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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예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三道軒정태수
중국 서예세미나 답사기
왕희지에게 서예의 길을 묻고 오다
청림 신은숙(계명대 한학촌 서화아카데미 연구생)
“백번 듣는 것 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낫다”는 속담이 있다. 그 동안 서예공부를 하면서 꼭 중국 현지에 가서 그들의 글씨와 그들이 살았던 현장을 직접보고 싶었다. 계명대학교 한학촌 서화아카데미에서 먹향을 함께 해 온 연구생들과 서예과 학생 및 졸업생들이 5일 동안 중국산동성 서예유적을 살펴보는 세미나를 떠났다. 아직도 생생한 답사때의 감흥을 되새겨본다.
1월 10일. ‘중국으로 출발, 정희하비 답사’
새벽 5시, 미리 맞추어 놓은 휴대폰 알람소리에 다른 날 같으면 게으름을 피웠을텐데 오늘은 이불 속의 유혹을 뿌리치고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한다. 미리 싸 두었던 여행가방 속을 다시 점검하고 밑반찬 몇 가지랑 작은 담요, 여권도 집어넣는다. 7시 10분까지 동대구 고속터미널로 집결하기 위해 대문을 나서니 여행용 가방에 달린 바퀴소리만이 덜덜덜. 어두운 새벽, 골목길의 적막을 깬다. 동대구고속터미널에 도착하니 조금 이른 시간인데도 몇 분이 와 계신다. 저 분들도 나처럼 여행에 대한 기대와 설레임으로 잠을 설쳤나 보다. 하나, 둘씩 이번 세미나에 참석하기 위해 모든 분들이 도착하고, 인원점검을 한 후 리무진을 타고 김해 공항으로 이동을 했다.
교수님께서 만든 답사자료집과 카페에 올라온 여러 자료들을 이미 여러 번 읽어 본 터라 머릿속으로는 중국을 몇 번이나 왕래한것처럼 낯설지도 않은 곳이지만 막상 출발을 앞두고 수속을 밟고, 짐을 보내고 대기하는 동안 4박5일 동안 펼쳐질 새로운 것에 대한 기대로 가슴은 부풀대로 부풀어 터질것만 같았다. 비행기가 이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높은 고도로 올라가니 작은 창 아래 오밀조밀한 세상은 동화 속의 세상인 듯 작고 앙증맞다. 뭉게구름 속을 헤치고 2시간 정도 지나니 어느새 우리가 탄 비행기는 우리나라보다 시차가 1시간 늦은 중국의 청도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칭다오"란 영어표기가 처음 와 본 곳인데도 이번 여행의 시작과 끝을 함께하는 곳이라 정겹기만 하다.
현지가이드 김광수씨와 인사를 나누고 반점(중국에서는 식당을 반점, 호텔을 대반점이라 한다)으로 가서 중국에서의 첫 현지식으로 점심식사를 하고 우리 세미나의 첫 번째 장소인 래주의 운봉산으로 이동했다. 일반 관광객이 잘 찾지 않는 곳이니 헤매는 것도 당연지사. 중국인 버스기사 아저씨가 몇 번이나 차를 돌려 겨우 도착하니 사방은 이미 깜깜하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는 우리 교수님! 인적이 드문 곳이라 불도 켜주지 않고 관리인도 보이지 않는다. 한국에서 왔다고 특별히 부탁을 하자 건물 곳곳에 불을 밝혀 주었고, <정희하비>에도 조명을 넣어주었다. 미리 공부하고 온 마애각석을 직접 대하니 감개가 무량했다. 너그럽고 표일함에 중점을 두었다는 정도소의 <정희하비>가 우리 앞에 나타났다.
글씨는 마음의 소리여서 자신의 의지에 따라 면모와 풍격이 다양한 서예체계를 이룬다는데 도교, 유교, 불교가 서로 나타나 소멸하고 성장하는 과정에서 정수를 흡수하고 여러 사람의 장점을 널리 취해 한 용광로에 녹여 독특한 경지를 이루었다는 그의 글씨를 눈앞에서 보고 있으니 감개가 무량하다. 강유위가 <광예주쌍즙>에서 "높고 수려한 기운과 향기로움이 눈에 넘친다. 형체가 고상하고 기운이 표일하며 조밀한 운치에 이치가 통한다. 마치 신선이 나무에서 퉁소를 불고 바다에 뗏목을 띄워 객이 된 것과 같아 사람으로 하여금 상상을 다할 수 없게 한다."라고 극찬하였는데 서예를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아 그만큼은 아니더라도 그 느낌은 조금 알 것 같다.
한참을 감격해 하시던 교수님의 "다시 오기는 힘든 곳입니다"라는 그 말씀에 더 절실해져서 다시 한 번 북조의 서성이라는 정도소의 비를 꼼꼼이 살펴본다. 삶이든, 사랑이든, 공부든 언제나 그렇듯 마지막이라 생각하면 더욱더 절실해진다. 이곳도 마찬가지이리라! 교수님 말씀처럼 내가 살아서 다시 이곳을 찾을 수가 있을까? 눈에, 마음에, 모두모두 담아 가야지하고 욕심을 더 부려본다.
<정희하비> 외에 다른 각석을 보기 위해 운봉산에 올랐다. 어둠을 뚫고 휴대폰 조명에 겨우 의지하여 산에 오르니 커다란 자연석에 새겨진 마애각석이 눈, 비에 훼손되지 않게 하려고 각석 위에 기와지붕을 만들어 놓은 중국인들의 섬세함이 놀랍다. 국토의 70%를 산이 차지하여 각종 나무와 야생화로 가득한 우리나라의 여러 명산에 비하면 낮고 바위로 이루어진 운봉산은 초라하기 그지 없지만 운봉산이 좋은 이유는 그 속에 문화가 있기 때문이라 한다. 산을 내려오면서 처음 산을 오를때와는 산이 다르게 보였다. 나도 내면이 더 아름다운 그런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해 본다.
<운봉산의 정문공하비> 앞에서
래주의 신세기호텔에 도착하여 라운지에 가방을 일렬로 모아두고 식당으로 옮겨서 느긋하게 저녁식사를 했다. 회전식 유리판위에 중국 동부지방의 산동성 요리들이 하나씩 날라져왔다. 각종 야채를 많은 기름에 볶거나 우리나라 탕종류의 국물이 많은 생선요리, 닭고기나 돼지고기 볶음이 주를 이룬다. 공동경비로 햇반과 김, 컵라면을 박스로 준비해왔지만 아무도 준비해온 우리 음식을 찾지 않고 현지식으로 잘 드신다. 나도 기름이 하도 많아 윤기가 좔좔 흐르긴 하지만 기대 이상인 파랗게 볶은 배추요리와 고기로 맛있게 저녁을 먹었다.
저녁을 먹은 후 이미 정해진 나의 룸메이트 연당선생님이랑 우리방에 들어서니 하얀 시트의 깔끔한 싱글 침대가 두개! 가족들에게서 벗어나 혼자 맞는 밤이 언제였는지. 자유로움을 온 몸으로 느끼며 내일 일정을 위해 포근한 이불속으로 들어갔다.
1월 11일. ‘위방 십홀원, 산동성박물관, 산동 신화서화원 전시장’
아침 6시에 모닝콜을 받고 일어나 씻고 준비하여 7시에 또 현지식으로 식사를 하고 두 번째 답사장소인 위방으로 이동하였다. 위방시에는 천연관광자원이 풍부하여 "아름답고 영롱하며 남북원림의 특색을 고루 갖춘" 십홀원이 있다. 청나라 때 위방에서 제일 부자였던 사람이 주거용으로 조성했던 원림인데 이곳에 연못을 파고 그 흙을 쌓아 산을 만들어 정원을 꾸몄는데 중국 공산당이 집권을 한 후에는 이 정원을 국유로 삼았고, 1978년 위방시 박물관을 이곳으로 옮겨 일반인에게 공개 된 곳이라 한다.
십홀은 이 정원의 주인이 마치 10개의 홀을 깔아 놓은것처럼 작다는 뜻으로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미로같은 작은 홀을 돌아 다니다 보니 작은 무대가 보였다.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이 집의 주인은 공연을 좋아하여 공연가들을 자주 집으로 초빙하여 즐겼다고 한다. 얼마나 큰 부호였으면 집안에 이런 무대까지 갖추었을까? 가끔 드라마에서 보면 영화관을 통째로 빌려 연인에게 감동을 주는 장면을 보긴했지만 이런 엄청난 재력에 입이 다물어 지지가 않는다. 넓이가 불과 2000평방미터인 이 정원에는 누대, 정자, 가산, 연못, 객방, 서재, 회랑, 작은 다리 등 20여개의 크고 작은 건축물이 있으며 60개의 방이 있다. 건축물이 늘어선 형태는 아주 엄정하고 적당한 밀도를 유지하고 있어서 북국의 호방하고 대칭적이며 웅장한 건축특색을 잘 드러내고 있으며, 남국의 섬세하고 그윽하며 변화가 많은 특색도 겸하고 있다고 한다.
맑은 물이 담긴 연못과 그 주위를 둘러싼 산과 건물들의 형상이 물 위에 비치는 모습은 신비롭기 그지없다고 원림전문가에게 평가받기도 했던 이 연못이 지금은 메마른 바닥을 드러내고 있어 안타깝기 그지없다. 봄이 되어 연두색 수양버들이 하늘거리고, 형형색색의 꽃들도 만발하고 맑은 연못에는 물고기들이 자유롭게 헤엄치고 푸른 산과 누각이 물 위에 투영되어 아름다움이 극에 다다랐을 그 시절의 정원을 상상해 본다.
십홀원 한 방에는 시, 서, 화에 모두 능한 정판교의 작품전시실이 마련되어 있었다. 그의 천재성과 청빈했던 삶을 돌아보았고, 대나무와 난초를 멋지게 휘호한 작품도 오랫동안 감상하였다. 사군자를 공부하면서 정판교의 작품을 보고싶었는데 직접 대하니 눈이 호사를 한 것 같다. 일행 중에 탁본을 구입하는 사람도 있었다. 중국사람들의 서화작품에서는 그들의 활달한 운필이 눈에 띄었다.
십홀원을 빠져 나오니 매년 국제 연 축제가 열리고 수 십 개의 용 모양의 연을 잇댄 용연이 유명한 곳이라 그런지 기념품가게마다 여러 형태의 연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어릴 때 달력을 오려 붙이고 대나무살을 가늘게 덧대어 가오리연을 만든 경험은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 연이 바람의 방향을 따라 자유롭게 높이높이 날아오르면 내 꿈도 두둥실 떠오르는 것 같아 희망에 가득찼던 행복한 기억. 여러 가지 고운색채로 장식된 화려한 연들을 보고 있으니 문득 동심으로 돌아간다.
십홀원
십홀원을 관람한 뒤 오후에 산동성 성도인 제남으로 이동해 산동성박물관에 도착하니 해는 벌써 뉘엿뉘엿 넘어가고 주변에는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중국이란 나라가 워낙 넓다보니 이동하는데도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아쉽지만 한 곳이라도 더 보려면 빨리빨리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최근 신축된 산동성박물관은 중국에서 규모가 두 번째라고 한다. 이번 중국여행에서 보고 느꼈지만, 중국의 건축물들은 대체로 실내의 실용성과 견고함, 외관의 미적인 것을 고려하기보다 크기나 높이에 중점을 두고 그저 하늘 높은줄 모르고 올라가거나 엄청나게 커다란 규모의 건물들이 많은것 같았다. 우리나라 전통 건축물들이 아담하고 소박한데 비해 중국 전통 건축물들은 크고 웅장했고, 현대 건축물들도 중국인들의 풍격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박물관 안 광장의 천장이 얼마나 높은지. 신비로운 우주를 연상시키는 초록색은 얼마나 매력적인지. 나는 중국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보여주는 수많은 소장품과 귀한 보물, 여러 토기들과 유물보다 산동성 박물관의 그 신비로운 천장과 굵고 화려한 황금색 기둥에 더 매료되었다.
산동성박물관의 고고유물을 견학하고 우리나라 문화체육관광부와 같은 중국의 중앙부서에서 관리하고 후원한다는 산동신화서화원 전시장에 들렀다. 중국의 유명 서화작가들의 공동 작업장 겸 전시실이었는데 붓글씨를 쓴다는 것 하나로 국경을 넘어 교감이 되는듯했다. 원장이 낯선 우리를 환한 미소로 반겨 주었다. 익숙한 먹향기에 마음이 편해져서 이곳저곳을 편하게 둘러보고 오늘의 일정을 마무리했다.
1월 12일. ‘가선(假仙)이 되어 태산(泰山) 등정, 장천비, 태산각석 답사’
아침일찍 일어나 태산에 오르기 위해 조식을 든든히 먹은 후 장갑이랑 목도리 마스크 등 만반의 준비를 하여 태산 입구에서 중천문까지 셔틀버스를 타고 갔다. 구불구불한 산길을 한참이나 달리는 동안 우리나라 산세와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맑은 물 얇은 얼음, 아카시아 나무와 참나무 종류의 회색 나무들을 보면서 마치 우리나라 어느 겨울산에 오르고 있는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태산은 우리에게도 친근한 산이다."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라는 시나 "티끌모아 태산 "이라는 속담에서 흔히 들어온 산이라 케이블카를 타고 정상 가까이로 이동하는 내내 마음이 편안했다. 케이블카에서 내리니 태산의 맑고 차가운 공기가 두 뺨을 얼얼하게 한다.
얼마 전 눈이 왔는지 곳곳에 눈이 쌓여있다. 차가운 바람을 그대로 다 맞으며 태산 정상까지 오르는 동안 "중국 천연 서예전시장"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초서, 예서, 전서, 그리고 여러 가지 서풍으로 새겨진 무수한 석각을 볼 수 있었다. 내용은 대부분 역대 제왕의 봉선제문, 사찰의 창건 및 재건 기록, 석경이나 묘비명, 태산을 기리는 시문, 대련 등이라 한다. 태산에 이렇게 석각이 많은 이유는 그만큼 좋은 바위가 많았고 중국의 동쪽 명산에 기원을 남기고자 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나라의 산자수명한 곳의 평평한 바위에도 석각이 많은걸 보면 중국 사람들이나 우리나라 사람들이나 무언가 흔적을 남기고 싶은 욕구는 같은가 보다.
태산 정상에 오르니 중국의 천황이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사당인 대묘가 있었다. 나는 어떤 종교도 없지만 그 안으로 들어가 소원을 빌면서 절을 하였다. 하늘과 맞닿은 듯한 태산을 내려오면서 교수님께서 "오늘 무엇을 느꼈나요?" 하고 물으셨다. 나는 내가 무엇을 느끼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도 않고 아무 생각없이 그저 다른 사람을 따라서 산을 올라갔다가 내려오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들었다. "지금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지만 집에 돌아가면 어떤 생각이 날 것 같아요!"라고 대답했다.
태산의 무수한 석각
태산에서 내려온 뒤 점심식사를 하고 대묘박물관에 수장된 <장천비>와 <태산각석>을 살펴보러 갔다. 한나라 예서 가운데 독특한 풍격을 지닌 <장천비>를 직접 보니 가슴이 설레었다. 그리고 진시황이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뒤 소전(小篆)으로 문자통일을 하고, 태산에 자신이 통일한 소전으로 남긴 <태산각석>을 보았다. 남은 비석조각에서 불과 몇 글자만 발견할 수 있었다. 처음 전서를 공부하면서 임서해 본 각석을 직접 보니 반갑기 그지없었다.
오후에 세계 4대 성인 중 한 사람인 공자님의 고향인 곡부로 이동하였다. 광활한 대지를 몇 시간이나 달려 겨우 곡부에 도착하니 공묘의 문을 닫을 시간이라 한다. 할 수 없이 <궐리빈사>란 호텔에 짐을 맡겨두고 숙소근처를 개인적으로 관광하기로 하였다. 틀에 짜인 고등학생시절을 벗어나 대학에 처음 들어갔을 때가 생각났다. 많아봐야 하루에 두, 세 시간의 수업이 전부이고 나머지 시간은 알아서 활용해야 했을 때. 갑자기 주어진 그 자유가 감당이 안되던 그때가. 빡빡하게 짜여진 일정에 맞추어 바삐 움직여 온 우리에게 갑자기 주어진 자유시간! 태양도 아직 지지 않았고 낯선 이곳에서 그 시절처럼 이렇게 한가한 오후 시간을 의미있게 보내기 위해 우리는 재래시장에 가보기로 하였다. "전화위복"이란 말이 딱 어울렸다. 우리는 삼삼오오 짝을 지어 재래시장을 활보했다. 맛보기는 조금 꺼려지는 노점상에서 파는 꼬치랑 음료수. 제멋대로 자전거나 삼륜오토바이를 타고 휑하니 지나가는 곡부 사람들. 그래도 중국에 도착한 이후로 사람들의 왕래가 제일 빈번하고 활기차며 사람사는 냄새가 나는 곳이라는 인상을 주는 곳이었다. 공자덕분에 먹고 사는 지역이라 했던가?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민경진학장님이랑 박명호도서관장님, 심곡선생님은 우리가 그냥 지나쳤던 이 시장에서 양꼬치를 안주 삼아 곡부의 명주인 공부가주를 한잔씩 하셨다고 한다. 시장을 한 바퀴 돌고 기념품가게에 들러 저마다 가족들에게 선물할 도장이나 자신의 서화작품에 찍을 인장을 새겼다. 나도 우리나라 돈으로 8천원밖에 안되는 가격으로 하나 새겨 달라고 주문했다. 저녁 7시, 공자의 고향 곡부에서 맞는 이 순간의 가슴벅참은 현장휘호로 이어졌다. 이렇게 필요할줄 알고 미리챙겨오신 연당선생님의 종이와 붓, 먹으로 휘호자리가 펼쳐졌다. 먼저 교수님께서 오늘의 감흥을 노자와 공자가 설파한 이후로 대대로 도덕군자와 선비들이 수신의 덕목으로 삼아 온 진수무향(眞水無香, 참된 물은 향기가 없다)이란 사자성어를 일필휘지하셨다. 사물의 진면목을 꿰뚫어 보는 것으로 사람의 됨됨이는 물론 무엇이 겸양의 미덕이며 화합의 요체인지 가장 짧은글이지만 의미가 담긴 내용이었다.
이어서 서예과출신 작가님들과 학생분들, 그리고 우리 한학촌 서화아카데미 연구생들이 평소 좌우명처럼 삼는 글들을 휘호하였다. 한창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 우리 서화아카데미의 백향선생님께서 "날마다 새롭게 또 날마다 새롭게"라는 "일일신 우일신(日日新 又日新)"이라는 글을 멋지게 휘호하셨다. 마지막으로 교수님께서 우리가 오늘 묵어야 할 호텔측에 "한중우호는 이 궐리빈사호텔이 다리 역할을 한다는"뜻의 글을, 가이드 김광수씨에게는 그의 이름이 들어간 멋진 글을 즉석에서 지어서 휘호해 선물로 주면서 이번 여행을 잘 이끌어준 고마움을 전하셨다. 나는 서력이 짧아 망설이다 좋은 경험한다 생각하고 교수님께서 지어주신 아호 "비온뒤 맑게 개인 숲"이라는 뜻의 "청림(晴林)"을 부들부들 떨면서 적어 보았다. 어설픈 글씨를 쓰면서 교수님과 작가님, 여러 선배님들 앞에서 아직은 부끄러웠지만 오늘의 이 경험이 앞으로 나를 더욱 자라게 해 줄 것을 믿는다. 휘호자리를 파하고 태산과 공자님에 관한 담소를 나누면서 밤은 깊어갔다.
태산에서
1월 13일. ‘공부, 공묘, 공림, 왕희지고택, 서법광장 답사’
어젯밤 휘호대회의 떨림이 가시지 않은 채 다시 맞이한 아침! 그토록 와보고 싶었던 공자님을 만나는 날이다. 공자(孔子)는 기원전 552년 춘추전국시대 노(魯)나라에서 태어나 기원전 479년에 돌아가셨으며 이름은 구(丘) 자는 중니(仲尼)이다. 노나라에 벼슬하여 대사구(大司寇)가 되었으나 물러나 진, 초 등 여러 나라를 순회하며 13년간을 방랑한 끝에 고향에 돌아와 제자를 기르고 경서를 정리하였는데 제자가 3천이나 되었고 육례(六藝)에 능통한 자도 72명이나 되었다. 그는 교육자, 철학자, 정치사상가였다. 인(仁)을 근본으로, 효(孝)와 제(悌)를 실천윤리로 하는 덕치주의를 역설한 유교의 시조인데 그의 언행을 모아 저술한 책이 『논어』이다.
공자님의 도시인 곡부(曲阜)에는 삼공(三孔)이 있다, 즉 공묘(孔廟), 공부(孔府), 공림(孔林)이 그것이다. 공묘는 공자님의 사당, 공부는 공자님의 후손들이 사는 곳, 공림은 공자님과 후손들이 묻힌 씨족묘지이다. 공묘는 남북의 길이가 약 1킬로, 면적은 22만 제곱미터, 기원전 480년, 공자 사후에 그의 제자들이 공자가 직접 강의하던 행단에 사당을 지어 위패를 모신 것이 시작인데 일 년 뒤 주나라 경왕 12년에 애공이 개조하여 제사를 올렸고, 동한 말(153년)의 환제가 처음으로 국가적 차원에서 묘당을 지었으며, 위나라 황초 2년(221년)에 공자가 거처하던 3칸의 집을 사당으로 삼아 공자 생전에 쓰던 의관과 거문고, 수레, 책 등을 보관하여 공묘로 삼았다 한다. 그 후 여러 차례에 걸쳐 중수 확장되었고, 명, 청 양 대에 걸쳐 다시 중수, 보수, 확장하여 지금의 규모로 완성되었다고 한다. 공묘는 3개의 전(殿), 1개의 각(閣), 1개의 단(壇), 3개의 사당(祠堂), 2개의 당(堂), 2개의 서재, 466개의 방과 54개의 문으로 되어있고, 여덟 군데에 출입문이 있으며 9개의 정원과 2000여개의 석비가 있다고 한다. 비석이 하도 많아 비림이라고 부른다고 하는데 여기에도 비석, 저기에도 비석이 가득한 것을 보니 그렇게 불리는 것도 당연하다 싶었다.
중국의 삼대 건축물이라는 대성전에 들어가 보니 중앙에는 공자의 소상이 감실에 앉아있다. 그 좌우에 덕행으로 뽑힌 안연(顔淵)과 민자건(閔子騫), 염백우(冉伯牛)와 중궁(仲弓), 언사(言辭)로 뽑힌 재아(宰我)와 자공(子貢), 정사(政事)로 뽑힌 염유(冉有)와 계로(季路), 문학(文學)에서 뽑힌 자유(子游)와 자하(子夏) 등 대표적인 제자 십철(十哲)의 소상이 있고 여러 악기와 무구(舞具)들이 진열되어 있다. 편액과 주련이 많았지만 ‘생민미유(生民未有 ; 사람이 난 이래 공자와 같은 성인은 없었다는 뜻)’라고 쓴 청나라 세종의 어필이 특히 눈길을 끈다. 지금도 곡부에서는 공자를 숭앙하여 대성전의 높이보다 더 높은 건물은 짖지 않는다고 한다. 대성전 앞 동서행랑 중앙에 행단(杏壇)이 있다. 공자는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고대문헌의 정리와 후세교육에 마지막 남은 열정을 바쳤는데 바로 이 행단이 중심활동구역이었다. 지금의 행단 자리는 원래 공자고택의 교수당이 있던 자리라고 한다. 송나라 진종 천희 2년(1018)에 대성전을 북쪽으로 옮겨 확장하면서 땅을 고르고 단을 만들어 행단이라 하고 그 주위에 살구나무를 심었으며 금나라 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단 위에 건축물을 세우고 승안(承安) 무오년(1198)에 공자의 후손에 의해 당대의 문필가였던 당회영(黨懷英)의 글씨로 그 내부에 비가 세워졌다고 한다. 공묘내의 건축물은 웅장하고 역사적으로 오래 되었으며 그 보존상태가 온전할 뿐 아니라 역사, 문화, 건축, 문장, 서화, 조각 등이 잘 구비된 대형 박물관이었다. 이 넓은 대형박물관 안, 수령이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모를 늙은 잣나무와 측백나무들이 줄지어 선 그 길을 걸으며 스치듯이 지나가는 것들을 눈에 다 담을 수 없어 안타까웠다. 이곳에 와 본 것만으로도 만족해야 할까? 공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우연히 황금색의 납매를 볼 수 있었다. 아직 차가운 겨울인데도 벌써 피어 경건하기만 한 사당에 화사함을 더하고 있었다.
공묘앞에서
우리가 여기에 온 목적은 한비(漢碑)의 대표적인 <을영비>, <사신비>, <예기비>, 그리고 북위시대의 <장맹룡비>를 보기 위해서였다. 워낙 넓은 곳이다 보니 두 번 만에 겨우 찾아 들어간 곳에는 보존을 위해 유리로 사방을 막아놓은 비석들이 모여 있었다. 책에서만 보아왔던 그 비들이 눈앞에 펼쳐져 있으니 감격스러움에 가슴이 뭉클해져왔다. 오래 전 교수님이 이곳을 방문하고 이 비들을 처음 보았을 때 감동의 눈물이 나왔다는 말씀에 고개가 끄덕여 졌다.
<을영비>는 동한 표준예서의 표본으로 원필과 방필을 겸비하고 있으며 파책이 분명하고 필세가 강건하다. 결체가 방정하고 가지런하며 행간과 자간이 뚜렷하고 질서 정연한 장법으로 동한시대 예서 가운데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된다고 한다. 비문의 내용은 한나라 노상인 을영이 치백석졸사를 공묘에 청하여 제사를 관장하도록 한 일을 적은 것이다. 이어서 내가 예서를 처음 공부할 때 임서했던 <예기비>가 눈에 들어왔다. “저수량의 글씨에도 많은 영향을 주고 '별이 흐르고 번개가 돌며 섬세하기가 터럭을 심은것보다 더하다'라는 것은 아직 만족할 만한 형용이 아니다. 한나라 여러 비들의 결구와 뜻이 모두 비슷하나 유독 이 비만 은하수와 같아 가히 볼 수는 있어도 접할수도 없다”고 곽종창의<금석사>에서 극찬받았고, 한비 중 최고의 걸작이라는 <예기비>를 두 손으로 어루만져 보았다. 그리고 팔분예서 가운데 비교적 담백하고 표준적이며 순탄한 서법의 <사신비>도 우리의 눈길을 오래도록 붙잡았다. 강유위는 <광예주쌍즙>에서 "예기비와 사신비는 주공이 예법을 만든 것처럼 일삼은 것들이 모두 아름다우며 정자체의 모습으로 탈바꿈한 것들 중에서 종주가 되고 결구가 매우 뛰어나며 변화가 끝이 없다"고 높이 평가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게다가 좌음우양의 경향을 보이고 남북조시대 해서이면서 북조의 웅강한 멋을 표현한 <장맹룡비> 등 여러 명비들을 이곳 공부에서 한꺼번에 눈으로 직접 보고 손으로 만져보니 그 기운들이 고스란히 내게 전해져 오는 것 같았다. 글씨는 그 사람의 인격이 그대로 형상화되는 예술이라 하는데 훌륭한 인격을 지닌 서예가가 되기 위해 더욱더 마음을 갈고 닦아 이 명비의 주인공들처럼 후대에도 칭송받는 그런 서예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한위비진열관 앞에서
공묘를 나와 조그만 버스를 타고 지성림(至聖林)이라고도 불리는 공림으로 향했다. 여기는 공자를 비롯한 직계자손의 묘지공원으로 10만여기의 분묘가 모여있는 세계에서 제일 오래되고 넓은 씨족 묘지라 한다. 공자의 무덤으로 가기 전 공자의 제자 자공이 외직에 나가있어 스승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한것을 통탄하여 심었다는 나무가 고사하여 밑동만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자공은 6년간이나 시묘하며 스승을 모셨다는데 요즈음 땅에 떨어진 우리나라 선생님들의 교권을 생각하니 씁쓸해졌다. 드디어 공자님의 무덤에 도착! 대성지성문선왕묘(大成至聖文宣王墓)라고 금색으로 적혀 있었다. 왕(王)자는 제단에 가려 간(干)자처럼 보이게 해 놓았는데 가까이 가서 내려다 보아야만이 王자로 보인다. 황제가 있는데 “王자를 쓸 수 없어 그렇게 했다는 설도 있고 성인앞에서 고개를 숙이라는 의미에서 그렇게 만들었다는 설”도 있다고 한다. 어쨌든 나도 정말 그런지 보기위해 공자님앞에서 고개를 숙여야만 했다. 공자님 무덤까지 왔는데 어찌 절을 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중국 돈으로 100원이라는 큰돈을 넣고 절을 하면서 공자님의 덕과 공자님 가문의 흥망성쇠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공자님의 무덤 옆에는 아들인 공리(孔鯉)의 무덤이 있었고, 앞에는 『중용』의 저자이자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의 무덤이 있었다. 그리고 해서(楷書)의 모델이 되었다는 해수목(楷樹木)도 보였다. 공자님의 묘앞에서 절을 하고 공림을 걸어나오는데 측백나무와 전나무, 느릅나무, 홰나무 등 2만여 그루의 노목들 사이에 분묘들이 가득했다. 벌초도 하지않고 묘와 묘사이의 경계도 없이 끝없이 이어진 수많은 봉분들 옆을 지나치니 스산함보다는 경건함이 마음에 가득하였다.
공자묘 앞에서
공림을 나와 점심식사를 하고 글씨의 성인이라는 왕희지의 고향 임기로 이동하였다. 이동하는 버스안에서 가이드가 공자의 부모인 숙량흘과 안씨부인, 공자의 어린시절에 대해 얘기해 주었다. 훌륭한 사람위에는 다 훌륭한 부모가 있다는 교훈을 느끼며 집에 돌아가면 나도 아이들에게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왕희지 고택에 들어서니 먼저 왕희지가 어릴때부터 벼루를 씻었다는 세연지(洗硯池)가 눈에 들어온다. 얼마나 열심히 글씨를 쓰고 벼루를 씻었으면 이 넓은 연못이 온통 검은 물이었을까? 한학촌 서화아카데미에 처음 들어와 1년정도는 오전 수업이 있는날은 오후까지 남아서 연습을 하고, 오후수업이 있는 날은 아침일찍 와서 1시간정도 정성들여 먹을 갈았었다. 이제는 그런 열정도 조금씩 사라지고 점점 나태해져가는 이 때, 이 세연지는 다시 훌륭한 서예가에 대한 동경의 불꽃을 일으킨다. 왕희지는 여러 서예 대가의 장점을 흡수하여 평생동안 서예의 참뜻을 탐구했다고 한다. 장지와 종요에게서 필력을 얻었지만 단순한 모방에 그치지 않고 구시대의 필체를 가감하여 과거와 현대를 융합하여 변화와 발전을 모색함으로써 한나라, 위나라의 소박하고 웅장한 서풍을 변화시키고 유려하면서도 시원하게 뻗은 서체를 창조하기에 이르렀으며 전혀 새로운 서예의 분위기를 만들어 서예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 오랫동안 기리게 되었다 한다. 우리도 우리만의 서체가 나올때까지 여러 법첩을 임서하면서 장점만을 흡수하여 왕희지처럼 훌륭한 서예가의 반열에 오르도록 열심히 먹을 갈아야겠다. 청년 왕희지의 동상이 있는 곳에 가서 그의 기운을 조금이라도 받기위해 손을 잡아 보았다.
왕희지하면 <난정서>가 먼저 떠오를만큼 그의 난정서는 천하제일행서로 유명하다. 3월 삼짇날, 물가에 가서 흐르는 물에 몸을 깨끗이 씻고 신에게 복을 기원하는 제사가 열리는 기간에 42명의 문사들이 모여 시를 짓고 술을 즐겼다는 내용의 난정서! 324자 모두 아름다운 자연미가 넘치며 글자의 기세가 종횡을 가르고 변화무쌍하며 마치 조물주에 의해 씌어진것 같다고 찬미받는 이 난정서의 탁본을 겨우 구입할 수 있었는데 집에 돌아가면 고이 걸어두고 내가 가는 서예가의 길에 귀감으로 삼고 싶다.
왕희지 고택에서 조금 떨어진 임기시의 외곽지로 버스를 타고 가니 역대 명가들과 현대 작가들의 작품들을 수많은 돌에 새겨놓은 서법광장(書法廣場)이 나왔다. 나는 이곳이 이번 세미나의 하이라이트라 규정짓고 싶을만큼 마음에 쏙 들었다. 그동안 무수히 보아왔던 석각과 비석들. 삶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또 내려놓았던 태산의 돌계단길. 10만기나 되는 분묘앞에서 겸허해졌던 시간들. 차가운 겨울날, 가도가도 끝없는 광활한 대지의 황량함. 이 모든것을 다 합쳐도 이 서법광장에서 받은 충격과 신선함은 메꾸질 못한다. 다양한 소재의 돌에 그림을 그리는 듯 흐느적거리며 자신의 느낌을 써 내려간 작품들, 맑고 수려한 기운의 작품들, 생동감으로 요동치는 작품들, 고도로 절제된듯한 작품들, "영화9년 계축년, 늦봄 초 회계산에 있는 난정에 모여..."라고 시작되는 난정서의 전문이 석각된 비석을 보면서 나자신 속의 수많은 고정관념과 틀을 깨트릴 수 있었다.
왕희지 고택에서
시대별 명가들의 작품을 보기위해 먼 곳을 돌고 돌아왔는데 이렇게 한 곳에 다 모여 있다는 사실이 조금 허무하기도 했지만 다시한번 복습하듯이 찬찬히 살펴 볼 수 있어 값진 선물을 받은 듯하다.
이제 우리의 긴 여정도 마지막을 위해 치닫고 있다. 내일 다시 우리나라로 돌아가기위해 이번 여행을 시작했던 청도로 출발했다. 나는 수학여행을 가든, 답사를 가든, M.T를 가든 버스에서는 절대 잠을 자질 않는다. 다 비슷해 보여도 그 지역만의 특색이나 풍경을 보면서 그 순간에 느낄 수 있는 감정들을 잠으로 허비하는 것이 너무 아까워서이다. 그래서 밤에는 일찍자고 낮에는 하나라도 놓칠세라 열심히 살펴보곤 했었다. 그런데 중국은 다르다. 벌써 4시간째 버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같은 모습이다. 쭉 뻗은 고속도로. 끝없이 펼쳐진 농경지. 드문드문 획일적인 집단 주거지. 이 단조로움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떨구었다. 문득, 눈을 떠보니 고속도로 주변마다 일제히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앙상한 나무가지를 서로 포개며 자작나무들이 추위에 떨고 있다. 줄지어 선 자작나무숲이 황량하면서도 아름다워 다시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서법광장의 안진경 작품
청도 시내에 들어서니 몇 시간을 달려왔던 깜깜한 농촌과 대비를 이루어 화려한 간판과 네온싸인으로 눈이 부시다. 이번 여행의 "최후의 만찬"은 한국식당에서 시작되었다. 오랜만에 맛보는 얼큰한 국물의 김치찌개와 물이 좋아 맥주로 유명하다는 청도맥주를 우리는 몇 잔이나 마셨는지 모른다. 음료수같이 가벼워 취하지도 않는다. 교수님이 먼저 건배제의를 하시고 우리는 돌아가면서 이번세미나에서 느낀 점과 서예공부를 하면서 느꼈던 점, 자신의 아호에 대한 애기들을 하면서 저녁식사를 마쳤다.
1월 14일. ‘청도시내관광 후 인천으로 출발’
처음 출발할때는 4박5일이라는 일정이 길게만 느껴졌는데 오늘 이렇게 마지막날을 맞게되니 지나간 4일이 짧게만 다가온다. 다른 날처럼 아침식사 후 산이라고 하기보다는 구릉에 가까운 해발 60미터인 소어산에 올랐다. 안개가 자욱하여 흐릿하기는 하지만 정상에 있는 누각에서 내려다 본 바다는 가슴을 확 트이게 한다. 안개속 저 멀리 해가 바다에 비쳐 일렁거리는 모습이나 독일식 붉은 지붕들이 이어진 마을광경은 그림처럼 아름답다. 독일식 주택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것은 이곳이 한 때 독일의 지배를 받았던 흔적이라고 한다. 처음에는 안개가 걷혀 모든게 선명하게 제대로 보였으면 하는 생각을 했지만 이렇게 적당한 안개에 가려 중국안에서 비록 서구열강들의 침략잔해이긴 하지만 어렴풋하게 독일의 정취를 느낄 수 있었다. 너무 가까이 있고 잘 보이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우리들. 류시화의 시처럼 안개 속에 숨어버린 풍경도 괜찮은 것 같았다.
소어산을 내려와 독일이 청도를 점유했을 때 독일총독관저로 사용한 건축물인 영빈관을 보러갔다. 1905년 짓기 시작해 독일의 전형적인 성 건축양식을 모방한 건축물이라고 하며, 현재 독일에서조차 영빈관과 같은 풍격의 건축물을 보기 힘들다고 한다. 건물 외벽에 부분적으로 장식된 연녹색과 연회색 화강암, 담의 모서리마다 우뚝 세워진 석주는 이국적 향취를 물씬 느끼게 하는데 손색이 없었다. 건물 내부는 물론이고 외관도 너무나 멋진 이 건축물앞에서 여러 장의 사진을 찍었다.
청도에서 세미나를 마무리 하면서...
오랜만에 여유있게 청도시내를 관광하고 버스로 돌아오는 길에 연당선생님이 현지가이드 광수씨랑 듀엣으로 "첨밀밀"을 불렀다. "티엔 미미 니 시아오 더 티엔 미미......" 사랑하는 사람의 미소가 봄바람에 피어나는 한송이 꽃처럼 달콤하다고 표현한 그 노래를 나도 뒤따라가면서 흥얼거리니 중국에 오기 얼마 전 다시 보았던 영화장면이 이번 5일간의 여정과 같이 겹쳐진다.
청도 국제공항에 도착해서 5일동안 따뜻하게 우리를 잘 인솔해 주었던 현지가이드와 아쉬운 작별인사를 하고 입국수속을 밟았다. 생각보다 포근하긴 했지만 많은 습기를 머금어 항상 축축했던 중국의 바람, 어딜가나 희뿌옇고 텁텁한 공기. 우리나라의 맑고 차가운 공기를 다시 만나면 금방 잊어버리게 될 이 나라의 기후를 뚫고 비행기는 인천으로 향했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아쉬운 점은 평소 다른나라의 문화에 별로 관심 가지지 않고 서예를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아 많이 보이지 않고 느낄 수 없었다는 점이다. 그래도 한학촌에 다시 돌아가면 이번 세미나의 진가가 조금씩 발현되어주길 기대해 본다. 그날을 위해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먹을 갈면서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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