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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베르1896물기04지물
『물질과 기억 1896』1896년 제4장 지각과 물질
Henri Bergson, Matière et mémoire, Paris: PUF, 1990(1919, origine. 1896),
Ch. 4 De la délimitation et de la fixation des images - perception et matière
제4장 이마쥬의 제한과 고정 - 지각과 물질 199-251
이원론의 문제 Le problème du dualisme 199
따라야할 방법 Méthode à suivre 203
지각과 물질 Perception et matière 209
모든 운동은 불가분이다. Tout mouvement est indivisible
실재적 운동 Le mouvement réel 215
물질의 분할은 인위적이다. La division de la matière est artificielle
실재적 운동은 상태의 이동이다. Le mouvement réel est un transport d'état
지속과 긴장 Durée et tension 226
너비와 연장 Etendue et extension 235
영혼과 신체 L'âme et le corps 246
결론 – Conclusion 253-280
** 벩송은 왜 3장 -> 2장 -> 1장으로 글을 썼을까? (스피노자의 내재성의 실체에서 변용태의 속성으로, 그리고 양태들을 다루었듯이 말이다). 벩송은 첫 저술 DI에서 철학사에서 19세기 중반까지 무시되었던 심층이라는 실재성을 구출해냈다. MM에서는 그 실재성의 실체 또는 실증적 자료를 탐구했다. 그래서 제3장은 내재성의 권능과 같은 심층의 기억 덩어리로부터 출발한다. 그리고 제2장에서 내재성이 표면으로 등장하기 전에 그 과정들을 어떤 방식으로 나올까? 두 가지 기억을 통해 추억들(신체기억)과 기억(인격기억)에 대한 본성상의 차이를 마치 속성의 두 가지 선인 것처럼 구별하였다. 그러고 나서 제1장에서는 표면에 등장한 표현들을 관념론과 경험론은 현상과 인상이라는 잘라진 단편 조각들처럼 다루어 짜맞추기 한다. 이에 비해 심층에서 표면으로 단절없이 올라와 형성되고 있는 형성중인 것이 이마쥬이다. 운동 중인 이마쥬를 단면으로 잘라서 관념이니 물체니 하면서 관념과 개념으로 상징화하고 기호 체계화한다(이 둘은 이데아론과 원자론의 대비와 닮았다). 이마쥬라는 현전의 상태는 대상화될 수 있는 내용이자 표현인 셈이다. / 이 이마쥬로부터 관념론과 실재론은 자신들의 학문적 체계에 맞는 대상으로 구성하거나 물체로서 현실을 구축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51QKF, 51QLE)
이원론이 아니면, 자연의 자기 생성에서 발현되는 두 속성으로 어떻게 그 내용들을 표현(설명)할까? 속성의 두 측면을 하나는 기억(추억과 이마쥬)이며 다른 하나는 신체(지각과 물질)이 아니겠는가? 벩송은 스피노자의 시대와 달리 실증적 연구로 검증할 수 있었다. 그래서 두 속성을, 하나는 심리학적으로 다른 하나는 의학 생리학적으로 검토한 후, 상상하는 것과 역할을 하는 것으로 구별할 수 있었을 것이다. 둘 사이는 위상적 지속(연속)이며, 별개의 선(평면)이라도 침투 또는 공명으로 이루어진다. (51QKH)
신체와 영혼은 각각이 대상 또는 관념처럼 있어서 관계를 통하여 설명되기보다, 이 들 사이에는 절단되어 있기보다 연속적으로 연관을 맺고 있다는 것을 밝히는 것이다. 관계 맺음에서는 연상 작용이든 의식 개입이든 간에 나누어진 두 개의 항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이에 비해 연관 작동은 서로 사이에 경계가 먼저 있는 것이 아니라 어느 하나가 작동하고 다른 하나가 침투(공감) 또는 공명(삼투)처럼 일어나는 과정을 보자는 것이다. 신체의 작동 쪽에서는 기억을 선택하고, 기억의 침투 쪽에서는 언제나 신체 속에서 현실적 활동에 닿아 있다. 신체 활동의 연속성에서보면, 감각운동을 실행하면서 끊임없이 지각과 연관에서 기억 중에서 필요한 것을 길어 올리며, 그 활동을 다채롭게 태어나게 한다. 의식(영혼)의 측면에서 보면 기억 운동의 지속성이 지각에 스며들어 신체의 현실 행동에서 즉 이마쥬 운동에서 구체적으로 행하게 한다. 어쩌면 신체 활동이 다채로움보다 일관성을 유지하는 것은 일상적 삶이리라. 조금만 일상에서 벗어나거나, 또는 부딪히는 장애물이나 위험에는 지각된 것을 넘어서 기억덩어리에서 무언가를 불러올 것이다. 이런 양태들에서는 둘 사이에 연관이 있다. 기억이 지각을 통해 작동하지 않으면, 둘 사이에 단절이 있는 것인데, 이 경우는 기억이 소멸 또는 퇴화되었기보다 신체의 작동(신경계든)이 문제(맹이든 농이든)가 있는 것이다. 둘 연관은 대칭도 평행도 부대현상도 아니다. 이원론은 이 양자 사이에 인지에 맞는 것만을 골라서 이항으로보아 번역가능하고, 연합가능하다고 한다. 인지와 인식, 재인지와 재인식을 달리 보아야 할 것이다. - 수정 후 배의 활동이 지각 활동의 태어남일 것이다. 지각에 관한한 의학 생리학적 검토는 미시부분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다. (51Q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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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 4 De la délimitation et de la fixation des images - perception et matière
이마쥬의 제한과 고정 - 지각과 물질
이원론의 문제 Le problème du dualisme 199
제1장 신체, 제2장 지각, 제3장 기억에 대한 베르그송 자신의 해설.
신체는 항상 행동을 향해 있으며, 행동을 위해 정신(영혼)의 삶을 제한하는 것, 그래서 선택의 도구일 뿐이다. (199). (limiter)
지각: 신체는 물질의 부분들(les parties)과 국면들(les aspects)을 표시한다. 지각은 사물에 대한 우리의 잠재적 행동(notre action virtulle)을 측정하는 것..
기억: 신체[두뇌]는 기억을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선택하는 것이다. [신체, 지각, 기억으로 연구과정은 의식의 활동(운동)이라는 측면에서 벩송의 유물론이다. 데카르트 스피노자의 유물론에 비해 의학생리학적 설명을 보탠 실증적 유물론인 셈이다.(51QKH)]
환타지의 유희와 상상의 작업 - 그 만큼이나 .... 자유가 도래한다.(200)
정신의 삶에서 신체의 역할(200)
영혼과 신체의 통일성문제(200) ... 우리가 물질과 정신을 깊이있게 구별하였기 때문이다. ... 왜냐하면 우리는 정신과 물질을 부정적 특성이 아니라 긍정적 특성으로 정의하기 때문이다. 순수지각이 우리를 위치시킬 곳은 진실로 물질[신체]이며, 우리가 이미 기억과 함께 파고 들어갈 곳은 실제로 정신[영혼] 자체이다.(200) - [만일 순수 추억이 무의식이라는 측면에서 신체와 연관이 없다면, 순수지각은 지각되지 않은 측면이라서 신체이외의 가능적 지각으로서 대상이라고 해도 괜찮을 것이다. 그러나 영혼과 신체의 문제에서 순수지각은 감각되지 않고 또한 지각하려고 해도 하기 어려운 비교감 운동(혈관 림프이동 세포 내 운동 등)으로서 공감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베르그송을 이해하는데 더 나을 것이다. ]
문제의 모호성[애매성은 지각에서 모호성은 기억의 문제에서]은 우리의 오성이 한편으로는 너비와 비너비 사이에, 다른 한편으로는 질과 양 사이에 세운 이중의 반대명제에 기인한다.... 따라서 한편으로는 비너비와 질이, 다른 한편으로는 너비와 양이 있을 것이다. 둘째 항으로부터 첫째 항을 도출한다고 주장하는 유물론을 거부했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둘째 항이 단순히 첫째 항의 구성이라는 관념론도 받아들이지 않았다(201) . - 유물론과 관념론 ...전자는 뇌가 표상을 산출한다고 하고, 후자는 우리의 오성이 계획을 그린다고 한다. (201) [- 이 문제는 두 가지 부대현상론에 대한 비판이다. 그러면 평행론인가? 그렇지 않다. 둘 사이에는 대칭성이 없다는 점에서 평행론도 아니다. 그러면 베르그송의 입장은 무엇인가? - “따라야 할 방법”으로 제시할 것이다.]
[유물론의 통로(issues)를 열기 위해] 순수지각을 .... [외적 크기에 대해] 우리는 지각을 사물자체 속에 위치시켰다. .... 그것은 순수지각에 대한 분석이 우리에게 확장(extention)[외연]이라는 관념 속에서 너비와 비너비 사이에 가능한 접근을 엿보게 해주었다.. (202)
[관념론의 통로를 열기 위해] 순수추억을 ... [내포성에 대하여] 질과 양에 대립을 완화하기에 이를 것이다. (202) ... 그러면 마치 너비와 비너비의 거리의 확장에 대한 고찰에 의해서 감소되는 것처럼, 양과 질의 간격은 강도(tension, 긴장)를 고려함으로써 감소될 수 있지 않을까? (203)
따라야 할 방법 Méthode à suivre 203
우리가 일상적으로 부르는 사실(fait)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매개적 직관에 나타나는 대로의 실재성이 아니라 실천적 관심과 사회적 삶의 요구들에 실재적인 것을 적응시킨 것에 불과하다. 외적이든 내적이든 순수직관은 불가분의 연속성에 대한 직관이다. 우리는 그것을 이쪽에서는 구별된 단어들(mots) 저쪽에서는 독립적인 대상들(objets)들에 상응하는 병렬된 요소들로 분할한다. (203-204) - 이 점에서 즉 적응시킨다는 점에서 들뢰즈는 사실은 사건(evenement)이다. 단어와 대상의 분리는 구조주의의 기표와 기의에 닮았다. 단어들과 대상들은 일대일 대응하지 않는다.
우리는 내적인 연속성으로부터 생겨나는 생명적 단일성을 인공적 단일성(unité factice)으로 대치하는데, 이것은 항들을 통일시키지만 항들처럼 부동적이고 비어있는 틀(cadre vide, inerte)이다. [인식론적 차원에서] 경험론과 독단론은 이처럼 재구성된 현상으로부터 출발하는데 있어서 근본적으로 일치하며, 단지 독단론은 이 형식에 더욱 집착하고, 경험론은 이 질료에 더욱 집착한다 점에서만 다를 뿐이다. (204) - 존재론적 차원에서 유물론과 관념론, 인식론적 차원에서 경험론과 독단론으로 구별하여 쓴다.
경험론과 독단론 설명: 독단론은 형식에 집착하고 경험론은 이 질료에 더욱 집착한다 점에서만 다를 뿐이다. / 경험론 ...항들에 만족하면서 관계들을 무시한다. ... (204) - 독단론은 분리되고 불연속적인 현상들을 수용하고는 단순히 그것들을 종합하려고 노력할 뿐이다. 이 종합은 직관 속에 주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언제나 필연적으로 자의적인 형식을 가질 것이다.(204-205) 그 마지막은 비판 철학일 것이다. [경험론이 지시론에서 대응설로 독단론이 진리론에서 정합론으로 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마지막 시도가 남아 있을 것이다. ... 그것은 경험을 그 근원(source)으로 찾으러 가는 것이 될 것이다. 또는 차라리 유용성의 방향으로 굴절되면서 고유하게 인간적(humaine) 경험이 되는 결정적 전환점(tournant decisif) 그 너머로 우리의 경험을 찾으러 가는 것일지도 모른다.(205) [- 그 넘어(au-dessus)를 들뢰즈에서 선험적 경험론(empirisme transcendantal)이라는 표현이 가능하다. 베르그송에서는 신체의 굴절을 겪지 않은 경험 즉 순수경험을 말한다. 이 순수 경험이 외화된 표현을 들뢰즈는 대사건(Evenement)에 상응하게 설명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인식의 상대성은 결정적인 것이 아닐지 모른다. 이러한 욕구들이 만들어 낸 것을 해체함으로써 우리는 직관을 그것의 최초의 순수성 속에서 회복할 수 있을 것이고, 실재와의 접촉을 다시 취할 것이다. (205)
우리가 경험의 전환점(tournant)이라고 불렀던 것에 위치했을 때, 무매적인 것(l'immédiat)으로부터 유용한 것(l'utile)으로 넘어가는 것을 조명하면서 우리 인간적 경험의 여명을 시작하는 어스럼한 빛을 이용했을 때, 남은 것은 우리가 실재의 곡선으로부터 그와 같이 포착하는 무한히 작은 요소들을 가지고 그것들 뒤의 어둠 속에서 펼쳐지는 곡선자체의 형태를 재구성하는 일이다. ... 철학자의 임무 .... 철학적 탐구의 궁극의 과정은 진정한 적분이다. (206)
우리는 이전의 의식의 문제에 이 방법을 적용하려 시도한 바 있다. 그리고 우리의 내적 삶의 지각과 관련한 정신의 실용적 작업은 순수 지속을 공간을 통해 굴절시키는 데 있는 것으로 보였다. 이 굴절은 심리상태들을 분리하고 그것들을 점점 더 비개성적인 형태가 되게 하고, 그것들에 이름(noms)을 부여하고, 결국에는 그것들을 사회적 삶의 흐름 속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이다. 경험론과 독단론은 내적인 상태들을 이러한 불연속적인 형태로 취하는데, 전자는 상태들 자체에 만족하여 자아 속에서 단지 일련의 병렬된 사실들만을 보는 반면, 후자는 관계맺음의 필요성을 인정하지만 이 관계를 하나의 형식 또는 하나의 힘 -집합이 삽입되는 외적인 형식, 요소들의 응집을 보장할 결정되지 않은 힘, 즉 물리적 힘 [기철학] - 안에서 외에는 더 이상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206-207)
[다시 한번 더 쓰면]경험론은 상태들 자체에 만족하여 자아 속에서 단지 일련의 병렬된 사실들만을 보는 반면, 독단론은 관계맺음의 필요성을 인정하지만 이 관계를 하나의 형식 또는 하나의 힘 -집합이 삽입되는 외적인 형식, 요소들의 응집을 보장할 결정되지 않은 힘, 즉 물리적 힘 [기철학] - 안에서 외에는 더 이상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206-207) 결정론에서 행위는 요소들 상호간의 기계적인 구성의 결과물이다. 그 반대자들은 그들이 자신들의 원리와 엄밀하게 일치한다면, 자유로운 결정은 임의적 결단(fiat), 무로부터(ex nihilo)의 진정한 창조가 되어야 한다. (207)
취해야 할 방법: 우리는 선택할 수 있는 세 번째 입장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순수 지속 속에 다시 위치하는 것이다. ...그 때 우리의 행동은 앞선 것들로부터 고유한(sui generis) 진화에 의해서 나오게 된다고 믿었다. ... 따라서 자유란 감각적[신체적] 자발성으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다. .... 사유하는 존재로서 인간에게 자유로운 행위는 감정들과 관념들의 종합이라고 불릴 만하고, 거기로 인도한 진화는 진정한 진화라고 불릴만하다. ... [일상적 인식과 진실한 인식] 1)행동하는 우리를 우리가 바라볼 수 있고, 또 이러한 바라봄을 유용하게 해주는 지속은 그것의 요소들이 분리되고 병렬되는 지속이다[인지론]. 그러나 2)우리가 그 안에서 행동하는 지속은 우리의 상태들이 서로 안으로 용해되는 지속이다. (207)
이 문제가 물질에도 적용될까? [(1)문제] 칸트가 말한 “현상들의 다양성”[의 문제] ...[- 칸트의 “현상들의 다양성”은 DI에서 그물(범주)에 걸러진 지각 가능한 의식의 다양성일 뿐이다.] ... [(2)문제] 문제는 우리가 보통 근본적으로 간주하는 어떤 조건들이 우리가 사물들에 대해서 가질 수 있는 순수 인식이기보다는 오히려 사물들의 용도, 사물들을 이용하는 실용적 방편에 관련된 것이 아닌지를 아는 것이다. (208) ...왜냐하면 아무것도 과거와 현재의 응집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너비라는 것으로부터 벗어나지 않고서도 공간으로부터 뚜렷하게 구분되어질 수 있다. 바로 거기에 직접성의 회귀가 있을 것이다. ... 왜냐하면 우리는 참으로 너비를 지각하는데 반해, 공간을 단지 하나의 도식(schème)이란 방식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208) [도식이란 신체라는 외적 형식을 말한다] 사람들은 무매개적 인식에 특권적 가치를 임의로 부여하는 이 방법을 비난할 것인가?...(209)
이 방법을 통해서 적용을 통해서 인도할 수 있는 결과들을 .. 네 가지를 설명할 것이다.(209-235) [ 이방법은 PM “형이상학 입문91903]”에서 폭넓게 전개 될 것이다.]
지각과 물질 Perception et matière 209
[운동에 대한 과학사의 조망은 DI Ch2, MM Ch 4, PM에서 동일하게 전개된다.]
[1] 모든 운동은 불가분이다. Tout mouvement est indivisible 209
I. 모든 운동은 정지에서 정지로 이행인 한에서 절대적으로 불가분이다.
예) 여기 점 A에 놓인 나의 손이 있다. ... 따라서 나는 [AB로 가는]운동을 공간에서 또는 시간에서 생각함에 따라, 이 운동을 복수(multiple) 또는 불가분으로 간주할 수 있다.(209-210)
이행은 운동이고 멈춤(정지)은 부동성이다. (210)
그러나 운동을 지각하는 감관의 자료들과 운동을 재구성하는 정신의 인위(artifices,기교)를 혼동해서는 안될 것이다. 감관은 그대로 내버려두면 두 실재적인 정지사이에서 확고하고 불가분한 전체로서 실재적 운동을 우리에게 제시한다. 분할은 상상력의 작품인데, 상상력이란 바로 우리의 일상적 경험의 움직이는 이미지들을 밤 동안에 뇌우의 장면을 비추는 순간적인 번개불처럼, 고정하는 기능을 한다.(211)
[착각(illusion)이 왜 일어날까?] 그러나 과정(progrès)이 어떻게 사물(chose)과 일치하며, 운동이 어떻게 부동성과 일치하겠는가? / 여기서 환상을 용이하게 하는 것은 우리가 운동자의 경로 위에 위치들을 구별하듯이, 지속의 흐름 속에서 순간들을 구별하기 때문이다.(211) ... 따라서 운동의 불가분성은 순간의 불가능성을 함축한다. [순간도 지속이다] 그 지속은 ... 압축되어 있고, 불가분적이다.(212) ... 흘러가는 지속(213)
엘레아 학파의 제논에 대한 비판 (213-215) - DI 84 참조
그러나 운동의 내밀한 본성은 추구하는 철학자는... [이 철학자는 베르그송이다.] (213)
제논의 역설, 첫 번째(Dichotomie 이분법의 역설), 두 번째(Achille 아킬레스의 역설), 세 번째(Flèche, 화살의 역설), 네 번째(Stade, 경기장역설)
[2] 실재적 운동 Le mouvement réel 215
II. 실재적 운동은 있다. [고대 제논에 대한 반론으로 외적 운동의 구성- 근대과학자]
수학자는 상식의 생각을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서 위치를 지표들의 점이나 축들에 이르는 거리에 의해 정의하고 운동을 거리의 변화에 의해 정의한다. (215)
그러나 수학에서 물리학으로 넘어가서 운동에 대한 추상적 연구로부터 우주 속에서 이루어지는 구체적인 변화들을 고려하면 이미 사태의 국면은 바뀌게 된다. (216)
이 모순은 모든 운동이 상호적(réciproque)이라고 주장하면서, 상대성의 이론에 가장 극단적인 형식을 제공한 후, 마치 운동이 절대적인 것처럼 운동법칙을 공식화하였다. (216)
데카르트(Descartes, 1596-1650) 철학의 원리 II 29. 운동이상호적, 절대적인 것.
라이프니쯔(Gottfrid Leibniz, 1646-1716)
모루스(Morus, R2x) 데카르트 비판자.
뉴튼(Issac Newton 1642-1727)
오일러(Leonard Euler 1707-1783)
우리들 생각으로는, 동체가 관계하는 축과 점이라기보다 오히려 움직이는 동체가 있다는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수학적 기호는 없다.(217)
한 장소(lieu)는, 단지 그것이 질에 의해서 또는 그것이 공간 전체와 갖는 관계에 의해서만, 다른 장소로부터 절대적으로 구별될 것이다. 따라서 이 가설에서 공간은 이질적 부분들로 구성되어 있거나 아니면 유한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유한한 공간에게 다른 공간을 경계(barrière)로서 부여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공간의 이질적인 부분들 아래, 동질적 공간을 지반(support)으로서 상상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 이 두 경우에 우리가 필연적으로 귀착하는 것은 동질적이고 무한정한 공간이다.(217-218) [- 경계 밖이나 하부 지반 이란 개념에는 이미 등질적 무한 공간 즉 절대공간을 인정하는 것이다. 여기서 상대적과 절대적 운동이 성립한다.]
그리고 결정적 분석에서[W. James] 이[노력의] 감정 속에는 신체 주변에 효과있거나 시작된 운동들에 대한 의식 이외 다른 것이 없다는 것을 잘 지적했지 않았던가? 따라서 우리가 운동의 실재성을 그것과 구분되는 원인 위에 기초하려고 하는 것은 헛된 일이다. 즉 분석은 언제나 우리를 운동 자체에 이르게 한다. (218) [신체 주변에 즉 신체 표면에 효과화 된 운동, 신체의 운동자체가 있다.]
하물며 내가 운동을 생산하려 원한 후 그것을 생산하려고 할때, 그리고 근육감각이 나에게 운동에 대한 의식을 가져올 때, 나는 운동의 실재성을 확신한다. 그것은 운동이 나에게 나타날 때, 즉 상태의 변화 또는 질의 변화로서 나에게 내적으로 나타날 때, 나는 운동의 실재성을 접한다는 것을 뜻한다.(219)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소리와 침묵, 빛과 어둠) 이동(passage) 역시 절대적으로 실재적인 현상이다. 따라서 사는 사슬의 양극단을 쥐고 있는데, 그것은 내 안에서는 근육의 감각들, 내 밖에서는 물질의 감각적 성질들이다. 전자의 경우에서든 후자의 경우에서든 운동이 있다고 해도 나는 그것을 단순한 관계로 포착하지 않는다. 즉 운동은 절대적인 것이다. - 이 양극단 사이에 이른바 외적인 물체들(corps)의 운동이 위치한다. (219)
[문제는] 외견상의 운동과 실재적 운동을 어떻게 구별하는가? 이다. ... [해결을 위한 제언] 이와는 반대되는 가설에서, 실은 물질(matière)의 이러저러한 결정된 부분들(parties)에서 어떻게 위치변화가 일어나는 지를 아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전체(tout) 속에서 국면(position) 변화가 어떻게 이루어지는 지를 아는 것이 문제일 것이다. 이 국면 변화의 본성을 결정하는 것이 우리에게 남아있는 일일 것이다. (220) [변화의 본성은 창조적 진화로 넘어갈 수 있는 단초이다. - 여기서는 물체 과학의 인식의 한계들 먼저 지적할 것이다.]
[3] 물질의 분할은 인위적이다. La division de la matière est artificielle 220
III 물질을 절대적으로 결정된 윤곽을 갖는 독립적인 물체들로 분할(division)하는 것은 모두 인위적인 분할이다. [물질을 물체로 분할하는 것은 신체의 요구이다. - 과학의 인지론적 인식에 대해 비판하는 베르그송의 견해]
하나의 물체, 독립적인 물질적 대상은 우선 우리에게 물질들의 체계로 나타나는데, 거기서 저항과 색이 - 시각과 촉각의 재료들 - 중심을 차지하며, 다른 모든 성질들을 어느 정도 중단시키고 있다. 다른 한편 시각과 촉각의 재료들은 공간 속에서 가장 명백하게 늘여져지는(부피를 갖는) 재료이고, 공간의 본질적 성격은 연속성이다. (220)
우리는 어떻게 물질적 너비부터 원초적으로 통각된 연속성을, 물체의 각각이 자신의 실체(substance)과 자기의 개별성을 가질 수 있을 만큼의 물체들로, 조각나게 이루어지게 되는가? 아마도 이 연속성은 순간마다 측면을 바꿀 것이다. 그러나 왜 우리는 마치 만화경을 돌렸을 때처럼 전체(ensemble)가 변화했다는 것을 순수하고 단순하게 확정하지 않는가? (220-221) 왜 우리는 결국 그 전체의 운동성 속에서 운동하는 물체가 따르는 궤도(pistes)만을 찾으려 하는가? 움직이는 연속성(continuité mouvant)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고, 거기서는 모든 것이 변화하는 동시에 머문다. 우리가 영속성과 변화라는 두 항을 분리한 후, 물체들로 연속성을 나타내고, 공간 속의 동질적인 운동들로 변화를 나타내는 것은 어디서 유래하는가? .... 그렇다면 위치와 상호간의 관계만을 바꾸는, 잘 재단된(découpées) 모서리를 가진 대상들을 가지고 하나의 불연속적인 물질적 우주를 구성하려는 저항할 수 없는 경향은 어디서 오는가?/ [답은] 삶이다. ...살아가는 필요성, 즉 행위하려는 필연성에 의해 설명된다.(221)
물질의 본성이 어떠하든 간에, 삶은 이미 거기에 첫 번째 불연속성을 세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 감각적 실재성으로부터 재단된(découpées) 부분들 사이에 완전히 특별한 연관들을 세우는 것은 바로 우리가 산다(vivre)고 부르는 것이다. (222)
따라서 생명적 운동(mouvement vital)을 연장하는 것이고 진정한 인식에 등을 돌리는 것이다. ... 이 분할 작용은 실로 유용한 행동의 일상적인 형식을 순수 인식의 영역으로 부당하게 이전한 것을 나타낸다. ... [학문들은 화학처럼] 화학은 물질보다 물체를 연구한다. ... 그러나 아주 단순한 실험들만 참조해도 어떤 실재적 접촉도 없이 서로 밀어내는 두 물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맥스웰(Maxwell)](223) 그리고 다른 한편 고체성은 절대적으로 뚜렷한 물질 상태가 아니다. 고체성과 충돌은 그것들의 외관상의 명백성을 실천적 삶의 습관들과 필요성으로부터 빌려온 것이다. (223-224)
패러데이(Faraday)에게 원자는 하나의 “힘의 중심”이다. ... 각 원자들은 “중력이 전개되는 공간전체”를 점유하며, “모든 원자들은 상호침투한다.” (225)
톰슨(Thomson)은 우리가 원자라고 부르는 것은 이 연속성 속에서 소용돌이운동을 하면서 자신의 속성들을 자신의 형태와 존재에 빚지고, 따라서 자신의 개체성을 자신의 운동에 빚지고 있는 불변적인 형태의 고리일지 모른다.(225)
우리는 힘이 물질화되고, 원자가 관념화되며, 이 두 항들이 하나의 공통적 경계로 수렴하고, 이렇게 해서 우주가 자신의 연속성을 회복하는 것을 본다. ...그러나 원자의 고체성과 관성은 운동들이나 힘의 선들로 용해될 것이며, 그것들의 상호 연대성이 우주적 연속성을 회복할 것이다. (225)
모든 자연 철학은 마침내 불연속성이 물질의 일반적 속성들과 양립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되었다. (225) [톰슨의 소용돌이 파라데이의 힘의 선의 개념은 연속성을 설명하려는 것인데, 소용돌이나 선들이란 계산하기 편리한 기호(symbole)들이다.]
사실인즉 소용돌이와 힘의 선들은 물리학자의 정신 속에는 계산을 도식화할 목적으로 마련된 편리한 형태들에 불과하다. 그러나 철학은 왜 이 상징(기호)들이 다른 상징들보다 더욱 편리하고, 더 멀리 나아갈 것을 허용하는지를 물어야만 한다. ... 이 상징들은 구체적 너비(étendu)를 가로질러 가면서 우리에게 변양(modification), 간섭(perturbation) 긴장(tension) 또는 에너지(énergie)의 변화를 보여준다. 무엇보다 이런 사실들에 의해서 이 상징들은 우리가 처음 운동에 관해 제공했던 순수하게 심리학적인 분석과 다시 결합하는 경향이 있다. 심리학적분석은 우리에게 운동을 대상들의 관계 위에 우연처럼 덧붙여지는 단순한 변화로서가 아니라 진정한 실재성으로 말하자면 독립적인 실재성으로 제시하였다. 따라서 과학도 의식도 결코 이 마지막 명제를 혐오하지 않을 것이다. (226)
지속과 긴장 Durée et tension 226
[4] 실재적 운동은 상태의 이동이다. Le mouvement réel est un transport d'état 226
IV 실재적 운동은 한 사물의 이동이라기보다는 한 상태의 이동이다.
질은 서로 이질적이고 운동은 동질적이다. 본질상 불가분적인 감각은 측정을 회피한다.(226) ... 거기서부터 어떤 기적에 의해서가 아니라면 달리 소통할 수 없는, 두 상이한 세계가 비롯되는데, 그것들은 한편으로는 공간 속의 운동의 세계이고, 다른 한편으로 감각을 갖는 의식이다. ... 한편으로 질과 다른 한편으로 순수 양 사이에서 차이는 환원할 수 없는 것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실재적 운동들이 자신들 사이에서 단지 양의 차이만을 나타내는지, 아니면 내적으로 진동하는 그리고 자신의 고유한 존재를 헤아릴 수 없는 무수한 순간들로 분절하는, 질 자체가 아닌지를 아는 일이다. 역학이 연구하는 운동은 단지 하나의 추상물아니면 하나의 상징에 불과하다. 즉 모든 실재적 운동들은 상호 비교할 수 있게 해주는 하나의 공통척도, 공통분모에 불과하다. (227)
불안정적인 것을 안정적으로 대체하는 것이 우리 표상의 법칙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원자는 중요하고 중심적인 요소가 된다. 운동은 원자의 잇따르는 위치들을 연결하는 것 이앗의 일을 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 견해의 불편함 ... 그것은 (불편함) 우리가 우리 지각 속에서 우리의 의식의 한 상태(état)와 우리와 독립적인 하나의 실재(réalité)를 동시에 파악하는 과정을 이해할 수 없게 만든다. (228-229)
이렇게 이해된 실재론은 스스로 파괴된다. [외적 운동의 설명 실패]
질은 표면에서는 펼쳐져 있고, 부동적인데, 그러나 그것은 심층에서는 살아있고, 진동하고(vibrer) 있다. (229)
통각된 실재성들이 명백한 실재성들이라고 믿는 것은 무엇보다도 우리의 지각 질서가 이 실재성에 의존하는 것이지 우리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229)
물질의 상태들이 서로로부터 연역될 수 있다고 주장할 때, 기계론은 이 믿음을 더욱 정확하게 공식화 한 것에 불과하다. (229-230) [기계론의 약점 ]
내적인 진동의 형식으로 운동을 질 속에(dans) 놓아야 하고, 이 진동과 질을 그것들이 피상적으로 드러나는 것보다 진동을 덜 동질적으로 질을 이질적으로 간주해야 하고, 두 항들의 측면의 차이를 필연성에, 즉 어느 정도 한정되지 않은 다양체에서 순간들로 나눌 수 없을 정도로 너무나 짧은 지속에서 축약될 수밖에 없는 필연성에, 부여해야만 했다. (230)
우리 의식에 의해 체험된 지속은 특정한 리듬을 갖는 지속이며, 물리학자가 말하는 시간과는 아주 다르다. (230)
빛의 진동 400조(兆)(230) ... 엑스너(Exner)에 따르면, 우리가 의식하는 텅 빈 시간의 가장 짧은 간격은 천 분의 이(2/1000)초와 동등하다고 한다. 게다가 우리가 그렇게 짧은 간격을 연이어 지각할 수 있을지도 의심스럽다. ... 단순 계산으로 이 작용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2만 5천년이 필요할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231)
공간이란 단지 무한한 분할가능성의 도식에 불과하다. 그러나 지속은 이와 전적으로 다르다. (232)
우리는 자연 속에서 우리의 내적인 상태들 보다 훨씬 더 빨리 잇따르는 것들을 예감한다. 그것들을 어떻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고 자신의 능력이 모든 상상력을 넘어서는 이 지속은 어떤 것인가? [EC로 가는 길목인가? ] / 그것은 확실히 우리들 자신의 지속은 아니다. 그러나 비개인적이고 동질적인 지속은 더더욱 아니다. ... 소위 동질적 시간은 언어의 우상(idole)이자, 기원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허구(fiction)이다. 실제로 지속의 유일한 리듬은 없다. (233)
그리고 우리 의식보다 더욱 긴장된 의식, 말하자면 인류의 발전을 인간 진화의 커다란 단계들로 응축해서 목격할 지도 모르는 의식을 가정한다면, 그 의식에는 역사 전체가 매우 짧은 시간 안에 포함되지 않겠는가? 지각하는 것은 ...응축시키는 것으로, 그렇게 해서 매우 긴 역사를 요약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지각한다는 것은 고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233) / 그것은 우리가 지각 행위 속에서 지각 자체를 넘어서는 어떤 것을 포착한다는 것을 뜻한다. (233)
물질적 우주는 있었던 대로 존속한다(subsister)(233) ... 물질은 모든 것이 중단 없는 연속 속에서 연결되어 있으며, 모든 것이 서로 연대적인 수 없는 진동들로 용해되는 데, 이 진동들은 그 만큼의 떨림들(frissons)처럼 모든 방향으로 퍼져 나간다. (234)
달리는 사람의 수천의 잇따르는 위치들이 유일한 상징적(기호적) 태도로 응축되어 우리 눈에 지각되고 예술에 의해 재생되고, 모든 사람들에게 달리는 사람의 이미지가 되는 것은 그와 같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 주변에 간간이 던지는 시선은 단지 무수한 반복들과 내적인 진화들의 결과들만을 포착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 자체에 의해 이 결과들은 불연속적이 되고, 우리는 그것들의 연속성을 우리가 공간 속의 대상들에 부여하는 상대적 운동들에 의해서 회복한다. 변화는 도처에 있다.(234) 그러나 그것은 심층적으로 있다. 우리는 변화를 여기저기 위치시키지만 그것은 표면일 뿐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렇게 해서 그것들의 질에 관해서는 안정적이고 그것들의 위치에 관해서는 움직이는 물체를 구성한다.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 단순한 장소의 변화는 자신 안에 우주적 변형을 응축하고 있는 것이다. (235)
너비와 연장 Etendue et extension 235
[duree -> etendue ... tension -> extention]
동질적 공간 (235)
동질적 시간 (236-237)
우리의 지각이 과거를 현재 속에 이어간다. 왜냐하면 우리의 행동은 기억에서 부풀려진 지각이 과거를 압축했던 것에 정확히 비례해서 미래를 처분한다. 행동의 리듬을 겹겹이 채워놓고[쟁여놓고] 또 똑같은 지속 속에서 연속되는 무매개적 반작용에 의해서 감당되었던 행동에 대꾸하는 것, 현재 속에서 존재하는 것 즉 끊임없이 다시 시작하는 현재 속에서 존재하는 것[기억과 지각이 없는 것], 그것이 물질의 근본적 법칙이고, 그러한 것이 필연성이다. 만일 자유로운 행동들이 또는 적어도 부분적으로 비결정적인 행동들이 있다면, 그 행동들은, 점점 멀리(오래) 생성[되기]을 고정할 수 있는, 그리고 생성을 구별된 순간들에서 견고하게[형상화] 할 수 있는, 존재들(생명체)에게만 속한다. (236) [물질의 흐름의 필연성에는 피드백이 없다. 자유로운 행동만이 고정시킬 수도 있고 견고하게 할 수 도 있다. 고정되고 견고하게 되는 것이 신체 즉 기억을 지닌 나의 신체이다. 필연성이 바탕이며 근원이다. 그 안에서 자유로운 행동이 어떻게 생성(devenir)되는 지를 보아야 할 것이다. 필연이란 이질적 흐름이며 들뢰즈 식으로 카오스이다. 그중에서 초기의 부분적으로 고착화가 준안정인 셈이고, 현재에 이루어진 생성은 안전성의 코스모스이다. 이 코스모스는 신체라는 코스모스이다. 들뢰즈라면, 우주를 코스모스라 할 때 현재의 리름을 유지하는 환경(milieu)이 코스모스이다. 현재의 환경은 과거의 환경과 다르다는 점이다. 자연은 자기 환경에서 끊임없이 자기 환경을 변화 변전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자연은 자기에 의한 자시 생성이다. 물질이란 형상처럼 형이상학적 개념으로서 양 극을 지칭하는 기호 또는 기표로 보아야 할 것이다. 기표라는 비유에 깊이 사고하여 물질이 존재이듯이 형상이 존재이지, 플라톤주의자의 표현으로 형상이 존재이니 물질이 (비)존재가 되는 것으로 사고하는 경우가 상층주의자가 되는 것이 아닐까. (51RKC)]
Répondre à une action subie par une réaction immédiate qui en emboîte le rythme et se continue dans la même durée, être dans le présent, et dans un présent qui recommence sans cesse, voilà la loi fondamentale de la matière : en cela consiste la nécessité. S’il y a des actions libres ou tout au moins partiellement indéterminées, elles ne peuvent appartenir qu’à des êtres capables de fixer, de loin en loin, le devenir sur lequel leur propre devenir s’applique, de le solidifier en moments distincts, d'en condenser ainsi la matiere et, en se l'assimilant, de la digerer en mouvements de reaction qui passeront a travers les mailles de la necessite naturel. .
L’independence de leur action sur la matiere ambiante s’affirme(=se reveler) de mieux en mieux a mesure qu’ils se degagent advantage du rythme selon lequel cette matiere s’ecoule. 떠도는 물질에 관한 생명체들(존재들)의 행위의 독립성은 존재들이 리듬을 더 잘 분간해감에 따라서 점점 더 잘 확정되고, 이 리듬에 따라 물질은 흐르게 되어 있다. (236) [생명체 속에서는 물질이 리듬에 따라 흐르게 되어 있다. / 여기서 leur는 문장의 흐름상 존재들(생명체들)의 대명사이다. ]
관념론 - 버클리 (238)
실재론 - 뉴튼
물질에 관한 다양한 이론들의 근본에 .. 두 개의 가정 (238)
영국관념론의 본질은 연장을 촉각적 지각들의 한 속성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239)
그러나 [반대로] 운동을 공간 속에 놓고 감각을 의식 속에 놓는 원자론적 실재론 도 연장의 변양들 또는 연장적 현상들과 그것들에 상응하는 감각들 사이에는 어떤 공통적인 것도 발견할 수 없다. (239)
관념론과 실재론 ... 주요 난점의 공통가정 (240-242)
“따라서 시각적이고 촉각적인 두 계열 속에 또는 그것들의 원인들 속에는 그것들을 서로에 상응하게 하는 그리고 그것들의 평행관계의 항상성을 보장한느 무엇인가가 있다. 그 관계맺음의 원리는 무엇인가?” (242)
영국 관념론에서 그것은 단지 어떤 기계로부터 신(deus ex machina)이 될 수밖에 없고 우리는 불가사의에 이르게 된다. ... 진정으로 무로부터 ex nihilo 창조를 의미하는 것처럼 보였다. 지금은 [통속적 실재론에 있어서] 모든 감각들은 무로부터 생겨나거나 또는 적어도 그것들을 야기하는 운동과 아무 관련도 없다. (242-243)
“통속적 실재론의 난점들은 ... 공간의 형식과 감각의 연장들 사이에 ... 어떻게 상호일치하는 지를 더 이상 알지 못한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243)
우리의 모든 감각은 어느 정도 연장적(extensives)이라는 생각이 오늘날의 심리학에 점점 침투하고 있다. 사람들은 외관상으로라도 어떤 이유를 제시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연장성(extensité)없는 감각 또는 부피의 느낌이 없는 감각은 없다는 것을 주장한다. (243-244)
이렇게 이해될 경우, 공간은 고정성과 무한 분할 가능성의 상징(symbole)이다. (244)
반대로 해석이나 측정을 목적으로 하는 모든 선입견을 떨쳐버리고 직접적 실재성과 대면해 보자. 우리는 지각과 지각된 사물 사이에서, 질과 운동 사이에서 더 이상 뛰어넘을 수 없는 거리를 발견하지 못하고, 더 이상 본질적인 차이를 발견하지 못하며, 진정한 구분조차 발견하지 못한다. (245)
영혼과 신체 L'âme et le corps 246 (200- 에도 있다)
우리의 지각은 본래 정신 안에서보다는 사물들 안에, 우리 안에서보다는 우리 밖에 있다. 다양한 종류의 지각들은 실재성에 대한 그만큼의 진정한 방향들을 표시한다. 그러나 자신의 대항과 일치하는 이 지각은 사실적이라기보다는 권리적으로 존재한다고 우리는 덧붙였다. 즉 그것은 순간성 안에서 일어날지도 모른다. (246)
의식과 물질, 영혼과 신체는 이처럼 지각 속에서 접촉하게 되었다. (246)
동질적 공간은 물질에 대해 작용하는 존재의 행동방식에 관련되는 것이지, 물질의 본질에 대해 사변하는 정신의 작업에 관련된 것이 아니다. (247)
“마지막으로 이 연장성이 일단 도달된 후에는 나누어지지 않은 채로 있으며 따라서 영혼의 단일성과 어떤 방식으로 어울리지(jure) 못한다면, 정신은 순수 지각 작용 속에서 물질 위에 놓일 수 있고, 따라서 물질과 결합할 수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은 물질과 근본적으로 구별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원문 대조요] ((247-248)
정신과 물질이 구별되는 이유는 그 때조차도 정신은 기억(mémoire), 즉 미래를 위한 과거와 현재의 종합이기 때문이며, 또한 정신은 이 물질의 순간들을 응축시키기 때문이다. 정신이 물질의 순간들을 응축시키는 것은 그것들을 사용하기 위해, 그리고 스스로가 행동들로 현시되기 위해서이며, 행동(actions)이야말로 정신이 신체와 통일되어야 하는 이유인 것이다. (248)
통속적 이원론의 오류는 공간의 관점에 위치하여, 한편으로는 공간 속에 물질과 그것의 변양들을 놓고, 다른 한편으로는 의식 속에 비연장적인 감각들을 놓는 것이다. ... (248)
물질은 사람들이 그것에 대한 분석을 더욱 멀리 진행함에 따라 상호 도출되는 따라서 서로 등가적인(s'equivalent) 무한히 빠른 순간들이 잇따름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경향이 있고, 정신은 지각 속에서 이미 기억이고 현재 속의 과거의 연장이며 진보(progres)이며, 진정한 진화로 뚜렷이 나타난다.(248-249)
신체와 정신의 관계 ... 공간적 구별과 시간적 구별 ... 첫째 구별은 정도[단계]를 포함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 반대로 [둘재] 만일 정신의 가장 하급한 역할이 사물들의 지속의 잇따르는 순간들을 연결하는 것이라면, 또한 이 작용에 의해서 정신이 우선 물질과 구분된다면, 사람들은 물질과 충분히 전개된 정신 사이에서 무한한 단계들을 생각할 수 있다. (249)
이처럼 무기물과 반성의 가장 높은 단계에 도달한 정신 사이에는 기억의 모든 가능한 강도들 즉 같은 말이 되겠지만, 자유의 모든 단계들이 있다. 첫째 가설, 즉 정신과 신체의 구분을 공간의 용어들로 표현하는 가설에서 신체와 정신은 직각으로 절단된 두 철길과 같다. 둘째 가설에서 철길들은 곡선을 따라 이어지고 따라서 한 길에서 다른 길로 서서히 넘어간다. (250) [탄젠트(접선) 그리고 편위(derivee), 파생]
만일 물질이 과거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물질이 과거를 끊임이 반복하기 때문이며, [또한] 필연성에 종속되어 각각이 선행하는 것과 등가적이고, 그것으로부터 도출될 수 있는 일련의 순간들을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물질의 과거는 진실로 그것의 현재 속에 주어진다. 그러나 다소간 자유롭게 전개되는 존재[생명존재]는 매순간 새로운 어떤 것을 창조한다. 따라서 만일 과거가 기억 상태로 그 존재 안에 놓여지지 않는다면, 그 존재의 현재 속에서 그 존재의 과거를 읽으려고 시도하는 것은 헛된 일이다. 따라서 이 책에서 이미 여러 번 사용했던 은유를 다시 사용하면, 유사한 이유들로 인해 과거는 물질에 의해 작동되고(joué), 정신에 의해 표상됨에(imaginé) 틀림없다. (251) (39UNA) [운동 속성 대 사유속성 (51QKH)]
# 결론 - Conclusion
1. 신체가 행동의 도구, 오로지 행동만의 도구라는 것이다. ..253
외적 지각이 문제되는 경우... 그러나 우리 지각에서 뇌에 의해 설명되는 것은 우리의 시작되었거나 준비되었거나 암시된 행동들이지 우리 지각자체는 아니다. (253)
추억이 문제되는 경우 ... 이처럼 지각 속에서도 기억 속에서도 하물며 정신의 고차적인 작용들 속에서도 신체는 표상에 직접적으로 기여하지 않는다. (253-4)
2. [신체와 영혼 사이 넘을 수 없는 심연을 파놓은 것], 254
이 문제가 제기한 모든 난점들은 통속적 이원론에서든, 유물론에서든, 관념론에서든 실상 사람들이 지각과 기억의 현상들 속에서 육신(le physique) 과 마음(le moral)을 서로 복사본(duplicata)처럼 생각한 데서 비롯된다. [복사(duplicata)란 번역 가능하고 서로 대응된다고 믿는 평행론을 인정하는 사고이다. (51QKH)]
유물론 - 사람들이 우선적으로 놓은 물질적 우주의 의식적 반복이 어떻게 생겨나고, 무엇에 소용이 되는 지를 결코 이해할 수 없다. (254)
관념론 - 관념론의 암초는 지각에서 우리에게 나타나는(apparaît) 질서로부터 과학에서 우리에게 성공을 가져다(réussit) 준 질서로 가는 이행 속에 있다. 또는 특별히 칸트적 관념론이 문제일 경우에는, 감성으로부터 오성으로 가는 이행 속에 있다. (255)
통속적 이원론 - 그리고 그때 내가 나의 표상 속에서 물질에 부여했던 모든 성질들을 물질로부터 벗겨내기 때문에, 나는 바로 관념론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 그리고 이원론은 .. 이 실체들을 동일한 원리로부터 미리 조정된 두 가지의 평행적인 전개들로 간주하며, 이렇게 해서 그것들의 상호 영향을 부정하고, 그 불가피한 결과로써 자유를 희생시키는 데 이르게 될 것이다. (256)
세 가설에서 의식의 기원 - 때로는 외적 실재성의 무용한 복사본[관념론], 때로는 지적 구성의 타성적 물질[유물론]이다. 그러나 이 세 가설은 지각과 행동(action) 관계, 추억과 품성(conduite) 관계를 무시한다. (256)
따라서 한 생명체의 기억은 무엇보다도 사물에 관한 생명체의 행동의 능력(puissance)의 척도이자, 이 능력의 지적인 반향일 뿐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원리의 힘으로서 행동의 힘(force)으로부터 출발해보자. 지각과 기억에 대해서.. 알아보자. (256-257)
3. 우선 지각에 대해서 알아보자 (257)
여기에 지각 중추들을 가진 나의 신체가 있다. .. 지각은 진동들 밖에 있다. 지각은 어디에 있는가? 나는 주저하지 않고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의 신체를 놓음으로써 나는 어떤 이마쥬를 놓는 것이지만 그러나 그 사실에 의해서 또한 다른 이마쥬들의 전체를 놓는 것이다. ...따라서 나의 지각은 이 대상들 자체에 관한 어떤 것이 될 수 있을 뿐이다. ... 따라서 지각하는 대상들의 전체로부터 그것들에 대한 나의 신체의 가능적 행동(action possible)을 분리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그때 지각은 어떤 선택에 불과하다. 지각은 아무것도 창조하지 않는다. 반대로 그것의[지각의] 역할은 이마쥬 총집합으로부터 내가 어떤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는 것들[지각의 무지각 영역]을 모두 제거하고, 그리고 나서 자체로 보존된 이 이마쥬 각각들로부터 나의 신체라고 부르는 이마쥬의 필요에 무관한 모든 것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러한 것이 ...순수지각의 도식적 서술이다.(257)
모든 실재성은 결국 의식과 친화성, 유비, 연관을 갖는다는 것, ... 관념론에 양보하는 것.... 지각과 실재성 사이에 부분과 전체의 연관을 확립하기 위하여 지각에 그것의 진정한 역할, 즉 행동들을 준비하는 역할을 남겨 두어야 할 것이다. (258)
물질에 대한 나의 인식은 주관적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내 안에 있다기보다 사물 속에 있기 때문이다[영국 관념론-밀(Mill)]. 그것은[물질에 대한 나의 인식] 상대적이 아니다. 왜냐하면 “현상”과 “사물” 사이에 외관과 실재성의 관계가 아니라 단지 부분과 전체의 관계이기 때문이다[칸트주의 관념론]. (259)
실재론으로 되돌아오는 것 .. .. 소박한(naïf) 실재론이든 칸트적 실재론이든 지성과 사물 사이에 동질적 공간을 장벽처럼 세워놓고 있다. 전자는 이 공간을 사물들이 거기에 매달려 있는 실제적 장소로 만든다. 후자는 공간을 감각의 잡다(雜多)들이 정돈되는 이상적 장소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양자는 이 장소가 거기에 자리 잡으러 오는 것의 필연적 조건인 것처럼 먼저(d'abord) 주어진다. (260)
우리는 구체적 너비(étendue)가 실제로 분할되지 않으며, 무매개적 지각도 진정으로 비연장적(inextensif)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 즉 우리는 지각을 사물들 속에 다시 위치하게 했다. .. .. 한계를 제거함에 따라 ... 실재론과 관념론이 거의 일치하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261)
마치 모든 일은 우리가 외적 사물들로부터 잠재적 작용을 고정시켜 붙잡아두기 위해 그것의 실재적 행동을 여과하는 것처럼 일어날 것이다. 우리 신체에 대한 사물들의 잠재적(virtuelle) 행동과 사물들에 대한 우리 신체의 잠재적 행동이야말로 우리 지각 자체이다. (261)
뇌의 이 상태는 지각의 원인도 결과도 아니고, 어떠한 의미에서도 복사본(duplicat)도 아니다. (262)
4. 순수지각 이론 262
<순수지각>에 대한 이론은 동시에 두 가지 점에서 완화되고 보충되어야만 한다. 실로 이 순수지각은 실재로부터 있는 그대로 떼어낸 단편과 같은 것이어서, 다른 물체들의 지각에 자신의 신체에 대한 지각 즉 자신의 정념들을 혼합하지 않는 존재, 자신의 현실적 순간의 직관에 다른 순간들의 직관 즉 그곳의 기억들을 혼합하지 않는 존재에 속할 지도 모른다.(262)
우리는 우선 연구의 편의를 위해 생명체를 공간 속의 수학적 점처럼 다루고, 의식적 지각을 시간 속의 수학적 순간처럼 다루었다. 이 생명체에 그것의 연장을 복구시키고, 지각에 그것의 지속을 복구시켜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의식 속에서 그것의 두 가지 주관적 요소를, 정념(affectivité 애정성)과 기억(mémoire)을 복귀시킬 것이다. (262)
정념은 무엇인가? 우리의 지각은 다른 사물들에 대한 우리 신체의 가능적 행동을 그린다고 우리는 말했다. ... 물체들은 가정상 우리 신체로부터 공간에 의해 현저하게 분리되는데, 이 공간은 시간 속에서 그 물체들이 [미래의] 약속(전망, promesses)과 위협(menaces)으로부터 얼마나 떨어져 있는가를 재는 것이다. (262)
고통은 상해 받는 부분들이 사태를 복구하기 위한 현실적 노력이며, 오로지 전체의 효과들에 적합한 유기체 속에서 고립되어 결국 실패하게 되어 있는 노력이다. ... 느껴진 정념과 지각된 이마쥬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정념은 우리 신체 속에 있고 이마쥬는 우리 신체밖에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신체와 다른 물체들의 공통의 경계인 우리 신체의 표면은 우리에게 감각과 이마쥬의 형태로 동시에 주어진다. / 정념적 감각의 주관성은 그것의 내재성으로 이루어지고, 이마쥬들의 객관성은 일반적으로 그것들의 외재성으로 이루어진다. (263)
반대로 우리가 출발해야 하는 것은 바로 우리 활동의 필연적 무대인 이 경험으로부터이다. 따라서 사람들이 우선 주어져야 하는 것은 순수 지각, 즉 이마쥬이다.(264)
5. 정신[영혼의 문제로] 264
정신의 실재에 접하기 위해서는 한 개별적인 의식이 과거의 그것으로 풍부해진 현재 속으로 연장하고 보존하면서 필연의 법칙 자체에서 벗어나는 바로 그 지점에 위치해야 한다. ...이 필연법칙에서 모든 것이 항상 흘러가는 것이다.(264-265) [플라톤이 물질의 필연성을 끊임없이 움직임으로 파악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그런데 베르그송에서는 의식 자체도 끊임없이 흐르는 지속이다. 이 필연성에서 자유가 나온다는 것이 플라톤과 다르다. 플라톤의 명령과 지배의 자유임에 비해 베르그송은 자기 생성의 자유이다.]
6. 기억 265
그러나 기억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사정이 다르다. 왜냐하면 추억은 부재한 대상의 표상이기 때문이다. ... [두 개의 상반된 주장] [하나- 생리학자] 기억은 단지 뇌의 기능에 불과하고, 지각과 추억 사이에는 단지 강도의 차이 밖에 없다. ... 반대되는 주장 [영혼학자] 기억은 뇌의 기능과는 다른 것이며, 지각과 추억사이에는 정도의 차이가 아니라 본성의 차이가 있다. - 따라서 이 두 이론의 대립은 첨예한 형태를 취하며, 이번에는 경험이 그것들을 분리할 수 있다. (265-266)
반대로 재인식은 현재 지각에 접촉하여 순수 추억을 점진적으로 물질화하기 위해 순수기억 속으로 그것들을 찾으러 가는 의식의 다소 높은 긴장을 함축한다.(268)
우리는 방금 그 첫째 논점을 즉 기억은 뇌의 기능과 다른 것임을 확립했다. 따라서 순수추억을 분석함으로써 추억과 지각 사이에 단순한 정도의 차이가 아니라 근본적인 본성의 차이가 있음을 보여주는 일이 남게 되었다. (268)
7. [순수추억의 지각과 본성상 차이] 형이상학적 범위(portée)에 속한다. [범위 271]
추억이 약화된 기억이라고 하는 것은 아마도 순수 심리학의 주장일 것이다. 그러나 그 말에 속지 말기를 바란다. ... 거기에 영국 관념론의 싹이 있다. (268)
관찰[이 해결해 줄 것이다.] ... 예를 들어 가벼운 소리의 지각을 강한 잡음의 추억으로 간주하는 일이 일어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이러한 혼동은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 (269)
사실 기억은 결코 현재로부터 과거로 후퇴하는 것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과거로부터 현재로 가는 진보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우리가 단번에 위치하는 곳은 과거 속이다. 우리는 잠재적 상태로부터 출발하여, 일련의 상이한 의식의 평면들(plans de conscience)을 가로질러 그것이 현실적 지각으로 구체화되는 끝점까지 즉 그것이 현재적이며 작용하는 상태가 되는 지점까지, 결국 우리 신체가 그려지는 우리 의식의 이 극단적인 평면에까지 조금씩 그것을 인도한다. 순수 추억은 이러한 잠재적(virtuel) 상태로 이루어진다. (269-270)
순수추억은 정신적[심리적] 표출(manifestation spirituelle)이다. 기억과 더불어 우리는 진실로 정신[영혼]의 영역 속에 있게 된다. (270-271) [영역 portée]
8. 정신과 몸의 합류점 271
관념연합과 일반관념의 문제
또한 관념연합론은 어떻게 추억이 그것을 일깨우는 지각에 접착되는지, 왜 연합작용은 다른 방식이 아니라 유사성과 인접성에 의해서 만들어지는지, 결국 어떤 변덕에 의해서 정해진 추억이 .... 무수한 추억들 가운데서 선택되었는지를 설명할 수 없었다. 이 사실은 관념연합론이 상이한 의식의 모든 평면들을 뒤섞고 혼동했다는 것을 뜻한다.(271)
행동의 평면과 기억의 평면 사이에서 우리는 의식의 무수한 상이한 평면들, 우리의 체험된 경험 전체의 총체적이고 다양한 무수한 반복들을 포착한다고 생각했다.(273)
생명체의 관심 - 유사(ressembler)와 접근(rapprocher), 이용(profiter) ... 생명적 유용성(utilité) ... 행동의 평면과 꿈의 평면 ...
따라서 많은 유사성들 사이에서 하나의 유사성을 선택하는 것, 다른 인접성들 중에서 하나의 인접성을 선택하는 것은 우연적으로 작용하는[에피쿠로스] 것이 아니다. 선택은 기억작용의 긴장(tension)의 끊임없이 변화하는 정도에 의존하는데, 이 기억작용은 그것이 현재의 행동으로 더욱 삽입되려하거나 또는 거기서부터 풀려나려 함에 따라 어떤 음색(ton) 또는 다른 음색으로 완전히 이전[transfoter] 한다. 그리고 또한 .. 최초의 일반관념들을 그리는 것도 기억의 두 극단적인 한계를 사이를 오가는 기억의 이중적인 운동이다. 즉 운동적 습관은 유사한 이마쥬들로부터 유사성들을 이끌어내고, 유사한 이마쥬들은 운동 습관으로 다시 내려가, 예를 들어, 그것들을 통일하는 말의 자동적인 발성 운동 속에 섞이게 된다. 따라서 관념으로부터 생겨나는 일반성은 이미 정신의 어떤 활동으로, 행동과 표상 사이의 어떤 운동으로 이루어진다. ... 그러나 일반관념은 실제로 한 극단에서 다른 극단으로 이행하는 정신의 진행(marche)으로 이루어진다..(273-274)
9. 순수지각과 순수 추억의 교차: 정신과 물질의 상호작용... 274
순수지각 즉 순간적인(instantanée) 지각은 단지 하나의 이상(idéal), 즉 하나의 한계(limite)에 불과하다. 모든 지각은 지속의 어떤 두께를 점유하고, 과거를 현재 속에 연장하며, 그 사실에 의해 기억에 참여한다. ...(274)
이원론 일반에서 나타나는 두 원리의 대립은, 비너비인 것과 너비적인 것[유물론-신체론], 질과 양[심리론-애정과 지각론], 그리고 자유와 필연[형이상학-영혼과 신체론]의 삼중적 대립으로 귀착한다. ... 따라서 단지 심리학으로부터 취하려 했던 결론들을 여기서는 더욱 형이상학적 형태로 제시하면서 이 대립들을 차례로 검토해보자. (275)
1) 물질과 의식사이, 신체와 정신 사이에서 어떤 공통적인 것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275
주어진 것, 실재적인 것, 그것은 나누어진 너비와 순수 비너비 사이에서 비결정적인 어떤 것이다. 이 비결정인 어떤 것을 우리는 확장적인 것(extensif)라고 부른다. 확장이란 지각의 가장 표면적인(apparente) 성질이다. (276)
2) 질과 양의 대립, 즉 의식과 운동의 대립은 훨씬 덜 인위적이다. 276
... 우리는 확장(extension)이라는 관념에 의해서 비너비적인 것과 너비적인 것의 대립을 제거했듯이, 긴장(tension)이라는 관념에 의해서 질과 양의 대립을 제거하려 했다. ... 오성의 기능은 확장과 긴장이라는 이 두 가지 류(genre)로부터 그것들의 빈용기(contenant)만을 즉 동질적 공간과 순수 양만을 분리해내고, 그렇게 함으로써 단계들을 포함하는 유연한 실재들에 단지 취하거나 버릴 수 있을 뿐인 행동의 필요들로부터 생겨난 엄격한 추상물들을 대치하고, ... (278-279) [그런 행동이 행태주의자들의 것이고, 제국주의 옹호 방식이며 이들의 행태가 전쟁 또는 위협을 통한 자기 관념을 우월성을 만든다. 이것이 상층 추상물이다. (51QKH)]며, 사
3) 자유와 필연의 대립 279
자유는 자연 속에서 제국 속의 제국과 같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이 자연이 하나의 중성화된(neutraliseé) 의식으로 따라서 잠재적인(latente) 의식으로, 그것의 우발적인 현시들이 서로 상충해서 그것들이 나타나려는 정확한 순간에 무화되는 의식[무의식, inconscient]으로 간주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279) [DI와 MM에서 ‘제국 속의 제국’이란 플라톤주의자들과 유일신앙자들의 착각을 지칭한다. 이 용어는 스피노자 “윤리학” 1장 부록에 나온다.(51QKH)]
이 의식은 단지 하나의 장애를 제거하고, 실재 전체로부터 잠재적 부분을 추출하고, 결국 그것에 관계된 것을 선택하고 끄집어내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이 지적 선택에 의해서 이 의식이 정신으로부터 자신의 형식을 보유한다는 것을 증언한다면, 이 의식이 자신의 질료를 이끌어내는 것은 바로 자연이다.(279-280) [벩송이 스피노자와 같은 사유의 방향을 취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스피노자는 근대의 오성(지성) 위에서 속성을 사고(추론)와 운동(연장)으로 전개하였다면, 벩송의 두 속성은 심리학의 사유의 현실화(기억의 전송)와 의학 생리학의 전달(감각 운동기제 이동)이라는 실증을 통하여 두 속성을 영혼의 상상하다 (inmaginer)와 신체의 상연(jouer)하다로 보았고, 두 속성을 개의 선으로 보다는 회로로서 꿈의 평면(도식)과 상연의 도식(평면)으로 위상적으로 구별하였다고 볼 수 있다. (51QKH)] [나로서는 선택을 속좁은 이성(오성)의 지식을 통한 이기심으로 보면 제국주의가 보이고, 선택이 자연의 본성에서 유래한다면 생명종의 노력으로 보면 생태주의자들의 관점이 보인다. 고 하겠다.]
이처럼 시간 속에서 고려하든 공간 속에서 고려하든, 자유는 언제나 필연 속에 깊은 뿌리들을 밀어넣고 있으며, 필연과 함께 내밀하게 조직되는 것처럼 보인다. 정신은 물질로부터 지각들을 빌려와 거기서 자신의 양분을 이끌어내고, 자신의 자유를 새겨 놓은 운동의 형태로 물질에게 지각들을 돌려준다. (280) / 정신은 자신의 자양분을 끌어낸 지각들을 물질로부터 빌려와, 자신의 자유를 각인한 운동의 형식으로 물질에게 지각들을 되돌려 준다. (280 마지막 구절) ㅡ [영혼이 물질(신체)로부터 자신의 지각을 얻어 종합한 지식(사본)을 새로운 사본을 만들기 위해 물질(신체)에게 다시 사본을 형성하게 한다. 이 후자의 사본은 앞선 사본의 반복이지만 새로운 반복이다. 이로서 영혼이 신체에서 새로운 반복을 시행한다. 그 신체는 새로운 영혼의 모습을 현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 [새로운 영혼이란 환경(millieu) 속에서 탈영토화로서 활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탈코드화의 길을 것든다. 이 탈코드화가 다른 코드로서 기존의 코드를 포섭하고, 확장하는 경우에 인식의 확장이다(인지)의 복잡성의 증가나, 요소들의 증가에 의한 인지의 정도를 높이는 것과는 다르다. (51QKH).] (39SNA) (39UMJ) (69:2 39WMH) (IV,15:06, 51QKF) (15:32 51QK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