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지덕지 앉은 이끼… 인현왕후 恨 쌓인 듯
경북 김천 청암사
찾아가는 길부터 남달랐습니다. 구절양장 부항재를 조심조심 넘을 때 특히 그랬습니다.
고개는 깊고 적요했습니다. 쭉쭉 뻗은 나무들은 짙은 숲 그늘을 드리웠고, 이리저리 굽고
휜 길은 라면처럼 구불거렸습니다. 도회지라 여겼던 경북 김천에 여태 이런 두메가 남았으
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조선 숙종 때, 희빈 장씨의 해코지를 피해 청암사(靑巖寺)에
몸을 의탁하려던 인현왕후도 이 험한 산길을 걸었을 테지요. 폐서인의 설움을 가슴에 안고요.
고개를 넘어서면 수도계곡입니다. 이끼 낀 푸른 바위와 투명한 계곡물이 절창을 펼쳐 냅니다.
그 계곡 끝에 청암사가 수줍게 들어앉아 있습니다. 절집 앞에 앉아 계곡물의 속삭임을 들어
보시지요. 남루했던 일상이 어느새 말갛게 씻긴 듯한 느낌을 받게 될 겁니다.
절창 [絶唱] 아주 뛰어나게 잘 지은 시문(詩文
▲ 청암사 초입의 계곡. 푸른 이끼 낀 암벽이 인상적이다. 청암사란 이름은 이 푸른 암벽들에서 비롯됐다.
▲ 소박한 단청이 인상적인 대웅전(왼쪽)과 진영각.
▲ 세밀한 표현이 아름다운 청암사 대웅전 벽화.
청암사는 수도산(1317m, 불령산이라고도 불린다) 자락에 깃든 고찰이다. ‘불령동천’(佛靈洞天)이라 불리는 수도계곡과 기막히게
어울렸다. 절집 이름에 담긴 의미도 깊다. 산의 정기가 계곡 여기저기 솟구친 바위에 스며 푸른 이끼로 돋아났다는 뜻이다.
험한 산길, 폐서인 설움 안은 인현왕후 따르다
청암사는 비구니 스님들이 발심(發心)의 자세를 추슬러 용맹정진하는 도량이다. 절집이 들어선 모양새에서 어딘가 수줍음이 느껴
지는 건 그 때문이지 싶다. 청암사는 쉬 자태를 드러내지 않는다. 작은 일주문을 지나고 아름드리나무를 헤친 뒤 푸른 이끼 낀 바위
를 딛고서야 비로소 숨어 있는 절집과 마주할 수 있다.
발심 [發心] [불교] 불도를 깨닫고 중생을 제도하려는 마음을 일으킴
일주문을 지나 절집으로 가는 길. 노거수들이 오솔길을 따라 늘어섰다. 멀리 아름드리 전나무 사이엔 사천왕문이 왜소한 모습으로- 끼어 있다. 자연에 순응한 건물 형태다. 바로 이곳에서 승속의 경계가 갈린다.
사천왕문을 나서면 웅장한 바위가 발걸음을 막는다. 필경 청암사란 절집 이름의 유래가 된 바위일 터다. 이끼 뒤덮인 짙푸른 바위 - 위엔 이런저런 이름들이 적혀 있다. 그 가운데 최송설당(崔松雪堂)이란 이름이 유독 크고 돋보인다. 그의 이름이 새겨진 과정을
- 요약하면 이렇다. 최송설당은 조선 말의 상궁이었다. 고종과 엄비 사이에 난 영친왕의 보모이기도 했다. 당시 안팎의 혼란 속에서
- 도 영친왕을 잘 돌본 공로로 많은 금품을 하사받았던 그는 이를 청암사 재건을 위해 희사했다고 한다.
경내로 들면 정법루가 단아한 자태로 객을 맞는다. 1940년대 지어진 목조건물로, 세월이 더께로 내려앉은 벽에 유리창을 냈다. - 이채로운 모양새다. 창문 너머로 비구니 스님들이 두 줄로 앉아 있다. 하나같이 파르라니 깎은 머리다. 때는 이미 초여름. 무더위
- 에도 그네들의 자세는 흐트러지는 법이 없다. 정법루 앞은 대웅전이다. 한때 고왔을 단청은 죄다 벗겨졌지만, 외려 그 덕에 삿된
- 세속의 홍진이 범접하지 못하는 듯하다.
숨은 절집…파르라니 머리 깎은 여승이 앉았네
대웅전 맞은편 산자락에도 건물 몇 채가 있다. 절집이 그랬듯, 이곳 역시 방문객이 부러 찾아봐 주지 않았더라면 꼭꼭 숨어 버렸을 - 게 분명하다. 여러 채의 건물 가운데 유독 단아한 고택이 눈길을 잡아 끈다. 조선 숙종의 계비였던 인현왕후(1667~1701)가 기사환
- 국(1689) 때 폐서인이 되어 고통의 세월을 보낸 극락전이다. 오랜 세월을 건너온 탓에 여기저기 구멍이 뚫리고 빛깔도 바랬지만
- 기품만은 꼿꼿하다.
희빈 장씨와의 암투에서 밀린 인현왕후는 갈 곳이 마땅치 않았다. 반대 세력들의 해코지를 피해 은거할 곳을 찾던 인현왕후는 경북 - 상주의 외가와 가까운 청암사로 거처를 정한다. 당시 왕후가 머물던 곳이 극락전 별채, 복위 기도를 올렸던 곳이 보광전이다. 인현
- 왕후는 극락전에서 만 3년간 머물렀던 것으로 전해진다. 극락전은 외부인 출입 금지다. 흘러내린 돌담 너머로, 삭아 내린 솟을대문
- 의 틈 사이로 엿볼 수밖에 없다. 극락전 뒤뜰의 눈은 삼월이 지나도록 녹지 않는다고 한다. 왕후의 설움과 원망이 켜켜이 쌓인 게다.
- 인현왕후가 제자리를 되찾은 건 1694년 갑술옥사 때다. 그는 복위 뒤 청암사에 감사 편지를 보내는데, 당시 편지는 현재 직지사 성
- 보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대웅전 돌턱에 앉아 경내를 살핀다. 뜨락을 오가는 비구니 스님들의 웃음이 해맑다. 지아비 부름 받아 돌아가던 왕후의 모습도 저랬 - 을까. 내려갈 때 보았던 계곡도 이와 비슷했다. 오를 때와는 사뭇 다른, 쪼로롱대며 나대는 산새처럼 경쾌한 모습이다.
무흘구곡…옛 가야 땅 적시는 대가천 물길 좇네
청암사 아래는 무흘구곡(武屹九曲)이다. 조선 중기의 학자인 한강(寒岡) 정구(1543~1620)가 중국 송나라 주자의 ‘무이구곡’(武夷 - 九曲)에 빗대 이름 지었다. 무흘구곡은 대가천을 따라 펼쳐진다. 대가천은 수도산에서 발원해 가야산 북사면을 따라 내려오다 성
- 주, 고령 땅을 적신 뒤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물줄기다. 옛 가야 땅을 흐른다 해서 이름도 대가천(大伽川)이다.
무흘구곡은 성주에 1~5곡, 김천에 6~9곡이 있다. 제1곡은 봉비암(鳳飛岩)이다. 바위 위엔 한강이 후학들을 양성했다는 회연 - 서원이 터를 잡고 있다. 이어 한강대(2곡), 대가천을 오르내리는 배를 묶어 두었다는 배바위(3곡), 꼿꼿이 선 자세가 선비의 기개를
- 닮았다는 선바위(입암, 4곡), 찾는 사람마다 인연을 맺는다는 사인암(5곡) 등이 성주 관내의 30번 국도를 따라 늘어서 있다.
6곡은 김천 쪽의 옥류동이다. 만월담(7곡), 와룡암(8곡), 용추폭포(9곡) 등이 수도계곡을 따라 펼쳐져 있다. 한데 옥류동을 제외하면 공사 중이거나 도로에 가려 접근하기가 쉽지 않다. 무엇보다 만월담이 아쉽다. 달빛이 연못에 꽉 찬다는 뜻의 경승지다. 도로에서 한참 떨어진 데다 가는 길이 정비되지 않아 돌아보기가 만만치 않다. 만월담 옆의 ‘무흘강도지’는 더하다. 무흘구곡이란 이름을 지은 이가 은둔하며 학문을 베푼 핵심 공간인데도 건물이 형편없이 허물어져 있다. 잘 먹고 잘살게 됐으면서도 선인들이 남긴 유산을 이런 몰골로 방치하고 있는 우리의 마음가짐이 안타깝다.
9곡 용추폭포가 있는 수도리는 ‘인현왕후길’의 들머리이기도 하다. 인현왕후길은 수도산 자락의 수도암과 청암사를 잇는 9㎞짜리 산길이다. 인현왕후가 수도암과 청암사를 오가며 기도를 올렸을 것이라는 향토사학계의 추정에 근거해 조성했다. 애초 청암사를 거쳐 가는 것으로 코스를 조성하려 했으나 비구니 스님들의 거처를 외부인들에게 개방할 수 없어 수도리 주차장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변경했다고 한다. 걷는 데 3시간 이상 소요된다.
글 사진 성주·김천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여행수첩(지역번호 054)
→가는 길:청암사, 무흘구곡 등이 속한 증산면은 김천의 남쪽이다. 수도권에서 승용차로 갈 경우 경부고속도로 김천 나들목으로 - 나와 3번 국도 거창 방향으로 좌회전한다. 이어 지례면을 지나 도톨·속수 이정표를 보고 좌회전, 903번 지방도를 타고 부항재를 넘
- 는다. 부항재는 굴곡이 심하다. 차량 통행은 뜸하지만 각별히 조심해서 운전해야 한다. 고개를 넘으면 부항리 마을이다. 마을 끝자
- 락 삼거리에서 우회전, 무주 방향 30번 국도로 올라탄 뒤 3㎞ 정도 가면 청암사다. 김천의 대표 여행지인 직지사는 김천 나들목에서
- 우회전해 올라가야 한다. 무흘구곡은 마을 삼거리에서 좌회전해 성주 방면으로 내려가면 나온다. 무흘구곡을 거쳐 청암사로 가겠다
- 면 중부내륙고속도로 성주 나들목으로 나오는 편이 낫다. 김천시청 새마을문화관광과 420-6633.
→맛집:지례면 쪽에 흑돼지 맛집 거리가 형성돼 있다. 흑돼지 요리 전문점이 10여곳에 이른다. 최근 한 TV 프로그램에 소개되면서 -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지례 흑돼지는 비계가 투명하고 살이 탄탄한 것이 특징이다. 현재 지례면 내에 3500여 마리의 흑돼지가
- 사육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가장 일반적인 요리는 소금구이다. 연탄불에 구워 먹는 고추장 불고기도 맛있다. 삼거리 불고기
- (435-0067), 상부가든(435-0247) 등이 널리 알려졌다.
2016-06-18 14면
승속(僧俗)의 관계에 한정하여 말하면, 승속 간에 높은 장벽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예전에는 지금처럼 출가와 재가의 엄격한 신분 구분이 없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출가와 재가의 구분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승려중심의 불교가 아니었다는 의미이다.
1947년 시작된 봉암사결사 이후부터 한국불교의 풍속도는 급격히 달라졌다.
다시 말해서 한국불교가 출가자 중심의 불교로 바뀌게 된 것은
봉암사결사 이후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전에는 승려에게 삼배의 예를 올리는 관습도 없었다.
그것을 강조한 분이 성철스님이다.
봉암사결사 이전에는 승려와 신도의 복식에도 별로 차이가 없었다.
한복과 승복은 별로 차이가 없다. 다만 승복은 먹물을 들여 회색이었다는 차이뿐이다.
옛 장삼은 선비들의 도포와 별반 다르지 않았고,
다만 승려는 의식을 집전할 때 붉은 색의 홍가사(紅袈裟)를 수했기 때문에 구별되었을 뿐이다. 봉암사결사 이후 변한 불교의 풍속도는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는 승속 간에 너무 격식을 따지게 되었다. 사찰의 예절을 너무 강조하다보니
신도들은 반드시 스님께 삼배를 올려야 하는 것으로 변해갔다.
그 때문에 거사들이 사찰에 오는 자체가 큰 부담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나이 많은 노보살에게 반말하는 것은 다반사고,
갓 머리 깎은 사미승이 자신의 부모보다 나이 많은 신도로부터 삼배를 받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승려의 위치가 올라가는 것은 아니다.
둘째는 승속의 구분을 지나치게 강조하게 되었다.
봉암사결사 이후 지금까지는 조선시대의 억불숭유 정책으로 인한
승려의 신분을 향상시키기 위한 시간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조선시대 팔천민(八賤民) 가운데 하나였던 승려 신분을
당시에는 향상시킬 필요성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지나쳐 신도 위에 군림하는 위치에까지 오게 되었다.
부처님이 비판했던 바라문교의 사제 신분과 바를 바 없다.
일반적으로 스님들이라면 삼배 받는 것을 당연시 한다.
스님에게 삼배 대신 합장 한번 하며 인사하는 것으로 족하다,
그런데 현실은 자격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스님들일수록 삼배를 강요하는 현상이 있다.
이에 대하여 “그들은 출가한 것이 무슨 벼슬을 한 것처럼 생각하는 권위의식을 갖고 있다.
나는 오늘도 과연 남으로부터 존경받을 만한 밥값을 하고 있는가를 되돌아본다.
부끄럽기 짝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