 지명목록 홈
< 대방의 위치도 >
▣ 대방의 중요성
고구려 수도가 국내성이고, 후한이 낙양에 있었을 때인 196 - 200년 사이에 공손강이 요동군의 일부를 대방군으로 하였다 (삼국지 권 30)
대방의 위치는 東夷國인 高句麗, 百濟, 신라 倭의 위치를 규명하여 주는 중요한 지명인데 요동군을 밝혀주는 요소도 된다.
대방의위치를 밝히지 않는 한 결코 동이위치는 밝혀지기 어려울 것이다. 다시말하면 대방의 위치는 다음과 같은 사항을 아는데 핵심적인 곳이다.
- 韓, 倭, 百濟 수도 낙랑군의 위치를 알수 있다.
- 300년대의 신라 위치를 알 수 있다.
- 요동군의 위치를 알수 있다.
▣ 대방의 위치에 대한 중국사서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1) 韓帶方之南 (삼국지권30) (韓은 帶方의 남쪽에 있다.)
(2) 倭人在帶方東南 (삼국지권30) (倭人은 대방의 동남에 있다)
倭人은 대방 남쪽, 회계, 담이(남월), 주애, 이주, 단주가 있는 곳에 있었다 (삼국지, 후한서, 남제서, 양사, 남사)
(3) 質桓之間復犯遼東西安平殺帶方令 (후한서권85) (질제와 환제 사이에 다시 요동 서안평을 침범하여 대방현령을 죽였다.)
(4) 桓靈之末韓濊彊盛郡縣不能制民多流入韓國建安中公孫康分屯有縣以南荒地爲帶方郡 (삼국지권30)
(환제와 영제의 말년에 한과 예가 강성해져서 그 군현을 제어할 수 없이되자 많은 백성들이 한국으로 도망해 들어 갔다.
건안시대에 공손강이 남쪽지방 거친땅을 쪼개서 대방군을 삼았다.)
(5) '남제서'에서 百濟는 요동에 廣陽, 朝鮮, 帶方, 廣陵, 淸河, 樂浪, 城陽등이 있다.
(北齊書에 城陽王 淸河王이 있는데 北齊는 550-577년까지 28년간 있었다.)
지금 하북성에 청하가 있으니 대방도 이 지역에 가까이 있어야 한다.
▣ 장안 중심의 중국기록을 종합하여 보면 대방은
① 강회의 북쪽에 있어야 하고
② 衛와 회계의 서북쪽에 있어야 하고
③ 遼의 동쪽이며 안평의 서쪽에 있어야 하고
④ 청하가 있는 지역이어야 한다.
▣ 결국 하북성 청하 안평의 서쪽이고 요의 동쪽인 태행산맥의 동쪽에 帶方이 있음이다. 한족들의 기록이 위와 같은데 우리의 기록은 어떻게 되어 있을까?
▣ '삼국사기'의 百濟本紀에 의한 帶方
① 溫祚王
溫祚王 동명의 후손으로 구이가 있어 어짐과 신의에 돈독하여는데 나라를 대방고지에 세웠다.
구이는 仇首王(214-233)과 古爾王(234-286)을 나타내고 있다.
② 286년 責稽王
고구려가 대방을 치니 대방이 구원을 청하므로 군사를 내어 구원하고 고구리가 원망하므로 침략을 염려하여 阿且城과 蛇城을 수리 하였다.
③ 蓋鹵王
帶方太守馬張茂(대방태수마장무)를 魏에 보냈다.蒸土築城(연와로 성을 쌓았다.) 緣河樹堰(하수=한수)를 따라
제방을 샇았는데 사성의 동에서 崇山까지 쌓았다.) 그리고 한성이 고구리군에 함락되고 阿且城아래에서 돌아가셨다.
472년에는 백제의 대방군이 있는데 한수, 하수, 숭산, 사성, 아차성, 하수의 제방, 벽돌의 성터가 있어야 대방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 高句麗本紀에서 帶方
④ 太祖94년 한 요동의 西安平에 있으므로 쳐서 대방령을 죽이고 낙랑태수 처자를 사로 잡았다.
- 247년에 고구려가 평양성으로 옮겼다
- 265년에 위가 망하였다
- 315년 고구려가 대방군을 평정했다. (302 ~ 420년 까지 중국은 5호16국시대 였다)
▣ 열전 및 신라본기
⑤ 672년 김유신전에서 '당군은 말갈과 함께 석문의 들에다 진을 치고 법민왕은 장군 의복, 춘장 등을 보내어 대방의 들에다 진을 쳤다.
(唐軍與靺鞨營於石門之野王(법민)遣將軍義福春長等禦之營於帶方之野)
⑥ 300년 낙랑, 대방이 신라에 항복하였다
▣ 위의 삼국사기에서 대방관계를 종합하면
① 阿且城, 蛇城, 漢城, 河水, 崇山이 있어야 하고
② 遼의 동쪽이며 안평의 서쪽에 있어야 하고
③ 석문이 있어야 한다.
▣ 지금 河北省에는 안평, 석문이 있고 河南省에는 崇山이 있으며 그 사이를 흐르는 강이 河水 또는 漢水라 부르는 黃河가 있고
崇山의 북에서 하수를 따라 동으로 제방이 있다.
'삼국사기'의 내용도 한족의 사서와 비슷하지만 아주 정확한 기록이 있음이니 石門과 대방이 접하여 있음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 대방에 관하여 종합적으로 정리 하면
1. 會稽 이주 衛의 서북쪽에 있어야 하고
2. 江淮(양자강과 회수)의 북쪽에 있으며
3. 崇山 북쪽에서 동으로 흐르는 漢水 또는 河水의 북쪽에 있어야 하고
4. 淸河가 있는 곳에 있으며
5. 遼의 동쪽 즉 태행산맥의 동쪽에 있고 安平의 서쪽에 있어야 하는데
6. 석문과 帶方은 진을 치고 대적하고 있었으니 접하여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 東洋의 모든 사서에서 이보다 정확하게 대방을 밝힐 수는 없을 것이라 본다. 왜냐하면 漢族의 正史와 '三國史記'에서 밝혀졌기 때문이다.
대방은 태행산맥의 동쪽이며 안평의 서쪽 석문 유역으로 표기하든지 石門接帶方으로 하든지 하면 될 것이다.
石門의 바로 남쪽에는 贊皇(地名찬황;西安平)이 있고 石城이 있고 樂山이 있다.
또한 '삼국지'에서 대방군은 요동군에서 분리되었음을 분명히 하였다.
자 ! 이제 지도상에서 대방의 위치를 확인해보시고 이보다 더 나은 대방에 관련된 과학적인 자료가 나오길 고대합니다
< 대방의 위치도 >
이지도는 고지도인 "우적도" < 송나라(700~800전)때 만들어진 고지도로 대만 영인본 > 와 송본지리지장도, 중국군사지도를 추적하여 확인한 지명중 일부이다
▣ 맺음말 : 꼭 한마디 하고 싶어 올리는 글이나 읽어보시지는 말아주시길 ~ ~ (^.^)
이러한 얘기를 한다는 자체가 답답한 노릇이나 기존 강단 사학자들에게 한가지 드리고 싶은 말이 있다
도대체 사서의 기록은 지울 수가 없을 진데 동양의 모든 사서를 펴놓고 한번 공통되는 부분만 가지고 우리역사를 비교검토 해보라는 부탁이다.
어찌 지금 가르키는 역사책을 우리역사라고 가르킬 수 있는 가 ?
매국보다 더한 짓이다.
그리고 공부들 좀 했으면 좋겠다. 공부 즉 연구를 좀 하고 난 후 두려워 하지 말고 발표를 해라
나의 역사를 말하는데 왜 일본민족과 중국민족의 눈치를 보며 일제식민사학의 잔재를 떨쳐 버리지 못하는 가
"창피한 줄 알아야 한다"
"포트리스 용어"를 한번 인용한다. "알면서도 밥줄 떨어질까 말 안하는 바보탱이 들 ~ "
< 참고 지도 >
요동 요서(遼東 遼西)
1.8세기 이전 "요동(遼東)은 "산서성(山西省) 요(遼)의 동쪽을 의미한다 !
< 8세기 이전 "요동(遼東)은 "산서성(山西省) 요(遼)의 동쪽"을 의미한다 >
- 8세기 이전의 요동, 요서의 기준점은 요(遼)이다.(기준성 방향언어)
< 8세기 이전 요동, 요서의 기준점 "요" >
요동, 요서를 부르는 기준점은 동이국가와 장안 중심의 지나족(한부족)국가 경계 지역에 있고 고구려, 백제의 위치를 밝혀 줄 중요한 기준점 이므로 우리민족사를 정리하기 위해서 시대별로 반드시 밝혀야 한다
< 요동, 요서의 중요성 >
* B.C 5세기 연(燕)나라와 조선(古朝鮮)의 경계와 위치를 알 수 있다.
* 고구려 서쪽 경계와 고구려 초기 및 말기 위치를 알 수 있다.
* 백제의 위치와 수도 한성과 웅진 위치를 알 수 있다.
* 대방(帶方)의 위치를 알 수 있다.
* 서안평(西安平) 위치를 밝혀 고구려 서쪽과 요(遼)나라 수도 위치를 알 수 있다.
< 연(燕)과 요동(遼東) >
① BC 5세기 요동은『사기』권69 소진(蘇秦)의 기록으로 위치를 알 수 있다.
# 일부한자 지원이 않되어 공란으로 나타나는 점 이해바랍니다 !
"연(燕)의 동서남북 기록"
東有朝鮮遼東
北有林胡樓煩(樓煩屬雁門郡 林胡國名朔嵐己北)
西有雲中九原(雲中九原秦曰九原郡漢曰五原郡雲中城內楡林縣九原郡在楡林縣西界)
南有호타易水( 出鹵城)
㉠ 동유조선요동(東有 朝鮮 遼東 : 동쪽에는 조선 요동이 있다)
㉡ 북유임호누번(北有 林胡 樓煩 : 북쪽에는 임호 누번이 있다)
㉢ 서유운중구원(西有 雲中 九原 : 서쪽에는 운중 구원이 있다)
㉣ 남유호타역수(南有 호타 易水 : 남쪽에는 호타 역수가 있다)
이중에서 누번속안문(樓煩屬雁門 : 누번은 안문에 속하여 있다)과
임호삭람지북(林胡朔嵐之北 : 임호는 삭과 람의 북쪽에 있다)과
구원개오원(九原改五原 : 구원을 오원으로 바뀌었다)과
호타출로성(호타出鹵城 : 호타는 노성에서 출발하였다)
위와 같이 각 방향 마다 2개의 명칭이 있어 "연"강역을 나타내고 있다.
어느 나라를 나타낼 때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 위치를 나타내는 방법인데 영역과는 상관없다.
둘째, 영역을 나타내는 방법인데 위치까지도 동시에 알 수 있다.
연의 기록에서 위치를 나타냈는지, 영역을 나타냈는지 밝혀야 한다.
연의 ㉡은 북쪽 표기에서 "임호"는 삭,람의 북쪽에 있고, "누번"은 안문에 속하여 있다고 했는데 안문은 동쪽에 있고 삭, 람은 서쪽에 있다.
㉢은 서쪽 표기이다. 운중과 구원이 있다고 했는데 현재 운중이 있을 뿐 구원은 없으나 구원과 유사한 지명이 북쪽에 "오원"이 있고 남쪽에 태원이 있는데 기록에서는 "구원"을 "오원"으로 변경했다 하는데 현재의 "오원"은 삭, 람, 안문의 서북쪽에 있으니 서쪽이 북쪽의 두 지점보다 더 북쪽에 있을 수는 없다고 본다.
그렇다면 구원을 오원으로 변경했다고 하는 것보다는 비슷한 태원(太原)이 매우 가까운 변형으로 볼 수 있다.
구(九)에서 대(大)로, 대(大)는 태(太)로 유사형태화(類似形態化)로 본다면 태원(太原)을 구원(九原)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
태원은 운중(雲中)의 남쪽에 있으니 가능성이 있다.
㉣은 남쪽 기록인데 역수(易水)와 호타출로성(호타出鹵城)이라 하였는데 현지도에 로성(潞城)이 있다. 노성 주변에서 역수와 비슷한 형태의 지명이 wenshu로 발음되는 문수(文水)가 있을 뿐인데 로성(潞城)의 서북쪽에 있다.
㉡㉢㉣에서 북쪽 서쪽 남쪽의 위치가 정하여 질 수 있는데
㉠의 동쪽은 조선과 요동(遼東)이라고 하였다.
조선은 국호인데 고조선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는데 기자가 살던 조선의 기(箕)땅으로 본다면 아래쪽에 둘 수 있으나 고조선의 기비(箕丕)나 위만 및 예군남여(南閭)의 위치를 보면 위쪽에 둘 수가 있다.
㉠㉡㉢㉣의 지명이 있는 곳에서 요동과 닮은 지명으로는 안문과 로성 사이의 요(遼)밖에 없는데 요에서 태행산맥까지는 요동(遼東)으로 표현될 수 있다.
산서성에 8개의 명칭을 배열하니 8각을 형성하고 이중에서 북쪽의 두 지점이 태행산맥(太行山脈)을 넘지 못하였기 때문에 동,서,남쪽이 산맥을 넘을 수가 없는 것이며 영역을 표기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8개 명칭중에서 삭, 람지북, 안문, 운중, 로성(鹵城)과 같은 로성(潞城)의 4개의 명칭이 자리를 잡으면 나머지는 결정되게 마련이다.
----------< 북쪽 >
------林胡-------樓煩
------朔 嵐------雁門
---雲中-+-----------+-朝鮮
서------|-----------|--------동
쪽------|-----------|--------쪽
---九原 +-----------+ 遼東
------?---------鹵城
-----易水
---------< 남쪽 >
이로서 연나라때 요동은 요 동쪽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 지도상 표시 >
< 우적도상 "요" >
태원 바로 및에 "요"가 있다
2.『사기』에서 진(秦)과 요동(遼東) - 진장성연구(秦長城硏究)
BC3세기 요동시점의 연구는 "진장성"에서 밝혀야 한다
(진장성은 104도-113도까지 진나라 때 축성된 성을 말한다 - 요의 서쪽(요서)에 있다)
# 여전히 한자가 일부지원 안되는 점 이해바랍니다 !
< 중국 군사지도상에서 만리장성 표시 >
- 노란선이 진시황의 장성이고
- 녹색선은 진시황 후대에 축성한 성인 것 같다
# 진시황의 장성은 서쪽의 임조('臨 : 감숙성) 강중(羌中)에서 남쪽의 북향호를 지나서 북쪽으로 하수를 지나 새(塞)와 음산(陰山 : 산서성)사이 까지이고 음산을 지나면 요동이다.
(西至臨 羌中 南至北嚮戶北據河爲塞 陰山至遼東)
(서지임조강중 남지북향호북거하위새병음산지요동)
# 지리지에 서쪽 하수(河水)에 음산현이 있다
(地理志西河有陰山縣)
(지리지서하유음산현)
#「사기」에 있는 진시황의 장성(長城)에 대한 기록인데 유적지가 있기 때문에 비교하여 보자.
(塞先代反 白浪反謂靈夏勝等州之北黃河 陰山在朔州北塞外 從河傍陰山 東至遼東 築長城爲北界)
(새선대반병백랑반위령하승등주지북황하 음산재삭주북새외 종하방음산 동지요동 축장성위북계)
현재 황하 서쪽은 감숙성에서 시작하여 령, 하, 승(靈 夏 勝)을 지나 북(北)황하 황석보(滑石堡)에서 동쪽으로 와서 한줄기는 남쪽으로 안문(雁門)까지 이르는 장성과 또 한줄기는 북쪽으로 마니산에 이르고 숭례(崇禮)를 거처 산해관에 이르는 장성이 있다.
진장성은 서쪽의 임조(감숙성)에서 시작하여 강, 역(羌 域)을 지나서 북쪽으로 황하(黃河)를 거쳐 음산(陰山) 근처에 이르고 음산(陰山)을 지나면 요동이다 라는 뜻이다
장안중심의 진이 장성을 음산 북쪽 장성을 먼저 축성했다면 남쪽에 장성을 구축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서쪽에서 안문(雁門)까지 장성이 있고 안문동쪽은 장성이 없고 그 동쪽에 태행(太行)산맥에 있다. 안문은 요와 같은 남북축상에 있으니 안문 동쪽을 요동이라고 할수 있을 것같다. 그리고 태행(太行)산맥 동서의 세력과 안문의 남북세력이 전혀 달랐기 때문에 축성(築城)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 진장성 부분 확대도 : "삭(朔)"북쪽 "음산(지도표시는 산음)" >
- 노란선 끝부분 바로 직전에 "삭(朔)"
- 노란선 끝부분에 "안문(관)"
- "삭" 북동쪽에 "음산(산음)"
→ 장성이 끝난부분이 바로 태행산맥이다
→ 장성 동쪽이 요동이라는 의미 아닌가 ?
분명한 것은 진장성은 안문(雁門)에서 끝나는 장성으로 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진시황 장성 기록과 일치하는 것은 임조에서 안문(雁門)에 도달하는 유적이 있다.
분명히 진장성은 기록과 일치하게 음산의 남쪽 안문에서 장성이 끝나며 동쪽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안문의 동쪽은 요의 동쪽으로 표기 할 수도 있다.
음산지요동(陰山至遼東)을 음산을 지나면 요동에 이른다고 해석된다.
음산과 요동에 대하여 본문(本文) 음산지요동(陰山至遼東)을 해석하여 놓기를 정의(正義) 음산동지요동(陰山東至遼東)이라 하였으므로 요동의 시발점을 어디로 보는가를 밝혀질 수 있게 하고 있다.
두 문장은 동자(東字)의 차이밖에 없지만 뜻은 많은 차이점을 두고 있는 것이다.
진장성(秦長城) 기록에서 요동이란 장성이 끝나는 삭, 안문의 동쪽을 요중심의 동쪽으로 표현한 것으로 볼수가 있을 것이다.
< 삭, 안문, 음산 위치 >
3.한과 요동(창해군으로 연구)
① BC.1세기 요동의 시점 연구는 한(漢) 창해군 연구에서 알 수 있다.
㉠ 원삭원년에 예왕 남여(濊王 南閭) 등이 우거를 배반하고 28만명을 데리고 요동군에 속하게 하니 무제는 그 땅을 창해군으로 하였다.
(元朔元年濊君南閭等畔右渠率二十八萬口詣遼東內屬武帝以其地爲蒼海郡 :『후한서』권85)
(원삭원년예군남여등반우거솔이십팔만구예요동내속무제이기지위창해군 :『후한서』권85)
㉡ 彭吳賈滅朝鮮置滄海之郡則燕齊之間靡然發動 :『사기』 권30
---팽오가멸조선치창해지군칙연제지간미연발동 :『사기』 권30
㉢ 彭吳穿穢貊朝鮮置滄海郡則燕齊之間靡然發動 :『한서』 권24
---팽오천예맥조선치창해군칙연제지간미연발동 :『한서』 권24
㉣ 東夷 君南閭等口二十八萬人降爲蒼海郡 :『후한서』 권85
---동이예군남여등구이십팔만인항위창해군 :『후한서』 권85
(武濟因文景之畜忿胡奧之害卽位數年嚴助朱買臣等招徠東 事兩奧"江淮之間"蕭然煩費矣 )
(무제인문경지축분호오지해즉위수년엄조주매신등초내동구사양오"강회지간"소연번비의 )
창해군은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남여(南閭) 등이 요동으로 이동한 지역을 창해군이라고 했을 수도 있고,
둘째는 남여 등이 살고 있는 지역을 명칭만 조선의 우거밑에서 한 무제로 바뀌였다고 볼 수도 있다.
어찌하든 창해군은 요동에 있으며 연제(燕齊) 사이에 있다는 것이다.
또한 『한서(漢書)』권 24 에 의하면 팽오가 예물로써 구멍을 뚫듯 매수하여 예맥조선에 창해군을 설치했다(팽오아예맥조선치창해군 : 彭吳穿穢貊朝鮮置滄海郡)고 하였으니 이동 한 것이 아니고 칭호만 변경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창해군이 바로 요동에 있다는 점이다.
이제 창해군의 위치가 과연 어디일까 ?
『한서』권 24 에서 창해군을 설치하니 연제(燕齊)사이에서 소요가 일어났다.
(치 창해군즉연제지간마연발동 : 置滄海郡則燕齊之間靡然發動)고 했다.
창해군을 설치하는데 왜 연, 제(燕 齊)(산서성과 산동성)사이에서 소요가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조선땅 안에 창해군이 설치되는데 다른 부족이 가만히 있겠는가 그러니 소요가 일어날 수밖에 없는데 연(燕)이 전항에서 살펴보았듯이 산서성에 있고 제(齊)가 산동성에 있었으니 그 사이에 창해가 바로 창해군이라 할 수 있고 창해의 서쪽에 요동의 기준(基準)점이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창해의 잔영 창과 신해 서쪽에는 태행산맥이 있고 그 서쪽에 요(遼)가 있다.
요의 동쪽에 창해가 있으니 창해군으로 요동의 기준(基準)점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4.고구리(高句麗)와 요동(遼東)
삼국지, 후한서, 송서, 양서, 남사에서 고구리(려음"리")는 요동에 있다고 했다.
그런데 요동지동천리(遼東之東千餘里)라 하여 '요동에서 천여리 떨어져서 고구리가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후한서』에서 우 북평, 어양, 상곡, 태원(右 北平 漁陽 上谷 太原)을 평정하였다고 하였고, 안평의 서쪽를 평정하였다고 하였으며,
『위서』에는 광주(光州)를, 『구당서』에서는 항성(項城)과 은산(銀山)을 기록하고 있는데 은산, 북평, 서안평(銀山, 北平(阜平), 西安平)은 하북성에, 광주, 항성(光州 項城) 은 하남성에, 태원(太原)은 산서성에 있다.
요동에 고구리가 있다면 북평 은산 신성 의 하북성,
광주 항성의 하남성도 요동이어야 하고
태원도 요동에 가까움을 말하는 것이다.
당태종 이전의 고구리는 요에 가까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당(唐)태종 이전의 고구리는 요동지동천여리라는 기록으로 보면 은산, 용도(북평), 신성, 서안평(銀山, 甬道(北平), 新城, 西安平) 등에서 서쪽으로 천리(千里)를 가면 요동의 기점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은산(銀山)에서 천리(千里)에 가까운 곳은 바로 산서성 요(遼)가 있다.
요동의 시점이 아닌가 그러니 연(燕)과 조선, 진장성(秦長城)과 요동,
한과 창해군에서 나타난 대로 음산보다 서쪽으로 요동 기점이 갈 수는 없다.
그러므로 천여리라는 말은 그대로 믿는 것보다 요동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 보면 될 것이다.
어떤 이유이든 은산, 용도(북평), 신성, 서안평, 항성, 광주보다 요동의 기점은 서쪽에 있어야 한다.
이것은 태행산맥의 서쪽에 요동의 기점이 있다는 연, 진장성, 창해지군 사건과 동일한 뜻이라 할 수 있다.
5.맥제(백제)와 요동, 요서(遼東 遼西)
지금까지 연과 조선,
진장성과 요동,
창해지군, 요동고구리에서 요동의 기점을 논하여 보았는데,
연에서는 요의 동쪽을 요동으로,
진장성에서는 음산의 동쪽을,
창해지군에서는 창(滄)의 서쪽에 기점이 있을 것이다.
고구리에서는 은산, 용도(북평), 안평의 서쪽에 기점이 있을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위의 여러 가지는 요동에 관해서만 말하였지 요서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다.
유일하게 맥제는 요동과 요서를 동시에 기록하고 있다.
『양서』와 『남사』의 기록에서
"요동백제역거유요서진평2군지(遼東百濟亦據有遼西晋平2郡地)"
(송서(宋書) : 요동백제유요서백제소치위지진평군진평현,
---------------遼東百濟有遼西百濟所治謂之晋平郡晋平縣으로 기록했음)"
요서와 요동에 대해서 고찰하여 보면 맥제(百濟)가 요동에 있으며 요서에는 진평이군(晋平二郡)이 있을 뿐이라고 하였다.
요동(遼東)에 있어야 할 지명 기록은,
『남제서』에서 광양, 조선, 대방, 광능, 청하, 낙랑, 성양(廣陽, 朝鮮, 帶方, 廣陵, 淸河, 樂浪, 城陽)이 기록되어 있고,
『구당서』에는 항성, 웅진, 대산, 동명, 박성, 제성, 백마(項城, 熊津, 大山, 東明, 薄城, 諸城, 白馬) 등 기록이 있으며,
『삼국사기』맥제본기에는 석문, 평원, 황산, 사자하, 숭산, 독산, 동성, 잠산. 덕안(石門, 平原, 黃山, 泗 河, 崇山, 獨山, 桐城, 岑山. 德安)등이 요동에 있어야 한다.
요서의 진평이군(晋平二郡)은 산서성 요의 서쪽에는 진성(晉城)과 고평(高平)이 있어 한자씩을 취한 지명이다.
요동 지명은 하북성에 석문, 청하, 평원(石門, 淸河, 平原)이 있고,
산동성(山東省)에는 동명, 황산, 박산, 제성, 백마, 사자하(東明, 黃山, 博山, 諸城, 白馬, 泗 河)가 있으며,
하남성에는 항성(項城)이, 안휘성에는 독산, 동성, 잠산(獨山, 桐城, 岑山)이,
강서성에는 덕안(德安)이 있다.
분명히 태행산맥의 동서를 가름하는 것이 요동과 요서로 볼 수 있는데
오직 요서에 진평이군이 있다고 했는데 요서의 시발점을 진평이군(晋平二郡)으로 볼 수 있고 요동의 시발점은 음산지요동(陰山之遼東)이었다.
이를 지도상에 맞추어 보면 동경 113도를 중심으로 서쪽에 음산, 진평, 고평(陰山, 晉城, 高平)이 있었다.
태행산맥의 서쪽에 요(遼)가 있는데 음산,진평, 고평과는 동경으로 0.5도의 차이 밖에 없다. 이것은 연(燕)에서 요(遼)의 동쪽을 요동(遼東)이라 하였음을 입증하는 것이 될 것이다.
이제는 서기 9세기 이전의 요동과 요서는 요(遼)의 동쪽을 요동(遼東),
요의 서쪽을 요서(遼西)로 하고 있음을 분명히 알고,
연(燕)나라 이후의 요동(遼東)과 혼동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 요나라 이전 요동과 요서는 산서성의 요(遼)중심의 동서를 말한다.
------------------------------------- 구요동 구요서(舊遼東 舊遼西)
※ 요나라 이후 遼東과 遼西는 요령성의 遼河의 東西를 말한다.
------------------------------------- 신요동 신요서(新遼東 新遼西)
6.요동, 요서를 혼돈하는 이유
< 왜 遼가 遼東 遼西의 기점이 됐을까 ? >
① 진장성에서 하수(河水)까지의 중앙의 지점에 있다.
② 태행산맥(太行山脈)이 서쪽으로 튀어나온 두 지점에 제일 가까운 지명이다.
③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지나족(支那族 :漢部族)과 조선족의 격전지이기 때문에 요충지역이란 뜻이 아니겠는가 ?
④ 태행산맥(太行山脈)의 옛이름이 서개마대산(西蓋馬大山)이다.
그 명칭을 다 쓸수는 없어서 약칭이 필요했던 것이다.
⑤ 요동요서의 표현은 바로 국경 즉 전역(戰域)의 표시인 것이다.
요동에는 조선족의 국가가 요서에는 지나족(한부족)의 국가가 있어 대치되었으므로 자주 거론이 되었던 것이다.
< 왜 遼東, 遼西가 혼돈되었는가 ? >
요(遼)나라가 907년부터 1124년까지 존재하면서 요동을 기록함에 있어 요동과 9세기 이전 요동기록에서 요동(遼東) 시발점에 대한 혼돈을 촉발 시켰던 것이다.
요나라 상경도 상경임황부(上京道 上京臨潢府)는 한나라때의 요동군 서안평(西安平)의 땅에 있었으니 요나라는 요동에 세웠던 것이다.
그리고 요나라의 동경부(東京府)는 요하(遼河)의 서쪽에 있었다.
그리고서 요하(遼河)의 동쪽을 요나라의 동쪽이라하고 요동(遼東)이라 불렀다.
그래서 요동반도라는 지역명칭이 생긴 것이다.
(고구리의 땅일 때는 남옥저의 명칭이었다)
요(遼)나라 이후의 모든 사람들이 요나라 이전의 요동을 찾으려 하지 않고,
요나라 동쪽인 요동으로 9세기 이전 역사에서 요동으로 표현하게 되니 10세기 이후 요동과 혼돈하게 되였고 지금은 遼나라 이전의 요동 요서와 遼나라 이후의 요동을 거듭 혼돈하고 있는 것이다.
혼돈의 시작은 907년 요나라 건국부터 였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전 요동은 산서성 요의 동쪽을 요동이라 하였다.
< 산서성 요(遼 : 좌권)를 중심으로 동쪽에 우리역사와 관계가 깊은 지명들 >
< 요(遼:左權)의 동쪽 >
광영(광녕) 독산성 석문 은산 밀운 북평 양향 탁 역 고안 안차 용성 신성 신농 수성 창주 신해 안평 청하 평원 은 황산 대산(대산) 동명 연주 운주 사수 치주 청주 제성 내주 용도(북평:용도) 고대인성( 주구점) 귀덕 서화 항성 몽성 해 풍 우 서 영국 선성 함산 독산 회영
(廣靈(廣 ) 獨山城 石門 銀山 密雲 北平 良鄕 易 固安 安次 容城 新城 新農 遂城 滄州 新海 安平 淸河 平原 恩 黃山 岱山(大山) 東明 州 州 泗水 淄州 靑州 諸城 萊州) 甬道(北平:龍道) 古代人城( 주구점) 歸德 西華 項城 蒙城 海 豊 虞 徐 寧國 宣城 含山 獨山 懷寧 )
< 요의 중심과 서쪽 >
숭산 진성 고평 여성 태원 요 남 운중 안문 대 삭 음산 오대산
특히 안평의 서쪽(서안평)에 찬황이 있다.
(崇山 晉城 高平 黎城 太原 遼 嵐 雲中 雁門 代 朔 陰山 五臺山
특히 안평의 서쪽(西安平)에 贊皇이 있다.)
천문학으로 본 삼국의 위치
▣ 고구려, 백제, 신라가 중국대륙에 있었다.
사서에 나오는 사항을 언급하기 전에 쉬운 접근을 위하여 역사학자가 아닌 서울대 천체물리학과 교수인 박창범 교수가 삼국이 대륙에 있었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입증한 논문이 있어 먼저 소개코자 한다
▣ '94년 4월 서울대 천체물리학과 박창범 교수의 발표 논문내용
① 일식기록
지구상의 일식은 특정지역에서만 관측이 가능하므로 동시대에 기록을 남긴 관측자의 위치를 컴퓨터 계산을 통하여 확인 하므로써 그국가의 위치를 추정할 수 있다.
이는 전세계적으로 일반화된 방법으로 독자의 관측기록이 있다면 그 당시 나라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 아주 정확한 방법이며 이론의 여지가 없는 부분이다
이 사실은 일본학자에 의하여 먼저 연구가 되었었는데 삼국사기 일식기록 검증결과 3국이 AD6~7세기 이전에는 중국대륙에 있는 것으로 나타나자 삼국사기는 중국의 기록을 차용하여 기록한 것으로 믿을 바가 못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삼국사기의 일식 등 천체관측 기록은 애석하게도 중국기록에도 없는 우리 독자의 기록이라는 것을 모르고 하는 소리였음을 서울대 박창범 교수가 증빙한 것이다.
② 홍수기록
홍수기록 역시 전세계적인 평균통계치를 분석해 보면 기록상에 나오는 국가가 어느지역에 있었는 지 추정이 가능하다
4~5월에 한반도에 홍수가 난적이 있는가 ? 메뚜기 떼의 기록이 있는가 ?
하여간 상식적으로 맞지 않는 자연현상들이 너무 많다
그외에 다른 사항들도 있으나 이두가지만 참고를 해보아도 우리삼국시대 역사의 진실이 과연 무엇인지 대충 짐작은 할 수 있으며 동 결과는 이 지구상의 어느 학자가 분석을 하여도 똑같은 결과가 나온다는 것이다
이사실을 부정하기 위한 온갖방법이 동원되고 있으나 부정하면 부정할수록 이사실의 개관적인 검증만 더하여 준다는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진실은 아무리 부정해도 다시 진실로 돌아온다 "
우리나라에 정신 차려야 할 몇몇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다
천문학으로 본 삼국시대-2
여기서 한가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실증을 대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과학적인 자료, 즉 그 실증을 댄 때가 1994년 이었다
그때도 그들은 말이 없었고 지금도 말이없다
http://www.khss.or.kr/korean/journal/browse/index.html
- 한국과학사학회
- 한국과학사학회지 보기
- 검색란 "박창범" 입력후 검색
(1) "박창범 , 라대일 ( Chang Bom Park , Dai Le La ), 논문 : 삼국시대 천문현상 기록의 독자 관측사실 검증 ( Articles : Confirmation and Historical Consequences of Astronomical Records in Samguksagi ), 16권 2호 (1994), 167."
(2) "박창범 ( Chang Bom Park ), 논문 : 일본 고대 일식기록의 (日蝕記錄) 분석 ( Articles : Analysis of Japanese Historical Solar Eclipse Records ), 18권 2호 (1996), 155."
(1)번의 논문이 나오게 된 이유는
일본인 반도충부(飯島忠夫)라는 사람이 삼국사기 기록은 중국기록을 베껴 썻기 때문에 "위서"라는 것을 증빙한 내용에 대하여 과학적으로 다시 조사를 해보니 "차용이 아닌 독자 기록"이며 최적 관측지를 추적하니 5세기 이전에는 중국대륙에 있었고 7세기 이후에는 반도에도 나온다는 것이다.
일식 실현율 엮시 평균 80%대로 기록의 정확성을 증빙해주고 있다.
차용이 아닌 독자기록이며 정확히 기록한 사서라는 것이다.
- 신라상대 : BC 54 ~ AD256년 - 84%(19개중 16개 실현)
- 신라하대 : 787 ~ 911 - 90%(10개중 9개 실현)
- 백제 : 77%(26개중 20개 실현)
- 고구려 : 73%(11개중 8개 실현)
중국 당나라(618 ~ 906년) 일식실현률은 77%이다(108개중 83개)
최적관측자의 위치가 중국대륙으로 나온다.
< 신라 후기 및 고려 >
< 일식기록수 >
그래서 도대체 일본사람들의 사서는 얼마나 정확한가 하여 다시 분석해보니
(2) 번 논문이 나오게 된 것이다 !
- 784년 이전 일식 실현율 33%(81개중 27개 실현)
- 950년 ~ 1550년 72.5%(189개중 137개 실현)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
일본의 고대사는 정확도가 떨어진다는 것이고 784년이전 최적관측지는 애석하게도 대만남쪽 남지나해상으로 나온다. 무슨말인가 하면 일본 고대사가 조작되었다는 반증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을 분석을 잘못했다고 다시 분석을 해야된다고 노력들을 하는 사람들의 열정은 이해할만하다.
과학시대에 과학적인 증빙을 요구한다면 누가답을 하겠는가 ?
그것은 과학자다
박교수는 서울대학 교수이지만 천체물리학에 있어 전세계적으로 상당한 지명도가 있는 학자로 알고 있다
kbs 역사스페셜 인터뷰 내용을 본사람도 많을 것이다
일본인들의 허무맹랑한 논리를 1925년 이후 처음으로 밝힌 분이 박창범 교수다
자랑스러워 하지는 못할지언정
"잘못되었을 가능성을 찾기위해 혼신의 노력(?)들을 하고있다"
무엇이 두려운가?
아무리 연구하고 조사해도 있는 기록을 그대로 가져다 컴퓨터에 입력하여 검증한 자료인데 이이상 더정확하게 어떻게 조사한다는 건지 않타깝다. 물론 더 좋은 방법이 나오면 얼마나 좋을까 ?
다 증빙하고 할려면 일년은 걸릴것이다
사서를 보고 일식기록을 확인하고 다시 컴퓨터에 넣어 계산하고 ~ ~
일식기록을 통한 강역 추정은 전세계적으로 일반화된 방법 아닌가 ?(내가 잘못알고 있는 건지 ?)
역사를 모르는 과학자가 기록을 잘못보았을 가능성에 대하여 의문이 있는 사람은 걱정들 붙들어 매라고 말하고 싶다
기존의 논문의 잘못된 점까지 이미 분석이 되어있으며(베껴쓰는 풍토가 사라지겠는가? - 그러니 발전들이 없지 ^.^)
자료를 뽑는 과정에 상당한 노력이 여러곳에서 있었음을 밝히고 싶다
설마 서울대 천문학과 보다 더좋은 설비를 가진 개인은 없겠지 ~
일일이 언제 설득시켜가며 우리역사를 찾는다 말인고 ~
※ 논문외에 참고할 자료
< "동아시아 일식도" >
- BC800년부터 동아시아의 모든 일식을 개개건별로 중국, 우리나라, 일본사서를 전부 분석해 놓은 책
- 서울대학교 출판부
- 저자 : 박창범
- 발행일자 : 1999.11.30
< 밝혀질 우리역사 >
- 오재성 선생님이 국내의 일식관련 모든 논문을 분석
- 관련 페이지 : 435 ~ 462쪽
- 1997년 8.15일 발행
- 발행처 : 리민족사 연구회
한자가 많아 한자에 익숙한 분에게만 권하며
필요한분은 이메일 주시면 카피하여 우편우송해 주겠습니다
<< 지금까지의 연구현황 >>
< 일인 반도충부(日人 飯島忠夫) >
- 연도 : 1925
- 주제 : 일식, 태백주견(日蝕, 太白晝見 : 낮에 금성이 보임)
- 독자연구 여부 : 독자연구
- 관측지설정 : 한반도에서 관측한 것으로 전제하에 연구
- 독자관측 여부 : 한반도에서 볼수 없는 기록이니 중국기록을 차용한 위서
- 일식으로 관측지 연구 : 관측지 연구 안함
☞ 연구목적이 삼국사기가 "위서"임을 증빙하는데 있었음
< 홍이섭 >
- 연도 : 1944
- 주제 : 일식, 태백주견(日蝕, 太白晝見 : 낮에 금성이 보임)
- 독자연구 여부 : 반도논문을 차용 (독자안함)
- 관측지설정 : 한반도에서 관측한 것으로 전제하에 연구(한반도 설정)
- 독자관측 여부 : 독자관측기록도 있고 중국기록 차용도 하였음
- 일식으로 관측지 연구 : 관측지 연구 안함
< 김용운 >
- 연도 : 1977
- 주제 : 일식, 태백주견(日蝕, 太白晝見 : 낮에 금성이 보임)
- 독자연구 여부 : 반도논문을 반박
- 관측지설정 : 한반도 설정
- 독자관측 여부 : 독자기록(차용아님)
- 일식으로 관측지 연구 : 관측지 연구 안함
< 현정준 >
- 연도 : 1979
- 주제 : 일식, 태백주견(日蝕, 太白晝見 : 낮에 금성이 보임)
- 독자연구 여부 : 독자연구
- 관측지설정 : 한반도 설정
- 독자관측 여부 : 독자기록
- 일식으로 관측지 연구 : 관측지 연구 안함
< 신형식 >
- 연도 : 1981
- 주제 : 일식, 태백주견(日蝕, 太白晝見 : 낮에 금성이 보임)
- 독자연구 여부 : 前학자의 논문인용(홍이섭의 글을 반도충부의 글로 소개)
- 관측지설정 : 한반도 설정
- 일식으로 관측지 연구 : 관측지 연구 안함
< 박성래 >
- 연도 : 1992
- 주제 : 일식, 태백주견(日蝕, 太白晝見 : 낮에 금성이 보임)
- 독자연구 여부 : 반도설 차용(太白晝見 관심없음)
- 관측지설정 : 한반도 설정
- 독자관측 여부 : 초기의문
- 일식으로 관측지 연구 : 관측지 연구 안함
< 일인 제등국치(日人 齊藤國治) >
- 연도 : 1985
- 주제 : 일식, 태백주견(日蝕, 太白晝見 : 낮에 금성이 보임)
- 독자연구 여부 : 독자연구
- 관측지설정 : 한반도 설정
- 독자관측 여부 : 차용도 하고 독자기록
- 일식으로 관측지 연구 : 관측지 연구 안함
< 박창범 >
- 연도 : 1994
- 주제 : 일식, 태백주견(日蝕, 太白晝見 : 낮에 금성이 보임)
- 독자연구 여부 : 독자연구
- 관측지설정 : 관측지 설정을 하지 않고 관측위치 추적
- 독자관측 여부 : 독자기록
- 일식으로 관측지 연구 : 관측지 연구(대륙관측)
지금까지 일식의 실현여부에 대한 연구가 아니라 일식을 관측한 곳이 어디인가를 연구한 것은 박창범 교수가 처음이다.
일본 사람들의 영향에서 제발 벗어나야 한다 !
지금은 2001년 아닌가 ?
자연현상 기록을 이용한 삼국의 위치 고증
- 서울대 천체물리학과 교수 박창범 -
박창범 교수 강의 내용(세종문화회관)
고려시대에 집필된 김부식의 三國史記와 일연의 三國遺史에는 삼국시대에 일어난 日蝕이 67회, 行星운동의 이상현상이 40회, 彗星의 출현이 63회, 流星과 隕石의 낙하가 42회, 기타 14회 등 총 226회의 많은 천체 현상들이 기록되어 있다.
중국과 일본의 고대 사서에도 나타나는 이러한 천문현상 기록들은 각 국 고대과학의 수준과 역사를 가늠하는 척도로서 인식되기도 한다.
천문현상에 대한 우리의 고대 기록들은 그동안 국내외 학자들에 의하여 연구되어 왔다. 그런데 이 천문현상 기록들은 순수 과학적인 그리고 과학사적인 가치뿐만 아니라, 고대 역사학에도 그 응용가치가 있다.
그 이유는 천체에 대한 기록을 당시 주변 국가들의 기록과 비교함으로써 과학 문물의 흐름을 알 수 있고, 또한 특정 국가가 남긴 천체 관측 기록을 분석하여 정세변화, 강역의 위치 등을 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천문현상 기록뿐만 아니라, 地震, 洪水, 颱風 등의 기상학적, 지질학적 기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자연현상 기록은 다양한 가치를 갖는다.
이 기록들을 이용하여 본문에서 논의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나라 고대 삼국의 위치를 추적하는 것이다.
천체 관측 기록으로부터 관측을 수행한 나라의 위치를 알아볼 수 있다는 생각은 일식과 같은 현상의 경우 달 그림자가 지구상의 모든 곳에 드리워지지 않기 때문에, 일부 지역에서만 蝕의 진행을 볼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또한 여러 해 동안 한 장소에서 일어난 일식들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위치가 관측자의 위치, 곧 그 국가의 위치가 되리라는 것이다.
본 연구에서는 일식을 이용한 삼국의 위치 고증에 두 가지 방법을 사용하였다.
첫째는
특정 국가가 기록한 일식들에 대응하는 천체역학적으로 계산한 실제 일식들의 진행상황을 동아시아 전역에서 조사하여, 그 일식들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최적 관측지를 찾는 방법이다.
다음 쪽에 나오는 세 도표의 평균 식분도는 신라(24회)와 백제(19회)와 고구려(8회)에서 기록한 일식 중 동아시아에서 관측할 수 있는 일식들의 평균식분을 보여준다. 윤곽선 안쪽 지역으로 갈수록 평균식분이 크며, 이것은 곧 그 기록을 남긴 국가의 위치를 암시한다고 할 수 있다.
흥미롭게도 삼국의 일식을 가장 잘 관측할 수 있는 곳이, 세 경우 모두 한반도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일식 기록 횟수가 적은 고구려의 경우에는 최적 관측지가 확실하게 나타나지는 않지만, 대체로 백제나 신라의 경우보다 북쪽에 치우쳐 있음을 알 수 있다.
최적 관측지가 확실히 보이는 백제와 신라의 경우에는 각국의 관측자가 발해만과 양자강 유역에 각각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삼국의 위치를 찾기 위한 두 번째 방법으로는
앞의 방법과 정반대로 개개의 일식을 볼 수 없는 지역을 제거해 나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특정 국가가 기록한 일식을 모두 볼 수 있는 지역을 바로 그 국가의 위치로 생각하는 것이다.
다음 쪽의 세 도표에서 잔 점들을 찍은 곳이 바로 이런 지역이고, 바깥으로 나갈수록 1개, 2개 또는 그 이상의 일식들은 기록이 되어있음에도 볼 수 없는 지역이다.
분명한 결론을 내릴 수 있는 백제와 신라의 경우 기록된 일식을 많이 볼 수 있는 지역이 앞에서 보인 최적 관측지와 일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신라의 경우 관측자가 경주에 있다면, 동아시아에서 관측 가능한 24개 일식 중 2개를 전혀 볼 수 없다.
백제와 신라가 현재 중국의 동쪽 지방에 있었다는 생각은 최근 일부 재야 사학가들에게서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본 연구의 결과는 그들의 주장과 상당히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천체 관측만을 이용한 본 연구 내용에서만 생각하면, 왜 기존 역사관과 달리 백제와 신라의 위치가 중국대륙에 있다는 결과가 나왔는가에 대하여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삼국사기에 실린 일식기록이 중국기록을 차용한 것일 가능성이다.
삼국의 천체관측 기록은 일제 식민지 시대부터 일본학자들에 의해서 꾸준히 연구되어왔다.
천체역학적 계산과 사료 비교를 통해 그들은 적어도 5세기까지의 삼국사기 천문현상 기록들은 중국기록을 그대로 베낀 것이라고 결론짓고 있다.
1910년대에서 현재까지의 이러한 연구 결과는 국내외적으로 상당한 인정을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국내에서 출판되고 있는 과학사 서적들에도 이런 주장이 긍정적으로 언급되고 있으며, 구미에서는 사실로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일본학자들의 주장에는 논리적 타당성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제는 같은 문제에 대한 국내 학자들의 연구가 필요한 시점에 와 있다고 할 수 있다.
둘째는
백제와 신라가 실제로 중국대륙 동부에 있었을 가능성이다. 따라서 일식기록도 삼국의 독자적인 천체 관측 기록들일 가능성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본 연구의 결과는 삼국의 위치가 분명 중국대륙에 있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따라서 현재 알려져 있는 우리나라의 고대역사는 심하게 왜곡된 것이고, 바로 잡혀야만 하는 것이다.
우리의 역사를 진실에서 벗어나 異민족이 보고 싶은 대로 왜곡시켜 후손에게 전해서는 더욱 안 될 것이다.
“살수대첩 현장은 중국 요동성 일대”
<조선일보 2001년6월11일(月) NK리포트 41면>
명장 을지문덕 장군이 이끄는 고구려군이 수(隋)나라 별동대 30여만 대군을 일패도지(一敗塗地)시킨 살수대첩. 세계 전사에 큰 자취를 남긴 이 전역(戰役)에 대한 북한의 역사기술은 우리와 사뭇 다르다.
살수대첩이 있었던 수나라의 제2차 고구려 침공(612년)으로 쌍방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역사의 무대가 한반도 북부지역이 아니라 모두 지금의 압록강 이북, 즉 중국 요령성 일대라는 것이다. 살수대첩의 현장인 살수(薩水)는 현재 평안남북도를 남북으로 가르며 황해로 흘러드는 청천강이 아니며, 전사에 등장하는 평양성이나 압록수도 지금의 평양이나 압록강이 아니라는 것이 북한의 해석이다.
북한 통사인 『조선전사』 제3권(1979년) '고구려사'에 따르면 살수대첩의 살수는 현재 요동반도에 있는 대양하(大洋河)의 지류인 소자하이다. 또한 수나라 별동대가 평양성을 향해 떠날 때 건넜던 압록수는 소자하 위쪽에 있는 오늘날의 태자하 하류(일명 오렬수)이며, 그들이 점령하고자 했던 평양성도 압록강 북쪽에 있던 봉황성(현재 봉성)이었다.
당시 고구려에는 수도 평양 외에 평양의 북쪽(북평양)과 남쪽(남평양)에 각각 부수도(副首都)를 가지고 있었는데 봉황성은 북평양이었고, 봉황성이란 "임금이 있는 성"이라는 뜻이며 고구려 왕이 있던 왕성이었기 때문에 수나라가 이곳을 평양(수도)으로 잘못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역사기록에 따르면 살수는 평양성과 압록수 사이에 있었고 오골성(현재 수암) 동쪽, 평양성(봉황성) 서쪽을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강이었고, 수 나라 장수 우문술이 살수를 건널 때 서쪽에서 동쪽으로 건넜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이 일대에서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강은 대양하의 지류인 소자하뿐이다.
그러나 1971년 평양에서 발간된 『력사사전』 제2권에는 살수가 청천강으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