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서울 도성의 봉수제도
(강연 내용 축약)
고대의 봉수통신 《삼국유사》의 〈가락국기〉에 보면 ‘적선이 발견되면 붉은 깃발을 올리고 밤에는 횃불을 올렸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고대로부터 변방에 외침이 있을 때에는 군사적 전달방법으로 봉화를 활용하였던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송나라 사신 서긍이 그의 견문록 〈고려도경〉에서 ‘사신들이 탄 배가 흑산도에 이르자 산꼭대기에서 횃불이 밝혀지는 광경을 목격했으며 왕성에 이르기까지 계속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상당히 발달된 봉수체계를 갖추어 야화(夜火)·주연(晝煙)의 방법으로 변경과 해안지방의 경계상황을 파악하고 전달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의 봉수제도 ① 새 왕조의 개창 고려 말 왜구의 잦은 침범으로 민심은 흉훙하고 국가기강이 흔들리는 정치적 상황에서 동북면에서 활동하고 있던 이성계가 중앙 정계에 진출한다. 황산대첩에서 발호하는 왜구의 기세를 꺾은 다음, 위화도회군으로 정계를 장악한 이성계는 고려 왕조의 운명을 접고 조선을 개국하여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게 되었다. ② 세종대왕의 봉수제도 개혁 태종의 탄탄한 권력기반 위에 등극한 세종은 국방개혁의 차원에서 북방의 변경과 해안지방의 방위태세를 강화하기 위해 전국의 봉수처에 연대를 높이 쌓고 화기와 병기를 비치하여 주야로 돈대의 수비를 보강하면서 의정부와 병조로 하여금 봉수망을 엄격히 관장하도록 하였다. 세종27년에는 봉수시설의 개수와 봉수꾼 및 수비대원에 대한 상벌을 대명률에 따라 엄격히 시행토록 하는 <봉수구폐책(烽燧救弊策)>을 시행하였다. 뒤이어 세조 때에는 경국대전(續六典)에 따라 전국에 산재한 연변과 내지의 모든 봉수가 도성의 목멱산 경(京)봉수에 연결되도록 직·간봉제를 확립하는 법적 근거를 마련하기도 했다. ③ 봉수제도의 문제점과 폐지 변경지역의 위급한 정황을 신속히 중앙정부에 전달하는 봉수체계의 장점은 운용과정의 장애요인 발생으로 효과적인 대처능력에 문제점이 야기되기도 하였다. 장마와 폭풍 또는 홍수와 폭설 등 기상악화나 야생동물의 급습 그리고 전염병 발생 등으로 인하여 수비대의 현장관리에 문제점이 많았다. 특히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봉수제도의 기능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보완대책이 마련되기도 하였으나, 조선 말기에 이르러 전신·전보·전화와 같은 새로운 과학적 전달 수단이 등장함으로 재래식 전달체계인 봉수제도와 파발은 더 이상 국방시설로서의 존재 가치가 없어져 갑오경장을 계기로 폐지되어 과거 유산으로 남게 되었다.
서울 정도600주년기념 봉수대 발굴과 복원 조선 태조3년에 도읍을 한양으로 옮긴 뒤 설치된 목멱산 봉수대는 임란 때 훼손되고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서울시민의 관심에서 사라졌으며 6.25동란으로 거의 자취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현재는 서울정도600년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복원이 추진되어 《청구도》 등 관련 자료를 고증하여 남산에 1개소(서울시 기념물 제14호)와 무악 봉수대(제13호) 그리고 봉화산 봉화대(제15호)를 복원하였다. - 정리 : 부회장 원흥식 -
첫댓글 공부 잘 했습니다. 전체 원고를 읽어보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네. 파일 부탁해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잘 감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