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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회화.전각이론 스크랩 19. `顔筋柳骨`이란 무엇인가?
청운 추천 0 조회 71 14.12.17 16:0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19. ‘안근유골’이란 무엇인가?

 

   당나라 초기의 구양순과 우세남은 수나라로부터 당나라에 들어간 서예가이다. 초당은 이미 그들이 활동한 후기로 그들은 수나라의 서예를 계승ㆍ종합ㆍ발전하여 초당의 해서규범을 형성했으며, 특히 해서의 결체에서 당나라의 서풍을 열어주었다. 이후 저수량은 초당의 기초에서 더욱 진일보해 위로는 구양순과 우세남의 실마리를 이었고, 아래로는 안진경과 유공권의 풍격을 열어주었다. 성당시기에 이옹(李邕)의 서예는 이미 새로운 형세를 나타내고 있었다. 그의 글씨는 행서와 해서의 사이에 있었으니, 『선화서보』에서는 “처음에 왕희지 행서의 법을 배워 이미 그 묘함을 얻고, 다시 구습을 벗어나 필력이 한 번 새로워졌다. 이양빙은 서예에서 신선의 손이라고 일컬었다[初學右軍行法, 旣得其妙, 復乃擺脫舊習, 筆力一新. 李陽?謂之書中仙手].”라고 했다. 이옹의 새로움은 새로운 체세에 있고, 해행서를 비에 들인 성당시기에 성취가 뛰어난 서예가이다. 조금 뒤의 안진경과 유공권은 결체와 필법에서 앞으로 향해 더욱 한 걸음 확장하여 초당 해서의 규범을 변혁했다. 즉, 왕희지의 서풍으로부터 철저히 벗어나 진정 당나라 해서에 속하는 형식규범을 이루었고, 전형적인 당나라 해서의 예술형상을 창조했으며, 완전히 새로운 예술경지를 개척했다. 안진경과 유공권에서 안진경의 성취가 가장 탁월하고 공헌이 컸으며 영향이 심원했다. 그는 동진시대 왕희지를 계승한 이후 서단에서 영향이 가장 큰 서예가이다.

   안진경(顔眞卿, 709-785)의 자는 청신(淸臣)이고 학자집안 출신이다. 개원(713-741) 연간에 진사가 되어 감찰어사에 이르렀으나 권신인 양국충(楊國忠)을 거역함으로 인하여 평원태수로 내보내졌기 때문에 세칭 '안평원(顔平原)'이라 한다. 당 대종 때 형부상서로 임명되고 작위는 노군개국공에 봉해졌으므로 또한 '안노공(顔魯公)'이라 불렸다. 몸소 현종ㆍ숙종ㆍ대종ㆍ덕종 네 황제를 섬기며 성당으로부터 중당으로 들어가는 사이의 걸출한 서예가이다. 그는 정치에서 중앙집권을 옹호하고, 번진(藩鎭)의 할거를 반대했다.

   평원태수 재임 중에 일찍이 사촌형인 상산태수 안고경(顔?卿)과 연합하여 군사를 일으켜 안록산의 반란을 진압하고 토벌하다가 형과 조카가 전쟁에 패해 피살되었다. 이에 안진경은 “부친이 죽고 자식이 죽으니 둥지가 기울어져 알이 엎어졌다[父陷子死, 巢傾卵覆].”라는 비분강개한 상황에서 방종한 필치로 글씨를 쓴 것이 바로 원나라 선우추(鮮于樞)에게 ‘천하 제2행서[天下行書第二]’라고 칭찬을 받았던 <제질고(祭侄稿)>이다. 그의 또 다른 행초서 명작인 <유중사첩(劉中使帖)>은 반군을 극복하고 승리한 후에 몸과 마음이 기쁘고 위안되어 쓴 것이다. 감정은 자유분방하고 필봉은 강하고 굳세어 “신채가 농염하게 발하고 용과 뱀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神彩艶發, 龍蛇生動].” 그 글씨를 보면, 마치 그 사람을 보는 것 같이 단정하게 승리의 소식을 듣고 개연히 충성을 드러낸 형태가 있다. 이희열(李希烈) 반란 이후 안진경은 명을 받아 투항을 권고했으나 끝내 이희열에게 죽임을 당했다. 안진경의 일생은 충성에 빛나고 권신과 간사함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일찍이 권신과 간신에 아첨했던 곽영의(郭英義)에 대하여 정면으로 다투고 아울러 편지를 보내어 질책했다. 이것이 곧 <여곽복야서(與郭僕射書)>, 즉 <쟁좌위첩(爭座位帖)>으로 자긍심과 성냄의 기운이 안에서 발해 붓으로 나타냈으니 전체가 한 기운으로 이루어졌다. 쓴 글자가 기이하고 예스러우며 호방하고 질탕함을 얻었고, “글자가 서로 연속되고 기이함이 날아 움직여[字相連屬, 詭異飛動]” 미불은 안진경 글씨의 제일이라 평했다. 안진경의 행초서는 뜻과 정서가 서예형식과 고도로 융합하여 매우 강한 예술 감염력을 나타내어 후세에 매우 깊게 여겼다. ‘서여기인’처럼 서품이 인품과 일치하여 사람과 글씨가 함께 후세에 전하여 칭송받고 있다.

   안진경은 해서ㆍ행서ㆍ초서를 잘 썼으며, 그가 창립한 ‘안체’의 서예특징은 해서에서 더욱 충분히 나타난다.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 계통은 모두 오랫동안 글씨를 잘 쓰는 집안으로 배움이 가학으로 전해졌다. 35세 때 장욱(張旭)에게 글씨를 배웠는데, 장욱과 안진경이 필법을 담론한 『술장장사필법십이의(述張長史筆法十二意)』가 세상에 전한다. 안진경 글씨의 원류에 관해 설은 역대로 일치하지 않는다. 소식은 그의 <동방삭화찬(東方朔畵贊)>이 왕희지를 법 삼았다고 했고, 어떤 사람은 북비 및 전서와 주문이 원류라고 했으며, 또한 저수량을 배웠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당나라 서예는 구양순과 우세남 이후 민간서예가 이미 변혁의 추세를 형성했다. 안진경은 이러한 풍토에서 널리 여러 서예가의 장점을 모아 한 용광로에 융해했고, 또한 민간서예에서 영양을 흡수하여 왕희지ㆍ구양순ㆍ우세남ㆍ저수량 이래의 규범을 벗어나 별도로 다른 길을 열어 필법ㆍ결체ㆍ장법에서 전면적으로 변혁했다. “안진경이 법을 변화하여 새로운 뜻을 내었다[顔公變法出新意].”라는 가치는 “위ㆍ진으로부터 초당에 이르는 서예가들 모두를 귀납하여 바로잡은 것이다[顔魯公書, 自魏晉及唐初諸家皆歸?括].” 그의 서예는 전서와 주문의 필의를 포함하고, 또한 북비의 졸박하고 엄정한 풍이 있어 수려하고 윤택하며 청아한 유풍을 일소하여 기세가 드높고 웅장하면서 중후하고 강건한 ‘안체’의 풍격을 창조했다. 이는 서예사에서 일차로 중대한 변혁이다.

   일반적으로 ‘안체’의 서풍은 3단계를 거친다. 초기의 <천복사다보탑비(千福寺多寶塔碑)>ㆍ<동방삭화찬>은 필법이 모나고 험준하며 전환하는 곳은 모나게 꺾어 비록 개인의 풍격은 있으나 ‘안체’의 특징은 아직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62세에 쓴 <마고선단기(麻姑仙壇記)>의 용필은 방필을 바꿔 원필로 했고, 전절은 둥글게 꺾는 것을 운용했으며, 가로획은 가볍고 세로획은 무거우면서 호형(弧形)을 띠고 있다. 교묘하게 장봉과 중봉을 운용하고, ‘잠두연미’식의 필법 특징이 이미 매우 선명하다. 글자마다 중후하고 운필의 일으키고 엎고 들고 누르는 변화의 리듬이 초당 3대가 보다 더욱 풍부하고 힘이 종이 뒤까지 침투하는 느낌이 있다. 결체에서는 기이하고 치우치는 것을 변화하여 단정함으로 삼고, 좌우가 대칭하며 정면으로 형세를 취한 특징이 매우 두드러진다. 중심은 펼쳐 기운과 도량이 너그럽고 커서 분명한 ‘안체’의 풍격이 이미 형성되었다. 말기의 <고신첩(告身帖)>과 <안씨가묘비(顔氏家墓碑)> 등은 더욱 성숙하고 세련되었는데 용필은 웅장하고 걸출하며 중후하며, 결체는 더욱 단정하고 근엄하며 졸박함으로 나아갔다. 자간은 긴밀하게 모이고 포국은 무성하고 조밀하며, 점과 획 그리고 행간의 기운과 뜻이 충만하여 전체적으로 보면 장중하고 정대한 기상이 정점에 도달했다.

   ‘안체’의 서예는 이전 사람의 규범을 벗어난 것이 매우 분명하다. 미불은 왕희지와 초당의 구양순ㆍ우세남을 아름답다고 했으나, 안진경은 “평담한 정취가 없으니, 대저 안진경과 유공권의 뽑고 차는 것은 후세 추하고 괴이한 악찰의 종주가 되었다. 이로부터 고법이 씻기어 남음이 없다[大抵顔柳挑?, 爲後世醜怪惡札之祖, 從此古法蕩無遺矣].”라고 비평했다. 이는 바로 반대적으로 안진경과 유공권이 옛것을 변화하여 새로운 것을 창조한 공헌이 여기에 있음을 설명하는 것이다. 안진경 서예의 공헌은 분명하다. 그는 하나의 완전한 체계를 세운 새로운 필법을 형성하여 당나라 해서가 용필에서 하나의 새로운 단계로 넘어 들어가도록 했다. 또한 당나라 해서 성숙시기의 전형적인 형상과 예술경지를 창조하여 당나라 해서의 발전을 최고봉으로 끌어올렸다. 이에 대해 소식은 “시는 두보, 문장은 한유, 서예는 안진경, 그림은 오도현에 이르러 고금의 변화를 나타내며 천하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마쳤다[詩至於杜子美, 文至於韓退之, 書至於顔魯公, 畵至於吳道子, 而古今之變, 天下之能事畢矣].”라고 했다. 소식의 말은 자못 안목이 있는 것으로 안진경의 서예발전에 대한 공헌은 개척성이다.

   유공권(柳公權, 778-865)의 자는 성현(誠懸)이고 벼슬이 태자소사에 이르렀기 때문에 세칭 '유소사(柳少師)'라고 하며, 안진경에 비해 70년이 늦다. 유공권은 목종(穆宗, 821-824) 때 글씨를 잘 썼기 때문에 한림시서학사가 되었다. 목종이 일찍이 유공권에게 묻길 “글씨는 어떻게 해야 아름다움을 다할 수 있는가[筆何盡美]?”라고 하자, 유공권은 "용필은 마음에 있으니 마음이 올바르면 글씨가 올바릅니다[用筆在心, 心正則筆正]."라고 답했다. 이 고사는 '필간(筆諫)'이라는 아름다운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인품과 서품의 문제를 다루었기 때문에 또한 서예를 논한 명언이기도 하다. 유공권의 서학에 대해 『당서』 본전에서는 “처음에 왕희지 글씨를 배우고 두루 근대 필법을 보았다[初學王書, 遍閱近代筆法].”라고 했다. 당 문종은 그의 글씨를 “종요와 왕희지가 다시 태어나도 여기에 가할 것이 없다[鍾王復生, 無以加焉].”라고 칭찬했다. 소식은 “유공권의 글씨는 본래 안진경에서 나왔으나 스스로 새로운 뜻을 낼 수 있었다[柳少師書本出于顔, 而能自出新意].”라고 했다. 유공권의 해서를 보면, 구양순과 안진경의 영향을 받은 흔적이 분명하며, 그는 안진경이 개척한 길을 따라 자신의 풍격을 형성하여 역대로 ‘안근유골(顔筋柳骨)’이란 논함이 있다. 위부인은 『필진도』에서 “필력이 좋은 것은 골이 많다.……골이 많고 육이 적은 것은 근서라 부른다[善筆力者多骨.……多骨微肉者謂之筋書].”라고 했다. 안진경과 유공권의 용필은 모두 굳세고 필력은 강성하다. 안진경의 글씨는 비교적 관박하고 위대하며, 골기가 강하고 살집이 풍부하며, 세로획은 호형을 띠고, 뽑고 차는 변화가 풍부하며 매우 탄력이 풍부하기 때문에 ‘안근(顔筋)’이라 일컫는다. 유공권의 글씨는 못을 깎고 철을 끊는 듯하고 침착통쾌하기 때문에 안진경의 글씨와 더불어 살찌고 씩씩함이 서로 다르다. 가로획과 세로획이 균등하며, 파리하고 굳세면서 상쾌하고 예리하며 뻣세기 때문에 ‘유골(柳骨)’이라고 말한다. '안근유골'의 형상으로 안진경과 유공권이 필법 형상에서의 기본 특징 및 그들을 예술에서 연관시켜 표현하고 있다.

   유공권은 해서ㆍ행서ㆍ초서를 잘 썼다. ‘유체’의 특징은 그의 해서에서 비교적 충분히 나타난다. 해서의 대표작은 <이성비(李晟碑)>ㆍ<금강경(金剛經)>ㆍ<부린비(符璘碑)>ㆍ<신책군비(神策軍碑)>ㆍ<대달법사현비탑비(大達法師玄秘塔碑)> 등이 있다. <신책군비>는 유공권 65세의 작품으로 정련되고 창경하며 정신과 기운이 완전하고 족하여 세상에 전해지는 유공권의 글씨에서 가장 아름답다. 유공권의 글씨의 용필은 방필과 원필을 함께 운용했으나 방필을 위주로 삼았다. 머무름과 꺾음을 강조했고, 근골을 펼쳤는데 펼침이 상쾌하고 예리하다. 별획은 가볍고 날획은 무거우며 변화가 분명하다. 갈고리와 뽑는 획은 모두 필봉을 돌려 일으켜 뽑았고, 전절하는 곳은 붓을 들어 별도로 일으켜 능각이 있다. 결자는 구양순 글씨의 긴밀하고 삼엄함과 다르고, 또한 안진경 글씨의 너그러움과도 다르다. 중궁은 모아서 긴밀하게 맺었고, 가로획과 세로획은 방종하면서 길게 펼쳤으며, 이것으로부터 소밀(疏密)ㆍ허실(虛實)ㆍ흑백(黑白)ㆍ산취(散聚) 등의 대비와 서로를 부각시킴을 조성했다. 글자의 외형에 높고 낮고 펼치고 오므린 변화가 있으며, 의태가 풍부하여 자못 정취가 있다. 초당 3대가와 안진경 글씨에 비해 유공권 글씨의 해서의 필법은 스스로 풍격을 이루었으니, 만당에 창조성이 풍부한 걸출한 서예가이다.

당나라 해서는 저수량으로부터 시작하여 용필에서 풍부하고 다양한 자태로 향함은 위에서 변화했고, 중간에 이옹ㆍ장욱을 거쳐 안진경ㆍ유공권에 이르러 당나라 해서 필법은 하나의 완전한 새로운 규범이 완성되었다. 근대 서예가 심윤묵(沈尹?)은 당나라 각 시기의 서예가 용필 규율을 연구한 뒤에 “그들의 용필은 일탁직하(一拓直下)와 그렇지 않은 구분을 발견했는데, 구양순과 우세남은 전자에 속하고, 회소는 후자에 속한다. 전자는 ‘이왕’ 이래의 옛 법이고, 후자는 장욱ㆍ안진경 이후의 새로운 법이다.”라고 했다. 장욱으로부터 안진경ㆍ유공권에 이르는 주요 공헌은 곧 옛것을 타파하고 새로운 것을 세워 새로운 국면을 개척한 것이다. 당나라 해서 필법은 안진경과 유공권의 손 안에서 점과 선이 더욱 입체감과 절주감이 풍부해졌고, 서예가의 주관적인 성정과 정서를 더욱 잘 표현할 수 있었으며, 개성화의 색채가 있었다. 종합하면, 안진경과 유공권이 당나라 해서를 최고봉으로 끌어올린 공적은 시대에 획을 긋는 일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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