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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김학중 목사님 http://youtu.be/2BS54eyMGeI
본 문 : 마가복음 10장 31절
1. 수용력(receptivity)이 경쟁력이다.
예수님께서 당시 종교지도자들과 이혼에 관한 논쟁을 마치자,
이번에는 어른들이 어린아이들의 손을 잡아 이끌고 예수님에게 다가왔습니다.
예수님께서 축복과 능력의 손길로 어린아이들을 사랑스럽게 만져주시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분위기를 산만하게 만드는 어린아이들의 존재가 성가셨는지,
아니면 어린아이들까지 상대하면 예수님께서 너무 피곤하실 것을 걱정했는지,
예수님의 제자들은 ‘마치 귀신을 내쫓듯’ 그들을 심하게 야단쳐 내몰았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제자들의 행동에 매우 분노하셨습니다.
그래서 아이들의 접근을 방해하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상당히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마가복음 10:14).
즉 당시 서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다투던 제자들이 아닌,
바로 어린아이들이 하나님의 나라의 진정한 주인공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곧이어 훨씬 더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마가복음 10:15).
즉 제자들이 어린아이들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순진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아예 들어갈 수도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수용력’,
즉 ‘받아들이는 능력’이 문제라는 것을 지적하고 계십니다.
불과 얼마 전에도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를 꼭 끌어안으시며,
제자들에게 어린아이들을 예수님으로 생각하고 맞아들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마가복음9:36-37).
하지만 제자들의 태도는 조금도 바뀌지 않았습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께서 그 동안 아무리 가르치고 책망했어도,
제자들의 삶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쇠 귀에 경 읽기’처럼 제자들의 귓가만 간지럽혔을 뿐,
마치 길가에 심겨진 씨앗처럼 제자들의 마음에 뿌리내리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당시에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시시각각 다가오며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가르치실 시간도 별로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초조하고 답답했겠습니까?
결국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들, 그 상태로는 한자리를 얻기는커녕,
하나님의 나라에 아예 들어가지도 못한다!’는 최후통첩을 보내셨습니다.
최근 일본 경제가 큰 어려움을 겪는 이유들 중에 하나는
지금까지 일본이 개발한 여러 가지 신기술들이 ‘국제규격’으로 인정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일본에서는 1980년대부터 IT 기술이 눈부시게 발달한 결과,
현재 통용되는 스마트폰이나 HD 기술도 오래 전에 개발되었습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윈도우스’에 대항할 컴퓨터 운영체제도 일찌감치 개발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일본의 신기술들은 일본에만 적합했지,
세계의 기술환경과 고객들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그래도 일본은 ‘일본의 기술이 곧 세계의 기술’이라는 자만심 속에 세계의 요구를 거부하였습니다.
그 결과 일본이 개발했던 신기술들은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고스란히 폐기되고 말았습니다.
‘나쓰노 다케시’ 게이오대학교 교수는 일본의 이렇게 답답한 현실을 ‘갈라파고스 신드롬’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갈라파고스’는 남미대륙으로부터 1천 킬로미터나 떨어져 철저히 고립된 생태계를 이룬 섬입니다.
그래서 최근 일본의 지식인들은 이 문제를 뼈저리게 반성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지난 21일, ‘모테기 도시미쓰’ 일본 경제산업장관은
“더 이상 일본의 제도를 갈라파고스로 만들지 않겠다.
갈라파고스의 오명을 씻겠다”는 선언을 하였습니다.
비록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더 이상 일본의 기준을 고집하지 않고,
국제기준을 받아들이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분들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을 고집불통의 독불장군이 되는 것으로 오해합니다.
하지만 일단 그리스도인이 되면, 그 이전보다 더 많은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선 하나님의 말씀을 겸손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자신의 선입견과 고집을 내세우며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막으면 안 됩니다.
아무리 성경을 많이 읽고, 아무리 많은 설교를 들어도,
마음이 굳게 닫힌 사람에게는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다양한 목소리들도 신중하게 경청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이 복음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가공하고’
또한 그 복음이 최대한 널리 전파되도록 ‘유통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훌륭한 그리스도인은 뛰어난 복음의 ‘가공업자요, 유통업자’입니다.
따라서 마치 세상의 기업들이 고객의 소리에 귀 기울이듯,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세상의 요구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복음전파 방식을 ‘고객중심주의’로 설명하였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
율법 없는 자에게는 … 율법 없는 자와 같이 …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고린도전서 9:20-22).
그러므로 2013년에는 우리 모두 결심해봅시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전보다 더욱 겸손히 그리고 진지하게 받아들입시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목소리와 의견을 더욱 넓은 마음으로 받아들입시다.
그래서 ‘고집불통’이란 소리를 듣지 말고,
‘가장 소통을 잘하는 사람’이라는 칭찬을 받아봅시다.
2. 과대망상(delusion of grandeur)은 치명적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책망하신 뒤에,
부자 한 사람이 달려와 예수님의 발 앞에 꿇어 앉았습니다.
다른 복음서는 이 사람이 부유한 청년이며 당시의 유력한 사회지도층이었다고 소개합니다.
그런데 세상의 기준에서는 완벽했던 이 부자가 예수님에게 의외의 질문을 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마가복음 10:17).
즉 자신의 부족한 점이 무엇이냐고 묻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부자의 질문에는 양면성이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에게 다가온 인물들은 대부분 이 세상에서 먹고 사는 문제에 집착했던 반면,
이 부자는 이 세상을 넘어 ‘영생’의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이 부자는 당시 사람들과는 차원이 다른 영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이 부자는 ‘자신의 능력’으로 영생까지도 얻을 수 있다는 대단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무엇을 하여야”라는 질문을 합니다.
다시 말해, 이 질문은 그가 영생을 얻을 만한 능력을 지녔으며,
지금까지 상당한 업적을 쌓았음을 과시하는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질문에 대하여 신앙생활의 기초인 ‘십계명’을 지목하시며,
그 계명들을 지키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랬더니 이 부자는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마가복음 10:20)라고 대답하였습니다.
한마디로 ‘그까짓 계명 지키는 것은 일도 아니죠.
좀 더 어려운 것 없어요?’라는 자신만만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이렇게 보면, 그의 질문은 애초부터 자신의 부족함을 묻는 질문이 아니라,
‘자신의 완벽함을 인정해달라’는 요구였던 것 같습니다.
그의 교만한 태도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책망하신 것처럼 날카롭게 비판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라보셨습니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마가복음 10:21).
최소한 이 부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일 자세는 되어 있었으니,
아무리 말해도 자리다툼만 하는 자신의 제자들보다는 낫다고 생각하셨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부드러운 음성으로 이 부자의 잘못된 생각을 교정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래? 그럼 네가 알고 싶어하는 너의 부족함을 알려 주지.
네 스스로 말하듯 너는 사실상 완벽하니까, 딱 한 가지만 고치면 될 것 같아.
네 재물을 몽땅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를 따르는 제자가 되면 돼!’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은 부자는 엄청난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그리고 이전의 자신감은 모두 잃은 채, 풀이 죽어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예수님은 개인의 재산을 부정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또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각자의 재산을 몽땅 팔아 기부해야 한다고 주장하신 것도 아닙니다.
다만 이 사건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부자가 ‘자신에 대한 과대망상’,
즉 ‘자기 스스로를 대단한 인물로 착각하고 있음’을 지적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부자의 자만심이 그의 재산에서 나왔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그가 아무리 스스로 대단한 것처럼 뻐겨도,
그의 삶에서 재산을 빼고 나면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적하셨습니다.
그의 고상해 보이는 영성조차, 사실상 재산을 잃으면 사라지는 안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자신감과 자만심을 혼돈합니다.
자신감은 자신의 능력과 현실을 분명하게 아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자만심은 자신의 능력과 현실을 모르고 무턱대고 덤비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감을 가진 사람은 실패해도 또 다시 일어서지만,
자만심에 들떠 있던 사람은 실패하면 재기는커녕 폐인이 되고 맙니다.
그만큼 스스로를 대단한 인물로 착각하는 과대망상은 치명적입니다.
또한 스스로를 대단한 인물로 착각하는 과대망상이 오랜 기간 지속되면,
그 착각 자체가 확고한 신념으로 변해서 회복과 개혁의 기회마저 놓치게 됩니다.
지난 2011년 10월, 약 6-7년 동안 검사행세를 하다가,
마침내 주변 사람들로부터 1억6천만 원의 금품을 뜯은 30대 청년이 집행유예로 풀려났습니다.
판사가 이 청년에게 관대한 형을 선고한 이유는, 비록 죄질은 나쁘지만,
이 청년이 너무 오랫동안 검사행세를 하다 보니,
자신을 정말 검사라고 착각할 정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청년은 고등학교를 중퇴한 이후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시험준비과정에서 알게 된 알량한 법적 지식을 주변 사람들에게 과시할 기회를 종종 얻게 되었습니다.
그 후 주변 사람들이 그를 진짜 법조인으로 생각하는 눈치가 보이자,
그는 스스로 ‘인천지검 부천지청 부장검사’ 행세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검사 신분증과 검찰청 행정 봉투를 위조해 사용하고,
심지어 장인의 장례식에 부천지청장 명의의 화환을 보내기까지 하였습니다.
법원은 그가 정말 자신을 검사로 착각했다고 판단하였습니다.
남을 속이다가 결국 자신마저 속이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이런 착각 속에서 살아갑니다.
자신들의 신앙 연륜, 직분, 업적 등을 근거로
자신들의 신앙이 대단하다고 스스로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모래 위에 지은 집’ 같이 부실한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사탄은 이러한 그리스도인들의 ‘과대망상’을 매우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탄은 지금도 우리의 신앙이 모두 가짜라는 것을 증명하겠다며,
우리를 불 같은 시험 속에 몰아넣곤 합니다.
구약성경의 욥기를 보면, 사탄은 하나님의 두터운 신임을 받던 욥의 신앙도 재산을 잃는 순간 모두 사라질 것이라며 큰소리쳤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조차 부귀영화 앞에서는 사탄에게 무릎을 꿇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예수님을 유혹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에 대한 과대망상’의 늪에서 빠져 나와야 합니다.
자신을 대단한 존재로 착각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패망의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경고합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고린도전서 10:12).
훌륭한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자신을 자랑하거나 대단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부족함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인정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무능함을 알기에 전능하신 하나님을 붙드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은 스스로 낮추고 하나님만을 높이는 것,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탁월한 경쟁력입니다.
3. 아직 경쟁은 끝나지 않았다.
부자가 낙담하여 돌아가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또 다시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마가복음 10:23, 25).
이 충격적인 말씀에 다른 제자들은 모두 놀라 할 말을 잃었지만,
눈치 9단이었던 베드로는 오히려 지금이 점수를 딸 기회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냉큼 이렇게 말했습니다.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마가복음 10:28).
즉 방금 떠난 부자와는 달리, 자신들은 모든 재물과 가족도 버렸으니,
영생과 하나님의 나라를 차지할 충분한 자격을 갖춘 것이 아니냐는 말이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마가복음 10:31).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동시에 담겨 있습니다.
첫째, 제자들이 생각하는 ‘권력서열’은 얼마든지 뒤집어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제자들이 누구를 ‘최고’로 생각하든,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최종순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뜻입니다.
오히려 제자들이 생각하는 ‘최고’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꼴찌’가 될 수도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나라의 순위경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마치 육상선수가 결승선을 통과하는 그 순간까지 순위를 장담할 수 없듯,
하나님의 나라의 순위에 대해서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다시 한 번, 그들의 고집을 버리고 겸손해질 것을 요구하셨습니다.
어린아이들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진하게 받아들이는 수용력,
어린아이들처럼 귀찮고 성가신 사람들까지도 기꺼이 품을 수 있는 포용력,
그리고 자신의 능력을 과대포장 하지 않고,
자신의 부족함을 진실하게 고백하며 하나님만 높이는 겸손함,
세상적 야망을 내려놓고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바라보는 영적 성숙이 있어야만
하나님의 나라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음을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아무런 유익이 없는 세상의 순위경쟁에 매달리지 말고,
여러분 모두가 진정한 상급과 기쁨이 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경쟁에 뛰어드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