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비극의 연인들
강형사는 설희주의 과거에 정정 관심을 기울이고 그것을 더 캐기 시작했다.
오민수가 설희주를 죽인 범인일 것이라는 수사관의 시각이라기보다는 이 시대의
불행한 젊은이들의 고뇌와 갈등이 그를 움직인 것이다.
그는 아무래도 자기는 추경감의 세대보다는 오민수의 세대에 가깝지 않느냐
고 반성해 보기도 했다.
불행하면서도 주위로부터 모든 증오를 한 몸에 지니고 있던 설희주는 점점 불가사의한
여자로 강형사에게 부각되어 왔다.
그는 설희주의 학교 시절 친구들로부터 그녀가 고영혜와 가까운 사이였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뿐 아니라 재벌 그룹의 둘째딸인 고영혜가 운동권에 가담하고 있었으며 선배인
오민수를 흠모하고 있었다는 놀라운 사실도 알아냈다.
"그러고 보면 뒤에 시누 올케 사이가 된 고영혜와 설희주
는 오민수를 사이에 둔 3각의 라이벌이 아닌가?"
강형사의 설명을 들은 추경감이 상황을 정리해서 말했다.
"그뿐 아니라 고봉식, 즉 오빠를 소개해서 설희주와 알게 한 것도 고영혜였답니다."
강형사는 고영혜를 만나 그때의 상황을 다시 확인했다.
"새 언니, 설희주 선배는 배신자라는 낙인이 찍혔지요,
물론. 그러나 인간이 궁극에 달하면 가장 이기적인 돌파구를 찾는다는 것을 잘 보여준 여자지요."
고영혜는 설희주를 나쁜 여자로 치부하는 발언을 서슴없이 했다.
고영혜와 설희주가 학교 앞 카페에서 싸우던 이야기를 그녀의 옛날 친구가 강형사에게 들려주었다.
그날은 설희주가 고봉식과 걸혼식을 올리기 전날 밤이었다.
오민수와 설희주가 마지막 작별의 말을 나누던 자리였다.
"극적인 자리군요. 내가 우연히 목격을 해서 미안해요."
고영혜가 가시돋친 말을 앞세우고 두 사람 테이블 앞에 다가섰다.
고영혜로서는 이 장면에 착잡한 심경을 느껴야만 했다.
라이벌인 한 여자가 딴 곳으로 떠나 안도했지만 그 라이벌이 자기 집안으로 들어온다니
심사가 편할 리 없었다.
두 사람은 뜻밖의 목격자 앞에 말을 잃었다.
"설희주씨, 아니 이제 새언니, 결혼식 전날 밤 옛 애인과
의 마지막 밀회! 어때요? 그런데 뭐가 그렇게 슬퍼 그런 표정을하고 있어요?"
"웬일이야? 영혜가 여기에." 설희주는 겨우 입을 열었다.
"내가 못 올 데를 왔나요? 여학생 회장님!
그 고고하고 총명하신 모습은 어디 가고 이렇게 나약해지셨나요?"
"영혜!"
설희주가 나직하지만 위엄 있는 목청으로 불렀다.
"위선자! 뭐? 노동자 착취하는 악덕 재벌 자폭하라?
노동자 농민이 주인 되는 민주화 이룩하자?
내 사랑 내 젊음 노동의 전사되어 장엄한 역사의 불꽃으로 타오르다?
살아 춤추는조국, 노동자 해방 위해?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 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그래서 재벌 그룹의 며느님되셔?"
고영혜는 흥분한 목소리로 설희주에게 피부었다.
그녀가 인용한 말은 데모 현장에서 피맺히게 절규하던 노동가의 노래 가사였다.
"영혜! 그만, 제발 그만!"
설희주는 거의 울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민주 사회의 젊은이는 피를 먹으며 성장하는 것이라고 우리를 일깨운 게 엇그제 같은데,
이제 동지는 간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참으로 불가사의한 일이군요.
무엇이 우리의 투사 설희주씨를 이렇게 놀랍게 변화시켰는지 참으로 궁금해요."
고영혜의 흥분은 조금 가라앉았다.
"하지만 불안해할 건 없어요. 당신과 오민수씨와의 관계,
오빠나 집 식구들에겐 비밀로 해 드리겠어요. 노동 투사 후배의 의리예요.
나는 단지 당신의 카멜레온 같은 그 변신을 조용히 지켜보겠어요.
시누이와 올케라는 이름의 돌 계단 위에 앉아서."
"영혜!"
침묵을 지키고 있던 오민수가 큰 소리로 불렀다.
그러나 고영혜는 들은 척도 않고 돌아서서 카페를 나가 버렸다.
이 이야기를 들으며 강형사는 참으로 묘한 심경에 빠졌다.
어쩌면 소설과도 같은 얼키고 설킨 일들이 현실로 나타났단 말인가?
세상에는 이와 같은 일이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처럼 살인 사건 같은 것이 나지 않으면 걸코 세상에 노출되지 않고
묻힐 것이 아닌가?
설희주의 행동이 1백80도 회전한 것같이 보이지만 실은 자기대로 좌절을 헤치는
방법의 하나로 고봉식을 택했는지 모른다는생각이 강형사에게 들었다.
"그렇다고 희주가 가난이나 좌절감 그 자체 때문에 애정 없는 결혼을 했다고 보진 않습니다.
그녀가 젊은날의 이데올로기는 포기했더라도 재벌 2세와의 걸혼으로 그 차선책
을 나름대로 모색했을 것입니다.
설희주는 적어도 그런 여자였습니다.
결국 모든 것이 허망의 파도 저편으로 스러져 갔지만요."
강형사가 오민수를 다시 만났을 때 그가 고개를 떨구며 비탄의 목소리로 들려준 말이었다.
강형사는 오민수가 설희주를 마지막 만났을 때 그녀의 심경이나 주변의 일을 들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설희주씨가 죽기 1주일 전에 만나고는 만나지 못했다는 것이 사실이오?"
강형사가 수십번도 더 들은 질문을 또 했다.
오민수는 더 이상 대답하기도 싫다는 듯 고개만 끄덕였다.
"설희주를 아직도 증오하고 있소?"
"전 다만."
오민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만 뭡니까?"
"왜 그날 좀 편한 마음을 갖도록 해서 그녀를 보내 주지
못했나 하는 것을 후회하고 있습니다. 그땐 의지 약한 여
자는 할수 없다는 생각과 배신이라는 원망도 했습니다만."
오민수는 식은 커피를 단숨에 들이키고는 이야기를 계속 했다.
"희주는 불행한 여자였습니다. 저는 그녀의 가정의 피눈
물나는 비극을 그녀가 고사장에게 시집간 뒤에야 알았던 것입니다."
오민수는 이렇게 말하고는 괴로운 듯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었다.
"우리는 왜 이런 시대에 이 나라에 태어나야만 했습니까?"
그러나 그 대답은 강형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한편 추경감은 가장 용의점이 많다고 생각되는 고봉식의 사생활을 깊이 캐들어가고 있었다.
고봉식은 부잣집 맏아들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었다.
약간 모자라는데다 낙천주의자이고 낭비벽과 바람끼 등 모든 것을 지니고 있었다.
특히 그와 가까운 여자는 그의 성적 노리개가 된 비서 양경숙이었다.
그들의 동물적인 사랑 유희는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처음에는 정혜의 친구라고 하던 양경숙이 어느 새 그 모양으로 변해 있었다.
아니, 변했다기보다는 처음부터 그랬는지도 모른다.
"왜 그래요? 여기서 뭐 한두 번이었나요?"
고봉식 사장의 집무실. 푹신한 소파 위에 비스듬히 누워 소커트를 걷어붙이고
육중하게 실려오는 고사장의 체중을
즐겁게 받치고 있던 양경숙이 주춤해진 고사장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도무지 정신 집중이 안 돼서 말이야."
고봉식은 갑자기 하던 짓을 멈추고 벌떡 일어났다.
닫긴 했으나 커튼 사이로 들어온 강열한 햇살이 허옇게 드러난
양경숙의 아랫배와 허벅지를 비추었다. 중심부 비너스의 숲이 더욱 까만 윤기를 내었다.
그러나 고봉식은 이미 경숙에게 흥미를 잃은 것 같았다.
"일어나. 도무지 집중이 안 돼."
"집중? 이제 마누라 생각할 것두 없어졌는데 왜 이래요?"
"목소리 죽여!"
양경숙의 앙칼진 앙탈에 고봉식이 주의를 주었다.
그는 바지춤을 올리고 담배를 피워 물었다.
"사장님!"
그러나 양경숙은 쉽사리 물러서지 않았다.
그녀는 하반신을 소파 위에 허옇게 다 드러내놓은 채 꼼짝도 않고 더욱 앙칼지게 불렀다.
여자는 잠자리에서 버림받았을때 가장 비참해지는 것이다.
그녀는 휴지처럼 버려진 자기의 육체를 수습할 생각은 전혀 않고 분노로 얼굴이 일그러졌다.
돌아서서 담배 연기를 뿜고있는 고봉식의 뒷등을 그녀는 이글이글 타는 눈으로
쏘아보았다.
"이렇게 해도 되는 거예요?"
고봉식이 돌아서서 천한 자세로 다리를 벌리고 있는 양경숙을 흘깃 보았다.
쇼커트 자락은 가슴께로 말려 올라가 있고 유난히 깊게 파인 배꼽 밑으로 꽤 탄력 있어
보이는 조그만 아랫배가 희게 빛났다.
왼쪽 다리는 소파에 약간 구부린 채 얹혀 있고,
오른쪽 다리는 정갱이부터 소파에서 느러뜨려져 바닥에 발바닥이 닿고 있었다.
그 발목에는 손바닥만한 흰 팬티가 벗겨지다 말고 걸려 있었다.
짙은 비너스의 숲과 자색 소파의 색깔, 거기에 흰 그녀의 넓적다리는 대단히 육감적이었다.
그러나 고사장의 눈에는 권태롭고 추잡한 여자의 하반신으로만 보였다.
"빨리 일어나지 못해."
고사장은 조금 미안했던지 양경숙의 팔을 잡아 일으키며말했다.
"사장님, 또 경찰서 불려 갔댔어요?"
양경숙은 생각난 듯 부시시 일어나 앉아 팬티에 왼발을 끼어넣으며 말했다.
그러나 고봉식은 묵묵부답인 채 벽에 걸린 아버지 고회장의 초상화를 뭍끄러미 들여다
보고 있었다.
"지금 혐의자가 식구 중에도 있어요?"
양경숙은 분이 풀어진 듯 옷매무새를 고치며 조금은 걱정스럽게 물었다.
"우리 식구 몽땅."
고봉식이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나두?"
그러나 고봉식은 그 말에 대답을 않고 책상 서랍을 열면서물었다.
"적금이 얼마라구? 그 구멍 맨날 쑤셔 넣어도 끝이 없어."
"백80만원이던가."
고봉식은 책상 서랍에서 수표 한 장을 꺼내 집어 던지다시피 양겅숙에게 주었다.
"3백이야."
"어머! 고마와요. 근데 따져두고 넘어갈 게 있어요.
그 구멍 끝이 없다는 야비한 말 취소하세요."
고봉식이 양경숙을 흘깃 보았다. 농담으로 한 이야기가 아니란 것을 알자 얼른 대답했다.
"그래, 취소다. 취소."
"그리고, 또 한 가지 따져둘 게 있어요."
양경숙은 내친 김이라는 듯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또 뭐야?"
"앞으로 어떻게 하실 거예요? 사모님도 없어졌으니까 이
제 사장님도 핑계댈 게 없어졌잖아요? 예식장 날 안 받아요?"
"뭐? 예식장은 왜?"
"왜라뇨? 나 면사포 안 씌우고 이대로 둘 거예요?
난 싫단 말예요. 밤낮 사장님 소파에서 스커트나 걷어올리고 누가 들어올까봐
도둑질하듯 끝내는 그런 사랑 이젠 싫어요."
"왜 우리가 이 방 소파에서만."
고사장은 무어라고 말을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치사한 변명 같았던 모양이다.
"그래요. 대관령 콘도 별장, 제주도 호텔, 그런 데도 몇번 갔지요.
하지만 그건 우리 가정이 아니란 말이에요. 나도 가정을 갖고 싶어요.
이렇게 숨어서 도둑 사랑을 하는게 벌써 2년도 넘었어요.
나도 화장대 앞에서 입술 그리며, 화려한 잠옷 입고 당신을 기다리는 생활을 하고 싶어
요. 부엌에서 맛있는 찌게 끓이며."
"당신?"
양경숙의 입에서 무심코 나온 말에 고봉식은 섬한 거부감을 느꼈다.
그녀가 고사장을 당신이라고 부른 것은 처음 이었다.
양경숙은 설희주가 죽고 나자 부쩍 고사장을 조르기 시작했다.
이제 거리낄 것 없다는 듯이 때로 자기 서방 다루듯 하는 태도가 점점 노골적으로 되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고봉식은 꽁무니를 뺐다. 마침내는 그녀와 사랑 놀음도 제대로
끝낼 수 없는 처지에까지 오고 말 았다.
"언제까지 이러구 기다려야 해요?"
양경숙은 당신이라고 의식적으로 써 보았는데 그 반응이 의외로 나쁘다고 생각했는지
톤을 조금 낮추었다.
"지금 희주 죽은 지 며칠 되었어? 사람이 왜 그렇게 성미 가 급해?
지금도 우리 식구들은 수사 대상이 되어 있단 말 이야.
그런데 뭐 걸혼식 날짜를 잡자고? 우리가 지금 얼씨구나 하고 덜컥 걸혼을 해봐.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어. 또 형사 나부랭이들은 어떻게 보겠어? 옳다구나,
너희들이 설희주를 죽였구나. 그리고 죽이자마자 결혼을 해? 이렇게 밖에
더 생각하겠어?"
고봉식이 자기딴에는 차근차근하고 논리적으로 설명했다.
"그럼 우리 멀리 날랐다가 와요."
양경숙은 자기가 경솔했다고 생각한 듯 엉뚱한 말을 했다.
"날라?"
"우리 프랑크푸르트 가기로 했잖아요. 사장님이 먼저 떠나고 나는 휴가 얻어서 뒤따라 가기로."
그랬었다 몇달 전에 세운 고봉식의 계획이었다.
고사장 출장을 이용해 양경숙과 해외에서 만나 한 2주일쯤 보내고
그녀가 먼저 귀국한 뒤 고봉식은 일본을 거쳐 천천히 들어올 계획을 세워 놓고 있었던 것이다.
"그거 당분간 중지야."
"예? 여권까지 다 내놓았는데."
양경숙은 크게 실망했다. 그녀는 소파에 털석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나중에. 봄쯤에나 가자구."
"왜요?"
"수사 끌날 때까지 금족령이야. 우리 식구 모두 꼼짝 말래."
"무엇이라구요? 누가 그래요? 명왕성 그룹이 어떤 재벌인데 형사 새끼들이 그 따위 소릴 해요?"
"이놈의 사건 빨리 끝나야 할 텐데."
고봉식은 주먹을 불끈 쥐어 보면서 중얼거렸다.
그들의 대낮 정사가 이렇게 비참하게 끝나기는 처음이었다.
설희주가 없어져 주면 얼마나 홀가분하고 재미있겠느냐고 생각해 온 두 사람의 모습은
정반대로 나타났다.
양경숙이 혹시 용의자가 아닐까고 그녀의 뒤를 추적하던 추경감은 그녀의 부도덕한
여러 면을 발견하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예쁘고 젊고 학식 높은 여자가 도덕적으로 이렇게 타락할 수 있는가 싶었다.
나이 스물네 살. 일류 대학 연극영화과를 나왔고 학교 다닐때는 미스 유니버시티라고
불릴 정도로 미인이었다. 성 격이 대담쾌활하고 집안도 꽤 유복한 편이었다.
그런데 양경숙은 대학 다닐 때부터 두세 명의 보이프랜드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대학 3학년 때 학교 근방에 살아야 된다는 핑계로 아파트를 얻어 혼자 나와 살았다.
그때부터 생활이 불규칙해졌고 두세 명의 남학생과 번갈아 동거를 하다시피 했다.
양경숙은 능란한 말솜씨와 뛰어난 미모로 고봉식을 사로 잡는 일쯤은 식은죽 먹기였다.
고봉식은 쉽게 그녀에게 포로가 되었다.
양경숙은 돈도 뜯어내고 인사에도 관여해 자기 단짝 친구인 희정의 남편을 계속
승진시켜 명왕성 자동차의 기획실장에까지 오르게 했다.
그러나 그녀는 괴로운 일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질 나쁜 건달들이 그녀와 고사장의 관계를 알고 계속 용돈을 뜯어 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가 타가는 곗돈이라는 것은 거의 그런 건달들 호주머니에 들어가고는 했다.
양경숙의 유일한 희망은 고봉식과 결혼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녀의 속셈은 그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고봉식의 재취로 들어간다고 하면 집에서도
맹렬히 반대할 뿐 아니라 그녀의 자존심도 용납하지 않는 일이었다.
그녀는 고봉식으로부터 결혼하겠다는 결심을 받아낸 뒤
그에 상당하는 재산을 울궈내고 물러설 생각 같았다.
막대한 재산을 손에 넣기만 하면 자기 또래의 멋진 남자를 골라 결혼하겠다고 그녀의 단짝
친구들에게 말한 일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