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지도론 제34권
51. 초품 중 ‘모든 부처님 세계를 보다’의 뜻을 풀이함 ②
【經】 다시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시방의 항하의 모래수같이 많은 세계 안의 모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법에 대하여 이미 말씀하셨고 지금 말씀하시며 장차 말씀하실 법을 들은 뒤에 일체를 믿고 지니면서 스스로가 행하고 또한 남을 위해 설해주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느니라.
【論】
【문】 위에서 이미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 말씀한 법을 기억하고 지니면서 잊지 않고자 한다면 마땅히 반야를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이제 무엇 때문에 다시 3세의 부처님 법을 믿고 지닌다고 말씀하는가?
【답】 위에서는 “시방의 모든 부처님의 법을 기억하고 지니고자 한다면”이라고 말씀하셨으나,
그것이 어떤 법인 줄 아직 모르기 때문에 12부경(部經)이 바로 부처님의 법임을 말씀하셨고 그리고 성문이 듣지 못한 것도 말씀하셨다.
위에서는 다만 항하의 모래수같이 많은 세계의 모든 부처님이라고 말씀했고,
이제는 항하의 모래수같이 많은 3세의 모든 부처님의 법이라고 하셨다.
또 위에서는 다만 받아 지니어 잊지 말 것을 말씀하고, 받아 지니어 이익되는 것은 말씀하지 않았으나,
이제는 자기 자신을 위하고 또한 다른 사람을 위해 설한다고 하신 것이니, 이 때문에 다시 말씀하는 것이다.
【經】 다시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과거의 모든 부처님께서 말씀하여 마쳤거나 미래의 모든 부처님께서 장차 말씀하실 것을 듣고 들은 뒤에는 스스로를 이롭게 하고 다른 이를 이롭게 하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느니라.
【論】
【문】 시방에 현재 계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법은 받을 수 있고 지닐 수도 있지만, 과거는 이미 사라졌고 미래는 아직 있지 않은데 어떻게 들을 수 있다는 것인가?
【답】 이 이치는 먼저 이미 대답했으나 이제 다시 설명하겠다.
보살에게 삼매가 있나니, 관삼세제불삼매(觀三世諸佛三昧)1)라 한다.
보살은 이 삼매 안에 들어가 3세의 모든 부처님을 모두 뵙고 그 설법도 듣게 된다.
비유하건대 마치 외도의 신선(神仙)이 미래세의 일에 대해 아직 형상이나 징조가 없고 아직 언설이 없는데도 지혜의 힘으로써 역시 보기도 하고 듣기도 하는 것과 같다.
또 모든 보살의 힘은 불가사의한지라 미래 세상이 비록 아직 형상도 없고 아직 언설이 없다 하더라도 능히 볼 수가 있고 들을 수도 있나니,
혹은 다라니(陀羅尼)의 힘 때문이기도 하고 혹은 지금의 일로써 과거나 미래의 모든 일에 견주어서 알기도 한다.
이 때문에 “이것을 얻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經】 시방의 항하의 모래수같이 많은 모든 세계 중간의 어두운 곳과 해와 달이 비추지 않는 곳을 광명을 가지고 두루 비추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느니라.
【論】 보살은 도솔천(兜率天)으로부터 어머님의 태(胎) 중에 내려오려 할 때 몸에서 광명을 놓아 온갖 세계와 세간의 어두운 곳을 두루 비추셨고,
다음에 탄생하실 때에도 광명을 두루 비추심이 역시 그와 같았으며,
처음 도를 이룰 때와 법륜(法輪)을 굴릴 때와 열반에 드실 때에도 큰 광명을 놓으셨음은 역시 모두 그와 같았다.
나아가 그 밖의 다른 때에도 큰 신통을 나타내고 큰 광명을 놓으셨나니,
마치 반야바라밀을 말씀하려 할 때 큰 신통을 나타내고 큰 광명으로써 세간의 어두운 곳을 두루 비추신 것과 같다.
이와 같이 곳곳의 경 가운데서 모두 신통과 광명을 말씀하셨다.
【문】 이것은 바로 부처님의 힘인데 무엇 때문에 보살이라고 말씀하는가?
【답】 지금은 “보살이 이것을 얻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모든 큰 보살은 능히 이런 힘이 있나니,
마치 변길(遍吉)보살과 관세음(觀世音)ㆍ득대세(得大勢)ㆍ명망(明網)ㆍ무량광(無量光) 보살 등은 능히 이런 힘이 있어서 몸에서는 한량없는 광명을 내며 시방의 항하의 모래수같이 많은 세계를 능히 비춘다.
또 아미타불(阿彌陀佛) 세계 안의 모든 보살들은 몸에서 상광(常光)을 놓아 10만 유순을 비춘다.
【문】 보살의 몸의 광명이 이와 같음은 본래 어떤 업의 인연으로 얻는 것인가?
【답】 신업(身業)이 청정하기 때문에 몸에 장엄을 얻는 것이다.
마치 경에서의 말씀한 것과 같으니,
어느 한 귀신이 있었는데 머리는 돼지와 같고 입에서는 냄새나는 벌레가 나오면서도 몸에는 금빛의 광명이 있었다.
이 귀신은 전생에 비구로 있으면서 객(客) 비구를 나쁜 말로 욕하고 꾸짖은 일이 있다.
몸으로는 청정한 계율을 지녔기 때문에 몸에는 광명이 있었지만,
입으로는 나쁜 말이 있었기 때문에 입에서 냄새나는 나는 벌레가 나왔었다.
마치 경에서 말하기를,
“마음의 청정함에는 우열(優劣)이 있기 때문에 광명에는 상ㆍ중ㆍ하가 있다”고 한 것과 같다.
소광천(少光天)ㆍ대광천(大光天)ㆍ광음천(光音天)과 욕계의 모든 하늘은 마음이 청정하면서 보시하고 계율을 지녔기 때문에 몸에 광명이 있다.
또 어떤 사람은 중생을 가엾이 여기는 까닭에 어두운 곳에 등불을 켰으며,
또한 존상(尊像)과 탑사에 공양하기 위하여 명주(明珠)와 호향(戶嚮)과 밝은 거울 등 밝고 깨끗한 물건을 보시한 까닭에 몸에 광명이 있다.
또 항상 인자한 마음[慈心]을 닦으면서 중생을 두루 생각하며 마음이 청정한 까닭이며,
항상 염불삼매(念佛三昧)를 닦으면서 모든 부처님의 광명과 신령한 덕을 염(念)한 까닭에 몸에 광명을 얻는 것이다.
또 수행하는 이가 항상 불의 온갖 것에 드는 것[火一切入]2)을 닦거나 또는 지혜의 광명으로써 어리석고 어둡고 삿된 소견을 지닌 중생을 교화하는 이러한 업의 인연 때문에 마음속에 지혜의 광명을 얻고 몸에서도 역시 빛이 있게 되나니, 이와 같은 등의 업의 인연으로 몸의 광명이 청정함을 얻는다.
【經】 시방의 항하의 모래수같이 많은 세계 안에 부처님이라는 이름과 법이라는 이름과 승가(僧伽)라는 이름이 없을 때에 온갖 중생들로 하여금 모두가 바른 소견[正見]을 얻고 3보(寶)라는 음성을 듣게 하려 하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느니라.
【論】 보살은 먼저 불법과 탑사(塔寺)가 없는 곳에서는 탑을 세우나니, 이 업의 인연으로 후생에 받는 몸은 힘을 성취하게 된다.
그리고 불ㆍ법ㆍ승이 없는 곳에서는 3보를 찬탄하면서 중생들로 하여금 바른 소견에 들게 한다.
마치 경에서의 말씀과 같아서,
어떤 사람이 먼저 부처님 탑이 없는 국토 안에서 탑묘를 세우면 맑은[梵] 복덕과 맑은 이름과 한량없는 복덕을 얻나니, 이런 인연 때문에 신속히 선정(禪定)을 얻고 선정을 얻기 때문에 한량없는 신통을 얻으며, 신통의 힘 때문에 시방에 이르러 3보를 찬탄하게 된다.
바른 소견이란 만일 먼저 3보의 공덕을 알지 못하면 보살로 인하여 3보를 믿는 것이다.
3보를 믿기 때문에 업의 인연과 죄복을 믿으며,
업의 인연을 믿기 때문에 세간이 바로 속박이요 열반이 바로 해탈임을 믿게 된다.
3보를 찬탄하는 이치에 관해서는 팔념(八念) 중에서의 설명과 같다.
【經】 보살마하살이 시방의 항하의 모래수같이 많은 세계안의 중생으로 하여금 나의 힘으로 눈먼 이는 볼 수 있고 귀머거리는 들을 수 있으며, 미친 자는 정신을 찾고 벌거숭이는 옷을 얻으며, 배고프고 목마른 이는 충분히 먹고 마시게 하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느니라.
【論】 보살은 막힘 없는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막힘이 없는 해탈을 얻어 부처님을 이루기도 하고 법성생신(法性生身)의 보살이 되기도 한다.
마치 문수사리 등은 10주(住)의 자리에 있으면서 갖가지 공덕이 구족하므로 중생이 보게 되면 모두가 원하는 대로 되는 것과 같다.
비유하건대 마치 여의주(如意珠)는 바라는 바를 모두 얻게 되는 것처럼 법성생신의 부처님과 법성생신의 보살을 사람으로서 보는 이가 있으면 모두가 소원대로 되는 것도 역시 그와 같다.
보살은 처음 뜻을 내어서부터 한량없는 겁 동안에 온갖 중생들의 96종의 눈병을 치료했으며, 또한 한량없는 세상 동안에 자신의 눈을 중생에게 보시했다.
또한 지혜의 광명으로 삿된 소견의 암흑을 깨뜨렸으며, 또한 대비(大悲)로써 중생들로 하여금 소원을 모두 얻게 하고자 했다.
이러한 업의 인연이 있는데 어떻게 중생으로 하여금 보살의 몸을 보고도 눈을 얻지 못하게 하겠는가.
그 밖의 일도 역시 이와 같으니, 이런 모든 이치는 방광(放光) 안에서의 설명과 같다.
【經】 다시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만일 시방의 항하의 모래수같이 많은 세계 안의 중생으로서 3악취(惡趣)에 있는 모든 이로 하여금 나의 힘으로 모두가 사람의 몸을 얻게 하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느니라.
【論】
【문】 자기 자신의 선업(善業)의 인연 때문에 사람의 몸을 얻는데 어떻게 보살이,
“나의 힘의 인연으로 3악도 안의 중생으로 하여금 모두 사람 몸을 얻게 한다”고 말하는가?
【답】 보살의 업의 인연으로써 중생으로 하여금 사람의 몸을 얻게 한다는 말씀이 아니고, 다만 보살의 은혜의 힘의 인연 때문에 얻는다는 말씀일 뿐이다.
보살은 신통변화와 설법의 힘 때문에 중생으로 하여금 선행을 닦아서 사람의 몸을 얻게 하는 것이다.
마치 경 안에서의 말씀과 같아서, 두 가지 인연이 있어 바른 소견[正見]을 일으키는 것이다.
첫째 밖으로는 바른 법을 듣는 것이고,
둘째 안으로는 바른 기억[正念]을 지니는 것이다.
또 마치 풀과 나무가 안으로는 종자가 있고 밖으로는 비의 은택이 있은 연후에야 생겨나는 것과 같다.
만일 보살이 없다면 중생에게 비록 업의 인연이 있다 하더라도 일으키게 하는 계기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부처님과 보살이 이익되게 하는 바가 심히 많은 줄 알 수 있다.
【문】 어떻게 3악도 안의 중생들을 모두 해탈시킬 수가 있겠는가?
부처님도 오히려 할 수 없는데 하물며 보살이겠는가?
【답】 보살은 마음으로 서원해 그렇게 하려는 것이니 허물은 없다.
또 거의 모두가 해탈을 얻기 때문에 온갖[一切]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마치 모든 부처님과 큰 보살들은 몸으로 한량없는 광명을 두루 내고 그 광명으로부터 한량없는 화신(化身)을 내어 시방의 3악도 안으로 두루 들어가게 하는데 지옥(地獄)에서는 불을 끄고 끓는 물을 차게 하며, 그 안의 중생들의 마음을 청정하게 하여 천상과 인간 안에 가 나게 한다.
아귀도(餓鬼道)에서는 배고픔과 목마름을 충족시키고 착한 마음이 일어나게 하여 천상과 인간 안에 가 나게 한다.
축생도(畜生道)에서는 뜻대로 먹이를 얻고 모든 두려움을 여의며 착한 마음이 일어나게 하여 역시 천상과 인간 안에 가 나게 한다.
이와 같음을 일컬어 “온갖 3악도에서 해탈을 얻게 한다”고 한다.
【문】 다른 경에서는 “천상과 인간 가운데 태어난다”고 설명하는데,
여기서는 무엇 때문에 “모두가 사람 몸을 얻게 한다”고만 말씀하는가?
【답】 인간 안에서는 큰 공덕을 닦을 수 있고 또한 복과 쾌락을 누리게 되지만 천상에서는 다분히 쾌락에 집착하기 때문에 도를 닦지 못한다. 이 때문에 모두가 사람 몸을 얻게 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또 보살은 중생들이 복과 쾌락만을 누리는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해탈과 항상하고 즐거움이 있는 열반을 얻게 하려 하기 때문에 천상에 가 나는 것은 말씀하지 않는다.
【經】 시방의 항하의 모래수같이 많은 세계 안의 중생으로 하여금 나의 힘으로 계율[戒]ㆍ삼매(三昧)ㆍ지혜(智慧)ㆍ해탈(解脫)ㆍ해탈지견(解脫知見)에 서게 하고 수다원(須陀洹)의 과위에서부터 아뇩다라삼먁삼보리까지를 얻게 하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느니라.
【論】
【문】 먼저 이미 이 5중(衆)과 도의 과위[道果]에 대해서 말씀하셨는데 이제 무엇 때문에 다시 말씀하시는가?
【답】 위에서는 다만 수다원에서 무여열반(無餘涅槃)에 이르기까지의 성문의 법만을 말씀하셨고,
이번에는 성문과 벽지불에서부터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이르기까지의 3승을 섞어 말씀하셨다.
【經】 다시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모든 부처님의 위의(威儀)를 배우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느니라.
【論】
【문】 어떤 것이 모든 부처님의 위의인가?
【답】 위의란 몸의 네 가지 동작을 말한다.
비유하건대 마치 코끼리가 몸을 돌려 바라보는 것과 같으니, 보고 걸을 때에 발을 땅에서 네 손가락만큼 떨어져 땅을 밟지 않아도 수레바퀴[輪相] 자국이 나타난다.
더디지도 않고 빠르지도 않으며, 몸은 기울거나 움직이지 않고 항상 오른손을 들어서 중생을 위로하며,
결가부좌(結跏趺坐) 하고 몸이 똑바르고 언제나 오른 겨드랑이를 대면서 무릎을 포개 누우며,
펴 놓은 풀 깔개는 가지런하면서 어지럽지 않고 음식에는 맛의 좋고 나쁨에 집착하지 않으며,
한 번 남의 청(請)을 받으면 묵연히 받아들여 어김이 없고 말씀이 부드러우며 방편과 이롭게 하는 데에 때를 잃지 않으신다.
또 법신불(法身佛)의 위의라 함은 동방으로 항하의 모래수같이 많은 세계를 지나가는 그 거리를 한 걸음으로 삼는다.
범음(梵音)의 설법도 역시 그와 같나니, 법신불의 모양과 이치에 관해서는 먼저의 설명과 같다.
【經】 또 보살마하살이 마치 코끼리가 바라보듯 하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느니라.
보살이 이러한 서원을 세우되,
“나로 하여금 나아갈 때에는 땅에서 네 손가락만큼 떨어지면서 발로 땅을 밟지 않게 되고, 나는 장차 사천왕천(四天王天)에서부터 아가니타천(阿迦尼吒天)에 이르기까지의 한량없는 천만억의 모든 하늘들에 둘러싸여 공경 받으면서 보리수(菩提樹) 아래에 이르겠노라”고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느니라.
【論】 마치 코끼리가 돌아보듯 한다 함은, 만일 몸을 돌려서 보려 할 때에는 온몸을 함께 움직이는 것이다. 대인(大人)의 몸매라 함은 몸과 마음이 오로지 하나일 뿐이다. 이 때문에 만일 볼 것이 있으면 몸과 마음을 함께 돌리는 것이다.
비유하건대 마치 사자가 잡을 것이 있을 때는 작은 동물이라도 그의 웅장한 기세를 고치지 않는 것처럼,
부처님도 역시 그와 같아서 만일 보실 것이 있거나 말씀할 것이 있으면 몸과 마음이 함께 해 언제나 흩어지지 않으신다.
그것은 왜냐하면, 헤아릴 수 없는 겁으로부터 한마음의 법[一心法]을 쌓았기 때문이다. 이런 업의 인연 때문에 정골(頂骨)3)과 몸은 하나이어서 나누어짐이 없다.
또 세상세상마다 교만을 깨뜨린 까닭에 중생들을 가벼이 여기지 않으시고, 보실 때에도 몸을 함께 돌리셨나니,
마치 니타아파타나(尼陀阿波陀那) 중에서의 설명과 같다. 사바제국(舍婆提國)에서는 똥을 치우는 사람에게도 부처님은 손으로 머리를 어루만지고 가르쳐 출가하게 하면서 오히려 그를 가벼이 여기지 않으셨다.
발을 땅에서 네 손가락만큼[四指] 떨어진다 함은,
부처님께서 항상 날아다니면 중생들은 의심하고 괴이하게 여기면서,
“부처님은 사람이 아니다”고 하며 귀의하거나 따르지 않을 것이요,
만일 발이 땅에 닿으면 중생들은 그로써 보통 사람과 다르지 않다고 여기면서 공경하는 마음을 내지 않을 것이다.
이 때문에 비록 땅을 다닐 때에는 네 손가락만큼 닿지 않으면서도 수레바퀴 자국이 나타나는 것이다.
【문】 부처님 같은 분은 항상 한 길의 광명[丈光]을 놓고 발이 땅에 닿지도 않는데 중생은 어찌하여 모두 다 공경하면서 따르지 않는 것인가?
【답】 중생은 한량없는 겁 동안 쌓은 죄가 심히 중하고 무명(無明)의 때[垢]가 깊으므로,
부처님에 대하여 의심을 내면서,
“이 사람은 환술쟁이다. 환술로써 사람을 속이고 있다”고 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말하기를,
“발이 땅을 밟지 않는 것이 태어난 성품이 저절로 그러하다. 마치 새처럼 날고 있는데 무엇이 기특하단 말인가”라고 하기도 한다.
혹은 어떤 중생은 죄가 중한 인연 때문에 부처님의 몸매조차 보지 못하고 곧장 큰 위덕이 있는 사문(沙門)이라고 말할 따름이다.
비유하건대 마치 사람이 중병이 들어서 죽으려 할 때에는 명약(名藥)이나 좋은 음식도 모두 더러운 악취가 난다고 하는 것과 같나니,
이 때문에 모두 다 공경하거나 따르지 못하는 것이다.
사천왕에서부터 아가니타까지의 한량없는 천만억의 모든 하늘들에 공경 받고 둘러싸여 보리수 아래에 이른다 함은,
이것은 바로 모든 부처님께 통상 있는 법이다.
부처님은 세존(世尊)이시라 보리수 아래에 이르러서 두 종류의 악마를 파괴하려고 하시는 것이니,
첫째는 번뇌의 악마[結使魔]요,
둘째는 자재천자의 악마[自在天子魔]이다.
그리고 일체지(一切智)를 이루고자 하심이니,
이 모든 하늘들이 어떻게 공경하면서 모셔 보내지 않겠는가.
또 모든 하늘들은 세상마다 보살을 돕고 옹호하였다. 출가할 때에는 모든 궁인(宮人)과 채녀(婇女)들을 깊은 잠에 빠지게 했고, 말을 양 다리로 치켜들어서 성을 넘어 나오도록 하셨다.
오늘날은 일이 성취된지라,
“우리들이 같이 모셔 보내서 보리수 아래에 이르셔야 하리라”고 하는 것이다.
【문】 무엇 때문에 찰리(刹利)와 바라문(婆羅門) 등의 한량없는 사람들이 모셔 보냈다고는 말하지 않고 모든 하늘들만을 말하고 있는가?
【답】 부처님께서는 혼자 깊은 숲 속에서 보리수를 구하셨고 그곳은 사람들이 다니는 곳이 아니었나니, 이 때문에 말하지 않는다.
또 사람들은 천안(天眼)이나 타심지(他心智)가 없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당연히 도를 이루실 것을 몰랐었나니, 이 때문에도 말하지 않는 것이다.
또 모든 하늘은 사람보다 귀한 까닭에 다만 하늘들만 말할 뿐이다.
또한 모든 부처님은 항상 고요한 데를 좋아하시고 모든 하늘들은 몸을 숨겨 나타나지 않으면서 고요를 방해하지 않았나니, 이 때문에 다만 모든 하늘들의 시중만을 말할 뿐이다.
또 보살은 다섯의 비구가 보살을 버리고 떠나간 것을 보면서 보살은 혼자 보리수 아래에 이른 것이니, 이 때문에 이러한 서원을 세우는 것이다.
【經】 “내가 장차 보리수 아래 앉을 때 사천왕천에서부터 아가니타천에 이르기까지의 하늘 옷[天衣]으로 자리가 되게 하리라”고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느니라.
【論】
【문】 마치 경에서의 말씀과 같이 부처님은 풀을 나무 아래에 깔고 앉아서 부처님의 도를 이루셨는데 이제는 어떻게 하늘 옷으로 자리가 되라고 원하라 하시는가?
【답】 성문의 경 중에서는 풀을 깔았다고 설명되었으나 마하연의 경 안에서는 중생들이 보는 바에 따라,
혹 어떤 이는 풀을 나무 아래에 깔았다고 보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하늘의 완연(婉綖)을 깔았다고 보기도 하나니,
그 복덕의 많고 적음에 따라 그 보는 바도 같지 않다.
또 생신(生身)의 부처님은 풀을 나무 아래에 깔았을 것이나 법성생신(法性生身)의 부처님은 하늘 옷으로 자리가 되었으리니, 혹 하늘 옷이 더 훌륭하기 때문이다.
또 부처님은 깊은 숲 속의 나무 아래서 성불하신지라 숲 속에 있는 사람이 보았다면 부처님께 풀을 바쳤을 것이요,
만일 귀한 사람이 보았다면 당연히 귀히 여기는 의복으로 자리를 만들었을 것이나,
이 숲 속에서는 귀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이때의 모든 용과 신과 하늘들이 저마다 묘한 옷으로써 자리를 만들었을 뿐이다.
사천왕의 옷은 무게가 두 냥(兩)이요 도리천(忉利天)의 옷은 무게가 한 냥이며,
야마천(夜摩天)의 옷은 무게가 18수(銖)요 도솔천(兜率天)의 옷은 무게가 12수이며,
화락천(化樂天)의 옷은 무게가 6수요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의 옷은 무게는 3수이며, 색계천(色界天)의 옷은 무게가 없었다.
욕계천(欲界天)의 옷은 나무 곁에서 생겨나 올도 없고 짜 집은 것도 아니었으니,
마치 얇은 얼음에 광명이 비치면 맑고 깨끗하면서 갖가지의 빛깔이 있는 것과 같았다.
색계천의 옷은 순수한 금빛 광명이어서 드러내어 알 만한 것이 아니었다.
이와 같은 등의 보배 옷으로 자리를 깔았으며 보살은 그 위에 앉아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셨다.
【문】 무엇 때문에 모든 하늘들이 까는 옷만을 말하고 시방의 모든 큰 보살이 부처님을 위하여 자리를 깐 일은 말하지 않는가? 모든 보살들은 부처님께서 장차 도를 이루시려 할 때 모두가 부처님을 위하여 자리를 폈나니, 혹은 너비와 길이가 1유순이기도 하고, 십ㆍ백ㆍ천ㆍ만ㆍ억 내지 한량없는 유순이기도 했으며, 높이도 역시 그와 같았다. 이 모든 보배 자리는 이 보살들의 무루(無漏)의 복덕에서 생겼기 때문에 이 모든 하늘들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거늘 하물며 손으로 댈 수 있었겠는가?
시방 3세(世)의 모든 부처님께서 악마를 항복을 받아 도를 얻고 장엄하고 불사(佛事)를 하는 등을 모두 다 비추어 보는 것은 마치 밝은 거울과 같았나니, 이와 같은 묘한 자리를 무엇 때문에 말하지 않는가?
【답】 반야바라밀에는 두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성문과 보살과 모든 하늘들을 위하여 같이 말하는 것이요,
둘째는 다만 10주(住)가 구족된 보살만을 위하여 말하는 것이다.
이 반야바라밀 안에서는 보살들이 부처님을 위하여 자리를 깐 것을 설명해야만 한다.
그것은 왜냐하면, 모든 하늘도 부처님의 은혜를 알지만 1생(生)ㆍ2생(生)의 모든 큰 보살에게는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보살이신데 어떻게 신통의 힘으로써 부처님께 공양하지 않았겠는가.
이 안에서는 성문과 합하여 설명되었나니, 이 때문에 말하지 않는다.
【經】 “내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할 때 가고 서고 앉고 눕는 곳이 모두 금강(金剛)이 되게 하리라”고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느니라.
【論】
【문】 무엇 때문에 부처님의 4위의(威儀) 안의 땅을 모두 금강이 되게 한다는 것인가?
【답】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보살은 보리수 아래에 이르렀을 때 이곳에 앉아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셨다. 그때에 보살은 모든 법의 실상(實相) 안으로 들어가므로 땅은 이 보살을 올려놓을 수가 없다. 그것은 왜냐하면, 땅은 모두가 중생의 거짓된 업의 인연의 과보로 존재하는 까닭이다. 이 때문에 보살이 성불하고자 하는 때의 실상지혜의 몸을 들어 올릴 수가 없는 것이다. 이때 앉은 곳은 변해 금강이 된다”고 한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흙은 금륜(金輪) 위에 있고 금륜은 금강 위에 있는데 금강의 끝에서 나와 마치 연화대(蓮花臺) 같으며, 그 위에 보살이 앉는 곳을 지녀 움푹 꺼지는 일이 없다. 이 때문에 이 도량(道場)의 앉는 곳을 금강이라 한다”고 하며,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불도를 이루시고 나면 네 가지 위의(威儀)의 처소는 모두 변하여 금강이 된다”고도 한다.
【문】 금강 역시 이것은 중생의 거짓된 업의 인연으로 있거늘 어떻게 부처님을 올려놓을 수 있는가?
【답】 금강도 비록 이것이 거짓으로 이루어졌기는 하나 땅에서는 가장 견고한 것으로 이보다 더 나은 것은 없다. 금강이란 물을 내려 주는 모든 큰 용왕도 이 견고한 물건을 부처님께 바쳐 올렸으니, 역시 이것은 부처님의 전생의 업의 인연 때문에 이러한 편히 계실 곳을 얻으신 것이다.
또 부처님은 금강과 4대(大)를 변화시켜 허공이 되게 하셨다. 허공은 거짓이 아니고 부처님의 지혜도 거짓이 아니어서 두 가지 일이 이미 동일하나니, 이 때문에 올려놓게 할 수 있다.
【經】 다시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출가한 바로 그날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고, 바로 그날에 법륜(法輪)을 굴리며, 법륜을 굴릴 때에 한량없는 아승기의 중생이 티끌을 멀리하고 때를 여의어 모든 법 가운데서 법안(法眼)이 청정하게 되며, 한량없는 아승기의 중생이 온갖 법을 받지 않기 때문에 모든 번뇌 있는 마음이 해탈을 얻으며, 한량없는 아승기의 중생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서 불퇴전(不退轉)을 얻게 하려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느니라.
【論】 혹 어떤 보살은 나쁜 세상의 삿된 소견을 지닌 중생들 가운데서 그 중생들의 삿된 소견을 제거하기 위하여 스스로 애쓰면서 심히 하기 어려운 행을 행한다.
마치 석가모니부처님께서 구루빈라(漚樓頻螺)4)나무 숲 속에서 깨 한 톨과 쌀 한 톨씩을 잡수시니,
모든 외도들이 말하기를,
“우리들의 스승이 비록 고행(苦行)을 하셨다 하더라도 이와 같이 6년 동안을 애쓰지는 못했다”고 한 것과 같다.
또 어떤 사람들은 말하기를,
“부처님은 전생의 악업에 대해 지금 고통의 과보를 받는다”고 한다.
어떤 보살은,
“부처님은 실로 이런 고통을 받게 된다”고 여기기도 하나니,
이 때문에 발심하면서,
“나는 바로 출가한 그날에 성불하겠다”고 하는 것이다.
또 어떤 보살은 좋은 세상에 출가하는데, 대통혜(大通惠)5)와 같은 이는 부처님의 도를 구하면서 가부하고 앉아 10소겁(小劫)을 지나고서야 부처를 이루게 되었다.
보살은 이런 일을 들은 뒤에 발심하면서 말하기를,
“나는 출가한 바로 그 날에 성불하겠다”고 하는 것이다.
어떤 보살은 성불하고 나서도 이내 법륜을 굴리지 않는다.
마치 연등불(然燈佛) 같은 분은 성불하신 뒤에도 12년 동안 오로지 광명만을 놓으시고 사람들로서 아는 이가 없는지라 설법하지 않으셨다.
또 수선다(須扇多)6)부처님 같은 분은 성불하신 뒤에 교화 받는 이가 없었으므로 변화한 부처님[化佛]이 되어 1겁 동안 머무르면서 설법하며 사람들을 제도하고 자신은 멸도(滅度)하셨다.
또 석가모니부처님은 성불하신 뒤에 57일 동안 법을 설하지 않으셨다.
보살은 이런 일들을 듣고서, .“원하건대 나는 성불하고 나서 바로 법륜을 굴리겠다”고 하는 것이다.
어떤 부처님은 중생을 제도하시는 데에 한계와 범주가 있다.
마치 석가모니부처님 같은 분은 법륜을 굴리셨을 때 교진여(憍陳如) 한 사람이 첫 번째 도[初道]를 얻었고 8만의 하늘들이 모든 법 가운데서 법안이 청정함을 얻었다.
보살은 이런 일을 듣고 나서 원을 짓기를,
“나는 법륜을 굴릴 때 한량없는 아승기 사람으로 하여금 티끌을 멀리하고 때를 여의어 모든 법 가운데서 법안이 청정함을 얻게 하겠다”고 하는 것이다.
석가모니부처님이 최초로 법륜을 굴리실 때 한 비구 및 모든 하늘들이 모두 첫 번째의 도는 얻었으나 아라한과 보살의 도를 얻은 이는 한 사람도 없었다.
이 때문에 보살은 원하기를,
“나는 부처님이 될 때 한량없는 아승기의 중생으로 하여금 온갖 법을 받지 않기 때문에 모든 번뇌 있는 마음이 해탈을 얻고 한량없는 아승기의 중생으로 하여금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서 불퇴전을 얻게 하겠노라”고 하는 것이다.
【문】 만일 모든 부처님은 신력과 공덕으로 중생을 제도함은 모두가 동등한데 이 보살은 무엇 때문에 이런 원을 세우는 것인가?
【답】 한 분의 부처님은 능히 한량없는 아승기의 몸으로 변화하여 중생을 제도하시면서도 세계에는 장엄 청정한 데도 있고 장엄 청정하지 않는 데도 있다.
보살은 이 모든 부처님께서 고행하면서 부처님이 되기 어려운 이도 있었고 바로 법륜을 굴리지 못한 이도 있었으며 석가모니부처님처럼 6년 동안 고행을 하시고 도를 이루신 분이 있었음을 보기도 하고 듣기도 한다.
또 최초의 법륜을 들었을 때는 아직 아라한의 도를 얻은 이가 없었거늘 하물며 보살의 도를 얻은 이겠는가.
이 때문에 보살은 아직 모든 부처님의 힘의 평등함을 듣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원을 세운 것이다.
그러나 모든 부처님의 신력과 공덕은 평등하여 다름이 없다.
【經】 “내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때 한량없는 아승기의 성문(聲聞)으로 승가[僧]를 삼겠으며, 내가 한 번 설법할 때에는 자리에 있는 이를 모두 아라한이 되게 하리라”고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느니라.
【論】 어떤 부처님이 성문으로 승가를 삼으시는 데는 수효가 있고 한계도 있다.
마치 석가모니부처님은 1,250의 비구로 승가를 삼으셨다. 미륵부처님[彌勒佛]은 처음 모인[初會] 승가는 99억이고 두 번째 모임에는 96억이며 세 번째 모임에는 93억이다.
이와 같은 모든 부처님들의 승가는 각각 한계가 있고 수효가 있어서 같지 않나니,
이 때문에 보살은 원하기를,
“나는 한량없는 아승기의 성문으로 승가를 삼겠노라”고 하는 것이다.
어떤 부처님은 중생을 위하여 설법하실 때 한 번 설법하면 첫 번째 도를 얻고, 다른 때 다시 설법할 때에 두 번째의 도, 세 번째의 도, 네 번째의 도를 얻게 된다.
마치 석가모니부처님께서 다섯의 비구들에게 설법하시자 첫 번째 도를 얻었고 그 뒤 다른 날에 아라한의 도를 얻은 것과 같다.
그리고 사리불 같은 이는 첫 번째 도를 얻은 지 반 달이 지난 뒤에야 아라한의 도를 얻었고,
마하가섭(摩訶迦葉)은 부처님을 뵙자 첫 번째 도를 얻었고 8일이 지난 뒤에는 아라한이 되었다.
아난(阿難)은 수다원(須陀洹)의 도를 얻고 나서 25년 동안 부처님께 공양하였고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에야 아라한이 되었다.
이와 같이 모든 아라한들이 한꺼번에 네 가지의 도를 얻은 것이 아니니,
이 때문에 보살은 원하기를,
“내가 한 번 설법할 때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아라한이 되게 하겠노라”고 하는 것이다.
【經】 “나는 한량없는 아승기의 보살마하살로써 승가를 삼겠으며, 내가 한번 설법할 때 한량없는 아승기의 보살이 모두 아비발치(阿鞞跋致)를 얻게 하리라.”
【論】 보살이 이러한 원을 세우는 까닭은 모든 부처님은 대부분 성문으로써 승가를 삼으면서 달리 보살승(菩薩乘)이 없기 때문이다.
마치 미륵보살이나 문수사리보살 등은 석가모니부처님께는 달리 보살승가가 없었기 때문에 성문의 승가 안에 들어가서 차례로 앉았던 것과 같다.
어떤 부처님은 1승(乘)을 위하여 설법하셨고 순수하게 보살로 승가를 삼기도 하였으며,
어떤 부처님께서는 성문과 보살을 한데 섞어서 승가를 삼기도 하였다.
마치 아미타불(阿彌陀佛)의 나라에는 보살 승가는 많고 성문 승가는 적은 것과 같나니,
이 때문에 원하기를,
“한량없는 보살로써 승가를 삼겠노라”고 원하는 것이다.
어떤 부처님께서는 처음 법륜을 굴릴 때 아무도 아비발치를 얻는 이가 없었나니,
이 때문에 보살은 원하기를,
“내가 한 번 설법할 때 한량없는 아승기의 사람이 아비발치를 얻게 하겠노라”고 하는 것이다.
【經】 “수명(壽命)이 한량없고 광명을 구족하게 하리라”고 한다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느니라.”
【論】 모든 부처님의 수명에는 긴 분도 있고 짧은 분도 있다.
마치 비바시부처님[鞞婆尸佛]은 수명이 8만 4천 세였고, 구루손타부처님[拘樓餐陀佛]은 수명이 6만 세였다. 가나가모니부처님[迦那伽牟尼佛]은 수명이 3만 세였고, 가섭부처님[迦葉佛]은 수명이 2만 세였으며, 석가모니부처님은 수명이 백 세였다.
조금 지나가면 미륵부처님[彌勒佛]의 수명은 8만 4천 세가 된다.
석가모니부처님의 상광(常光)은 한 길[丈]이요 미륵부처님의 상광은 10리(里)이다.
모든 부처님의 수명과 광명에는 각각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감춰 숨기는[隱藏] 것이고,
둘째는 환히 드러내는[顯現] 것이다.
첫째는 진실(眞實)이고,
둘째는 중생을 위하는 까닭이다.
감춰 숨기고 진실한 것은 한량이 없이 드러나며,
중생을 위한 것은 한계도 있고 수량도 있다.
진실로 부처님의 수명은 짧지 않아야 한다. 그것은 왜냐하면, 모든 부처님은 장수(長壽)할 업의 인연이 구족하기 때문이니,
마치 바가범(婆伽梵)7)은 전생에 한 마을 사람들의 생명을 구제한 까닭에 한량없는 아승기의 수명을 얻은 것과 같다.
범세(梵世) 안의 수명은 반 겁(半劫)을 지나지 않는데도 여기 범천(梵天)의 수명은 유독 한량이 없다.
이 때문에 삿된 소견을 내면서,
“오직 나만이 항상 머무른다”고 말하므로,
부처님은 그에게로 가셔서 그의 삿된 소견을 깨뜨리고 그의 본래 인연을 말씀해 주셨다.
한 마을을 구제해도 그 수명이 그러한데, 하물며 부처님이 세상마다 한량없는 아승기의 중생을 구제함이겠는가.
혹은 재물로써 구제하기도 하고 혹은 몸과 목숨으로 그의 죽음을 대신하기도 했으니 어떻게 그 수명의 한계가 백 세에 불과하겠는가.
또 불살생(不殺生)의 계율은 바로 오래 살게 되는 업의 인연이다.
부처님께서는 큰 자비로써 중생을 사랑함이 골수에 사무쳐 항상 중생들을 대신하여 죽었는데 하물며 산목숨을 죽이겠는가.
또 모든 법의 실상(實相)의 지혜는 진실이요 거짓이 아니기 때문에 역시 이것은 오래 사는 인연이 된다.
보살은 반야바라밀로써 계율을 지니는 모든 공덕과 화합한 까닭에 수명을 얻되 한량이 없는데,
하물며 부처님께서는 세상마다 이 모든 한량없는 공덕을 두루 갖추었으니 그럼에도 수명에 한계가 있겠는가.
또 온갖 모양[色] 가운데에서는 부처님 몸이 첫째가고,
온갖 마음 가운데에서는 부처님의 마음이 첫째간다.
이 때문에 온갖 수명 가운데서도 부처님의 수명이 첫째가야 하는 것이다.
마치 세속 사람이 말하기를,
“사람은 세상에 태어나서 수명으로 귀함을 받는다”고 한 것과 같나니,
부처님께서는 인간 안에서 으뜸 되는 분이라 수명 역시 길어야 한다.
【문】 부처님께서는 비록 오래 사는 업의 인연이 있다 하더라도 나쁜 세상에 나시기 때문에 수명이 짧으시다.
이 짧은 수명으로도 불사(佛事)를 다 마치실 수 있는데 오래 계신들 무엇 하겠는가?
또한 부처님께서는 신통의 힘으로써 하루 사이에도 불사를 마칠 수 있는데 하물며 백 년 동안이겠는가?
【답】 이 세간의 염부제(閻浮提)는 나쁘기 때문에 부처님의 수명은 짧아야 하며 그 밖의 다른 곳은 좋기 때문에 부처님의 수명은 길어야 한다.
【문】 만일 그렇다면 보살은 이 염부제의 정반왕궁(淨飯王宮)에서 태어나셨고 출가하여 성도를 이루셨으니, 이 분은 참 부처님[實佛]이며, 그 밖의 다른 곳에는 모두가 신통의 힘으로 변화한 부처님께서 중생들을 제도하고 계신다.
【답】 그 말은 옳지 못하다. 그것은 왜냐하면, 다른 곳의 염부제에서도 역시 각각 말하기를,
“우리나라 부처님이야말로 참 부처님이요 다른 곳의 부처님은 변화로 된 분이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어찌 아는가?
만일 다른 곳의 국토에서 스스로 변화로 된 부처님인 줄 알면 그 분의 가르침과 계율을 믿고 받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또 다른 국토의 사람의 수명이 1겁(劫)이요 만일 부처님의 수명이 백 세라면 거기서는 겨우 하루도 못 되므로 중생들이 경만(輕慢)한 마음을 일으키고 등을 돌리면서 가르침을 받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곳에서 1겁으로 진실을 삼는다면 부처님께서는 이에 준하여 변화하시게 된다.
마치 『수릉엄경(首楞嚴經)』에서의 말씀과 같아서, 신통으로 두루 비추어 보면 부처님의 수명은 7백 아승기겁이시다.
부처님께서 문수시리에게 말씀하시되,
“그곳의 부처님은 바로 나의 몸이니라.
그곳의 부처님도 역시,
‘석가모니불은 바로 나의 몸이니라’고 하실 것이니라”고 하셨으니,
이 때문에 모든 부처님의 수명은 실로 모두가 한량없되 사람들을 제도하기 위하여 장단(長短)이 있음을 나타낸 줄 알 수 있다.
그대는 말하기를,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신통력 때문에 제도할 중생과 사람의 수명이 다르지 않다면 백 세 동안도 필요 없고 하루 동안에 불사를 다 갖출 수 있다”고 했다.
마치 아난이 어느 때 생각하기를.
“연등(然燈)세존과 일체승불(一切勝佛)과 비바시불(鞞婆尸佛)같은 분은 좋은 세상에 출현하여 수명도 극히 많고 불사를 완전히 갖추셨지만,
우리 석가모니부처님께서는 악세에 나오시고 수명도 극히 짧은지라 장차 세존으로서 불사를 다 갖출 수 없지나 않으실까”고 했다.
그때에 세존은 일출삼매(日出三昧)에 들어 계셨는데, 몸을 좇아 변화하여 한량없는 모든 부처님 및 한량없는 광명을 내시어 두루 시방에 이르셨으니,
그 낱낱 변화한 부처님께서는 그 모든 세계에 계시면서 각각 불사를 지으셨다.
혹은 설법을 하시기도 하고
혹은 신통을 나타내기도 하며
혹은 삼매를 나타내기도 하고 혹은 공양을 잡숫고 계시기도 하셨나니,
이와 같이 갖가지의 인연으로 불사를 베푸시면서 중생을 제도하셨다.
그리고는 삼매에서 일어나 아난에게 말씀하시되,
“너는 이런 일들을 모두 보고 들었느냐?”고 하셨다.
아난이 대답하기를,
“예, 모두 보았습니다”고 하자, 부처님께서는 아난에게 말씀하시되,
“부처님은 이러한 신력으로써 불사를 갖출 수 있겠느냐?”고 하셨다.
아난은 말하기를,
“가령 부처님의 수명이 단 하루만이라 해도 대지(大地)와 초목에 이르기까지 제도해야 할 중생은 모조리 제도할 수 있는데 하물며 백 년이겠나이까”고 했나니,
이 때문에 모든 부처님의 수명은 모두 다 한량없되 사람들을 제도하기 위하여 그 길고 짧음이 있음을 나타낸 줄 알 것이다.
비유하건대 마치 해가 나와서 그림자가 물에 나타날 때 물의 많고 적음에 따른다.
물이 많으면 곧 그림자가 오래있고 물이 작으면 곧 속이 없어지게 되는 것과 같으며,
만일 유리(琉璃)나 파리(頗梨) 구슬로 된 산을 비추면 그림자가 오래오래 머무르는 것과 같다.
또 마치 불이 초목을 태울 때 탈 것이 적으면 빨리 꺼지고 탈 것이 많으면 오래도록 머무르는 것과 같다.
불이 꺼진 곳에 불이 없다 하여 탈 것이 많은 곳에도 불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나니, 광명의 길고 짧은 이치도 역시 그와 같다.
1)
범어로는 tryadhvabuddhadarśanasamādhi.
2)
범어로는 tejaḥkṛtsnāyatana.
3)
여기에서 정골이란 몸에 상대되는 마음[心]을 의미한다.
4)
범어로는 Uruvilva.
5)
범어로는 Mahābhijñajñāna.
6)
범어로는 Suśānta.
7)
범어로는 Bakabrahm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