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희 개인전 & 아트아시아 2012
야곱의 사닥다리 - 파랑
파란색은 오랜 세월동안 색으로서의 자리매김을 받지 못했다.
미적 감성을 자극하지 못해 심지어 무지개의 색에도 포함되지 못했던 파랑은
나의 모시나비를 통해 나만의 심연을 나타내고 무한한 세계적 우주관을 심는다.
그 내면에 말할 수 없는 무한한 가능성, 상상력을 보는 이로 하여금 희망을 주고자 한다.
글 : 금요비(화가. 시인)
2012. 12. 12 - 12. 19 성남아트센터 미술관(T.031-783-8143, 분당)
2012. 12. 11 - 12. 16 Art asia 코엑스A70(T.031-754-5574, 삼성동)
나비와 사다리의 관계 _ 김명희에 대한 소고
지난 30여 년 동안 만들어진 그녀의 수많은 작품들은 매번 반복하여 한 인간이 자신과 자신의 체험에 몰두하고 탐구하여 산출된 것이다. 그것들은 나비나 사다리 또는 다른 이미지들은 작가가 직·간접적으로 체험한 데서 탄생된 작품이다. 그 작품들에서는 수집하려는 성향, 곧 느낀 것을 기록하고 그것을 붙들어 고정시키고자 하는 필연성이 처음으로 열정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비유적인 것 또는 규칙적인 것들이 유추되어 나올 수 있었다. 자기 자신과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신체적으로나 매우 깊이 체험한 것들의 결과로 나온 작품들이다. 흥미와 호기심은 여러 다른 재료들을 가지고 시도해보고 그 안에서 다시 변화 과정을 시험하게 하는 동기가 되었다. 작품들은 그 속에 숨어 있는 작가의 고행적인 인성과 생각을 나타낸다. 외적인 표현방법의 축소, 정신적 힘을 위한 포기. 그것은, 관찰자가 채집하려는 색의 표면적 표현이 아니라, 이 재료의 특별한 존재성에서 뻗어 나오는 형광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에 그 관찰자에게 전해진다. 형광의 사다리만이 아니라 모시나비의 재발견 또는 재해석이 사물 위에 놓이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으로부터 돌출한다. 그녀에게 고유한 미학은 글자 그대로 소중한 가치이고, 미학적 흥미이며 매혹의 덧붙임 없는 즐거움이다.
양끝이 하늘로 치솟은 것은 타협하지 않는다.
쭉 펴진 직선의 도구는 외 길 같은 느낌이다.
두 개의 선을 정점으로 하며 그 가장자리 끝
위험스러움이 아닌 자유 함을 얻는다.
중력의 모든 경험에 대항해서 공간 안
한쪽 끝에만 의존한 채 자유롭게 떠 있다.
예술도 아무리 인위적으로 보일지라도 사물의 연관적인 세계를 가름하게 하는 원칙을 무시할 수는 없다. 사다리는 “공간적인 실체”라고 부르는 것을 자명한 듯이 이해하고 있으며, 그 실체는 그의 회화적인 본질과 조응한다. 그는 “공간적 회화 내에서 그리고 공간을 통해서 해석하고 설치함으로써 그 표현을 얻어내고 있다”라고, 이 말은 매우 간결하게 들릴지 몰라도 사실 그것은 하나의 혁명을 의미한다. 그것은 공간성을 회화로 파악하기 때문이며, 그로써 육중한 현재성을 띤 공간은 새로운 의식 속으로 들어온다. 이론적으로 공간성의 정의(定義)를 논하지는 않았으나, 자신의 실험적이고 실용적인 길을 가면서 전적으로 그에 비견할 만한 결과에 도달한다. 이 회화의 최고의 목적은 그녀 자신이 아주 간결하게 설명한 바에 따르면, 완성된 그림이 속할 수 있는, 즉 적합한 장소에 걸려 있는 것을 느끼는 것이라고 한다. 뭔가 제대로 맞는 것을 만드는 것, 즉 ‘올바른’ 형태를 발견한다는 목표는 대수롭지 않게 들릴지 모르지만 사실은 숭고하다.
왜냐하면 뭔가 ‘올바른 것’을 어떤 장소에 만들기 위해서는, 그 공간을 아주 자세히 알아야 하고, 그것을 매우 원칙적으로 통찰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림을 그리면서, 스스로를 관찰하고 철저하게 분석하며 심어가는 작업을 함께 한다. 그녀는 자신의 예술을 주변에 열심히 알리는 대신 항상 세상에서 예술을 혹은 예술에 포함시킬 수 있는 구석을 찾아 나선다. 그러므로 그의 예술은 경험, 분석과 비평 그리고 이해의 수단이 된다. 전시된 작품을 관찰하면 스케치의 반복 사용의 모순, 본 것이나 생각한 것 같은 윤곽을 종이 위에 놓는 것을 그녀는 분명히 하고 스케치 안에 모든 프로젝트와는 별개의 질서가 존재하고 주변의 것을 특별히 놓고 큰 것을 작게 하고 작은 것을 크게 하고 스스로 중심과 그림자를 만들거나 부피와 면적을 만든다. 그려진 것은 눈으로 본 것과 같지 않으며 모든 다른 작업 형태와 마찬가지로 고유의 미디어적인 진실을 확정한다. 스케치의 과정과 재료를 의식하고 있어야 하는 고유의 인식 방법은 이해되어야 한다.
이 스케치들을 제외하고 두 종류의 선이 형성되고 있다. 하나는 수직선, 수평선 그리고 원처럼 엄격하게 기하학적 구조를 지닌 선으로서 종이의 표면에 기준을 부여한다. 또 하나는 마치 손목에서 즉흥적으로 흘러나오는 것 같은 선으로 종이 위에서 자기가 갈 길을 찾는다. 이 선은 공간을 창조하는 듯한 인상을 주며, 때로는 미궁 속에서 헤매기도 하고 심층 공간으로 달아나기도 한다. 그녀의 나비와 사다리의 관계는 공간적으로 경계를 짓지 않고 있다. 풍경을 묘사하고 있지도 않으며 원근법적인 확산에 대한 것도 전혀 다루고 있지 않다. 나비가 다다르고 싶어 하는 장소적 이동 공간이나 사다리를 통하여 옮겨 가고 싶은 공간적 목적이 하나이다. 즉 전혀 다른 것이지만 자의적이나 타의적이나 그녀가 마음속에 정해 놓은 형이상학적인 세계로 올라가고 싶으나 아니면 날아서 가고 싶은 바람이 작품 속에 내재된 의미이기도 하고 의식 속에 있다. 나비의 이동하는 곳도 하나의 선이고, 또 높은 곳을 기어오르는 것도 선으로 표현하고 있다. 맑고 밝은 코발트블루와 스카이 블루의 세계가 펼쳐지는 몽유도원도 같은 곳일 수 있다. 그 곳은 죽음 이후 사후 세계를 가는 곳이 아닌 현실에서 느끼고 체험하면서 다가오는 몽유도원도 일 수도 있다. 그러한 공간을 묶어 두지 않으려 사다리는 불규칙하게 대비하고 있고, 또 공간의 긴장을 단단하게 쌓아 올린 건축물처럼 보이기보다 어느 곳이든 소통이 가능하다는 의미로서 사다리는 한 곳에 고정되어 있지 않다. 그녀의 크고 작은 조형물은 단색으로 더 강하게 메시지를 던지는 것은 색채적 이론과 공간적 배열을 통한 균형으로 읽고 싶다. 공간 안에서의 물질 묘사를 추구하는 가운데 그의 스케치에서는 바탕 위에서 회화적으로 번지는 잉크부터 선으로 이루어진 조직에 이르기까지 재료의 확실성을 통해 그 공간의 배경을 묻고자 하는 의도가 점점 더 강해지고 있다. 그럼으로써 스케치에서 처음에 염려했던 2차원성의 한계를 이미 극복하고 있으며, 평면 위에서의 확장을 조형적으로 인지할 수 있을 만큼 시야가 넓어졌다.
언젠가 나는 그녀의 그림들은 심리적 풍경화처럼 살펴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것들은 육체(분위기)가 아니라 영혼(기분)을 나타내고 있으며 무한한 시간을 순간으로 옮기고 순간을 무한한 시간으로 고양시킨다. 그녀의 작품 현존은 모든 창작 단계에서 뚜렷하게 감지할 수 있다. 그러한 관점에서 지속적이고 확고한 현실성이 부단하게 추구되고 있으며 그것은 그녀가 사용하는 색에 대한 그의 관계 및 색을 다루는 태도에도 해당된다. 실제로 그녀는 항상 색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의 작품이 전개되어 가는 과정을 살펴보면 그것이 늘 까다로운 대화였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그녀가 몇 가지 안 되는 색에 국한된 색조를 사용한다던가.
그러한 면에서도 그녀는 실험가이며 약한 색을 사용하고 있는 것도 그런 그의 면모를 입증해주는 것이다. 약한 색을 사용하지만 그 결과는 약한 것이 아니라 대단한 다양성을 보여주기 때문에... 그녀의 새로운 전시를 기대한다.
김명희 작가노트
우로 - Rain and dew
“우로(Rain and dew)”는 봄날의 새로운 탄생과 시작을 알리며 상징적 공간에 존재하는 맛에 대한 관심을 끌어들여 일상적인 자연의 결실들을 하나하나 찾아내어 자연의 순리에서 얻은 결과를 예술로 재창시하여 시각적인 맛으로 조형화한 새로운 탄생을 의미한다. 설치되어진 우산의 이미지를 재창조한 하나의 회화적 기법으로서 자연의 섭리인 비의 상징으로 맛을 창출해 내는 과실의 영양을 공급하는 근원적 자연의 이치를 표현하는 순환적 상관관계를 의미한다.
빛과 생명 - Light and Life
겨우내 혹한의 추위에도 불구하고 어느새 파릇한 생명이 용솟음 치고 한해의 결실들이 온 세상을 수놓는다. 하늘은 물기를 머금고 바람 속에 스며들어와 생명의 집을 흔들고 대지는 바쁜 하루를 기지개를 켜며 열매를 토해낸다. 와아~꽃만큼이나 아름다운, 향기로운 과실들에 반한 나비는 맛의 나라에 흠뻑 젖어 춤추는 무희다. 단맛 쓴맛 신맛 짠맛 감칠맛 등 자연의 미감, 즉 인간의 오감을 나비를 통해 역설한다. 맛의 나라는 자연 순환의 결과물이며, 풍요를 위한 시각의 반복을 극대화시키고, 혀끝에 와 닿는 그 짜릿한 맛의 쾌감이 형광등이라는 매체를 통해 광선을 발산한다.
우산에 비친 풍요
겨우내 움츠러들었던 삼라만상은 사실은 그 저장고에 무수한 토양을 품고 있다. 폭설의 끝에 꽁꽁 얼어붙어 있던 고드름조차 햇살을 머금고 깊은 수면으로 자꾸만 스며드는 겨울은 그 벅찬 생명의 움직임의 길이를 이기지 못하고 새싹들을 토해낸다. 그 근원적 생명의 양식인 물은 순환적 생태계에 없어서는 안 되는 꼭 필요한 기본 요소이다. 땅이 용솟음치는 샘물을 뿜어 낼 때 하늘은 비를 토해낸다. 대기 중의 수증기가 찬 공기를 만나 식어서 생기는 물방울이 땅 위로 떨어지는 것이다. 그 비를 상징하는 우산을 천정에 지그재그로 설치하여 비의 리듬을 생동감 있게 연출하여 뚫린 천정으로 마치 하늘에서 비가 오는 듯, 내리는 비를 한껏 강조한다. 하늘을 메우는 듯, 풍성한 우산은 풍요를 암시한다. 파스텔 톤의 색은 봄의 화사함을 만끽하고 오감을 예감하듯 높고 낮은 구성만큼이나 종을 펼친다. 안개비, 는개, 이슬비, 보슬비, 부슬비, 가루비, 잔비, 실비, 가랑비, 싸락비, 날비, 발비, 작달비, 장대비, 주룩비, 달구비, 채찍비, 여우비, 지나가는 비, 소나기, 찬비, 밤비, 단비, 이른 비...등 셀 수 없는 비의 종류의 다양성을 표현한다. 비를 대신한 우산의 연주는 바로 풍요 그 자체이다.
옐로우, 그린, 레드 그리고 블루
색은 바로 그 물체의 성질을 단정한다. 세상의 빛을 대변하고 분위기를 연출하고 때론 사람을 유혹하기도 한다. 색이 말하는 것은 그만큼 넓고 크고 깊다. 우주를 포용하고 마음을 열게 만든다. 그만큼 회색빛 속에 눈발을 날리던 차가운 세상을 변화시킨 것은 그 생물 자체 속에서 자라나는 색의 향연이다. 신비롭고 그윽한 것이 환경을 탓하지 않고 그 자태를 다소곳이 나오더니 어느새 온 세상을 바꾸어 놓는 것이 색이다. 본디 기분을 차분하게 하는 진정 효과가 있으며, 흥분한 마음을 냉정하게 만드는 자제의 색인 파란색은 오랜 세월동안 색으로서의 자리매김을 받지 못했다. 미적 감성을 자극하지 못해 심지어 무지개의 색에도 포함되지 못했던 파랑은 나의 모시나비를 통해 나만의 심연을 나타내고 무한한 세계적 우주관을 심는다. 그 내면에 말할 수 없는 무한한 가능성, 상상력을 보는 이로 하여금 희망을 주고자 한다. 그래서 이 겨울 “야곱의 사닥다리(창 28:12 - 22)”속에 스며든 파랑과 더불어 주변의 다양한 색과 함께 사뭇 어설프지만 깊은 대화를 시작한다.
Parnassius butterfly-white on blue,130.3x162.2cm,acryl
Rain and dew,60.6x72.7cm,mixed media,2012(우산에비친풍요)
Fruits10,33.4x24.2cm,mixed media,2012
Jacob's Ladder-blueI,91x116.8cm,bamboo,korean color on paper,2012
옐로우,그린,레드,mixed media,가변크기,2012
Parnassius butterfly -yellow on pink,53x45.5cm,acrylic on canvas,2012
Jacob's Ladder-poli taste1
VoyageI-I,91x116.8cm,korean ink and color on paper,2012
VoyageIII-2,60.6x72.7cm,bamboo,korean ink and color on paper,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