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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월 21일
베이징 자금성
쾌청한 베이징 하늘
6시쯤 되니 부지런한 사람들이 세수를 하느라 복도를 부지런히 오갔다. 앞자리의 중국인 남자는 正安驛에서 나와 눈인사를 나누고는 내렸다. 붉은 해가 동쪽 차창 너머로 떠올랐다. 서쪽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니 하늘에는 아직도 상현달이 보인다. 해와 달 이고 기차는 낯선 시공 속으로 거침없이 달려간다. 베이징의 날씨는 쾌청하다. 중국에 온 지 맑은 날은 어제와 오늘 이틀뿐이다. 베이징 날씨가 오늘처럼 맑기는 정말 오랜만이라고 한다. 기찻길 옆 언덕 위에 높은 목탑이 보인다. 이윽고 베이징 서역에 내렸다.
연변에서 북경으로 유학 와서 가이드가 된 상냥한 동포 여인을 따라서 역 뒷문으로 나가서 우동 체인점으로 들어갔다. 중국에 와서 처음으로 식미에 맞는 우동을 먹는다. 국물이 담백하여 먹을 만하였다. 식당이름이 美國加州牛肉面大王(미국 캘리포니아 소고기 대왕우동)이다.
천안문 광장
버스를 타고 길거리를 달려 천안문 광장으로 간다. 우리나라의 서울처럼 베이징 시민들의 출근길이 바쁘다. 천안문 광장 가까이에 내려서 길거리를 걸었다. 길 건너편에는 정양문이 보이고 한 무리의 군인들이 열을 지어 발걸음 맞추어 어디론가 이동한다. 그 씩씩한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울릉도 사는 김샘이 군인들과 보조를 같이하며 걷는 모습이 익살스럽다.
나도 군인들처럼 발걸음과 팔을 흔들며 걸으니 걷는 것이 한결 수월하고 몸 어디서 힘이 샘솟았다. 길거리 어느 가게에는 사람들이 몰려서 저마다 뭔가를 받으려고 아우성이다. 복권을 파는 집 같기도 하였다.
중국국가박물관 앞에서 지하도로 내려가 길 건너편에서 지상으로 올랐다. 마침내 천안문 광장에 들어섰다. 텔레비전에서 자주 보아서 익숙한 건물이 보인다. 눈앞에 네모난 돌기둥의 ‘인민영웅기념비’가 서있고 인민대회당이 보인다. 기념비 남쪽에는 모택동기념관이 있다. 북쪽으로는 나에게도 익숙한 천안문이 보인다.
천안문의 처마에는 이삭과 톱니바퀴가 둘러싼 테두리에 노란색 별 5개 아래에 천안문이 그려져 있는 국가휘장이 걸려 있다. 이 국가휘장은 1950년 6월 23일 모택동이 주재하는 회의에서 통과된 것으로 청화대학 학생과 교수들이 도안한 것이라고 한다.
문루 아래의 성벽에는 5개의 문이 있다. 가운데 큰 문 위에 모택동의 대형 사진이 걸려 있다. 모택동 사진 우측에 ‘中華人民共和國萬歲’ 좌측에 ‘世界人民大團結萬歲’라는 문구가 붙어 있다. 저 천안문 문루에서 1949년 10월 1일 모택동이 중화인민공화국의 탄생을 선포하였다.
인민영웅기념비
인민영웅기념비에는 아편전쟁 이래의 중국 근현대사의 주요 장면들이 부조 조각으로 붙어 있고, 비문은 모택동이 짓고 주은래가 썼다고 한다. 저 기념비를 중심으로 중국현대사에 큰 사건이 2번 있었다. 1989년의 천안문 사건으로 수많은 학생과 시민이 군대의 탱크와 장갑차와 총탄에 학살되었다. 한국현대사에서 있었던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이나 1986년 유월민주항쟁, 1988년 8월 8일의 미얀마민주화항쟁과도 닮았다.
<1949년 제1차 중국인민정치협상회 전체회의에서 19~20세기 중국 혁명과정에서 희생된 인민들을 위한 기념비를 제작하기로 결정하여 량쓰청(梁思成)의 설계로 톈안먼광장 중앙부 톈안먼과 마주하는 위치에 비를 세웠다. 1958년에 완성되었다.
기념비는 높이 약 38m, 면적 3000㎡, 무게 약 10,000톤에 달하는 거대한 석조 비석으로, 칭다오· 산둥지방· 펭산 등지로부터 공수한 약 17,000개 화강암과 대리석으로 만들었다.
비석의 대리석 받침대 네 면에는 근대 약 100년간의 혁명 역사를 조각한 8개의 거대한 부조(浮雕)가 있다. 각각의 내용은 1840년 아편전쟁 중 아편의 소각 장면, 1851년 태평천국 운동 당시 진텐마을(Jintian:金田村)의 봉기, 1911년 우창봉기, 1919년 5.4운동, 1925년 5.30운동, 1927년 난창봉기, 1931~1945년 항일유격전쟁, 1949년 홍군의 양쯔강 도하 성공 등으로 혁명과정의 기념비적인 사실들이 조각되어 있다.
기념비의 정면에는 '인민 영웅들은 영원토록 썩지 말라(人民英雄永垂不朽)'라는 마오쩌둥의 친필 명각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기념비의 후면에는 마오쩌둥이 초안을 잡고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쓴 비문이 있다.
기념비가 세워진 자리는 1976년 저우언라이 사망 시 그를 추모하는 민중과 이를 저지하려는 당국과의 사이에 발생한 충돌사건인 톈안먼사건이 일어난 현장이기도 하다. 또한 1989년 6월 4일 민주화를 요구하며 연좌시위를 벌였던 톈안먼사태 당시 생긴 총탄 자국이 기념비에 남아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인민영웅기념비 [Monument to the People's Heroes, 人民英雄纪念碑] (두산백과)
<(1)중국 마오쩌둥[毛澤東] 체제 말기인 1976년 4월에 있었던 대중반란.(2) 1989년 6월 4일 미명에 민주화를 요구하며 베이징의 톈안먼 광장에서 연좌시위를 벌이던 학생 ·노동자 ·시민들을 계엄군을 동원하여 탱크와 장갑차로 해산시키면서 발포, 많은 사상자를 낸 사건.
⑴ 중국 문화대혁명 이래의 마오쩌둥 사상 절대화의 풍조와 마오쩌둥 가부장 체제에 대한 중국 민중의 저항을 나타낸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1976년 1월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가 사망하자, 중국에서는 ‘주자파(走資派:자본주의의 길로 나아간 實權派)’비판운동이 일제히 일어났다.
따라서, 오랜 기간 중국의 혁명과 건설 및 국제적 무대에서의 중국의 위신증대에 기여한 저우언라이 총리를 추도하려던 중국 민중의 의지는 꺾이고, 다시 극좌적 조류가 지배하기 시작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고인을 추모하기 위해, 1976년 4월 4일 청명절(淸明節)에, 베이징[北京]의 민중은 손에 손에 화환과 플래카드를 들고 톈안먼 광장에 있는 인민 영웅기념비를 향해 시위행진하였다.
저우언라이의 자필 비문이 새겨져 있는 기념비는 민중의 화환에 의해 제단으로 변하였다. 그러나 베이징시 당국과 관헌은 이 기념비에 바친 화환을 모두 철거하였고, 다음날인 5일 격노한 대중은 반란을 일으켜 건물과 자동차 등에 방화를 하는 등 일대 소요가 야기되었다.
플래카드에는, 후에 ‘4인방’이라 하여 체포된 마오쩌둥의 부인 장칭[江靑]과 측근인 야오원위안[姚文元] 등을 비판하는 시가 많이 게재되어 분명하게 마오쩌둥 체제에 대한 반역의 의사를 나타내고 있었다. 이 사건은 공안당국과 군에 의해 반혁명사건으로 철저히 탄압되였으며, 덩샤오핑[鄧小平:당시 중국공산당 부주석 ·부총리]에게 책임을 물어, 4월 7일 그의 모든 직무를 박탈함으로써 실각시켰다.
반면, 이 사건으로 해서 화궈펑[華國鋒]은 정식으로 총리의 자리에 올랐다. 중국은 그해 9월 마오쩌둥이 사망하고, 10월에는 ‘베이징정변’으로 4인방이 체포되는 등의 격동의 시기를 체험하였으나, 이러한 와중에서 비마오쩌둥화(化)가 진행되어, 1978년 11월에는 톈안먼 사건이 혁명적 행동이었다는 대역전의 평가를 받게 되었다. 이후 이 사건은 1919년의 역사적인 5 ·4운동을 본떠서 ‘4 ·5운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⑵ 당시 베이징에서는, 그해 4월 15일 후야오방[胡耀邦]이 사망한 후, 팡리즈[方勵之] 등 지식인을 중심으로 후야오방의 명예회복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빈번히 일어나고 있었다.
특히, 학생들은 노동자 ·지식인을 포함한 광범위한 시민층을 대표하여 5월 13일 이래, 베이징대학과 베이징사범대학을 중심으로 전국에서 모인 학생대표들과 함께 톈안먼 광장에서 단식연좌시위를 계속했다. 5월 15일 소련의 고르바초프가 베이징에 도착했으나, 17일 발생한 100만 명이 넘는 대규모시위로 일정을 변경해야만 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에 당국은 학생들의 시위를 난동으로 규정, 베이징시에 계엄을 선포했다. 한편, 학생들의 요구에 유연한 대응을 보이던 공산당 총서기 자오쯔양[趙紫陽]의 행방이 묘연해지고 그의 해임설이 떠도는 가운데, 덩샤오핑의 후계자로 알려진 양상쿤[楊尙昆] 국가주석과 리펑[李鵬] 국무원 부총리 등 강경파가 주도권을 잡았다.
이들은 6월 3일 밤 인민해방군 27군을 동원, 무차별 발포로 톈안먼 광장의 시위군중을 살상 끝에 해산시켰으며, 시내 곳곳에서도 수천 명의 시민 ·학생 ·군인들이 시위 진압과정에서 죽거나 부상했다.
이 사건은 당시 중 ·소 수뇌회담 취재차 입국했던 외국 기자들에 의해 즉각 전세계로 보도되었으며, 미국을 비롯한 유럽 여러 나라는 이와 같은 비인도적 처사에 항의, 강력한 비난성명을 냈다. 이 사건 이후 민주화운동의 상징적 인물이 된 천체물리학자 팡리즈는 미국 대사관으로 피신하였다.
이른바 ‘피의 일요일’로 불리는 이 사건 이후 중국 지도부는 반혁명분자에 대한 숙청, 개인숭배 조장, 인민들에 대한 각종 학습 등 체제굳히기와 함께 개방정책 고수를 천명하고,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확립을 내세우는 등 이율배반적 태도를 보여왔으며, 특히 동유럽의 민주화 물결을 극복하는 데 안간힘을 쏟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톈안먼사건 [天安門事件(천안문사건)] (두산백과)
천안문 광장에서 플랭카드를 펴고 단체 기념사진을 촬영하려고 하니 공안 감시원이 플랭카드를 펴지 못하게 한다. 입구부터 소지품 검색을 하더니, 최근에 위그르족의 독립자치를 요구하는 차량돌진 테러사건이 일어났다고 한다.
1950년 10월 8만의 중국군이 티베트를 침공하였다. 한국전쟁으로 유엔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관심은 티베트의 지원 호소에 관심이 없었다. 티베트가 중국 공산당의 지배 속으로 들어간 뒤, 1954년 초여름에 티베트의 라싸에서 출발한 달라이 라마와 500명의 사람들은 청뚜를 거쳐 시안에서 기차로 베이징까지 3200킬로미터를 왔다.
1955년 6월에 라싸로 돌아갈 때까지 베이징과 중국 각 지역을 여행하였다. 달라이 라마 성하는 주덕이나 주은래의 환영을 받고 베이징에서 인도 수상 네루를 만나기까지 하였다.
달라이 라마 성하는 모택동으로부터 종교는 독약과도 같아서 승려들이 독신이라서 인구를 감소시키고, 물질적인 발전을 도외시한다는 모욕적인 말을 듣기도 하였다. 제1차 공산당 전당대회에서 전국인민대표자대회 상임위원회 부위원장이라는 허울을 받기도 하였다.
티베트는 중국 침략 이후에 무려 150만 명의 사람들이 잔인한 고문으로 죽고 1966년부터 시작된 이른바 문화대혁명 시기에 무려 6,000여 개의 사원이 파괴되고 문화유산들은 산산이 흩어졌다.
천안문
광장에서 다시 지하도로 내려가서 검색대를 통과하여 자금성 앞의 천안문으로 올라갔다. 북경성은 외성과 내성과 황성과 자금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외성의 정남문은 영정문이고, 정양문은 내성의 정남문이고, 천안문은 내성 안 황성의 정남문이다.
황성 안에 궁궐인 자금성이 있고 자금성의 정문은 오문이다. 자금성의 이름은 하늘의 3환 28수 중 중환인 紫薇垣에서 취한 것이다. 지금은 흔적도 없지만 천안문과 정양문 사이에는 6부와 홍려시, 흠천감, 鸞儀衛, 태의원, 도찰원, 대리시, 태상시, 한림원 등의 관청과 조선의 사신이 묵는 玉河館이 있었다.
돌다리를 건너서 천안문을 지나자 천안문 동서에 서 있던 것과 같은 모양의 날개가 달린 백색 화강암의 擎天柱가 보인다. 열하일기에도 나오는데, 연암은 궁궐이나 무덤 앞에 장식물로 세우는 石闕인 것 같다고 하였다.
단문과 오문
정면에 거대한 端門이 있다. 단문을 지나자 午門이 정면에 보인다. 오문 앞의 서쪽에 사직단이, 동쪽에 태묘(太廟)가 있었다. 오문 마당에는 두 줄로 버드나무가 심어져 있고 마당이 아주 넓으며 관광객들이 많다. 오문 앞에서 한참을 기다렸다. 이 오문부터가 궁궐이다.
태화문
오문을 지나자 중층헐산식(重檐歇山式: 겹처마 팔작지붕) 지붕의 거대한 이층문인 太和門이다. 마당의 5개 석교인 金水橋를 건너서 백색 2중의 석단 위에 있는 태화문의 이중 처마 위의 기와는 온통 누런색이고 처마의 단청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태화문 앞의 마당에는 청동 사자 암수가 동서에 지키고 서 있다.
중국 건축의 지붕 양식
第一位:重檐庑殿顶(겹처마우진각지붕)。重要的佛殿、皇宫的主殿,象征尊贵。
第二位:重檐歇山顶(겹처마팔작지붕)。常见于宫殿、园林、坛庙式建筑。
第三位:单檐庑殿顶(홑처마우지각지붕)。重要的建筑。
第四位:单檐歇山顶(홑처마팔작지붕)。重要的建筑。
第五位:悬山顶(맞배지붕, 일본, 한국, 베트남에도 전파됨. 용마루와 4개의 추녀마루가 있고, 지붕끝이 양쪽 산장 밖으로 튀어나와 있다. 방풍, 방우에 유리하여 남방가옥에 많이 채택하였다.)。民居、神橱、神库。
第六位:硬山顶(맞배지붕과 비슷하나 지붕끝이 산장면과 수평이다. 방화에 유리하여 북방 가옥에 많고 벽돌건축을 지은 명청대에 많이 채택하였다.)民居。
第七位:卷棚顶(용마루가 없고 지붕을 말아놓은 것처럼 앞 뒤 지붕이 곡선으로 연결되었다.)。民间建筑。
无等级:
攒尖顶(용마루가 없고 추녀마루들이 지붕 꼭대기의 한 점에 모아져 있다. 4, 6, 8각, 원형이 있다. 자금성 중화전은 4각이고 천단 기년전은 원형 지붕)。
亭台楼阁。
태화전
태화문을 지나자 정면에 압도적인 규모의 이층 지붕(重檐廡殿頂, 겹처마우진각지붕)의 태화전이 삼단의 백색 석단 위에 위용을 드러낸다. 하늘로 치솟은 것이 아니라 좌우로 긴 건물이 태산처럼 안정감을 주면서 대지 위에 앉아 있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선명한 모습으로 나의 시야에 가득 찬다.
마지막 황제
그 앞에는 아주 너른 마당이 있는데 직사각형의 돌과 벽돌로 포장하였다. 태화문 앞의 뜰이 바로 조정(朝廷)이다. 저 거대한 태화전 보좌에 6살 어린 황제 푸의溥儀가 앉아 있고 문무백관들이 도열한 조회가 있었다.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가 감독하고 존 론이 푸이역을 맡은 영화, <마지막 황제(The Last Emperor, 末代皇帝溥儀>를 극장의 대형 스크린으로 보지 못하여 아쉽다.
<푸이의 자서전에 바탕을 둔 이 영화는 중국 베이징의 자금성에서 로케되어 영화사상 처음으로 서유럽인이 서유럽적인 감각과 시야에서 중국인의 드라마를 그렸다. 자금성 경내의 웅장한 모습을 보여 주면서 황제에서 시민으로 변해가는 과정이 담담하게 전개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푸이는 다른 전범들과 함께 체포되어 화장실에 들어가 동맥을 끊어 자살을 기도한다.
1908년, 3살의 푸이는 최고의 권력자인 서태후의 지명으로 광서제의 후계자가 되기 위해 자금성으로 들어간다. 6세까지는 청나라의 황제로서 내시들과 궁녀들 사이에서 성장한다.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황제의 존호와 궁전 및 사유재산만 인정받은 채 퇴위하게 된다. 청나라가 몰락하고 중화민국이 탄생한다.
어느 날 궁밖에 나간 푸이는 변화한 시대의 흐름을 보고 놀란다. 14세 되던 해, 영국인 가정교사 레지널드 존스턴이 자금성으로 들어온다. 오랜 관습에 반발하면서도 그는 17세의 완용공주를 황후로, 12세의 문연공주를 후실로 맞아들인다.
1924년에 일어난 펑위샹(馮鈺祥 풍옥상)의 군사혁명으로 푸이는 추방과 함께 반역죄로 감시받는 신세가 된다. 일본대사관을 방문한 레지널드 존스턴은 감백 대위를 만나 도움을 청하고, 푸이는 두 아내와 함께 톈진으로 도피한다. 얼마 뒤 신사조에 눈뜬 문연공주는 푸이의 곁을 떠난다. 한편, 레지널드 존스턴도 영국으로 돌아가고, 대신 푸이의 보좌로 일본군이 온다.
푸이는 마침내 일본군의 획책에 넘어가 신생 만주국의 황제가 된다. 완용은 일본에 농락당하기만 하는 푸이에게 실망한다. 그녀는 아편에 의지하고, 운전사와의 밀애로 아이를 가진다. 1945년 만주국이 멸망하고 푸이는 소련의 전범 수용소로 송치된다. 1950년 소련에서 중국으로 후송되지만 공산정권에 의해 10년간 재교육을 받는다. 그리고 식물원 정원사가 되어 자유의 몸이 된다.
제60회 아카데미에서 작품상을 포함해 9개 부문을 휩쓴 이 영화에는 여러 나라 배우가 출연한다. 엑스트라가 1만 9000명, 스태프도 이탈리아인 100명, 영국인 20명, 중국인 150명이 동원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마지막 황제 [The Last Emperor] (두산백과)
<푸이[溥儀]는 중국 청의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의 이름이다. 본래 이름은 '아이신줴뤄 푸이[愛新覺羅 溥儀]'이며, 광서제(光緖帝)의 이복동생인 순친왕(醇親王) 재풍(載豊)의 아들이다.
1908년 10월 서태후(西太后)는 동치제(同治帝)와 광서제의 뒤를 잇기 위해 푸이에게 제위를 잇게 하겠다는 교서를 발표했고, 그해 11월 14일 광서제가 죽자 푸이는 3살의 나이로 청의 12대 황제가 되었다.
연호는 '선통(宣統)'이라 했으며, 아버지인 순친왕과 광서제의 황후인 융유황태후(隆裕皇太后)가 섭정했다. 순친왕은 황족이 절대 다수로 구성된 내각을 구성하여 황족 중심의 집권화를 도모했다.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났고, 혁명의 진압 과정에서 위안스카이[袁世凱]가 청 조정의 정치와 군사의 실권을 장악했다. 위안스카이는 난징[南京]에 쑨원[孫文]을 임시대총통으로 하여 수립된 중화민국(中華民國) 임시정부와 협상을 진행했다. 그리고 청을 물러나게 하고 공화정을 선포하는 대신 총통 자리를 물려준다는 쑨원의 약속을 받고, 북부의 군벌들을 동원해 공화정을 선포하도록 청 왕조를 압박했다.
결국 1912년 2월 12일 융유황태후가 푸이를 대신해 퇴위 조서를 반포했고, 3월 10일 위안스카이가 베이징[北京]에서 중화민국 제2대 임시대총통으로 취임했다. 이로써 청 왕조는 멸망했고, 푸이는 중국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다.
푸이는 퇴위 후에도 쯔진청[紫禁城]에서 생활했다. 1916년 위안스카이가 죽은 후 그의 직할 부대였던 베이양[北洋] 군벌은 안후이[安徽]파와 즈리[直隷]파, 펑톈[奉天]파 등으로 나뉘어 파벌 갈등을 일으켰다.
이러한 혼란을 이용해 1917년 6월 안후이 독군(督軍) 장쉰[張勛]은 캉유웨이[康有爲] 등의 보황당(保皇黨) 일파와 함께 청의 부활을 추진하는 복고적 정변을 일으켰다. 장쉰은 군대를 이끌고 베이징에 입성하여 위안스카이의 총통 자리를 계승한 리위안훙[黎元洪]을 퇴진시키고 푸이의 복벽(復辟)을 선언했다. 그러나 돤치루이[段棋瑞]가 공화정을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장쉰을 제거하면서 푸이는 다시 퇴위를 선포했다.
1924년 즈리파와 펑톈파 군벌 사이에 일어난 제2차 펑톈즈리전쟁 당시 푸이는 베이징을 점령한 펑위샹[馮玉祥]에 의해 쯔진청에서 쫓겨났다. 순친왕 재풍의 거처로 옮겼다가 다시 일본 공사관으로 도피했다. 그리고 일본인에 의해 톈진[天津]으로 호송되어 일본 조계(租界)에 머물렀다.
1931년 9월 일본 관동군(關東軍)은 만주전쟁을 일으켜 중국 북동부를 점령했으며, 1932년 3월 1일 만주국을 세워 푸이에게 집정(執政)을 요구했다. 수도는 신징(新京, 지금의 吉林省 長春), 연호는 '대동(大同)'이라 했다. 1934년 3월에는 제정(帝政)을 선포하고 연호를 '강덕(康德)'으로 고쳤다. 푸이는 만주국의 황제가 되었고, 중국인 총리와 각부대신과 함께했지만, 만주국의 모든 실권은 일본의 관동군 사령관이 장악하고 있었다.
1945년 8월 소련의 참전으로 일본 관동군이 괴멸하자 곳곳에서 민중반란이 일어나 만주국은 붕괴되었다. 푸이는 8월 17일 선양(瀋陽)에서 소련군에 체포되어 전범으로 하바롭스크(Khabarovsk)에 억류되었다. 1946년 극동국제군사재판 때 증인으로 출두했으며, 1950년 8월 초 중국으로 압송되어 푸순[撫順] 전범관리소에 수감되었다.
1959년 12월 4일 마오쩌둥[毛澤東]의 특별사면령으로 풀려난 후 베이징 식물원에서 정원사로 일했다. 전범관리소에서 교화 생활을 한 후 1957년 자신의 죄상을 고백하는 형식으로 ‘내 죄악의 전반생’이라는 반성문을 집필했다.
1964년 이를 바탕으로 《나의 전반생(我的前半生)》이라는 자서전을 정식 출간했다. 이 책의 내용을 기반으로 삼아 1987년 이탈리아의 영화 감독인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Bernardo Bertolucci)가 《마지막 황제(L'ultimo imperatore)》라는 영화를 만들어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
푸이는 1964년 전국정치협상회의 문사자료연구위원회(文史資料硏究委員會)로 전출되어 자료 전문위원을 역임하면서 인민정치협상회의(人民政治協商會議) 전국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그러나 1967년 10월 16일 신장암으로 사망했다. 시신은 베이징 시내의 팔보산(八寶山) 공동묘지의 인민납골당에 안치되었다가 1980년 5월 팔보산 혁명공묘(革命公墓)로 옮겨졌고, 1995년 1월 26일에 베이징 남서쪽 허베이성[河北省] 이[易]현에 있는 청나라 황릉으로 이장되었다.
청의 옛 황실에서 그에게 '공종 민황제(恭宗 愍皇帝)'라는 시호를 추증했으나 중국 정부는 이것을 인정하지 않고 '손제(遜帝)'라는 명칭을 쓰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푸이 [溥儀] (두산백과)
체인각과 홍의각
광장 가운데에 서니 동쪽에는 體仁閣, 서쪽에는 弘義閣이 보인다. 체인각은 옥산서원의 회재 선생 사당인 체인묘를 생각나게 한다.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에서 연암은 체인각 동쪽에 동궁이 있지만 태자를 세우는 제도가 폐지되면서 잠겨 있어서 들어가볼 수 없었다고 하였다.
연암은 조선의 사신이 가져간 자주색 명주와 누런 모시 예물을 물목대장과 함께 체인각에 바쳤다고 하였다. 당시 체인각의 관리들이 한림의 최고 학사를 지낸 李侍堯의 가산을 접수하고 있었다. 이시요는 운남·귀주 총독으로 있으며 海明(海寧의 오지)으로부터 금 이백 냥을 뇌물 받은 일이 적발되어 가산을 몰수당한 것이다. 내무부의 관원이 접수하는 물품은 모두 부인들이 입는 담비 가죽옷 이백여 벌이었다고 연암은 기록하고 있다.
명나라 때는 皇極殿이라고 하였던 태화전은 길이가 64미터, 폭이 37미터, 높이가 26.92미터인데 월대를 포함하면 35.05미터이다. 황금색 유리기와를 이은 이중 처마의 지붕 아래에 12개의 붉은 색 기둥이 도열해 있다. 태화전의 月臺는 삼단으로 이루어진 백옥 석단이고 난간이 있고, 난간 기둥마다 용을 새겨 놓았다.
월대(須彌臺)의 난간 아래 벽에는 이무기 두상이 열 지어 박혀 있다. 비가 오면 배수구가 된 이들 이무기들의 입에서 빗물이 쏟아져 ‘千龍吐水’의 장관을 연출한다고 한다.
월대의 곳곳에 향로 모양의 18개의 커다란 청동 솥이 놓여 있다. <<열하일기>>에서 연암은 첫 번째 난간 안에 8개의 솥을 나열하였고, 2번 째 난간의 모서리에 2개의 솥을 마주 보게 했으며, 3번 째 난간 안에는 난간을 끼고 각각 솥 하나씩을 우뚝 세웠다고 하였다. 솥의 높이는 모두 한 길이 넘고, 뜰 가운데에도 30여 개의 솥을 늘어놓았는데, 귀신이 교묘하게 빚은 것 같고, 우 임금이 만든 구정을 보는 듯 하다고 하였다.
월대의 정면에는 3곳에 섬돌이 있는데, 가운데의 어도에는 이십여 미터 길이의 돌에 구름과 용들이 생동감 나게 새겨져 있다.
해시계
태화전 앞의 석단 동쪽에는 해시계인 일구가, 서쪽에는 가량이 있다. 일구의 둥근 백색의 대리석 원반 가운데에 철침이 박혀 있어서 그림자가 현재 시간을 알려주고, 서쪽에는 곡식의 부피를 재는 돌로 된 가량(嘉量)을 올려놓았다. 동쪽과 서쪽 끝에는 청동으로 주조한 학과 거북 앞 뒤로 세워져 있다. 연암도 이 학을 보았다.
일구(日晷)는 네 개의 석주 위에 받침이 있고 다시 사각의 돌을 올려놓았다. 고려의 궁궐터인 만월대 서쪽에 남아있는 첨성대와 흡사하다. 사각형 돌 위에 동근 백색의 대리석 원반의 면은 적도의 면과 평행하도록 기울게 올려놓았다.
그 위쪽의 반원에 지는 시침의 그림자는 춘분에서 추분까지의 시각을 나타내는데 적도 이북의 북반구 시각을, 그 아래쪽의 반원에 지는 시침의 그림자는 추분에서 다음해 춘분까지의 적도 이남의 남반구 시각을 표시한다. 그림자 돌 가운데의 철침은 위쪽은 북극을, 아래쪽은 남극을 가리킨다.
시침의 그림자는 원반 아래쪽의 사시(巳時, 오전9시 30분에서 10시 30분 사이)를 지나서 병시(丙時, 오전 10시 30분에서 11시 30분 사이)에 들어가고 있다. 현재시각은 오전 10시 25분경이다.
해시계를 태화전 앞에 설치한 것은 황제가 제국의 인민들에게 시간을 주는 최고의 권력자임을 상징한다. 연암은 중국인들에게 김석문과 홍대용이 지구자전을 알아내었다고 하였지만, 해시계는 지구자전을 이용한다.
가량
중국 고대 표준 양기(量器), 가량(嘉量)은 곡(斛, 휘, 10말), 斗(말), 升(되), 合(한 홉), 약(龠, 반 홉), 5개가 있는데, 가량 중간의 큰 그릇 윗부분은 깊이가 1척인데 곡이고, 그 아래 부분은 깊이가 1촌인데 두이고, 좌측의 손잡이처럼 생긴 작은 그릇은 깊이가 2.5촌인데 승이고, 우측의 손잡이처럼 생긴 작은 그릇은 윗부분이 깊이가 1촌인데 합이며, 그 아래쪽은 깊이가 5푼인데 약이다.
태화전 월대(丹階) 서편 앞 마당에 설치되어 있는 가량은 單檐歇山式(홑처마 팔작지붕) 漢白玉石 정자 안에 들어 있고, 정자 아래 부분은 한백옥석 받침이다. 받침의 상부는 雲氣, 卍字, 바닷물, 강변 언덕(江崖) 문양을 양각하였고, 하부는 須彌基座이다.
장식 가량은 석등의 사각형 화사석 같은 곳에 들어 있고, 그 받침대는 초당사 구마라즙 당나라 승탑의 대석이나 불국사의 신라시대 승탑의 간주석을 닮았다.
이 가량은 건륭 9년(1744)에 王莽이 신나라를 건국한 서기 9년에 劉歆 등이 설계하여 만든 청동도금 가량을 모방하여 만들었다. 윗부분에는 건륭황제가 직접 지은 銘文이 새겨져 있다.
가량을 태화전 앞에 두는 것은 도량형(度量衡; 공간)을 정하고 천하를 통일한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자금성은 중국인의 천지 코스몰로지를 바탕으로 하고,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은 중화제국의 심장부인 것이다.
연암이 본 태화전
연암은 태화전이 천자가 앉아 정치를 하는 곳이건만, 생각만큼 크고 높지 않아 보여서,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니 그들도 비슷한 의견을 보였다. 수석 통역관이
‘그것은 조선에서 압록강을 거쳐서 여기까지 오면서 호화롭고 거대한 사찰, 도교 사원들을 보며 눈이 높아져서 태화전이 어마어마하게 클 것으로 상상을 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그런 사찰이나 道觀, 민간의 집들이 모두 태화전을 꾸미며, 누런 유리기와, 삼층 처마와 아홉 돌층계는 평민들은 지을 수 없으며, 자금성의 궁궐들이 모두 태화전을 닮게 지은 것도 태화전을 장엄하게 하는 요소들이인데, 그렇지 않으면 태화전도 또한 쓸쓸한 초가 오두막과 다를 게 없다’
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듣고 난 뒤에 연암은
“자네 말처럼 한다면 요·순 같은 성군도 걸이나 주와 같은 임금의 포악성을 겸하고 있어야만 비로소 자신의 뜻대로 만족하고 뽐낼 수 있는 천자가 되겠구먼.”
이라고 응수하였고, 듣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크게 웃었다고 하였다.
속칭 금란전(金銮殿) 이라고 하는 태화전은 명나라 영락 18년(1420)에 지어 봉천전이라 하였고, 가정 41년(1562)에 황극전으로 고쳤다가, 청나라 순치2년(1645)에 태화전으로 고쳤다. 지금 건물은 강희 34년(1695)년에 중건한 것으로 중첨무전정의 중국 최대 목조 건물이다.
잡상
지붕의 추녀 마루 끝마다 진와수(鎭瓦獸-仙人走獸)가 올려져있다. 우리나라 건축에서는 雜像이라고 하여 서유기의 삼장법사와 손오공 등의 제자들과 土神을 올려놓는 것과 비슷하다. 진와수의 짐승 숫자는 엄격하게 제한한다고 한다.
태화전에는 중국에서 가장 많은 숫자로 유일무이하게 10마리가 올려져 있고, 중화전에 7마리, 천안문과 보화전에 9마리, 기타 다른 건물에는 숫자를 점점 줄여서 올렸다고 한다. 진와수의 맨 앞에 봉황을 타고 있는 仙人은 위진남북조의 제나라 明王이라고 한다. 그는 신선술을 닦아서 신선계로 올라갔다고 한다. 선인 뒤에 작은 짐승으로 용, 봉황, 사자, 천마, 해마(海馬), 준예(狻猊), 압어(狎魚), 해치(獬豸), 두우(斗牛), 행집(行什)을 올려놓았다.
태화전은 명청시대 24황제가 성대한 典禮를 거행하였던 곳이다. 황제 즉위식, 황제 혼례, 황후 책립, 장수의 출정 외에 황제 생일인 만수절, 설날, 동지라는 3대 명절에 황제는 문무 관료들의 조하, 왕공대신에게 내리는 연회가 여기서 있었다. 청나라 초기에 신진 관료를 선발하는 전시가 태화전에서 있었다.
황제의 평소 조회는 태화전이 아니고 御門聽政이라 하여 태화문, 건청문에서 하였고, 대신들을 접견하는 곳은 乾淸宮이었다. 청나라 말기 慈禧太后의 垂簾聽政 장소는 건청궁 서편의 養心殿이었다.
이 태화전과 백색 석단의 월대와 앞마당에 깃발을 들고 도열하여 청나라 황제의 즉위식을 하였을 것이고, 조선의 축하사절단도 마당의 한 곳에 서서 참가했을 것이다. 태화전 내부를 발꿈치를 세우고 사람들 머리 위로 겨우 볼 수 있다.
황제의 보좌 위에는 ‘建極綏猷’라는 건륭제의 어필 대자가 황금색 판 위에 쓴 편액이 걸려 있다. 이것은 복제품이고 원래 편액은 위안스카이(袁世凯)가 황제가 될 때 교체되어 잃어버렸다고 한다.
편액 ‘建極綏猷’에서 建極의 출전은 <<尙書>> <周書·洪範>의 “皇建其有極”이다. 치국의 최고 준칙인 중정을 세운다는 뜻이다. 주나라 무왕이 은나라 주왕을 친 뒤에 감옥에 갇혀있던 기자에게 천도를 물으니 기자가 천지의 大法을 가르친 것이 洪範이고, 홍범의 제5조가 황극이다. 군주는 백성의 주인으로서 자신부터 중정의 도를 세운 뒤에 백성을 교화한다는 말이다. 綏猷의 典出은 <<尙書>> <湯誥>의 “惟皇上帝,降衷于下民。若有恒性,克綏厥猷惟后”이다. 수는 按撫, 順應의 뜻이고 猷는 道, 法則이라는 뜻이다.
은나라 탕왕이 주나라 폭군 桀王을 칠 때, 수도 亳으로 돌아온 뒤에 걸을 치는 대의를 천하에 알리며 지은 것이 <탕고>이다. 天帝가 善道를 백성에게 부여할 때에는 백성으로 하여금 항상된 성품을 지니도록 하는데, 그 도에 따르면 천자가 된다는 뜻이다.
월대 위에서 난간 너머의 마당을 내려 보니 사방은 회랑으로 둘러쳐져 있고, 태화문 너머로 오문의 지붕과 전각들의 지붕이 보인다. 태화전을 둘러싸는 동쪽 아래를 보니, 이어진 건물의 누런 유리기와 지붕에 햇빛이 반사되어 눈부시다. 태화전의 처마와 공포의 단청은 청색과 녹색이 주조를 이루고 온통 금빛으로 빛난다. 중화전으로 들어가는 문 앞에 손잡이가 달린 커다란 황동 드무가 놓여 있다. 크기가 지름이 150센티미터는 되어 보인다. 자금성은 정말로 호화롭고 화려하고 웅장하고 장엄하다.
열하일기에는 천자가 조회를 하는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큰 조회를 할 때 황제가 거둥을 하여 태화전에 나와 앉으면, 일기를 맡은 흠천감이 오봉루(태화문의 문루) 위에서 시간을 알리는 북을 치고, 음악을 맡은 敎坊司가 오봉루 양쪽에서 中和韶樂이란 음악을 연주한다.
통역관 徐宗顯의 말에 의하면 조회 때의 풍경은 이러하다.
“황제의 의복과 기구를 맡은 錦衣衛에서 출입할 때 필요한 儀仗을 태화전의 뜰 동서로 진열하여 북쪽을 보게 하고, 길들인 코끼리를 오봉루 아래의 동서에 마주 보게 세워 놓으며, 천자의 수레를 태화문의 붉은 섬돌 가운데 길에 북쪽으로 진열해 놓는다.
御馬監이 의장용 말을 벌려 세우고, 金吾衛와 雲麾司에서는 갑옷을 입은 병사, 의장대, 징과 북을 태화문 밖과 오문 안의 붉은 섬돌에 배치하며, 북경을 수비하는 장교 칠만 명이 도로를 끼고 깃발을 세워서 바둑판처럼 넓고 반듯한 거리를 호위하고 경계한다.
조정의 백관들은 단문 안의 경천주 아래에서 기다리다가, 오봉루 안에서 첫 번째 북소리가 나면 반열을 정비하고, 두 번째 북소리가 나면 문무 반을 나누어 태화문 좌우의 문을 끼고서 한 줄로 나란히 들어간다. 그러면 황제의 어가가 보화전에서부터 중화전을 거쳐 태화전으로 듭시는데, 길잡이 시위가 황제의 옥새와 인장, 부절을 받들고 앞에 선다.
이때 풍악은 飛龍引之曲을 연주하고, 大樂은 風雲會之曲을 연주한다. 그때에 맞추어 여러 대문을 일제히 열어젖혀 곧바로 정양문까지 환하게 트이게 만드는데, 안팎이 바르고 곧아서 하나도 숨기거나 굽은 것이 없다.
그리고 오봉루 안에서 慶皇都와 喜昇平을 연주하는 소리가 마치 천상에서 울리는 것처럼 흘러나온다.”
중화전
태화전 뒤로 돌아가니 정사각형의 아담한 궁전, 중화전이 있고 그 뒤로 태화전과 비슷한 크기의 보화전이 있다. 和자가 들어가는 이름의 세 궁전이 모두 같은 월대 위에 있다. 중국인들의 우주관이나 세계관에서 천자인이 어울려 생명을 탄생시키고, 생명이 어울려 살아가는 화합을 얼마나 중요시 여기는가를 웅변한다. <<중용>>의 중과 화의 철학이 생각난다.
중화전은 정사각형 건물로 지붕은 용마루가 없이 4개의 추녀마루 지붕 꼭대기에서 한 점으로 모이는 찬첨정(攢尖頂) 건물이다. 결코 작은 건물이 아니지만 태화전과 보화전 사이에 있으며 이들 건물들과 비교되어 아담한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황제가 태화전 조회에 나가기 전에 잠시 쉬는 공간이고, 집사관원이 황제를 배알하는 곳이었다. <<中庸>>의 “中也者,天下之大本也;和也者,天下之達道也”에서 취한 것이다.
안의 보좌 위에는 ‘允執厥中’이라는 대자 편액이 걸려 있다. <<서경>> <대우모편(大禹謨篇)>의 “인심은 위태하고, 도심은 희미하니, 오직 정(精)하고 일(一)하여야 진실로 그 중(中)을 잡으리라(人心惟危 道心惟微 惟精惟一 允執厥中).”에서 취한 유명한 말이다. 순임금이 우임금에게 임금 자리를 물려주면서 한 말이다. 주자의 철학을 받아들인 퇴계와 율곡 철학의 중요한 명제였다. 보좌 앞의 주련은 時乘六龍以御天所其無逸, 用敷五福而锡极彰厥有常이라고 하였다.
보화전
중화전 뒤의 보화전은 명나라 영락18년(1420)에 지었는데 화재를 몇 번 겪었다. 현존 건물의 뼈대는 명나라 때 건축이다. 명초에 謹身殿,明 嘉靖 41녀(1562)에 건극전(建極殿),청나라 순치 2년(1645)에 보화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保和”는 출전이《易經》이고 뜻은 “志不外馳,恬神守志”라는 뜻으로 정신을 오로지하여 우주의 만물화해를 간직하여야 수복과 안락하여 천하가 태평하게 된다는 뜻이다. “皇建有極” 편액은 건륭제의 어필이고 출전은 <<상서>> <홍범>의 “皇建其有極”이다. 겹처마팔작지붕이다. 바깥은 9칸, 안은 5칸 건물로 건평이 1240평방미터이고, 높이가 29.50미터이며 지붕은 겹처마팔작지붕(重檐歇山頂)이다.
보화전은 명대에는 전례 전에 황제가 옷을 갈아 입었고, 황후, 태자를 책봉할 때 축하를 받은 곳이다. 청대에는 매년 제석(除夕)、정월(正月) 보름날에 황제가 제후국과 왕공, 1~2품 대신들에게 연회를 내리고, 전시를 열었던 곳이다. 매년 연말에 宗人府와 吏部가 보화전에서 종실, 만, 몽, 한의 군대, 각 省의 漢職, 外藩 世職을 호적에 올렸다.
백탑
보화전 뒤의 단계(丹階-월대)에서 보니 건청궁 너머의 북쪽으로 景山이 있고 그 위에 3층 처마의 전각이 있다. 산의 동쪽에도 2층의 작은 정자가 2개 보인다. 경산은 태액지를 파며 나온 흙을 쌓아서 만든 산이다.
경산은 의종(毅宗, 思宗) 열(烈)황제, 숭정제(崇禎帝)가 자결한 곳이다. 신하들이 이자성의 반란군에 속속 투항하였고, 1644년 4월 21일에는 베이징이 포위되었다. 결국 4월 25일(崇禎 17년 3월 19일) 베이징이 함락되자, 숭정제는 처첩(妻妾)과 딸을 죽이고 자신도 징산(景山)에서 느티나무에 목을 매어 자살하였다.
서북쪽으로는 궁궐 지붕 위로 멀리 백탑이 보인다. 티베트불교를 받아들인 청나라 황실에서 1651년에 세웠다. 높이가 35.9미터이고 탑신은 보병형이며, 상부에 2층의 구리 양산을 올렸고, 정상에는 도금 보주를 설치하였다. 하부는 수미좌이고 탑 안에는 티베트문자 불경, 衣鉢, 2과의 사리를 갈무리하고 있다. 열하일기에는 태액지 중 北海의 瓊華島가 나온다. 경화도의 정상에 지금 내가 보고 있는 백탑이 있다.
열하일기에는 태액지 중에 金鰲橋가 있고, 금오교에서 백탑사의 백탑이 나무숲 너머로 보인다고 하였다.
요나라 때인 1096년에 불탑을 세웠는데 전쟁으로 불탔다. 그 자리에 1271년에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가 다시 탑을 세우게 하였다. 8년이 걸린 설계와 시공으로 1279년에 백탑을 세웠다. 쿠빌라이의 칙명으로 탑 아래에 大聖壽萬安寺를 1288년에 세웠다. 역사책에 의하면 절은 탑에서 화살이 날아가는 곳까지를 부지로 하였다고 한다. 절의 면적은 16만평방미터이다. 절은 西苑이라고도 불렸고 원나라 황실의 사원이었고, 백관이 의례를 익히고 몽골문과 위그르문으로 불경을 번역하고 인쇄하였다. 쿠빌라이가 죽은 뒤에 백탑 양쪽에 影堂인 神御殿을 짓고 제사를 모셨다. 1295년 원나라 황제가 직접 주관한 國祭日의 불사 때는 7만 명이 참가하였다. 1368년에 벼락으로 사원 건물은 불타고 백탑만 남았다.
1433년, 명나라 선종의 칙명으로 백탑을 수리하였고, 1457년에 사원을 중건하고 “妙應寺”라고 하였는데, 면적은 13,000 평방가 되었다. 강희, 건륭 황제 어필 중수비문이 있다.
백탑의 높이는 51미터이고 벽돌로 쌓았다. 3층의 기단부에서 하층은 호장이고 2, 3층은 수미좌이다. 수미좌 위에 복발형의 백색 탑신이 있다. 탑신 위에 원추형의 원반이 13층이 쌓여 있다. 이른바 13천 위에 36개의 작은 풍경이 걸려있는 꽃문양의 구리 원반이 있다. 바람이 불면 청아한 소리가 난다. 동반 위에 8층의 구리 塔刹이 있다. 그 높이가 5미터이고 무게가 4톤이다. 탑찰은 刹座, 相輪, 寶蓋와 刹頂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1978년에 백탑을 수리하면서 탑 정상부에서 건륭 18년(1753)의 <<대장경>>, 목조관세음상, 꽃무늬가사, 5佛冠, 건륭제 어필 <<바라밀다심경>>, 티베트문 <<尊勝呪>>, 청동삼세불상, 赤金舍利長壽佛 등을 발견하였다.
아니고
백탑은 인도의 스투파에서 기원한다. 中統 원년(1260)에 원나라 세조 쿠빌라이가 帝師 파사파에게 티베트에 황금탑을 세우도록 명령하였다. 쿠빌라이의 요청으로 17세의 공예가였던 아니고(Anigo,阿尼哥, 1244-1306)가 네팔 말라 왕조의 공예가 80명을 인솔하고 티베트로 와서 다음해에 탑을 세웠다. 아니고는 어려서부터 불경을 익히고 산스크리트어를 익혔다. 그림과 彫塑업에 종사하며 <<尺寸經>>을 공부하였다. 그는 한번 들으면 기억을 하였고 자라서는 화소와 주물로 불상을 만드는 일에 뛰어났다.
파사파가 귀국하려는 아니고에게 원나라의 황제를 알현하도록 권하며, 출가시켜 제자로 삼았고, 원나라 조정에 추천하였다. 쿠빌라이를 만난 아니고가 쿠빌라이의 명으로 鍼灸銅人像을 수리하였다. 그것은 원나라 태종 와활대(窩闊台, 1186-1241) 당시에 왕즙(王檝)이 남송에 사신 갔을 때 선물 받은 것이었다. 동인상에는 흉곽과 脈絡이 모두 표시되어 있었다. 세월이 오래되어 파손이 심하여 모든 장인들이 감히 수리하지 못하였는데, 아니고만이 수리를 시도하여 지원 2년(1265)에 수리해내었다. 모든 장인들이 감탄하였다. 이후로는 큰 사찰의 탑을 세우고, 불상과 그림, 주물 등을 그에게 맡겼다.
지원 12년(1275)에 諸色人匠摠管府를 세워 梵像局 등 18개 국들을 관할하게 하였는데, 아니고가 총관직을 맡았다. 그의 부인이 네팔에 있었는데, 察必황후가 사람을 보내 황금을 내렸고, 지원 13년에는 사신이 황금 500냥을 가지고 가서 부인을 베이징으로 오도록 하였다. 지원 15년 아니고를 황제의 명으로 환속하도록 하여 光祿大夫, 大司徒의 관계와 관직을 제수하고 將作院을 통솔하도록 하였다. 송나라 경헌태자의 손녀를 부인으로 삼도록 하여 景獻태자 소유의 田宅을 하사했다. 지원 16년(1279)에 聖壽萬安寺의 탑을 조성하여 京畿의 良田 1만5천 무, 농부 100인, 소와 농기구 등을 하사받았다. 원정 원년(1295), 오대산에 萬聖佑國寺를 지어서 阔阔真황태후가 은 1만 냥과 귀족의 딸을 부인으로 삼도록 하였다. 1296년에 도교의 崇眞萬壽宮을 짓고 그로 하여금 상을 설치하게 하였다. 1306년에 병으로 대도(大都, 베이징)에서 죽었다. 1311년에 민혜(敏慧)라는 시호를 내렸다.
건청궁
보화전 단계에서 내려와 건청문 앞의 마당으로 내려갔다. 황금빛 구리 사자 암수가 건청문 앞마당의 좌우에 세워져 있고, 그 바깥으로 황동으로 된 큰 드무가 놓여져 있다.
乾淸門의 월대에는 용과 구름을 새긴 돌이 박혀 있고, 편액에는 만주족 문자가 한자와 나란히 쓰여 있다. 건청문 계단을 올라가자 다시 漢白玉石(Alabaster) 난간의 월대가 있고 그 끝에 1789년에 세워진 건청궁이 있다.
건청궁은 자금성의 내정 후3궁 중 첫 건물로 명청시대 황제들이 일상의 政務를 처리한 곳이다. 바깥 9칸, 안 5칸이고 겹처마우진각지붕 건물로 높이가 20미터이다. 건청궁의 출전은 노자의 <<道德经>> “昔之得一者,天得一以清,地得一以宁,神得一以灵,浴得一以盈,侯王得一而以为正”이다. 건은 하늘이고, 청은 하늘이 청명한 것으로 국가의 안정을 상징한다.
보좌 위에는 순치제 어필의 “정대광명”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편액 뒤에는 건저갑(建儲匣)을 갈무리하여 두었다.
열하일기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건륭제가 제위에 너무 오래 있어서 ‘세상에 머리가 허옇게 센 태자도 있다더냐?’라고 하는 말이 밖으로 새 나가서 태자를 폐하고 그로부터 태자를 미리 세우지 않았다. 옹정제는 여러 아들 중 한 사람을 황위계승자로 선택하여 이름을 직접 써서 밀봉하여 건청궁의 세조 章황제가 쓴 ‘정대광명’ 편액 뒤에 보관하게 하였다.
황제 신변에 둔 황위계승자 명단 문서와 편액 뒤의 건저갑을 대조하여 맞으면 그 사람을 황위계승자로 선포하였다. 건륭, 가경, 도광, 함풍 4황제가 이런 방식으로 황제가 되었다. 이것은 황자들 사이의 권력 싸움을 막고 황제에 대한 효성을 다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열하일기에서 연암은 이런 이유로 푸른 유리기와 지붕을 한 태자궁의 문, 前星門이 닫힌 지 백 년이 되어 간다고 하였다. 함풍제는 아들이 한 사람 밖에 없었고, 동치제와 광서제에게는 아들이 없었기에 이런 제도는 존재 의의를 잃고 말았다.
교태전
건청궁 뒤에는 交泰殿이 있다. 교태전 뒤에는 坤寧宮이 있다. 같은 월대 위의 이 3건물은 후3궁이라고 하고 자금성의 內廷이다. 내정은 황제와 황후가 거주하는 정궁이고 그 뒤에는 御花園이다. 후3궁 동서에는 각각 6궁이 있는데, 후비들의 휴식 공간이다. 동6궁 동쪽에는 천궁보전 등의 불당이다. 서6궁 서쪽에는 중정전 등의 불당이다.
태화전, 중화전, 보화전, 3대전은 外朝로 국가 거행의 大典禮 공간이다. 3대전의 좌우에는 文華殿과 武英殿이 있다. 내정과 외정 바깥으로 다시 外東路, 외서로가 있다. 외동로 남쪽에 황자가 거주하는 擷芳殿인데 속칭 南三所이다. 북쪽은 건륭제가 지은 태상황궁전으로 寧壽宮이다. 서동로의 남쪽에는 황태후가 거주하는 慈寧宮, 壽康宮이다. 수강궁 북쪽에 황태후가 거주하는 壽安宮이고, 그 북쪽에 불당인 英花殿이 있다.
교태전이라는 이름은 <<易經经>> "天地交合、康泰美滿"에서 취하였다. 황제와 황후들이 거주하는 공간이다. 명나라 가정 연간에 세웠고 1655, 1600년에 중수하였다. 1797년에 건청궁에 화재가 날 때 불탔으나 중건했다. 황후의 생일인 천추절에 축하를 받고, 황제 혼례, 황후 책립, 좌우 책상에 황제의 寶安(옥새)을 두고, 봄에 지내는 선농제에 쓰이는 뽕잎 채취 도구를 살피는 공간이다.
청나라에서는 25개의 옥새를 이 교태전에 보관하였다. 정월에 흠천감이 길일 길시를 선택하여 책상 위에 옥새를 진열하고 황제가 와서 향을 올리는 의례를 하였다. 명나라 환관의 전횡을 교훈 삼아서 청조에서는 환관이 정치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래서 ‘内宮不許干預政事’라고 쓴 철패를 여기 교태전에 세웠다.
교태전은 정방형 3칸 건물이고 황유리기와의 4각 단첨찬첨도금보정(單檐攢尖鎏金寶頂)이다. 보좌 위에는 강희제 어필의 편액, ‘무위’가 있고, 뒤에는 건륭제 어필의 <교태전명交泰殿銘>이 있다. 교태전의 동쪽에는 청동 물시계(滴漏),서쪽에는 자명종(自鳴鐘)이 설치되어 있다. 이 자명종은 가경 3년에 만든 것인데, 황궁 안의 시간은 모두가 이 시계에 따랐는데 높이가 6미터로 현존 중국 옛 시계 중에 최대이다.
곤녕궁
곤녕궁은 정면 바깥 9칸, 내면 3칸, 황유리기와의 겹처마 우지각 지붕(重檐廡殿頂)의 건물이다. 곤녕궁 월대 동쪽에도 해시계가 있고 철침의 그림자는 오시를 향하고 있다. 곤녕궁은 명나라 영락 18년(1420)에 처음 지었고, 1514, 1596년에 불타고 1605년에 중건했다. 청나라 순치 2년(1645)에 명나라 제도에 따라 중수하고, 1655년에 심양 盛京의 淸寧宮을 모방하여 중수하였다. 1797년 건청궁의 불로 처마가 탔고 1798년에 중수했다. 건청궁이 양성, 곤녕궁이 음성을 대표하여 음양결합의 천지합벽의 뜻을 나타냈다. 곤녕궁이라는 이름은 <<道德經>> “昔之得一者,天得一以清,地得一以宁,神得一以灵,浴得一以盈,侯王得一而以为正”에서 취한 것이다. 황후는 地, 坤이다.
어화원
곤녕궁의 월대에서 마당으로 내려서니 곤녕문이 있다. 곤녕문을 지나니 御花園이 나온다. 곳곳에 측백나무가 심어져 있고, 괴석들이 놓여 있다. 天一門을 지나서 안으로 들어가니 겨울이라 화초는 말랐지만, 측백나무 숲 사이에 堆秀山이라고 하는 괴석으로 만든 인공의 산이 있고 그 위에는 御景亭이라고 하는 정자까지 있다. 내부에는 물이 흘러내리게 하였으며, 重陽節에 황제와 황후가 어경정에 올라갔다. 어화원에는 白松도 보인다.
추사가 25세 때, 자제군관 자격으로 생부인 김노경을 따라 청나라 연경에 다녀오면서 가지고 온 씨를 고조부 김흥경의 묘소에 심은 백송이 현전한다.
어화원의 주 건물은 겹처마의 록정(盝頂: 우진각 지붕이지만 용마루가 없고 상부가 평평하다.)의 흠안전(欽安殿)이다. 또 원추형 지붕 아래에 여러 번 접은 지붕의 정자는 예쁘고 정겨운 건물이었다.
어화원은 명나라 때인 1420년에 처음 지었는데 이름은 궁후원(宮後苑)이었다. 면적은 남북 80미터에 동서 140미터이다. 용도는 황제, 황후의 휴식, 자연 완상, 제사, 藏書, 독서이다.
경산
어화원에서 붉은색의 화려한 承光門을 통과하니 다시 10미터 높이의 붉은 담장이 서 있다. 그 가운데로 난 順貞門을 지나자 다시 자금성의 북문인 神武門이 나온다.
커다란 동굴 속을 지나는 것처럼 큰 신무문을 지나자 정면에 景山이 있다. 태액지를 파며 나온 흙을 쌓아 만든 높이 43미터의 경산(만수산)은 베이징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산마루에는 1750년에 세운 5개의 정자가 있다. 중봉의 정상에 있는 것은 만춘정인데 3겹 처마에 4각 찬첨지붕의 황색 유리기와 건물이다. 그 동서에는 겹처마 8각형 녹색유리기와 정자 있는데, 서쪽은 輯芳亭, 동쪽은 觀妙亭이다.
그 바깥으로 다시 원형의 겹처마 남색유리기와 정자가 있는데, 서쪽은 富覽정, 동쪽은 周賞亭이다. 예전에는 정자마다 불상을 모시고 五位神, 五味神이라고 하였다. 1900년에 8개국 연합군이 4존의 불상을 약탈하였고 중앙의 만춘정에 모신 비로자나불은 파괴되었다. 만춘정에 오르면 베이징이 한 눈에 들어오는 장관이 펼쳐진다고 한다.
경산은 萬壽山, 萬歲山이라고도 하고 煤山이라고도 한다. 연암은 만수산과 만세산의 명칭 변화를 고증하고, 명 의종이 자결한 만수산의 壽皇亭을 보고 싶었지만, 문지기가 들여보내주지 않아서 그 정자가 남아 있는지 궁금해 하였다. 원대에는 작은 언덕이 있어서 靑山이라고 불렀고, 명대에는 이곳에 석탄을 쌓아두어서 매산이라고 하였다. 황궁 북쪽의 병풍 같은 산이라서 풍수가들은 鎭山이라고 한다.
명청대에 과일나무를 심고 학, 사슴을 키웠기에 산 아래는 백과원, 산 위는 만세산이라고 하였다. 華菓園에는 해당원(海棠園)、모란원(牡丹园)、도원(桃园)、사과원(苹果园)、포도원(葡萄园)、감나무숲(柿子林)이 있었다. 1655년에 경산으로 고쳤다. 경산은 <<시경>> <殷賦>의 "陟彼景山,松柏丸丸"에서 취하였다.
신무문 앞에 나와 좌우를 보니 폭이 약 30미터는 되는 해자가 있고 물이 얼어 있다. 동쪽 끝에 角樓가 보인다. 신무문 편액이 걸린 겹처마 우진각 지붕의 문루 아래의 성벽에는 ‘故宮博物院’이라고 크게 쓴 글씨가 박혀있다.
베이징의 점심
버스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해자를 따라 동쪽으로 걸어가는데, 부부 걸인이 지나간다. 남편은 눈이 먼 봉사이고 아내는 동냥 그릇을 들고 간다. 기구한 그 모습을 사진기에 담으려고 하니 부인이 화가 나서 뭐라고 소리를 질렀다. 봉변을 당할까 겁이 나서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겨우 지나왔다.
버스를 타고 북쪽으로 가는데, 오래된 기와집들이 보이고 도로가에는 큰 호수가 있다. 호수에서 얼음을 지치는 베이징 시민들의 모습이 활기차다. 도로 위에는 전기로 달리는 버스가 달리고 있는 것이 신기하게 보인다. 호수는 아마도 태액지 중 什刹海나 北海일 것이다. 조금 가니 세계 각국의 건물들을 재현해놓은 민속관광거리가 보인다. 다시 새둥지모양으로 설계된 베이징올림픽 수영장을 몇 해 만에 다시 본다.
차가 선 곳은 새로 지은 빌딩이 많은 상가였다. 식당 이름이 우합미미(優合美味)인데 한국음식집이다. 야채와 소고기를 끓는 물에 데쳐서 먹는 샤브샤브로 점심을 먹었다. 기름기와 밀가루 위주의 중국 음식에 지친 나는 한국음식이 반가웠다. 음식점 벽에 붙은 칠성사이다(樂天七星汽水), 한국배(韓國梨), 이효리가 모델로 나오는 소주 ‘처음처럼(初飮初樂)’ 광고지가 반갑다. 산수여행사 이사장님의 건배 제의에 나는 얀징맥주(燕京鮮啤, Yanjing Beer)를 한 모금 마셨다.
귀국
공항으로 차가 출발하자 이샘이 청바지천으로 된 정이 묻은 모자를 식당에 두고 왔다. 버스를 세우고 이사장님이 달려가서 가져왔다. 박샘이 아침에 우동집에서 산 귤을 버스 안에서 모두에게 나누어 주었다. 고가도로 위를 달려서 버스는 베이징공항에 섰다. 공항에서 짐가방을 정리하여 화물로 접수하였다. 공항에도 춘절을 맞이하는 紅燈을 매달아 놓았다. 대합실에는 明나라 때의 천문관측기기(天文觀測器機), 혼천의(渾天儀)가 설치되어 있다.
공항대합실에서 짐을 부치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 지하철과 같이 생긴 탑승구가 있는 곳으로 가는 셔틀 기차를 타고 이동하였다. 기차에서 내려 검색대를 통과하여 다시 탑승구가 있는 곳으로 수평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이동하였다.
내려서 면세점에 들어갔다. 나는 소흥화조(紹興花雕) 술 한 병과 봉리소(鳳梨酥), 오과소(五果酥) 1통씩을 샀다. 김해공항에서 검색을 통과할 수 없을 것 같아서 귤을 면세점 종업원 아가씨에게 모두 주니, 고마운 표정을 지으며 받았다.
창밖으로 관제탑이 보이고 탑승할 비행기가 눈앞에 있다. 서울, 인천으로 가는 사람들과 작별을 하고 오후 4시 40분에 이륙하는 부산행 아시아나 OZ316편에 올랐다. 안샘 부부와 같이 앉았다. 기내식을 먹고 안샘과 이야기도 하고 신문도 보면서 김해공항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가방을 찾아서 경주로 오는 단체버스에 올랐다. 경주에서 다시 포항으로 왔다. 연화재 공용주차장으로 차를 몰고 온 아내와 재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