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江陵 鶴山 金光坪) 이야기
13. 목도꾼 만복이 아버지
만복이 형의 아버지는 가을걷이가 끝나자 대관령 넘어 황병산(黃柄山) 산판(山坂:벌목)에 목도질을 하러갔다. 산판일은 벌이는 괜찮았지만, 무척이나 위험한 일로 특히 목도일은 품삯이 후한 반면, 다치는 일도 많았다.
산주(山主)와 협의가 되어 산림청에서 벌목 허가를 받은 벌채의 총책임자인 목상(木商)은 먼저 인부들을 모은다. 인부는 벌채할 나무를 골라 표시를 하는 사람, 자르는 사람, 굴려 내리는 사람, 목도질하는 사람(목도꾼), 껍질을 벗기는 사람(탈피공), 차에 나무를 싣는 사람(상차꾼) 등으로 나누어진다.
산판(山坂:벌목) / 목도질 / 탈피(脫皮) 작업
산 아래쪽부터 통나무를 굴려 내리는 길을 만들며 나무를 베어내면서 차츰 위로 올라가는데 경사를 보아가며 자른 나무를 뉘어 홈통처럼 만들며 위로 올라간다. 꼭대기까지 홈통이 만들어지면 그 언저리의 나무를 잘라 홈통을 통하여 아래로 내려보내게 되는데 거센 기세로 미끄러져 내려가는 굵은 통나무는 소리도 요란하고 한 길씩 튀어 오르기도 해서 자칫 사람에게 덮치기라도 하면 큰 사고가 난다. 근처의 나무를 모두 자르면 차츰 내려오면서 벌목을 하는데 위쪽부터 홈통도 허물어 통나무를 내려보내며 차츰 내려오게 된다.
굴러 내려진 통나무는 목도꾼이 덤벼들어 넓은 공터로 옮기는데 큰 통나무는 목도꾼 넷이, 좀 작으면 두 명이 붙기도 하고 더 작으면 한사람이 어깨로 메어 나른다.
목도질은 우선 튼튼한 삼끈으로 굵게 꼰 밧줄을 두골잡이로 하여 통나무 밑으로 넣어 감아올려서 끈에 구멍을 만든 다음 매끈하게 깎은 목도(막대)를 구멍에 낀다. 그다음 양쪽에서 목도꾼이 목 뒤에 목도를 얹고 호흡을 맞추어 일어서서는 ‘에야, 헤야’ 소리를 맞추며 발을 옮기는데 엄청나게 무거운 것도 거뜬히 목도질을 해냈다. 목적지에 다 오면 그중 제일 연장자가 큰 소리로 ‘놓고~’ 하면 동시에 땅에 내려놓았다. 목도질은 목도꾼의 호흡이 생명으로 둘이 할 때도 그렇지만 앞뒤로 넷이 할때에는 목도질 소리와 호흡과 보폭이 기가 막히게 맞아 외나무다리도 건너간다고 하였는데 많은 경험이 필요하였다.
만복이 아버지는 소문난 목도꾼으로 목 뒤에는 손바닥 같은 굳은 살이 박혔고, 허리도 구부정하였는데 젊어서부터 수도 없이 산판을 전전하였다고 한다.
목도꾼이 옮겨 쌓은 한 옆에서는 탈피작업이 시작되는데 양쪽에 손잡이가 달린 넓적한 낫으로 좍좍 껍질을 벗겨낸다.
탈피작업은 완전히 하얗게 벗기는 것이 아니라 듬성듬성 죽죽 벗겨내었는데 쉬 마르고 썩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었다.
껍질을 벗겨낸 통나무는 다시 한옆에 쌓았다가 실어 낼 트럭이 오면 차 뒤에다 기다란 발 받침 두 개를 비스듬히 걸쳐 놓은 다음 목도꾼이 목도질을 하여 차에 실었다.
비스듬히 걸쳐진 발판 위로 엄청나게 큰 통나무를 목도질하여 올라가는 것을 보면 아슬아슬하고 신기하였다.
보통 늦은 가을에 시작되는 산판의 벌채 일은 눈이 내릴 때까지 계속되곤 했는데 눈이 내려서 미끄러우면 더욱 위험하였다.
그해 초겨울, 기어이 만복이 아버지가 사고를 당하고야 말았다. 목도질을 하다가 산 위에서 굴러져 내려오는 통나무에 부딪쳤는데 허리를 심하게 다쳐 업혀서 집으로 돌아왔다. 원체 사람이 양순하여 제대로 항의도 못하고 쥐꼬리만 한 위로금을 받고는 흐지부지 말았는데 그 후로는 영영 목도 일을 못하는, 동네 어른들의 말을 빌리면 폐인(廢人)이 되고 말았다.
이듬해 봄이 되었는데 운신이 자유롭지 못한 만복이 아버지는 돌투성이 밭 가에 쪼그리고 앉아 벙어리 마누라가 씨앗을 넣는 모양을 보고는 못마땅하여 손사래를 치며 혀를 차고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