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르네오 섬의 추억
소 재 현
1984년 봄, 제조업체인 현대중공업이 말레이시아 보르네오 섬에 건설되는 발전소를 턴키 베이스로
수주하게 되었다. 당시 원자력사업을 담당하고 있던 나는 회사에서 처음으로 수행하는 해외 발전소
공사에 공무 책임자로 차출되어 그 해 겨울 송년회로 거리가 떠들썩한 분위기를 뒤로 하고 생소한
보르네오 섬에 선발대로 부임하게 되었다.
무더운 날씨에 하늘을 찌르는 듯한 정글이 무성한 보르네오 섬엔 매일 한 번씩 스콜이 쏟아졌고 발전소 부지가 있는 곳은 밀림 숲 속의 바다를 낀 작은 마을이었다. 선발대는 5명으로 구성되어 현지에 도착하여 마땅한 숙박시설이 없는 관계로 발주처가 운영하는 작은 게스트하우스에 임시로 머물며 현장 개설을 위한 준비 작업을 서둘렀다. 발주처는 미국과 말레이시아의 합작회사였으며 사장부터 주요 직급은 미국인들이 맡아 운영하고 있었다.
매일 정글을 오가는 출퇴근을 하며 정신없이 바쁜 일정을 소화했지만, 처음으로 부딪힌 외국 생활임에도 일에 대한 사명감으로 견딜 만하였고 젊은 엔지니어들이 현장에 적응하는 것도 큰 무리가 없었다.
2개월의 준비작업으로 어느 정도 기반을 갖춘 우리는 본사에서 파견되는 2진을 맞게 되었고, 숙소도 새로 지은 정글 속 통나무 집으로 옮겨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2진에는 한국인 요리사도 같이 와 드디어 한식을 먹게 된다는 설렘이 모두들 가득했다. 요리사는 실력 발휘도 할 겸 이것 저것 저녁 식사를 준비했는데 그 중 인기가 있던 메뉴가 밀가루 부침개였다. 그런데 식사를 마치고 밤이 되어 취침에 든 뒤 새벽 2시경쯤 되었을까 이 방 저 방에서 배가 아프다며 난리가 났다. 놀란 우리는 환자들을 마을에 있던 보건소로 옮겨 의사의 진찰을 받으니 전부 식중독 증세였다.
우리가 저녁식사 준비에 사용한 물이 문제였다. 수도 파이프에서 나오는 물을 받아 밥도 짓고 요리를 했는데 그 물은 전혀 여과나 위생처리가 안된 강물이었다. 강에 파이프를 연결하여 가정에 공급되고 있었던 것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현지에 사는 미국인들은 모두 생수를 별도로 구입하여 식수로 사용하고 있었으며 현지인들도 필터 장치를 사용하고 있었다. 게스트하우스에서 숙식을 해결해 왔던 우리는 전혀 그러한 사실을 접할 수 없었기에 발생한 사고였다.
그 후 비가 심하게 오는 날에는 강물이 혼탁 해져서 수도 파이프에서는 세수도 할 수 없는 흙탕물이 나오는 경우도 있었으며, 일부 가난한 현지인들은 집 처마 밑에 물탱크를 설치하여 빗물을 모아 식수로 사용하고 있는 것도 알게 되었다. 정글 지대여서 빗물은 오염되지 않은 비교적 깨끗한 물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사고를 접한 그 후부터는 모든 사항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다.
오랑우탄을 친구삼아 정글의 오솔길을 걸어 출퇴근할 때면 가끔 도로를 횡단하는 2m 길이의 뱀도 무서워하지 않게 되었고 잠자리에 들려고 침대에 누워 툭하면 천정에서 떨어지는 도마뱀을 친구로 맞으며 현지 생활에 적응하던 그 시절이 생각난다.
당시 우리는 밀림에서 벌목하는 목재를 잘라 합판을 만드는 합판공장과 제재소에서 나무를 절단할 때 3분에 한 트럭 분량씩 나오는 톱밥을 연료로 하는 발전소를 건설하는 공사를 맡아 일을 진행하고 있었다.
무더운 나라라 톱밥을 활용할 데가 없어 마을 인근 바닷가에서 매일 태워 없애느라 소각 연기가 공해를 유발시키고 있었으며 태운 뒤 남는 재를 처리하는 것도 골칫덩이였다. 또한 일제 강점기에 설치된 소형 디젤 발전기는 노후화로 인해 툭하면 고장이 발생하여 주 정부는 전력공급에도 여간 애로가 있는 게 아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건설하는 합판공장과 발전소는 이들의 모든 문제를 한 방에 해결해 주는 대안이 되었고, 마을 주민들은 우리 한국인들을 구세주로 알고 따뜻하게 대해 주었다.
우리는 본사에서 보내주는 현장 운영비를 1시간 거리의 읍내에 있는 은행에서 인출하여 생필품도 사고 직원들에게 현지 수당도 지급하곤 했다. 그 날도 나는 경리 직원을 대동하고 돈을 찾아 현장에 복귀했는데 우리가 은행을 나온 지 30분이 지난 후 은행 강도 사건이 발생했다. 인근 필리핀 민다나오 섬에 거주하는 해적들이 소총으로 무장한 채 은행을 습격하여 우리에게 돈을 내주던 은행원을 사살하고 돈을 강탈해 가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보르네오 섬은 해안 경비가 소홀한 관계로 인근 필리핀이나 인도네시아인들이 해안을 통해 불법으로 입국하는 일이 많았으며 특히, 필리핀 민다나오 섬에는 가난한 사람들과 범죄 전과자 등 반정부 주민들이 거주하며 보트를 이용하여 해적 행위를 하여 말썽을 일으키곤 했다.
현장에서는 숙소내에 소등을 지시하고 외부 출입을 봉쇄했다. 간발의 차이로 해적 들과의 사고를 피했던 나는 안도의 한숨을 들이 마시며 생사의 갈림길이 언제나 근접해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무튼 해적의 출현은 또 하나의 예기치 못한 엄청난 사건이었다.
80년대만 해도 우리 한국인 근로자가 직접 해외에 파견되었지만 지금은 우리 한국인 근로자는 임금이 높아 해외현장에 한국인 근로자 동원은 거의 없다. 대부분 TCN(Third Country Nationality, 삼국인)으로 불리는 필리핀, 인도, 방글라데시, 파키스탄, 네팔 등 인력이 풍부하고 노임이 싼 사람들을 동원해 일을 한다. 당시에는 과도기여서 우리 나라 하청업체에서 일부 베테랑 숙련공들을 동원하였고 한국인 근로자 1명에 필리핀 보조 작업자를 3명씩 붙여 허드렛일을 돕게 했다. 자재를 이동하는 작업, 공구를 옮기는 작업, 청소 등 단순 보조 작업이 많아 우리 근로자들과 삼국인 작업자들은 대부분 잘 융합하며 일을 해 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하루는 사고가 발생했다. 영어가 약했던 우리 근로자가 삼국인에게 작업 지시를 할 때마다 소리를 지르면서 우리 말로 ‘새끼야’를 끝에 붙였던 게 화근이었다. “저기 있는 파이프 이쪽으로 가져와, 새끼야!”식으로 몸짓으로 지시하며 아무 감정없이 내 뱉는 우리 근로자의 고함이 삼국인 작업자를 자극했고 ‘새끼야’가 무슨 뜻인지 알아본 삼국인이 그 말이 좋지 않은 욕이라는 걸 알게 되자 순간적으로 흥분하여 들고 있던 쇠파이프로 우리 근로자의 뒷머리를 가격한 것이다. 우리 근로자는 병원으로 후송 입원 조치되었고 다행이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으나 현장에는 비상이 걸렸다.
그런데 사고를 낸 그 친구는 파출소에 가서 당당하게 주장했다. 한국인이 자기를 모독하였기에 알라신의 이름으로 혼을 내 주었다는 것이다. 그는 무슬림이었다. 경찰은 그를 마을에서 추방하고 현장 접근을 불허했다. 우리는 현장 한국인 근로자들에게 언행에 각별한 주의를 당부했고 못 알아들을 거라는 예단 속에 함부로 내뱉는 나쁜 말들은 반드시 화근이 되어 자기에게 돌아옴을 일깨워주었다.
요즘에는 터빈 발전기 등 중량물을 설치하기 위해 재킹타워(Jacking Tower)라는 첨단 장비를 사용하지만 당시에는 그런 장비가 없어 우리 나름의 고전적인 방법으로 일을 했다. 파이프를 지면에 깔아 그 위에 중량물을 올려 파이프를 굴리면서 중량물을 설치장소까지 이동시켜 H형강으로 제작된 문형 구조물에 체인블럭을 걸어 중량물 들어 올려 설치했다. 이 광경을 본 발주처의 미국인 건설부장이 감격하여 자기가40년 동안 건설현장 에서 일을 했는데 터빈을 이러한 원시적인 방법으로도 완벽하게 설치하는 것은 처음 보았다고 극찬의 공문을 보내왔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기발한 공법에 감탄한 것이다. 그 외에도 우리 나라 작업자들의 고소작업은 능란하여 마치 서커스를 보는 것처럼 발주처 감독관들의 탄성을 자아내곤 했다.
전화도 발주처 사장실에 딱 한 대가 설치될 정도로 열악한 환경에서도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열심히 일을 했고 그 결과 착공한지 1년만에 우리는 발전소를 성공리에 완공하여 발주처에 인도하고 보르네오 섬에서 철수하였고 꿈에 그리던 가족 들과의 재회의 기쁨을 누렸다.
가족과 떨어져 머나먼 이국 땅에서 예기치 못한 난관에 부딪히며 계약된 납기 내에 발주처가 납득할 수 있는 공사를 완공해야 하는 해외 건설 현장은 생각하는 것 보다 훨씬 힘들고 어렵지만 자기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회사와 나라의 명예를 지킨다는 신념아래 목표를 달성하고 나면 그 보다 더 강한 성취감은 없다.
오래 전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지만 기억이 소환될 때마다 새로운 활력이 솟아오른다.
우리 말의 맛깔
소 재 현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할 무렵 대통령의 이름을 ‘윤서결’로 발음해야 하는지 ‘윤성녈’로 해야 하는지를 놓고 논란이 많았다. 문법을 떠나 본인 의사를 존중하여 공식적인 발음을 ‘윤성녈’로 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지만 이러한 경우가 가끔 발생한다.
우리 말에는 한자어가 섞여 있어 발음 원칙이 헷갈릴 때가 있으나 발음하기 쉽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발음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
유행가 가사에서도 그렇다. ‘울고 넘는 박달재’는 노래의 첫 구절인 ‘천등산 박달재’도 대부분의 노래하는 사람들은 ‘천둥산 박달재’로 부르고 ‘안개 낀 장충단공원’에서도 원음 가수 마져도 ‘안개 낀 장춘단공원’으로 부르고 있다. 그렇게 불러야 노래가 부르기 쉽고 구성진 모양이다.
드라마 ‘전원일기’의 극중인물 ‘응삼이’는 ‘응샘이’라고 불러야 더 맛깔이 나고, 같은 시골에서 자란 ‘용덕이’는 ‘용디기’라고 불려졌던 기억이 정겹고 새롭기만 하다.
동남아에 나가보면 말레이시아 사람들은 말 끝에 ‘∽ㄹ라’를 붙이는 버릇이 있다. ‘오케이’하면 될 것을 ‘오켈라’, ‘렛츠고’하면 될 것도 꼭 ‘렛츠골라’라고 한다. 그런가 하면 태국 사람들은 말 끝에 ‘ ∽요’를 붙이기를 좋아 한다. ’오케요’, ‘렛츠고요’라고 하는 게 일상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경상도에 가면 사람들이 ‘소재현이가’를 ‘소재혀이가’로 ㄴ을 생략하며 말을 이어가는 버릇이 있다. 이것을 사투리라고 해야 하는지 버릇이라고 해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과학적이고 아름다운 우리 말도 세밀히 들어가 보면 어려워진다.
요즘 회사 이름도 기억하기 쉽게 작명하여 가끔 그 기발성에 감탄하기도 한다.
냄새를 감지하는 디텍터를 생산하는 업체인 ‘개코전자’라는 회사가 있다. 처음에는 외국 회사인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순 우리말 회사 이름이었다. 개가 냄새를 잘 맡는 것에 착안하여 회사 이름을 개코전자라 등록하였고 누구나 한 번 들으면 잊을 것 같지 않은 이름이다.
한 번은 광화문 근처에 있는 건물에 컨소시엄을 구성한 회사와 프로젝트 오피스를 임시로 개설하여 입주하였는데 같은 층에 FSK라는 회사가 입주해 있었다. 궁금하여 그 회사를 찾아가 FSK가 무슨 일을 하는 회사인지, FSK는 무슨 뜻인지 물어보았다. 세계 유명 화장품 회사에 화장품을 담는 케이스를 납품하는 회사이며 FSK는 ‘From Seoul Korea’의 약자라 했다. 정말 아이디어 작명이 아닐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또한 우리나라에 ‘주식회사 E1’이라는 LPG 공급 전문회사가 있다. 원래 회사 이름을 지을 때 ‘Energy First’ 라는 기치아래 ‘E1(이원)’이라는 이름을 도입했는데 표기가 짤막하다 보니 오해도 많이 받는다고 한다.
회사가 커져 큰 행사 후원도 많이 하는데 입장 티켓에 회사 이름이 적혀 있는 것을 좌석번호인 줄
아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EI(이아이)로 읽는 사람도 있다 한다. 이 회사가 사업도 잘 되고 유명해져서 지금은 그런 일이 없지만 초창기에 발생했던 일화다.
요즘에는 E1을 우리 말인 줄 알고 ‘티’ 라고 하는 사람도 있어 이 회사는 ‘티티’라는 귀여운 로고를 만들어 회사 이미지를 선전하고 있으며 소비자들의 기억에 쉽게 각인되고 있어 좋은 홍보 효과를 내고 있다.
사람 이름이건 회사 이름이건 뜻이 있고 기억하기 쉬운 이름이 최고가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