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선대가리
최 화 웅
예부터 명절 뒤에는 콩나물조림과 열구지탕이 일품이었다.
이 두 가지 음식 맛은 생선이 좌우한다. 그것도 먹다 남은 생선대가리 중에서 뼈가 억센 도미대가리 맛이 으뜸이다. 어두일미(魚頭一味)라 “생선의 감칠맛은 대가리에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버려도 그만일 생선대가리가 깊은 맛을 우려낼 줄 그 누가 알았을까? 나는 생선대가리를 넣고 졸인 콩나물조림과 얼큰한 열구지탕을 유별스레 좋아한다. 빼어난 맛과 어린 날의 추억이 고스란히 살아 있기 때문이다. 열구지탕은 한자로 즐거울 열(悅)자에 입 구(口)자를 써서 悅口之湯이라 쓰는데 “입맛에 맞는 국” 또는 “입이 즐거운 탕”이라는 뜻이다. 도시락 반찬으로 담은 콩나물조림 국물이 흘러 그려놓은 지도얼룩에서 어릴 적 추억이 피어나고 열구지탕 밥상에 오르면 세상 부러울 게 없다.
열구지탕은 우리네 서민들이 즐기는 전통음식이다.
음식은 대체로 찌거나 굽고 볶거나 끓인다. 국물이 있는 음식은 국과 찌개, 탕과 전골로 나누어지는데 전골은 궁중음식에 속하는 것으로 굽이 있는 신선로에 숯불까지 넣어서 격을 갖춰 상에 오른다. 국과 찌개, 탕과 전골은 국물과 건더기의 비율에 따라 붙여진 이름이다. 그 비율은 국과 탕의 국물이 가장 많고 찌개와 열구지탕은 반반 정도, 전골은 건더기가 더 많다. 탕은 흔히 달여서 마시는 한약을 일컫거나 국을 높여 이르는 말이다. 국을 제상에 올릴 때는 탕이라고 하지 않던가?
명절 뒤에 남은 음식으로 끓이는 열구지탕 맛은 정성의 결정체다.
열구지탕은 그릇에 재료를 고루 넣고 물과 불로 끓이면 그만이다. 그러나 열구지탕은 벙거짓골에 엄마의 손맛으로 끓여야 한다. 중국으로부터 처음 신선로가 전해졌을 때는 열구자탕(悅口子湯)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형식이 내용을 지배한다.”는 말처럼 열구지탕도 그릇에 따라 그 맛과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진다. 열구지탕이 상에 오르면 다른 찬은 모두 뒷걸음질을 치듯 물러난다. 그만큼 맛의 위력을 가진다. 열구지탕이라는 음식이름은 고전소설 ‘이춘풍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춘풍전’은 조선 숙종 때 서울과 평양을 무대로 두루 설쳤던 한량 이춘풍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시대를 풍자한 판소리계 고전소설이다.
“춘풍이 오입하여 하는 일마다 방탕하고, 세전지물(世傳之物) 누만금(累萬金)을 남용하여 없이 할 제, 남북촌(南北村) 오입쟁이와 한 가지로 휩쓸려 다니며, 호강하며 주야로 노닐 적에, 모화관(慕華館) 활쏘기와 장악원(掌樂院) 풍류하기, 산영에 바둑 두기 장기 골패 쌍륙(雙六) 수투전(數鬪牋) 육자배기 사시랑이 동동아 엿방망이 하기와, 아이 보면 돈 주기 어른 보면 술대접하여, 고운 양자 맑은 소리, 맛 좋은 일년주(一年酒)에 벙거짓골 열구지탕 너비할미 갈비찜에 일일장취 노닐 적에, 청루미색(靑樓美色) 달려들어 수천금을 시각에 없이 하니, 천하부자 석송인들 그 무엇이 남아돌까, 티끌같이 없어지고 진토같이 다 마른다.“ ‘이춘풍전’은 조선 후기의 사회 부패상을 해학과 풍자로 그려나갔다.
명절을 보내고 가족들이 떠난 뒷자리는 썰렁하다.
왁자지껄하던 분위기는 숨을 죽이고 멀리서 새소리만 들려 집안은 절간 같은 적막강산이다. 그럴 때면 울적한 마음을 달래줄 열구지탕 안주에 한 잔의 소주가 적절한 처방이다. 어쩌다 열구지탕을 끓이는 날 아내에게 “뭘 더 넣어 볼까?”하고 능청을 부리며 기분을 바꿔 볼만하다. 명절 뒤에 널브러진 생선대가리와 전, 찜과 튀김, 나물과 탕을 모아 그 위에 콩나물과 두부, 버섯과 땡초를 넣고 팔팔 끓여보라. 그 얼큰한 맛에 어떤 생각도 잠잔다. 열구지탕을 끓일 때 상기해야할 일은 생선대가리가 맛을 좌우한다는 것이다. 나도 한 번씩 생선 대가리 노릇을 하는지 돌아보게 한다. 약한 불에 천천히 달구어야 제대로 맛을 내는 열구지탕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에게 입맛의 기억을 되살린다. 희미한 추억의 불빛을 지키는 열구지탕이여!
열구지탕(悅口之湯)
성 찬 경
한 열흘 아내가 피정(避靜) 가 있는 동안
나는 부엌 주인이다. 전권을 행사한다.
절대자유 실험가다. 요리왕이다.
요리의 근본원리를 완전 터득한다.
요리는 세 가지다. 날 요리 발효 요리 불에 댄 요리.
끓이는 요리는 물과 불의 합작이다.
다 나오라 냉장고 깊은 곳 해묵은 것들.
버섯 당근 은행 마늘 고추 꾸미 닭다리.
부글부글 끓인다. 전기냄비가 나의 여의주다.
셀러리만은 날로 먹는다. 절대 끓여서는 안 된다.
간은 새우젓으로 한다. 짜면 물을 붓는다.
뭍 바다 하늘 맛이 얼싸안고 춤을 춘다.
태초에 맛이 있었다.
열구지탕 아닌가.
첫댓글 작은 숟가락에 담긴 국물이 세상의 깊은 맛을 가지고 있으니, 세상을 다 가지는 것이 너무도 쉬운 거 같습니다.~^^
안드레아 수사님! 그간 잘 계셨죠? 열구지탕으로 소박한 밥상을 마주하고 싶습니다.
최국장님 추석은 잘 지내셨는지요? 열구지탕을 좋아 하시는군요. 저는 그저 안사람이 처치 곤란하여 몽땅 넣고 끓여 주는줄 알았습니다. 이렇게 역사가 오래된 음식인줄은 몰랐습니다. 감사합니다.
열구지탕..오늘 처음 들어봤습니다...저도 한번 시도해 보아야겠습니다...맛난 열구지탕을...^^*
정말 맛이있는데 우리식구들은 냉대를......................
저렇게 끓이는 찌개를 지금까지 주욱 '잡탕'이라고 불렀습니다.
그것이 찌개한테 참 미안합니다. 나도 이젠 '열구지탕'이라고 불러줘야겠네요.
서민의 양식, 열구지탕의 역할과 이름을 제대로 찾아줘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