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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루를 만나다
박보라
궁여지책이라고 생각했다.
설핏하게 짠 목도리는 민주의 얼굴을 반쯤 묻어 간신히 떠 있는 두 눈만 밖으로 내보였다. 빨갛게 달아오른 쇳덩이 위에 찬 물을 끼얹은 것처럼 사람들은 하얀 입김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몸속의 열기들을 내뱉어 차갑게 식어가는 건물들 사이로 민주는 부지런히 걷고 있었다.
“네 주제에 이것도 어디 가당키나 하니? 그나마 엄마 친구가 거기 병원장이랑 아는 사이라 겨우 자리 하나 만들어주는 거야. 딴짓 할 생각 말고, 거기서 열심히 일하다가 선봐서 결혼이나 해.”
파란 불이 깜빡이는 것을 보고, 발걸음을 재촉하던 민주는 오늘 아침 엄마가 한 말을 떠올렸다. 목도리 위로 더 많은 입김이 뭉게구름처럼 뿜어져 나왔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는 계절인데도 몸이 불구덩이 속에 있는 것만 같았다. 눈 주위가 코보다 더 빨갛게 달아올랐다. 설상가상으로 악마의 손톱 같은 바람이 그나마 반만 나온 얼굴마저 사정없이 때리고 지나갔다.
‘그래, 조금만 참자. 2년만 다니다가 더 좋은 곳으로 이직하면 돼.’
민주는 주머니 속으로 힘껏 주먹을 쥐었다. 분해도 도리가 없었다. 이번 해도 넘기면 취직하기는 더 힘들어질 것이다. 또 수많은 간호대 졸업생들이 100M 달리기를 하는 육상선수들처럼 자신의 꼬리를 잡기 위해 전력을 다할 것이기 때문이다. 옆에서 함께 달리던 친구들도 이미 해외 구직을 하거나 대학원을 준비하면서 민주의 어깨선에서 한 발짝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러니 힘들다고 쉬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메트로 메디컬 센터’
건물 외벽에 붙은 병원 간판은 이른 아침부터 밝은 초록색을 뿜어내고 있었다. 총 304병상. 지상 6층, 지하 2층으로 지어진 이곳은 2년 전 세워진 신축 병원이다. 그래도 자리는 잘 잡아서 동네 부유층 고객들이 자주 드나든다. 그렇지만 내과, 외과보다 성형외과나 피부과에 더 많은 사람이 붐빈다는 건 제대로 굴러가는 종합병원은 아니라는 반증이다.
회전문은 자동으로 걸음걸이에 맞추어 돌아 민주를 건물 안으로 밀어 넣어 주었다.
“김민주 쌤?”
같은 병동 1년 차 정연희 간호사였다.
“지금이 몇 신데 신규가 이제 출근이야? 나이트 근무 서신 쌤들 다크서클 내려오는 소리 안 들리니?”
‘자기도 이제 출근하는 주제에!’ 라고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는 감히 낼 수도 없는 말이었다. 고작 민주보다 1년 먼저 입사했다. 하지만 그 유명한 간호사 세계의 '태움 문화'를 전수하듯 아주 선배 노릇을 톡톡히 하는 수간호사의 애제자다.
“아, 네. 죄송합니다. 그럼 저는 계단으로 먼저 뛰어 올라가겠습니다.”
허리를 단번에 접어 인사하고 비상구를 향해 달려가는 민주의 뒤에서 연희는 ‘우리 때는!’을 연발하고 있었다. 민주는 그렇게 4층 산부인과 병동까지 단숨에 올랐다. 가뜩이나 초등학생 같은 민주의 다리가 부들부들 떨려 휘청거렸다. '후우.' 하고 호흡을 재장전했다. 전쟁터로 들어가는데 당연한 의식이었다.
나이트 근무를 선 간호사 중 한 명이 가운데에 앉고, 그 옆에는 수간호사가, 다른 쪽 옆에는 연희가 앉았다. 그리고 나머지는 뒤에 병풍처럼 둘러섰다. 인수인계는 아직도 민주에겐 낯설다. 적어야 할 처치들이나 알아야 할 검사 수치, 용어들도 많고, 무엇보다 랩을 하듯 빠르게 흘러가는 그 입을 따라갈 수가 없다. 민주는 ‘이것도 몇 개월 지나면 익숙해지겠지.’하고 일단 들리는 것만 부지런히 받아 적었다.
“... 412호 금송이 환자분, 23세. 오늘 오전 5시 15분, 우측 하복부 통증과 고열로 ER(응급실) 통해 내원하셨고요……”
‘금송이?!’ 민주는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떠올리고 싶지 않아 몇 겹으로 싸서 깊숙한 곳에 넣어 두었던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는 것만 같았다.
“네가 민주구나? 우리 애 이름은 금송이야. 앞으로 잘 부탁해.”
파란 하늘이 지나치게 맑아 불안한 날이었다. 하늘색과 경쟁하듯 공원 잔디는 초록빛 몸을 융단처럼 깔고 누워 있었다. 머리를 하나로 높게 올려 묶어 끝이 더 날렵하게 올라간 송이의 눈꼬리는 첫인상을 더욱 사납게 만들었다. 송이는 하얀 레이스로 밑단 처리가 된 원피스를 입고, 나비 모양의 리본이 달린 하얀색 구두를 신고 있었다. 엄마를 닮아서인지 고양이상에 커다란 눈망울, 그리고 입고 있는 원피스 색만큼이나 새하얀 피부는 송이를 동화 속 공주님같이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에 비교해 민주는 동네 골목에서 마주친 길고양이처럼 거친 머릿결과 까무잡잡한 피부, 장작개비 같은 몸을 하고 있었다. 민주는 무릎이 구멍 난 청바지에 유치한 그림이 그려진 티셔츠가 부끄러웠는지 엄마 뒤에 숨어 발끝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송이 역시 제 엄마 뒤에 똑같이 숨어 곁눈질할 뿐이었다. 그것이 민주와 송이의 첫 만남이자 마지막 만남이었다. 고작 초등학교 2학년 때 일이었지만 서로는 알 수 없는 긴장감이 둘 사이에 흐른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특이해서 좀처럼 잊히지 않는 이름 탓이었을까? 민주는 그 이름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금송이’
의사는 송이에게 해열진통제와 항생제를 처방하였다. 송이는 2인실, 창가 쪽 침대를 쓰고 있었지만 다른 환자가 없었기 때문에 병실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열이 내리고, 통증이 잦아들자 송이는 평온한 표정으로 잠이 든 것 같았다. 민주는 내심 송이가 자기를 알아보지 못하기를 기대하며 병실에 들어섰다.
여전히 하얀 피부는 참 예뻤다. 맥박을 재기 위해 송이의 손목에 검지와 중지를 갖다 대었을 때, 그 색의 차이가 확연하게 나서 민주는 얼른 자신의 손을 거두어들였다. 민주의 손길에 깬 것인지 송이가 무거운 눈꺼풀을 천천히 밀어 올렸다. 하지만 민주 쪽을 대충 둘러보고는 다시 눈을 감아 내렸다.
“체온 재겠어요. 아- 하세요.”
민주는 송이가 알아챌까 싶어 조금 목소리를 남자같이 내리깔며 말했다. 하지만 송이는 그저 입을 벌려 체온계를 물었고, 혈압을 다 잴 때까지도 눈을 다시 뜨지 않았다. 그리고는 문을 열고 나가는 민주의 등에 대고, 고맙다는 인사를 맥없이 내뱉을 뿐이었다. 민주는 분명 송이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였다고 생각하며 자기도 모르게 가벼운 안도의 숨을 쉬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새털같이 가벼웠다. 걷는다기보다는 날아간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이다. 민주는 성적표를 들고, 이것을 보며 크게 칭찬할 엄마의 모습을 기대했다.
“엄마! 엄마! 이거!!”
민주는 집을 들어서자마자 신발을 휙 벗어 던지고, 엄마 앞에 자신의 성적표를 들이밀었다. 엄마의 눈길이 차례로 성적표를 훑어 내릴 때, 민주는 설렘으로 가슴이 울렁거렸다. 엄마가 뭐라고 하실까? 민주는 엄마가 당신의 딸을 매우 자랑스럽다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실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왜 미술 같은 데서 점수를 깎아 먹었어? 이렇게 쉬운 건 당연히 ‘수’를 받았어야지. 그 엄마 친구 딸, 송이 있잖니? 걔는 이번에 전교 1등 했다더라. 어쩜 걔는 생긴 것도 예쁘면서 공부도 그렇게 잘 한다니?“
엄마는 민주 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그 눈빛은 부러움이 가득 담겨 슬퍼 보이기까지 했다. 민주는 온몸이 어두운 땅 밑으로 꺼져 버리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엄마가 그냥 옆으로 치워 놓은 자신의 성적표를 들고 방으로 들어와 침대에 누웠다. 미술 하나만 ‘우’고, 다른 것은 모두 ‘수’였다. 심지어 행동발달사항 란에는 민주가 매우 급우들에게 친절하고, 솔선수범하며, 노래에도 소질이 있다는 극찬이 적혀 있었다. 민주는 한참을 그렇게 멍하니 성적표를 올려보다가 쫙쫙 소리가 나도록 찢어버렸다. 그리고 그것을 곧바로 쓰레기통에 던져 버렸다. 열세살의 민주는 생각했다. ‘공부 따위 개나 줘 버려.’
환자의 상처를 소독하며 쓴 거즈와 알코올 솜이 쓰레기통으로 쏟아져 내렸다. 송이는 PID(골반염)를 진단받았다. 약물치료를 해 보다가 효과를 보이지 않거나 다른 문제가 생길 경우, 수술을 받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 말은 송이가 이 병동에 한동안 머무를 거란 이야기가 되기도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캐나다로 유학을 갔다 했던가? 민주는 그 잘난 송이가 분명 자유분방한 캐나다 학교에서 무분별하게 남자들을 만나 이런 병을 달고 왔을 거로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콜라 한 캔을 단번에 들이킨 듯한 상쾌함, 아니 통쾌함이 들었다. 비뚤어진 자기 마음에 살짝 죄책감이 들긴 했지만, 그런 것 따위 열등감을 핑계 삼아 버리면 될 일이다. 민주는 제법 타당하다고 자위하며 돌아서자 한결 검은 마음이 회색 정도로는 색이 빠진 것 같았다.
창밖으로 눈보라가 매섭게 몰아치고 있었다. 그 바람은 창문을 때리고 지날 때마다 윙-하고 위협적인 소리를 내뱉고는 심하게 창문을 흔들어 대었다. 민주는 복도 끝을 돌아 다른 환자의 병실로 향하다가 송이의 병실 안을 살짝 들여다보았다. 송이는 목소리를 조금 높이며 누군가와 전화 통화를 하는 것 같았다. 문이 닫혀 있어 내용을 들을 순 없었지만, 송이의 몸짓과 표정으로 보아 좋은 이야기는 아닌 것 같았다. 그 새하얀 얼굴이 더 창백해져 파랗게 번져가고 있었다.
민주는 짙은 파란색에 흰색, 빨간색 격자무늬가 있는 교복 치마를 벗고, 짧은 청반바지로 갈아입었다. 그리고 입술에 바를 무언가를 찾다가 붉은 색 립스틱을 꺼내어 누르듯이 발랐다.
“야, 김민주. 난 그렇다 치고, 너희 엄만 너 이러는 거 아시냐?”
“네가 우리 엄마를 알아?”
민주는 잠깐 피식하고,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우리 엄마는 내 일에 신경도 안 써. 그러니까 너도 내 일에 상관 마.”
백화점 화장실 안 파우더룸은 안락하고 우아했다. 민주는 입술 색과 같은 둥근 의자에 앉아 가방에서 꺼낸 검은색 부츠로 신발을 갈아 신었다. 머리를 풀고, 몇 번 손으로 매만지니 거울 속에는 또 다른 민주가 있었다.
번화가를 걷는 민주의 다리와 입술 위로 수많은 사내의 눈길이 스쳐 지나갔다. 그들은 마치 잘 구워진 돼지 뒷다리 앞에서 침을 흘리는 개와 같았다. 민주는 그런 눈길을 내심 즐기는 눈치였다. 차들이 뿜어내는 잿빛 매연들마저 민주의 답답한 마음을 상쾌하게 뚫어주는 것만 같았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만의 삶을 사는 거다. 누가 누구를 신경 쓴다는 것은 애초에 맞지 않는 말이다. 자기 삶도 책임지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무엇을 책임질 수 있단 말인가.
민주는 능숙하게 클럽 문 앞을 지키는 사내에게 눈길을 한 번 주고 시끄러운 음악 소리가 들려오는 빌딩 입 속으로 들어갔다. 힘든 일을 잊으려는 밤의 시간은 음악의 비트만큼이나 빠르게 지나갔고, 그 시간만큼은 자기가 주인공이 된 것 같았다. 모르는 남자들이 쏟는 관심의 눈길이 민주를 살아있게 했다. ‘나 아직 죽지 않았군.’ 하며 민주는 그 날 밤도 안도했다.
날이 다 새서야 다시 교복으로 갈아입고, 학교로 향했다. 머리카락에서는 아직도 퀴퀴한 담배 냄새와 남자들의 향수 냄새가 짙게 배어 있었다.
“김민주!”
엄마의 목소리였다. 육두문자가 가늘게 입 밖을 새어나왔다. 민주는 돌아보지 않았지만, 엄마의 빨라지는 구두 소리가 자신을 향해 걸어온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짝!’
엄마의 차가운 손바닥이 민주의 뺨을 향해 내리꽂혔다.
“너 미쳤어?! 또 클럽 갔다 왔니? 고3이 제정신이야? 수능이 반년도 안 남았는데 공부 안 하니? 엄마 친구 딸, 송이는 수시 준비한다더라. 너, 인생 포기했어?”
‘또 금송이 이야기!’ 민주는 진절머리가 났다. 어릴 때 어린이 대공원에서 본 이후로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송이는 언제나 민주와 함께 사는 것만 같았다. 엄마의 손톱에 긁혔는지 부어오르는 뺨에서 빨간 것이 인주처럼 찍혀 나왔다. 열아홉살의 민주는 생각했다. ‘인생? 그까짓 꺼, 될 대로 되라지.’
송이는 붉은 색 립스틱을 입에 바르고, 검은색 바지 정장을 꺼내어 입었다. ‘어디를 나가려는 건가?’ 민주는 궁금해졌지만 일단 환자가 의사의 허락 없이 병원을 나가는 것만은 막아야 했다. 민주는 문을 열고 들어가 고개를 살짝 돌리며 말했다.
“저기 환자분, 담당의께서 절대 안정하셔야 한다고 지시를 내리셨어요. 어디를 가시는지는 모르겠지만, 투약시간도 다가오고.”
“잠시 이 앞에 다녀올 겁니다. 오래 걸리진 않을 거예요.”
민주의 말을 가로막으며 송이가 단호하게 말했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가 그려진 스카프를 목에 두른 송이는 핸드백을 손에 쥐고 민주의 뒤를 스쳐 지나갔다. 민주는 잠시 망설였지만 송이에게는 알 수 없는, 그리고 거절할 수 없는 그런 묘한 분위기가 있었다.
“뭐라고?! 김민주 쌤.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환자의 안위를 전혀 생각하지 않는가 봐? 도대체 그 학교에선 뭘 가르쳤나 몰라? 이래서 출신학교가 중요한 거라니까? 면허증 있다고 다 같은 간호사인 줄 아나? 시골 전문대 출신 주제에.”
연희는 특히 ‘시골 전문대’에 힘을 주어 말하였다. 학창시절 같았으면 주먹으로 한 대 쳐버리면 그만인 것을, 이 사회라는 족쇄와 이렇게라도 살아야 한다는 현실이 민주의 꽉 쥔 주먹을 다시 펴게 했다.
“얼른 나가서 찾아오겠습니다.”
“수 쌤 오시기 전에 찾아와야 할 거야. 수 쌤 아시면 우리 병동 다 비상 걸리는 거 알지?”
민주는 열심히 뛰어나가는 척하다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나서 어깨에 긴장을 내려놓았다. ‘역시 골치 아파, 금송이.’
아직 점심시간이 되지 않은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병원 앞거리는 한산했다. 자동 회전문을 돌아 밖으로 나오며 그제야 민주는 코트와 목도리를 들고나오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람을 타고 온 찬기가 무섭게 간호복을 파고들었다. 소매와 바짓단으로 맹렬히 달려드는 겨울바람은 뱀이 기둥을 타고 오르듯 빠른 속도로 민주의 팔다리를 감아 올랐다.
송이의 기에 눌려 무단외출을 막지 못한 자신에게 너무 화가 났다. ‘때려눕혀서라도 침대에 묶어 놓을 걸 그랬어.’ 민주는 상체를 둥글게 말아 팔로 감싸 안으며 횡단보도를 건넜다. 어제 송이는 누군가와 격렬히 다투는 것 같았다. 전화 속 사람이 누군지는 몰라도 아마 그 사람을 만나러 나간 것은 아닐는지. 누군가를 만나러 나갔다면 병원 앞 커피숍 중 하나일 것이다.
민주는 얼른 건너편 병원을 올려다보았다. 4층 병실 창문들이 보였고, 그 중 송이의 병실 창문이 보였다. 그쪽에서 내려다 보았다면…. 민주의 눈앞에 ‘LE CIEL'이라고 크게 써 붙인 커피숍 간판이 보였다. 2층이었다. 문을 열자 따뜻한 온기가 민주의 움츠린 몸을 기분 좋게 이완시켜 주었다. 커피숍 종업원은 피곤하다는 듯 대충 인사를 했다. 그리고 그곳에 송이가 있었다. 송이는 창가 쪽 두 번째 테이블에 나이가 좀 있어 보이는 남자와 마주 앉아 있었다. 둘 앞에 커피는 식었는지 더는 하얀 김이 올라오지 않았다. 민주는 송이가 보이지 않도록 건너편 뒷자리에 앉았다. 거기는 둘의 이야기가 잘 들리는 자리였다.
“캐나다에서 유학하는 깨어있는 신세대라 이해할 줄 알았는데, 내 판단이 틀렸나 봐.”
“그 말은.... 제가 아무렇게나 쉽게 남자를 만나다 헤어지는 그런 여자이길 기대했다는 뜻으로 들리네요. 거북하군요.”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그렇게 들렸다니 미안. 하지만, 이건 뭐 너무 상식적인 말이라 더 할 말이 없네?”
“그 상식은 누구에게 해당하는 상식인가요? 당신 같은 사람들?”
“당신 같은 사람들이라. 하하.... 그래, 좋아. 간단히 이야기할게. 캐나다로 돌아가. 그럼 내가 가끔 들를게. 우리 그곳에서는 행복했잖아?”
남자는 베르사체 문양이 새겨진 결혼반지를 낀 왼손으로 송이의 오른손을 슬며시 잡았고, 송이는 못 만질 것에 손이 닿았다는 듯, 급히 손을 빼내어 커피잔을 들었다. 커피잔을 들어 올리는 송이의 하얀 손이 파르르 떨렸다.
“캐나다에서는 행복했고, 여기서 저를 보시는 것은 행복하지 않으신가 봐요?”
송이는 날카롭게 눈을 올려 뜨며 남자를 보았다. 하지만 남자는 여유롭게 소파에 등을 기대며 대답했다.
“그곳의 것은 그곳에 둘 때가 가장 아름다운 거야, 송이야.”
“제 이름,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그건 그렇고.... 몸은 괜찮은 건가? 내가 그 병원 원장을 잘 알아. 특별히 신경 써 달라고 해 둘게. 골반염이라지? 잘못하면 자궁이나 다른 부속기관들을 잘라내는 수술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던데.”
“그 원장이라는 사람이 그러던가요? 아니면 그렇게 해 달라고 부탁하신 건 아니시고요? 걱정 마세요. 탓할 생각은 없으니.”
민주는 종업원이 가져다 준 물을 한 모금 마시며 소리도 내지 않았다. 뭔가 송이의 대단한 비밀을 알게 된 것 같아 자신의 목소리도 숨어 들어갔다.
“앞으로는 연락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사모님께 충실하며 사세요.”
“하아.... 이런. 송이야, 내 가족은 내가 알아서 해. 너의 소관이 아니야. 그러니 네 처신이나 잘 하며 살아. 이 바닥, 좁다.”
“네, 좁죠. 그리고 제 입은 가볍고요.”
송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핸드백을 챙겼다. 그리고 고개를 까닥하는 정도로 인사를 한 뒤, 몸을 돌려 나오다가 민주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송이의 그 큰 눈이 더 커지더니 민망한 듯 서둘러 커피숍을 나가버렸다.
민주는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 송이 곁에 섰다.
“일부러 들으려고 한 건 아니에요. 하지만 환자의 정보를 발설하는 건 의료법에 어긋나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요.”
“감사하네요.”
송이의 입에서 하얀 입김이 작게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빨간 불은 금세 파란 불로 바뀌어 버렸다.
2월이 시작되었는데도 아파트 입구엔 아직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적힌 현수막이 휘날리고 있었다. 민주는 휴대폰에 귀를 대고 횡단보도를 서둘러 건넜다.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지방의 간호 전문대에서 합격했다는 소식이 온 것이었다. 대학을 가지 않을 작정이었다. 하지만 엄마를 벗어나 독립하기 위해서는 돌파구가 필요했다. 지방이라서 차라리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최대한 엄마에게서 멀리 떨어지길 바랐던 것이니까. 더군다나 간호사는 전문직이라 취업도 쉽다고 했다. 요즘 청년실업에 대한 뉴스를 볼 때마다 무엇이든 전문 기술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3년을 무사히 학교에 다니고, 면허증을 딸 수 있다면 민주는 취업과 동시에 엄마에게서 영원히 벗어날 수 있으리라. 그래서 마지막 힘을 짜내었다. 중고등학교 내내 하지 않았던 공부를 위해 하루에 몇 권씩 문제집을 떼었다. 그리고 밤을 새워 교육방송에서 나오는 문제풀이에 매달렸다. 그래서 결국 몇 군데 넣은 간호 전문대 중 한 곳에서 합격 소식을 받게 된 것이다. ‘엄마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할까?’ 민주는 고민하며 현관문을 열었다. 어쩌면 대학을 가지 않겠다던 딸이 전문대라도 합격했으니 다행이라 해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엄마는 안방에서 통화 중이었다.
“어, 그럼. 동창회 가야지. 응? 우리 민주? 어.... 민주는.... 아, 참! 송이는 대학 결정했니?”
엄마는 민주의 이야기가 나오자 말을 얼버무리며, 급히 송이 이야기로 말을 돌렸다. 민주는 그 날, 엄마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도 자기를 부끄러워한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갑자기 수치심으로 입 끝에 힘이 들어갔다.
“아... 송이는 캐나다 유학 가기로 했구나. 세계화 시대에 잘 결정했다. 걔는 거기 가서도 잘 할 거야.”
민주는 다시 현관문을 열고 집을 나왔다. 이제 막 스무 살이 된 민주는 생각했다. ‘세계화는 개뿔.’
송이의 수술 날짜가 잡혔다. 담당의는 정말 그 남자가 말한 대로 수술을 권했다. 농양을 배액하고, 한쪽 난소를 함께 절제하는 수술이란다. 민주는 커피숍에서의 남자가 자꾸 떠올라 송이에 대한 수술 결정이 과연 타당한 것인지 의심이 들었다. 이제 겨우 스물세 살인데 난소를 절제한다는 것은 단순한 수술 이상의 문제였다. 그리고 이 병원 의사들이 그렇게 믿을만한 실력을 갖추었던가! 전부터 이 병원은 성형외과와 피부과만 빼고 다 돌팔이라고 생각했던 민주였다. 자기가 보기에는 송이의 상태가 이제는 열도 잡히고, 밖에 나갔다 올 정도로 통증도 없었던 것 같은데. 민주 안의 쓸데없는 정의감이 얼굴을 들었다.
송이는 자기 병실에서 힘없이 눈 내리는 창밖을 내다보며 누워 있었다. 하얀 침대보가 송이의 얼굴을 더 처연하게 보이게 했다. 그리고 생각해 보니 송이의 엄마나 다른 가족들이 병문안을 오지 않는 것으로 보아 몰래 한국에 나온 것이 틀림없었다.
“수술이 내일이라 금식하셔야 합니다.”
민주는 침대에 ‘금식’이라고 쓰인 경고문을 붙였다.
“넌 참 좋아 보이는구나.”
송이는 창가 쪽을 보며 말했다.
“네?!”
‘나에게 하는 말인가?’ 민주는 어색하게 송이 쪽을 올려다보았다.
“너, 서초초등학교 다니던 김민주 맞지?”
민주는 송이가 자기를 기억하고 있다는 점에 한 번 놀랐고, 이미 이 병원에서 자기를 알아보았다는 점에 두 번 놀랐다. 그런데 알고 있었다면 왜 아는 척하지 않았을까?
민주는 그저 말없이 일어서 다시 송이를 내려다보았다.
“키만 컸지, 얼굴은 그대로였어. 그리고 난 널 평생 못 잊으니까.”
송이의 눈은 매우 슬퍼 보였지만, 입은 엷게 웃고 있었다.
“내가 널 얼마나 미워했는지 넌 아마 모를 거야.”
“네가 나를??”
송이의 입에서 나온 말은 가히 충격적인 것이었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민주는 자기 속에 깊이 숨겨둔 분한 마음이 다시 스멀스멀 목을 기어오르는 것 같았다.
“넌 우리 엄마의 말대로 명문대를 나와서 나 보란 듯이 멋진 간호사가 되었네. 난 이 꼴을 하고 누워 있는데.”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민주의 머리 뒤편을 때렸다.
“내가 명문대를 나왔다고? 너야말로 캐나다 유학 갔다더니 왜 더 멋있게 나타나지 않았니? 또 그 남자는....!!”
민주는 왠지 그 남자에 대해서 더 말을 꺼내면 의료법에 위반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입을 닫아버렸다.
“캐나다 유학? 그게 유학이니? 우리 엄마는 항상 너 같지 않은 나를 한심하게 생각하셨어. 그래서 창피하신지 아예 캐나다로 도피유학을 가라 하셨지. 거긴 나 같은 아이들이 많아. 집안에 돈은 좀 있는데, 공부를 못 하니까. 한국 땅에서는 보는 눈들이 많잖아? 그래서 캐나다 땅에 자기 자식을 내다 버리는 거야.”
송이는 계속해서 말도 안 되는 이야기들을 토해내고 있었다.
“난.... 명문대를 나오지 않았어. 나야말로 너를 얼마나 미워하며 살아왔는지 몰라. 엄마는 늘 공부도 잘 하고, 예쁜 너에 나를 비교하며 실망하셨거든.”
그제야 송이가 민주 쪽을 돌아보았다. 동그란 눈이 좌우로 미세하게 흔들렸다.
“그럼.... 넌....”
“난 지방에 있는 작은 간호 전문대를 나와서 큰 대학병원도 못 가고, 엄마가 손 써 준 이 병원에 신규간호사로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어.”
“그럼 우리 엄마는 왜 그런?!”
민주는 그제야 이 무시무시한 추리소설 속 사건의 전말을 모두 알게 되었다. 언제나 자기를 죽이려 뒤쫓아오던 송이는 온데간데 없고, 자기같이 엄마의 자존심에 버려진 딸, 송이만이 민주와 마주하고 있었다. 이 비극의 주인공들이 지구 몇 바퀴를 걸어 돌아 조우한 셈이다.
“김민주 쌤? 잠시만 이리로.”
멈춰진 화면을 다시 재생시킨 것은 다름 아닌 연희였다.
“잠시만. 다시 올게.”
아직도 뛰고 있는 심장이 호흡을 가쁘게 했다. 민주는 정신을 반쯤 놓고, 연희의 뒤를 따르다가 지나가던 남자의 어깨에 부딪히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남자는 손으로 어깨를 툭 털어내며 여유로운 걸음걸이로 복도 끝을 돌아 사라졌다.
“아니, 들어온 지가 언젠데 아직도 물품 정리 하나를 못 해? 노말 셀라인은 이쪽에, 도뇨 세트는 저쪽에 놓으라고 했어, 안 했어? 넌 머리가 옵션이니??
연희는 민주를 벽으로 몰아세우며 또다시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내었다. 하지만 민주는 여느 때처럼 마음이 상하거나 하지 않았다. ‘방금 지나가던 그 남자. 익숙했는데.’ 민주는 곰곰이, 그리고 아주 천천히 그 남자의 인상착의를 다시 돌려보기 버튼을 눌러 살펴보고 있었다. 짙은 남색 정장에 광이 나는 검은색 구두, 흰색 머리카락이 적당히 섞여 있지만 세련되어 보였던 헤어스타일. 그리고 베르사체 문양이 새겨진 반지, 왼쪽 네 번째 손가락에 끼고 있던 그 반지!
“쌤, 잠시만요!”
“아니, 내 말 아직 안 끝났는데, 어딜 가는거야?!”
민주는 복도를 향해 힘껏 달렸다. 연희는 민주의 뒤에 대고 온갖 상스러운 말을 쏟아내고 있었다. 복도 끝을 돌아서면 병실이 시작되고, 두 번째가 바로 송이의 병실이었다.
“송이야!!”
송이가 없었다. 침대보는 어지러이 흩어져 있었고, 핸드백은 바닥에 떨어져 립스틱과 지갑 등이 널브러져 있었다. 민주는 다시 간호사 스테이션으로 돌아와 연희를 붙들고 소리쳤다.
“쌤! 경찰서에 신고 좀 해 주세요! 그리고 412호 금송이 환자가 사라졌어요! 경비실에 CCTV 확인 좀!!”
연희는 아직 분기가 가라앉지 않았지만, 민주의 말을 듣고 서둘러 경찰서와 경비실에 연락했고, 경비 요원은 두 사람이 옥상 쪽으로 올라가는 것이 찍혔다고 알려왔다.
민주는 가느다란 다리에 힘을 주어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옥상 문을 온몸으로 힘껏 밀어 열자 찬바람이 훅하고 민주를 덮쳤다.
“안 돼!!”
송이는 벌써 남자의 손에 이끌려 난간에 반쯤 몸을 넘기고 있었다. 송이의 눈이 간절하게 민주를 바라보았다. 민주는 마치 우사인 볼트가 된 듯이 달려 남자의 몸을 밀쳐내고, 송이를 난간 안쪽으로 끌어 올렸다. 남자가 쓰러지며 왼손으로 민주의 얼굴을 쳐내면서 반지로 민주의 뺨에 빨간 줄을 그었다. 그리고 송이의 몸은 앞으로 고꾸라지며 무릎이 시멘트 바닥에 콱 박혀버렸다. 그 뒤로 경비요원 두 명이 들어와 남자를 붙들었고, 몇 분 후 온 경찰에게 인계했다.
412호 병실엔 민주와 송이 둘뿐이었다. 옥상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꿈같이 아련했다. 자신의 명성에 빨간 줄이 갈까 두려워했던 남자의 말로는 경찰이 밝혀줄 것이다. 민주는 능숙한 솜씨로 송이의 무릎에 소독약을 바르고, 거즈를 붙였다. 송이는 침대에 가만히 앉아 그런 민주를 조용히 내려다보았다.
“너도 상처 입었니? 어디 보자.”
송이가 민주의 뺨을 쳐다보며 물었다.
“괜찮아. 상처는 곧 아물 거니까. 새 살이 다시 돋을 시간이 좀 필요하겠지만. 지금 우리들도 그러하고.”
민주는 간호복 주머니 속에서 반창고를 꺼내어 자기 뺨에도 하나 붙였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뭐가?”
“평생 유령처럼 내 뒤에서 삶을 갉아 먹던 너와 이렇게 웃는 얼굴로 마주하고 있다는 것이.”
민주의 말에 송이가 흐릿하게 웃었다.
“내 지난 시간도 그래. 내 몸에서 피가 다 빠져나가는 기분이었어. 그래서 창백하게 죽어가는 것 같은 내 입술에 언제나 생명력이 느껴지는 붉은 색 립스틱을 바르곤 했지.”
“나도 그랬는데!”
민주는 병실에서 붉은 색 립스틱을 바르던 송이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리고 둘이 참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다.
“우린 그동안 누구랑 싸우고 있었던 걸까? 우리 엄마들의 자존심으로 만들어진 허상 속의 너와 나?”
둘은 어이가 없다는 듯 한참을 함께 웃었다. 그 웃음은 행복과 허무가 일체 되는 미묘한 것이었다.
“참 한심하다. 그따위에 우리 꿈을 다 날려 버리고, 어두운 동굴 속에 숨어서 살았다는 거잖아.”
“생명력을 잃은 피는 검은색에 가까워지니까.”
민주와 송이는 거즈 위에 검붉은 색으로 말라버린 동그라미를 바라보았다.
“난 오늘 당장 사표를 쓸 생각이야. 이제야 제대로 살아가야 할 이유를 찾은 것 같거든. 그리고 넌 다른 병원에 가 봐. 내가 보기엔 너, 다 나은 것 같아. 하지만 다른 병원에서 검사해도 수술을 해야 한다 하면 어쩔 수 없겠지만.”
“병원은 나중에. 얄미운 엄친딸(신조어. 엄마 친구 딸의 줄임말)이 진짜 친구가 된 기념주는 한잔해야 되지 않겠어?”
연희의 ‘요즘 애들은 3개월도 못 버틴다.’는 잔소리가 뒤에서 작렬하지만, 민주는 멋지게 수간호사 앞에서 사표를 내던진 자기 자신이 어느 때보다 자랑스럽다고 생각했다.
병원 앞 번화가의 저녁 시간은 이제 크리스마스 캐럴과 날리는 눈발로 생명의 활기가 느껴졌다. 그리고 둘의 입에서는 하늘에서 내리는 눈만큼이나 새하얀 입김이 뿜어져 나와 어느 순간 형체를 흩어 이내 사라져 버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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