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움꾼 왕건, 팔공산 전투 지고도 천하를 얻다 |
고려사의 재발견 · 태조 왕건 | ① 팔공산 전투
고려 건국의 아버지 태조 왕건(877~945년)은 왕이 되기 전엔 백전노장, ‘천하의 싸움꾼’이었다. 이런 사실을 알아야 왕건의 진면목과 고려왕조의 역사를 제대로 읽을 수 있다. 896년 스무 살의 왕건은 아버지 손에 이끌려 궁예 휘하에 들어간다. 이후 20여 년간 싸움판을 전전하다 918년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왕조를 건국한다. 이것으로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이후 무려 18년 동안 견훤의 후백제, 통일신라와 치열하게 자웅을 겨뤄 60세인 936년 마침내 천하를 통일한다. 69세까지 살았지만 싸움판을 오간 게 꼬박 40년이다.
왕건은 자신의 생애를 ‘즐풍목우(櫛風沐雨)’라고 압축한 바 있다(『고려사』 권2 태조 17년(924) 5월조). 이 말은 『장자(莊子)』에서 유래했다. 글자 그대로 ‘바람 불면 머리 빗질을 하고, 비 오면 빗물로 목욕한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왕건의 심정을 압축할 것이다. 싸움판 앞에서 그는 더욱 단단해졌고, 끝내 천하를 움켜쥐었다.
5000 군사 전멸하고 왕건 혼자 살아남아
왕건의 40년 싸움꾼 인생에서 유일한 패배가 927년(태조10) 11월의 대구 팔공산 전투였다. 백전노장인 왕건에게 가장 치욕스러운 사건이다. 그보다 2년 전인 925년(태조8) 10월 고울부(高鬱府·경북 영천) 성주인 능문(能文)이라는 자가 왕건에게 귀부한다. 영천은 경주의 코앞에 있는, 신라의 마지막 보루와 같은 곳이다. 그곳 성주가 귀부한 것은 신라의 자존심에 큰 생채기를 내는 일이었다. 920년 이미 두 나라는 동맹을 맺은 터라, 왕건은 신라의 동요를 염려해 귀부를 거부한다. 수일 후 왕건과 견훤은 지금의 선산 부근인 조물군(曹物郡) 전투에서 승부를 가리지 못해 화의를 맺고 인질을 교환한다. 왕건은 사촌동생을 인질로 보낸다. 그러나 이듬해 4월 견훤이 보낸 인질이 병으로 죽자 견훤은 고려의 인질을 죽인다. 반년 만에 이 화의는 깨진다.
고려·신라의 동맹사실을 안 견훤에게 화의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두 나라의 동맹은 후백제의 고립을 뜻한다. 견훤은 이를 깨기 위해 먼저 약자인 신라를 공격한다. 927년(태조10) 9월 견훤은 왕건에게 귀부한 고울부를 공격하는 무력시위를 벌인다. 다급해진 신라는 왕건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이해 11월 왕건의 군사가 도착하기 전에, 견훤은 경주를 점령해 왕을 죽이고 왕비를 겁탈하는 잔악한 행동을 한다. 그러곤 경순왕을 즉위시킨다. 왕건은 군사 5000을 이끌고 신라를 구원하러 내려가다 대구 팔공산인 공산동수(公山桐藪)에서 경주에서 북상하는 견훤과 전투를 벌인다. 이 전투에서 자신의 오른팔 격인 신숭겸(申崇謙)과 김락(金樂)이 전사하고, 군사 5000은 전멸한다. 왕건 혼자 겨우 살아남았을 정도로 가장 치욕스러운 일이었다. 가장 자세한 전투사실이 다음의 기록이다.
“신숭겸의 처음 이름은 능산(能山)이며, 광해주(光海州) 사람이다. 몸이 장대하고 무용이 있었다. 927년 태조가 견훤과 공산동수에서 싸웠는데, 견훤의 군사가 태조를 포위하여 매우 위급했다. 그때 신숭겸이 대장이 되어 김락과 함께 힘껏 싸우다가 전사했다. 태조는 애통하게 여겨, 장절(壯節)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 동생 신능길(申能吉), 아들 신보(申甫), 김락의 동생 김철(金鐵)에게 모두 원윤이라는 벼슬을 내렸다. 지묘사(智妙寺)라는 절을 지어 명복을 빌게 했다.”(『고려사』 권92 신숭겸 열전)
전투의 중요성에 비해 내용은 밋밋하다. 오히려 수년 전 방영된 ‘태조 왕건’이라는 TV드라마의 내용이 더 흥미진진한데, 이 전투에서 신숭겸은 태조를 탈출시킨 후 태조의 옷을 입고 장렬하게 전사했다고 한다. 허구이지만 천년 후 재생된 신판 ‘도이장가’라 할 만하다. 그렇다면 원판 ‘도이장가(悼二將歌)’를 보자. 1120년(예종15) 10월 서경(평양)에서 열린 팔관회 행사 때 예종이 행사에 등장한 신숭겸과 김락의 우상을 보고 그들의 충절을 기린 노래이다.
“님(*태조 왕건)을 온전하게 하시기 위한/ 그 정성은 하늘 끝까지 미치심이여/ 그대의 넋은 이미 가셨지만/ 일찍이 지니셨던 벼슬은 여전히 하고 싶으심이여/ 오오! 돌아보건대 두 공신의 곧고 곧은 업적은/ 오래오래 빛나리로소이다.” (양주동 박사 번역;『평산신씨 고려대(태)사 장절공 유사』 수록)
두 장수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연민의 갈채일까? 아니면 최후의 승자인 왕건을 극적으로 미화하는 노래일까? 두 장수의 충절은 고려 500년 내내 칭송되었다. 조선 중기에 편찬된 삼강행실도에도 신숭겸의 죽음은 ‘장절도(壯節圖)’란 그림으로 남아서 전한다. 그러나 이 노래에 담긴 팔공산 전투의 의미를 다르게 읽어야 한다. 왕건은 패했지만, 이 전투를 계기로 오히려 승리의 실마리를 얻게 된다는 역설이다. 이해(927년) 12월 승리에 한껏 고무된 견훤이 왕건에게 편지를 보낸다.
“지난날 신라 국상 김웅렴 등이 당신을 신라 서울로 불러들이려 했다. 이것은 마치 자라가 큰 자라의 소리에 응하며, 종달새가 새매의 날개를 부축하려는 것과 같다. 이는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리고 국토를 폐허로 만드는 일이다. 그래서 내가 선수를 써서 군사를 동원하여 신라를 정벌했다.” (『고려사』 권1 태조10년 12월조 인용)
930년 고창군 전투도 후삼국 전쟁 분수령
신라 국상 김웅렴이 왕건을 경주로 불렀다는 표현은 두 나라 동맹을 깨기 위해 견훤이 전략적으로 신라를 침입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는 작은 자라와 종달새에 불과한 고려가 큰 자라와 매인 신라의 품에 안기려 한다면서, 왕건을 조롱한다. 그러나 그 후 펼쳐진 후삼국 전쟁에서 견훤이 도리어 패망의 길로 가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팔공산 전투에서 정통왕조에 잔악한 행동을 한 견훤에게 여론의 따가운 화살이 쏟아진 것이다. 견훤은 내심 이 전투의 승리에 놀란 성주와 장군들이 두려워 그에게 붙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여론은 심상치 않았다. 그가 왕건에게 편지를 보낸 건, 자신의 신라 침공은 신라와 동맹한 왕건의 잘못 때문이라며 왕건에게 책임을 전가하기 위해서였다.
견훤은 편지의 다른 구절에서, ‘나는 원래 신라를 존중하고 의리에 충실하고, 신라에 대해 우정과 의리가 깊다’라고 한 발 물러서는 모습을 보인다. 쇠잔한 신라를 만만하게 보았지만, 현실적으로 정통왕조라는 상징성을 간과했던 것이다. 왕건은 928년 1월 견훤에게 보낸 답신에서, ‘서울(경주)을 곤경에 빠뜨리고 신라 대왕을 크게 놀라게 했다. 정의에 입각하여 신라 왕실을 높여야 하는데, 그대는 기회를 엿보아 신라를 뒤엎으려 했고, 지극히 높은 신라왕을 당신의 아들이라고 부르기를 강요했다’ (『고려사』 권1 태조 11년 1월)고 비난한다. 왕건 역시 여론을 의식해 신라를 정통왕조로 인정하고 있다. 조선 최고의 역사가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고려가 건국된 918년부터 후삼국을 통일한 936년까지 고려는 정통왕조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역사가들은 견훤의 경주 침입 3년 후인 930년 고창군(안동) 전투를 후삼국 전쟁의 분수령이라 한다. 여기서 왕건이 승리하자, 고창군 주변 30여 성은 물론 강릉에서 울산에 이르는 동해안의 110여 성의 성주와 장군들도 귀부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견훤의 신라 침략과 팔공산 전투가 후삼국 전쟁의 분수령이라고 생각된다. 통일신라의 수많은 성주와 장군들이 두 사건을 보면서 존왕(尊王)주의를 내세워 신라를 끝까지 정통왕조로 존중한 왕건에게 지지를 보냈기 때문이다. 3년 후 고창군 전투는 이런 신뢰를 확인하는 의식에 지나지 않았다. 견훤은 작은 승리에 도취돼 천하 대권을 놓치는 자충수를 두었다.
- 중앙선데이 | 박종기 국민대 교수 | 제315호 | 2013.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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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주에 출정한 왕건이 샘터에서 빨래하던 장화왕후에게 물을 얻어 마시는 장면을 형상화한 나주시 송월동의 조형물. 나주=프리랜서 오종찬. |
왕건, 변방 장수가 전쟁 영웅으로 … 궁예 이어 2인자 |
고려사의 재발견 · 태조 왕건 | ② 나주 전투
927년의 팔공산 전투가 후삼국 전쟁의 향방을 가른 육전(陸戰)의 대표적 전투라면, 나주전투는 당시 해전(海戰)의 대표였다. 903년부터 935년까지 왕건은 나주를 놓고 견훤과 치열한 공방을 벌였다. 한 지역을 두고 이렇게 긴 공방을 벌인 적이 없을 정도였다. 그만큼 나주는 후삼국 전쟁의 전략적 거점이었다.
고려 건국 이전 왕건의 행적을 기록한 『고려사』 가운데 ‘태조 총서’의 대부분은 나주전투로 장식돼 있다. 하이라이트는 왕건이 고려국을 건국하기 8년 전인 910년의 전투다. ‘태조 총서’에 기록된 당시 전투상황은 다음과 같다..
“(왕건의 군사가) 나주 포구에 이르자 견훤이 직접 군사를 인솔하고 전함을 벌려 놓았다. 목포에서 덕진포(德眞浦: 지금의 영암 해안)에 이르기까지 육지와 바다의 앞뒤 좌우로 배치된 군대의 위세가 대단했다. 여러 장수들이 두려워하자, 왕건은 ‘근심할 것 없다. 싸움에 이기는 것은 마음을 합하는 데 있지, 숫자가 많은 데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군사를 내어 급히 공격하자, 적의 군함이 뒤로 물러났다. 이때 바람을 이용해 불을 지르자(乘風縱火), 불에 타고 물에 빠져 죽는 자가 태반이었다. 500여 명의 머리를 베거나 사로잡자, 견훤은 조그마한 배를 타고 도망쳤다. (생략) 견훤의 정예군을 꺾으니, 여러 사람의 마음이 다 안정되었다. 이에 삼한의 땅을 궁예가 태반이나 차지하였다.”
910년 견훤은 보병과 기병 3000명으로 903년에 빼앗긴 나주를 탈환하기 위해 10여 일간 포위한다. 견훤의 반격을 당한 궁예는 왕건에게 정주(貞州: 개성 풍덕)에서 전함을 수리한 후 2500명 군사로 공격하게 한다. 왕건은 먼저 배후인 진도와 고이도 (皐夷島: 신안 高耳島)를 공격해 나주를 고립시킨 후, 견훤의 군사와 전투를 벌였다. 이게 위의 기록이다. 이어 왕건은 견훤의 잔당으로 해전에 능하여 ‘수달’로 불린 능창(能昌)을 사로잡아, 나주해전을 승리로 이끈다. 910년에 시작된 전투는 2년 만인 912년에 끝났다.(『삼국사기』권 50 견훤 열전) 나주전투는 이같이 견훤과 궁예의 대리인이 자웅(雌雄)을 겨룬 전투로서, 승리를 거둔 궁예의 태봉국이 견훤의 후백제국을 압도하는 국면을 만들었다.
고려 개방정책을 잉태하다
이 전투의 지휘자 왕건은 단숨에 전쟁 영웅으로 떠올랐다. 이전까지 그는 궁예 휘하의 변방 장수에 불과했다. 나주전투 승리 당시 왕건은 36세였다. 왕건보다 10년 위인 견훤(867∼936년)은 26세 때인 892년 이미 무진주(광주)를 점령한 후 후백제의 군주를 자처했다. 더욱이 나주전투 때 견훤은 후백제 군주였다. 왕건은 당시까지만 해도 견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미약한 존재였다. 왕건은 27세 때인 903년(궁예 재위 3년) 수군을 이끌고 금성군(錦城郡)을 정벌하고 주변의 10여 군현을 빼앗은 뒤 금성을 지금의 이름인 나주로 바꿨다. 견훤과의 첫 전투였다. 견훤이 다시 나주를 장악하자, 910년 궁예는 왕건을 해군대장군으로 임명하여 견훤에게 대대적인 반격을 가해 승리한다. 변방의 장수 왕건은 이를 계기로 태봉국의 2인자인 시중으로 승진하고, 마침내 궁예를 몰아낸 뒤 고려국을 건설한다. 반면에 후백제의 견훤은 근거지 나주를 점령당해, 내륙으로 진출하기 앞서 뒷문 단속부터 해야 했다. 근거지 나주의 상실은 견훤의 천하통일에 큰 걸림돌이 되었다.후삼국 최대 해전 나주전투의 실리는 결국 전투의 종결자 왕건의 몫이 되었다. 나주는 견훤에겐 기억하기조차 싫은 곳이지만, 왕건에겐 천하대권을 꿈꾸게 한 꿈의 무대가 되었다. 뒷날 견훤이 아들 신검에게 쫓겨 선택한 첫 망명지가 나주란 사실은 예사롭지 않다. 대체 나주는 어떤 가치를 지닌 곳일까?
| | | 1 신안선 모형도. 2 보존 처리 중인 신안선 구조물 | |
『삼국지』에서 제갈량은 적벽대전에서 7일간 기도 끝에 불어 온 동남풍을 이용해 조조의 군사를 대파해 유비의 촉나라를 건국하는 결정적인 공을 세운다. 2000년에 방영된 TV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드라마 작가는 왕건의 군사가 ‘바람을 이용해 (견훤의 배에) 불을 질렀다(乘風縱火)’는 ‘태조 총서’의 기록에 착안해 왕건의 책사 태평(泰評)이란 자가 동남풍을 이용해 승리를 이끌었다고 극화했다. 역사의 진실을 외면한 통속 드라마의 한계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승리의 일등공신은 물론 왕건이지만, 그 뒤에는 또 다른 숨은 공신이 있다. 1976년 전남 신안 앞바다에 원나라 선적의 ‘신안선’이 발굴되었다. 중국에서 일본으로 보내는 도자기 등 수많은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최근 발굴이 시작된 고려 선박 ‘마도선’까지 중국과 고려 선박 16척이 산동반도와 한반도 서해안에서 출토, 발굴됐다. 특히 2005년 중국 산동성 봉래시에서 발굴된 2척의 선박은 고려의 원양 항해용 선박이다. 고려 당시 서해안 일대에 성행했던 해상교류의 모습을 뒷받침해 주는 증거다. 고려는 어느 왕조보다 해상교류가 활발했던 왕조다. 당시 해상교류는 황해(서해)를 중심으로 중국대륙-한반도-일본열도를 축으로 이뤄졌는데, 어떤 학자는 황해를 ‘동아시아 지중해’라고 부르기도 한다. 나주는 일본과 중국으로 연결되는 황해 해상물류의 거점지역이자, 동아시아 해상실크로드의 길목에 위치해 있다. 나주전투는 황해의 제해권을 확보하는 해상의 경제 전쟁이었다. 세 영웅이 사활을 건 것은 이 때문이다.
바다상인(海商)의 후예, 왕건
왕건의 집안은 대대로 개성에 근거를 두고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바다상인(海商) 출신이다. 이러한 집안 내력을 알아야 왕건이 승리한 배경을 이해할 수 있다. 그의 조상들이 바다상인으로서 축적한 자본과 인맥이 전투의 승리, 나아가 고려 건국의 밑천이 됐다. 왕건의 집안과 해상 교역을 통해 오랫동안 유대를 맺어온 서해안 일대 해상세력은 왕건이 나주로 출정할 때 적지 않은 도움을 줬다. 즉 같은 해상세력이라는 친연성이 왕건의 군사와 연대감을 갖게 했던 것이다. 왕건은 그들의 협조를 얻어 황해의 제해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왕건은 각 지역의 유력한 세력과 혼인을 통해 동맹을 맺고, 그들의 군사·경제적 지원을 받아 전쟁을 치러 나갔다. 그러다 보니 부인이 29명이나 되었다. 뒷날 분란을 염려해 그는 부인의 서열을 매겨, 제1비에서 6비까지가 낳은 소생자에게 왕위 계승권을 부여했다. 제1비는 정주(貞州: 지금의 개풍군) 출신의 신혜(神惠)왕후이며, 제2비는 나주 출신의 장화(莊和)왕후다. 1비 사이에 소생이 없어, 2비 소생인 혜종이 왕건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를 정도로 부인의 서열은 매우 중요하다. 주목되는 것은 서열이 가장 높은 두 부인이 모두 서남해 해상세력의 딸로서, 나주전투를 전후해 왕건과 혼인했다는 사실이다.
첫째 부인의 아버지는 정주 출신의 유천궁(柳天弓)이다. 정주는 예성강·임진강·한강이 합류하고, 강화도를 마주하는 황해 중부 해상 교역로의 중심지다. 왕건의 근거지 개경과 인접해 있다. 유천궁은 이곳을 근거지로 한 해상세력이다. 왕건은 909년과 914년 각각 2500명과 2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정주에서 출발하여 나주로 향한다. 914년 70여 척의 군함을 이곳에서 수리한다. 당시 정주는 왕건이 거느린 해군의 발진기지였다. 유천궁은 왕건의 군사에게 식량을 제공할 정도로 왕건의 든든한 후원자였다. “왕건이 궁예를 섬겨 장군이 되어 군사를 거느리고 정주를 지나다가 버드나무 고목 밑에서 말을 휴식시키는데, 왕후가 길가 냇가에 있었다. 왕건은 그녀가 덕을 갖춘 모습을 보고, 이 집에 유숙했다. 천궁은 자기 집에서 모든 군사를 풍족하게 먹이고, 딸에게 태조를 모시게 했다. 왕건은 그녀를 부인으로 삼았다” (『고려사』 권 88 ‘태조 후비 신혜왕후 열전’).
918년 홍유·배현경·신숭겸 등이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려 할 때 신혜왕후는 머뭇거리는 왕건에게 갑옷을 입히고 궁예를 몰아내게 한 내조의 여인이다. 한편 제2비(장화왕후)는 서남해의 거점지역인 나주 해상세력 오다련(吳多憐)의 딸이다. “왕후는 일찍이 (나주)포구에서 용이 배 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꿨다. 얼마 후 왕건이 수군장군으로 나주에 출진하여 배 속에 머물러 있었는데, 시냇가 위에 오색구름의 기운이 있어 그곳으로 가 보았다. 왕후가 빨래를 하고 있었다. 왕건이 그녀를 불러 잠자리를 함께했다. 뒤에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혜종이다”(『고려사』 권 88 ‘태조 후비 장화왕후 열전’). 꿈속에서 용이 배 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꾼 장화왕후가 뒤에 왕건과 결합한 사실은 곧 나주 해상세력 오다련과 왕건이 연맹을 맺은 사실을 상징한다. 이같이 해상세력의 딸들이 왕건의 부인으로 가장 높은 서열의 제 1비와 2비가 된 계기는 나주전투였다. 나주전투 승리는 왕건과 혼인을 통해 동맹을 맺은 서남해 해상세력의 협조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그들은 나주전투의 또 다른 숨은 공로자였다.
조선 최고 상인 宋商의 등장에 기여
이외에도 혜성군(慧城郡: 지금의 당진) 출신의 박술희(朴述熙)와 복지겸(卜智謙)도 해상세력 출신이다. 복지겸은 궁예가 횡포하여 민심을 잃자, 배현경 · 신숭겸 · 홍유 등과 함께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추대, 고려를 세운 공신이다. 박술희는 936년 후백제 신검군과의 마지막 전투에 참여하여 큰 공을 세웠다. 943년 왕건이 죽을 때, 그에게 군국대사를 맡기고 훈요십조를 전했다. 그는 왕건의 최측근이자 뒤이어 즉위한 왕건의 맏이 혜종의 후견인이다.
고려왕조는 어느 왕조보다 대외무역을 적극적으로 장려하고, 선진문물을 수용하는 데 적극적인 개방정책을 추구했다. 이는 상업과 해상무역을 통해 길러진 바다상인 특유의 개방성을 지닌 왕건 집안의 내력에다, 나주전투를 비롯한 왕건의 정벌사업에 협조했던 해상세력의 존재와 관련이 있다. 상업과 무역의 장려, 적극적인 선진문물의 수용 등 고려 개방정책의 전통이 남아 있던 개성에서 뒷날 조선 최고의 상인집단인 송상(松商)이 등장한다. 우연한 일은 아닐 것이다. 왕건은 나주전투를 통해 천하 평정의 꿈을 잉태할 수 있었고, 해상세력의 협조를 얻으면서 개방정책이라는 천하 경영의 싹을 심을 수 있었다.
- 중앙선데이 | 박종기 국민대 교수 | 제316호 | 2013.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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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라 말 고려(후고구려)를 건국한 궁예(?∼918)가 904년 국호를 마진(摩震)이라 고치고 그해 7월에 수도를 철원으로 옮기면서 도성으로 삼았던 궁터. |
이상주의 군주 궁예, ‘실사구시’ 왕건에 무너지다 |
고려사의 재발견 · 태조 왕건 | ③ 왕건과 궁예
고려 중기 문장가 이규보는 서사시 『동명왕편』에서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을 영웅 군주의 모습으로 그려내고 있다. 후삼국시대에도 주몽에 버금가는 영웅들이 역사의 무대를 빛냈다. 궁예, 견훤, 왕건이 그들이다. 그러나 후세의 역사가들은 궁예와 견훤을 선악의 도덕적 잣대로 평가해 영웅적인 면모를 잃게 했다.
“신라는 그 운이 다하여 도의가 땅에 떨어지자, 온갖 도적들이 고슴도치의 털과 같이 일어났다. 심한 자가 궁예와 견훤 두 사람이다. 궁예는 신라 왕자이면서 신라를 원수로 여겨 반란을 일으켰다. 견훤은 신라 백성으로 신라의 녹을 먹으면서 모반의 마음을 품고 수도 경주를 공격해 임금과 신하 베기를 짐승 죽이듯 풀 베듯 했다. 두 사람은 천하의 극악한 사람이다. 궁예는 신하에게 버림받았고 견훤은 아들에게 화를 입었다. 모두 스스로 자초한 짓이다. (생략) 흉악한 두 사람이 어찌 왕건에 항거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왕건을 위해 백성을 몰아다준 사람에 불과했다.”(『삼국사기』권50 견훤 열전)
1145년 김부식이 세 영웅을 평가한 내용이다. 뒷날 대부분의 역사서가 베껴 쓸 정도로 김부식의 평가는 모범 답안이 되었다. 아무리 역사가 승자(왕건)의 기록이라지만 지나친 편견이다.
오다 ㆍ 도요토미 ㆍ 도쿠가와에 비유
혹자는 이 세 영웅을 일본 전국시대 영웅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1534~1582),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1536~1598),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1543~1616)와 비교하기도 한다. 최후 승자는 도쿠가와지만, 일본인들은 오다나 도요토미를 도덕의 잣대로 일방적으로 폄하하지 않는다. 즉 ‘오다가 떡쌀을 찧고, 도요토미가 반죽을 한 천하를 힘 안 들이고 먹은 사람이 도쿠가와’라고 평가한다. 이에 비춰보면 견훤은 오다, 궁예는 도요토미, 왕건은 도쿠가와에 각각 비유할 수 있다.(이재범 『슬픈 궁예』)
필자는 도덕의 잣대를 거두고, 왕건의 쿠데타로 비극적 최후를 맞은 패자(敗者) 궁예의 진면목을 새로운 시각에서 보려 한다.
918년 6월 왕건은 궁예를 제거하고 왕위에 오르면서 곧바로 즉위 조서를 반포한다. 그 첫머리에 전왕 궁예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다.
“전왕은 사방이 무너질 때 도적을 없애고, 점차 영토를 확대해 나갔다. 그러나 나라를 통합하기 전에 폭정과 간사함, 협박으로 세금을 무겁게 하여 백성은 줄어들고 국토는 황폐해졌다. 도를 넘는 궁궐 공사로 원망과 비난이 일어났다. 연호를 훔쳐 왕이라 칭했다. 부인과 자식을 죽여 천지가 용서하지 않았고, 귀신과 사람의 원망을 함께 받아 왕조가 무너졌으니, 경계할 일이다.”(『고려사』권1 태조 1년 6월)
왕건에게 찾아가 쿠데타를 권유한 심복들도 왕건과 같은 진단을 내린다. 왕건의 심복인 홍유·배현경·신숭겸·복지겸은 “삼한이 분열하여 도둑 떼가 다투어 일어나자 지금 왕(궁예)이 그들을 무찌르고 한반도의 땅을 3분하여, 그 반을 차지하여 나라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2기(二紀·24년)가 넘었으나 통일을 못한 채, 처자식을 죽이고 신하를 죽이는 잔학한 짓으로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습니다” (『고려사』권92 홍유 열전)라면서 궁예를 제거할 것을 권유했다. 궁예 폐위의 이유로 통일의 대의명분을 저버린 점을 든 건 주목할 대목이다. 도덕의 잣대로 궁예를 비판한 김부식의 평가와는 다르다. 궁예는 18년간 왕으로 재위했는데, 24년이 지나도록 삼한 통일을 이루지 못했다는 말은 무슨 얘기인가? 쿠데타 당시를 기준으로 24년 전은 894년이다. 궁예는 양길 휘하에서 영월 울진을 점령(942년)한 데 이어, 894년 명주(강릉)를 점령한다. 궁예는 이때 자신을 따른 군사가 3500명에 달하자 스스로 장군이라 칭하며 독립 세력이 되었다. 세달사(世達寺·강원 영월) 소속 승려 신분을 벗어던지고 죽주(안성 죽산) 호족 기훤 (箕萱)의 휘하로 들어간 지 3년 만에 영웅으로 등장한 것이다. 그러니까 홍유·배현경 등의 비판은 궁예가 이 시점을 기준으로 24년이 지나도록 통일을 이루지 못했다는 주장인 셈이다. 896년 궁예는 개성 왕건 부자의 귀순을 받아들이고, 철원을 도읍지로 삼아 사실상 왕조를 건국한다. 삼한 통합을 공언한 건 이 무렵으로 보인다. 901년 고려를 건국한 궁예의 즉위 일성(一聲)은 의미심장하다.
“지난날 신라가 당나라에 군사를 청하여 고구려를 멸하여, 평양의 옛 도읍이 무성한 잡초로 덮였다. 나는 반드시 그 원수를 갚겠다.”(『삼국사기』권50 궁예 열전)
궁예, 고려 ㆍ 마진 ㆍ 태봉으로 국호 개명
궁예는 옛 고구려의 역사와 영광을 회복하고 계승하는 삼한 통합을 천명하여 정통 왕조 신라에 도전장을 던졌다. 신라 헌안왕(혹은 경문왕)의 아들이라는 왕족의 핏줄은 그의 성장에 어떤 도움도 되지 않았다. “왕이 궁중의 사람을 시켜 궁예를 죽이게 하였다. 포대기에 싸인 어린 궁예를 처마 아래로 던졌는데, 유모가 몰래 받다가 실수하여 손가락으로 눈을 찔러 한쪽 눈이 멀었다. 궁예를 안고 도망가서 힘들고 고생스럽게 길렀다. 10여 세 되어도 놀기만 하자, 유모가 나무랐다. 궁예가 울면서 ‘그렇다면 어머니를 떠나 걱정을 끼쳐드리지 않겠습니다’하고, 세달사로 가서 중이 되었다.” (『삼국사기』권50 궁예 열전)
왕족으로 태어난 이유로 궁예는 죽을 고비를 맞았고, 겨우 왕궁을 탈출하여 유모의 손에서 성장했다. 그런 고난이 자신의 뿌리인 신라 왕실을 부정하고 새 국가를 건설하는 영웅의 자질을 기를 수 있게 했다. 바다 상인의 후예로 풍요롭게 성장했고,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궁예에게 의탁한 왕건과는 다른 헝그리 정신이 궁예의 원동력이 된 것이다. 그의 국가 경영 의지는 국호에 잘 나타나 있다. 901년 건국 후 918년 왕건에게 쫓겨나기까지 궁예는 국호를 고려(901년), 마진(摩震, 904년), 태봉(泰封, 911년)으로 세 번이나 바꾼다. 18년짜리 나라에서 국호가 이렇게 바뀐 예는 이례적이다.
| | | 철원군 동송읍 관우리에 위치한 사찰 도피안사에 안치된 철조 비로자나불좌상 | |
궁예의 미륵불, 혁명적 변화 염원 반영
첫 번째 국호 고려는 고구려와 같은 뜻이다. 6세기 무렵 이미 중국에서는 고구려를 고려라 불렀다. 고구려의 역사와 영토를 계승하겠다는 궁예의 취임 일성이 고려라는 국호를 제정한 것이다. 건국 당시 궁예가 지배한 지역은 지금의 강원도와 송악(개성)·강화·김포·양주(서울)·충주·패강진 등 대부분 옛 고구려의 영토였다. 이 지역을 기반으로 국가를 건국했기 때문에 이곳 세력의 호응을 얻기 위해 국호를 그렇게 정했던 것이다.
두 번째 국호 마진(摩震)은 범어 ‘마하진단(摩河震旦)’의 약칭이다. 마하는 ‘크다’, 진단은 동방을 뜻하여, 마진은 ‘대동방국’의 뜻이다. (이병도, 『진단변(震檀辨)』) 궁예는 904년 국호를 마진으로 바꾸면서, 도읍을 송악에서 다시 철원으로 옮기고 청주의 1000호를 이주시킨다. 공주의 호족 홍기도 이때 궁예에게 의탁한다. 그 1년 전인 903년, 궁예는 왕건을 통해 후백제의 근거지 나주를 점령한다. 청주 · 공주 · 나주는 옛 백제의 전통이 남아 있는 친백제 성향 도시다. 또 상주와 경북 북부 등 신라의 영토를 확보한다. 그러면서 특정 국가를 계승하는 통일 정책을 버리고 고구려·신라·백제를 아우르는 ‘대동방국’ 건설이란 새로운 통일 정책으로 전환한다. 국호 마진에는 그런 상징성이 담겨 있다.
세 번째 국호 태봉(泰封)의 ‘태’는 천지가 어울려 만물을 낳고 상하가 어울려 그 뜻을 같이한다는 뜻이다. ‘봉’은 봉토, 즉 영토다.(이병도, 『삼국사기 역주』) 즉 ‘태봉’은 서로 뜻을 같이해 화합하는 세상이라는 뜻이다. 고구려 · 신라 · 백제를 아울러 조화를 이룬 통일 국가를 건설하려는 궁예의 이상이 담겨 있다.
궁예는 어려서부터 하층민으로서 세파를 겪으면서 성장했다. 난세의 하층민은 천지개벽의 혁명적 변화를 갈구한다. 현세를 말세로 인식하고 새 세계의 도래를 갈구하는 의식 속에서 그러한 혁명적 변화를 꿈꾸게 된다.
궁예의 근거지 철원에 도피안사라는 사찰이 있다. 이곳에 865년 제작된 금박을 입힌 쇠로 만든 비로자나불이 있다. 이 불상 뒷면에 새겨진 글 속에, 석가불 입적 후 천년이 지나면 말세가 오는 것을 슬퍼하며 이를 구제할 미륵불의 도래를 염원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궁예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기 약 1세대 전이다. 궁예가 이곳 철원을 도읍지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염원을 갈구한 이 지역 하층민의 열렬한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궁예가 미륵불로 자처한 것은 우연은 아닐 것이다.
“궁예는 미륵불을 자칭하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몸에 가사를 입었다. 큰아들을 청광보살, 막내아들을 신광보살로 삼아, 외출할 때 항상 흰 말을 탔는데 말갈기와 꼬리를 고운 비단으로 장식했다. 소년·소녀에게 깃발, 일산과 향내 나는 꽃을 들고 앞에서 인도하게 했다. 승려 200여 명을 시켜 범패를 부르며 뒤를 따르게 하였다.”(『삼국사기』권50 궁예 열전)
하층민의 염원을 알던 궁예는 미륵불로 자처하면서, 미륵의 이상향 용화세계를 태봉이라는 국호에 담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이상에 불과했다. 고구려 계승의식을 지지한 송악의 왕건을 비롯한 옛 고구려 지역 출신 현실주의자의 반발은 필연적이었다. 궁예는 그로 인해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다. 이상주의 군주였던 궁예의 꿈은 현실의 기득권 연합세력에 산산조각 났다. “통일을 완성하지 못한 채 폭정과 인륜을 저버렸다”는 평가는 현실주의자들의 매서운 반격을 담은 선고였다.
- 중앙선데이 | 박종기 국민대 교수 | 제317호 | 2013.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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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936년 견훤이 숨진 뒤 왕건이 그의 무덤 가까운 곳에 세운 개태사(開泰寺·충남 논산시 연산면 소재)의 전경. 한을 품고 숨진 견훤의 영혼을 달래려는 왕건의 뜻이 담긴 사찰이다. |
‘삼한 통합’ 기치 내건 견훤, 人和 실패로 스러지다 |
고려사의 재발견 · 태조 왕건 | ④ 견훤의 귀순
“늙은 제가 전하에게 몸을 의탁한 것은 전하의 위엄을 빌려 반역한 자식의 목을 베기 위한 것입니다. 전하께서 신령한 군사를 빌려주어 난신적자를 없애주신다면 저는 죽어도 유감이 없을 것입니다.”(『삼국사기』권50, 견훤 열전)
견훤은 고려 귀순 1년 뒤인 936년(태조19) 6월, 왕건에게 자신의 왕위를 찬탈한 아들 이자 후백제의 왕인 신검(神劒)을 토벌해달라고 요청한다. 수십 년간 자웅을 겨뤄왔던 라이벌 왕건의 무릎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아들을 죽여달라는 아비 견훤의 심정은 어땠을까.
견훤은 9년 전인 927년 팔공산 전투에서 왕건에게 치욕의 패배를 안기면서 “그대는 아직도 내가 탄 말의 머리도 보지 못했고, 나의 털 하나 뽑아보지 못했다. (생략) 이제 강약이 분명하니 승부는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네” (『고려사』권1, 태조 10년(927) 12월)라고 왕건을 조롱했다. 그랬던 그가 어떻게 10년도 지나지 않아 이런 처지로 뒤바뀌었을까.
935년(태조18) 3월 견훤의 첫째 아들 신검은 넷째 아들 금강(金剛)에게 왕위를 물려주려던 견훤에게 반발해 동생 양검(良劍) · 용검(龍劍)과 난을 일으킨다. 신검은 금강을 죽이고 아버지 견훤을 금산사(지금의 김제)에 유폐한 뒤 왕위를 찬탈 한다. 권력은 부자 사이도 갈라서게 한다는 옛말은 이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한마디로 후백제의 자중지란(自中之亂)이었다.
왕건, 견훤을 영웅으로 극진히 대접
| | | 충남 논산시 연무읍 금곡리에 있는 견훤의 무덤. [사진 박종기] | |
견훤은 왕건에게 귀부하기 직전, “내가 후백제를 세운 지 여러 해가 되었다. 나의 군사는 북군(北軍)인 고려군보다 갑절이나 많은데도 이기지 못하니, 아마 하늘이 고려를 돕는 것 같다”(『삼국유사』견훤 열전)라고 했다. 후백제의 자중지란은 고려군보다 두 배나 강한 남군(南軍·후백제군)의 군사력을 무력한 존재로 만들어 버렸다. 역사의 경고는 이렇게도 무섭다.
졸지에 왕위를 빼앗기고 유폐된 견훤은 석 달 뒤인 935년 6월 처자식을 데리고 금산사를 탈출, 나주로 도망해 고려에 망명을 요청한다. 나주는 견훤이 오랫동안 왕건과 치열하게 싸웠던 전략 요충지였는데 그곳이 자신의 피난처가 될 줄이야. 왕건은 도망 나온 10년 연상의 견훤을 ‘상부(尙父)’라 존대하면서, 최고의 관직과 함께 남쪽 궁궐(南宮)을 거처로 제공했다. 또 양주(楊州:서울)를 식읍으로 줘 그곳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생활하게 했다(고려사』권2 태조18년 6월조). 지난날 자신에게 엄청난 수모와 치욕을 안긴 적장을 왕건은 영웅으로 극진하게 예우했다. 영웅만이 영웅을 제대로 알고 대접하는 것일까.
견훤이 귀순한 지 5개월 뒤인 그해 11월, 신라 경순왕은 직접 개경에 와 신라의 항복을 받아달라고 청한다. 머뭇거리던 왕건은 “하늘에 두 태양이 없고, 땅에 두 임금이 없다”고 신하들이 간하자, 그해 12월 항복을 받아들인다. 반란 왕조였던 고려는 비로소 한반도의 정통 왕조가 된다. 이듬해(936년) 2월, 신검의 매형이자 견훤의 사위인 장군 박영규(朴英規)도 고려에 귀순한다. 박영규는 지금의 순천에 근거지를 뒀던 서남해 해상세력의 대표주자이자, 후백제 해군 주력부대의 사령관 격이었다. 귀순의 도미노 현상이라 할까.
아비를 내쫓고 동생을 죽인 후백제의 정변과 견훤 · 경순왕의 귀순은 권력을 잡은 지 1년도 되지 않은 후백제왕 신검을 고립무원의 처지에 빠뜨리고, 군사강국 후백제의 종말을 재촉하는 신호탄이 되었다. 반세기 동안 끌어온 후삼국 전쟁의 승부추가 고려로 기울어지는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이다.
신라 국왕과 사위의 귀순에 고무된 것일까. 견훤은 귀순한 지 1년 만인 936년 6월, 글의 첫머리에 적은 대로, 아들을 처단해달라고 왕건에게 간청한다. 같은 달 왕건은 마침내 출정 명령을 내린다. 태자 무(武:혜종)와 장군 박술희가 이끄는 군사 1만 명을 천안에 보내 전쟁을 준비케 한다. 영남과 호남의 갈림길에 위치한 천안은 공주를 거쳐 후백제 수도 전주를 바로 공격할 수 있는 길목이다. 하지만 석 달 뒤인 9월 견훤과 함께 개경을 떠나 천안에 도착한 왕건은 예상과 달리 추풍령을 넘어 일리천(一利川)으로 우회해 후백제군을 공격하는, 성동격서(聲東擊西)식 기만전술을 택했다.
고려와 후백제의 최후 결전지가 된 일리천은 구미시 해평면 낙산리 원촌마을 앞을 흐르는 낙동강 일대다. 왕건은 왜 이곳을 공격했을까. 왕건은 이곳에서 항복한 신라군을 고려군으로 보강하고, 낙동강 물길로 병력과 물자를 신속히 이동시켜 후백제의 측면과 후방을 치려 했다. 동시에 신검의 군대가 전세를 역전시키기 위해 낙동강을 통해 기습적으로 신라 지역을 점령하는 걸 막으려는 목적도 있었다. 당시 해로와 수로는 오늘의 철도나 고속도로와 같은, 사람과 물류 이동의 중심 루트였다. 왕건이 8만7500명이란 대규모 군대를 동원할 수 있었던 것도 낙동강을 확보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수전(水戰)에 일가견을 지닌 왕건에게 낙동강은 대규모 병력의 신속한 이동을 통해 신라로 진격하려는 후백제군을 견제하고, 그 후방을 기습할 수 있는 전술적 가치를 지녔던 것이다. 이런 기습전이 성공하면서 전세는 일찌감치 왕건 쪽으로 기울어졌다.
“(고려군이) 북을 울리며 앞으로 나아가자, 문득 칼과 창 모양의 흰 구름이 고려군의 상공에서 일어나더니 적진을 향해 날아갔다. (후)백제 장군들은 병세가 크게 성함을 보고, 갑옷을 벗고 창을 던지며 견훤의 말 앞에 항복해왔다.” (『고려사』권2 태조 19년(936) 9월조)
고려 · 후백제 최후 결전, 일리천 전투
하늘을 찌를 듯한 고려군의 사기와, 위축돼 싸우기를 포기한 후백제군의 모습을 사서는 위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후백제의 내분과 견훤의 귀순, 신라의 항복으로 사기가 크게 꺾인 신검의 후백제군은 팔다리가 묶인 채 싸움판에 끌려 나온 형국이었다. 이 전투에서 고려군은 후백제군 3200여 명을 사로잡고, 5700여 명의 목을 베었다. 당황한 신검의 군사들은 창을 거꾸로 돌려 자신들끼리 서로 찔렀다고 한다. 싸움의 승패는 이 일리천 전투에서 결정 났다.
왕건은 대장군 공훤(公萱)에게 명해 신검이 지휘하던 후백제 중군을 공격하게 했고, 남은 고려군 3개 집단이 뒤를 따랐다. 고려군은 도주하는 후백제군을 쫓아 황산군(黃山郡:논산)에 이르렀고, 다시 탄령(炭嶺:완주군 고산면)을 넘어 마성(馬城:완주군 운주면 금당리)까지 진격했다. 이곳에서 신검은 동생·문무백관들과 함께 고려군에 항복한다. 왕건은 신검의 동생 양검과 용검은 귀양을 보냈다가 죽이지만, 신검은 관작을 내리며 살려준다. 고려엔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원악(元惡:악의 우두머리)이었지만, 적국의 국왕에 대한 예우 때문일까. 이 때문에 견훤은 근심과 번민으로 등창이 나 며칠 만에 황산군에서 죽었다.
왕건은 이해 12월 견훤의 무덤에서 가까운 곳에 개태사(開泰寺:논산시 연산면)란 사찰을 창건하고 직접 법회를 연 뒤 다음과 같은 글을 짓는다.
“병신년(936년) 가을 9월에 숭선성(崇善城:일리천 부근)에서 백제 군사와 진을 치고, 한 번 부르짖으니 흉악하고 미친 무리가 와해되었다. 두 번째 북소리에 반역의 무리들이 얼음 녹듯 사라져 개선과 환희의 노래가 하늘과 땅을 울렸다. (생략) 들판의 도적과 산골의 흉도들이 죄과를 뉘우쳐 새 사람이 되겠다고 귀순해 왔다. 나는 간사하고 악한 자를 제거하여, 기울어진 것을 일으키고 털끝 하나 풀 한 포기 다치게 하지 않았다. 이에 부처님과 산신령님의 도움에 보답하기 위해 관리들에게 사원을 창건하게 했다. 절의 이름을 개태사라 한다. 원컨대 부처님의 위엄과 하느님의 힘으로 나라를 붙들어 주십시오.”(『신증동국여지승람』권18 연산현 불우(佛宇) 개태사)
견훤, 장남 살려두자 화병으로 사망?
개태사는 고려의 전승을 기념한 사찰이자, 전쟁에 쓰러진 원혼을 달래려는 사찰이다. 또한 아들의 죽음을 보지 못한 채 원한을 안고 죽은 견훤의 영혼을 달래려는 것도 개태사 건립에 담긴 뜻이었을 것이다. 왕건은 개태사를 지어 견훤을 최후까지 영웅으로 배려하려 했다.
『삼국사기』 편찬자는 견훤이 서남해안(전라·충청)에서 전공을 세워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게 된 건 늘 창을 베개 삼아 적과 싸운, ‘침과대적(枕戈待敵)’의 자질 때문이었다고 평가했다. 또한 백제는 삼한의 정통 마한국을 계승한 정통 국가인데, 당나라 때문에 망한 억울함을 씻기 위해 후백제를 건국한다는 분명한 역사의식을 견훤은 지녔다 (이상 『삼국사기』권50 견훤 열전). 견훤은 한평생 바람에 빗질하고 빗물에 몸을 씻는 ‘즐풍목우(櫛風沐雨)’의 거친 야전을 누빈 왕건과 다를 바 없는 훌륭한 자질을 지닌 영웅이었다. 『궁예가 삼한 통합의 판세를 키워 모두에 삼한 통합의 꿈을 갖게 한 영웅 군주였다면, 왕건은 일리천 전투의 승리로 마침내 삼한 통합의 꿈을 실현한 영웅 군주였다. 그렇다면 견훤은 어떤 군주였을까? 견훤은 당시 아무도 꿈꾸지 못했던 삼한 통합이라는 희망의 깃발을 맨 먼저 세운 영웅 군주였다. 그로 인해 궁예와 왕건은 영웅 군주의 꿈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견훤은 고려군보다 두 배나 강한 군사력과 전술만 믿었지, 나라 안에서 흙벽 무너지는 무서움(土崩), 즉 아들이 아비를 내쫓는 자중지란의 무서움을 깨닫지 못했다. 맹자는 “천시(天時)는 지리(地利)만 못하고, 지리는 인화(人和)만 못하다”면서 그 까닭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3리 둘레의 성과 7리 둘레의 바깥 성을 포위하여, 가장 적절한 때인 천시를 택해 공격해도 이기지 못하는 것은 천시가 지리만 못하다는 증거다. 성이 높고, 성을 에워싼 못이 깊고, 무기가 강하고, 곡식이 많은데도 성을 버리고 도망치는 일이 있다. 이것은 지리가 인화만 못한 증거다.”(『맹자』공손추 하) 즉, 전쟁에서 승패의 요처는 인화라는 것이다. 안으로 무너지는 흙벽을 단단하게 하는 인화(人和)가 지리와 천시를 뛰어넘는다는 사실을 견훤은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 중앙선데이 | 박종기 국민대 교수 | 제318호 | 2013.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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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문화체육관광부가 제작한 왕건 초상. 야성적이면서도 예민한 기운이 감도는 인물로 표현돼 있다. |
송나라 사신 서긍 “왕씨 선조는 고구려의 대족” |
고려사의 재발견 · 태조 왕건 | ⑤ 왕조의 뿌리
중국 지린(吉林)성 지안(集安)에서 발굴된 ‘지안고구려비’ 의 진위 여부를 놓고 지난 4월 13일 한국고대사학회가 주최한 학술회의는 비를 발견해 분석한 중국학자까지 참석했지만 아무 결론을 얻지 못한 채 끝났다 (중앙일보 4월 15일자 ‘고구려비 논란만 더 키웠다’ 기사 참조).
지난해 7월 발견됐던 비문은 아직도 공개되지 않아, 위작설까지 나오고 있다. 공개되지 않은 비문을 분석한 중국의 보고서에 매달려 진행된 학술회의를 지켜보면서, 동북공정의 악몽이 다시 새 모습으로 등장하지 않을까 염려된다. 심지어 고려 왕조가 한반도에 중국인의 후예가 세운 중국의 세 번째 지방정권이라는 2007년 중국 측의 주장을 새삼 떠올리게 된다. 쇠붙이조차 삼켜버리는 ‘불가사리’ 같은 동북공정이 고려 역사에까지 촉수를 뻗치고 있는 것이다. 그 주장의 내용과 근거를 살펴보는 것도 고려사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930년 후백제와의 고창(지금의 안동)전투에서 승리하여 크게 사기가 오른 고려는 정권의 정통성을 다지기 위해 932년(태조15) 중국 후당(後唐:923~936년)에 사신을 보낸다. 그에 대한 대답으로 후당은 이듬해 3월 사신 왕경(王瓊)과 양소업(楊昭業)을 보내, 왕건을 고려국왕으로 책봉하는 조서를 보낸다. 『고려사』에는 왕건 및 처 유씨(柳氏)의 책봉조서, 책봉과 함께 물품을 보낸다는 조서, 3군의 군사에게 국왕 책봉을 알리는 조서 등 모두 4통의 조서가 실려 있어(권2 태조 16년(933) 3월조 참고), 그런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 | | 고려왕실의 족보인 『성원록』. [건국대 김기덕 교수] | |
中 학자 “중국이 한반도에 세운 세 번째 정권”
중국 학자들이 주목한 것은 후비 유씨(柳氏)의 책봉조서다. 그 가운데 “그대(*왕건)는 장회(長淮)의 무족(茂族:번성한 명문의 족속)이며 창해(漲海)의 웅번 (雄蕃)이다. 문무를 겸비한 재주로 영토를 보유하고 충효의 절개로 중국의 교화와 풍속을 받았다.” (又詔曰 卿 長淮茂族 漲海雄蕃 以文武之才 控玆土宇 以忠孝之節 來化風) 란 구절이 있다. 중국 학자에 따르면, 장회(長淮)의 ‘장’은 길다는 뜻의 수식어이며, ‘회’는 중국의 회하(淮河), 혹은 회하 유역이다. ‘창해의 웅번’은 바다 건너 커다란 번국의 제후라는 뜻이다. 송나라가 고려 성종을 책봉한 985년(성종4) 조서에도 “항상 백제(*삼한)의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장회 출신인 너의 족속을 영원히 번창케 하라”(常安百濟之民, 永茂長淮之族;『고려사』권3·성종 4년(985) 5월조)란 구절이 다시 언급돼 있다. 중국 학자는 이 두 구절을 근거로 왕건(고려왕실)의 선조는 중국 회하 유역의 명문거족이고, 왕건은 회하 유역 한족(漢族)의 후예로 단정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중국 회하 명문거족의 후예인 왕건이 중국의 바다 건너편에 제후국 고려를 건국했다 는 것이다. 또한 왕건 책봉조서에 나온 “(그대 왕건은) 주몽이 개국한 상서로움을 이어받아 그 나라의 군장이 되었고, 기자가 번국(蕃國)을 이룩한 자취를 밟았도다” (踵朱蒙啓土之禎 爲彼君長 履箕子作蕃之跡)란 구절도 문제가 됐다. 왕건은 조선반도 역사상 주몽과 기자의 뒤를 이어 중국에서 온 통치자로서, 고려왕조의 군장이 되었다고 해석한 것이다. 따라서 고려는 한인(漢人)의 후예인 왕건이 세운 왕조이며, 기자조선 고구려에 이어 중국이 한반도에 세운 세 번째 정권이라고 주장했다. [史長樂, ‘당(*후당)나라 명종이 밝힌 고려 태조 왕건의 족적(族籍)’ 『동북사지(東北史地)』2007년 3호(5-6월호)]. 최근 문제의 고구려비가 발견된 지린성에는 동북공정을 처음 발의한 지린성 사회과학원이 있다. 이곳에서 발간된 격월간 역사잡지에서 이런 주장이 나온 것이다.
고려가 중국인의 후예가 세운 중국의 지방정권이란 이런 황당한 주장을 새삼 거론한 건 ‘지안고구려비’에 대한 중국 학자들의 보고서가 고구려인의 기원을 중국 고대종족의 하나인 고이(高夷)족이라 주장한 사실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고대사 연구자들은 비문의 건립 시기에 주로 관심을 갖고 있지만 필자는 다른 생각이다. ‘지안고구려비’를 계기로 중국에서는 중국 내 소수민족의 왕조는 중국의 지방정권이란 주장에서 한발 더 나가, 그 건국 주체까지 중국인의 후예로 보려는 방향으로 동북공정식 역사연구 방법론이 확장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문을 공개하지 않으면서, 비문 내용과 관련 없는 고구려인의 뿌리를 건드린 중국 학자들의 보고서에서 동북공정의 또 다른 저의를 읽을 수 있다.
『고려도경』이 동북공정 오류 보여줘
고려가 기자조선과 고구려를 이어 건국됐다는 구절은 오히려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음을 알려준다. 그런 사실을 기록한 후당의 조서야말로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왕조임을 뒷받침하는 적극적인 증거가 된다. 동북공정의 논리에 경도된 중국 학자들에게나 세 왕조는 중국의 지방정권이라는 식으로 읽힐 뿐이다. 그런 잘못된 시각만 걷어내면 위의 기록은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사실을 알려준다. 다른 기록을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고려와 거란의 전쟁 당시 거란 장수 소손녕은, “고려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 땅은 우리의 소유다. 그런데도 고려는 우리나라 땅을 침식해 들어와서, 거란이 침략했다”고 했다. 이에 대해 고려의 서희(徐熙)는 “아니다. 고려는 고구려의 옛 땅에서 일어났다. 그러므로 국호를 고려라 하고 평양에 도읍했다. 땅의 경계를 따지자면, 거란의 동경은 모두 우리 영토 안에 있다”고 반박했다. (『고려사』권94 서희 열전)
동북공정식의 논리라면, 서희의 얘기처럼 고구려 땅에 건국한 고려야말로 중국의 지방정권임을 알려주는 더없이 좋은 자료일 것이다. 그러나 영토와 의식의 차원에서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서희의 얘기를 그런 뜻으로 받아들일 수 없음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이다. 서희뿐만 아니다. 고려·거란 전쟁 뒤 100년이 지난 1123년, 고려를 방문한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은 “왕씨의 선조는 대개 고구려의 대족(大族)이다. 고씨(高氏)의 정치가 쇠퇴하자, 나라 사람들이 왕건을 어질게 여겨 드디어 왕으로 세웠다. (왕건은) 후당 장흥(長興) 3년(932)에 스스로 권지국사(權知國事)라 칭하고 (후당) 명종에게 봉작을 청하자, (명종은 왕건을) 고려의 왕으로 봉했다.” (『고려도경』 권2 왕씨조(王氏祖))라고 했다. 당시 송나라 황제에게 올릴 보고서인 『고려도경』에서 왕건의 조상을 ‘고구려 대족의 후예’라 했다. 또한 고구려 국왕의 성씨인 고씨(高氏)를 이어 왕건이 국왕으로 추대됐다는 표현 속엔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사실이 반영돼있다. 이런 기록들을 무시하고, 왕건을 중국인(漢人)의 후예로 본 것은 사료 해석의 근본을 망각한 것이다.
“고려왕실은 동이족 중 명문거족” 반론
그런 점에서 왕건의 출신을 ‘장회무족’이라 한 구절은 새롭게 해석할 근거를 얻게 된다. 가장 권위 있는 해석은 다음과 같다. “회수(淮水)라는 이름은 회이(淮夷)들이 많이 살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회이는 동이족(東夷族) 가운데 가장 저명한 족속이다. ‘장회무족’은 고려왕실이 동이족 가운데 명문거족이라는 뜻이다.” (김상기, 『역주 고려사』, 동아대).
중국 황하 상류 지역에서 일어난 동이족은 기원전 12세기 무렵 주나라와 항쟁하면서 점차 하류 지역으로 내려온다. 동남 만주와 한반도로 이동한 동이족은 한(韓) · 예(濊) · 맥(貊)족으로 갈린다. 산둥 반도 쪽으로 이동한 동이족은 우이(隅夷 : 청주(靑州)지역, 동부연안), 내이(萊夷 : 등주 지방), 회이(淮夷 : 강소성 양주(楊州) 일대, 회수 유역에서 산동성의 동남부 지역), 서융(西戎 : 서주(徐州)를 중심으로 한 노(魯)의 동남지역)이 된다. 특히 회이와 서융은 서주와 춘추시대 한족(漢族)과 대립하면서 그 세력이 약화돼 전국시대에는 겨우 명맥을 유지한다. 서융은 기원전 515년에 오(吳)나라에 망한다. 이후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면서 동이족은 한족(漢族) 사이에 분산 배치되면서, 중국 대륙에서 점차 사라지게 된다(김상기, 『동이와 회이, 서융에 대하여』1954).
후당은 고려왕실이 동이족 가운데 명문거족의 후예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고 기록했을까. 후당(後唐:923~936년)은 13년짜리 단명 왕조다. 고려왕실의 가계에 대해 자세한 정보를 가질 형편은 아니었다. 따라서 후당은 당시까지 중국에 전해오던 동이족에 관한 사실을 그대로 책봉조서에 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고려가 책봉을 요구하는 사신을 보내면서, 그런 사실을 사전에 알려주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고려는 막바지에 이른 후삼국 통합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후당의 지원이 필요했다. 그들과의 친근함을 강조하기 위해 왕건의 본관을 동이족이 번성했던 회수지역과 연결시켜 그렇게 작성했을 수 있다. 대체로 그런 유의 책봉조서는 상대국을 존중하여 그들이 보낸 자료에 근거하여 작성했을 개연성이 크기 때문이다. 동북공정으로 인해 오히려 한민족의 조상인 동이족이 기원전 12세기부터 기원 전후까지 중국에서 번성했던 모습을 확인한 셈이다. 현재 우리의 역사연구와 서술에서 이런 사실들이 강조되지 않았던 현실이 동북공정이 들어설 자리를 마련해준 건 아닐까 반성해본다.
- 중앙선데이 | 박종기 국민대 교수 | 제319호 | 2013.0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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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개성 송악산 전경. 왕건의 5대조 강충이 술사의 권고를 듣고 삼한 통합 군주 왕건의 탄생을 위해 부소산에 소나무를 심고 송악산으로 이름을 고쳤다. 사진은 1997년 중앙일보 북한 문화유적 취재 답사단이 송악산을 찾았을 때 촬영한 것이다 |
“6대조 호경은 백두산에서 내려온 성골장군” |
고려사의 재발견 · 태조 왕건 | ⑥ 왕실의 조상
934년(태조17) 7월 발해의 세자 대광현(大光顯)이 발해인 수만 명을 데리고 고려에 귀부하자 왕건은 그에게 왕씨 성을 주고 계(繼)라는 이름을 준다. 또한 고려왕실의 족보에 올려 왕족으로 대우한다. 황해도 배천 땅을 주어 거기서 나오는 비용으로 조상의 제사를 받들게 했다(『고려사』 권2 세가). 왜 왕건은 이렇게 극진하게 예우했을까? 발해 세자라는 신분 때문일까?
다른 기록을 보자. 왕건은 후진(後晋:936~946년)에서 온 승려 말라(襪羅)를 통해 후진 고조에게 거란을 함께 공격할 것을 제의한다. 왕건은 “발해는 ‘고려와 친척의 나라(吾親戚之國)’ 또는 ‘우리와 혼인한 나라(渤海我婚姻也)’” 라면서 그런 발해를 멸망시켜 국왕을 사로잡은 원수를 갚기 위해서라 했다(『자치통감』권 285 後晋紀 開運2년(945)조). 이같이 발해를 ‘혼인’ 혹은 ‘친척’ 관계라 한 것은 이전부터 두 나라가 밀접한 관계였음을 알려준다. 또한 발해 세자를 극진하게 대접한 것도 단순한 의례용이 아님을 보여준다.
발해국 세자를 이렇게 대접한 것은 고려왕실의 뿌리, 나아가 고려국의 기원을 알려 주는 것은 아닐까? 수수께끼 같은 이 문제를 풀어줄 단서는 『고려사』 첫머리에 실린 ‘고려세계(高麗世系)’다. 이 기록은 현재 남아 있는 고려왕실의 조상에 관한 유일한 기록이다. 왕조가 편찬한 공식 역사서에는 항상 이런 기록이 첫머리를 장식한다. 예를 들어 보자.
용비어천가 vs 편년통록
우리 역사에서 성군으로 추앙받는 조선 세종은 1438년(세종20) 신하의 반대를 무릅 쓰고 아무도 볼 수 없는 할아버지 이성계의 역사가 담긴 『태조실록』 ‘총서(總書)’ 를 읽고, 부실한 내용에 불만을 제기한다. 예컨대 1380년(고려 우왕6) 이성계가 왜구를 크게 물리친 황산대첩 전투 기록은 당시까지도 생존자와 목격자가 있을 것이니 그 사실을 더 보충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미 완성된 ‘총서’는 어쩔 수 없어 세종은 아예 아버지인 태종 이방원, 태조 이성계와 목조(穆祖:李安社-이성계 고조), 익조(翼祖:李行里-증조부), 도조(度祖:李椿-조부), 환조(桓祖:李子春-부친) 등 6명의 행적을 다시 보완한 역사서를 편찬케 한다. ‘해동의 여섯 용이 나시어(海東六龍飛), 하시는 일마다 하늘의 복이시니라(莫非天所扶)’로 시작되는 유명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1447년)는 이렇게 탄생한다. 조선왕조 건국 후 반세기가 넘은 다음의 일이다.
제왕(帝王)이 천하를 통일하면 이같이 그 조상의 지위와 위상을 제왕에 준하여 높이는 의례를 먼저 행한다. 시호(諡號)를 올린다는 말이 그것이다. 가족, 가계와 조상 등 가문의 뿌리를 중시하는 전근대 동아시아 특유의 조상 숭배 의식에서 기원한 것으로, 어느 왕조에서나 매우 중시되는 의례다. 시호와 함께 그에 걸맞게 조상의 행적을 정리하는 ‘뿌리 찾기’도 함께 이루어진다.
고려왕조 역시 그러했다. 왕건은 천하를 통일한 이듬해인 919년(태조2) 3월 증조부모를 각각 시조원덕대왕(始祖元德大王)과 정화왕후(貞和王后), 조부모를 각각 의조경강대왕(懿祖景康大王)과 원창왕후(元昌王后), 부모를 세조위무대왕(世祖威武大王)과 위숙왕후(威肅王后)와 같이 3대 조상의 시호를 올렸다(『고려사』 권1). 고려왕실의 조상은 이로써 처음 역사기록에 등장한다. 그러나 조상의 행적은 제대로 정리할 수 없었는지 당시 기록엔 누락되어 있다. 왕건의 가계가 미천했기 때문일까?
왕건은 역산(歷山)에서 농사짓던 중국 순(舜) 임금과 패(沛) 땅의 평민인 한나라 고조(高祖)는 미천한 출신의 인물이지만 덕과 지혜를 가져 제왕이 되었듯이, 자신 또한 그런 처지에서 왕위에 올랐다고 했다(『고려사』 권2 태조 26년(943) 4월). 그의 말은 당시 잘나가는 신라 귀족에 비해 상대적으로 미천하다는 겸사(謙辭)이지, 그 때문에 왕실 조상의 행적을 기록하지 않은 것은 아닐 것이다.
고려의 경우 건국 후 250년이 지난 의종(毅宗:1146~1170년 재위) 때 비로소 왕실의 역사가 새롭게 정리된다. 의종은 흔히 술과 연희에 빠진 군주였고, 끝내 보현원이라는 별궁에서 그렇게 즐기다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린 무신들에 의해 왕위를 빼앗긴 유약하고 무능한 군주로 알려져 있다. 권력을 잡은 무신들이 그렇게 기록했을 뿐이다. 의종(毅宗)은 문벌귀족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지만, 그들 대신 환관과 측근 무신을 정치 파트너로 삼아 새 정치를 꾀하려 했다. 그것이 화근이 되어 믿었던 환관과 측근 무신의 손에 쫓겨난 불행한 군주였다. 그렇지만 재위 기간 내내 문벌귀족을 누르고 왕실의 중흥과 왕권의 강화를 꾀하려 한 신성(神聖)군주의 면모를 갖고 있었다. 유교이념을 통치이념으로 했던 대부분의 군주와는 달리 의종은 불교와 풍수지리 · 도참사상 등을 통치이념으로 내세운 특이한 캐릭터를 지닌 군주였다. 그는 풍수지리에 따라 왕실의 중흥(重興)을 위해 황해도 토산에 대궐 ‘중흥궐’을 세우고, 태조 왕건이 중시한 서경에서 새로운 정책을 발표하고, 그곳에 왕실 중흥의 염원을 담은 중흥사 를 창건했다. 그는 김관의(金寬毅)라는 역사가에게 고려왕실과 왕조의 역사를 새롭게 편찬케 했다. 『편년통록(編年通錄)』이 바로 그것이다. 지금은 전해지지 않으나 주요한 내용은 『고려사』의 첫머리에 실린 ‘고려세계(高麗世系)’에 인용되어 있다. 이로써 고려왕실의 뿌리와 고려국의 기원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신화와 전설은 역사의 일부
‘고려세계’에는 왕건이 시호를 내린 3대조뿐 아니라 6대조 호경(虎景)과 5대조 강충 (康忠)까지 기록되어 있다. 시호를 내릴 당시 3대조인 시조원덕대왕은 4대조가 되고, 대신 당나라 숙종이 3대조로 추가되어 있다. (왕실 세계도 참조)당나라 황실에 혈통을 갖다 붙여 고려왕실을 미화하려 했던 것이다. 또한 6대조 호경이 본처를 둔 채 호랑이인 산신과 혼인했는데 몰래 본처와 관계해 강충을 낳았다든가,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作帝建)이 아버지(숙종)를 찾아 중국으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 바닷속에서 용녀를 만나 고려로 돌아왔다는 것도 그런 목적에서 기록된 것이다.
한편 5대조 강충이 부소산(扶蘇山)의 형세는 좋으나 초목이 없으니 이곳에 소나무를 심어 바위를 드러내지 않으면 삼한을 통합할 자가 태어난다는 술사의 얘기를 듣고 소나무를 심고 산의 이름을 송악산(松嶽山)으로 고친 설화는 왕건의 등장을 예고한다. 비록 신화와 전설로 윤색된 것이지만, 그 속에 당시 사람들의 생각과 가치관이 담겨 있다. 그런 생각과 가치관은 곧 역사적 사실과 자료가 된다.
‘고려세계’에서 읽게 될 역사적 사실은 무엇일까? 최초 조상인 호경은 “스스로 성골장군(聖骨將軍)이라고 하고, 백두산에서 내려와 두루 유람하여 부소산에 왔다”고 한다. ‘성골’은 신라에서 왕이 될 수 있는 고위 신분인데, 거기에다 장군을 덧붙이고 있다. 맞지 않는 호칭법이다. 그가 신라 귀족 출신이기보다는 당시 지배계급임을 알려주는 표현이다. 주목되는 사실은 그가 백두산에서 내려와 송악산, 즉 개경에 정착했다는 것이다. 백두산은 옛 고구려 영토며, 발해 역시 백두산의 동북지역에서 건국했다. 30년을 한 세대로 할 경우 왕건의 6대조 호경이 살던 때는 700년 무렵이다. 고구려가 망하고, 발해(699~926년)가 건국되는 시기이다. 발해 건국 이전이라면 호경은 고구려 출신이며, 발해가 건국되었더라도 그는 고구려 출신의 발해인이다.후자일 가능성이 더 크다.
왕건이 발해를 친척의 나라라 하고, 그 세자를 극진하게 대접한 까닭은 이같이 ‘고려세계’에서 그 해답을 얻을 수 있다. 따라서 고려국의 기원은 고구려와 발해국에서 찾게 된다. 신화와 전설은 문자기록이 변변치 않던 시기에 스토리텔링의 구전(口傳) 형식으로 오랜 기간 전해 내려온 역사의 일부다. 고려 건국 이후 그런 사실이 전해지다가 『편년통록(編年通錄)』 편찬 때 채록되어 결국 ‘고려세계’에 남게 된 것이다. 따라서 『편년통록』 이전에 이미 고려왕실에 관한 사실들이 전해 내려온 것이다. 다음의 사실이 그러하다.
지난 호(319호)에 밝힌 대로, 송나라 사신 서긍은 『고려도경』에서 고려왕실의 조상이 고구려의 대족이라 했다. 그는 이 책의 다른 부분에서 고려의 건국을 서술했는데, 그 이전에 먼저 고구려의 역사를 설명한 다음 고구려 멸망 후 걸중상(乞仲象)의 아들 대조영(大祚榮)이 발해를 건국한 사실을 서술했다. 그런 후 고구려 검모잠의 고구려 부흥운동을 서술했다. 그런 다음 왕건이 왕위에 오른 사실을 서술했다(『고려도경』 권1 참고).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를 서술하고, 그것을 고려 역사의 전사(前史)에 포함시킨 것이다. 결국 고려는 두 나라에서 기원했고, 그들의 역사를 계승했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짧은 체류기간 그가 서술한 고려역사는 자신의 지식이 아니라 당시 고려로부터 얻은 역사지식에 근거한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그의 역사서술 속에는 당시 고려인의 역사인식이 반영되어 있다. 그러한 역사인식이 의종 때 편찬된 『편년통록』에 또한 반영되어 있다. 고려왕실과 고려국의 기원은 이같이 의종 때 창작된 게 아니라 오랫동안 전승된 것을 모아 편찬한 것이다. 왕건이 발해를 ‘혼인’ ‘친척’의 나라라 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 중앙선데이 | 박종기 국민대 교수 | 제320호 | 2013.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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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금강 전경. 성호 이익은 “금강 물길은 개경과 한양을 감싸지 않고 굽은 활처럼 등지고 흘러 술사들이 말하는 ‘반궁수(反弓水)’ 형상이라 고려가 이 지역 인물의 등용을 금지한 것” 이라고 주장했다 |
훈요십조 8조 근거로 현종 측근 위작설 주장 |
고려사의 재발견 · 태조 왕건 | ⑦ 식민사관의 계략
‘훈요십조(訓要十條)’는 고려 태조 왕건이 숨지기 한 달 전인 943년(태조26) 4월에 직접 작성한 문서이다. 글자 그대로 ‘교훈이 되는 10가지 조항의 중요한 정책’이라는 뜻의 훈요십조는 고려 왕조가 존속한 500년 내내 중대한 정책을 결정할 때마다 하나의 기준과 근거로 활용되었다. 즉 고려 왕조 통치 강령이며, 오늘날 헌법에 준할 정도의 중요한 자료이다. 그런데 훈요십조는 왕건이 지은 것이 아니라, 그보다 약 100년이 지난 현종 때(1010~1031년 재위) 현종의 측근인 경주 출신의 신라계 정치인 최항(崔沆)이 작성했다는 주장이 있다. 1918년 일본 식민사학자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제기한 ‘훈요십조 위작설’이다. 위작설이 훈요십조 가운데 문제 삼는 구절은 8조이다.
“여덟째, 차현(*차령산맥) 이남과 공주강(*금강) 밖의 산과 땅은 모두 배역의 형세이며, 인심 또한 그러하다. 저 아래 주군의 사람들이 조정에 참여하면, 왕후 국척과 혼인하여 국정을 잡으면 국가를 변란케 할 것이다. 혹은 (고려에) 통합된 원한을 품고 국왕이 가는 길을 가로막아 난을 일으킬 것이다 (其八曰 車峴以南 公州江外 山形地勢 역趨背逆 人心亦然 彼下州郡人 參與朝廷 與王侯國戚婚姻 得秉國政 則或變亂國家 或啣統合之怨 犯비生亂).”
이마니시는 ‘차현 이남과 공주강 밖’ 지역이 지금의 전라도 지방이라는 점을 전제로, 왕건이 나주 출신 부인의 소생을 태자(뒤에 혜종)로 삼은 사실을 들어 왕건이 8조와 같은 내용을 작성할 리 없다고 했다. 지금의 장흥 출신인 정안(定安) 임씨(任氏)가 인종과 의종의 외척인 사실과 최지몽·유방헌·김심언·전공지 등 이 지역 출신 인물이 고려 전기 정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점도 그 근거라고 주장했다. 이마니시는 “태조의 훈요십조는 병란으로 소실되었는데, 최제안(崔齊安)이 최항의 집에서 그것을 얻어 임금에게 바쳐 세상에 전해졌다” (『고려사』권98 최제안 열전)는 기록을 근거로, 최항의 집에서 발견된 훈요십조는 최항의 작품이라 했다.
금지 대상은 특정지역 아닌 反통합 인물
최항은 최언휘의 손자이다. 최언휘는 경주 출신으로 당나라에 유학해 과거에 급제한 뒤 귀국했다. 당시 중요 기록은 모두 최언휘의 손을 거쳤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그는 왕건의 핵심 참모였다. 또한 최항은 태조에서 목종까지 일곱 국왕의 실록인 7대 실록의 편찬 책임자였다. 이 7대 실록은 1011년(현종1) 거란의 침략으로 불에 타 없어졌다. 이 최항이 경주 출신의 신라계 인물로서, 후백제에 대한 나쁜 감정 때문에 훈요십조를 조작했는데, 당시 실록 편찬자가 최항의 가짜 훈요십조를 태조의 것으로 잘못 알고 역사책에 기록했다는 게 이마니시의 주장이다.
| | | ▲ 대동여지도에 나타난 금강. 술사들은 이 모양을 반궁수 혹은 배류수라 했다. [사진 국사편찬위원회] |
그러나 최항의 훈요십조 조작 여부를 떠나 등용 금지 지역을 전라도로 본 이마니시의 전제 자체가 잘못됐다. 그는 조선 후기 실학자 성호(星湖) 이익(李瀷·1681~1763)의 주장을 받아들여 위작설을 제기했다. 성호 이익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고려 태조(왕건)가 남긴 훈요십조의 잘잘못을 따지지 않겠으나, 지금 우리 성조(聖朝*조선 왕조)의 기반은 전주인데, 도선의 말이 과연 헛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태조는 한갓 사람을 등용하여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할 줄만 알았지, 하늘의 뜻과 사람의 마음이 남모르는 사이에 옮겨질 줄은 몰랐던 것이다.” (『성호사설』권12 人事門 ‘麗祖訓要’)
성호 이익은 전주 출신인 이성계의 조상들이 함경도 여진 지역으로 이주한 것은 등용을 금지한 훈요십조 때문이라 했다. 또한 이 지역 인물의 등용을 금지한 것은 풍수지리설을 유포한 도선의 생각이 반영된 것이라 했다. 그는 다른 글에서 금강의 물길은 개경과 한양을 감싸주지 않고 굽은 활과 같이 등지고 흘러 술사들이 흔히 말하는 반궁수(反弓水) 모양이라서, 등용을 금지한 것이라고 덧붙이기까지 했다 (『성호사설』권3 天地門 ‘漢陽’조). 『택리지(擇里志)』를 저술한 이중환(李重煥·1690~1752)도 같은 생각이었다.
“신라 말 후백제 견훤이 이 지역(*전라도)을 차지하고 고려 태조와 여러 번 싸워서, 태조는 자주 위태한 경우를 당했다. 태조는 견훤을 평정한 뒤에 ‘백제 사람을 미워하여 차령 이남의 물길(*금강)은 모두 거꾸로 흐르니, 차령 이남의 사람을 등용하지 말라’는 명을 남겼다.” (『택리지』 팔도총론 전라도조)
이중환은 성호 이익의 ‘반궁수’론을 이어받아 금강의 물길이 거꾸로 흐르는 배류수(背流水)라고 덧붙이고 있다. 참고로 섬진강·영산강·낙동강도 그러해서, 우리나라 3대 배류수에 해당한다(『고려사』 지리지 양주(梁州·*양산)조 참고). 그런데 하필이면 금강만 배류수로 본 것일까? 등용 금지 지역을 전라도로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익과 이중환처럼 볼 경우 이 지역(금강)에는 전라도뿐만 아니라 충청도 지역도 포함된다. 전라도로 국한한 사실 자체가 사리에 맞지 않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이마니시는 이들의 잘못된 주장을 빌려 위작설을 제기했던 것이다.
앞에서 인용한 8조를 다시 읽어보자. 금지된 대상은 특정 지역이 아니라, 삼한 통합에 반감과 원한을 가진 사람이다. 이들을 등용할 경우 뒷날 화를 불러일으킬 것이라 했다. 반감을 품은 사람들의 지리적 범주를 ‘차령 이남, 공주 밖’으로 에둘러 표현한 것뿐이다. 현재 학계는 굳이 지역을 따지자면, 통합전쟁에서 고려에 가장 저항이 심했던 후백제 수도인 전주를 포함해 공주, 홍성(당시 운주) 지역 정도로 보고 있다. 왕건은 이곳 사람 가운데 통합에 반감을 가진 사람의 등용을 금지하려 했던 것이다.
8조는 지역차별과 전혀 관계없는 내용
1011년(현종2) 거란의 침입으로 태조에서 목종까지 일곱 국왕의 실록과 함께 많은 기록들이 불탔다. 이 속에 훈요십조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고려는 1013년 9월 소실된 일곱 국왕의 실록을 다시 편찬하기 시작해, 1034년(덕종3) 일곱 국왕의 7대실록 36권이 완성된다. 최제안이 최항의 집에서 발견한 훈요십조도 실록 편찬을 위한 자료 수집 과정에서 발견돼 새로 편찬된 『태조실록』에 수록된 것이다.
고려 후기 역사가 이제현은 훈요십조를 ‘신서십조(信書十條)’라 했다(『익재집』권9 ‘충헌왕세가’). ‘신서(信書)’는 글자 그대로 가장 믿을 만한 사람에게 내리는 글로, 친서이자 속마음이 그대로 드러나 있어 공개할 수 없는 사신(私信)을 말한다. 훈요십조의 특성을 잘 드러낸 표현이다. 즉 훈요십조는 공식 문서가 아니라 국왕이나 그 측근 관료들 사이에 비전(秘傳)된 통치의 지침을 담은 내부용 문서다. 약 100년이 지나 다시 실록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하나의 역사 자료로 공개된 것이다.
최항은 천추태후의 살해 위협에서 벗어나 왕위에 오른 현종을 옹립한 인물이다. 그는 현종이 즉위한 뒤 현종의 스승과 재상을 역임한 측근이다. 그는 국왕들에게 전해 내려온 훈요십조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목종은 죽기 직전 최항에게 신왕 현종을 보좌할 것을 부탁했다. 이때 왕실에 전래된 훈요십조를 현종에게 전하라는 부탁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이병도, 『고려시대의 연구』). 7대실록 편찬 책임자인 최항의 집에서 훈요십조가 나올 가능성은 충분하다. 훈요십조를 조작할 이유는 없었다.
흥왕사는 덕수현(德水縣) 이라는 하나의 현을 옮기고, 그곳에 짓기 시작해 12년 만인 1067년(문종21)에 완공된 고려시대 최대 사찰의 하나다. 건립을 주도한 문종에 대해 관료집단은 크게 반대한다. 재상 최유선(崔惟善)은 이렇게 주장했다. “우리 태조 신성(神聖)왕의 훈요십조에, ‘국사 도선이 국내 산천의 순역(順逆)을 관찰하여 사원을 세울 만한 곳에 짓되, 후세의 국왕 및 공후(公侯) 귀척(貴戚) 후비 신료들이 다투어 사원을 지어 지덕을 훼손하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이제 폐하의 고려는 선조의 업을 이어받아 오랫동안 태평한 상태입니다. 비용을 절약하고 사람을 사랑하며 성대한 운세를 지켜 후세에 전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백성의 재산과 힘을 소비하여 불필요한 일에 허비하여 나라의 근본을 위태롭게 하십니까.” (『고려사』권95 최유선 열전)
최유선은 신라가 함부로 사원을 지어 지덕을 훼손해 망했다는 훈요십조 2조에 근거해 문종의 흥왕사 건립에 반대한 것이다. 훈요십조는 이같이 국왕의 정치를 비판하거나, 주요한 정치 현안에 대한 판단의 근거로 많이 인용됐다. 이런 사례는 많이 찾을 수 있다. 고려 당대인도 훈요십조를 사실로 믿었다는 증거다. 훈요십조는 이같이 일종의 헌법과도 같은 취급을 받았다. 이를 위작으로 몰아간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주장은 고려 역사의 출발 자체를 부정하려는 의도와 무관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은 위작설에서 제기된 지역 차별에 관심을 갖고, 그런 차별의 역사적 근거를 훈요십조의 8조에서 찾는 경우가 없지 않다. 지역 차별이라는 우리 현대사의 어두운 측면과 결합되어 훈요십조를 이해하고 있다는 증거인데, 학계 연구 성과의 축적으로 8조는 지역 차별과 전혀 관계없는 내용임이 판명되었다.
- 중앙선데이 | 박종기 국민대 교수 | 제321호 | 2013.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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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안동 김씨와 권씨·장씨 시조의 공덕을 새긴 비석. 이황의 '삼공신묘기'를 바탕으로 1805년 김희순이 비문을 지었다. 안동시 북문동에 있다 |
왕건, 지방세력에게 본관·성씨 주고 충성을 얻다 |
고려사의 재발견 · 태조 왕건 | ⑧ 본관제(本貫制)
고려 후기 유학자 이색(李穡)은 지금의 안동 권씨의 유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권씨는 김행(金幸)에서 시작하는 신라의 대성이었다. 김행은 복주(福州*안동)를 지켰는데, 태조가 신라를 치려고 복주에 왔을 때 김행은 천명이 그에게 돌아가는 것을 알고 그에게 고을을 바치고 항복했다. 태조가 기뻐해서 ‘권’이라는 성을 내렸다.”(『목은문고』 권16 현복군 권공 묘지명)
왕건은 후삼국 전쟁의 향배가 걸린 고창(古昌*안동)전투에 승리하자, 승리에 협조한 김행에게 권씨라는 성을 주었다. 이어서 고창을 ‘동쪽지역이 평안하게 됐다’는 뜻의 ‘안동(安東)’이란 이름으로 바꾼다. 김행에게 권이라는 성과 함께 안동을 본관으로 주었던 것이다. 김행과 함께 왕건을 도운 김선평과 장길도 이때 각각 안동 김씨와 안동 장씨의 시조가 된다. 안동을 본관으로 하는 권·김·장씨는 여기서 출발한다.
왕건이 남쪽지역을 정벌하기 위해 지금의 남한강에 이르자, 서목(徐穆)이란 사람이 ‘이섭(利涉:강을 건너는 데 도움을 주다)’했다고 해서 그곳을 이천(利川)군으로 명칭을 바꾼다(『고려사』 권56 지리1 이천군조). 이천을 본관으로 한 서씨 또한 이로부터 유래한다. 왕건이 지방의 유력자에게 성과 본관을 준 대표적인 예다.
고려 왕조 때부터 본관·성씨 보편화
| | | ▲ 1 고려 때 주민등록증 역할을 한 ‘준호구’. 소지한 사람과 배우자의 4대 조까지 본관과 성이 기록돼 있다. 2 안동 김씨ㆍ장씨ㆍ권씨의 시조들(삼태사)이 썼던 것으로 알려진 구리 도장과 도장함. | 대한민국 국민은 대부분 본관과 성을 갖는다. 본관은 시조의 거주지나 근거지 지명을 따서 만들어진다. 성은 시조의 혈통을 표시하거나 같은 혈통을 다른 혈통과 구별하기 위해 붙인 호칭이다. 대를 내려가 수십촌으로 촌수가 멀어져도 같은 본관과 성을 가진 사람은 여전히 동족(同族)으로서의 유대의식을 갖는다. 본관과 성을 갖는 전통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김행의 경우와 같이 삼국의 왕족과 지배층은 일찍이 중국과 교류하면서 성씨를 갖기 시작했다. 하지만 본관과 성이 일반인 차원에서 보편화된 건 고려왕조 때부터다.
약 540가문의 계보를 싣고 있는 『씨족원류(氏族原流)』(조종운(1607~1683) 편찬)에서 이씨(李氏)를 예로 들면, 이씨의 본관은 60개가량 된다. 그 가운데 지금의 경북 성주지역을 본관으로 한 이씨는 경산(京山)ㆍ벽진(碧珍)ㆍ광평(廣平)ㆍ성산(星山)ㆍ성주(星州) 등 5개다. 성주는 신라 경덕왕 때 성산으로 불렸다가 그뒤 벽진으로 바뀌었고, 고려 태조 23년(940) 때 경산, 경종 6년(981) 때 광평, 충렬왕 34년(1308) 때 성주라 각각 불렸다. 성주 지역을 상징하는 이씨 5개 본관은 모두 고려 때 정해진 군현 명칭을 따르고 있다. 이 가운데 신라 경덕왕이나 고려 초기 때 정해진 명칭을 본관으로 사용한 경우가 가장 이른 시기의 본관이다.
전체 약 60개의 이씨 본관 가운데 절반이 철성(鐵城·철원) · 재령(載寧) · 전의(全義· 연기군 전의면) · 우계(羽溪·강릉 옥계면) · 조종(朝宗·가평) 등 고려 때 군현이었다가 없어진 경우다. 지금도 남아 있는 경주·전주·광주 등의 본관도 고려 때 처음 정해진 군현 명칭이다. 『씨족원류(氏族原流)』에 나온 다른 성들의 본관 명칭도 이런 경향을 따르고 있다. 『택리지(擇里志)』의 저자 이중환(李重煥ㆍ1690~1752)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신라가 말기에 중국과 교류하면서 처음 성씨를 만들었으나, 벼슬을 한 사족(士族) 정도만 성씨를 가졌고 일반 백성은 갖지 않았다. 고려 때 비로소 중국의 씨족제도를 모방하여 성씨를 반포하면서 일반 사람들도 성을 가지게 되었다.”(『택리지(擇里志)』 ‘총론’)
정곡을 찌른 얘기다. 본관은 이같이 고려 때부터 사용되기 시작하는데, 태조 왕건 때 제도화됐다. 왕건은 후삼국 통합전쟁 도중 고려왕조에 협력한 지방 유력 계층에게 성씨와 함께 그들의 거주지를 본관으로 주기 시작했다.
전쟁이 끝난 940년(태조23)에는 이를 전국으로 확대해 실시한다. 이 정책을 ‘토성분정(土姓分定)’이라 한다. ‘토’는 지역·지연의 뜻을 가진 본관을 뜻하고 ‘성’은 혈연의 뜻을 가진 성씨를 각각 뜻하는데 고려 때 본관과 성씨를 합쳐 토성이라 한 것이다. 토성은 원래 중국에서 유래했다. “토성을 (나누어) 주는 것은 일정한 토지를 주어 나라를 세우게 하고, 성을 주어 종족을 세우게 하는 것”(『서경』 우공조)이라는 얘기다. 토성은 천자가 제후에게 행하는 의례인데, 이때 성은 제후의 출생지나 나라 이름을 따라 정해진다(이수건, 『한국의 성씨와 족보』). 예컨대 춘추시대 정(鄭)·송(宋)·오(吳)는 나라의 이름이면서 제후의 성이 된다.
태조는 ‘토성분정’을 시행한 940년에 전국의 군현 명칭을 개정한다. 이 조치는 본관과 성을 정한 토성분정 정책을 보완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그런 예를 잘 보여주는 것이 당시 경주에 대한 군현 개편이다.
“태조 18년(935) (신라) 경순왕 김부(金傅)가 와서 항복하자, 나라를 없애고 그곳을 경주(慶州)라 하였다. (태조) 23년 경주의 관격(官格)을 대도독부로 삼았다. 또한 경주 6부의 이름을 고쳤다.”(『고려사』 권57 지리2 경주조)
935년 신라 경순왕의 항복에 고무된 왕건은 신라 수도 계림을 ‘경사스러운 고을’이라는 뜻의 경주(慶州)로 명칭을 바꾼다. 940년(태조23)에는 경주를 대도독부로 격상시킨 뒤 6부의 명칭을 고치고 각각 토성을 분정했다. 중흥부(*李)ㆍ남산부(*鄭)ㆍ통선부(*崔)ㆍ임천부(*薛)ㆍ가덕부(*裵)ㆍ장복부(*孫)가 그것이다.
경주의 예와 같이 940년 군현 명칭 개정은 해당 지역 유력층의 비중과 전략적 중요성, 교통·생산의 중요성 등을 고려해 경·목·도호(도독)부·군·현·향·부곡과 같이 군현의 격(본관)을 정했다. 따라서 본관이 어느 지역인가에 따라 그 사람의 사회적 위상이 결정됐다. 왕건이 발해 세자 대광현에게 고려 왕족의 성인 왕씨를 준 것은 그만큼 대광현의 위상을 높여주기 위해서였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각 군현마다 토성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940년(태조23)에 확정된 본관과 성씨의 기록이다. 안동의 경우 앞에서 언급한 권(權)·김(金)·장(張) 외에 강(姜)·조(曹)·고(高)·이(李) 등 모두 7개 성씨가 안동을 본관으로 한 토성이다. 토성이 기록된 곳은 대체로 대동강에서 원산만을 잇는 선의 이남 지역, 즉 통일신라와 고려 초기의 영역 내 군현이다. 고려 때 토성이 제정된 것임을 뒷받침한다.
시행 100년 지나며 일반 양인으로 확산
왜 왕건은 이런 정책을 시행했을까? 그의 독창적인 정책은 아니다. 중국 당나라 제도를 참고해 만든 것이다. 중국 위진 남북조 때 구품중정법(九品中正法)이 시행됐다. 중앙에서 파견된 중정(中正)이란 관리가 지방 인물의 재능과 덕행을 보고 1품에서 9품의 향품(鄕品)을 정해 추천하면, 그에 해당하는 중앙 관직이 지방 인물에게 주어졌다. 대체로 영향력 있는 유력자의 자제가 높은 향품을 받게 된다. 자제는 이를 바탕으로 지역(郡) 내 유망한 족속이라는 뜻의 ‘군망(郡望)’으로 행세하면서 문벌을 형성한다. 천하를 통일한 당나라는 기득권층이 된 문벌의 군망을 줄이고, 통일에 협조한 신흥세력에 성씨를 주어 권위를 높인다. 또한 전국 유력세력과 그들의 성씨를 기록한 『씨족지(氏族志)』와 『군망표(郡望表)』를 편찬한다. 문벌을 억제하고, 천하 통일에 협조한 신흥세력의 도움을 얻어 황제체제를 강화하려는 정책이다.
토성분정 정책은 이 같은 당나라 제도를 모델로 했다. 왕건은 박씨와 김씨가 성골과 진골이 되어 정치·경제를 독점한 통일신라의 폐쇄적인 골품제를 무너뜨리고, 소외된 지방 유력층에 토성을 줌으로써 새 지배층에 편입시켜 신왕조 질서 수립에 도움을 얻고자 했다.
이 정책은 단순히 지방세력에 본관과 성씨를 부여하는 친족제도가 아니라, 반세기에 가까운 내란으로 분열된 지역과 민심을 통합하려는 고려판 사회통합정책이다. 학계에서는 이 정책을 ‘본관제(本貫制)’라 부른다.
초기에 토성을 받은 계층은 지방 유력층으로 백성(百姓)층이라 한다. ‘백성’은 보통 사람들이란 지금의 뜻과 다르게 성씨를 받아 지배질서에 참여할 수 있는 계층이라는 뜻이다. 이들을 당시 ‘유망한 족속’이라는 뜻의 망족(望族)으로 불렀다. 중국의 군망(郡望)과 같은 뜻이다. 당나라 제도를 수용한 증거가 이러한 용어에도 반영되어 있다.
958년(광종9) 과거제 시행은 본관과 성씨 사용이 일반인 계층까지 확산된 계기가 되었다. 1055년(문종9) ‘씨족록(氏族錄)’에 실려 있지 않은 사람은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게 하는 조치(氏族不付者 勿令赴擧; 『고려사』 권73 선거 과거)가 내려졌다. 초기에는 과거 응시 자격이 지방 유력층인 향리층 이상에게만 주어졌지만 과거가 시행된 지 100년이 지나면서 씨족록에 성씨와 본관이 등록된 일반인에게도 응시가 허용됐다. 그러면서 성씨와 본관이 확산되기 시작한다. 대체로 11세기와 12세기를 거치면서 노비를 제외한 일반 양인들이 지금과 같이 성씨와 본관을 갖는 게 보편화된다.
- 중앙선데이 | 박종기 국민대 교수 | 제322호 | 2013.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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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경기도 하남시 춘궁리에 위치한 3층 및 5층 석탑. 1988년 발굴 결과 10세기에 건립된 2층 높이의 대형 사찰터가 확인되었다. 고려 초기의 호족인 왕규와 관련된 사찰로 추정된다. 조용철 기자. |
외척 반발 빌미로 왕위 빼앗은 고려판 ‘왕자의 난’ |
고려사의 재발견 · 혜종 | ① 왕규의 난
한 번 치세(治世·훌륭한 통치) 뒤엔 난세(亂世)가 온다는 ‘일치일란(一治一亂)’은 왕조나 국왕의 교체 때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다. 태조 왕건의 사후 장남 혜종(惠宗·912~945년, 943~945년 재위) 때도 그런 현상을 목격할 수 있다.
“혜종이 병을 앓자 왕규(王規)가 딴 뜻을 품었다. 정종(定宗)이 가만히 왕식렴(王式廉)과 함께 변란에 대응할 방안을 모색했다. 왕규가 난을 일으키자, 왕식렴이 평양의 군사로 왕궁을 지키자 왕규가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다. (왕식렴은) 왕규와 그 일당 300여 명을 죽였다.” (고려사 권92 왕식렴 열전)
왕규는 지금 경기도 광주(廣州)의 호족이다. 궁예 휘하의 왕건이 899년 이곳을 정벌할 때 협조하면서 왕규는 정계에 등장한다. 그의 두 딸은 태조 왕건의 15ㆍ16번째 부인, 또 다른 딸은 혜종의 부인이 되었다. 왕규와 함께 처단된 무리가 300명이란 사실은 그가 당시 정계의 유력자였고, 그 바탕에는 한강의 수운(水運)을 장악해 축적한 그의 정치·경제 기반이 상당했음을 알려준다.
위 기록에서 왕규가 품었다는 '딴 뜻'은 태조의 16번째 부인이 낳은 광주원군 (廣州院君)을 혜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앉히기 위해 난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고려사』에는 이를 ‘왕규의 난’ 이라 했다. 고려 후기 역사가 이제현(1287~1367년)은 왕규를 ‘중국 노나라의 은공(隱公)에게 환공(桓公)을 죽이라고 건의했다가, 여의치 않게 되자 도리어 은공을 죽인 우부(羽父)와 같은 인물’로 평가했다. 이 같은 이제현의 견해가 『고려사』에 반영되면서 ‘왕규의 난’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당대 역사의 진실을 담는 그릇 역할을 하는 게 용어다. 현재 대부분의 역사책들이 ‘왕규의 난’이라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난’이란 용어가 과연 당시의 진실을 담보하는 그릇이 될 수 있을까?
왕규가 외손을 왕 앉히려 딴 뜻 품었다?
| | | ▲ 혜종의 묘인 순릉. 개성시 송악면 자하동에 있다. [사진 장경희 한서대 교수] | 약 100년 뒤 이자겸(李資謙)은 왕규와 같은 길을 걷는다. 딸들을 각각 예종과 그의 아들 인종의 비로 들인 왕실 외척 이자겸은 권세를 제멋대로 휘두른다. 이를 보다 못한 인종은 1126년 2월 장인이자 외조부인 이자겸을 치려다, 도리어 이자겸의 반격을 받아 궁궐이 모두 불타고 스스로 왕위를 이자겸에게 물려줄 뻔하는 수모를 겪는다. 인종이 먼저 이자겸을 제거하려다 벌어진 사태인데도, 그뒤 석 달 만인 1126년 5월 인종의 사주를 받은 측근 척준경에 의해 이자겸이 제거되자 왕실 사가들은 이자겸에게 모든 잘못을 씌워 ‘이자겸의 난’이라 기록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 했던가? ‘왕규의 난’을 다시 봐야 할 근거는 여기에 있다. 혜종 때 일어난 정변의 진실은 무엇일까? 왕규는 왕(혜종)에게 “왕의 아우인 요(堯·뒤에 고려 3대 왕 정종이 됨)와 소(昭·뒤에 고려 4대 왕 광종이 됨)가 반역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알렸다. 그러나 왕은 이를 믿지 않고 배다른 동생인 요와 소를 잘 대우해주면서 자신의 딸을 소에게 시집보내 그들의 세력을 강하게 해줬다. 이에 불만을 품은 왕규가 혜종을 두 차례나 제거하려다 실패했다는 것이 『고려사절요』(권2 혜종 2년·945)의 기록이다.
아버지 왕건을 따라 수많은 전투에 참여해 명성을 쌓아 왕이 된 혜종은 자신을 제거하려 한 왕규는 물론 국왕으로서 당연히 대처해야 할, 배다른 형제들의 반역 조짐에 대해 아무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즉위 이듬해부터 병을 앓아 소심해져 그랬을까? 혜종은 실제로 이들을 통제할 아무런 힘을 갖지 못했다.
“태조는 7살짜리 혜종을 태자로 삼으려 했으나 그 어머니 오씨(吳氏·나주 출신 2비)가 미천해 태자로 세우지 못할까 두려워했다. 태조가 낡은 상자에 황제를 상징하는 자줏빛이 나는 황포(황제를 상징)를 담아 오씨에게 주자, 오씨는 그것을 박술희(朴述熙)에게 보였다. 태조의 뜻을 헤아린 박술희가 다시 요청하자, 태조는 혜종을 태자로 삼았다. 태조가 임종 때 박술희에게 군국(軍國)의 일을 부탁하고, 태자를 잘 보좌하라고 부탁하자, 박술희는 그대로 따랐다.”(『고려사』권92 박술희 열전)
오씨가 미천하다는 것은 다른 세력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하다는 뜻이다. 왕건은 그 점이 마음에 걸렸다. 즉 태조는 자신의 사후 29명의 부인에게 태어난 34명의 자식(왕자 25명, 공주 9명) 사이에 벌어질 권력투쟁의 어두운 그림자를 예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태조는 오씨가 미천하다는 이유로 임신을 원하지 않았으나 오씨가 억지로 임신해 혜종을 낳았다는 사실(『고려사』 권88 장화왕후 열전)도 이를 뒷받침한다. 태조는 비록 외가 세력은 약하지만 장남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혜종을 태자로 결정하고, 당진(면천) 출신의 호족 박술희에게 태자의 뒷날을 부탁했던 것이다.
태조의 장인인 왕규는 943년 5월 재상 염상(廉相), 박수문(朴守文)과 함께 태조 왕건의 임종 자리에 있었다. 태조는 ‘아직 결정하지 못한 중요한 일은 태자 무(武·혜종)와 함께 결정하라’는 유언을 왕규에게 남길 정도로, 왕규 역시 혜종의 후견인이었다. 태조는 29명의 부인 가운데 6명은 왕후로, 나머지 23명은 부인으로 호칭을 붙였다. 그리고 왕후의 자식에게만 왕위계승권을 주었다. 왕규의 두 딸은 태조의 부인들이어서 이들의 자식들은 애당초 왕위 계승의 서열에서 벗어나 있었다. 또 왕규는 혜종의 후견인이었기 때문에 외손을 왕위에 앉히려 난을 일으킬 입장도 아니었다.
요(정종)와 소(광종) 형제는 혜종이 즉위한 직후 곧바로 병석에 눕자, 왕위를 노리고 거사를 준비했다. ‘혜종이 병을 앓아 왕규가 딴 뜻을 품자, 정종이 몰래 왕식렴과 함께 변란의 대응책을 모색했다’는 사실(『고려사』 권92 왕식렴 열전)이 그를 뒷받침한다.
해상 세력 몰락하고 내륙 호족 득세
요와 소 형제는 각각 왕건의 차남과 3남이지만, 제3비인 충주 유씨(劉氏)의 자식으로 혜종과는 배다른 형제다. 이들의 음모를 알고도 혜종이 딸을 소에게 출가시킨 건 강력한 외가 세력을 업고 있던 이들 형제와 관계를 터 왕위를 유지하려 했던 게 아니었을까? 요와 소의 외가가 있던 충주는 중부 내륙의 요충지로 남부의 영남 지역, 북부의 강원도 지역과 연결되는 전략 거점이다. 충주 출신 호족 유권열(劉權說)의 권유로 궁예 휘하의 강릉 군벌인 왕순식(王順式) 군대가 고려에 귀부했다. 뒷날 후백제의 신검군을 격파한 주력이 왕순식과 충주 지역의 부대였다. 이런 충주 지역 출신인 요와 소 형제에게 혜종의 후견인 박술희와 왕규의 존재는 커다란 걸림돌이었다.
“혜종이 병석에 눕자 왕규를 미워해 다투던 박술희는 군사 100여 명으로 자신을 호위하게 했다. 정종은 박술희가 딴 뜻이 있음을 의심하여 (강화도) 갑곶에 귀양을 보냈다. 이것을 빌미로 왕규가 왕명이라 속이고 그를 죽였다.”(『고려사』 권88 박술희 열전)
정종이 박술희를 귀양 보내자, 왕규가 거짓으로 왕명을 만들어 그를 살해했다는 것이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왕규와 박술희가 갈등을 빚자 정종이 그 틈을 이용해 박술희가 딴 뜻이 있다는 이유로 귀양을 보낸 뒤 그를 죽인 것이다.
왕규는 혜종에게 요와 소 형제의 음모를 알렸으나 혜종은 도리어 자신의 딸을 소(광종)에게 혼인시켜 사태를 무마하려는 유화책을 펼쳤다. 이에 반발한 왕규가 혜종을 제거하려 했다. 하지만 이런 왕규의 반발은 정종 세력에게 정변의 명분을 만들어주었다. 박술희와 왕규의 이탈로 세력을 잃은 혜종은 재위 2년 만에 힘 한번 써보지 못한 채 배다른 동생에게 허무하게 왕위를 빼앗기게 된다. (그뒤 혜종은 병사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요컨대 혜종 때 일어난 왕실의 정변은 외척 ‘왕규의 난’이 아니라 정종 형제가 왕위 계승의 욕심을 드러낸 ‘왕자의 난’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단순한 궁중 내부의 권력게임이 아니었다. 고려 건국 이후 통일전쟁을 위해 왕권과 호족세력이 타협과 공존, 조화와 균형 속에 유지해온 정치질서가 이 정변을 계기로 크게 요동치게 됐다. 전쟁 상황에서도 억제됐던, 강한 군사력을 가진 세력이 현실 권력의 주인이 돼야 한다는 약육강식의 논리가 정치와 역사의 전면에 노출되었다. 힘을 가진 다수가 소수를 누르고 승자가 되는 야만의 정치가 개시된 것이다. 세력이 약한 혜종을 태자로 책봉하면서 품었던 왕건의 우려가 그의 사후에 현실화되었다.
지금 황해도와 평안도의 패서(浿西) 지역은 통일신라 최강의 부대였던 패강진 부대가 주둔한 곳이다. 이곳 출신 호족 또한 그런 군사 전통을 가진 세력으로, 이후 고려 지상군의 주력이 된다. 왕식렴은 왕건의 사촌동생이자, 이 지역 군사력을 관장한 세력가였다.
평양과 충주 두 세력의 결합을 통해 정종과 광종 형제는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반면에 혜종과 그 후견인 역할을 한 서해 남부 나주의 혜종 외가, 한강의 수운(水運)을 관장했던 광주의 왕규와 당진(면천)출신 박술희의 몰락으로 해상세력은 정계의 주도권을 상실하게 된다. 왕건의 강력한 카리스마 앞에 숨죽였던 정치의 야만성이 혜종 시절 왕자의 난을 계기로 본색을 드러내면서 또 다른 정치질서의 형성과 함께 험난한 격변을 예고하게 된다.
- 중앙선데이 | 박종기 국민대 교수 | 제323호 | 2013.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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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평양성 칠성문. 평양성의 북문이다. 성 앞에 방어용으로 작은 성(옹성)을 쌓은 것이 특징이다. 고구려 때와 고려 태조 5년(922년) 각각 축조되었다. 1712년(숙종 38) 개축되었다. 조용철 기자. |
26세 젊은 왕, 도읍 옮기려다 민심 잃고 의문사 |
고려사의 재발견 · 정종 | ① 서경 천도와 광군(光軍)
고려 제3대 왕인 정종(定宗: 923∼949년, 945∼949년 재위)은 즉위한 직후 왕규와 박술희를 제거해 자신의 즉위에 결정적인 공을 세운 왕식렴(王式廉)을 공신으로 책봉한다. 다음이 공신 책봉 조서다.
“그대(왕식렴)는 3대(태조·혜종·정종)의 원훈(元勳)이며 나라의 주석(柱石)이다. …간신(*왕규)이 흉악한 무리들과 손잡고 변란을 일으켰다. 옥이 불에 들어가 더욱 냉기를 드러내고, 소나무가 눈을 맞고 더욱 푸르게 되듯이 그대는 역당들의 목을 베 기울어질 뻔한 나라를 바로 세웠다. 그대가 없었다면, 어찌 오늘의 내가 있겠는가? ‘어지러울 때 성실한 신하를 알게 되고, 센 바람에 질긴 풀을 안다’ 는 말이 그대를 두고 한 말임을 이제야 알겠다. 내가 만석(萬石)의 넓은 땅으로 봉하고, 9주의 목사직을 모두 준다고 해도 어찌 그대의 공적에 보답할 수 있겠는가?” (『고려사』권92 왕식렴 열전)
그런데 내용이 지나치다. ‘만석의 넓은 땅과 9주의 목사직’을 주어도 아까울 게 없다는 식으로 지나치게 왕식렴을 치켜세우고 있다. 이는 정종이 재위기간(4년) 내내 왕식렴에게 기대어 정치를 하겠다는 속내를 그대로 드러낸 것이다. 정종은 강한 군사력을 가진 측근에 기대다 장차 초래할 참혹한 대가를 알기나 하고 이런 말을 한 것일까?
왕규가 제거될 때, 연루자 300여 명이 죽임을 당했다. 박술희가 제거될 때도 그를 호위한 100여 명이 함께 제거됐을 것이다. 이같이 왕식렴 군대에 의해 수백 명이 살육당한 정변의 현장, 개경은 공포의 소용돌이에 휩싸였을 것이다. 최승로는 “혜종·정종·광종을 거치면서 개경과 서경의 문무관료 절반이 살해됐다”(『고려사』권93 최승로 열전)고 했다. 왕식렴이 숨진 뒤 광종의 개혁 때 희생된 관료 중엔 서경 관료가 많았겠지만, 개경 관료는 왕식렴이 가담한 혜종과 정종 때 일어난 왕자의 난으로 희생됐다. 이 때문에 왕식렴과 정종에 대한 개경 관료들 및 이들과 연결된 호족세력의 반감은 대단했을 것이다. 또한 정종의 외가 충주 세력 에 대한 반감도 적지 않았다.
공신 왕식렴을 과하게 치켜세운 진짜 이유
| | | ▲ 개심사(開心寺)터 5층석탑. 광군(光軍)이 이 탑의조성에 동원된 사실이 탑의 기단부에 기록되어 있다. 경북 예천 소재. | 수도 개경은 정종이 왕 노릇을 하는데 적당한 곳은 아니었다. 정치의 무대를 바꾸는 것이 필요했다. 그 대안은 강력한 후견인 왕식렴이 있는 서경이다. 정종이 왕식렴을 과분하게 치켜세운 건 그런 정치적 포석에서 나온 것이다. 정종이 서경 천도를 결심한 시점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즉위 직후 곧바로 천도를 생각했던 건 분명하다. 서경 천도는 어느 정도 명분도 있었다. 정종의 부왕 태조 왕건이 일찍부터 서경을 재건하고, 그곳을 도읍지로 삼으려 했던 적이 있기 때문이다. 태조는 즉위하자마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옛 고구려 도읍지 평양은 황폐한 지 비록 오래되었으나 터는 아직도 남아 있다. 가시밭이 우거져 오랑캐 사람들이 돌아다니며 사냥하다 우리 변경을 침략해 그 폐해가 크다. 백성을 옮겨 이곳에 거주하게 해 나라를 오래도록 이롭게 하겠다.”(『고려사』권1 태조 1년(918) 9월조)
이어 태조는 사촌동생인 왕식렴을 보내 평양을 지키게 했다. 14년이 지난 932년(태조 15) 5월, 왕건은 “서경을 완전히 보수하고 민호를 이곳으로 옮겨 채운 것은 이곳에 의지해 삼한을 평정하고 장차 여기에 도읍하려 한 것이다”(『고려사』권2)고 밝혔다.
평양 재건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 뒤 이곳으로 천도하려 했던 것이다. 천도는 이뤄지지 않았지만, 평양을 중시한 태조의 생각은 그가 숨지기 직전인 943년에 작성한 ‘훈요십조’ 5조에도 반영돼 있다.
“다섯째, 짐(태조)은 삼한 산천의 숨은 도움에 힘입어 대업(大業: 왕조의 창업)을 이루었다. 서경은 수덕(水德)이 순조로워 우리나라 지맥의 근본이며, 대업(大業)을 만대에 전할 땅이다. 마땅히 사중월(四仲月: 4계절의 중간 달)에 (국왕은) 그곳에 행차해 100일 이상 머물러 (나라의) 안녕을 이루도록 하라.”
태조는 천도는 할 수 없었지만, 국왕이 1년에 100일 이상 서경에 머무르며 왕조의 안녕을 빌 것을 희망했다. 풍수지리의 서경 길지(吉地)론이나 건국이념의 고구려 계승론 때문에 서경을 중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더 중요한 건 현실적인 이유다.
태조는 평양을 재건하기 위해 황주·봉주·해주·백주·염주 지역의 주민을 이주시켰다(『고려사절요』권1 태조 1년 9월조). 왜 이 지역 주민을 평양으로 이주시켰을까? 이들 지역은 옛 통일신라 최강의 부대인 패강진 부대의 근거지였다. 패강(浿江)은 지금의 대동강이다. 패강진 부대는 평양에서 평산까지, 즉 지금의 평안도 · 황해도 일대에 배치된 군대다. 중국 당나라는 신라의 삼국통일 뒤에도 이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해 신라가 함부로 개척할 수 없었다. 735년(성덕왕)이 돼서야 당나라가 비로소 이 지역을 신라의 영토로 승인한다. 신라는 군대를 파견해 패강진 일대를 본격 개척하기 시작한다. 패강진은 평양 부근에 있었다(조이옥, ‘통일신라 북방개척과 패강진’ 참고). 패강진 일대의 군대는 왕건 부자가 궁예에게 귀부할 때 궁예 휘하에 들어갔다가, 고려가 건국한 뒤엔 고려군에 편입되었다. 따라서 패강진 부대는 고려 초기에도 여전히 왕조 최강의 지상군이었다.
태조가 서경을 중시한 현실적인 이유는 이곳 호족세력의 지지를 얻어 그들의 군사력으로 후백제와의 전투에서 승리해 삼한을 통합하기 위해서였다. 서경 길지론과 고구려 계승론도 그런 명분의 하나로 내세워진 측면이 없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왕건이 삼한통합 후 서경으로 천도하지 못한 건 개경 기득권 세력의 완강한 반대 때문이었다. 개경이 왕건의 태생지이자 본거지라는 점도 그러했다. 후원자 왕식렴이 서경에 있었지만, 부왕의 선례로 보아 정종의 서경 천도 역시 쉽지 않은 일이었다. 정종이 서경 천도를 즉위 후 곧바로 실천에 옮기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다.
‘광군(光軍)’ 30만 조직 과정서 호족과 대립
서경 천도는 947년(정종 2)에 착수하는데, 그 계기는 거란의 위협이었다. 태조의 문사인 최언위의 아들 최광윤(崔光胤)은 중국 후진으로 유학을 가다가 거란에 체포되었다. 거란은 그의 뛰어난 재주를 알고 관리로 임용했다. 947년(정종 2) 그는 거란 사신으로 고려에 와서, 장차 거란이 고려를 침입할 것이란 사실을 알렸다. 정종은 그에 대비해 30만 명의 광군(光軍)을 조직하고, 그런 조직을 관리하는 전담기구로 광군사(光軍司)를 설치한다. 또 같은 해(947년) 거란의 침입에 대비해 평안도 지역을 중심으로 국경지역에 대대적인 축성도 한다.
축성은 단순히 성을 쌓고 방어시설을 설치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곳에 군사와 주민을 이주시켜 새로운 군사도시를 만드는 것이다. 축성은 서경을 방어할 배후도시를 건설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주목되는 것은 정종이 거란의 침입에 대비한다는 구실로 서북지역에 축성을 하면서 서경에도 축성을 한 점이다. 서경 천도는 이를 계기로 같은 해(947년: 정종 2) 실행에 옮겨진 것으로 판단된다.
즉위 직후 구상한 서경 천도가 반대에 부닥쳐 지체되다가, 거란의 위협을 명분으로 전국에 걸쳐 광군을 조직하고 국경지역에 축성을 하는 과정에서 본격적으로 개시된 것이다. 광군 30만은 실제 숫자이며, 중앙군이 아니라 지방 호족세력의 지휘 아래 조직된 전국 규모의 농민 예비군 성격을 지닌다. 광군은 유사시에 군사력으로 전환할 수 있는 부대다. 정종은 거란의 위협에 대처하는 가운데 호족이 지휘하는 군사력을 전국적으로 조직화했던 것이다.
경북 예천에 개심사(開心寺)터 5층석탑이 있다. 1011년(현종 2)에 완성된 석탑에 새겨진 기록에 따르면, 광군 46대(隊: 1대는 25명), 즉 1150명이 동원돼 1년 만에 이 탑을 완성했다고 한다. 광군이 조직된 지 50여 년이 지났으나, 광군은 여전히 지방 군사조직으로 석탑을 조성하는 등 각종 공역(工役)에 동원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광군은 뒷날 고려 지방군인 주현군으로 편제된다(이기백, ‘고려 광군고’).
광군의 조직은 결국 호족이 지닌 군사력을 중앙정부가 직접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정종의 중앙정부는 광군을 조직하는 과정에서 호족세력의 커다란 반발을 샀다. 서경 천도는 수도 개경 기득권층의 반발에 그쳤지만, 광군의 조직은 전국에 걸친 호족 세력의 반발을 불렀다. 이로 인해 서경 천도도 다시 커다란 압박을 받게 됐다. 정종이 천도에 착수한 지 2년 만인 949년(정종 4) 1월, 서경의 왕식렴이 갑자기 숨졌다. 그로부터 3개월 뒤인 949년 4월, 정종 또한 26세의 젊은 나이에 숨졌다. 같은 무렵 두 사람이 숨진 건 의문을 살 만한 일이다.
“(정종은) 도참을 믿어 서경으로 도읍을 옮기려 장정을 징발하고 시중인 권직(權直)에게 명령해 궁궐을 경영하게 했다. 노역이 끊이지 않았다. 또 개경의 민가를 뽑아 서경에 보내자, 사람들이 마음으로 복종하지 않아 원망이 일어났다. 왕이 죽자 노역에 시달린 사람들이 뛸 듯이 기뻐했다.”(『고려사절요』권2 정종 4년조)
정종의 서경 천도는 ‘사람들이 마음으로 복종하지 않고 원망을 불러일으킨’ 무모한 정책, 즉 민심의 지지를 받지 못한 정책이다. 더욱이 광군을 조직해 호족의 군사력을 직접 장악하려던 시도로 인해 반발은 더욱 거세었을 것이 분명하다. 두 마리 토끼를 쫓다 모두 놓친 꼴이다. 명분과 취지가 훌륭해도 지지를 받지 못한 정책은 성공하지 못한다는 건 변함없는 역사의 진리다.
- 중앙선데이 | 박종기 국민대 교수 | 제324호 | 2013.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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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고려에 귀화해 관리가 된 중국계 고려인 채인범의 묘지명. 국내에서 발견된 최초의 고려시대 묘지명이며, 규모가 가장 크다. [사진 국립중앙박물관] |
귀화인 쌍기를 재상 등용 … 중국계 관료 40명 달해 |
고려사의 재발견 · 광종(光宗) | ① 개방 정책
원나라의 고려 간섭기 때 역사가인 이제현(李齊賢·1287~1367년)이 충선왕과 나눈 대화 한 토막을 소개한다.
충선왕이 “우리나라(고려)의 문물 수준이 중국과 대등하다고 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라고 묻자 이제현은 고려 4대 왕 광종(光宗·927~975년, 949~975년 재위)을 예로 들며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광종 이후 문교(文敎)를 닦아 서울에 국학(國學·국자감), 지방에 향교와 학당을 세워 학교에서 글 읽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렸습니다. 문물이 중국과 다를 바 없다는 말은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고려사』 권110 이제현 열전)
이제현은 교육기관을 확충하고 중국의 선진 문물·제도를 익히게 해 고려의 문물을 중국에 버금가는 수준으로 높인 군주로 광종을 꼽았다. 광종은 호족을 대대적으로 숙청해 왕권을 강화한 전형적인 전제군주로 알려져 있다. 우리 학계 역시 광종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다. 광종의 호족 숙청이 당시 정계에 워낙 큰 광풍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제현은 문치(文治)와 교화(敎化)를 중시한 광종의 통치를 새롭게 평가했다. 나아가 이제현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광종이 쌍기(雙冀)를 등용한 것을 두고 ‘현명한 사람을 쓰는 데 차이를 두지 않았다’(立賢無方)고 말할 수 있을까? 쌍기가 현명한 사람이라면 어찌 임금을 착한 길로 이끌지 못하고 (임금이) 참소를 믿어 형벌을 함부로 쓰는 것을 막지 않았을까? (그러나) 과거를 실시하여 선비(文士)를 뽑은 것은 광종이 문사를 등용하여 풍속을 바로잡으려는(用文化俗) 뜻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쌍기 또한 그 뜻을 따라 아름다운 일을 이루는 데 보탬이 없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고려사』 권2 이제현의 광종에 대한 평가)
이제현은 주변의 아첨을 믿어 숙청을 단행한 광종의 전제정치와 이를 막지 못한 광종의 측근이자 중국 귀화인인 쌍기에 대해 아쉬움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중국 귀화인 쌍기를 등용하고, 그를 통해 과거제도를 실시해 훌륭한 선비를 발굴함으로써 고려의 학술과 문화 수준을 높인 점에서 광종에게 후한 점수를 주었다. 친소(親疏)와 귀천(貴賤)을 가리지 않은 광종의 ‘입현무방(立賢無方)’의 인재 등용책을 주목한 점은 눈여겨볼 대목이다.
쌍기 이어 아버지 쌍철까지 고위직 앉혀
이와 함께 “광종의 숙청을 막을 사람은 쌍기밖에 없다”는 이제현의 언급을 통해 쌍기와 같은 외국인 귀화 관료가 새로운 정치집단이 돼 광종 정치의 또 다른 중심축이 된 것도 확인하게 된다. 쌍기로 상징되는 외국인 관료의 채용은 광종 정치, 나아가 고려왕조의 개방성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쌍기는 중국 후주(後周)사람이다. 광종7년(956년) 광종을 책봉하는 사신으로 왔다가 병이 나 고려에 머물렀다. 그를 만난 광종이 재주가 있다고 여겨 중국에 요청해 고려에 머물게 했다. 발탁 1년도 되지 않아 쌍기는 문병(文柄·학술계의 권력)을 장악했다. 958년(광종9)에는 과거제도를 건의하였고, 여러 번 과거의 고시관으로 임명돼 학문을 권장하여 고려에 문풍(文風·학술 기운)이 비로소 일어났다. (중략) 959년(광종10) 아버지 쌍철(雙哲)도 아들이 광종의 총애를 받는다고 해서 고려에 와 좌승(佐丞·3품)에 임명되었다.”(『고려사』 권93 쌍기 열전)
쌍기의 건의로 과거제도가 실시되고, 그로 인해 학문이 권장되면서 학술 기운이 비로소 일어나게 되었다는 기록이다. 고려의 문물이 중화의 그것에 버금갔다는 이제현의 지적과 같은 내용이다. 즉 광종 때 고려의 문물 수준을 높이는 데 귀화인의 역할이 컸음을 보여준다. 광종은 외국인 쌍기만을 예외적으로 등용한 것일까? 그렇지 않다.
| | | ▲ 경기도 개풍군에 있는 광종의 묘 헌릉(憲陵). [사진 장경희 한서대 교수] | 고려시대 독특한 장례문화의 하나는 죽은 자의 일대기를 적은 비석을 지상에 세우지 않고 관과 함께 지하에 매장하는 것이다. 지상의 묘비명(墓碑銘)과 구분하여 묘지명(墓誌銘)이라 한다. 묘지명은 땅속에 매장됐기 때문에 많이 전해지지는 않는다. 현재 확인된 것은 약 320점이다. 이 가운데 가장 오래된 묘지명은 1024년(현종15)에 제작된 채인범(蔡仁範·934~998년)의 것이다. 그는 중국인으로 고려에 귀화한 관리다. 채인범의 묘지명은 그에 관한 유일한 기록이다.
“공(公)의 성은 채이고, 이름은 인범이다. 송나라 강남 천주(泉州) 사람이다. (중략) 970년(광종21) 고려에 와서 국왕을 뵀다. (광종은 채인범을) 예빈성낭중(禮賓省郎中·5품)에 임명하고, 주택 한 채와 노비·토지를 하사했다. 그리고 그에게 필요한 물품을 모두 국가에서 공급하라고 명령했다. 공은 경전과 역사에 널리 통달하고 문장을 잘 지어 임금을 보좌한, 큰 재주를 품은 대학자였다.”(채인범 묘지명)
광종이 외국인을 등용하여 고려를 선진화하려는 노력이 채인범의 묘지명 속에 상징적으로 기록돼 있다. 채인범과 같이 공식 역사기록은 없지만 고려 전기에 중국(오대 및 송나라)과 거란·발해·여진 등에서 많은 인물이 고려에 귀화하여 정착한다.
그중 관료가 된 사람은 주로 중국계 귀화인이다. 『고려사』에 기록된 인물만 40명 정도나 된다. 반 이상이 학자나 문인 계통의 인물이다. 대부분 관리가 됐고 나머지는 상인·음악인·승려·역관(譯官)·의술·무예·점성술 등에 능한 특수 기능을 가진 사람들이다. 이들도 능력에 따라 관직을 얻은 경우가 있다. 이 가운데 쌍기와 같이 재상이 되는 등 행적이 뚜렷하여 『고려사』 열전에 수록된 인물은 거란 출신 위초(尉貂·효행)와 발해 출신 유충정(劉忠正·국왕의 총신)을 포함해 중국인 주저(周佇·재상)·유재(劉載·재상)·신수(愼脩·재상)·신안지(愼安之·재상)·쌍철(3품)·호종단(胡宗旦·5품)·임완(林完·6품) 등 모두 10명이다(박옥걸, 『고려시대의 귀화인 연구』).
외국인 기술자도 '글로벌 코리아' 혜택
우리 역사에서 외국인 출신이 고위 관료가 돼 중요한 정책을 입안하고 실행한 적이 있었던가? 박근혜정부 출범 직후 재미 한국인조차 입각에 실패한 적이 있다.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지만 능력을 구비한 인재를 가리지 않고 등용한, 광종의 ‘입현무방’의 인재 등용이 쉽지 않음을 누구나 실감했을 것이다. 천년 전 고려왕조가 능력 있는 외국인을 고위 관료로 등용한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고려 개방 정책의 아이콘은 이러한 인재 등용에서 찾을 수 있다. 요즘 표현대로 고려는 국제화·세계화를 성공적으로 이룩한 왕조, 즉 ‘글로벌 코리아’의 원조(元祖)가 되는 셈이다.
고려는 당시 세계의 중심인 중국의 선진 제도와 문물을 수용하여 호족에 좌지우지 되는 낡은 관료 시스템을 바꾸려 했다. 많은 외국인이 관리가 된 것은 결코 우연한 현상이 아니었다. 이 정책은 광종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11세기 초 고려는 관료 엘리트뿐만 아니라 기술자들도 정책적으로 받아들였다.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고려에 항복한 거란 포로 수만 명 가운데 10명 중 1명은 기술자인데, 그 가운데 기술이 정교한 자를 뽑아 고려에 머물게 했다. 이들로 인해 고려의 그릇과 옷 제조 기술이 더욱 정교하게 되었다.” (『고려도경』 권19 民庶 工技조).
포로는 노비로 만들어 공을 세운 사람에게 분배하는데, 고려는 기술자를 가려 그들의 기술을 활용하려 했던 것이다. 11세기 중엽 문종은 송나라 진사 출신인 장정(張廷)이 귀화하자 그에게 벼슬을 내렸다. 이어 훌륭한 선비를 얻은 기쁨을 말하며 “타산(他山)의 돌이라도 나에게는 쓸모가 있는 것이다”(『고려사』 권5 문종 5년(1052) 6월조)라고 했다. 나라에 도움이 된다면 국적을 가리지 않고 등용한다는 문종의 생각은 고려왕조의 전성기를 이끈 국왕의 리더십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고려 수도에는 중국인 수백 명이 있다. 민(·중국 복건성) 지역 사람이 많은데, 상선을 타고 왔다. 고려는 몰래 그들의 재능을 시험·회유하여 관리로 삼거나 강제로 평생 머물게 했다. 중국의 사신이 오면 이들 중 일부는 진정을 하여 귀국하기도 했다.”(『宋史』 고려 전)
수도 개경에 많은 중국인이 들어왔고, 고려 정부는 재능 있는 자를 가려 관리로 삼아 고려에 머물게 했다. 12세기 무렵 고려의 적극적인 개방 정책을 엿볼 수 있다. 광종은 그 개방 정책의 물꼬를 튼 군주였다. 이는 군사와 경제력에 의존하던 호족의 권력 정치를 청산하고 유교와 선진 문물에 눈뜬 문신 중심의 문치주의 정치를 열게 한 신호탄이었다. 광종의 정치를 재평가하는 이유의 하나는 바로 여기에 있다.
- 중앙선데이 | 박종기 국민대 교수 | 제325호 | 2013.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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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광종이 951년(광종 2년)에 어머니 신성황후 유씨를 위해 개경에 사찰 ‘불일사(佛日寺)’를 지으면서 세운 탑이다. 불일사 5층 석탑으로 불리며 장중하면서 웅건한 느낌을 준다. [사진 박종기] |
노비안검법·과거제 도입으로 정치판 물갈이 |
고려사의 재발견 · 광종(光宗) | ② 관료제 정비
고려 중기 문장가 이규보(1168~1241년)는 어느 지방 관원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고을을 다스리는 방법은 관대함과 엄격함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중용을 얻는 데 있다(要不過寬猛得中耳). (중략) (지방관이) 엄하기만 하면 힘이 들어 백성이 떠나가게 되고, 관대하기만 하면 백성이 윗사람을 얕봐 방자해진다. 두 가지를 함께해야 백성들이 (지방관을) 하늘같이 두려워하고 부모같이 사랑하게 돼 잘 다스려진다.” (『동국이상국집』 권27 ‘어느 書記에게 보낸 편지’)
관대함과 엄격함은 당근?채찍과 같은 양면성을 지니지만, 고을을 다스리는 지방관만이 아니라 나라를 다스리는 제왕에게 필요한 덕목이다. 이를 겸비한 제왕은 흔치 않다. 광종은 그것을 겸비한 군주였다.
외국인 관료를 우대한 건 광종의 관대한 통치의 일면을 보여준다. 반면에 광종이 호족 숙청과 과거제 실시로 정치판과 관료 시스템을 물갈이한 건 채찍과 같은 엄격한 통치의 일면을 보여준다. 당시 지배층 여론은 광종의 외국인 관료 우대 정책에 호의적이지 않았다.
서필(徐弼)은 광종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요즘 투화인(投化人·귀화인)들이 벼슬과 집을 골라 차지하여 세신(世臣·기존 관료)들은 거처할 곳을 잃을 정도입니다. 재상인 저의 집은 원래 제 소유가 아니니 가져가시고, 저는 녹봉을 아껴 작은 집을 지어 살겠습니다.”(『고려사』 권93 서필 열전)
서필은 재상으로 고려 정계의 원로였다. 뒷날 거란과의 전쟁 때 압록강 동쪽 280리 땅을 고려 영토로 편입시킨 그의 아들 서희(徐熙)는 광종 때 처음 실시된 과거에 합격해 관료가 됐다. 서필 집안은 광종 정책의 수혜자였지만, 서필은 정계 원로로서 광종 정치에 불만을 가진 세력을 대변해 이같이 말한 것이다.
“(광종은) 쌍기를 등용한 뒤 문사(文士)를 지나치게 존중하고 우대했다. 이로 인해 재주 없는 자가 마구 승진해 1년도 되지 않아 재상이 된 자도 있다. (중략) (광종은) 화풍(華風·중국의 문물과 제도)을 중하게 여겼으나, 중국의 좋은 제도와 법은 받아들이지 못했다. 화사(華士·중국의 선비)를 예우한다고 했으나, 중국의 현명한 인재는 얻지 못했다.”(『고려사』 권93 최승로 열전)
서필에 이어 유학자의 대표 격인 최승로(崔承老)도 광종을 이같이 비판했다. 두 사람의 발언을 통해 쌍기 등 중국인 귀화 관료를 중용한 광종의 인재 등용책에 불만을 가진 세력이 상당했음이 드러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종은 왜 이런 정책을 강행했을까?
호족 숙청의 신호탄, 노비안검법
광종의 형이자 선왕인 정종은 서경(평양) 군벌 왕식렴의 도움으로 즉위했다. 그 때문에 정종은 서경으로 천도해 왕식렴에 의지해 정치를 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광종은 호족 세력에 의지한 정종의 정치에 분명한 한계가 있음을 통감(痛感)했다. 왕식렴은 숨졌지만 신라 패강진 부대의 전통을 이은 서경 세력은 광종 시대에도 여전히 최대 군벌로서 왕권을 위협하는 존재였다. 광종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쌍기 등 중국계 귀화인 관료를 등용시켜 정치판을 물갈이하려 했다.
| | | ▲ 충북 청주의 ‘용두사’ 터에 있는 철당간(왼쪽). 표면에 “준풍(광종의 연호) 3년( 962년 광종 13년)에 건립됐다”는 기록이 새겨져 있다. [사진 문화재청] | 광종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호족 세력을 약화시키는 더욱 충격적인 조치를 취한다. 956년(광종7)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을 시행한 것이다. 호족들을 대상으로 노비 소유의 불법 여부를 가리겠다는 정책이다.
“왕조 건국 당시 공신들은 원래 소유한 노비에다 전쟁에서 얻은 포로 노비와 거래를 통해 얻은 매매 노비를 갖고 있었다. 태조는 포로 노비를 해방하려 했으나 공신들이 동요할까 염려하여 그들의 편의에 맡긴 지 약 60년이 되었다. 광종이 처음으로 공신들의 노비를 조사하여 불법으로 소유한 노비를 가려내자, 공신들은 모두 불만으로 가득 찼다. 대목왕후(大穆王后·광종비)가 광종에게 그만둘 것을 간절히 말해도 듣지 않았다.”(『고려사』 권93 최승로 열전)
노비는 호족들에게 토지와 함께 당시 중요한 재산의 일부였다. 그런데 광종은 호족들이 불법으로 취득한 노비는 해방시키거나 원래 주인에게 되돌려주겠다고 나선 것이다. 호족의 군사?경제 기반을 약화시키려는 조치였다. 요즘의 금융실명제에 버금가는 충격이었을 것이다. 서경 출신인 대목왕후가 남편 광종에게 노비안검법 시행 중단을 요청한 건 서경 출신 호족 세력의 입장이 반영된 것이다. 숙청의 화살이 최대 세력인 서경의 호족 세력을 겨냥하고 있었다는 간접적인 증거다. 그만큼 이 조치는 충격적이었다.
“박수경(朴守卿)이 죽었다. 정종이 즉위한 초기에 내란을 평정한 것은 대부분 박수경의 공이다. 그런데 이때 아들 승위(承位)·승경(承景)·승례(承禮)가 참소를 입어 옥에 갇히자, 수경이 근심하고 분노하여 죽었다.” (『고려사절요』 권2 광종 15년(964))
박수경은 황해도 평산의 호족으로 서경의 왕식렴과 함께 정종의 즉위에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왕식렴이 숨진 뒤엔 지금의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을 대표하는 군벌로 떠올랐다. 그의 딸은 태조의 28비 몽량원부인(夢良院夫人)이다. 박수경이 분노와 근심으로 스스로 죽었다지만, 광종이 그의 아들들을 숙청한 건 바로 당시 최대 군벌이었던 박수경을 겨냥한 것이었다. 박수경의 죽음은 가장 큰 호족 세력이 제거돼 광종의 숙청 작업이 성공했음을 간접적으로 알려준다. 다음 기록은 당시 호족 숙청의 실상을 잘 보여준다.
“일찍이 혜종·정종·광종이 서로 왕위를 이은 (고려 왕조의) 처음에는 모든 일이 편하지 않아 개경과 서경의 문무 관료가 절반이나 살상되었다. 광종 말년에는 세상이 어지럽고 참언(讒言)이 일어나 무릇 형장에 끌려간 사람은 대부분 죄 없는 사람이었다. 오래된 공신과 장군은 거의 죽음을 당했다. 경종이 즉위할 당시 옛 신하 가운데 살아남은 사람은 40여 명에 불과했다.”(『고려사』 권93 최승로 열전)
정치권의 대대적인 물갈이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광종은 호족뿐 아니라 왕실까지 숙청했다.
숙청 피해 살아남은 신하는 40여 명뿐
“960년(광종11)부터 975년(광종26)의 16년간 간사하고 흉악한 무리가 상대방을 참소하는 풍조가 크게 일어나 군자는 들어설 수 없고 소인이 뜻을 얻었다. (중략) 하물며 혜종과 정종의 외아들도 목숨을 유지하지 못했다. (광종은) 말년에는 자신의 외아들(*경종)까지 의심해 (다음 왕인) 경종은 불안해 하다가 겨우 왕위에 올랐다. 통탄할 일이다.”(최승로 열전)
광종의 조카인 두 형의 아들까지 목숨을 잃었고, 심지어 아들까지 한때 위태로운 지경에 처했던 것이다. 광종이 처가인 서경 세력을 의심했기 때문이다.
광종 숙청의 주된 표적은 당시 최대 군벌인 서경의 호족 세력이었다. 광종이 960년(광종11) 개경을 황도(皇都), 서경을 서도(西都)라고 이름을 고쳐 정종의 서경 우대정책을 버리고 개경 중심의 정치를 천명한 것도 그 때문이다. 광종은 같은 해 ‘준풍(峻豊)’이란 독자적인 연호를 제정했다. 현재 청주의 용두사(龍頭寺) 터에 쇠로 만든 당간(幢竿)이 있다. “준풍(峻豊) 3년 (962·광종13)에 건립됐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광종의 치세를 독자적인 연호로 표기했음을 알려준다.
광종은 958년(광종9) 처음으로 과거제도를 실시했다. 중국 귀화인 쌍기와 왕융(王融)이 고시관이 돼 재위 동안 여덟 차례 과거시험을 시행했다. 합격한 인물 가운데 공신과 호족 출신의 자제는 거의 찾을 수 없다. 옛 신라와 후백제 출신이나 서희와 같은 중부지역 출신 등의 새로운 인물들이 합격했다. 이런 인물들이 호족 세력을 대신해 새로운 관료집단으로 등장했다. 숙청이 인위적인 쇄신이라면, 과거제도는 호족 중심의 정치질서를 청산하고 능력과 실력을 갖춘 유교 관료가 지배 엘리트로 충원된 자연스러운 물갈이였다.
“이로 인해 남북의 용인(庸人·어리석은 사람)이 다투듯이 몰려왔다. 지혜와 재능을 따지지 않고 특별한 대우를 했다. 그런 까닭에 ‘후생(後生)’은 앞을 다투며 관리가 되었으나, ‘구덕(舊德·태조 이래 중용된 공신과 관료층)’은 점차 쇠락하였다.” (『고려사』 권93 최승로 열전)
최승로는 새로운 관료집단의 등장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그가 언급한 ‘남북 용인’ ‘후생’은 과거를 통해 등장한 새로운 관료집단이며, ‘구덕’은 태조 이래 중용된 공신과 관료집단이다. 하지만 최승로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광종의 과거제 실시는 문신이 정치, 문화를 주도하는 문치주의를 자연스럽게 뿌리내리게 했다.
- 중앙선데이 | 박종기 국민대 교수 | 제326호 | 2013.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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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경기도 하남시 교산동 선법사라는 작은 절 뒤에 있는 마애약사불좌상(보물 제981호). “지금 황제(*경종)의 만수무강을 빈다”는 명문(銘文)이 삼각형 바위 왼쪽에 새겨져 있다. ‘태평 2년(977·경종 2년)’은 좌상이 만들어진 시점이다. 태평은 송나라 태종의 연호다. 경종은 연호를 송나라 것을 쓰되, 스스로를 황제라 칭했다. 조용철 기자 |
경종의 네 왕비는 고종사촌, 친사촌, 외사촌 자매 |
고려사의 재발견 · 경종 | ① 왕실의 근친혼
고려 5대 국왕 경종(景宗: 955∼981년, 975∼981년 재위)은 6세 되던 960년부터 즉위 직전까지 15년간 지속된 광종이 일으킨 숙청의 광풍을 뚫고 어렵사리 즉위한다.
“경종은 깊은 궁중에서 태어나 부인(*광종의 부인 대목왕후)의 손에 자랐다. 따라서 궁궐 문 밖의 일은 일찍이 본 적이 없고 알지도 못했다. 다만 천성이 총명하여 아버지 광종의 말년에 겨우 죽음을 면해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다.” (『고려사』 권93 최승로 열전)
숙청의 회오리바람은 경종의 사촌이자, 혜종과 정종 아들의 목숨까지 앗아갔다. 막강한 친정 서경세력을 등에 업은 어머니의 보호로 경종은 겨우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성장한 경종에게 영특한 군왕의 자질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옳고 그름을 분간하지 못하고, 상 주고 벌 주는 것이 고르지 않은 것이 통치에도 영향을 끼쳤다. 정치를 게을리하고, 여색과 향락, 바둑과 장기에 빠졌다. 그의 주위에는 내시들뿐이었다. 군자의 말은 외면하고 소인의 말만 들었다. 처음은 있으나 끝이 없다는 말이 그를 두고 한 말이니, 충신의사들이 통분할 일이 아닌가?”(『고려사』 권93 최승로 열전)
드러내 놓을 만한 치적이 없다는 얘기다. 자식을 따뜻하게 보듬지 못한, 강한 개성의 부모 아래 자란 자식에게 나타나는 유약성이 경종에겐 이런 모습으로 나타난다. 부모의 영향력은 그의 혼인관계에서도 드러난다.
경종의 1비 헌숙왕후 김씨는 광종의 친누이 낙랑공주와 신라 경순왕 김부 사이에 태어난 딸이다. 경종과 고종사촌이다. 2비 헌의왕후 유씨(劉氏)는 광종의 동생 (경종의 삼촌)인 문원(文元)대왕의 딸로서 경종과 4촌이다. 3비 헌애왕후 황보씨와 4비 헌정왕후는 자매 사이로, 어머니 대목왕후의 동생인 대종(戴宗: 경종 외삼촌)의 딸이다. 경종과는 외4촌이다. 경종의 비는 이같이 모두 경종과 4촌 간이다. 근친혼(近親婚)으로 왕비를 맞아들인 것이다.
왕권 지키기 위해 왕족 끼리끼리 결혼
부전자전이랄까? 광종은 근친혼을 한 첫 국왕이다. 1비 대목왕후는 태조와 4비 신정왕후 황보씨 사이에 태어난 딸로서, 광종의 배다른 형제다. 2비 경화궁부인은 형 혜종의 딸로서, 광종의 조카다. 이같이 국왕이 근친혼을 한 첫 사례는 태조의 아들 광종에서 찾을 수 있는데, 태조가 낳은 9명의 공주 가운데 신라 경순왕과 혼인한 2명을 제외하면 모두 근친혼을 했다(1명 미상). 고려왕실의 근친혼은 태조 때부터 시작되었다. 경종을 잇는 성종과 목종의 비도 각각 4촌·6촌과 근친혼을 한다.
근친혼은 이후 고려왕실 혼인 형태의 하나로 굳어지는데, 다음과 같은 패턴이 반복된다. 먼저, 국왕은 왕실이 아닌 이성(異姓)과 혼인하더라도 왕비 1명은 반드시 근친혼을 한다. 그 다음, 태어난 공주는 어머니 쪽 성씨인 모성(母姓)을 사용한다. 경종의 어머니 대목왕후는 태조의 딸이나 그 어머니 신정왕후 황보씨(태조 4비)의 성을 따라 황보씨라 한 것이 그 예다. 근친혼의 전통은 고려에서가 아니라, 이미 신라왕실에서 나타난다.
“같은 성씨를 아내로 맞아들이지 않는 것은 분별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다. 신라의 경우 같은 성씨는 물론 형제의 자식과 고종 이종 자매까지 아내를 삼았다. 이는 도리에 크게 어긋나는 일이다.”(『삼국사기』권3 신라본기3 내물이사금조)
김부식은 『삼국사기』(1145년)에서 신라 내물왕이 삼촌인 미추왕의 딸을 왕비로 삼은 사실을 이같이 비난했다. 유교는 ‘동성불혼(同姓不婚)’의 원칙을 강조한다. 유교사가인 그에게 근친혼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고려사』를 편찬한 조선 초기 역사가 역시 고려의 근친혼을 심하게 비난했다.
“태조는 옛것을 본받아 풍속을 교화하려는 뜻을 가졌다. 그런데도 토착적인 풍습에 젖어 아들을 딸에게 장가보내고, 딸은 외가성을 따르게 했다. 자손들도 (근친혼을) 가법(家法)으로 삼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애석하다. 부부는 인륜의 근본이다. 나라가 잘 다스려지거나 어지러운 것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려사』 권88 후비전 서문)
| | | ▲ 고려의 근친혼 풍습을 비난한 『동국통감』. 조선 성종 때 편찬됐다 | 근친혼은 인륜의 근본을 무너뜨려 국가의 운명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논리로 근친혼을 비난했다. 윤리적 차원에서 용납할 수 없다는 생각이 김부식과 같다. 한편 『동국통감(東國通鑑)』(1485년)을 편찬한 역사가들은 현실적인 이유에서 근친혼을 비난했다.
“『좌전(左傳)』에 ‘남녀가 성이 같으면 태어나는 자손이 번성하지 못하다’고 했다. 같은 성씨 사이에도 그러한데, 더구나 아주 가까운 친족 간엔 어떻겠는가? 이제 그 고모나 자매에게 장가든 사람을 보면, 대개 후손이 없는 사람이 많다. (고려가) 오백 년의 오랜 세월을 지났어도 종손과 지손(支孫)이 결국 수십 인에 지나지 않았다. 이것을 본다면 선왕(先王)이 (동성불혼의) 예를 제정한 뜻이 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경계할 일이다.” (『동국통감(東國通鑑)』高麗紀 혜종 2년조 작은사진)
고려 오백 년간 왕실의 자손이 번창하지 못한 원인을 근친혼에서 찾았다. 윤리 문제가 아니라 유전적인 결함의 위험성을 거론하며, 근친혼의 문제점을 비판했다.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왕실의 내밀한 사실을 역사의 붓자루를 쥔 그들이 기록으로 남길 리야 없겠지만, 간접적이나마 그런 실례는 찾을 수 있다.
건국 백 년 지나서야 다른 성씨와 혼사
고려 역대 34명 국왕의 비는 모두 135명이다. 국왕 1명당 평균 3.97명, 대략 4명의 왕비를 두었다. 혼인하지 않은 국왕 4명을 제외하면 평균 4.5명, 즉 4명 내지 5명의 비를 둔 셈이다. 출생한 전체 자녀는 164명이다. 비가 없는 국왕을 제외하면 평균 5.5명으로 약 5~6명의 자녀를 두었다. 1명의 비가 평균 1명 정도의 자녀를 출산한 셈이다. 가족관계가 기록된 묘지명 약 220점을 분석하면, 고려 관료의 평균 자녀 숫자는 4명 정도다. 당시 일부일처제인 점을 감안하면, 관료의 경우 1명의 부인이 4명의 자녀를 출산한 셈이다. 결국 국왕의 자녀 출산은 관료의 4분의 1에 불과할 정도로 출산율이 매우 낮은 셈이다.
한편 묘지명에 따르면 관료의 평균 사망 연령은 65.5세다. 『고려사』열전에 사망 연령이 기록된 관료 176명의 평균 사망 연령은 60.7세다. 그에 비해 국왕의 평균 사망 연령은 42.3세에 불과하여, 일반 관료의 사망 연령과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이러한 통계만으로도 유전적 결함의 흔적을 간접적으로 엿볼 수 있다.
그 때문인지 몰라도 고려가 건국된 지 약 백 년이 지난 현종 때 김은부(金殷傅)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인다. 고려 왕실이 이성(異姓) 후비를 왕비로 맞아들이고, 여기에서 태어난 왕자가 다음 국왕으로 즉위한 예는 현종이 처음이다. 물론 이후에도 근친혼의 관례는 지켜지나, 근친혼 대신 이성 후비에게서 태어난 자식이 예외 없이 국왕으로 즉위한다. 현종 이후 인종 때까지 고려 전기 왕비 가운데 근친혼 출신 왕비는 6명, 이성 왕비는 24명으로, 이성 출신의 왕비 숫자도 늘어난다. 이성 후비와의 혼인은 유전적인 결함의 폐해를 막기 위한 고육책의 하나가 아닐까 생각된다.
유교 이념 취약했던 것도 근친혼 원인
왜 고려왕실은 근친혼을 했을까? 건국 당시 고려왕실은 송악 출신의 호족세력에 불과할 정도로 상대적으로 미약했다. 태조는 통합전쟁에서 호족세력의 협조를 얻기 위해 그들의 딸과 혼인하면서, 많은 부인을 두었다. 태어난 자녀들이 왕실 외부세력과 혼인관계를 맺을 경우, 태조가 죽은 뒤 왕규의 발호에서 보는 것처럼 왕실이 위태롭게 될 것을 염려했던 것이다. 29명의 부인에게서 태어난 많은 자녀는 근친혼을 할 여건이 되었다. 근친혼은 왕실과 왕권의 안정과 강화를 위해 고려왕실이 택한 불가피한 혼인 형태였다.
다음, 동성불혼의 원칙을 강조한 유교 정치이념이 보편화되지 못한 당시 사상풍토가 근친혼이 성행한 원인의 하나였다. 유교 정치이념은 국왕은 ‘천명지(天命之)’, 즉 하늘이 명한 것이라는 이른바 천명사상(天命思想)에 의해 초월적인 존재로 상징화시키고, 신하는 능력과 실력에 의해 충원된다는 엄격한 군신관계를 강조한다. 고려왕조 성립기엔 그런 이념기반이 취약하여 근친혼을 통해 국왕과 왕실의 세력기반을 강화하려 했다.
현종 이후 유교 정치이념이 뿌리를 내리고 왕권과 왕실이 안정되기 시작하는데, 이성 후비와의 혼인은 이런 사정과도 관련이 있다. 왕권과 왕실이 점차 안정되자 도리어 유력가문의 딸을 맞아들이고 외척가문을 왕실의 울타리로 삼으려 했던 것이다. 근친혼이든 이성과의 혼인이든 왕권 강화와 왕실 세력기반을 유지하려 한 점에서 혼인의 법칙이 달라진 것은 아니다. 현대 사회의 유력한 정치·경제 실력자들 사이 혼인도 그 점에서 예외는 아니다. 역사로부터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이렇게 넓고도 깊다.
- 중앙선데이 | 박종기 국민대 교수 | 제327호 | 2013.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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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경기도 여주군 산북면에 있는 서희(942~998) 장군 부부의 묘. 그가 숨진 998년(목종 1년) 조성됐다. 1977년 10월 13일 경기도기념물 제36호로 지정됐다. 조용철 기자 |
‘쓴소리 학자’ 최승로 재상 앉혀 국가 틀 잡다 |
고려사의 재발견 · 성종 | ① 인재등용
고려의 6대 국왕 성종(成宗 · 981~997년 재위, 960~997년)에 대해 고려 후기 유학자 이제현은 다음과 같이 평했다.
“(성종은) 종묘를 세우고 사직을 정했다. 학교 재정을 넉넉하게 해 선비를 양성했고, 직접 시험을 치러 어진 사람을 구했다. 수령을 독려하여 어려운 백성을 돕게 하고, 효성과 절의를 권장하여 풍속을 아름답게 했다. (중략) 뜻이 있어 함께 일을 할 수 있다는 말이 있는데, 성종이야말로 바로 그런 어진 군주(賢主)다.” (『고려사』 권3 성종 16년 10월)
성종이 고려 종묘와 사직의 완성, 인재의 양성과 발탁, 민생의 교화와 안정을 이룩 했다는 점에서 현군(賢君)으로 평가한 것이다. 그에게 붙여진 묘호(廟號:국왕 제사 때 호칭)인 ‘성종(成宗)’은 한 왕조의 기틀이 되는 이른바 ‘법과 제도’를 완성한 군주에게 붙여지는 호칭이다. 조선의 법과 제도를 담은 『경국대전(經國大典)』(1485년)을 완성한 국왕을 성종(1469~1494년)이라 했듯이 고려의 성종 역시 그런 호칭에 걸맞은 군주였다.
그러나 성종은 왕실 안팎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즉위하지는 못했다. 전왕 경종에게 아들 ‘송’(誦:성종 사후 목종으로 즉위)이 있어 경종의 사촌인 성종은 왕위 계승의 적자는 아니었다. 그러나 경종이 숨질 때 아들 송은 두 살에 불과해 22세인 성종이 대신 즉위한 것이다. 성종은 전왕 경종과 후왕 목종의 모후의 출신지인 서경세력보다는 광종의 외가인 태조의 3비 충주 유씨 세력의 지원으로 즉위했다. 혼인 경험이 있던 광종의 딸 문덕(文德)왕후와 재혼한 것도 그 때문이다. 왕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지 못한 증거다.
경종의 사촌 … 두 살짜리 조카 제치고 즉위
경종은 재위 6년 만에 숨졌다. 광종의 무자비한 숙청에 피해를 본 세력이 여전히 조야에 포진하고 있어 광종의 개혁정치는 실종될 위기에 처해 있었다. 그런 가운데도 성종은 광종의 정치를 계승하여 고려왕조의 면모를 일신하는 정책을 펼쳐나갔다. 17년 재위 기간 중 거란과 전쟁까지 치렀지만, 성종은 고려의 역대 국왕 가운데 ‘어진 군주(賢主)’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치세술(治世術)은 무엇일까?
우선 성종은 즉위 직후 언로(言路)를 개방했다. 5품 이상 모든 관료에게 현안에 대한 의견을 올리게 했다. 그 가운데 성종의 귀에 거슬릴 정도로 성종을 비판한 28가지 조항의 최승로(崔承老)의 시무상소가 전해지고 있다. 시무상소에서 최승로는 광종의 개혁도 신랄하게 비판했다.
“광종 즉위 후 8년간의 정치는 깨끗하고 공평하였으며, 상벌에서 지나침이 없었다. 그러나 중국인 쌍기를 등용한 후 그를 지나치게 대우하면서 재주 없는 자들이 함부로 벼슬길로 나아갔다. (중략) 광종은 화풍(華風:중국의 선진문물제도)을 존중 했으나, 중국의 아름다운 제도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화사(華士:중국 선비)를 예우했으나, 중국의 어진 인재를 얻지 못했다.”(『고려사』 권93 최승로 열전)
경주 출신의 신라계 유학자인 최승로는 광종이 쌍기를 비롯한 귀화인과, 과거를 통해 발탁된 신진세력에 의존해 개혁을 하려다 실패했다고 주장했다. 개혁을 주도할 만한 인재가 부족해 개혁에 실패했다는 것이다. 호족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옛 신라와 후백제 출신의 유교 정치가들도 광종 개혁에 대단히 비판적이었다. 이들은 일찍이 당나라에 유학하여 중국의 선진문물을 보고 익힌 뒤 귀국해 태조 때 중용되어 크게 활동했다. 그런데 광종은 이들을 배제하고 쌍기와 같은 중국계 귀화관료를 중용하여 왕조의 면모를 일신하려 했다. 최승로는 그러한 광종의 정치를 비판한 유학자의 대표격이다.
즉위 직후 광종의 정책을 계승하려던 성종에게 최승로는 마뜩찮은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성종은 이같이 비판적인 인물을 재상으로 기용했다. 광종이 추구한 화풍정책의 한계를 보완하여 왕조의 면모를 일신하려 한 것이다. 군주들이 언로를 열다가도 따가운 비판에 마음을 닫는 경우가 다반사지만, 성종은 끝까지 마음을 열어 신하들의 비판을 듣고 정책에 반영했다.
인적 청산에 치중한 광종과 달리 성종은 제도 개혁을 단행하여 고려의 법과 제도를 완성했다. 즉 최승로 계통의 ‘화풍파’(중국 문물 도입을 주장하는 유학자 집단) 관료들을 통해 중국의 선진문물을 수용하고, 3성6부와 같은 정치제도 및 2군6위와 같은 군사제도를 완비했다. 또한 호족세력을 약화시키고 중앙정부가 직접 지방을 지배하도록 행정제도도 개혁했다.
다양한 스펙트럼의 인재를 적재적소 배치
성종 재위 중 최대 위기는 993년(성종12) 거란의 고려 침입이다. 조정에선 서경 이북의 땅을 거란에 떼어주고 화해하자는 이른바 ‘할지론(割地論)’이 제기되었다. 학자 출신 관료들이 성종에게 그렇게 건의했다. 그러나 서희(徐熙)는 “적과 만나 그들의 의도를 살핀 뒤 결정해도 늦지 않다”고 성종을 설득했다. 이어 서희는 직접 거란 진영을 찾아가 사령관 소손녕과 담판했다. 그는 거란의 고려 침입이 고려와 송의 관계를 단절 하려는 데 있음을 파악하고 관계 단절의 대가로 압록강 이동 지역을 확보했다.
서희는 화풍을 강조한 유학자 출신의 관료집단과 달리 고려의 전통문화를 강조한 인물이다. 고려 고유의 전통문화를 당시엔 ‘토풍(土風)’ 혹은 ‘국풍(國風)’이라 했다. 서희는 국풍파의 대표격이다.
성종은 즉위 직후 서희와 같은 고려의 전통을 중시하는 관료집단을 개혁정치의 또 다른 우군으로 끌어안아 서희에게 오늘의 국방장관에 해당하는 병관어사(兵官御事)의 벼슬을 내렸다. 화풍을 중시한 성종은 이렇게 자신과 성향이 다른 정치인도 받아들였다. 가치와 생각이 다르더라도 훌륭한 재목이라면 발탁하여 미래 정치의 자산으로 삼았다. 이 때문에 서희와 같이 거란의 침입 앞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왕조를 위기에서 구하는 데 앞장선 인물이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
역시 국풍파 관료였던 이지백(李知白)은 거란의 침입 앞에서 마치 적전 분열처럼 비칠 정도로 과감하게 할지론과 성종의 화풍정책을 비판했다.
“가볍게 토지를 떼어 적국에 주기보다 선왕(先王, 태조)이 강조한 연등(燃燈) · 팔관(八關) · 선랑(仙郞) 등의 행사를 다시 시행하고 다른 나라의 법을 본받지 않는 것이 나라의 보전과 태평을 이루는 일입니다. 그렇게 하고서 하늘에 고한 뒤 싸울 것인가 화해할 것인가를 임금께서 결단해야 합니다.”
성종은 이지백의 말을 따랐다. 성종이 화풍을 좋아하고 사모하자 나라 사람들이 기뻐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지백이 이같이 말했던 것이다.(『고려사』 권94 서희 열전)
이지백은 팔관회·연등회의 전통 의례를 통해 민심을 결집시키는 것이 거란의 침입을 막는 지름길로 인식했다. 화풍을 추구한 성종의 정책을 좋아하지 않는 민심을 등에 업고 나온 발언이었다.
또 다른 국풍파 관료 한언공도 성종이 중국의 화폐제도를 도입하려 하자 제동을 건다. “고려의 현실에 맞지 않다”고 성종을 설득해 중단시킨 것이다. 서희 · 이지백 · 한언공은 화풍 중심의 일방적 제도 개혁의 속도를 조절할 것을 성종에게 건의하고, 고려의 전통문화인 국풍의 중요성을 강조한 인물들이다. 성종은 이들의 건의를 귀담아 듣고 그것을 정책에 반영하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성종은 이념 성향이 다른 인물들을 써 자신의 정치적 자산으로 만든, 독특한 인재 등용책을 구사한 군주였다. 그렇다고 다양한 세력의 틈바구니에 휘둘려 아무것도 하지 못한 무능한 군주도 아니었다. 그는 호족 중심의 낡은 정치와 관료 시스템을 물갈이하려 했던 광종의 개혁을 완성하는 것을 통치의 목표로 삼았다. 화풍정책을 계승해 중국의 선진문물을 수용함으로써 고려의 정치·경제·군사 제도를 개혁해 왕조의 체제를 새롭게 하려 했다. 인적 청산에 집중했던 광종과는 이런 점에서 달랐다.
위기의 시대에 소외된 정치세력은 외부의 적보다 더 무서운 적이 될 수 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진리다. 성종은 이런 평범한 진리를 받아들여 실천했다. 화풍 성향의 유교 관료집단과 국풍 성향의 관료집단을 함께 끌어안는 조화와 균형의 리더십으로 정국을 운영했다. 나라 안팎에 현안이 발생하면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해 나라를 위기에서 건져내고 왕조의 면모를 일신시켜 나갔다. ‘성종’이란 칭호에 걸맞은 군주였던 셈이다.
- 중앙선데이 | 박종기 국민대 교수 | 제328호 | 2013.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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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서울 낙성대에 있는 강감찬(948~1031) 장군의 영정. 70세 때인 1018년 고려를 침공한 거란 10만 대군을 이듬해 2월 궤멸시키고 대승을 거뒀다. |
송 · 거란 사이 능란한 줄타기로 영토 확장 |
고려사의 재발견 | 성종 ㆍ 현종의 실리외교
993년(성종12) 거란 장수 소손녕은 두 가지 이유로 고려를 정벌한다고 했다. 첫째, 신라 땅에서 일어난(신라를 계승한) 고려가 거란의 영토인 고구려 지역을 잠식했다. 둘째, 국경을 접한 거란 대신 송나라와 관계를 맺었다.
고려의 서희는 첫째 이유에 대해 “고려는 고구려의 옛 땅에서 건국됐다. 국호를 고려라 하고 평양을 도읍으로 삼았다. 거란의 동경 땅도 고구려 땅으로 원래 우리의 영토다(고구려 계승론)”라고 반박한다. 둘째 이유에 대해서도 “고려가 거란과 외교관계를 맺지 않은 건 압록강 주변을 여진족이 차지해 거란으로 가는 길목이 차단됐기 때문이다. 여진을 쫓고 그곳을 우리 영토로 인정하면 거란과 관계를 맺을 것이다(압록강 영유론)”라고 답변한다. (『고려사』 권94 서희 열전).
소손녕의 본심은 무엇이며, 그동안 우리나라 역사책은 ‘고구려 계승론’과 ‘압록강 영유론’ 가운데 어느 쪽을 더 강조했을까? ‘고구려 계승론’에 방점을 찍어 서술했다. 통쾌하기조차 한 서희의 ‘고구려 계승론’은 민족의식을 강조한 역사교육에 가장 적절한 소재로 인용돼 왔다. 틀린 말은 아니나 그것만 강조하면 고려와 거란의 전쟁 의미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없다.
고려와 송의 관계를 차단한 뒤 고려가 거란과 관계를 맺게 하려는 게 소손녕의 본심, 즉 거란 침입의 목적이었다. 서희는 거란의 그런 의도를 꿰뚫어 보고 ‘압록강 영유론’을 주장해 관철시켰다. 거란과 외교관계를 재개하는 조건으로 압록강 이동 280리 지역을 고려 영토로 확정한 것이다. 고려 실리외교의 전형을 보여준다. 거란과의 전쟁은 고구려 계승론과 같은 민족의식의 경연장이 아니라 국익(國益)이 걸린 영토분쟁이었다.
인류 역사상 전쟁은 대부분 영토분쟁에서 시작된다. 993년(성종12) 거란의 1차 침입에서 1019년(현종10) 강감찬의 귀주대첩까지 30년 가까이 이어진 두 나라 간 전쟁의 본질 역시 영토분쟁이다. 그러나 단순한 영토분쟁은 아니다. 이 전쟁에 대해 영웅 서희와 강감찬의 활동에 초점을 둬온 그동안의 시각에서 벗어나 좀 더 국제적인 시각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거란은 왜 전쟁을 일으켰을까?
고려 · 거란 30년 전쟁은 결국 땅따먹기
960년 중국에서 송나라가 건국되면서 동아시아 세계는 영토분쟁에 휩싸인다. 거란의 도움으로 후진(後晋·936~946년)을 건국한 석경당(石敬塘)은 지금의 베이징 지역이 포함된 보하이만 이북의 연(燕)· 운(雲) 등 16개 주, 이른바 ‘연운 16주’ 지역을 거란에 양도한다. 송나라는 건국 후 거란에 이 영토의 반환을 요구한다. 거란이 거부하자 979년 송 태종은 거란을 치기 위해 북벌 (北伐)에 나선다. 동아시아 영토분쟁의 시작이다. 거란은 송나라와의 전쟁에 앞서 후방 지역의 안정을 위해 983년(성종2)부터 압록강 일대 여진족을 정벌한다. 이어 985년 발해 유민이 세운 정안국(定安國)을 무너뜨린다. 이런 거란의 움직임에 대비해 고려와 송나라는 관계를 강화한다.
“연운 16주는 중국의 땅인데 오랑캐들이 차지했다. 이곳을 오랑캐의 풍속에 빠지게 할 수 없다. 이제 군사를 일으켜 정벌하고자 한다. (고려)왕은 오랫동안 중국 풍속을 사모하고 평소 밝은 계략과 충성스러운 절의로 나라를 다스렸는데, 오랑캐(거란)와 국경을 접해 많은 해를 입었다. 이제 그 분함을 씻을 기회이니 두 나라가 군사를 일으켜 함께 오랑캐를 정벌할 것이다. 좋은 때는 두 번 오지 않으니 함께 도모하기 바란다. 노획한 포로와 소 · 양 · 재물 등은 모두 고려 장수와 군사에게 상으로 나누어 주겠다.”(『고려사』 권3 성종 4년 5월)
송나라가 985년(성종4) 신료인 한국화(韓國華)를 고려에 보내 거란 협공을 요청한 외교문서의 내용이다. 송나라는 그 2년 전 고려 성종을 책봉(冊封)했는데, 이번에도 다시 책봉하면서 이같이 요청했다. 책봉은 해당 국왕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시키는 한편, 그 나라를 품에 안으려는 외교 의례다. 즉위 후 한 번의 책봉이 관례인데, 송나라는 이후 세 차례(성종 7, 9, 11년) 더 책봉한다. 다섯 차례의 책봉은 매우 이례적이다. 거란과의 전쟁에 고려를 끌어들이려는 송나라의 다급한 사정이 드러난다. 그러나 고려는 냉정했다. 거란을 외교적으로 압박하려는 목적에서 송과 관계를 맺은 것이지 군사동맹으로 또 다른 화를 자초할 정도로 어리석지 않았다. 고려는 시간을 끌면서 송나라 요구를 거부한다.
‘천혜 요새’ 강동 6주 넘긴 거란의 패착
| | | ▲ 서울 낙성대의 강감찬 장군 생가 터에 있던 탑과 강장군을 기리는 사당인 안국사. | 여진족과 발해 유민의 정안국을 정벌한 거란은 마침내 993년(성종12) 고려에 침입한다. 송나라를 고립시키고 후방의 안전을 확보해 장차 송나라와의 전쟁(1004년)에서 승리하려는 다목적 노림수가 숨어 있었다. 고려는 송나라와 관계를 끊고 거란과 외교관계를 맺는 대가로 압록강 이동 280리 지역을 확보한다. 고려는 이듬해(994년) 송나라에 거란의 침략을 알리고 군사동맹을 제안한다. 송나라가 거부하자 이를 빌미로 송나라와의 관계를 단절한다. 고려는 압록강 이동 280리 지역에 있는 여진족을 몰아내고 6개 성을 요새화하는 등 압록강까지 영토를 확보한다. 한편 거란은 1004년 송나라를 굴복시키고, 연운 16주 지역을 자국 영토로 확정한다. 전쟁에서 패한 송나라는 해마다 막대한 물품을 거란에 배상하는 치욕을 당한다.
그러나 거란은 압록강 이동 지역을 고려에 넘겨줄 당시만 해도 이 지역이 뒷날 거란에 엄청난 재앙을 안겨줄 것이란 사실은 깨닫지 못한 실책을 저질렀다. 이곳에 설치한 6개의 군사도시인 강동 6주(성)의 중요성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거란은 997년과 998년 동북(함경도)의 여진족 정벌에 나선다. 지름길은 강동 6주의 서북 지역을 통하는 길인데, 고려에 넘겨준 까닭에 함흥 황초령 등 북방 지역을 우회해 여진을 정벌한다. 길이 멀고 식량이 끊겨 군사와 병마가 많은 피해를 보고 정벌에도 실패한다. 강동 6주는 동북 지역 진출의 교통요지였다. 한편 압록강을 넘어 남쪽으로 내려오려면 반드시 6주(성)를 거쳐야 한다. 고려는 이곳을 요새화하는데, 거란은 물론 뒷날 몽골군도 이 지역에서 패배해 전력이 반감됐을 만큼 강동 6주는 천혜 요새인 전략 거점이다. 압록강 하류는 산동반도-한반도-일본으로 이어지는 해로의 길목이며, 송나라·여진·고려·거란 사이에 교역이 이루어진 곳이다. 강동 6주(성)는 이곳의 교역을 감시·견제하는 가치를 지닌 곳이다.
강동6주가 교통·군사·경제의 중요한 거점임을 뒤늦게 알게 된 거란은 송과의 전쟁이 끝난 후 고려에 강동 6주의 반환을 요구한다. 현종 때 재연된 거란과의 전쟁은 강동 6주의 반환을 둘러싼 또 다른 형태의 영토전쟁이다. 1010년(현종1) 11월 거란은 목종을 폐위한 강조(康兆)의 정변을 구실로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에 침입한다. 현종은 이해 12월 남쪽으로 피란하고, 거란은 이듬해 1월 개경을 점령한다. 고려가 거란에 화의를 요청하자 거란은 국왕이 거란에 가서 항복하는 조건으로 철수한다. 1012년(현종3) 6월 고려는 국왕의 병을 이유로 거란행을 거부한다. 그러자 거란은 “흥화(興化)·통주(通主)·용주(龍州)·철주(鐵州)·곽주(郭州)· 구주(龜州) 등 6성을 점령하겠다”며 본심을 드러낸다. 강동 6주의 반환을 관철하는 게 거란 침입의 목적이었던 것이다.
거란이 사신 야율행평(耶律行平)을 여러 차례 보내 6성의 반환을 요구한 데 대해 고려는 1014년(현종5) 거란 사신을 억류하는 강경책을 구사한다. 다른 한편으로 고려는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 중단된 외교관계를 재개함으로써 거란을 압박해 그들의 무리한 요구를 막으려는 외교전술을 구사한다. 이해 10월 거란은 6성의 반환을 요구하면서 고려에 침입한다. 거란의 3차 고려 침입이다. 1015년(현종6) 거란은 압록강 동쪽의 요충지 보주(保州·지금의 의주)를 점령한다. 보주 반환을 둘러싸고 두 나라 사이에 독도 영유권 분쟁에 비유할 만한 100년간의 긴 영토분쟁이 시작된다. 이는 뒤에 다루기로 한다.
거란의 保州 점령으로 100년 전쟁 시작
거란의 3차 침입에 다급해진 고려는 1016년(현종7) 곽원(郭元)을 송나라에 보내 도움을 요청한다. 송나라는 고려에 거란과의 화해를 권하면서 고려의 요구를 완곡하게 거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는 이 해 송나라 연호를 사용하면서 거란과의 관계를 단절하는 강경책을 구사한다. ‘영원한 동지도 영원한 적도 없다’는 국제질서의 명언을 역사에서 실천한 왕조의 하나는 고려다.
두 나라 사이에 전면전은 불가피했다. 거란은 소배압에게 10만의 군사를 줘 고려를 공격하게 한다. 1018년(현종9) 10월 고려는 강감찬(姜邯贊)을 최고사령관, 강민첨(姜民瞻)을 부사령관으로 삼아 군사 20만8300명을 거느리고 영주(寧州·평남 안주)에 주둔케 하여 마지막 결전에 대비한다. 1019년(현종10) 2월 강감찬은 마침내 거란군을 크게 물리친다.
“2월(1019년) 강감찬이 귀주에서 거란군과 싸웠다. 승패가 나지 않았는데, 부하 김종현이 군사를 이끌고 세를 불리자 군사들이 용기를 내 싸워 거란병을 패주시켰다. 도망가는 거란병을 추격하자 시체가 들판을 덮었다. 사로잡은 사람과 말·낙타·갑옷·무기는 헤아릴 수 없고, 살아 돌아간 자는 불과 수천 명이었다. 거란이 이같이 패한 적은 이전에 없었다. 거란 왕이 소손녕(※소배압의 오기)을 꾸짖기를 ‘네가 적을 무시하고 깊이 들어가 이렇게 패했다. 무슨 면목으로 나를 보겠는가. 마땅히 너의 낯가죽을 벗긴 후 죽일 것이다’라고 했다.”(『고려사』 권94 강감찬 열전)
동아시아 영토분쟁의 파고(波高)는 고려와 거란의 전쟁을 유발했다. 이 전쟁은 국지전이 아니라 국제전쟁의 일부였다. 고려는 군사력과 외교력을 동시에 구사하면서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어갔다. 송과의 관계를 지렛대로 거란을 견제하고 때로는 과감하게 송과 외교관계를 단절해 실리를 챙겼다. 군사적으로 유리한 국면에선 전면전을 통해 거란을 패주시켰다. 국익을 위해 강경노선과 유화노선을 적절하게 배합한 고려의 외교 · 군사전략은 지금도 배울 점이 적지 않다.
- 중앙선데이 | 박종기 국민대 교수 | 제329호 | 2013.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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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중생을 안락의 세계로 이끄는 관음보살의 모습을 그린 ‘수월관음도’. 고려시대 불화를 대표하는 작품의 하나이지만 일본 규슈에 위치한 신사인 가가미신사(鏡神社)에 소장돼 있다. 2 고려가 몽골의 침입을 불력(佛力)으로 막아내기 위해 제작한 팔만대장경. 3 연등회와 팔관회 시행을 강조한 '훈요십조' 부분. |
불교국교설은 史實무근 수신은 불교, 통치는 유교 |
고려사의 재발견 · '훈요십조'가 말하는 종교 이념
불교국교설은 史實무근 수신은 불교, 통치는 유교
불교가 고려의 ‘국교(國敎)’라는 주장(이하 불교국교설)은 정설처럼 회자되고 있다. 하지만 정작 언제, 누가, 어떤 근거로 이런 주장을 했느냐는 의문을 풀어줄 분명한 글은 고려사 연구자인 필자도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교국교설은 마치 신비주의자의 주술처럼 구전돼 사학자들조차 그런 주술에 휘둘리고 있다. 역사학이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주장이다.
국어사전에, 국교는 ‘국가에서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여 보호되고 공인된 종교’ 라고 나와 있다. 국민이 전부 믿어야 하고, 그 종교의 일(敎務)을 나라의 일(國務)로 취급하는 종교가 국교다. 특정 종교의 이념과 정신이 법과 제도에 반영되어 국가의 통치 이념과 원리가 돼야 국교란 지위가 부여된다는 말이다. 고려 불교국교설을 당연시한 글들 가운데 많이 인용한 근거를 꼽자면 태조 왕건의 '훈요십조' (943년) 다. “6조, 내가 지극히 원하는 것은 연등회(燃燈會)와 팔관회(八關會)이다. 연등회는 부처를 섬기는 것이고, 팔관회는 하늘의 신(天靈) · 오악(五嶽) · 명산(名山) · 대천(大川) · 용신(龍神)을 섬기는 것이다. 후세에 간신들이 (두 행사를) 더하거나 줄이자고 건의하면, 마땅히 금지하게 하라. 나 또한 처음부터 맹세하기를 (두 행사의) 모임 날은 국기(國忌: 국왕 등의 제사)를 범하지 않고, 임금과 신하가 함께 즐길 것이다. 마땅히 경건하게 행사를 치르도록 하라.”
태조 왕건은 연등회와 팔관회를 중시하고, 반드시 시행할 것을 주문했다. 국왕과 백관이 사원에서 행사를 치른 연등회는 고려의 대표적인 불교행사였다. 연등회 말고도 고려가 불교를 중시한 예는 많다. 돌아가신 왕들의 영정은 주로 사원에 모셔져 사원에서 선왕(先王)의 제사를 치렀다. 고려는 불교와 승려를 위한 여러 제도를 만들었다. 과거시험에 승려를 위한 승과 (僧科)를 두었다. 승려들은 승과를 통과해야 사원의 주지 등에 임명되었다. 또한 왕사(王師*왕의 스승)나 국사(國師*나라의 스승) 제도를 만들고 덕이 많은 고승 (高僧)을 왕사·국사에 임명했다. 국왕은 새로 임명된 왕사와 국사에게 9번 절하며 제자의 예를 취했다. 이같이 고려시대엔 불교가 다른 어느 종교보다 중시됐고, 불교가 고려 사상계에서 주도적인 위치에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만으로 불교가 고려의 국교라고 하기엔 미흡하다.
풍수지리설도 불교만큼 고려 건국에 기여
6조에서 연등회와 함께 팔관회도 강조됐다. 원래 팔관회는 재가신도들이 8가지 금욕적 계율을 지키는 불교행사다. 하지만 고려의 팔관회는 불교 외에 다른 사상도 녹아든 행사였다. 팔관회엔 선랑(仙郞*화랑)이 용·봉황·말·코끼리를 타고 행사에 등장하고, 그 뒤를 사선악부(四仙樂部: 행사의 樂隊)가 뒤따른다. 네 마리 짐승은 불가(佛家)에서 한 해 동안 인간이 행한 일들의 선악을 평가하는 불가(佛家)의 상징이다. 사선악부는 과거 신라 화랑도의 영랑(永郞), 술랑(述郞), 남랑(南郞), 안상(安詳)의 사선(四仙)을 형상화한 것이다. 신라 이래 전통사상인 낭가(郎家) 사상을 계승한 증거다. 팔관회 첫날엔 태조의 진전(眞殿)과 역대 국왕에 참배하는 의식을 치른다. 천자를 자처한 역대 국왕에 대한 숭배는 제천(祭天)의례에 해당된다. 또한 고려의 관리와 송나라, 여진, 거란, 일본의 상인들은 고려 국왕에게 천자의 의례를 행한다. 송나라 사신 서긍이 팔관회를 고구려 제천행사인 동맹(東盟)에 비유한 것도 이 때문이다. 태조가 강조한 팔관회는 민간신앙을 포함한 전통사상, 조상 숭배 및 제천의식을 포함했다. 불교의례만 중시된 게 아니었다. 불교국교설의 또 다른 근거를 살펴보자. “1조, 우리나라의 대업(大業*왕조 창건)은 불교의 호위하는 힘에 도움을 받았다(我國家大業 必資諸佛護衛之力). 그 까닭에 선종과 교종 사원을 창건하고 주지를 파견하여 그 업을 닦게 하였다. 뒷날 간신이 집권하여 승려들의 청탁에 따라, 사원을 서로 바꾸고 빼앗는 것을 금지하라.”
부처의 힘으로 고려왕조가 건국됐다는 '훈요십조' 1조는 불교국교설의 유력한 근거로 많이 인용되어 왔다. 그러나 왕조 건국에 도움을 준 사상은 불교만이 아니었다. “5조, 짐이 삼한 산천의 숨은 도움에 힘입어 대업을 이루었다(朕賴三韓山川陰佑 以成大業). 서경은 수덕(水德)이 순조로워 우리나라 지맥의 근본이며, 대업을 만대에 전할 땅이다. (국왕은) 사중월(四仲月: 각 계절의 가운데 달)에 그곳에 가서 100일이 지나도록 머물러, 왕조의 안녕을 이루게 하라.” 5조엔 산천의 숨은 도움, 즉 풍수지리 사상도 고려 건국에 도움이 됐다고 했다. 1조의 ‘우리나라의 대업은 부처의 호위하는 힘에 도움을 받았다’는 표현과 같다. 태조 왕건은 왕조 건국에 두 사상이 동일한 역할을 한 것으로 생각했다. 1조에 근거한 불교국교설은 그런 점에서 설득력이 부족하다.
“국왕은 유교이념에 입각한 통치를”
오히려 1조가 작성된 취지는 승려들이 뒷날 권신(權臣)과 결탁하여 정치에 관여하거나 사원의 소유권을 빼앗는 등 불교의 폐단을 경계하는 데 있다. 또한 사원을 함부로 지어 지덕을 훼손함으로써 신라가 멸망했다는 전제 아래 승려 도선이 풍수지리설에 따라 지정한 장소 외엔 사원을 함부로 창건하지 못하게 규정한 2조 역시 같은 취지다. 불교를 언급한 '훈요십조'의 1조와 2조는 불교국교설의 근거가 아니라, 불교의 폐단을 경계한 것이다.
후삼국 전쟁이 한창일 때 태조 왕건은 신라가 황룡사 9층탑을 세워 3국을 통일한 예에 따라 개경에 7층탑, 서경에 9층탑을 각각 세워 후삼국을 통합하려 했다. 그러자 참모인 최응(崔凝)은 ‘왕이 된 자는 전쟁 때 반드시 문덕(文德*유교 정치 이념)을 닦아야 하며, 불교나 음양(*풍수지리)사상으로 천하를 얻을 수 없습니다’ 라고 충고한다. 태조 왕건은 ‘백성들이 전쟁에 시달리고 두려워하니 부처와 귀신과 산수의 신령한 도움을 청하려 한다. 그들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그러는 것이며, 난리가 진정되어 편안하게 되면 유교 정치이념으로 풍속을 고치고 교화할 것이다’라고 했다(보한집(補閑集) 권上). 왕건은 전쟁에 시달린 민심을 달래주기 위해 불교와 음양사상을 강조한 것이다. 반면 나라를 통치하는 데는 유교 정치이념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런 생각은 '훈요십조'에도 나타난다. “10조, 가정과 국가를 가진 자는 근심이 없을 때 조심해야 한다. 널리 (유교) 경전과 역사서를 읽어, 옛일을 거울 삼아 오늘을 경계해야 한다. 주공(周公) 같은 대성(大聖)도 '서경'의 ‘무일(無逸)’ 편을 성왕(成王)에게 바쳐 경계했다. 마땅히 이것을 그림으로 그려 붙이고, 들어오고 나갈 때에 보고 살피도록 하라.”
국왕은 항상 역사를 공부하고, 유교이념에 입각한 통치를 하여야 한다고 권고하고 있다. 또 7조엔 “신하와 백성의 마음, 즉 민심을 얻는 방법은 신하의 비판과 충고를 듣고 백성을 때에 맞춰 부리고 부세와 요역을 가볍게 하고 농사짓는 어려움을 알아야 한다”고 언급했다. 결국 위의 두 조항은 모두 유교이념에 입각한 정치, 즉 군주의 어진 정치(仁政)를 강조한 것이다. '훈요십조'에서 불교국교설은 찾을 수 없다.
지방 세력의 고유한 사상·문화 인정
성종 때(982년) 최승로는 성종에게 올린 상소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불교는 수신(修身)의 근본이며, 유교는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입니다. 수신(*불교)은 내생(來生: 다음의 삶)을 위한 밑천이며, 나라를 다스리는 일(*유교)은 지금 힘써야 할 일입니다. 지금은 가까운 것이며, 내생은 먼 것입니다. 가까운 것을 버리고, 먼 것을 찾는 일은 잘못이 아니겠습니까?”(고려사 권93 崔承老 열전) 최승로는 이렇게 “수신의 역할은 불교, 통치의 역할은 유교가 각각 맡아야 한다” 면서 불교와 유교의 공존을 주장했다. 그는 태조 왕건에게 발탁돼 관료생활을 시작한 태조의 측근문신이었다. 태조 사후(943년) 40년이 지나 그가 제기한 불교와 유교의 역할론은 태조의 뜻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태조의 생각을 담은 '훈요십조' 에도 불교뿐만 아니라 유교와 풍수지리, 도교와 전통사상 등 다양한 사상과 종교의 공존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상과 종교의 다원성을 중시한 태조의 생각은 성종 때 최고의 유학자인 최승로에게까지 계승되고 있었다.
고려사회는 하나의 이념과 사상이 강조된 사회가 아니라, 다양성이 존중된 다원사회였다. 고려왕조는 옛 삼국 출신의 수많은 독자적인 지방 세력을 통합하여 건국되었다. 건국 후에도 그들의 자율성을 인정하면서 그들의 협조를 얻어 왕조를 통치하려 했다. 옛 삼국의 근거지에서 독자 영역을 구축한 지방 세력의 고유한 사상과 문화를 인정하고 그것과 공존하면서, 민심의 수습과 사회의 통합을 이루어 나가려 했다. 태조의 그런 통치철학이 훈요십조에 담겨 있다.
- 중앙선데이 | 박종기 국민대 교수 | 제330호 | 2013.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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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단군의 표준영정. 몽골 침략기와 구한말, 일제강점기에 등장한 단일민족론은 우리 민족이 단군의 후손이란 주장에 바탕을 뒀다. [중앙포토]. |
인구 9%, 군인 10%가 귀화인 … 무늬만 단일민족 |
고려사의 재발견 · 귀화인 수용과 천자국체제
고려가 건국된 지 100년이 될 무렵, 제8대 현종(顯宗·992~1031년, 1009~1031년 재위)이 즉위한다. 현종은 신라계 출신 왕족 안종(安宗)과 그 조카 헌정왕후(경종의 비)의 불륜으로 태어난 국왕이다. 안종이 불륜을 범한 죄로 경남 사천에 유배되자, 현종은 유배지에서 지내다 안종이 숨지자 개경에 온다. 헌정왕후와 자매 사이인 헌애왕후는 경종의 비로서, 유명한 여걸 천추태후다. 아들 목종이 즉위하자, 모후가 된 천추태후는 외척인 김치양과의 불륜으로 낳은 아들을 병약한 목종의 후사로 왕위에 앉히기 위해 왕위 계승 서열상 적자인 현종을 강제로 출가시켜 지금의 북한산 신혈사로 내친다. 그것도 모자라 여러 번 현종을 살해하려 하나 실패한다. 어렵사리 왕위에 오른 현종은 거란의 침입으로 개경이 점령되자, 공주·전주·나주로 피난을 한다. 피난 도중 국왕의 체통에 손상을 입을 정도로 온갖 수모를 당한다.
고려의 학문을 융성케 한 유학자 최충(崔沖)은 죽을 고비를 숱하게 넘긴 현종을 ‘간난비운(艱難非運·죽도록 고생하고 억세게 운이 없음)’의 군주라고 평가했다. 그러면서도 거란의 침입을 물리쳐 붕괴 직전의 고려 왕조를 일으켜 세운 ‘중흥(中興)의 군주’라고 평가했다. 오늘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지만 현종대에 일어난 중요한 사건에 눈을 돌려보기로 한다.
“거란의 수군(水軍)지휘사로 호기위(虎騎尉)의 벼슬을 가진 대도(大道) 이경(李卿) 등 6명이 내투(來投·귀화)했다. 이때부터 거란과 발해인이 귀화하는 일이 매우 많았다.”(『고려사』 권5 현종 21년(1030) 5월)
왜 현종 때부터 거란과 발해인들이 대거 고려로 귀화했을까? 현종 20년인 1029년 9월, 거란 장군 대연림(大延琳)이 발해부흥운동을 일으켜 흥요국(興遼國)을 세운 게 도화선이 됐다. 발해 시조 대조영(大祚榮)의 7대손인 대연림(大延琳)은 고려 침략을 주도한 거란 성종(聖宗)이 병약해(1031년 사망) 거란 조정에 내분이 일어난 틈을 타 흥요국을 세웠다. 거란의 불안한 정세로 그동안 거란의 지배를 받아온 발해와 거란 계통의 주민들이 고려에 귀화하기 시작한다. 발해 · 거란인들의 고려 이주는 발해가 멸망(926년)한 10세기 초에 시작됐지만 현종 때부터 본격화된 것이다. 이때부터 금나라가 건국(1115년)되는 12세기 초까지 수많은 이민족 주민들이 고려에 귀화한다. 그런 점에서 1030년(현종 21) 이민족의 대거 귀순은 고려의 주민 구성은 물론 고려 사회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온 상징적인 사건이다. 다음의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한민족=단군 후손’ 주장이 단일민족론 근거
고려 건국 후 12세기 초까지 약 200년 동안 고려에 귀화한 주민과 종족은 크게 한인(漢人)과 여진 · 거란 · 발해 계통 등 네 갈래로 나뉜다. 가장 많이 귀화한 주민은 발해계로서, 38회에 걸쳐 12만2686명이 귀화했다. 전체 귀화인 가운데 73%를 차지한다. 발해국이 멸망한 결과다. 그 다음으로 많은 귀화인은 여진계 주민으로 4만4226명에 달한다. 거란계 주민은 1432명이 귀화했다. 이들은 거란의 피정복민으로 억압을 받아오다 고려와 거란의 전쟁이나 거란의 내분을 틈타 고려에 귀화했던 것이다. 한인(漢人) 귀화인은 송나라는 물론, 송나라 건국 이전의 오월·후주 등 오대 국가의 주민들이 포함돼 있다. 모두 42회에 걸쳐 155명이 귀화했다. 고려에 귀화한 이민족 주민의 총수는 약 17만 명으로, 12세기 고려 인구를 200만 명으로 추산한 『송사(宋史)』의 기록에 근거할 때 결코 적지 않은 비율(8.5%)을 차지한다 (박옥걸, 『고려시대의 귀화인 연구』). 우리 역사에서 이처럼 많은 이민족이 유입된 경우는 기록상 고려 외에 달리 찾을 수 없다. 또 다른 예를 들기로 한다.
고려 태조 19년(936) 9월 지금 경북 선산의 일리천(一利川)에서 후백제 신검(神劍)과의 마지막 후삼국 통일전쟁에 동원된 고려군은 모두 8만7500명이다. 이 가운데 ‘유금필(庾黔弼) 등이 거느린 흑수(黑水) · 달고(達姑) · 철륵(鐵勒) 등 제번(諸蕃)의 경기병(勁騎兵) 9500명’이 포함돼 있다 (『고려사』세가 태조 19년 9월조). ‘제번(諸蕃)’ 의 군사는 고려에 귀화하여 고려군에 편입된 여진 계통의 이민족 병사들이다. 전체 군사의 10%가 넘는다.
귀화인의 비중 문제를 떠나 고려 왕조가 다양한 종족 · 국가 주민들의 귀화를 받아들인 사실은, 우리 역사의 특징 중 하나로 전가의 보도처럼 거론돼온 단일민족론을 재검토할 근거가 된다. 이민족의 고려 귀화에 최초로 주목한 학자는 손진태(孫晉泰·1900년생, 납북)다. 그러나 그는 고려 시대 이민족 귀화 현상에 대해 “한민족의 혈액 중에 만주족 · 몽고족 · 한족(漢族) 등의 혈액이 흘렀으나, 오랜 역사를 지남에 따라 우리 민족의 피는 완전히 한국적 피로 변화했다”고 했다 (『조선민족사개론』 1946년, 44-45쪽). ‘단일민족론’을 주장한 최초의 학자인 손진태는 이민족의 고려 귀화를 예외적인 현상으로 규정하고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던 것이다. 단일민족론은 무엇인가? 손진태의 주장이다.
“조선사는 조선민족사로서, 유사 이래 동일 혈족(血族)·동일 지역·동일 문화를 지닌 공동 운명 속에서 공동의 민족투쟁을 무수히 감행하면서 공동의 역사생활을 했다. 이민족(異民族)의 혼혈(混血)은 극소수이다. 따라서 조선에서 국민은 민족이며, 민족사가 곧 국사이다. 이 엄연한 역사 사실을 무시하고 조선 역사를 과학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손진태, 『조선민족사개론』, 3쪽)
단일민족은 동일한 혈족(피붙이) · 지역 · 문화를 가진 역사공동체다. 그는 혈족이 단일민족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라고 봤다. 위 글에서 이민족의 혼혈이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다는 단서를 단 것도 그 때문이다. 이병도 박사도 단일민족론을 제기한다(『국사와 지도이념』 1953년).
이민족 받아들이며 독자적 천하관 형성
단일민족론의 원류는 이승휴(李承休·1224~1300)의 『제왕운기(帝王韻紀)』(1287년)다. 이 책에 따르면 “부여·비류국·신라·고구려·옥저·예맥의 임금은 누구의 후손인가? 대대로 단군을 계승한 후예다”라고 했다. 몽골의 침략을 체험한 그는 단군의 후손이라는 역사의식으로 우리 역사를 서술했다. 일제 식민지배를 목전에 둔 한말 지식인들도 우리 역사에서 단군을 시조로 한 혈연공동체를 강조한다. 단일민족론은 여기에서 기원하며, 손진태는 이를 학문적으로 체계화했다.
단일민족의 중요한 기준을 피의 순수성으로 본 것은 지금의 입장에서 볼 때 너무 주관적이다. 또 다른 기준인 지역과 문화의 동질성도 고정불변한 것은 아니다. 고유문화도 외래문화를 수용, 융합해 새로운 문화로 창조된다. 변화하지 않는 문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수많은 종족이 고려 왕조에 귀화한 사실은 오히려 다양한 문화와 풍습이 고려에 유입돼 새로운 문화, 사회체제로 변화하는 계기가 된다. 단일민족론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다. 태조 왕건의 아버지 세조는 896년 궁예에게 귀순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대왕께서 만약 조선 · 숙신(肅愼) · 변한의 땅에서 왕이 되시고자 하면 먼저 송악에 성을 쌓고 저의 장남을 성주로 삼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고려사』 태조 총서)
신라 쇠망기 새로운 시대를 갈망한 세조(왕건의 아버지)와 궁예 등의 영웅들이 조선(고조선과 한사군) · 숙신(말갈과 발해) · 변한(한반도 남부) 지역을 아우르는 통일왕조의 건설을 구상한 증거다. 이들 지역엔 다양한 종족이 살고 있어 특정 민족보다는 여러 종족을 아우르는 ‘통일국가’를 건설하려 한 것이다. 그런 꿈이 고려 왕조의 건국 이념에 반영되어 있다. 한반도 최초의 실질적인 통일국가를 지향한 고려의 의지가 대륙 정세의 변동으로 나타난 수많은 이민족의 귀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고려 왕조는 이민족 귀화인들을 다양한 층위로 편제시켜, 고려의 신민(臣民)으로 삼고 그들의 거주지를 고려의 번병(蕃屛), 즉 울타리로 삼았다. 이러한 정책을 시행한 건 고려와 주변 종족을 중심과 주변, 즉 천자와 제후관계로 삼으려는, 종번의식(宗蕃意識)에 기초한 고려적인 천하관의 또 다른 표현이다. 이는 고려 왕조가 천자국(황제국) 체제를 갖추는 동력이 됐다. 이런 국가체제에서 ‘단일민족론’이 수용될 수 있었을까?
단일민족론은 고려 왕조의 국가 성격에 대한 연구가 부족했거나, 한말에 근대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강조한 선험적이고 관념적인 역사인식의 산물이 아닐까 하는 반성을 하게 된다. 단일민족론의 기준인 동일한 핏줄·문화·지역은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라 변화·발전하는 것이다. 그런 사실이 고려 역사에서 이미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 중앙선데이 | 박종기 국민대 교수 | 제331호 | 2013.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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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란 40만 대군 쳐들어오기 전날 축제 강행, 왜? |
고려사의 재발견 · 팔관회(八關會)
1010년(현종1) 10월 1일 고려는 거란의 침략 조짐을 알아차리고 강조(康兆)를 최고 사령관으로 해 30만 군사를 강동 6성의 하나인 통주(通州;평북 선천)에 집결시킨다. 한편으로 그해 10월 8일 거란에 사신을 보내 화의를 요청한다. 그러나 거란은 사신을 억류하고, 고려에 침략을 통보한다. 11월 1일 고려는 다시 사신을 보내 화의를 모색한다. 하지만 거란은 “국왕 성종이 직접 고려를 공격할 것”이라고 통보한다. 고려가 두 차례 보낸 사신들은 결국 거란의 고려 침략을 통보받으러 간 꼴이 되었다. 11월 16일 거란 성종은 40만 대군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고려를 공격한다. 11월 24일 고려의 30만 대군은 거란군에 참패를 당하고 최고사령관 강조는 포로가 된다. 12월 거란군이 개경에 접근하자 그달 28일 현종은 남쪽으로 피란을 떠난다. 사흘 뒤인 1011년(현종2) 1월 1일 수도 개경이 점령된다. 2차 거란의 고려 침략 당시 긴박한 상황이 『고려사』에 이같이 기록돼 있다.
놀라운 사실은 40만 대군을 거느린 거란 성종이 압록강을 건너기 하루 전인 11월 15일 현종이 개경에서 팔관회(八關會)를 개최한 것이다. 981년(성종 즉위년) “잡스럽고 번잡한 행사” 란 이유로 폐지된 팔관회를 30년 만에 부활시킨 셈이다. 전쟁 전야의 긴박한 상황에서 현종은 왜 팔관회를 치렀을까?
팔관회 행사가 폐지된 지 10여 년이 지난 993년(성종12), 고려는 거란의 1차 침략을 받았다. 조정에선 “거란에 고려의 땅을 떼어주고 항복을 하자”는 주장이 무성했다. 그러나 문신 이지백은 ‘할지론(割地論)’을 반대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가볍게 토지를 떼어 적국에 주기보다 선왕(先王;태조)이 강조한 연등(燃燈) · 팔관(八關) · 선랑(仙郞) 등의 행사를 다시 시행하고 다른 나라의 법을 본받지 않는 것이 나라의 보전과 태평을 이루는 일입니다. 그렇게 하고서 하늘에 고한 후 싸울 것인가 화해할 것인가를 임금께서 결단해야 합니다.”(『고려사』 권94 서희 열전)
연등회와 팔관회 같은 전통행사를 행하여 민심을 결집시킬 것을 요구한 것이다. 현종의 팔관회 부활도 그때의 학습효과 때문일까? 현종은 30년간 중단된 팔관회를 열어 민심을 결집하고, 국가와 사회를 통합하려 했던 것이다.
고구려 동맹과 신라 화랑도 정신 계승
팔관회는 원래 불교에서 재가신도가 지켜야 할 8계(戒), 즉 살생하지 않고(不殺生), 자기 물건이 아니면 갖지 않고(不與取), 음행하지 않고(不淫), 헛된 말을 하지 않고(不妄語), 음주하지 않는(不飮酒) 등 여덟 가지 계율을 지키기 위한 법회였다. 신라 진흥왕 12년(552) 고구려에서 귀화한 승려 혜량(惠亮)법사가 전사한 군인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법회를 연 것이 팔관회의 첫 기록이다. 궁예도 900년 양주 (지금 서울)와 견주(지금 양주)를 정벌한 뒤 팔관회를 열었다. 당시엔 불교행사였다.
고려도 건국된 해(918년) 11월 첫 팔관회를 열었으며, 성종과 원 간섭기 때 중단된 적이 있지만, 고려가 망할 때까지 팔관회가 지속됐다.
태조 왕건은 ‘훈요십조’(946년)에서 “연등회는 부처를 섬기는 행사이며, 팔관회는 하늘과 명산의 신령과 대천(大川)의 용신(龍神)을 섬기는 행사”라고 했다. 즉 팔관회는 불교행사인 연등회와 달리 하늘과 산천에 제사를 지내는 행사라 한 것이다. 또 왕건은 “선왕들의 제삿날을 피해 군신(君臣)이 함께 즐기는 행사가 돼야 한다”고 했다. 송나라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한 서긍(徐兢)은 당시 고려의 여러 제도와 풍습을 견문한 내용을 담은 『고려도경(高麗圖經)』(1123년)에서 “팔관회는 고구려 제천(祭天)행사인 동맹(東盟)을 계승한 것”이라 했다. 부여의 영고(迎鼓), 동예의 무천(舞天)도 동맹과 같은 제천행사다. 팔관회는 이같이 고대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민심과 사회를 결집시켜 온 국민이 하나가 되는 통합의 기능을 수행한 축제행사였다. 고려 의종은 1168년(의종22) 서경에 행차하면서 왕조 중흥을 위한 교서를 내리고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선풍(仙風)을 따르고 행하라. 옛날 신라는 선풍이 크게 성행했다. 이로써 하느님과 용신(龍神)이 함께 기뻐하고 사람과 만물이 편안하게 되었다. (중략) 근래 개경과 서경의 팔관회는 날로 옛 모습과 남긴 자취가 쇠퇴하고 있다. 지금부터 양반 가운데 재산이 넉넉한 자를 선가(仙家)로 미리 선택하여, 옛 모습을 따라 행하여, 사람과 하늘이 모두 기쁘게 하라.”(『고려사』 권18)
선풍은 신라의 낭가(郎家)사상이 깃든 풍습이다. 삼국 통일의 주역인 신라 화랑도는 이런 낭가 사상의 풍토 아래 조직됐다. 의종은 “팔관회 행사는 이런 신라의 선풍 (仙風)을 계승하는 것이며, 선풍의 쇠퇴는 곧 팔관회의 쇠퇴로 이어진다”고 했다.
고려 중기 문장가 이인로(李仁老) 역시 『파한집(破閑集)』에서 같은 생각을 밝혔다. “계림(신라의 경주)의 옛 습속에 남자 가운데 아름다운 풍모를 가진 자를 골라서 아름다운 장식으로 꾸며, 화랑으로 삼아 나라 사람들이 받들었다. 받드는 무리가 많을 경우 3000명이나 된다. (중략) 무리 가운데 뛰어난 자에게 관직을 주었다. ‘사선’(四仙;영랑 · 술랑 · 남랑 · 안상)의 무리가 가장 뛰어났다. 고려 태조도 이를 계승하여 겨울에 팔관회를 열어 훌륭한 집안 출신 4명을 골라서 신선 옷을 입히고 궁정에서 춤을 추게 했다.”
이인로의 언급과 같이 고려 태조는 선풍을 계승한 화랑, 즉 선랑(仙郞)의 풍습을 계승하여 팔관회를 열었다. 군신동락(君臣同樂)의 팔관회는 고구려·부여·신라에서 유행하던 고대 전통문화를 계승하고 새롭게 해석하여 새 문화를 창조하는 역할을 했다.
건국 이후 왕조 멸망 때까지 꾸준히 개최
| | | 포구악(抛毬樂;공 던지는 놀이)과 구장기(九張機;나무타기 놀이) 행사 모습. [김병하 화백] | 팔관회(八關會)는 매년 개경과 서경에서 거행되는데, 개경은 11월 15일, 서경은 10월 15일에 각각 열린다. 개경의 경우 팔관회는 국왕이 거처한 궁성에서 공식적으로 이틀에 걸쳐 행해진다. 첫째 날을 소회(小會)라 한다. 이날 국왕은 먼저 왕조 건국자인 태조의 진전(眞殿;초상화)에 배례한다. 다음엔 태자·왕족·중앙 관료들이 차례로 국왕에게 절을 올린다. 과거와 현재의 국왕에 대한 배례(拜禮)는 전통 농경(農耕)의례의 조상 숭배의식이자 제천 의례를 계승하는 측면을 보여준다. 이어서 3경, 동·서 병마사, 4도호부 8목의 수령들이 표문 (表文;제후가 천자에게 올리는 문서)을 올리고, 태자·왕족·중앙관료와 함께 국왕에게 조하(朝賀;조정에 나아가 왕에게 하례하는 것)와 헌수(獻壽;장수를 비는 뜻에서 술잔을 올리는 것)를 바친다. 이어 격구장에 설치된 무대에서 선랑의 무용과 가무, 포구악(抛毬樂;공 던지는 놀이)과 구장기(九張機;나무타기 놀이) 등 기악(伎樂) 공연을 한다. 국왕은 참석한 사람들에게 음식과 차를 내리고, 함께 공연을 관람한다. 둘째 날을 대회(大會)라 하는데, 이날은 송나라와 거란 · 일본 상인과 동 · 서 여진 (함경도 · 평안도 일대의 여진족)과 탐라 추장 등이 국왕에게 절을 올린 뒤 그들이 갖고 온 토산물을 바치는 의식이 행해진다. 나머지 행사는 첫째 날과 같다.
국왕은 황제를 상징하는 의상인 황포(黃袍)를 입고, 중앙의 왕족과 관료, 지방 수령, 외국의 상인과 추장으로부터 헌수와 조하를 받는다. 이들은 제후 자격으로 천자인 고려 국왕에게 헌수와 조하를 올린 것이다. 표문(제후가 천자에게 제출하는 문서)을 올리는 의식과 동 · 서 여진을 ‘동서번(東西藩)’이라 칭한 것 등이 그 예다.
‘팔관회는 국왕은 천자이며 고려는 천자국이라는 고려 특유의 천하관을 대내외에 과시한, 고려의 개방성을 잘 보여주는 의례다. 고려는 ‘외후내제(外侯內帝)’, 즉 송과 거란에 대해선 국익을 위해 제후국으로 처신하고, 국내적으론 황제(천자)국 체제를 갖춘 독특한 천하질서를 유지했다. 이틀에 걸쳐 행해지는 공연 가운데 선랑(仙郞)이 공연의 주역으로 등장한다. 선랑을 뽑는 풍습은 고려 때 사원에서도 계승되고 있다.
“나라 풍속에 어릴 때 반드시 스님을 따라 글자를 익혔다. 그 가운데 면수(面首;용모와 행동거지가 빼어난 자)가 있는 자를 승속(僧俗)이 함께 받들어 선랑(仙郞)이라 했다. 선랑을 따르는 무리가 때론 천백(千百)이나 되었다. 이 풍습은 신라 때부터 유래했다.”(『고려사』 권108 민적 열전)
선랑으로 선택된 자는 이날 용(龍)·봉황(鳳)·말(馬)·코끼리(象)의 모습을 한 수레를 타고, 그 뒤를 사선악부(四仙樂部)가 노래와 춤을 추면서 뒤따랐다. 용과 봉황 등 네 가지 모습의 수레를 탄 것은 매년 1회 하늘의 신(神)인 선랑이 이들 짐승을 타고 세상 사람들의 옳고 그름을 평가하는 불가(佛家)의 풍습에서 유래한 것이라 한다. 팔관회가 신라의 낭가사상과 불교가 융합된 행사임을 보여준다.
고려 왕조의 팔관회는 이렇게 고대 원시 농경 의례에서 출발한 제천의식과 신라의 선풍 · 불교의식 등 토착적이고 고유한 의례와 풍습을 계승하고 있다.
고려 왕조에선 조선과 달리 불교 · 도교 · 유교 · 산신 및 조상 숭배 등 매우 다양한 사상이 공존했다. 사상과 문화에서 개방적이었던 고려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그러나 다양한 문화와 사상이 공존하는 나라에선 자칫 사회가 분열돼 국가 혼란으로 이어질 우려도 생긴다. 국가의 안녕과 발전을 기원함으로써 민심과 사회를 통합해 이런 우려를 해소하는 기능이 팔관회 행사에 녹아들어 있다. 고려 팔관회의 역사적 의의는 여기에 있다.
- 중앙선데이 | 박종기 국민대 교수 | 제332호 | 2013.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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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이 국보로 지정한 의주성 남문 전경. 고려 영토였던 의주(당시 지명은 보주)는 1014년부터 103년간 거란에 점령됐다. 고려는 보주를 되찾기 위해 거란과 분쟁을 거듭했다.[국립문화재연] |
덕종 “보주성 탈환” 외치다 18세에 의문의 죽음 |
고려사의 재발견 · 백년 영토분쟁 <1>
1907년 일본이 독도를 시마네현에 강제 편입하면서 시작된 ‘독도 영유권 분쟁’은 10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이 같은 영토분쟁이 고려 때도 있었다. 1014년(현종5) 거란이 압록강 동쪽 고려 영토인 보주(保州·지금 義州)성을 점령한 뒤 고려가 이곳을 되찾은 건 100여 년 뒤인 1117년(예종12)이다. 거란이 보주를 실효적으로 지배한 점만 다를 뿐 장기간에 걸친 영토분쟁이란 점에서 독도 영유권 분쟁과 다를 바 없다. 분쟁의 발단은 다음과 같다.
“거란이 압록강에 다리를 놓은 뒤 그것을 끼고 동서로 성을 쌓았다. 고려는 군사를 보내 공격해 깨뜨리고자 했으나 이기지 못했다.”(『고려사』권4 현종6(1015) 1월)
거란이 압록강에 부교(浮橋)를 설치해 고려 영내로 들어와 성을 쌓은 건 1014년 (현종5) 6월이다. 6개월 뒤인 1015년 1월 고려가 이 성을 공격한 것이다. 거란 측 기록에 따르면 이때 거란이 쌓은 성은 압록강 서쪽의 정원성(定遠城)과 동쪽의 내원성(來遠城)이다. 고려는 압록강 동쪽의 내원성을 공격했다. 거란은 고려 영토인 보주를 점령해 내원성으로 이름을 고쳐 거란의 영토로 편입시켰다. 고려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명백한 영토침략 행위였다.
거란이 1010년(현종1) 두 번째로 침략하자, 고려는 국왕 현종이 거란에 직접 가서 항복하겠다는 조건으로 화의를 맺는다. 그러나 현종이 거란에 가지 않자, 거란은 이를 빌미로 강동 6성의 반환을 요구한다. 이마저 고려가 거부하자, 1014년 6월 거란은 보주성을 점령한 것이다. 중국 대륙과 한반도를 오가는 육로의 요충지인 보주 점령은 강동 6성을 되돌려 받기 위해 군사적으로 고려를 압박하려는 거란의 선제 공세였다. 전략과 교통의 요지인 강동 6성의 지정학적 가치를 거란이 그만큼 중요하게 여겼다는 방증이다.
거란 침입 대비해 압록강변 천리장성 축조
| | | 고려가 거란의 침입에 대비해 압록강 하구에서 안변 도련포까지 쌓은 천리장성 | 보주성 점령 4개월 만인 1014년 10월 거란은 제 3차 침략을 단행한다. 3개월 뒤 고려는 앞의 기록과 같이 기습적으로 보주성을 공격하다 실패한다. 3차 전쟁은 5년 뒤인 1019년 2월 강감찬이 이끄는 고려군이 거란을 물리치면서 종결된다. 그러나 고려는 보주성을 반환받지 못했다. 10년 뒤 고려는 다시 보주성을 공격한다.
“1029년(현종20) 흥요국(興遼國)이 요(거란)에 대해 반란을 일으켰다. 거란이 고려에 구원을 요청했다. 문신 곽원(郭元)은 왕(현종)에게 ‘거란이 압록강 동쪽에 점령한 성을 이번 기회에 공격해 빼앗기로 합시다’라고 제안했다. 그러나 최사위(崔士威)·서눌(徐訥)·김맹(金猛) 등은 상소를 올려 불가능하다고 건의했다. 곽원은 고집을 굽히지 않고 군사를 동원해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그 때문에 등창이 나서 죽었다.”(『고려사』권94 곽원 열전).
1029년(현종20) 발해 후손 대연림(大延琳)이 거란에 반란을 일으켜 흥요국을 세우자, 거란이 고려에 흥요국 진압을 위한 구원병을 요청했다는 기록이다. 이때 보주성 공격을 제안한 곽원은 거란이 1014년(현종5) 6월 제3차 침략을 단행했을 때 사신으로 송나라에 가서 구원을 요청했던 인물이다. 거란에 강경한 입장을 가진 매파였던 것이다. 곽원은 다른 중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보주성을 공격했으나 실패한다. 고려는 1015년(현종6) 1월에 이어 14년 만에 단행한 두 번째 보주성 탈환 전투에서도 패배한 것이다.
2년 뒤인 1031년 현종이 숨지면서 그의 맏이인 덕종(德宗·1016~1034년, 1031~1034년 재위)이 즉위한다. 그해 10월 고려는 고려 침략을 주도한 거란 국왕 성종(聖宗)의 장례식(이해 6월 사망)과 흥종(興宗)의 즉위식에 사신을 파견할 때 보주성 반환을 요구한다. 고려가 이같이 거란을 압박할 수 있었던 건 국제정세 변화 때문이다.
먼저, 흥요국 건국과 같은 발해 부흥운동 직후 거란 성종이 숨지고, 부마 필제(匹梯)가 반란을 일으키는 등 거란의 어수선하고 불안한 정세가 작용했다. 고려는 이를 틈타 보주성을 반환받으려 했던 것이다. 다음, 당시 고려는 덕종의 장인 왕가도(王可道)가 정국을 주도했다. 왕가도는 거란에 강경한 입장을 견지한 매파였다. 매파와 비둘기파를 적절하게 이용해 정국을 주도하던 현종이 죽자, 매파인 왕가도가 정국의 주도권을 잡은 것이다. 이해(1031년) 11월 거란 성종의 장례식에 참석한 고려 사신이 귀국한다.
“(사신) 김행공(金行恭)이 귀국하여 ‘거란이 우리 고려의 요구를 거부한다’고 보고했다. 평장사 서눌(徐訥) 등 29명은 ‘사신 파견을 중단하자’고 했다. 반면 중추사 황보유의(皇甫兪義) 등 33인은 ‘거란과의 단교는 결국 (전쟁을 일으켜) 백성을 피곤하게 하는 폐단을 가져다 줄 것이니, 거란과의 관계를 유지해 백성을 쉬게 하는 것이 좋다’고 반박했다. 그러나 덕종은 서눌과 왕가도의 의견에 따라 사신 파견을 중단하고 죽은 거란 성종 연호만 사용하기로 했다.” (『고려사절요』 권3 덕종 즉위년(1031) 11월)
거란이 보주성 반환을 거부하자 고려는 새로 즉위한 흥종의 연호 사용을 거부한 것이다. 거란의 새 국왕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고려는 이듬해인 1032년 (덕종1) 정월 거란 사신의 입국도 거부한다. 거란과 외교관계까지 단절한 것이다. 고려는 이어 삭주(보주 인근), 영인진(함경도 영흥), 파천현(함경도 안변) 등지에 성곽을 쌓아 거란의 침입에 대비한다. 이 조치의 연장이 1033년(덕종2) 시작된 압록강 하구에서 함경도 안변 도련포까지의 천리장성 축조다(1044년 완성).
덕종, 강경파 장인 사망 넉 달 뒤 같은 운명
덕종이 즉위 4년 만에 숨지자 상황은 급변한다. 전왕의 동생 정종(靖宗, 고려 제10대 국왕)이 즉위한 이듬해인 1035년 거란은 외교관계의 재개를 요구한다. 여러 차례 교섭 끝에 1039년(정종4) 두 나라는 보주 문제에 타협하고, 8년간 중단된 외교관계를 재개한다. 선왕(성종)의 유지(遺志)를 거스를 수 없다는 구실로 거란은 보주성 반환을 여전히 거부했다. 대신 이곳에 고려인의 농경과 정착을 허용한다. 보주성을 돌려받지는 못했지만 고려가 농민의 경작과 정착권을 획득한 건 거란의 보주성 영유를 인정하지 않으며, 언제든 반환의 불씨를 살릴 근거를 얻었다고 평가할 수 있는 측면이 있다. 어떻든 보주성 영유권 문제는 긴 시간을 요하는 장기 과제로 남긴 셈이 되었다. 보주성 문제가 8년 만에 타협론으로 급변한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거란은 탐욕스럽고 사나워 신의를 지킬 수 없어 태조(왕건)가 그들을 깊이 경계 하였다. 그러나 대연림(大延琳)의 난(발해의 후신인 興遼國을 건설한 일)을 계기로 거란과의 구호(舊好)를 버리는 것 또한 좋은 계책은 아니다. 현종은 어려운 때에 반정(反正)하매 미처 겨를이 없었다. 덕종은 어리기 때문에 더욱 전쟁을 경계해야 했다. 왕가도가 (거란과) 화친의 의리를 끊자는 주장은 화친을 유지하면서 백성을 쉬게 하자는 황보유의(皇甫兪義)의 주장보다 좋지 않다. 정종이 왕위를 계승한 지 3년 만에 최연하(崔延하)가 거란에 사신으로 가고, 4년에 거란 사신 마보업(馬保業)이 왔다. 이때부터 (고려와 거란은) 다시 화평을 유지했다.” (『고려사』 권5 정종 12년, 이제현의 정종에 대한 史評)
이제현(1287~1367년)은 정종 때의 타협론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원나라와 고려의 원만한 관계를 희구한 원 간섭기 지식인의 입장에서 나올 수 있는 당연한 평가다. 그런데 위의 글을 읽어보면, 타협론이 나오기까지 매파를 대표한 왕가도의 단교론(斷交論)과 황보유의의 화친론(和親論) 사이에 치열한 정치적 대립과 갈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정종은 거란에 보낸 문서에서 ‘보주성 반환 주장은 전왕(덕종)이 제기한 것’ 이라고 분명한 선을 긋고 거란과 타협한다. 즉 보주성 문제와 거란 관계의 재개는 별개라는 논리다. 정종의 즉위와 타협론의 득세 뒤에는 고려 정국 내부에 엄청난 희생과 대가가 뒤따랐던 것이 분명하다.
이승휴(1224~1300년)는 『제왕운기』에서 “덕종은 어찌해서 (재위기간이) 4년에 그쳤는가? 봉황이 와서 태평성세를 송축하네”라고 당시 역사를 시로 읊었다. 『고려사』 등에는 나오지 않은 기록이다. 덕종 때 강경론을 주도한 정치세력의 몰락이 덕종의 죽음을 재촉했고, 이후 정국이 안정을 되찾은 사실을 암시한 것이다. 덕종의 장인으로 정국을 주도한 왕가도가 1034년(덕종3) 5월 사망하고, 덕종도 이해 9월 숨진 사실이 그를 뒷받침한다. 이보다 90여 년 전인 949년(定宗4) 1월 후견인 왕식렴이 죽자, 서경 천도를 추진한 정종(定宗, 고려 제3대 국왕)도 3개월 뒤 사망한 사실을 연상케 한다. 덕종은 천수를 누리지 못한 것이 분명하며, 그의 죽음은 보주성 문제를 둘러싼 강온론 사이의 정치적 갈등의 결과였다. 즉 타협론이 등장하기까지 엄청난 정치적 희생과 대가가 뒤따랐던 것이 분명하다. 이승휴의 언급 외에 확인할 기록이 없다는 게 유감이다. 온건론(타협론)이 정국을 주도함에 따라, 보주성 문제는 이후 80년의 긴 시간 동안 지루한 외교전을 통해 해결의 길을 모색하게 된다.
- 중앙선데이 | 박종기 국민대 교수 | 제333호 | 2013.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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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단둥 쪽에서 바라본 압록강과 북한의 위화도. 고려는 압록강 일대에 세워진 보주성(保州· 지금 義州)을 놓고 거란과 100년 넘는 영토분쟁을 벌인 끝에 이를 탈환하는 데 성공한다. |
송·거란·여진 사이 줄타기 외교 … 103년 만에 보주 탈환 |
고려사의 재발견 · 백년 영토분쟁 <2>
1117년(예종 12) 3월, 금나라의 공격에 쫓긴 거란이 보주성에서 철수한다. 고려는 마침내 보주성을 고려 영토로 편입하고, 보주를 의주(義州)로 명칭을 고친다.1014년 이래 103년 동안 고려가 기울인 적공(積功)이 백년 영토분쟁을 종결시킨 것이다. 이를 축하하기 위해 국왕 예종에게 올린 신하들의 글은 감격에 겨워 비장한 느낌마저 든다.
“압록강의 옛 터(*보주)와 계림의 옛 땅은 멀리 선조 때부터 옷깃과 허리띠와 같이 우리나라를 둘러싼 요새였습니다. 중간에 거란에게 빼앗겨, 사람들은 분노했고 신(神)조차 수치심을 느꼈습니다. 거란과 금나라가 다투어 보주성의 향방이 어찌 될까 걱정했는데, 하늘이 금나라로 하여금 이 땅을 우리에게 헌납하도록 길을 열었고, 거란이 성을 버리고 도망했으니 이는 사람의 힘으로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곳의 우물과 연못이 우리 땅이 되어, 세금을 매기고 농사를 지어 우리의 영토를 넓히게 되었습니다.”(『고려사』 권14 예종 12년 3월)
압록강에서 한반도 남쪽 끝 계림의 땅까지 전부 우리 땅이라는 분명한 영토의식을 보여주는 글의 하나다. 보주성 탈환에 인간이 아닌 신(神)의 힘이 작용했다는 것은 수사일 뿐이다. 그 뒤엔 고려 특유의 유연하면서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외교전략이 발휘됐던 것이다. 이런 사실을 읽어야 백년 영토분쟁의 교훈을 얻을 수 있다.
“현종 · 덕종 · 정종 · 문종은 아비(현종)에 이어 아들(*덕종)이 그를 이었으며, 형이 죽자 동생(*정종과 문종)이 각각 왕위를 잇는 일이 거의 80년이나 되었다. (왕조의) 전성기라 할 만하다. (중략) 문종은 불필요한 관원을 줄이고 일을 간소하게 하였고, 비용을 줄여 나라가 부유하게 되었다. 큰 창고의 곡식이 썩어 문드러져,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마다 풍족하여 태평성대라 불렀다.” (『고려사』 권9 문종 37년 이제현의 문종 사찬)
고려 말 역사가 이제현은 현종(顯宗:1009~1031년 재위), 덕종(德宗:1031~1034년 재위), 정종(靖宗:1034~1046년 재위), 문종(文宗:1046~1083년 재위)으로 이어지는 80년간을 고려왕조의 전성기로 쳤다. 특히 문종 때를 일컬어 고려가 가장 번성한 태평성대라 했다. 그러나 “천석꾼은 천 가지 걱정, 만석꾼은 만 가지 걱정이 있다”란 말이 있듯이, 전성기를 이끈 국왕 문종에게도 걱정은 있었다.
태평성대에 재개된 거란의 도발
1038년(정종 5) 거란과의 타협으로 소강상태였던 보주성 문제가 문종 때 다시 불거진 것이다. 고려가 보주성 탈환을 위해 군사적 공세를 취했던 덕종 때와 달리 이번엔 거란이 보주성을 거점으로 공세를 취하기 시작한다. 이 사실은 1055년(문종 9) 7월 고려가 거란의 동경유수에게 보낸 항의문서에서 확인된다.
“고려는 기자의 나라를 이어받아 압록강을 경계선으로 삼았다. 전 태후(前 太后: 거란 성종의 모후)께서도 압록강을 경계로 삼게 했는데, 귀국(거란)은 우리 영토에 들어와서 다리를 놓고 성을 설치했다. 요즘엔 보주성에 군사시설을 증강하여 우리나라 사람을 놀라게 했다. 황제(거란 왕)에게 보고하여 귀국이 설치한 다리와 보주성의 군사시설을 철거하여 영토를 우리에게 반환해 주기 바란다.”(『고려사』 권7)
한 해 전(1054년) 7월 거란이 보주성에 신설한 군사시설 철거와 영토 반환을 요구하는 내용이다. 1038년(정종 5) 타협을 본 보주성 문제가 거란의 군사시설 증강으로 16년 만에 다시 분쟁의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다. 이듬해(1056년) 거란은 보주성 일대에서 농경지를 확장하기 시작했다.
이런 거란의 도발을 무력화하기 위해 고려가 선택한 수단은 외교 전략이었다. 1071년(문종 25) 3월 고려는 송나라와 50년 만에 외교관계를 재개했다. 두 나라의 연합을 가장 꺼려 하는 거란의 약점을 노린 것이었다. 1004년 거란과의 영토전쟁에서 패해 매년 막대한 공물을 바치는 치욕을 당해 온 송나라는 신종 (神宗: 1068~1085년 재위) 때 신법당(新法黨:신종의 후원 아래 부국강병을 추구하는 ‘신법(新法)’으로 혁신정치를 편 왕안석을 지지한 정파)이 집권한다. 신법당은 거란을 제압하기 위해 그 배후의 고려와 연합한다는 이른바 ‘연려제요(聯麗制遼)’의 외교전략을 수립한다. 고려는 송나라의 이런 의도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
외교관계를 재개한 두 나라는 이후 유례가 없을 정도로 활발하게 교류한다. 송나라와 거란의 대립을 적절하게 이용해 영토분쟁을 유리하게 이끈 고려식 등거리 실리외교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고려와 송나라의 외교관계 재개로 군사시설 증강 같은 무력시위가 실익이 없다는 사실을 안 거란은 보주의 영유권을 확고히 하기 위해 그 일대에 무역장을 설치하는 정책으로 선회한다. 고려에 대한 거란의 무역장 설치 요구는 선종(1084∼1094년 재위) 때 본격화한다.
보주는 한반도와 대륙으로 이어지는 길목이자, 압록강 일대의 교역 중심지였다. 거란은 보주의 교역권을 장악해 이익을 챙기는 한편으로 그 영유권을 영구화하려 했던 것이다. 고려가 무역장 설치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이유다.
“거란이 각장(각場:무역장)을 압록강 언덕에 설치할 것을 의논하자, 이를 알아챈 고려는 중추원 부사 이안(李顔)으로 하여금 대장경을 분향하는 임무를 진 것처럼 가장하게 해 귀주(龜州)에 보냈다. 몰래 변방의 일(*전쟁)에 대비하게 했다.” (『고려사』 권10)
| | | 거란의 무역장 설치 움직임에 맞서 고려가 군대를 파견한 귀주성. 강동 6성 가운데 최고 요새였다 | 1088년(선종) 2월의 일이다. 고려는 강동 6성 가운데 최고 요새인 귀주성(龜州)에 군사를 파견한다. 전쟁을 각오할 정도로 강경한 입장을 취한 것이다. 이어 이해 9월 고려는 사신을 거란에 보내 무역장 철회를 요구한다.
“(압록강 양안에 각각 성을 쌓아 두 나라의 영토로 삼으라는) 994년 (거란)성종(聖宗) 교서의 먹도 마르기 전에 1014년엔 (거란이) 압록강에 다리를 놓아 길을 통했습니다. (중략) 몇 차례 글을 올려 성곽의 철거를 요구했는데, 듣지 않았습니다. 이제 와서 신시(新市:무역장)를 경영한다고 하니, 선조(先朝:거란 성종)의 남긴 뜻을 어기는 일이며, 소국(*고려)이 충성을 다하고 있음을 옳게 여기지 않는 듯합니다. 수 천리 길에 수레(*사신)의 왕래가 게으름을 잊고 90년 동안 공물을 바친 공로가 헛것이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탄식하고 원망하고 있습니다. 지금 고려는 선대를 이어 바깥 울타리를 지키던(*제후의 역할) 얼마간의 즐거움이 다시 분노로 바뀌게 됩니다. 어찌 조그만 이익을 가지고 서로 원망을 맺어야 합니까?”(『고려사』 권10 선종 5년(1088) 9월)
거란이 무역장 설치를 철회하지 않을 경우 고려는 제후의 의무를 버리고 원망 (*전투)을 맺을지 모른다는, 선전포고에 가까운 내용이 들어 있다. 그 때문일까? 거란은 이해 11월 고려 사신이 귀국하는 편에 보낸 답서에서 “무역장 설치는 아직 논의 중인 사안이므로 고려는 더 이상 의심하지 말라”고 밝힌다. 사실상 무역장 설치 계획을 철회하겠다는 뜻이다. 이로써 이 문제는 마무리된다.
전쟁 각오한 항의로 무역장 철회시켜
고려의 요구에 거란이 왜 쉽사리 응했을까? 고려는 친송 대신 친거란으로 외교정책을 선회하고, 거란은 무역장을 포기한 맞바꿈의 결과였다. 그러나 더 근본적인 이유는 당시 급변하기 시작한 대륙의 정세 때문이었다. 여진족이 점차 강성해(1115년 금나라 건국) 고려와 거란 양국 국경을 침범하고 있었다. 여진의 군사적 위협에 대한 위기의식을 두 나라는 공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처하는 게 양국 간 영토분쟁보다 더 화급했다. 영토분쟁으로 여진족에 어부지리(漁父之利)를 안겨줄 수는 없었던 것이다.
고려가 1104년(숙종 9)과 1107년(예종 2), 두 차례에 걸쳐 여진 정벌에 나선 것도 그 때문이다. 새로운 정세 변화가 영토분쟁을 잠시 뒷전으로 접어두게 했던 것이다. 당시 고려가 친송 대신 친거란 정책을 편 것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는 보주성(保州·지금 義州) 반환의 끈을 놓지 않았다. 1115년(예종 10) 1월 금나라를 건국한 여진족은 곧바로 이웃 거란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다급해진 거란은 이해 8월과 11월 거듭 원병을 요청하지만 고려는 거부한다. 1116년 8월 금나라가 보주성을 공격하자, 고려는 사신을 금나라에 보내 보주성은 원래 고려 영토란 사실을 알리고 탈환 후 반환해 줄 것을 요구한다. 그러자 금나라는 고려가 직접 보주성을 탈환하라고 대답해 고려의 보주성 점령을 허용한다. 고려를 우군으로 삼아 거란과의 연합을 막으려는 금나라의 의도를 읽을 수 있다. 고려는 금나라의 이런 의도를 미리 꿰뚫고, 금나라에 사신을 보낸 것이다.
1117년(예종 12) 3월 금나라의 공격으로 보주성이 함락 직전에 이르자, 고려는 마침내 군사를 동원해 보주성을 점령한다. 이어 보주(保州)를 의주(義州)라 명칭을 고치고, 고려 영토에 편입한다.
영토분쟁이 전쟁 일보직전으로 치닫는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고려는 거란과 금나라에 대해 적대정책 대신 신뢰와 화해의 외교전술을 구사했다. 즉 여진족(금나라)에 공동으로 대응하겠다는 외교·군사적 신뢰를 거란에 보여주는 한편으로, 거란의 군사요청을 거부해 신흥 강국 금나라를 안심시킨 것이다. 보주를 둘러싼 백년의 영토분쟁을 종결시킨 건 이렇게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았던 고려의 유연한 외교전략이었다.
- 중앙선데이 | 박종기 국민대 교수 | 제334호 | 2013.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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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청자를 대표하는 작품인 국보 제68호 청자상감운학문매병. 당당한 어깨와 유연한 곡선미가 특징이다. [간송미술관] |
상감청자, 宋 아닌 거란 공예기술 힘입어 탄생 |
고려사의 재발견 · 명품 열전 ① 청자
“도기의 빛깔이 푸른 것을 고려인은 비색(翡色)이라고 한다. 근래에 만드는 솜씨와 빛깔이 더욱 좋아졌다. 술그릇의 형상은 참외 같은데, 위에 작은 뚜껑이 있고 그 위에 연꽃에 엎드린 오리 모양이 있다.” (『고려도경』(1123년) 권32 도존(陶尊)편)
12세기 전반 고려를 찾았던 송나라 사신 서긍이 묘사한 고려청자의 모습이다. 박물관에 진열된 술병 형상의 고려청자 모습이 쉽게 연상될 만큼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청자의 종주국인 중국인의 눈에도 중국의 것과는 다른 독자적 제품으로 비칠 만큼 고려의 청자 제조술이 발달했음을 알려주는 기록이다. 서긍이 주목한 고려 독자의 제품은 비색 청자였다.
“건주(建州)의 차, 촉(蜀)의 비단, 정요(定窯)의 백자, 절강(浙江)의 차 등과 함께 고려비색(高麗翡色*비색청자)은 모두 천하제일이다. 다른 곳에서는 따라 하고자 해도 도저히 할 수 없는 것들이다.”(『수중금(袖中錦)』)
비색청자는 서긍뿐 아니라 송나라 사람들 대부분이 인정한, 고려의 높은 기술 수준이 반영된 제품이었다. 청자는 섭씨 1200도 이상의 고온에서 제작된다. 이 정도의 온도를 낼 수 있는 가마 시설에다 흙과 유약이 고온에서 융합돼 비취색이 감도는 특유의 색깔을 창출하는 제작 기술이 필요하다. 그 점에서 비색청자는 지금의 신소재 첨단제품이나 다름없었다. 서양에선 17세기에야 제작이 가능했다. 중국은 이미 9세기 무렵 청자를 생산했는데, 고려는 10세기 초 중국에서 기술을 수입해 만들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11세기 후반~12세기 초에 독자의 제작기술을 개발해 탄생한 게 비색 청자다.
서긍은 “(고려의) 그릇은 대부분 금으로 도금한 것을 썼고 혹은 은으로 된 것도 있으나 청도기(靑陶器)를 귀하게 여겼다”고 했다. (『고려도경』 권26 연례(燕禮)조)
12세기 초만 해도 고려 궁중의 연회에서 청자가 많이 사용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보다 또 한 단계 도약된 기술로 제작된 것이 상감(象嵌)청자다. 12세기 중반부터 만들어졌는데, 이때부터 각종 형식의 고려청자가 대량으로 생산되기 시작한다. 서긍이 상감청자를 언급하지 않은 것은 12세기 전반까지 상감청자가 생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왕실의 정자 지붕까지 뒤덮은 청자
상감청자는 상감 기법으로 만들어진 청자다. 상감은 원하는 형태로 물건을 만든 뒤 표면에 무늬를 새기고, 흰색과 붉은 색 흙을 발라 굽는 기법이다. 단조로운 푸른색 대신 흰색과 검은색이 어우러져, 화려하고 장식적인 멋이 두드러진 고려청자의 백미다. 중국 기술을 모방하고 그 영향을 받아 생산된 ‘고려초기 청자’와 달리 고려의 독자 기술로 생산된 청자를 ‘고려중기(11세기 후반~13세기 중반) 청자’라 한다 (장남원, 『고려중기 청자 연구』, 2006).
| | | 1 송 황실의 제기(제사 용기)로 사용된 청자 파편. 2 중국 닝보(寧波)에서 발굴된 청자 파편. 박종기 | “(고려 18대 국왕 의종은) 민가 50여 구(區)를 헐어서 대평정(大平亭)을 짓고, 태자에게 명해 현판을 짓게 했다. 주위에 이름난 꽃과 특이한 과실수를 심은 뒤 진기하고 아름다운 물건들을 좌우에 진열했다. 정자 남쪽에는 못을 파고 관란정(觀瀾亭)을 지었다. 그 북쪽엔 양이정(養怡亭)을 지어 청자로 지붕을 이고, 남쪽엔 양화정(養和亭)을 지어 종려나무로 지붕을 이었다.” (『고려사』 권18 의종 11년(1157) 4월)
12세기 중엽 고려왕실이 지은 정자의 지붕을 청자로 덮었다는 기록이다. 정자인 ‘양이정’의 지붕을 인 청자기와는 현재 전남 강진과 전북 부안에서 많이 출토되고 있는데, 이 무렵 본격 생산된 것이다. 고려청자는 항아리·주전자· 대접·접시·잔·병 등의 식생활 용구, 촛대·향로 등의 제의(祭儀) 용구, 베개·상자·의자·벽돌·기와 등의 주거 용구, 연적·벼루·붓꽂이 등의 문방 용구에 이르기까지 의식주 전반에 걸쳐 다양하게 사용됐다. 특히 청자가 대량 생산돼 소비된 건 고려의 독자 기술로 상감청자가 제작된 12세기 중반 이후다. 하지만 고려청자가 실제로 어떻게 생산·유통·소비됐는지 알려주는 기록은 찾을 수 없다. 중국인 서긍이 비색 청자에 관한 기록을 남겼지만, 최고의 기술수준을 보여준 상감청자에 관한 기록을 찾을 수 없어 아쉬움이 더 크다.
그런데 지난 6월 26~30일 중국 항저우 저장대학에서 개최된 ‘고려청자 국제학술회의’(한국고등교육재단 지원)는 그런 아쉬움을 풀어준 기회였다. 한국·중국·일본의 고려청자 전공 학자들이 함께 모인 첫 학술회의인데, 제출된 논문만 무려 40여 편이나 됐다. 고려청자가 학술적으로 국제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일깨워준 회의였다. 세계적으로 고려사 일반을 전공하는 외국인 학자는 10명이 채 안 되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번 학술회의의 규모와 수준은 필자에게 놀라움과 부러움을 안겨주었다.
이번 자리에서 주목을 받은 것은 상감청자였다. 그 제작 기술과 유통이 주된 의제였다. 한국을 포함해 중국·일본 학자 대부분은 상감청자 제작 기술이 중국에서 유입됐다고 봤다. 초기 청자 제작 기술은 중국에서 수용된 게 맞다. 하지만 상감청자 제작 기술까지 그렇게 본 것에는 재고의 여지가 있다. 독자적인 기술은 스스로 나오지 않는다. 외부로부터 수용(모방)되고 변용(응용)과 창조의 단계를 거쳐야만 독자의 기술로 발전한다. 기술이 지닌 국제적 속성이다. 고려왕조 시절 국제 질서는 고려와 송나라 · 거란 · 금나라(여진) · 일본 등이 다양하게 교류한 다원적인 사회였다. 고려는 송나라 외에 여러 국가와 교류했던 것이다. 더욱이 거란과의 전쟁이 끝난 1021년부터 50년간 고려는 송나라와 국교를 단절한다. 민간교류는 계속됐지만 국교 단절은 아무래도 새로운 기술의 수용과 교류에 제한을 주기 마련이다. 송과의 국교 단절 이후 고려의 공예기술은 거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고려에 항복한 거란 포로 수만 명 가운데 10명 중 1명은 기술자인데, 그 가운데 기술이 정교한 자를 뽑아 고려에 머물게 했다. 이들로 인해 고려의 그릇과 옷 제조 기술이 더욱 정교하게 되었다.”(『고려도경』 권19 ‘民庶 工技’ 조)
고려가 거란으로부터 도자기 등 그릇 제조 기술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려주는 기록 이다. 상감 기술은 금속 제품과 나전칠기를 만들 때 금이나 은을 잘게 실 모양으로 꼬아 문양 주변에 테두리로 두르고, 그 속에 조개껍질 등을 박아 넣는 기술인 ‘입사(入絲)’에서 유래된 것이다. 입사는 거란의 전통적인 공예기법이다. 이처럼 상감기술은 고려가 처한 국제질서 속에서 거란의 기술과 관계를 맺고 있다. 송나라로부터 상감 기술이 일방적으로 수용됐다는 주장은 온당치 않다.
청자 종주국이 고려청자 역수입
고려청자 국제학술회의에서 또 하나 주목받은 것은 상감청자의 유통 문제였다. 송나라가 금나라에 쫓겨 수도를 항저우로 옮기면서 남송시대(1127~1279)가 시작된다. 상감청자는 남송시대인 12세기 중반 이후 제작되는데, 남송 이후 송과의 교류는 고려사 기록에 거의 나타나지 않아, 학계는 두 나라의 교류가 사실상 단절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런데 남송의 수도였던 항저우를 중심으로 상감청자를 비롯한 상당히 많은 고려청자가 발굴된 사실이 이번 회의에서 보고되었다. 상감청자의 완제품이 현재 베이징과 상하이는 물론 티베트 지역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주요 박물관에 전시돼 있다는 것이다. 또 일본에선 고려 초기부터 말기까지 생산된 청자가 나라 전역에서 발굴됐고, 상감청자를 포함한 많은 고려청자가 멀리 베트남 · 필리핀 등지에서도 발굴됐다는 사실도 보고됐다. 어떤 중국인 학자는 “중국은 남송 때 고려의 상감청자를 역수입하는 국가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번 회의에 때맞춰 항저우에 있는 ‘중국 관요(官窯) 박물관’에서 고려청자 특별전이 열렸다. 남송 때 항저우 인근에서 발굴된 고려 상감청자편(*파편)이 대량으로 전시됐다. 특히 상감청자로 제작된 황실의 제의(祭儀)용 물품과 황제의 비(부인) 및 궁전의 명칭이 표면에 새겨진 상감청자편도 있었다. 상감청자가 송나라 황실에서 수입돼 사용된 사실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12세기 중반부터 제작된 상감청자가 남송은 물론 동아시아 일대에까지 대량으로 유통·소비된 사실은 기록상 나타나지 않은 고려의 활발했던 대외교류 실상을 확인시켜 준다. 고려의 명품 청자는 『고려사』 『고려도경』 등 몇 편에 불과한 빈약한 문헌기록의 공백을 메워주고 고려의 가려진 역사를 새로운 모습으로 복원하는 역할을 한 고려 문화의 아이콘인 셈이다.
- 중앙선데이 | 박종기 국민대 교수 | 제335호 | 2013.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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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도 가평 장지방(張紙房)에서 전통 한지를 제작하는 모습. 장지방은 문화재청이 지정한 지장(紙匠)의 공방이다. [사진 김형진 국민대 교수] |
희고 매끄럽고 질긴 종이 … 종주국 중국에 역수출 |
고려사의 재발견 · 명품 열전 ② 고려지(高麗紙)
고려시대에 생산된 종이를 당시 중국의 문인·학자들은 ‘고려지(高麗紙ㆍ고려 종이)’라고 불렀다. 오늘날 한국의 대중가요 · 영화 · 드라마를 선호하는 해외 트렌드를 ‘한류(韓流)’라 하듯이 고려지는 고려판 ‘한류’ 원조이자 또 하나의 고려 명품이다.
지난 호에서 소개했듯 송(宋)나라 왕실은 다량의 고려청자를 수입 · 소비했고, 그 유물들이 남송의 수도 항저우(杭州)에서 집중적으로 발굴되었다. 그러나 그런 사실이 『고려사』 등의 역사 문헌에 기록된 경우는 거의 없었다. 반면에 고려지가 중국에 널리 유통된 사실은 각종 문헌 기록에 많이 나타난다. 1074년(문종28), 1080년(문종34) 7월 고려는 송나라에 대지(大紙) 20부(副ㆍ2000폭)를 각각 바쳤다. 원나라(몽골)도 고려와 1218년 공식 관계를 맺은 지 3년 만인 1221년(고종8) 고려로부터 종이 10만 장을 공물로 받아갔다. 또 1263년(원종3) 9월과 이듬해 4월에도 원나라는 다량의 고려 종이를 공물로 수취했다. 이렇게 고려지는 송나라뿐만 아니라 원나라에서도 호평을 받았다.
조선 후기 역사학자 한치윤(韓致奫;1765∼1814년)이 저술한 해동역사(海東繹史)엔 당시 중국인들의 고려지에 대한 평가가 잘 정리되어 있다.
“중국에서 나지 않는 것은 외국의 오랑캐로부터 많이 가져다가 쓴다. 당나라 사람들의 시 속에 ‘만전’(蠻전·오랑캐 종이)이란 글귀가 많이 인용되어 있는데, 여기엔 다 까닭이 있다. 고려에서는 해마다 종이(만전)를 조공했다. (중국에서) 책을 만들 때 이것(고려지)을 많이 사용했다.” (『해동역사』권27 문방류(文房流) 종이편)
고려지가 중국 대륙에서 널리 유통됐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기록이다. 중국인들은 ‘아름다운 흰빛에 결이 있는 매끄러움’ ‘두터움과 흰빛’ ‘흰빛과 질김’ 등의 표현으로 고려지의 우수성을 묘사했다. 종이는 인쇄술 · 나침반 · 화약과 함께 중국이 자랑하는 4대 발명품인데, 한나라 채륜(蔡倫)이 2세기 무렵 발명한 것이다. 그런데 그로부터 천년이 지나지 않아 중국은 고려지를 수입해 사용한 것이다. 그만큼 고려지는 당시 중국 문인들에게 인기를 끌었다. 이로 인해 송나라뿐 아니라 양자강 유역의 만족(蠻族)에게까지 널리 유통되었다.
닥나무 재료와 두드리는 도침법이 핵심
최근 몽골에서 고려지를 생산했던 공방의 유적이 발굴되었다. 몽골은 품질이 좋은 고려지를 공납받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고려지 기술자를 징발해 현지에서 직접 생산하여 수요를 충당했던 것이다. 고려지의 품질과 기술을 그만큼 신뢰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고려지의 기술 수준, 즉 제지기술의 특성은 무엇일까? 서긍의 『고려도경(高麗圖經)』(1123년)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고려의) 종이는 온전히 닥나무만을 써서 만들지 않고 간혹 등(藤)나무를 섞어서 만든다. 다듬이질을 하여 모두 매끈하며, 높고 낮은 등급이 몇 개 있다 (紙不全用楮 間以藤造 ?搗皆滑? 高下數等).”(권23 토산조)
서긍은 고려지의 강점을 사용 재료와 제작 방법에서 찾았다. 『고려도경』 에서 등나무가 일부 사용되었다 하나, 고려지의 주재료는 닥나무(저;楮)다. 마지(麻紙)가 종이의 주재료인 중국과 다르다. 한나라부터 당나라 이전까지 중국 종이의 80% 이상은 마지였고, 민간에 전래된 서예나 회화에 쓰인 종이도 대부분 마지였다. 국내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종이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陀羅尼經)』(704∼751년 제작 추정, 불국사 석가탑 출토)의 지질을 분석한 결과 재료가 닥나무임이 밝혀졌다. 당나라 시인의 시(詩) 속에서 만전(고려지)이란 용어가 나타난 것처럼 고려지의 연원은 통일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이때부터 닥나무를 재료로 종이를 제작해 왔던 것이다.
종이 표면을 두드려 가공함으로써 먹의 번짐을 막는 도침법(搗砧法)은 고려지 제작기술의 핵심이었다. 다라니경을 분석한 결과 통일신라의 종이도 이 기술로 제작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 기술은 종이 면을 고르게 하여 섬유 사이의 구멍을 메우고 광택 있는 종이를 만드는 데 필요한 종이 가공 기술이다. 또한 긴 섬유를 자르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므로 지나치게 물을 빨아들이거나 보푸라기가 이는 문제점이 해결된다. 적당한 수분을 고르게 먹인 다음, 큰 망치로 두들기는데 그때 두드리는 양을 가늠하는 데서 장인의 솜씨가 발휘된다. 또한 종이 지질이 치밀해지고 광택이 나며 잔털이 일어나지 않아 글씨가 깨끗하게 잘 써진다. 중국에서 고려지를 ‘백추지’(白추紙·표면이 희고 단단한 종이)나 ‘경면지’(鏡面紙·표면이 거울과 같이 맑고 깨끗한 종이) 또는 ‘견지’(繭紙·표면이 솜처럼 부드러운 종이)라고 표현한 것은 바로 이런 제작기술 덕택이다. 이 기법은 종이 위에 먹을 떨어뜨리면 먹이 스며드는 속도가 느릴 뿐 아니라 먹이 옆으로 번지지도 않는다. 이 기술은 신라부터 조선시대까지 꾸준하게 계승된 기술이다. 반면 중국의 제지술은 종이 표면에 백색 광물질 가루를 바르고, 작은 돌로 비벼 광을 내는 방식이다.
고려지의 품질을 크게 향상시킨 도침법은 닥나무와 같이 비교적 단단한 종이 재료 때문에 창안된 기술이다. 중국에서 많이 사용된 마(麻)와 비단 따위의 종이재료는 닥나무(楮)에 비해 부드럽기 때문에 이 기술을 적용할 수 없다. 그렇다면 왜 고려지는 닥나무를 재료로 했을까? 닥나무는 함경도와 제주도를 제외한 한반도의 자연풍토에서 가장 잘 자라며,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다. 한반도의 자연환경을 가장 잘 이용하여 생산된 것이 고려지인 셈이다.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 무렵에 확립된 도침법 기술 덕에 고려지는 종이의 종주국인 중국인도 호평을 할 만큼 경쟁력 있는 수출품이 된 것이다.
‘所’ 시스템으로 수공업 생산, 국가적 지원
고려지가 당시 동아시아 세계에서 인기를 끈 것은 단순히 종이 제작 기술의 우수성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선박과 자동차 · 핸드폰 · TV와 같은 제품이 세계 일류제품이 된 것은 끊임없는 기술 축적과 함께 그를 뒷받침한 사회적 생산시스템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런 시스템은 국가적·사회적 관심과 지원을 바탕으로 했기에 가능한 것이다. 고려 사회는 이러한 사회적 생산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그건 바로 ‘소(所)’ 생산체제로 압축된다.
“고려 때 또한 소(所)라고 불리는 곳이 있다. 금(金)소, 은(銀)소, 동(銅)소, 철(鐵)소, 사(絲)소, 주(紬)소, 지(紙)소, 와(瓦)소, 탄(炭)소, 염(鹽)소, 먹(墨)소, 곽(藿)소, 자기(瓷器)소, 어량(魚粱)소, 강(薑)소로 구분되었으며, 해당 생산물을 공납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권7 여주목(驪州牧) 고적(古跡) 등신장(登神莊)조)
고려 때 제도화된 ‘소’는 금 · 은 · 동 · 철 등의 광산물, 소금(鹽) · 미역(藿) · 생선(漁) · 생강(薑) · 직물(絲ㆍ紬) · 땔감(炭) · 생선(魚梁) 등의 농수산물, 자기·칠기(나전칠기) · 종이(紙) · 기와(瓦) · 먹(墨) 등의 수공업제품을 전문적으로 생산한 곳이다. 고려는 ‘소’라는 특수 행정단위를 두고 해당 제품의 전문 기술자인 장인(匠人)과 각종 제품의 생산을 위한 잡역에 동원된 소민(所民)을 두어 수준 높은 수공업제품을 생산했다. 이를 소 생산체제라 한다. 종이와 청자 외에 나전칠기와 먹 · 칼 등 당시 중국에서 크게 호평을 받은 고려의 수공업제품도 이런 생산체제에서 생산되었다. 소와 함께 향(鄕)과 부곡(部曲) 및 장(莊) · 처(處) 등의 특수 행정단위를 묶어 부곡제(部曲制)라 한다. 부곡제는 군현제(郡縣制)와 함께 고려의 지방행정구조를 떠받치는 두 개의 중요한 축이었다.
왕조건국 반대세력을 所에 편제시켜
부곡제의 일부인 소 생산체제는 고려왕조 성립기의 역사적 특성 속에서 생성되었다. 통일신라시대 이래 개간의 확대로 형성된 새로운 촌락을 군현체제로 편제하는 과정에서 군 또는 현이 되지 못한 영세한 지역을 향이나 부곡 · 소 등으로 편성했다.
고려는 왕조 건국에 반대한 세력들을 이곳에 편제시켰다. 당시 지역 간에 사회 · 경제적 발전 격차가 커서 중앙정부가 전국을 일률적으로 지배할 수 없었던 것도 이런 제도를 만든 또 다른 배경이 되었다. 그 가운데 국가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광산물과 농수산물 및 수공업제품을 생산하기 위해 소라는 특수 행정구역을 편성했다. 일종의 사회적·지역적 분업체제였던 소에서 고려의 명품으로 해외에서 호평을 받은 고려청자와 고려지가 생산된 것이다.
고려청자와 고려지는 사치와 화려함을 추구한 고려 문벌귀족층의 기호와도 맞물려 대량으로 생산되었다. 소는 명품을 향유한 문벌귀족층과 명품을 만드는 장인층 사이를 이어주는 매개 고리 역할을 하였다. 문화의 향유자와 생산자의 분리는 고도의 예술성을 갖춘 질 높은 문화제품을 생산할 수 있게 했다. 고려지 역시 이러한 사회적 생산시스템의 결과물인 셈이다.
- 중앙선데이 | 박종기 국민대 교수 | 제336호 | 2013.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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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인사에 소장돼 있는 재조대장경. 국보 제32호로 지정돼 있다. 초조대장경이 몽고의 침입으로 불타자 고려 왕조가 11년에 걸쳐 만든 두 번째 대장경이다. [중앙포토] |
불교 지식과 첨단 인쇄술 결합된 5000만 자의 하이테크 |
고려사의 재발견 · 명품 열전 ③ 대장경
부처님의 말씀을 담은 경장(經藏), 그것을 해설하고 내용을 보완한 논장(論藏), 수행자의 계율을 담은 율장(律藏) 등 불교와 관련된 경전을 전부 모은 게 대장경이다. 대장경에는 편찬 당시까지 전래된 모든 경전이 포함되어 있다. 한 왕조에서 두 번이나 대장경(大藏經)을 만든 세계 유일의 왕조가 고려다.
“국왕(고종)은 서문 밖 ‘대장경판당’(大藏經版堂)에 행차하여 백관과 함께 분향을 했다. 현종 때 만들어진 판본이 임진년(1232년) 몽고의 침입으로 불타자, 왕이 군신들과 함께 다시 발원하여 도감(都監)을 세워 16년 만에 마쳤다.” (『고려사』 권24 고종 38년(1251) 9월)
두 번째 대장경(1236년 시작)이 16년 만에 완성된 사실을 이같이 전하고 있다. 완성된 경판 숫자가 8만여 개라 흔히 팔만대장경이라 부른다. 고려 때 두 번째로 만든 대장경이라서 ‘재조(再彫 ·두 번째 새겼다는 뜻)대장경’이라고도 부른다. 후자가 더 정확한 표현이다.
재조대장경(再彫大藏經)은 현재 세계에 남아 있는 것 중에 가장 오래된 대장경이다. 세계 최초의 대장경은 983년 완성된 송나라 대장경이지만 1127년 금나라의 침입 으로 불타 없어졌다. 고려는 991년(성종 10년) 송나라에서 이 대장경을 입수했다. 1011년(현종 2년) 거란의 침입을 받자, 고려는 송나라 대장경을 토대로 대장경 판각 작업에 착수한다. 이 작업을 고려의 문장가 이규보(李奎報·1168~1241년)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옛날 현종 2년(1011) 거란주(契丹主: 거란 국왕)가 크게 군사를 일으켜 고려를 침략하자, 국왕은 남쪽으로 피난했다. 거란군은 송악성(松岳城)에 주둔한 뒤 물러가지 않았다. 현종은 신하들과 함께 더할 수 없는 큰 서원을 하여, 대장경을 판각하여 완성하기로 했다. 그러자 거란군사는 스스로 물러갔다.” (『동국이상국집』 권25, ‘대장경판각 군신(君臣)기고문(祈告文)’, 1237년)
1054년(문종 8년) 거란이 자신들의 대장경을 완성하자(1034년 시작), 10년 뒤인 1063년(문종 13년) 고려는 이를 입수한다. 그리고 현종 때 착수한 대장경을 보완하여 1087년(선종 4년) 최종적으로 완성한다. 초조(初彫 ·고려에서 처음 새겼다는 뜻)대장경이다.
고려, 대장경 두 차례 만든 유일한 왕조
당시 동아시아의 보편적인 사상과 지식체계는 유교와 불교였다. 오늘날의 보편적인 사상과 지식체계인 민주주의 이념과 같다. 민주주의 이념의 어젠다를 우리가 선점하고 주도한 적이 있었던가? 대장경 판각은 고려가 당시의 불교 지식과 사상체계를 완전히 이해하고 소화하여 동아시아 사상과 지식체계를 주도했다는 생생한 증거물이다. 대장경을 단순히 불교유산으로 그 역사적 의미를 제한시킬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대장경 판각에 관한 이규보의 증언은 계속된다.
“그때(현종 때)나 지금이나 대장경은 한 가지고, 그것을 새긴 일도 한 가지고, 군신(君臣)이 함께 하늘에 서원한 것도 한 가지이다. 그런데 어찌 그때만 거란 군사가 스스로 물러가고, 지금의 달단(몽고)은 그렇지 않겠는가? (중략) 진실로 지성으로 (서원)하는 것이 그때(현종)에 비해 부끄러울 것이 없으니, 원하건대 제불성현 삼십삼천(諸佛聖賢三十三天)은 간곡하게 비는 것을 헤아려 신통한 힘을 빌려 완악한 오랑캐가 발길을 거두고 멀리 도망하여 다시는 우리 국토를 밟는 일이 없게 하소서.” (『동국이상국집』 권25, ‘대장경판각 군신(君臣)기고문(祈告文)’, 1237년)
1232년(고종 9년) 몽고 침략으로 불타 없어진 대장경을 다시 만들 당시 모든 군신의 비장한 뜻이 잘 드러나 있다. 초조대장경은 70여 년 만에 완성되었는데(1011~1087년), 재조대장경은 16년 만에 완성되었다(1236~1251년). 그러나 재조대장경에 표시된 작성연대를 검토하면, 실제로 1237년(고종 24년)에 제조가 개시됐고 1248년 (고종 35년)에 완성되었다. 알려진 것보다 더 짧게 11년 만에 완성된 것이다. 재조대장경 판각 도중 몽고와 두 차례 전쟁(3차: 1235~1239년, 4차: 1247~1248년)이 있었다. 전쟁 중인 3년간(1237~1239년, 1247~1248년) 전체의 16%만 판각되었다. 대부분(84%)은 전쟁이 없던 7년(1240~1247년) 동안에 집중적으로 판각되었다. 특히 1243년 지방에 분사(分司)대장도감이 설치되어 중앙과 지방에서 동시에 판각이 이루어지면서 대장경 판각은 급속하게 진행됐다. 전쟁이 없던 1243년(전체 20%), 1244년(24.7%), 1245년(10.3%), 1246년(6.6%)의 4년 동안 전체의 약 62%가 완성됐다(최연주, 『고려대장경 연구』, 2006).
김정희 “사람이 아니라 신선이 쓴 글”
고려가 짧은 기간에 대장경을 완성한 것은, 이규보의 증언과 같이 불심(佛心)으로 몽고 침략을 물리치려는 고려인의 혼과 정성의 결과였다. 추사 김정희가 재조대장경을 보고 “이것은 사람이 쓴 것이 아니라 신선이 쓴 글이다(非肉身之筆 乃仙人之筆)”라고 극찬한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그 규모도 대단하다. 재조대장경에 새겨진 글자 수는 약 5200만 자다. 500년 역사가 기록된 조선왕조실록의 글자 수가 5600만 자인 점을 감안하면 그 규모가 어떤지 짐작할 수 있다. 숙련공이 하루 평균 40자를 새길 경우 5200만 자를 새기는 데 연인원이 약 130만 명 동원됐을 것이다. 16년의 작업을 전제로 하면 하루 평균 300명에서 1000명 이상이 동원된 셈이다. 평균 길이 68~78㎝, 폭은 약 24㎝, 두께 2.7~3.3㎝인 경판을 가로로 눕혀 쌓으면 백두산 높이에 가깝다. 그것을 이으면 150리가 된다. 1개 경판을 만들기 위해 지름 40㎝인 원목은 2만7000그루, 지름 50~60㎝인 원목은 1만~1만5000 그루가 필요하다 (박상진, 『나무에 새겨진 팔만대장경의 비밀』, 2007년).
재조대장경 작업이 단기간에 끝난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초조대장경을 제작한 경험이다. 재조대장경에 관한 기록에 따르면 저본(바탕이 된 경전)의 60%는 초조대장경이다. 재조대장경이 단기간에 완성된 가장 큰 이유다. 초조대장경은 불타 없어졌지만, 그것을 종이에 찍은 인본(印本)은 현재 1900점 정도 남아 있는데, 일본(약 1700점)과 한국(약 200점)에 각각 전해지고 있다. 둘째, 재조대장경이 저본으로 삼은 나머지 40%는 초조대장경 이후 송과 거란에서 새로 수집한 경전이다. 즉 초조대장경 제작 이후(1087년) 재조대장경 제작(1236년)까지에 이르는 약 150년 동안 동아시아에 유통된 수많은 불교 경전을 꾸준히 수집·정리한 것이다. 이처럼 축적된 연구가 있었기에 고려의 불교 연구와 이해가 당시 동아시아에서 최고 수준에 이른 것이다. 재조대장경의 독창성과 우수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특히 고려 최고의 학승(學僧) 대각국사 의천(義天·1055~1101)의 역할이 컸다.
“(선종) 2년(1085) 4월에 왕후(王煦*義天)가 몰래 제자 두 사람과 함께 송나라 상인의 배를 타고 송나라에 갔다. 의천은 사방을 돌아다니며 불법을 배우기를 (송 황제에게) 청하여 허락을 받아 관리를 데리고 오(吳) 땅의 사찰들을 방문했다. (중략) 의천은 귀국하면서 불교와 유교 경전 천 권을 (선종에게) 바쳤다. 또 국왕 (선종)께 아뢰어 흥왕사(興王寺)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두고 거란과 송에서 사온 불교 경전 4000권을 간행했다.” (『고려사』 권90, 대각국사 왕후(王煦) 열전)
의천이 1085년(선종 2년) 송나라에 가 여러 사찰에서 불교를 연구했으며, 거란과 송나라에서 수천 권의 불교경전을 구입하여 간행했다는 기록이다. 의천은 이렇게 초조대장경을 완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의천에 이어 승통(僧統) 수기(守其)는 재조대장경을 조판하기 위해 여러 불교 경전을 수집하고 교정했다.
고려 금속활자는 당시 세계 최고 수준
대장경은 한편으로 인쇄술 발달이라는 기술의 진보가 없었다면 완성될 수 없었다. 인쇄술은 지식과 정보를 공유하고 전파할 수 있는 최첨단 기술로서 인류 문화 발달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또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인간의 정신과 가치를 전달하는 매체로서 인문적 가치 혹은 인문정신과 결합된 것이다. 기술과 정신이 결합된 정화(精華)가 바로 인쇄술이다. 현재 세계 최고(最古)의 목판 인쇄본은 751년 통일신라 때 제작된 『무구정광다라니경』(無垢淨光陀羅尼經·불국사 석가탑에서 발견)이다. 목판인쇄술이 통일신라 때부터 발달했음을 알려준다. 이러한 기술 전통에 힘입어 고려가 두 차례나 대장경을 간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재조대장경 간행 직전인 1234년(고종 21년) 고려는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로 『상정고금예문』이란 책을 펴낸 바 있다. 재조대장경 제작 당시 고려 인쇄술은 동아시아에서 최고 수준의 단계에 도달해 있었던 것이다. 흔히 재조대장경을 ‘5000만 자의 하이테크’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인쇄술이라는 최첨단 과학기술이 대장경 제작에 큰 역할을 했음을 두고 한 말이다.
불교 지식에 대한 깊은 이해와 인쇄술이라는 최첨단 기술이 결합됐기에 대장경은 완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부처의 힘으로 외적을 물리치기 위해 대장경을 조판했다”는 이규보의 말 속에는 첨단 지식과 기술이 결합된 당시 고려 문명에 대한 강한 자부심이 담겨 있다. 외세에 대한 저항의식만으로 대장경은 만들어지지 않는 것이다. 현대문명의 총아인 스마트폰은 흔히 인문정신과 첨단기술의 결합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하는데, 대장경 또한 그것에 비유할 만하다. 대장경은 고려 명품의 지위를 넘어 기술과 지식의 결합이라는 한국형 전통문화의 정수이자, 미래 한국문화의 가능성을 말해주고 있다.
- 중앙선데이 | 박종기 국민대 교수 | 제337호 | 2013.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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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 중기의 문신 최루백의 부인 염경애(1100~1146)의 묘지명. 남편 최루백이 부인의 생애를 시와 산문으로 압축해 기록했다.[중앙포토] |
망자의 아름다운 행적 기리는 기록문화 정수 |
고려사의 재발견 · 명품 열전 ④ 묘지명(墓誌銘)
“『예기(禮記)』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 ‘묘지명은 조상의 이름을 알리는 것이다. 조상에게 아름다운 행적이 없으면서 칭찬하면 거짓(誣)이다. 조상이 선한 일을 했는데 알리지 않는다면 밝지 못한 것(不明)이다. 그것을 알고도 전하지 않으면 어질지 못한 것(不仁)이다. 이 세 가지는 군자의 부끄러움이다. ‘부인은 행실이 아름답고, 여러 아들이 밝고 어질다. 이 세 가지 부끄러움과는 거리가 먼 것은 의심할 나위 없다. 그러므로 부인의 공과 행실을 모두 적어 무덤에 넣는다.” <김변(金변) 처 허씨(許氏) 묘지명>
묘지명(墓誌銘)은 한 인물이 숨진 뒤 망자의 이름과 나이, 가계와 행적, 가족 및 장지(葬地) 등을 돌에 새겨 무덤 속에 시신과 함께 매장한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유일하게 고려 때에만 성행한 기록문화 유산의 하나다.
묘지명(墓誌銘)의 ‘지(誌)’는 기록한다는 뜻이고 ‘명(銘)’은 이름(名)이라는 뜻이다. 즉, 덕(德)과 공(功)이 있어 세상에 이름을 남길 만한 사람이 숨지면 후손들이 그의 기록을 후대에 전하기 위해 만든 것이 묘지명이다. 고려청자와 고려지 · 대장경이 고려 장인(匠人)들의 혼이 담긴 명품이라면, 묘지명은 인간의 아름다운 혼을 기록으로 남기려는 고려 기록문화의 정수다. 명품 반열에 올려도 부족하지 않다.
중국서 받아들인 풍습 … 고려 때만 성행
묘지명(墓誌銘)은 망자(亡者)의 시신과 함께 지하에 매장됐다는 점에서 무덤 앞 지상에 세운 묘비명(墓碑銘)과 다르다. 또 묘비명이 조선 왕조 이후에 성행했다면, 묘지명은 고려 때에만 성행했던 기록문화인 점도 다르다. 그러나 망자의 일대기를 산문 형식으로 정리한 지문(誌文)과 그것을 주로 사언(四言) 형식의 운문(韻文:시)으로 압축한 명문(銘文)으로 구성된 점은 같다. 원류를 따지자면 묘지명은 묘비명에서 유래한 것이다.
묘비명은 중국 한나라 때 크게 발달했다. 그러나 205년 위나라의 조조(曹操)가 많은 인력과 비용이 소요되는 후장(厚葬*호화장례)의 폐단을 없애기 위해 지상에 비석을 세우는 것을 금지한다. 그 대신 소형 비석을 만들어 관과 함께 매장하는 풍습이 성행하면서 묘지명 문화가 발달하게 된다. 우리나라도 고려 시대엔 묘비명 제작을 엄격하게 제한했다. 고려에선 지상의 묘비명은 국왕의 허가를 받아야만 세울 수 있었다. 고려 때 제작된 것으로 현재까지 남아 있는 67점의 묘비명은 모두 왕명으로 제작됐다. 왕사와 국사를 역임했거나 그에 준하는 고승(高僧)들의 것이다. 일반인의 묘비명은 고려 말 권문세족인 염제신(廉悌臣:1304~1382년)과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李自春:1315~1361년)의 것만 남아 있다. 그 정도로 일반인의 묘비명 제작은 엄격한 규제를 받았던 것이다. 조선도 초기엔 2품 이상 관직을 지낸 인사에게만 묘비명 제작이 허용되었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 유교문화의 확산으로 조상 숭배 의식이 발달하고 가문의 위세를 과시하려는 욕구가 커지면서 화려하고 거대한 묘비명 제작이 보편화된다. 묘비명 금지 원칙이 무너진 것이다.
고려 왕조 내내 묘지명 문화가 이어진 사실은 대단히 흥미롭다. 왜 고려 때 묘지명 문화가 발달했을까? 중국에서 묘지명 규격이 정형화되고, 제작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는 북위 [선비족의 탁발부(拓跋部)가 중국 화북지역에 세운 왕조:386∼534] 때였다. 이후 수나라(581~618)와 당나라(618~907)에 이르기까지 약 600년간 묘지명 문화가 발달했다. 이는 당시 중국에서 성행한 귀족 문화의 영향과 관련이 있다. 고려 왕조는 건국 직후부터 당나라 제도를 모델로 정치·과거·군사제도를 개혁해 왕조의 격을 높이려고 노력했다. 묘지명 문화의 발달은 고려 왕조의 이런 개방정책과 맞물려 있다. 고려 묘지명은 중국 북위의 묘지명 형식과 매우 유사하다. 당나라와 송나라의 형식도 북위의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고려 묘지명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1024년(현종15)에 제작된 귀화인 채인범(蔡仁範:934~998년)의 묘지명이다.
“(채인범은) 송나라 천주(泉州) 사람이다. (중략) 970년(광종21) 고려에 와서 국왕을 뵈었다. (광종은 채인범을) 예빈성낭중(*5품)에 임명하고, 주택 한 채와 노비·토지를 하사했다. 또 그에게 필요한 물품을 모두 국가에서 공급하라고 명령했다. 공은 경전과 역사에 널리 통달하고, 문장을 잘 지어 임금을 보좌한 큰 재주를 품은 대학자였다.”(채인범 묘지명)
송나라 사람으로 경전과 역사에 달통했던 채인범이 광종의 발탁으로 관리가 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두 번째로 오래된 묘지명은 1045년(정종11)에 제작된 유지성(劉志誠:972~1039)의 것이다. 유지성 역시 송나라 양주(楊州) 출신으로, 성종 대에 고려에 귀화해 재상을 역임했다. 고려엔 이들보다 앞서 쌍기 등 많은 중국인들이 귀화해 관료로 활동했다. 이들이 고려에서 활동하다 숨지면서 묘지명을 만드는 장례풍습이 고려에 도입된 것이다. 대체로 11세기 무렵 묘지명 문화가 고려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다.
왕족 · 관료 부인 등 여성 묘지명 유독 많아
묘지명 문화가 고려에서 발달한 또 하나의 원인은 당시 지배층의 장례 풍습인 화장(火葬)과 관련이 있다. 화장 뒤 망자의 뼈를 수습해 작은 크기의 석관에 담아 지하에 매장했는데, 묘지명은 이런 작은 공간에 석관과 함께 매장하기에 적합한 소재였다. 조상 숭배와 가문의 위세를 드러내기 위해 망자의 생애를 화려하고 장황하게 서술한 묘비명과 달리 망자의 생애를 간략하게 서술한 묘지명이 화장식 장례에 더 적합했던 것이다.
“무덤에 지석(誌石:묘지명)이 있는 것은 오래되었다. 세대가 멀어지면 간혹 (무덤이) 허물어질 수 있지만, 그 지석을 살펴보면 그것이 누구의 무덤인가를 알게 되어 차마 덮어주지 않을 수 없다. 이에 사대부 군자가 그 어버이를 장례 지낼 때 지석을 만드는 것을 뒤로 미루지 않은 것이다.”(고려 후기 문신 이조년의 묘지명)
뒷날 무덤이 훼손되더라도 매장된 지석으로 인해 주인을 찾을 수 있다는 데 묘지명의 효용성이 있다. 다만 묘지명은 지하에 묻히는 만큼 지상의 묘비명처럼 쉽게 수습할 수 없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지금까지 전해지는 묘지명은 많지 않다. 현재 확보된 고려시대 묘지명은 대부분 개발 혹은 자연재해로 인해 무덤이 훼손된 결과 드러난 것이다. 묘지명 문화가 가장 발달했던 중국 북위도 현재 400점 정도만이 전해지고 있다. 고려의 경우엔 현재 약 320점 정도 전해지고 있다. 이 수치는 중국에 비해 적지 않은 것으로 고려 때 묘지명 문화가 매우 성행했다는 증거다. 이 중 실물로 전해지는 묘지명은 200점이고, 나머지 120점은 묘지명을 작성한 사람의 문집 등에 기록으로 전해지는 것이다.
현존하는 고려 묘지명 가운데 승려의 것이 20점, 왕족의 것이 3점, 부인의 것이 34점이다. 나머지는 모두 일반 관료층의 묘지명이다. 반면에 일반 주민이나 지방 세력의 묘지명은 전무하다. 이 점에서 묘지명은 고려시대 관료층이나 중앙 지배층의 문화를 대변하는 유물이다. 특히 왕족과 관료의 부인 등 여성 묘지명이 많은 점도 또 다른 특징이다.
“을축년(1125년) 봄 나는 우정언 지제고(*임금의 잘못을 깨우치는 간관)가 되었다. (중략) 아내는 내게, ‘당신이 궁전에서 천자와 옳고 그른 것을 따지게 된다면, 비록 가시나무 비녀를 꽂고 무명치마를 입고, 삼태기를 이고 살게 되더라도 달게 여길 거예요’라고 말했다. 평범한 부녀자의 말 같지 않다. 병이 위독하여 세상을 떠났으니, 그 아쉬움은 말로 할 수 없다. (중략) 명(銘)하기를, ‘믿음으로 맹세하건대 당신을 결코 잊을 수 없으리라. 함께 묻히지 못함이 매우 애통하도다. 기러기 떼와 같은 아들딸들이 있어 부귀가 대대로 창성하리라’라고 했다.”(염경애(廉瓊愛) 의 묘지명)
남편 최루백(崔婁伯)이 사별한 아내 염경애(1100~1146년)의 내조와 희생을 기리며 직접 작성한 묘지명이다. 마지막 명문(銘文)에서 아내의 생애를 시로 압축하고 있다. 사별의 슬픔을 시의 형식을 빌려 문학적으로 승화시킨 명문은 죽음과 이별을 ‘여유와 관조의 미학’으로 받아들이는 고려 사람들의 생각이 담겨 있다.
인물사 · 가족사 · 사회사 연구에 귀한 자료
묘지명에 여성의 실명(實名)이 기록된 경우는 이 묘지명이 유일하다. 고려의 여성 묘지명에는 이 밖에도 출가한 딸이 홀어머니를 모시거나, 재혼한 여인이 전 남편의 자식을 교육시킨 모습 등이 기록돼 있다. 남자와 균등하게 재산을 상속받고, 호주도 될 수 있었던 고려 여성의 당당한 모습이 잘 담겨 있다. 조선 시대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묘지명은 인간의 출생과 사망, 가계와 출신, 관원의 이력, 가족 관계, 장례 관련자료 등이 기록되어 있어 고려 시대 인물사와 가족사·사회사 연구 자료로 학술적 가치를 지닌다.
묘지명 작성엔 일정한 양식이 있다. 북위의 묘지명에서 정착된 이 양식은 당나라와 송나라로 이어져, 명나라 때 이름 자, 성씨, 출신지(鄕邑), 세계(世系:대대로 내려오는 계통이란 뜻으로 ‘族出’의 의미), 관력(官歷:관리로서의 경력이란 뜻으로 ‘行治’의 의미), 이력(履歷:학업·직업·경험 등의 내력), 사망일(*卒日), 나이(*壽年), 처(妻), 자식(子), 장일(葬日), 장지(葬地) 등 13항목으로 확정된다. (王行의 『묘명거례(墓銘擧例)』) 고려 문신들은 다가올 죽음 앞에서 지나온 삶을 뒤돌아보기 위해 스스로 묘지명(*自撰 묘지명)을 작성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세속의 욕망을 절제하고 삶에서 ‘여유와 관조’를 맛보려 했다. 현대인들도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새로운 삶을 추구한다는 의미에서 ‘자찬 묘지명’을 작성해 보는 일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 중앙선데이 | 박종기 국민대 교수 | 제338호 | 2013.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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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시대에 제작된 석관의 모습. 전면에 보이는 청룡을 비롯해 백호·주작·현무 등 사신도가 그려져 있다. [국민대 박물관] |
망자의 극락환생 빌며 화장한 유골 갈무리 |
고려사의 재발견 · 명품 열전 ⑤ 석관(石棺)
청자나 대장경에 비해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고려문화를 상징하는 또 하나의 문화재가 석관(石棺)이다. 석관은 1916년 개성 개풍군에 위치한 고려 문신 송자청 (宋子淸: ?~1198년)의 분묘에서 처음 출토되면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길이 90㎝, 너비 46㎝, 높이 45㎝, 두께 3㎝ 정도 크기다. 망자의 시신을 담기 위해 사람 키보다 크게 만든 오늘날의 석관과는 다른 크기와 용도임을 알 수 있다.
송자청의 석관에선 묘지명과 부장품도 발굴됐다(『조선고적도보』 7집).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약 60점의 고려 석관도 모두 이 정도 크기다. 전부 개성 일대에서 출토된, 고려의 문화재다. 석관들이 만들어진 형식도 한결같다. 천판(天板: 덮개)과 지판(地板: 밑부분)으로 구성된 두장의 판석(板石)에다 지판 위에 설치돼 천판을 전후좌우에서 지탱하는 4장의 판석 등 모두 6장의 판석으로 조립되어 있다. 이 때문에 고려 석관은 조립식 석관으로 불린다.
석관은 고려 장례문화와 관련된 유물이다. 석관을 통해 당시 장례 풍습을 읽을 수 있다. 어떤 용도로 사용됐을까? 석관과 함께 출토된 송자청의 묘지명엔 다음 같은 기록이 있다.
“1174년(명종4) 서경의 반역자 조위총(趙位寵)이 공격하자, 공(송자청)은 1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먼저 나가 화살을 맞으면서 싸워 격파했다. (중략) 공은 1195년(명종25) 3품의 벼슬로 은퇴했고 1198년(신종1) 12월 20일 병이 들어 집에서 돌아갔다(숨졌다). 영×산(靈×山) 서쪽에 장례를 지냈다가, 얼마 뒤 다시 무덤자리를 점쳐 유골을 안장했다.”(송자청의 묘지명)
망자가 숨진 뒤 사흘간을 전후해 빈소에서 조문을 받은 뒤 화장 혹은 매장을 하는 요즘의 장례 형식을 단장(單葬)이라 한다. 반면 위의 기록에서는 송자청의 장례를 치른 뒤 얼마 후 다시 무덤자리를 정해 유골을 안장했다고 한다. 요즘의 장례와는 다른 형식이었음을 알려준다. 이를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이 다음의 기록이다.
“공은 향년 83세다. 올해(1144년) 봄 2월 을미일(14일)에 집에서 돌아가셨으며, 3월 10일 신유일에 정주 땅 동쪽 기슭에 화장했다. 임금이 듣고 몹시 슬퍼하며 특별히 부의를 더하게 하고 조서를 내려 대부(大傅: 정1품)라는 벼슬을 내렸다. 가을 8월 18일 정유일에 이곳에 유골을 묻고 묘지명을 짓는다.” (허재 許載: 1062~1144년: 묘지명)
오랜 기간 제례 올려야 망자에 대한 예의
| | | 유골을 담는 뼈항아리(골호). 통일신라기에 제작된 것으로 국보 125호로 지정됐다. | 고려 중기의 문신 허재는 숨진 뒤 26일 만에 화장됐고, 그 뒤 5개월 만에 화장으로 수습된 유골이 다시 매장된다. 사망→화장→유골 수습과 안치→매장까지 약 6개월이 소요된 셈이다. 이런 고려의 장례 형식을 ‘복장’(複葬)이라 한다. 여러 차례 장례를 치렀다는 뜻이다.
복장은 1·2·3차 장(葬)이라는 3단계의 의식을 치른다. 사망 후 빈소를 차려 손님을 맞는 빈례(殯禮)에 이어 화장(火葬)이나 매장(埋葬)을 통해 탈육(脫肉)하는 과정을 거쳐 유골을 수습하는 단계가 1차 장이다. 묘지명 기록에 따르면, 사망 후 대체로 5일에서 29일 사이에 화장을 한다. 화장 외에 시신을 땅에 매장해 탈육하는 경우 약 8~20개월이 걸린다. 12세기 중반부터 불교의 영향으로 매장보다는 화장이 보편화된다. 이어 유골을 수습한 뒤 사찰 등에 임시로 안치해 제사를 지내는 단계를 2차 장이라 한다. 기록에 따르면 이 기간은 4개월에서 6년4개월까지 차이가 많다.
“옛날 조상을 장례 지낼 때 날을 멀리 받는 것(遠日: 오랜 기간의 장례)이 예의다. 사대부가 3일장을 하는 것은 결코 예법이 아니다.” (『고려사』 권85 형법 금령 충숙왕 복위8년(1339)조)
고려 장례 풍습은 이렇게 오랜 기간 제례를 올리는 것을 망자에 대한 예의로 생각했다. 이 기간 동안 망자의 안식처이자 후손의 발복지(發福地)인 길지를 택하고, 분묘를 조성하며 석관과 묘지명 및 부장품을 준비한다. 하지만 유골을 사찰에 방치하는 경우도 있었다.
“요즈음 세상의 도가 쇠퇴해 풍속이 경박하다. (중략) 부모의 유골을 사찰에 임시로 모셔두고 수년 동안 매장하지 않은 자들도 있다. 관리들은 이를 조사해 죄를 줄 것이며, 만일 가난해 매장하지 못한 자는 관에서 비용을 지급하라.” (『고려사』 권16 인종 11년(1133) 6월)
복장을 치르는 데 과다한 비용이 든 탓에 유골을 방치한 경우가 적지 않았고 국가가 경비를 지원해 장례를 마무리하는 관행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찰에 안치된 유골은 석관에 담겨 매장됨으로써 장례 절차가 최종적으로 마무리된다. 이를 3차 장이라 한다. 석관은 이같이 복장식 장례에 필요한 물품이었다.
송자청의 석관 크기(90×46×45㎝)가 당시 표준이었던 것으로 보아, 석관은 수습된 망자의 유골을 담는 용기와 부장품을 담는 데 쓰였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석관은 화장식 장례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통일신라 문무왕(661~680년 재위)은 자신의 장례를 화장으로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때부터 화장이 널리 보급되기 시작한다. 원래 화장은 불교와 관계없이 신석기 시대에 발생해 청동기·철기 시대에 이르기까지 유럽 일대에서 성행했다. 그러나 국내에서 행해진 화장은 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특히 삼국·통일신라시대를 거쳐 불교가 발달된 고려 때 성행했다. 고려 때 화장은 승려뿐 아니라 왕족·귀족과 민간 일부 계층까지 확산됐다. 석관은 이런 과정에서 부각된 문화재다. 고려 때 왜 석관 문화가 성행했느냐는 물음은 당시 왜 화장을 했느냐는 물음과 통한다. 화장에 대한 고려인의 생각은 다음 글에 잘 나타나 있다.
“‘장(葬)’이란 감춘다(藏)는 뜻이다. (망자의) 해골을 감추어, 드러나지 않게 하는 것이다. 근래 불교의 다비법(茶毗法*화장)이 성행해 사람이 죽으면 모발과 피부를 태워 해골만을 남긴다. 심한 경우는 뼈를 태우고 재를 날려 물고기와 새에게 베푼다. 이렇게 해야 망자가 하늘에 가서 다시 태어나 서방세계(서방정토의 극락)에 이를 수 있다고 한다.” (『고려사』 권85 형법 금령조 공양왕 원년(1389)조)
관료 · 지배층 문화 … 서민들은 매장 · 풍장
모발과 피부는 물론 뼈까지 태우는 화장을 해야만 망자가 극락으로 갈 수 있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석관은 망자를 서방정토로 이끌어주는 도구였던 것이다. 그래서 화장 후 유골을 수습한 뒤 일정기간 안치해 제례를 올린 후 다시 석관을 만들어 유골을 정성스럽게 담아 매장했다. 그렇지만 화장이 고려의 일반적인 장례 풍습은 아니었다.
“가난한 사람의 경우 장례 도구를 갖추지 못하면 들판 가운데 버려두고, 봉분도 하지 않고 비석도 세우지 않았다. 개미, 까마귀, 솔개가 파먹는 대로 놓아두어도 사람들이 잘못됐다고 하지 않았다.”(『고려도경』 권22 잡속(雜俗)조)
이 글에서 드러나듯 고려의 일반 주민은 시신을 바로 땅에 매장했고, 가난한 사람들은 그것조차 어려워 들판에 시신을 놓아두는 풍장(風葬) 같은 ‘단장’(單葬)을 했다. 묘지명의 주인공이 왕실·관료층과 그 가족이듯이, 석관도 관료·지배층 장례문화의 일부였다.
석관은 미술사적인 가치를 지닌다. 석관의 네 벽은 관의 좌우에 해당하는 길이가 긴 장벽(長壁)과, 석관의 앞뒤에 해당하는 길이가 짧은 단벽(短壁)으로 구성된다. 석관의 네 벽 외면에는 주로 사신도(四神圖)가 그려져 있다. 네 벽 가운데 2장의 장벽 좌우에 각각 청룡(靑龍*좌청룡)과 백호(白虎*우백호)를, 나머지 2장의 단벽 전후에 각각 주작(朱雀*남주작)과 현무(玄武*북현무)를 선으로 깊이 새겼다. 또는 돋을새김을 했다.
사신(四神)은 사방을 수호하는 방위신이다. 석관을 매장할 때 위치를 표시하는 기능도 했다. 동서남북을 상징한 청백주현(靑白朱玄)의 네 색깔은 중국 황제가 관리를 지방에 파견할 때 사방의 방향에 따라 각각 해당 색깔의 흙(*色土)를 내려준 데서 연유했다. 사신도는 석관 내부를 망자의 소우주로 간주하고, 망자의 안식을 위해 석관의 외면에 사신을 배치한 그림이다. 그 밖에 연꽃무늬(蓮花文), 당초문(唐草文), 비천상(飛天像), 봉황문(鳳凰文), 구름무늬(雲文), 12지신상, 모란무늬 등이 그려진 경우도 있다. 석관의 뚜껑과 밑판의 판석에도 테두리를 선으로 새긴 뒤 위와 같은 그림을 새겨 넣었다.
석관의 장식은 남북조 이후 중국 역대 왕조와 거란의 석관에 새겨진 그림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석관의 사신도는 고구려 고분벽화와 신라왕릉의 12지신상을 계승한 것이다. 또 석관에 새겨진 장식기법은 고려의 도자기와 금속용품, 부도 등의 장식문양을 계승했다. 고려 예술의 정수라 할 수 있다. 또 석관의 양식은 거슬러 올라가보면 화장유골을 담은 삼국시대의 ‘골호’(骨壺*뼈항아리)를 계승하고 있다. 골호는 돌덩이 속을 파내어 화장유골을 담고, 그 바깥(*石函이라 함)을 여러 형태의 문양으로 다듬은 것이다. 석관은 내부에 골호와 같은 기능인 망자의 화장유골을 담은 그릇(*주로 나무상자)이 있다. 이와 함께 청자, 동전, 숟가락 등 부장품이 들어있고, 그 외부에는 사신도를 새겨 골호보다 양식적으로 더 발달된 형식을 보여주고 있다.
- 중앙선데이 | 박종기 국민대 교수 | 제339호 | 2013.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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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전국화문경함(螺鉀菊花文經函). [사진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고려시대에 왕실과 귀족층의 수요가 늘어나면서 각종 수공업이 발달하게 되었으며, 국내교역을 비롯하여 중국과 무역이 활발하게 전개되면서 나전칠기와 같은 물품이 시장을 통해 거래되었다. |
칠공예 · 나전기술의 융합 … 불교용품 주로 제작 |
고려사의 재발견 · 명품 열전 ⑥ 나전칠기 (螺鈿漆器)
고려문화의 또 다른 정수를 보여주는 명품은 나전칠기(螺鈿漆器)다. 현재 16점이 전해진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1점을 빼곤 모두 해외(일본 10점, 미국 3점, 유럽 2점)에 유출돼 있다. 나전칠기는 칠공예(漆工藝)와 나전 기술이 합쳐진, 이른바 기술의 융합에 의해 생산된 명품이다. 나전 기술은 원래 중국 당(唐)나라에서 건너왔다. 이와 달리 목재제품 등에 옻칠을 입히는 칠공예 기술은 이른 시기부터 우리나라에서 축적돼왔다. 우리나라 칠공예의 장식기법이 주로 자개를 이용해왔기 때문에 칠공예 기술과 나전기술을 분간하지 않고 사용하면서, 나전칠기가 단일한 기술로만 제작된 것이라는 오해를 받게 된 것이다.
또한 고려의 나전기술은 중국과 달랐다. 당나라의 나전은 자단(紫檀·동남아 등지에서 식생한 나무)과 같이 단단하고 무늬가 아름다운 나무에 바로 나전을 새겨 넣었다. 그래서 목지나전(木地螺鈿)이라 한다. 반면에 고려의 경우 경전·염주 등을 담는 나무상자에 굵은 삼베를 바르고 옻칠을 한다. 그 위에 잘게 썬 나전을 새겨 넣은 후 다시 옻칠을 덧입힌다. 그런 후 나전 무늬에 덮인 칠을 벗겨내고 광 내기 과정을 거쳐 제품이 생산됐다. 이렇게 나전 기술과 칠공예 기술이 결합돼 나전칠기라고 했다.
대표작은 나전대모국화당초문 염주합
| | | 나전대모국화당초문 염주합 세부도. 국화꽃의 붉은색 꽃술과 잎은 채색한 대모, 흰빛 잎과 넝쿨은 나전을 각각 새겨 넣은 것이다. 꽃 주변 테두리는 은과 구리선을 가늘게 꼬아 넣은 것이다. 약 900년 전 만들어진 나전칠기의 아름답고 화려한 무늬는 아직도 선명하게 살아 있다. [사진 일본 당마사(當麻寺)] | 두 가지 기술의 융합으로 제작된 나전칠기는 제작기법상 세 가지 특징을 갖는다. 첫째, 1㎝ 이내로 자른 조개 조각으로 무늬를 엮는다. 이를 절문(截文·끊음질 무늬)이라 한다. 이 과정에서 흰빛에 일곱 가지 색이 어른거리는 조개 특유의 색깔이 드러난다. 둘째, 바다거북 등딱지인 대모(玳瑁)의 뒷면을 채색해 나전과 함께 그릇 표면에 무늬를 놓는다. 조개와 붉은빛으로 채색된 대모의 색깔이 어울려 환상적인 색감을 보여준다. 셋째, 잘게 쪼갠 자개들을 정교하게 새긴 꽃이나 넝쿨무늬 주변에 은(銀)·동(銅)으로 꼰 가느다란 금속선을 둘러 꽃줄기와 넝쿨을 명확하게 드러냄으로써 무늬 구성에 디자인적 질서를 부여한다. 고려 나전칠기의 화려하면서도 전아(典雅)한 멋은 이 세 가지 기술이 결합된 무늬의 아름다움에 있다.
하지만 나전칠기의 수요가 많아져 대모 (玳瑁)를 조달하기 힘들어지자 대모 장식은 점차 사라진다. 초기 작품(11~12세기)에 대모의 장식이 많이 나타나는데, 현재 전해지는 나전칠기의 종류는 주로 불교 의식과 관련된 제품이다. 대장경 등을 담는 나전경함(經函)이 전체 16점 가운데 9점으로 가장 많다. 나전칠기의 가장 아름다운 대표작인 나전대모국화당초문(넝쿨무늬) 염주합(사진) 역시 불교 의식용 제품이다. 이처럼 나전칠기는 당시 성행한 불교 문화와 밀접한 관련 속에서 제작됐다. 1272년(원종13) 원나라 황후가 대장경을 담기 위해 나전으로 장식된 상자를 요구 하자, 고려는 전함조성도감(鈿函造成都監)을 설치한 것(『고려사』 권27 원종 13년 2월조)이 그 증거다(유홍준, 『유홍준의 한국미술사 강의2』, 2012년).
무늬 주변에 금속 선(線)을 넣는 기법은 고려 공예예술을 상징하는 기법이다. 금속공예에선 금속 표면에 무늬를 깊게 파낸 다음 가느다란 금실이나 은실을 메워 넣는 금(金) 입사(入絲), 은(銀) 입사 기법으로 나타난다. 도자공예에선 도자기 표면에 문양을 새기고 그 속에 검정·빨강·하양의 흙을 메운 뒤 구워 특유의 문양을 드러내는 상감기법으로 구현됐다. 고려의 나전칠기는 이같이 오랜 세월 동안 축적된 칠공예 기술에다 조개를 잘게 썰어 아름다운 문양을 새겨 넣는 정교한 나전 기술의 결합을 통해 탄생한 명품이다.
“(고려에서) 그릇에 옻칠하는 기술은 정교하지 못하지만, 나전 기술은 세밀하여 귀하다고 할 수 있다” (地少金銀 而多銅 器用漆作不甚工 而螺鈿之工 細密可貴) (『고려도경』(1123년) 권23 토산조).
고려에 온 송나라 사신 서긍은 위 기록과 같이 칠공예와 나전 기술을 분리해 평가했다. 실제로 고려는 왕실의 기물을 관장하던 관청 중상서(中尙署)에 나전장(螺鈿匠)과 칠장(漆匠)을 분리시켜 관리했다(『고려사』 권80 식화지). 서긍은 또한 고려에선 칠공예보다 나전 기술이 더 발달했다고 했다. 그의 지적은 사실 중국에 비해 화려하게 옻칠을 사용하지 않은 것을 지적한 데 불과하다. 실제로 그는 고려에서 옻칠공예가 성행한 사실을 같은 책 『고려도경』에 기록하고 있다. 즉 ‘쟁반과 소반은 모두 나무로 만들어 옻칠을 했으며’ (『고려도경』 권33 궤식(饋食)조), ‘왕과 관료들이 사용한 붉은 칠을 한 소반(丹漆俎)을 사신에게도 사용했다’ (권28 단칠(丹漆)조)고 했다. 당시 식생활 전반에 쟁반·소반 등 칠공예 제품이 널리 쓰였다는 사실을 전해주고 있다. 원 왕실도 옻칠과 匠人 보내달라 요구
목재 제품에 옻칠을 하면 방수 효과와 함께 쉽게 부패되거나 썩는 것을 예방하고 그릇의 아름다운 모양을 유지할 수 있다. 그래서 옻칠공예는 목기(木器)에 주로 활용되었다. 이규보 역시 다음 기록과 같이 술병에 옻칠을 하여 사용했다.
“박으로 병을 만들어 술 담는 데 사용한다(自瓠就壺 貯酒是資). 목은 길고 배는 불룩하여, 막히지도 않고 넘치지도 않는다(頸長腹? 不咽不歌). 그래서 내가 보배로 여겨, 옻칠을 하여 광채 나게 했다(我故寶之 漆以光之)”(『동국이상국집』 권19 잡저 칠호(漆壺)).
우리나라에서 옻칠 기술은 청동기 시대 이후 유물에서 칠 제품이 출토될 정도로 일찍부터 발달돼왔다. 신라 때는 옻칠 공예를 전담한 부서인 칠전(漆典)이 있었다. 또 그릇에 칠을 해 장식한다는 뜻으로 식기방(飾器房)이라 했다(『삼국사기』 권39 잡지). 앞서 언급했듯이 고려 때도 중앙관청에 칠장(漆匠)을 소속시켜 칠공예 제품을 생산하게 했을 정도로 옻칠공예가 성행했다. 전국에 닥나무(楮), 잣나무(栢), 배나무(梨), 대추나무(棗) 등과 함께 옻나무(漆)를 심게 해 옻을 계획적으로 생산했다 (『고려사』 권79 식화지 명종 18년(1188) 3월조). 그래선지 일찍부터 옻칠의 품질과 제작 기술이 뛰어났다.
“묵구(墨狗) 등 7명이 원나라에 금칠(金漆)을 보내라는 황제의 명령서를 갖고 왔다. 국왕(원종)은 ‘우리나라가 비축한 금칠은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할 때 모두 없어졌고, 생산지인 남쪽 섬은 요즘 역적(삼별초 군대)이 왕래하는 곳이 되었습니다. 틈을 타 생산해 보내겠으며, 우선 갖고 있는 열 항아리를 보냅니다. 옻칠의 액을 짜는 장인은 직접 생산지에서 징발하여 보내겠습니다’라고 보고했다”(『고려사』 권27 원종 12년(1271) 6월조).
원나라가 고려의 옻 품질이 뛰어나고 그것이 많이 생산된다는 사실을 알고 옻칠과 함께 장인을 함께 보내줄 것을 요구한 기록이다. 개경 환도 직후 옻칠이 많이 생산된 남쪽 섬 지역이 삼별초 군대에 점령되어 제대로 생산될 수 없었던 사정도 알려준다. 고려는 위 기록대로 삼별초 난이 진압된 2년 후인 1276년(충렬왕2) 원나라에 황칠(黃漆)을 공납했다.
원나라가 요구한 금칠은 황칠의 다른 이름이다. 원래 칠에는 옻칠과 황칠 두 가지가 있다. 옻칠은 옻나무에서 채취한 짙은 적갈색 진액이다. 지금도 많이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고려시대 옻은 황칠나무에서 주로 채취한 황금 색깔의 진액이다. 서긍도 당시 ‘나주지역에 황칠이 많이 생산되어 왕실에 공납되었다’라고 기록했다(『고려도경』 권23 토산조). 조선 후기에 이수광은 ‘고려의 황칠은 섬에서 생산되는데, 6월에 채취하였다’(『지봉유설』 권19)라고 전한다. 황칠은 부와 권력의 상징인 노란색을 띠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며, 또한 금 색깔과 같다고 해서 금칠이라 불렀던 것이다. 두릅나무과에 속하는 황칠나무는 남해안과 일대 섬에서 자라는 우리나라 토종의 늘 푸른 넓은잎나무다. 금빛을 띠면서 나뭇결을 살려내는 화려한 맛이 있어 왕실 등에서 선호했다(박상진, 『역사가 새겨진 나무이야기』, 2004).
기병用 말 안장 · 언치도 나전으로 장식
서긍은 앞에서 본 것처럼 “고려의 나전 기술은 세밀하여 귀하다”고 극찬했다. 현재 남아 있는 고려 나전 제품은 모두 목재제품을 이용한 것인데, 서긍이 극찬한 나전은 다른 제품이었다. 즉 그는 ‘기병이 사용하는 안장과 언치(안장 깔개)는 매우 정교하며 나전으로 장식하였다(騎兵所乘鞍?極精巧 螺鈿爲鞍)’ (『고려도경』 권15 기병마(騎兵馬)조)라고 말해 말 안장에 새겨진 나전 기술을 높이 평가했다.
1080년(문종34) 7월 고려는 송나라에 나전으로 장식한 수레(螺鈿裝車) 1대를 조공 했다(『고려사』 권9, 1243년(고종32). 무신정권의 권력자 최이는 왕실 사람과 재추(고위관료)에게 잔치를 베풀었는데, 커다란 그릇을 나전으로 장식했다고 한다 (『고려사』 권129 최이 열전). 즉 나전 기술은 목재 제품뿐 아니라 가죽 수레와 그릇 등 다양한 제품에도 적용되었던 것이다. 나전은 선물용으로 주로 사용되었다. 예종 때 문신 문공인(文公仁·?∼1137)은 거란에 사신으로 가서 나전 그릇을 선물로 많이 주었는데, 이후 거란의 사신이 고려에 오면 항상 나전 그릇을 요구하는 폐단을 낳았다고 한다(『고려사』 권125 문공인 열전). 고려에서 나전 제품이 많이 유통되고 외국에까지 널리 이름을 떨쳤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나전 기술 역시 칠공예 기술과 함께 발달된 것이다.
나전칠기는 이같이 칠공예 기술과 나전 기술이 함께 발달해야 생산될 수 있다. 어느 한쪽 기술만 발달하면 명품이 나올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제작된 제품이 송 · 거란 · 원나라 등으로부터 호평을 받았던 것은 당시 공예 기술이 높은 수준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술은 다른 분야에도 영향을 끼쳐 상감청자 · 고려지(高麗紙) · 대장경을 명품의 반열에 올려놓게 했다. 이 점에서 고려왕조는 진정한 문화 · 기술의 강국이었다. 이외에도 고려선(高麗船) · 금속활자 · 불화(佛畵) 등 수준 높은 명품 문화재를 낳게 했다.
- 중앙선데이 | 박종기 국민대 교수 | 제340호 | 2013.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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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속활자로 인쇄된 서적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인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 (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 고려 말기의 승려 백운화상이 상하 두 권으로 펴냈다. 상권은 전하지 않고 하권만이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돼 있다. [프랑스 파리국립도서관] |
유 · 불교 발달로 책 수요 폭발 … 宋도 고려 서적 부탁 |
고려사의 재발견 · 명품 열전 ⑦ 금속활자
고려왕조의 인쇄술은 당대 동아시아에서 최고 수준에 이른 명품이다. 이와 관련해 주목해야 할 인물은 무신정권 최고 권력자의 한 사람인 최이 [崔怡·?∼1249년, 첫 이름은 우(瑀)]다. 그는 최씨 무신정권을 세운 최충헌(崔忠獻·1149∼1219년)의 아들로 국왕 고종을 허수아비로 만들 만큼 절대 권력자였다. 고려 인쇄술을 언급할 때 빠뜨릴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최초로 금속활자로 만든 『상정고금예문(詳正古今禮文)』의 편찬을 주도했다. 이규보(1168∼1241년)는 그의 입을 빌려 그 사실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인종 때(1122~1146년) 편찬한 『상정예문』(50권)은 오래되어 빠진 글자가 많아 참고하기가 어려웠다. 나의 아버지(최충헌)께서 다시 보완해 2부를 만들었다. 한 부는 예관(禮官)에게 보내고 또 한 부는 우리 집에 보관했다. 강화도 천도 때 예관이 한 부를 미처 갖고 오지 못했다. 우리 집에 보관된 한 부가 남아 있어 다행이었다. 나는 선친의 선견지명을 깨달아 활자로 28부를 인쇄하여 여러 관청에 보관하게 했다.” (『동국이상국집』 후집 권11 「신서상정예문발미(新序詳定禮文跋尾)」 진양공(晉陽公·최이)을 대신해 짓다)
1232년(고종19) 강화도 천도 후 최이 주도 아래 금속활자로 『상정고금예문』 28부를 인쇄했다는 기록이다. 최이는 1234년 진양후로 책봉됐고 이규보는 1241년 숨졌다. 이를 볼 때 최초의 금속활자본은 1234년에서 1241년 사이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몽골 침입기에 금속활자로 책 제작
| | | 고려 분묘에서 출토된 금속활자. 국립청주박물관 | 최이가 직접 쓴 다음 글에 따르면 1239년(고종26) 당시 『상정고금예문』 외에 또 다른 책이 금속활자로 인쇄된 사실이 드러난다.
“『남명증도가(南明證道歌)』는 선문(禪門)에서 중요한 책이다. 참선을 하는 후학들은 이 책을 통해 오묘한 경지에 들어갈 수 있다. 이 때문에 이를 없애고 전하지 않게 할 수 없다. 이에 기술자를 모아 금속활자로 인쇄된 책(鑄字本)을 거듭 새겨 길이 전하고자 한다(重彫鑄字本 以壽其傳焉). 기해년(己亥年:1239) 9월 상순 중서령 진양공 최이가 삼가 쓰다.”
책의 정확한 이름은 『남명천화상송증도가(南明泉和尙頌證道歌)』이다. 본문에서 “금속활자로 인쇄된 책을 거듭 새겼다(重彫鑄字本)”라고 한 것은 금속활자로 인쇄된 책(鑄字本)을 그대로 뒤집어 목판에 다시 새겼다는 뜻이다. 금속활자본을 다시 목판본으로 인쇄했다는 얘기다. 실제로 이 책은 현재 목판본 으로 전해진다. 1239년은 고려 왕조가 강화도에 천도한 지 7년이 지난 시점이다. 천도 직후의 어수선한 상황을 감안하면 금속활자 제작과 인쇄는 천도 이전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주목할 만한 기록이다.
현재 전해지는 금속활자로 인쇄된 책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1377년 (우왕3) 청주 흥덕사(興德寺)에서 간행된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 (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인데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하권만 보관돼 있다. 그렇더라도 1440년대 독일에서 구텐베르크가 처음 금속활자를 만들었던 때보다 무려 70년가량 앞선다. 고려왕조는 금속활자를 만들어 책을 찍어낸 세계 최초의 왕조였다.
활판(금속) 인쇄의 시초는 중국 송나라 인종 때(1041∼1048년 무렵) 필승(畢昇)이란 사람이 ‘교니(膠泥 · 찰기 있는 점토)’를 이용해 활자를 만든 뒤 불에 구워 활자판에 배열한 것이다. 그러나 흙이 쉽게 부스러지는 등 내구성이 약해 실용화에 실패했다. 중국은 명나라 홍치(弘治) · 정덕(正德) 연간 때(1488~1521년) 비로소 금속활자를 완성한다. 청주 흥덕사의 『직지심체요절』보다 거의 100년이나 늦다.
금속활자는 한번 만들어 놓으면 필요할 때 활자를 집어내 판을 짜 손쉽게 책을 찍어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활자를 금속으로 만드는 주조(鑄造)기술, 활자가 흐트러지지 않게 판을 짜는 조판(組版)기술, 금속에 잘 묻는 먹 제조 기술 등 세 가지 조건을 갖춰야 한다(천혜봉, 「세계 초유의 창안인 고려주자(鑄字)인쇄」, 1984). 이런 까다로운 조건 때문에 실용화는 어려웠다. 그런데 고려는 중국에서 금속활자를 만들기 전에 흥덕사라는 지방 사찰에서도 금속활자로 책을 찍을 정도로 실용화에 성공했다.
통일신라시대 목판인쇄술이 밑거름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단순히 조상의 뛰어난 지혜 덕분으로 돌리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다. 당시 고려의 지식과 기술 수준이란 두 가지 차원에서 설명하는 것이 온당하다.
우선 기술 차원에서 통일신라 시대부터 인쇄문화 기술이 꾸준히 축적돼 왔다. 나무에 글자를 새겨 책을 찍어내는 목판인쇄술은 중국 당나라 현종 때(712∼756년) 시작됐다. 그런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물은 751년(신라 경덕왕 10)에 제작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無垢淨光大多羅尼經)』(국보 126호)이다. 통일신라 때 목판인쇄술이 상당히 발전했다는 증거다. 고려 역시 목판인쇄술로 초조대장경(1011년)과 재조대장경(1236년)을 완성했다. 당시까지 전래된 모든 불교 경전을 모아 목판인쇄로 조판한 거창한 사업이었다. 이를 계기로 인쇄술이 크게 발달했다. 그 결과 우리나라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인쇄와 금속활자로 만든 문화재를 갖고 있다.
그러나 목판인쇄를 하기 위해선 나무의 결을 삭히고 쪄서 진을 빼고 살충한 다음 충분히 말려 판이 뒤틀리거나 깨어지지 않게 처리해야 한다. 새기려는 책의 본문을 반듯한 글씨로 필사해 판목 위에 뒤집어 붙인 뒤 각수(刻手·돌이나 나무에 조각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가 새겨야 한다. 이는 오랜 시일이 걸리고 경비가 많이 드는 단점이 있다. 여러 부를 찍어 낼 수 있지만 한 책을 인쇄하는 것으로 목판인쇄의 수명은 다한다. 이러한 단점을 기술적으로 보완하려는 노력 속에서 금속활자가 창안된 것이다. 고려왕조가 강화도에 천도한 뒤 금속활자로 책을 출간할 수 있었던 건 당시 재조대장경을 조판할 정도로 인쇄기술이 발달됐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지식의 차원에서 보면 고려인들의 왕성한 지식욕이 금속활자가 창안된 또 하나의 원인이다. 정도전의 글이 그런 사정을 잘 알려준다.
“무릇 선비로서 학문의 길로 향할 마음이 있으나 서적을 얻지 못하면 또한 어찌하겠는가? 우리나라는 서적이 많지 않아 배우는 자가 책을 폭넓게 읽지 못하는 것을 한스럽게 여긴다. 나 역시 이를 오래전부터 걱정해왔다. 그래서 서적포(書籍鋪)를 설치하고 활자를 주조해 경 · 사 · 자 · 서(經史子書)와 제가(諸家)의 시문부터 의학 · 병서 · 법률서에 이르기까지 모든 서적을 인쇄해 학문에 뜻을 둔 사람들이 이를 모두 얻어 독서해 공부하는 때를 놓쳐 한탄하는 일이 없도록 했으면 한다.” (『삼봉집』 권1 「서적포를 설치하는 시」)
정도전은 지식의 확산을 위해 금속활자를 만들고 각종 서적을 인쇄해 학자들에게 널리 보급하자고 했다. 금속활자가 창안된 배경에는 고려인의 강한 지적 욕구가 있었음을 상징적으로 알려준다.
과거 응시자에게 오류 없는 책 공급
고려는 건국 초 과거제도를 실시하고 전국에 많은 학교를 세웠다. 그에 따라 많은 지속적인 서적의 제작과 유통이 절실했다. 인쇄술이 발달될 토양이 충분했던 것이다.
“서경유수가 보고했다. ‘서경에서 과거 응시자들이 공부하는 서적은 손으로 많이 베껴 틀린 글자가 많습니다. 비서각에 소장한 『구경(九經)』 『한서(漢書)』 『진서(晋書)』 『당서(唐書)』 『논어』 『효경』 등의 역사서와 경전, 여러 문집, 의(醫) · 복(卜) · 지리(地理) · 율(律) · 산(算) 등에 관한 서적을 나누어 주어 여러 학교에 두게 하십시오’라고 했다. 왕은 관리들에게 각각 1부씩 인쇄해 보내도록 했다.”(『고려사』 권7 문종 10년(1056) 8월)
고려왕조가 많은 서적을 인쇄한 이유는 과거 응시자에게 오류가 없는 책을 공급 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개경은 물론 경주 · 충주 · 청주 · 성주 · 진주 · 남원 등 전국 각지에서 많은 책을 발간했다. 무신정권 때 명종은 유신들에게 『자치통감』의 교정을 보게 한 뒤 여러 군현에서 분담하여 출간하게 했다. (『고려사』 권20 명종 22년(1192) 4월) 고려 때 지방에서 서적을 인쇄했다는 사실은 당시 지식층의 저변이 그만큼 넓었다는 증거다.
불교의 융성에 힘입어 불교경전 수집과 출간이 활발했던 점도 고려의 인쇄술을 발달시킨 또 하나의 원인이었다.
“대각국사 의천은 불법을 구하기 위해 선종 2년(1085) 4월 몰래 제자 2인과 함께 송나라 상인의 배를 타고 송나라에 갔다. … 왕이 송나라에 의천의 귀국을 요청하자 귀국한 의천은 불교와 유교 서적 1000권을 가져왔다. 흥왕사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두어 거란과 송나라에서 사온 4000권의 책을 모두 간행했다.” (『고려사』 권90 대각국사 의천 열전)
의천이 당시 4000권의 책을 간행했다는 기록이다. 고려는 유교와 불교의 발달로 많은 서적이 필요해 인쇄술을 장려하게 된 것이다. 고려에서 인쇄술이 발달돼 많은 서적이 출간된 사실을 중국도 알고 있었다. 송나라 황제는 고려 사신에게 127종의 책 목록을 주어 구하려 했다(『고려사』 권10 선종 8년(1091) 6월).
책은 지식을 생산 · 공급해 인류문명을 발달시키는 중요한 수단이다. 그러나 인쇄기술이 발달하지 않으면 책을 제대로 만들 수 없다. 그렇다면 고려 때 세계 최고 수준에 오른 인쇄술이 그 뒤 더 이상 기술적인 진보를 이루지 못한 원인은 무엇일까. 한자와 한문이 가진 한계 때문이다. 서양의 알파벳은 숫자가 적고 글자 구조도 단순한 데 비해 한자는 글자 구조가 복잡한 데다 수천 자를 일일이 주조해야 해 기술상의 어려움이 컸다. 대중이 쉽게 이해하고 쓸 수 없는 난해한 한자와 한문은 결국 지식과 기술의 발전을 지체시켰다. 인쇄술 역시 대중이 아니라 지식인 계층인 사대부를 위한 제한적인 기술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근대 이후 지식과 기술의 주도권이 서구로 넘어간 것은 이 때문이다.
- 중앙선데이 | 박종기 국민대 교수 | 제341호 | 2013.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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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 1310년, 비단채색. 일본 가가미신사(鏡神社) 소장. |
세 남자 섬긴 충선왕 숙비의 발원 담긴 수월관음도 |
고려사의 재발견 · 명품 열전 ⑧ 불화(佛畵)
고려불화(佛畵)는 고려청자와 함께 한국 미술을 대표할 정도의 빼어난 예술성을 지니고 있다. 현재 전해지는 고려불화 약 160점은 대부분 원(元)나라 간섭기인 14세기 전반 50년 동안에 제작되었다. 지금부터 700년 전이다. 그중 국내에 남아 있는 것은 10여 점에 불과하다. 불화는 흔히 말하는 탱화이다. 붙박이 벽화가 아니라 두루마리 형식으로 실내에 봉안하거나 사찰 바깥의 야외 법회용인 괘불(掛佛)의 두 가지 형식으로 사용되었다. 원의 간섭을 받던 무렵 고려엔 새로운 지배층인 권문세족이 등장한다. 이들은 발복(發福)을 위해 불화를 제작해 특정 사찰이나 저택에 원당(願堂)을 지어 이를 안치했다. 불화는 이때부터 크게 유행하기 시작했다(『유홍준의 한국미술사2』, 2012).
| 1 『감지금니 대방광불화엄경 보현행원품』 권 34. 고려 1334년, 보물 752호. [호림박물관] |
고려불화의 초기 모습은 사경변상도(寫經變相圖)에서 찾을 수 있다(그림1 참조). 사경(寫經)은 글자 그대로 베껴 쓴 경전이다. 변상도(變相圖)는 불교경전 안에 들어 있는 불교 전설이나 설화의 내용을 그림으로 옮긴 불화인데, 불교 경전을 쉽게 대중들에게 가르치기 위해 그린 것이다. 따라서 사경변상도는 ‘읽는 경전’이 아니라 ‘보는 경전’이라 할 수 있다. 불화는 역시 변상도와 같이 불교 경전의 내용을 그린 것이지만, 그 내용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킨 점에서 변상도와 다르다. <그림1>의 변상도엔 보현보살이 연화대(蓮花臺) 위에 앉아 설법을 하는데, 그 앞에 선재동자가 그려져 있다. 『화엄경』의 내용을 표현한 것이다. 고려불화 역시 『화엄경』을 소재로 한 그림이 많다.
화엄경을 소재로 한 그림 많아
“착한 남자여, 남방 보타락가산(寶陀洛伽山)에 관자재(觀自在)라는 보살이 있다. 그대는 그를 찾아가 어떻게 보살의 행동을 배우며, 어떻게 보살의 도리를 닦는지 여쭈어라. 그리고 다음과 같이 노래를 읊었다. ‘성현들이 사는 바다 위의 산, 보물들로 장식된 지극히 깨끗한 곳, 꽃과 과일나무 숲이 우거진 곳, 샘물과 연못이 넘실대는 곳, 용맹장부 관자재보살,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해 이 산에 있다. 그대는 가서 공덕을 물어라. 그대에게 큰 방향을 알려주리라.’ 그때 선재동자(善財童子)는 이 노래를 듣고 보살의 발 앞에서 예배를 드리고 하직하고 길을 떠났다…… 바위 골짜기 사이로 샘물이 흐르고, 울창한 숲에 보드라운 향내 나는 풀이 땅에 깔려 있는데, 관자재보살이 금강보석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다.”(『화엄경(華嚴經)』 ‘입법계품(入法界品)’)
보살은 ‘깨달음’, 즉 불교의 진리를 구하는 존재다. 위로는 깨달음을 추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濟度)하는 수행자가 보살이다. 깨달음을 찾아 길을 나선 선재동자가 인도 남부 보타락가산에 가서 관음보살 앞에서 예배를 올리는 장면이 하나의 그림처럼 기록되어 있다. 이런 내용을 담은 불화가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다. 달이 물에 비친 듯이 흰 천을 걸친 청정(淸淨)한 보살이란 뜻에서 그렇게 이름을 붙인 것이다.
| | | 2 ‘수월관음도’(1310년) 비단채색. 일본 가가미신사(鏡神社) 소장. | 고려 때 제작된 수월관음도 가운데 최고의 명품은 충선왕(1308~1313년 재위)의 비(妃)인 숙비(淑妃)의 발원으로 제작된 것이다. 길이 419.5cm, 너비 254.2cm (원래, 길이 500cm, 너비 270cm)로 제작돼 현존 불화 중 규모가 가장 크다. 크기 자체가 우선 다른 불화를 압도한다. 또한 현존 불화 가운데 최고의 예술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 그림 속에 고려 불화의 아름다움과 특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그림 2 참조).
그림의 중앙에 아미타불이 붉은 색 대의 (설법용 옷)를 입고서 연꽃으로 장식된 자리 위에 결가부좌로 앉아 있다. 꽃과 구슬로 장식된 얇은 흰 비단천을 머리에서 두 팔을 거쳐 다시 아래로 길게 내려뜨리고, 아미타불은 은근한 미소를 띠면서 우측 아래쪽을 내려다보고 있다. 그 아래 선재동자가 보살을 올려보면서 서원(誓願)을 빌고 있다. 보살 뒤로 기암괴석을 뚫고 대나무가 그려져 있다.
이 불화의 아름다움은 어디에 있는가? 왼쪽 상단의 관음보살 머리에서 하단 오른발까지 대각선 구도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우아하고 부드러운 원만한 얼굴 모습과 둥근 어깨, 풍만한 가슴은 전체적으로 우아하면서 부드러운 형태미를 보여준다. 옷 주름과 흰 사라천의 뚜렷한 선과 붉고 검은 필선이 대조를 이루어 유려한 선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보관에 금으로 그려진 정교하기 짝이 없는 연화당초문무늬, 사라천 끝단의 굵고 탐스런 금색 당초문 무늬, 연꽃무늬, 꽃무늬 그림은 화려함과 치밀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문명대, ‘한국 괘불화의 기원문제와 경신사장 금우문필(鏡神社藏 金祐文筆) 수월관음도’, 2009).
당대 최고의 화가 다섯 명이 제작
이 불화에 기록된 화기(畵記)에 따르면 충선왕의 비인 숙비(淑妃)가 발원하여 화사(畵師) 김우(金祐)와 화직(畵直) 이계(李桂) · 임순(林順) · 송연색(宋連色) · 최승(崔承) 등 다섯 명의 화가가 1310년(충선왕2) 5월에 완성한 것이다. 화가가 소속된 관청은 왕명을 전달하고 왕실의 각종 물품을 관장한 액정국(掖庭局)과, 교서와 각종 문서를 작성한 예문춘추관이다. 한마디로 고려왕실이 주도하고 당대 최고의 화가들이 제작한 것이다. 숙비 김씨는 원래 충렬왕비인 숙창원비(淑昌院妃)였으나, 1308년 충렬왕 사후 충선왕비가 되어 숙비(淑妃)로 호칭이 바뀌었다. 숙비 김씨는 몽골군과 함께 거란의 침입을 물리치고, 1218년 몽골과 형제맹약을 주도한 명신 김취려(金就礪)의 증손녀였다. 명문가 출신인 김씨는 처음 진사 최문(崔文)과 결혼했다. 사별 후 충선왕의 주선으로 충렬왕 비가 되었다. 충렬왕의 사후 충선왕은 김씨를 간통하고 다시 비로 삼았다. 이로 인해 세간의 여론은 좋지 않았다.
“충선왕이 부왕(충렬왕)의 비인 숙창원비를 간통하자 우탁(禹倬)이 흰옷에 도끼를 메고 궁궐 앞에서 거적자리를 깔고 비난의 상소를 올렸다. 근신들이 놀라서 왕 앞에서 감히 상소문을 읽지 못했다. 우탁은 소리를 크게 지르면서, ‘그대들은 근신으로 국왕의 잘못을 바로잡지 않은 죄를 알고 있는가?’ 하고 꾸짖었다. 국왕 좌우의 신하들은 두려워하고, 충선왕도 부끄러워했다.”(『고려사』 권109 우탁 열전)
우탁은 고려에 성리학을 전파하는 데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그는 김씨를 간통한 충선왕에게 목숨을 걸고 간언했던 것이다. 숙비 김씨는 미모가 출중한 여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때문인지 세 번이나 결혼을 했고, 두 국왕의 사후 모두 그녀의 집에 빈소를 차릴 정도로 기구한 운명의 여인이었다. 충선왕은 재위 5년간 줄곧 정비(正妃)인 원나라 출신의 계국대장공주와 원나라에 머물렀다. 이 기간 동안 국내의 중요한 정사에 숙비 김씨가 깊숙이 관여하며 권력을 휘둘렀다. 그러나 충선왕의 비가 된 후 세간의 비난이 쏟아져 그의 마음 한 구석엔 번뇌와 우수가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을 것이다.
고려불화는 어떻게 제작했을까? 불화는 비단 바탕 위에 광물질로 만든 안료를 사용해 만들어진다. 불화의 주 색깔인 붉은 색과 녹색·청색은 각각 주사(朱紗) · 석록(石綠) · 석청(石靑)이라는 광물성 안료를 재료로 한 것이다. 해당 원석을 갈아 가루를 만든 후, 맑은 아교물을 부어 여러 차례 걸러서 입자를 크기별로 분류한다. 큰 입자의 안료는 짙은 색, 작은 입자의 안료는 옅은 색을 내는 데 사용된다. 아교는 동물 가죽 등에서 추출한 천연 접착제인데, 이를 물에 녹여 적당히 농도를 조절한 후 여기에 안료가루를 개어 사용한다. 불화 채색 방법은 바탕천의 뒷면에 색을 칠하는 배채(背彩)법 혹은 복채伏彩)법이다. 뒷면에 색을 칠해 안료가 앞으로 배어 나오게 한 후 앞면에서 채색하여 음영을 보강하는 기법이다. 이는 빛깔을 보다 선명하게 하면서 변색을 지연시키며, 두텁게 칠해진 안료가 바탕에서 떨어지는 것을 막아준다. 채색 때는 얼룩을 방지하는 효과가 있다. 이러한 배채법이 고려불화의 아름다운 모습을 오랫동안 보존해준 중요한 기법이다(국립중앙박물관, ‘고려불화의 제작기법’, 2010년).
물론 고려불화는 고려 후기에 처음 제작되지 않았다. 고려 중기인 의종(1146∼1170년 재위) 때도 불화를 제작해 사용했다.
“(영의는) 국왕(의종)에게, ‘만일 장수하시려면 반드시 천제석(天帝釋)과 관음보살(觀音菩薩)을 섬겨야 합니다’ 라고 했다. 국왕은 두 부처의 그림(불화)을 많이 그려 중앙과 지방 사원에 보내 국왕의 장수를 위한 법회를 열게 했다.” (『고려사』 권123 영의(榮儀) 열전)
이 기록은 이미 고려 중기에 불화가 성행했다는 사실과 함께 불화의 용도를 알려준다. 불교에서 신앙의 상징은 불상(佛像)과 불화다. 불화는 불상이 표현하지 못하는 신앙의 세계를 보다 구체적으로 표현해주는 기능이 있다. 불상 제작엔 많은 비용과 노력이 필요하다. 서원의 내용에 알맞은 불상을 안치하기 힘들 경우엔 불화를 신앙 대상으로 삼았다. 불화는 불상 제작에 따른 비용과 노력을 절감해주는 효과도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고려와 원나라가 새로운 관계를 맺는 가운데 새로운 지배층 권문세족 사이에서 개인의 원당을 세우는 게 유행하면서 불상 대신 불화를 제작했던 것이다. 고려 후기에 불화의 수요가 많아진 것은 이 때문이다.
- 중앙선데이 | 박종기 국민대 교수 | 제342호 | 2013.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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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비창천(煌丕昌天:아주 화창한 하늘)’이 새겨진 고려 구리거울. 고려선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
뱃전에 짧은 창검 꽂은 ‘과선’ 개발 … 거북선으로 진화 |
고려사의 재발견 · 명품 열전 ⑨ 고려선(高麗船)
대한민국은 세계 최고의 조선강국이다. 조선강국의 DNA를 고려의 조선기술에서 찾는 일은 지나친 역사적 상상력일까. 고려는 당시 독자적인 조선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런 기술로 만든 선박을 고려선(高麗船)이라 한다.
“1274년(원종15) 원나라 황제가 일본을 정벌하기 위해 김방경(金方慶)과 홍다구(洪茶丘)에게 전함(戰艦)을 만드는 일을 감독하게 했다. 나라 사람들은 배를 만드는데 만약 만양(蠻樣·蠻은 남중국, 즉 남송) 식으로 하면 비용이 많이 들고 제때 만들지 못할 것을 근심했다. 동남도도독사(東南道都督使)로 전라도에 있던 김방경은 이에 고려의 조선기술(本國造船樣式)로 배 만드는 일을 감독했다.” (『고려사』 권104 김방경 열전)
남송(南宋)식보다는 고려 기술로 전함을 제작하는 것이 비용도 적게 들고 단기간에 전함을 만들 수 있다는 얘기다. 중국과 다른 조선기술을 고려가 확보하고 있었다는 증거다. 실제로 김방경은 고려 기술로 전함을 제작했다. 그런 사실은 다음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대장군 나유(羅裕)가 원나라에 보고하기를, ‘금년(1274년) 정월 3일 대선(大船) 삼백 척을 건조하라는 황제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허공(許珙)을 전주 변산(邊山)에, 홍록주(洪祿주)를 나주 천관산(天冠山·장흥)에 각각 보내 재목을 준비하게 했습니다. 시중 김방경을 도독(都督)으로 삼아 정월 15일 함께 모여 16일에 시작해 5월 그믐에 크고 작은 배 구백 척을 완성했습니다. 지금 배들은 금주(金州·김해)로 출발했습니다’라고 했다.”(『고려사』 권27 원종 15년(1274) 6월조)
원나라 황제의 명령대로 이해(1274년) 정월에서 5월까지 모두 900척의 전함을 만들었다는 기록이다. 만양식, 즉 남송의 기술이 아니라 고려 독자의 조선기술로 불과 다섯 달 사이에 건조했다. 이렇게 만든 900척의 전함으로 이해 10월 고려는 몽골군과 함께 제1차 일본 정벌에 나선다.
日 정벌 당시 中 전함보다 실전에 유용
|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가 2009년 간행한 『고려, 뱃길로 세금을 걷다』 표지의 고려선 조감도 |
1281년 원나라는 고려군 외에 원나라에 복속된 남송 출신의 군사까지 징발해 제2차 일본 원정에 나섰으나 역시 정벌에 실패했다. 실패한 원인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세자(충선왕)가 황제를 뵈었을 때… 정우승(丁右丞)이란 자가 아뢰기를, ‘(2차 정벌 때) 강남(江南·남송)의 전선(戰船)은 크기는 하지만 부딪치면 깨어졌습니다. 정벌에 실패한 원인입니다. 만약 고려에서 다시 배를 만들게 해 일본을 치면 성공할 것입니다’라고 했다.”(『고려사』 권30 충렬왕 18년(1292) 8월)
선체는 크지만 쉽게 파손된 남송 전선의 취약점을 언급하면서, 정벌에 성공하기 위해선 고려에서 배를 만들 것을 주문한 내용이다. 즉 고려의 전함이 작기는 하나 매우 튼튼해 실전에 매우 유용하다는 얘기다. 당시 중국인도 일본 정벌 당시 ‘크고 작은 전함이 파도에 휩쓸려 많이 부셔졌으나 오직 고려의 전함은 튼튼해 온전하였다’고 증언한 사실(『秋澗先生大全文集』 권40 汎海小錄)이 그를 뒷받침한다. 이렇게 고려는 값싼 비용으로 빠르게 배를 만들면서도 중국 전선보다 단단하고 견고한 독특한 선체 구조를 가진 조선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고려선의 모습과 제작기술의 특성은 무엇일까.
“(고려) 관선(官船)의 만듦새는 위는 띠를 이었고 아래는 문을 내었다. 주위에는 난간을 둘렀고, (배의 좌우를) 가로지른 나무(橫木:혹은 駕木·멍에)를 서로 꿰어 치켜올려서 포판(鋪板·누각)을 만들었는데, 윗면이 배의 바닥보다 넓다. 선박 몸체는 판책(板책·판자)을 쓰지 않고, 다만 통나무를 휘어서 굽혀 나란히 놓고 못을 박기만 했다.”(『고려도경』 권33 주즙(舟楫) 관선조)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이 기록한 고려선의 모습과 제조 기술이다. 고려선은 전체적으로 판자를 쓰지 않고 통나무 형태를 그대로 가공해 제작했다. 자연히 두꺼운 외판(배 옆면)과 무거운 저판(배 밑면)으로 제작돼 외형이 둔중하고 속도가 느려 위기 상황에서 빠르게 대처하지 못한 단점이 있었다. 하지만 선체가 무거워 바람이나 파도에 쉽게 전복되지 않는 장점이 있다. 이 때문에 고려선은 전함이나 물자 · 식량을 운반하는 조운선에 적합하다. 지금까지 발굴된 고려선은 대부분 목질이 강하고 쉽게 구할 수 있는 소나무를 재료로 해 제작되었다(문경호, 『고려시대 조운제도의 연구와 교재화』, 2012년). 앞에서 말한 대로 일본 원정용 전함 제작을 위해 그 재료를 변산반도와 장흥 천관산에서 구했다. 이 지역은 조선시대에도 선박용 소나무 제작을 위한 산(封山)으로 지정되었을 만큼 소나무가 풍부했다.
배 밑바닥이 넓은 평저선 구조가 강점
고려선의 건조 기술은 다음과 같다. <그림 참고> 소나무와 같은 원목을 여러 개 결합해 평탄한 저판(배 바닥)을 만들고, 거기에다 미리 조립한 선수재(船首材, 이물비우)와 선미재(船尾材, 고물비우) 등을 고착시켰다. 굵은 가룡목(駕木)을 배의 외판, 즉 배의 좌우 바깥으로 뚫고 나오게 한다. 그 위에 나간을 세우거나 갑판을 깔았다. 이렇게 설치된 여러 개의 가룡목이 선체 내부의 칸막이 구실을 했다. 칸막이를 중국과 같이 판자나 삿자리를 사용하지 않았다. 가룡목을 뱃전 밖으로 연장해 그곳을 잘 이용하는 것이 우리나라 선박의 큰 특징이다. 따라서 배의 모양은 배의 옆 부분이 좀 부른 장방형의 상자 모양이었다. 이러한 선박 구조는 배의 밑바닥이 좁은 첨저선형(尖底線型)의 배에는 사용할 수 없다. 실제 고려선은 배의 밑바닥이 넓은 평저선형(平底船型)을 특징으로 한다.(김재근, 『한국 선박사연구』,1984년) 이러한 선박 제조 기술은 이미 고려 초기에 나타난다.
고려의 군선(軍船) 역시 이러한 선박 구조를 갖고 있다. 궁예 정권 때 왕건은 개성 해상(海商·바다상인) 세력의 후예답게 직접 군선을 제작해 커다란 공을 세웠다.
“(914년 궁예는) 왕건에게 배 백여 척을 더 만들게 했다. 큰 배 10여 척은 사방이 각각 16보(步)이며 위에 망루를 만들고 말이 달릴 수 있을 정도였다. 군사 삼천여 명과 군량을 싣고 나주로 갔다.”(『고려사』 권1 태조총서)
후백제 근거지인 나주를 공격하기 위해 태조 왕건은 16보(96자, 1보는 6자), 즉 길이 약 30m나 되는 큰 선박을 제조했다는 기록이다. 당시 중국의 전선이 평균 15m 정도임을 감안하면 상대적으로 대형 선박을 제조할 능력을 보유했다. 9세기 후반 이래 장보고의 활약과 개성의 왕건 집안 등 해상 세력이 대두하고, 이들은 대내외 해상무역을 위해 선박을 제조하면서 고려 초기에 대형 선박을 제조할 기술을 축적하게 되었던 것이다.
다음의 기록은 근래 일본에서 발굴된 자료의 일부다. 1018년(현종10) 4월 고려는 진명 선병도부서(鎭溟船兵都府署·함경도 덕원 소재)에서 여진의 해적선 8척을 사로잡았는데, 이때 잡혀 있던 일본인 남녀 259명을 일본에 돌려보낸 사실이 있다. (『고려사』 권4) 이때 귀국한 일본인이 당시 전투에 사용된 고려 병선(兵船)을 목격한 기록이다. 현종(1009~1031년 재위) 당시 고려 병선의 특징이 잘 묘사돼 있다.
여진족 해적 퇴치와 조운 · 무역에 활용
“고려국의 병선 수백 척이 쳐들어가 적(여진)을 치자, 적들은 힘을 다해 싸웠으나 고려군의 사나운 기세 앞에 적수가 되지 못했다. 고려의 병선은 선체가 높고 크다. 무기가 많이 있어 배를 뒤집고 사람을 죽이자, 적들이 고려군의 용맹을 감당할 수 없었다. 고려선에 들어가 보니 이같이 넓고 큰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이층으로 만들어져 상층에는 노가 좌우에 각각 4개가 있으며 노를 다루는 자가 4∼5명 정도 있었다. 병사 20여 명이 전투에 대비하고 있었다. 하층에는 좌우에 각각 7∼8개의 노가 있다. 뱃머리는 적선과 충돌하여 깨부수기 위해 선체 바깥에 쇠로 만든 뿔이 있다. 선내에는 철갑옷과 크고 작은 칼과 갈퀴 등의 무기가 준비돼 있다. 적선에 던져 배를 깨부수기 위한 큰 돌(大石)들도 준비돼 있다.”(『小右記』(寬仁3년-1019년 8월)
뱃사공을 제외한 약 80명의 병사가 고려의 병선에 탄 모습이 실감나게 기록돼 있다. 참고로 1374년(공민왕23) 제주도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최영 장군이 거느린 부대가 배 315척에 2만5605명이라 한다. 척당 약 80명이 탄 셈이다. 조선 초기에 대형 전함의 정원 역시 80명이었다. 요컨대 고려 전기부터 이런 대형 전함을 제조했던 것이다.
고려에서 조선술이 발달한 배경은 뭘까. 고려왕조에선 개방정책 덕에 대외무역이 활발하게 이뤄졌다. 또한 우리 역사에서 처음으로 남해와 서해 항로와 한강 등 내륙 수운(水運)을 통해 전국의 조세를 수도 개경으로 거두어들이는 조운(漕運)제도를 실시한다. 또 동해안 지역은 해로를 이용한 여진족의 침입이 잦았다. 고려는 여진족 해적을 막기 위해 연해안 거점도시에 해상 방어관청인 도부서(都府署)를 설치한다. 이 과정에서 조운선과 전선 같은 선박 수요가 상당히 많았다. 이에 따라 독자적인 조선기술이 발달할 수밖에 없었다.
고려선 기술은 조선왕조로 계승돼 우리나라 전통 선박 한선(韓船)의 기원이 되었다. 그 가운데 고려의 군선(軍船)이 주목된다. 군선은 다른 배와 달리 뱃전에 짧은 창검(槍劍)을 빈틈없이 꽂아놓아 적이 배 안에 뛰어들지 못하도록 했다. 이를 과선(戈船)이라 부른 이유다. 이런 형태의 고려 전기 과선은 고려 말부터 조선 초 사이에 검선(劒船)이라 불렸다. 임진왜란 당시엔 구선(龜船·거북선) 제작으로 그 전통이 이어진다. 고려선 제작 기술은 이렇게 조선시대 중반까지 계승됐다.
- 중앙선데이 | 박종기 국민대 교수 | 제343호 | 2013.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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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관의 묘’.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에 있다. 사적 제323호. 묘역에는 묘와 영당(影堂), 교자총(較子塚), 신도비(神道碑), 재실(齋室) 등이 있다. [조용철 기자] |
반란과 정변의 불씨 남긴 여진 정벌 책임론 |
고려사의 재발견 · 윤관과 부국강병책
부왕 숙종의 상을 마친 예종은 1107년(예종2) 12월 17만의 군사로 2차 여진 정벌을 단행한다. 1104년(숙종9) 1차 여진 정벌이 실패한 지 3년 만이었다. 넉 달 만인 이듬해 3월 정벌지역에 9성(城)을 쌓았다. 사령관 윤관(尹瓘)이 이끈 정벌은 한마디로 파죽지세였다. 윤관은 휘하의 임언(林彦)을 시켜 9성 중 하나인 영주(英州)성 남쪽 청사에 정벌의 공을 기리는 글을 쓰게 했다.
“『맹자』에, ‘약한 것은 진실로 강한 것을 대적할 수 없으며, 작은 것은 진실로 큰 것을 대적할 수 없다’고 했다. 내가 이 말을 외운 지 오래되었으나 이제야 이 말이 진실이란 것을 믿게 되었다. 여진은 우리보다 군사도 약하고 인구도 적은 데도 병란을 일으켜 많은 백성을 죽이고 포로로 삼았다… 숙종께서 대로해 군사를 정비해 대의로써 토벌하다가 애석하게도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돌아가셨다. 지금 임금(예종)은 3년상을 마친 뒤, ‘큰 효도란 어버이의 뜻을 잘 잇는 것이라는 옛 사람의 말에 따라 어찌 정의의 깃발을 들어 무도한 자를 쳐서 선왕의 치욕을 완전히 씻지 않겠는가?’라고 하셨다.”(『고려사』 권97 윤관 열전)
윤관은 백성을 죽이고 사로잡은 무도한 여진족을 약한 자로 규정하고, 그들이 강한 고려를 결코 이길 수 없다는 강약의 논리로 정벌을 정당화했다. 또 자신의 정벌은 숙종과 예종 두 국왕의 뜻을 실천하는 것이라 했다. 한 달 뒤인 4월 윤관이 개선하자 예종은 그에게 ‘오랑캐를 평정하고 영토를 넓혀 나라의 근심을 잠재운(平戎拓地鎭國)’ 공신이란 칭호를 주고 2인자인 문하시중으로 임명한다.
그러나 승패를 결정짓는 전쟁은 끝이 아니라 이때부터가 시작이었다. 17만 고려 대군과의 전면전을 피해 내륙으로 군사를 후퇴시킨 여진은 고려 주력군이 철수하자 곧바로 대규모 반격을 시작한다. 강약의 논리로 여진을 조롱한 영주 성벽에 내건 현판의 먹물이 마르기도 전이었다.
9城 쌓고도 여진 공세로 수많은 희생
| ‘윤관척경입비도’는 윤관이 9성을 쌓고 영토를 개척한 그림이다. [고려대박물관 소장] |
여진의 반격을 예상해 9성 수축을 반대한 의견도 있었다. 정벌에 참여한 병마부사 박경작은 윤관에게 ‘무공을 떨쳤으니 군사를 거두어 만일에 대비해야 합니다. 오랑캐 땅 깊숙한 곳에 성(9성)을 쌓는 일은 쉽지만, 지키는 일은 더 어렵습니다’ 라고 주장했다. 윤관은 이를 무시하고 9성을 쌓았다. 그 후유증은 실로 컸다.
“처음 조정에선 병목[甁項] 지역을 빼앗아 방어하면 오랑캐에 대한 근심이 영원히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빼앗고 보니 이곳엔 수륙으로 도로가 통하지 않는 곳이 없어 전에 들은 것과는 전혀 달랐다. …(여진의 공세에도) 9성이 험하고 견고해 좀처럼 함락되진 않았지만 전투에서 아군은 많이 희생되었다. 개척한 땅이 너무 넓고 9성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고 계곡과 골짜기가 험하고 깊어 적들이 복병을 두어 성과 성을 왕래하는 사람들을 공격했다. 이 때문에 여러 차례 군사를 징발하자 온 나라가 소란해졌고, 기근과 역병으로 원망이 일어났다.”(『고려사』 권96 윤관 열전)
위 기록과 같이 여진 지역 깊숙한 곳에 쌓은 9성은 실제로 여진의 표적이 되었다. 더욱이 성과 성 사이의 거리가 멀어 방어 과정에서 수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다. 정벌에 따른 군사 징발에다 기근 · 역병까지 겹쳐 온 나라가 소란할 정도로 민심이 동요했다. 여진의 군사는 윤관이 귀환한 직후인 이 해(1108년) 4월부터 한 달간 9성의 하나인 웅주(雄州)성을 집중적으로 공격하는 등 전면 공세를 취한다. 이 해 5월엔 부사령관 오연총이, 7월엔 사령관 윤관이 다시 출정한다. 많은 역사서가 9성 수축을 여진 정벌의 성과로 기록한 것은 편향적이다. 여진 정벌 후 9성 수축까진 4개월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이후 9성을 반환한 이듬해(1109년) 7월까지 1년간 여진의 일방적인 공세에 시달린다. 9성 수축이 패전을 자초한 셈이 되었다.
9성 반환 직전인 이 해(1109년) 6월부터 사령관 윤관에게 패군(敗軍)의 죄를 묻는 처벌론이 제기된다. 9성 반환론도 동시에 제기된다. 대부분의 관료집단이 처벌론과 반환론에 동의한다.
“김인존은 ‘토지는 백성의 삶의 터전입니다. 지금 성을 서로 빼앗으며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는 차라리 그 땅을 돌려주어 백성을 쉬게 하는 것이 낫습니다. 지금 주지 않으면 반드시 거란(契丹)과 틈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라고 했다. 왕이 그 까닭을 물었다. ‘정벌 지역은 우리 땅이고 백성도 우리 땅이라고 정벌의 이유를 거란에 통보했는데, 거란이 조사해 사실이 아닌 것이 드러나면 거란과의 외교 마찰을 피할 수 없습니다. 북쪽의 거란과 함께 9성 설치로 동쪽의 여진을 동시에 방어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결코 나라에 복이 되지 않습니다’라고 했다.”(『고려사』 권96 김인존 열전)
고위 관료들, 윤관 처벌 요구하며 출근 거부
9성 반환은 거란과의 외교 마찰을 해소하고 거란과 여진을 동시에 방어하는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다는 논리다. 또한 민심을 안정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정벌을 주도한 예종과 윤관은 사면초가에 몰린다.
이 해 7월 재상 등 3품 이상의 고위 관료가 모여 9성 반환 여부를 논의했는데 이들은 모두 반환론에 동의했다. 국왕은 여진에 9성 지역을 반환하기로 결정한다. 또한 처벌 대신 윤관의 지휘권만 박탈한다. 관료들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다시 처벌을 요구한다. 이듬해(1110년) 5월까지 처벌론은 계속 제기된다.
“왕(예종)이 건덕전(乾德殿)에서 조회를 했다. 재상(宰相) 최홍사와 김경용이 대간과 함께 윤관과 오연총이 패전한 죄를 묻는 상소를 올렸다. 왕이 듣지 아니하고 곧 궁궐 안으로 들어갔다. 최홍사 등이 궁궐에 가서 오후 4시까지 죄를 청했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재상들이 모두 집으로 간 후 출근하지 않아 관청이 모두 비었다. 왕이 평장사 이오와 중서사인 이덕우 등을 불러 당직에 숙직시켰다. 최홍사 등이 수십 일 동안 출근하지 않았다.”(『고려사』 권13 예종 5년(1110) 5월)
관료들은 처벌론이 관철되지 않자 수십 일간 조정에 나가지 않고 업무를 보지 않은 항의성 시위를 벌인다. 절대권력의 국왕 앞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여진 정벌의 후유증은 국왕과 관료집단 사이의 대립과 갈등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예종은 끝까지 윤관을 옹호해 명예를 회복시킨다. 즉 이 해 12월 윤관을 다시 문하시중과 함께 판병부사로 임명해 군사권을 맡긴 것이다. 윤관이 사양하자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대(윤관)가 여진을 정벌한 것은 선왕(숙종)의 남기신 뜻과 나의 뜻을 따른 것이다. 죽음을 무릅쓰고 적진에서 적을 죽이고 사로잡은 것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고, 9성을 쌓아 나라의 오랜 치욕을 씻은 공은 실로 크다… 관리들의 탄핵으로 관직을 박탈당했으나 내가 그대의 잘못을 따지지 않은 것은 다시 공을 세우기를 바라기 때문이다.”(『고려사』 권96 윤관 열전)
여진 정벌은 이같이 두 국왕의 의지가 담긴 것이며, 그 의지를 몸소 실천한 이가 윤관이었다. 따라서 윤관 처벌론은 단순히 패전 책임을 묻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숙종 · 예종이 구상한 새로운 정치에 반대하는 관료집단의 뜻이 담겨 있다. 이 때문에 예종은 윤관을 끝까지 옹호했던 것이다.
예종은 처벌론을 잠재우고 윤관을 다시 기용해 정치적으로 승리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윤관은 다시 기용된 지 5개월 후 사망함으로써 이 정책은 더 이상 추진될 수 없었다. 측근 윤관의 죽음도 하나의 원인이지만 관료집단의 동의를 받지 못한 정책은 절대군주로서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새로운 정치를 펼치려 했던 숙종과 예종의 정치는 9성 반환과 윤관 처벌론을 계기로 분출된 관료집단의 뿌리 깊은 불신과 저항에 부닥쳐 추진력을 잃었다.
숙종과 예종이 추구한 새로운 정치는 무엇일까. 숙종은 외척 이자의(李資義)가 병약한 헌종 대신 자신의 조카를 왕위에 앉히려 한 이자의를 제거하고 즉위했다. 숙종은 기득권층인 외척과 문벌귀족 중심의 정치를 청산하고 왕권과 왕실의 권위를 확립하려는 ‘부국강병’이라는 실용주의 정책을 시행한다. 이 정책은 적극적인 대외 경략과 과감한 재정 개혁을 통해 개인이나 사문(私門)이 아닌 국가의 부를 확대하려 한 정책이다. 당시 송나라에서 시행된 왕안석의 신법(新法)을 모델로 삼았다. 『고려사』에서도 숙종의 정책을 또한 신법이라 불렀다. 어진 정치(仁政)와 덕을 앞세운 덕치(德治)를 내세운 유가(儒家)적 군주상과 달리 숙종은 법가(法家)적인 군주상을 지닌, 우리 역사에서 보기 드문 국왕이었다.
이자겸 · 묘청의 난과 무신정변으로 번져
숙종의 부국강병책은 구체적으로 수도 천도, 화폐 유통, 여진 정벌의 세 가지다. 예종 전반기까지 추진된 이 정책을 앞장서서 실현한 인물이 윤관이다. 윤관은 숙종의 동생인 승려 의천(義天)과 함께 숙종을 보좌한 최측근이었다. 거란과 송나라는 갑작스럽게 헌종의 왕위를 물려받아 즉위한 숙종을 의심했다. 윤관은 두 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즉위의 정당성을 알렸다. 그는 화폐를 주조하고 유통시켜 문벌귀족 대신 국가가 유통과 경제권을 장악하는 데 앞장섰다. 문벌귀족의 정치기반을 무너뜨리기 위해 지금의 서울인 남경으로 수도를 옮기기 위해 궁궐을 신축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숙종 때 여진 정벌에 실패하자 별무반 편성을 건의했고, 이 군사를 거느리고 예종 때 다시 여진 정벌에 나섰다. 윤관은 두 국왕이 가장 신뢰한 측근 중의 측근이었다.
여진 정벌이 실패하자 관료집단은 이를 빌미로 윤관 처벌론을 제기해 두 국왕이 추구한 새로운 정치를 부정하려 했다. 이로써 약 15년간 시행된 한국사 초유의 부국강병책은 실패한다. 그러나 그 파장은 컸다. 국왕과 문벌귀족 세력의 극렬한 대립과 갈등을 낳았고,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은 물론 끝내는 무신정변이라는 엄청난 정치적인 파장을 불러일으킨다. 여진 정벌을 둘러싼 정치권의 대립과 갈등은 그 신호탄이었다.
- 중앙선데이 | 박종기 국민대 교수 | 제344호 | 2013.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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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 문벌귀족의 생활을 그린 ‘아집도(雅集圖)’. 고려 후기 제작. [호암미술관 소장] |
고려, 금나라 ‘신하’로 전락 … 묘청의 난 불씨 되다 |
고려사의 재발견 · 이자겸과 형제맹약
역사 속에서 권력은 언제나 현실주의자의 몫이었다. 이상주의자에게 권력은 아침 햇살 앞의 이슬에 불과했다. 현실정치의 작동 원리를 제대로 읽지 못한 어리석음 때문이다. 거란에게 당한 치욕을 만회하기 위해 부국강병책을 시도한 송(宋)나라의 왕안석이나 현실정치의 개혁을 추진한 고려의 숙종과 윤관이 그런 존재였다.
숙종의 사후 안식처인 ‘천수사(天壽寺) 공사를 중단하라’는 관료집단의 매정한 요구는 현실정치의 냉혹함을 그대로 보여준다. 여진 정벌 한 해 전에 일어난 일이다. 이때 예종은 국정쇄신을 위해 신하들에게 정국 현안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당장에 부닥친 문제가 천수사 건립 문제였다.
“짐은 천수사 공사를 둘러싼 찬반 논의가 있는 것을 알고 있다. 선왕(숙종)께서 공사를 시작했을 땐 반대가 없었는데 승하하신 이후에야 공사를 중지하라는 여론이 크게 일어나고 있다. 지세의 길흉을 따져 중단을 요구한 것은 하찮은 이유에 불과하다. 천수사를 세우려 한 선왕의 뜻을 따르는 것이 옳다. 다만 올봄에 공사를 강행한 것은 잘못이니, 3년 후에 시행할 것이다.”(『고려사』 권12 예종 원년(1106) 7월조)
천수사는 숙종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낼 숙종의 원찰(願刹·죽은 이의 명복을 빌던 법당)이다. 역대 국왕은 모두 원찰을 지어 그곳에서 제사를 지내게 했다. 숙종 재위 땐 반대하지 않다가 관료집단이 사후에야 중단을 요구한 것이다. 관료들은 선왕의 명복을 빌 장소조차 허락하지 않겠다는 것인데 그 속엔 숙종의 부국강병책에 대한 뿌리 깊은 반감이 담겨 있다. 그런데 예종은 이를 묵살한다. 3년 뒤 공사를 재개한다는 약속을 어기고 석 달 뒤인 이해 10월 윤관에게 명령해 공사를 강행한다. 이듬해에는 윤관을 앞세워 여진 정벌을 강행한다. 현실정치를 무시한 예종의 정치는 실패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관료집단, 민생 안정 앞세워 개혁 반대
여진 정벌 실패와 윤관의 사망으로 사면초가에 몰린 예종은 이자겸(李資謙)의 딸을 비로 맞아들인다. 그 돌파구로 당대 최고의 문벌인 인주(仁州; 지금의 인천) 이씨와 다시 손을 잡은 것이다.
“왕(문종)은 이자연(李子淵)의 딸을 비로 삼고, 그에게 (최고 명예직인) 수태위 (정1품)라는 벼슬을 내렸다. …… (이자연은) 뒷날 문종의 공신으로 문종의 신주와 합사(合祀)되었다. 아들도 모두 고위직에 올랐다. 이호(李顥)는 경원백(慶源伯)의 작위를 받았다. 이정(李ㆍ)은 문하시중(종1품), 이의(李ㆍ)와 이전(李ㆍ)도 모두 재상(2품 이상)을 역임했다. 세 딸은 모두 문종의 비가 되었다. ……이자겸은 이호(李顥)의 아들이다.”(『고려사』 권95 이자연 열전)
| 이허겸의 묘(인천시 연수구 소재ㆍ사진 위)와 인주 이씨의 발상지라는 뜻(원인재)의 묘 재실 현판 |
위 기록과 같이 이자겸의 조부인 이자연 때 그의 세 딸이 문종의 비가 되면서, 인주 이씨는 왕실의 외척 가문이 된다. 아들도 작위를 받거나 재상이 되었다. 문종 이후 순종-선종-헌종-숙종-예종-인종까지, 숙종을 뺀 다른 국왕들은 모두 이자연 때부터 손자 이자겸 때까지 3대에 걸쳐 이 집안의 딸들을 왕비로 맞는다. 이 집안과 고려왕실 간의 인연은 더 거슬러 올라간다. 문종의 모후는 안산 김은부 (金殷傅)의 딸이다. 고려왕실 초기에 ‘백년 근친혼’의 관행을 깨고 처음 맞이한 이성(異姓) 후비였다. 김은부는 이자연의 조부 이허겸(李許謙)의 사위이다. 이허겸 때부터 인주 이씨는 이미 명문가 반열에 반열에 올라섰다. ‘가문의 영광’은 이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예종은 이자겸을 외척으로 삼아 자신의 왕권을 보장받았지만, 부왕 숙종을 위한 정치는 포기해야 했다. 나아가 신법에 반대한 문벌귀족세력이 정치적으로 득세하고 뒷날 외척이 발호하는 길을 터주는 실책을 저지른다. 정치 주도권을 장악한 김인존·고영신·최계방 등 유교 문신 귀족세력은 당장 숙종과 예종이 시도해온 신법에 반대한다.
“조종(祖宗)의 성헌(成憲)이 모두 갖추어 있는데, 떠들썩하게 (신법으로) 고치는 것은 불가합니다. 성헌을 지키고, 그것을 잃지 않는 것만이 가능합니다.” (『고려사』 권97 고영신 열전)
“공은 정사를 처리하면서 조상의 법을 함부로 고치거나, 새로운 법(新法)을 만들어 풍속을 동요시키는 것도 기꺼워하지 않았다.”(「최사추(崔思諏) 묘지명」)
곽상(郭尙)은 윤관이 화폐유통정책을 시행하려 하자, 풍속에 적합한 것이 아니라고 반대했다(『고려사』 권97 곽상 열전). 이미 만들어진 법을 따르면 될 일이지, 굳이 새로운 법을 만들어 풍속을 동요시킬 필요가 없다는 논리였다.
신법으로 불린 숙종의 부국강병책은 화폐 유통과 여러 형태의 조세를 신설해 재정을 확대하고, 확보된 재원으로 이민족 정벌과 같은 대외 팽창책을 펼쳐 왕권을 강화하려는 외치론(外治論)이었다. 반면 관료집단은 지배층의 도덕적 각성과 민생 안정에 중점을 둔 내치론(內治論)을 내세웠다. 예종은 내치론자와 타협한다.
이자겸, 측근에게 피살 … ‘석 달 천하’ 종지부
예종의 사후 왕실의 외척이 권력을 휘두르는 현상이 나타나면서 정국은 급변한다. 잡은 권력은 쉽게 놓치지 않는 법이다. 이자겸은 예종의 아들이자 외손자인 인종에게 다시 두 딸을 비로 들인다. 인종은 모후의 여동생인 두 명의 이모를 비로 맞아들인다. 왕의 외조부이자 장인이 된 이자겸은 왕권을 압도하는 권력을 행사한다. 절대권력은 부패하기 마련이다.
“이자겸은 친족들을 요직에 배치시키고 관직을 팔아 자기 일당을 요소요소에 심어두었다. 스스로 국공(國公: 고려 최고작위)에 올라 왕태자와 동등한 예우를 받았으며 그의 생일을 인수절(仁壽節: 국왕 생일에만 붙이는 이름)이라 하고, 국왕에게 올리는 형식으로 그에게 글을 올리게 했다. 아들들이 다투어 지은 저택은 거리마다 이어져 있었고, 세력이 커지자 뇌물이 공공연하게 오가고 사방에서 선물로 들어온 고기 수만 근이 날마다 썩어나갔다. 토지를 강탈하고 종들을 풀어 백성들의 수레와 말을 빼앗아 물건을 실어 나르니, 힘없는 백성들은 수레를 부수고 소와 말을 파느라 도로가 소란스러웠다. 이자겸은 지군국사(知軍國事)가 되어 왕에게 그 책봉식을 궁전이 아니라 자신의 집에서 하게 했고, 시간까지 강제로 정할 정도였다. 이로 인해 왕은 이자겸을 몹시 싫어하였다.”(『고려사』 권127 이자겸 열전)
1126년(인종4) 2월 인종은 측근 김찬 · 안보린 등을 시켜 외척 이자겸을 제거하려다 도리어 이자겸의 반격을 받아 그를 제거하는 데 실패한다. 거사에 실패한 뒤 인종은 이자겸의 집에 거처할 정도로 왕실과 국왕의 권위는 크게 실추되었다. 석 달 후 인종은 이자겸 측근인 척준경을 회유해 이자겸을 제거한다. 이자겸의 ‘석 달 천하’는 막을 내린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때 새로운 사태가 불거진다.
이자겸의 난이 일어나기 한 해 전인 1125년(인종3) 5월 금나라는 고려가 보낸 국서에서 스스로를 신(臣)이라 하지 않고 황제라 표현한 것을 구실로 삼아 고려 사신의 입국을 거부한다. 금나라는 형제맹약을 했던 고려에 신하의 예를 취하라고 압박한다. 조정에선 의견이 분분했다.
“(중국의) 한나라가 흉노에게, 당나라가 돌궐에게 혹은 신하라 일컫고 혹은 공주를 시집보내어 무릇 화친할 일은 모두 했습니다. 지금 송나라도 거란과 서로 백숙형제(伯叔兄弟)가 되어 대대로 화친하여 서로 통하고 있습니다. 오랑캐 나라에 굴하여 섬기는 것은 이른바 성인은 ‘임시방편(權)으로 도(道)를 이룬다’는 것으로, 국가를 보전하는 좋은 계책입니다.” (『고려사』 권97 김부의(金富儀) 열전)
외척 발호와 문벌귀족 失政에 민심 이반
1125년 5월 금나라가 고려 사신의 입국을 거부한 직후에 김부식의 아우 김부의가 제기한 견해이다. 이에 ‘대신들은 반대하고 금나라 사신을 베어 죽이자고 극언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재상들은 이를 비웃고 배척하여 금나라에 알리지 않았다’고 한다(『고려사』 권97 김부의 열전). 그러나 김부의의 견해 속엔 군신관계라는 형식적인 관계를 통해 고려의 안정을 유지하자는 현실론이 담겨 있으며, 그것은 김부의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그런 주장이 당시 조야에 먹혀들어가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최고 권력자 이자겸도 김부의와 같은 견해였다.
“금나라가 옛날에는 작은 나라로 요나라와 우리나라를 섬겼으나, 지금 갑자기 중흥하여 요와 송을 멸했다. 그들은 정치를 잘하고 군사가 날로 강해지고 있다. 또 우리와 국경을 인접하고 있어 형세로 보아 섬기지 않을 수 없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옛날 어진 왕의 도리이니, 마땅히 사신을 보내야 한다.” (『고려사절요』 권9 인종 4년 3월조)
이자겸은 이듬해(1126년) 3월 마침내 금나라에 칭신(稱臣)하기로 결정한다. 고려는 거란과 약 100년간의 분쟁을 벌인 끝에 보주(保州)를 금나라의 양해를 받아 1117년(예종10) 고려 영토로 귀속시켰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발생한 신흥강국 금나라와의 마찰은 지배층에게 커다란 부담이 됐을 것이다. 칭신(稱臣) 결정을 내린 이유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하급 관료집단과 일반인의 생각은 달랐다. 금나라에 대한 칭신을 고려왕조의 자존심에 생채기를 내는 것으로 간주했다. 이는 이자겸의 난 이후 나타난 외척의 발호, 개경 중심 문벌 귀족의 현실주의 정책에 대한 평소의 불만에 기름을 부은 꼴이 되었다. 이런 불만은 묘청(妙淸)의 난으로 폭발한다.
- 중앙선데이 | 박종기 국민대 교수 | 제345호 | 2013.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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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려문신이자 유학자인 김부식 선생의 표준 영정. 작은 사진은 삼국사기. [중앙포토] |
학자 김부식, 인종도 쩔쩔매는 냉혹한 권력자 변신 |
김부식과 묘청의 난
1123년(인종1) 송나라 사신 서긍은 김부식(金富軾: 1075~1151년)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인물평을 남겼다.
“김부식은 풍만한 얼굴과 커다란 체구에 얼굴이 검고 눈이 튀어나왔다. 널리 배우고 많이 기억해 글을 잘 짓고 예와 지금의 일을 잘 알아, 학사들에게 존경을 받기로는 그보다 앞설 사람이 없다.” (『고려도경』 권8 인물조)
한 달가량 고려에 체류한 그가 남긴 평가 속에는 그가 전해들은 고려인의 얘기가 섞여 있어, 당대 고려인의 평가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어쨌든 서긍의 눈에 비친 49세의 김부식은 고금(古今)을 꿰뚫는 박람강기(博覽强記: 박식하고 총명함)의 기백을 지닌 당대 최고의 학자였다. 실제로도 그러했다.
그러나 묘청(妙淸)의 난이 진압된 지 4년이 지난 1139년(인종17) 김부식의 모습은 이와는 달랐다. 국왕 인종과 나눈 대화 내용이다.
“(인종은) 김부식에게 송나라 사마광(司馬光)의 여러 글을 읽게 하고 그를 칭찬하면서, ‘사마광의 충성스러운 절의가 이렇게 훌륭한데 왜 사람들은 당시 그를 간사하다고 했는가?’ 하고 물었다. 김부식은, ‘왕안석의 무리들과 서로 좋지 않았기 때문이지, 잘못은 없습니다’라고 답했다. 왕은 ‘송나라가 망한 것은 왕안석 때문임이 분명하다’라고 했다.”(『고려사절요』 권10 인종17년 3월)
왕권에 집착한 국왕 인종의 자충수
김부식은 부국강병책을 시도한 송나라 왕안석의 신법보다는 기존 질서를 고수하려 한 사마광의 구법(舊法)을 더 높이 평가했다. 김부식은 왜 그런 말을 했을까? 그는 4년 전 묘청의 난을 진압한 총사령관이었다. 왕안석에 빗대어 금나라 정벌과 서경 천도와 같은 변법(變法: 신법)이 나라를 위기에 빠뜨릴 위험이 있음을 인종에게 알리려는 것이 그의 진심일 것이다. 인종은 왕안석의 신법이 송나라 멸망의 원인이라고 말해 김부식의 생각에 동의했다.
이 대화 속에서 묘청과 손을 잡고 개경 귀족을 억누르고 새 정치를 추구한 인종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인종 즉위 초에 최고의 학자인 김부식은 약 20년이 지난 이제 국왕도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최고의 권력자로 변모했다. 왜 이렇게 상황이 급변했을까? 오로지 국왕 인종의 자충수 때문이다.
1126년(인종4) 이자겸은 제거되었지만 ‘개경 정치’에 대한 불신은 더 깊어갔다. 그 부담은 인종이 떠안을 수밖에 없었다. 궁궐이 불타고 왕권이 실추된 것은 그 다음의 문제였다. 인종은 새로운 정치를 모색한다. 정치의 중심 무대를 개경에서 서경으로 옮기려 했고, 그에 화답한 세력이 개경 정치에 불만을 가진 서경의 묘청, 백수한(白壽翰), 정지상(鄭知常) 등이다. 그들은 1128년(인종6) 8월 인종이 서경을 방문했을 때 서경에 새 궁궐을 짓고 새 정치를 할 것을 주문한다.
“묘청 등은 말한다. ‘서경 임원역(林原驛)의 지세는 음양가에서 말하는 대화세(大華勢)입니다. 궁궐을 세워 이곳으로 옮기면 천하를 합병할 수 있습니다. 즉 금나라가 스스로 항복하며, 36국이 모두 (고려의) 신하가 됩니다’라고 했다. …또 묘청의 무리는 왕이 황제라 칭하고 독자 연호를 사용하고(稱帝建元), 유제(劉齊: 금나라의 지원을 받은 한족에 의해 세워진 대제국(大齊國)의 왕)와 협공해 금나라를 없애자고 했다. 식자(識者)들이 다 불가하다 했으나, 그들은 계속 주장했다.” (『고려사』 권127 묘청 열전)
새 궁궐지는 대화세(大華勢), 즉 나무에서 꽃이 피는 대화세(大花勢)로서 풍수지리상 명당이고 길지라는 것이다. 이곳에 궁궐을 지어야 금나라는 물론 주변의 많은 나라가 고려에 항복한다는 것이다.
김부식, 공신 칭호 받고 정계 실력자로
1129년(인종7) 1월 서경에 신궁(新宮)인 대화궁(大華宮)이 완성된다. 다음 달 인종은 서경에 간다. 1131년(인종9) 8월 대화궁의 외성(外城)인 임원궁성(林原宮城)이 완성된다. 이자겸이 제거된 게 1126년(인종4)이니 불과 3∼4년 만에 서경이 정치의 새로운 중심지로 급부상한 것이다. 국왕 인종이 묘청 세력을 끌어안아 이러한 상황을 만든 것이나 다름없다.
서경 천도가 거의 확정될 무렵 개경 귀족세력이 크게 반발한다. 이자겸과 함께 사대정책을 주도한 김부식과 이자겸 대신 외척이 된 정안(定安: 지금의 전남 장흥) 임씨의 임원애(任元?) 등이 앞장서 반대한다.
“(1133년 8월) 임원애는, ‘묘청과 백수한 등은 간사한 꾀를 부리고 해괴한 말로 민심을 어지럽혔습니다. 몇몇 대신과 근신도 묘청의 말을 따라 국왕을 잘못되게 했습니다. 장차 생각지도 못할 환란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묘청 등을 저잣거리에서 죽여 화의 싹을 끊으십시오’라고 상소했다. 국왕은 답하지 않았다.”(『고려사』 권127 묘청 열전)
묘청을 처벌하자는 임원애의 주장은 개경 문벌귀족의 입장을 대변한 것이다. 김부식은 1134년(인종12) 인종의 서경 행차에 이렇게 못을 박는다.
“묘청 일당이 국왕을 서경에 오게 하여 역모를 꾀하려 했다. 이에 대해 김부식은 ‘이번 여름 서경 궁전에 벼락이 쳤습니다. 벼락 친 곳으로 재앙을 피하러 가는 것은 이치에 어긋납니다. 가을 곡식을 아직 거두지도 않았는데 행차하면 벼를 짓밟아 농사에 방해가 됩니다. 이는 백성을 사랑하는 일이 아닙니다’라고 서경 행차에 반대했다. 왕은 행차를 중단했다.”(『고려사절요』 권10 인종 12년 9월)
김부식의 제동으로 인종의 서경 행차가 없는 일이 되었다. 서경 천도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사실을 안 묘청 일파는 1135년(인종13) 1월 서경에서 마침내 반란을 일으킨다.
“묘청은 조광(趙匡) 등과 함께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임금의 명령을 위조해 서경유수와 관원을 잡아 가두고, 서북면(지금의 평안도 일대) 일대의 군사 지휘자와 서경에 거주하는 개경 사람은 귀천을 막론하고 모두 잡아 가두었다. 군사를 파견해 서경과 개경으로 오가는 길목을 차단했다. 서북면 일대 여러 성의 군사를 징발했다. 나라 이름을 ‘대위(大爲)’라 하고 연호를 ‘천개(天開)’라 했다. 정부의 관서를 조직하고, 군대 이름을 ‘천견충의군(天遣忠義軍)’이라 했다. 묘청이 조광 등과 함께 군마(軍馬)를 호령하여 두어 길로 나누어 곧장 개경으로 향했다.”(『고려사절요』 권10 인종13년 1월조)
난이 일어난 지 두 달 뒤인 이해 3월 김부식은 묘청의 난을 토벌할 사령관에 임명된다. 진압 작전에 나선 그는 약 1년 만인 이듬해 2월 난을 진압한다. 국왕은 그에게 ‘충성을 다해 난을 바로잡아 왕조를 안정시켰다’는 공신 칭호(輸忠定難靖國功臣)를 준다. 이로써 그는 정계의 최고 실력자로 군림한다.
신라 중심 사관과 유교 통치이념 확립
다섯 임금을 섬겼던 김부식은 곧바로 권력을 휘두른다. 진압사령관 시절 자신의 막료이자 윤관의 아들이기도 한 윤언이(尹彦?)의 처벌을 국왕에게 건의한다.
“김부식이 말했다. ‘윤언이는 정지상과 결탁하여 서로 죽기로 맹세하고 한 무리가 되어 크고 작은 일을 함께 의논했습니다. 1132년(인종10) 국왕께서 서경에 행차하셨을 때 독자의 연호와 황제로 칭할 것을 요청하고, 국학의 학생들에게 이 일을 상소케 했습니다. 이는 금나라를 격분시키는 일이며, 그 틈을 타서 자기 무리가 아닌 사람을 없애고 반역을 꾀하려 했습니다. 결코 신하로서 할 짓은 아닙니다’라고 했다.”(『고려사』 권96 윤언이 열전)
신법에 부정적이었던 김부식은 숙종·예종 때 신법을 추진한 윤관의 아들 윤언이도 그런 존재로 여기고, ‘반역 음모를 꾸몄다’고 주장해 그를 제거하려 했다. 국왕도 어쩔 수 없이 양주(梁州: 지금의 경남 양산) 지방관으로 좌천시켰다가, 6년 후 광주(廣州)목사로 임명해 윤언이의 명예를 회복시켜 준다. 그제야 윤언이는 자신에게 잘못이 없다는 상소를 올린다.
“연호를 제정하자고 건의한 것은 임금을 높이려는 순수한 마음입니다. 우리나라에도 이미 태조와 광종의 전례가 있습니다. 신라와 발해도 그렇게 했으나, 큰 나라(*당나라)가 한 번도 정벌하지 않았습니다. … ‘금나라를 격분시켰다’는 말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강한 적국이 우리 강토를 침략하면 막기에도 겨를이 없을 터인데, 어찌 틈을 타서 반역을 꾀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대화궁을 짓자는 논의에 가담하지 않아 정지상과도 다릅니다.”(『고려사』 권96 윤언이 열전)
김부식은 자신과 정치적 견해가 다른 정적을 내칠 정도로 냉엄한 권력자로 변모했다. 1142년(인종20) 김부식은 현직에서 사퇴한 후 왕명으로 『삼국사기』를 편찬하기 시작해 1145년(인종23) 완성한다.
“지금의 학사대부들은 중국 경전과 역사는 잘 알고 있으나, 우리나라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삼국은 일찍 중국과 예로 통해 그들의 역사서 한서(漢書)나 당서(唐書)에 삼국의 사실이 실려 있다. 그러나 소략하게 다루어 자세하지 않다. 우리나라 옛 기록은 문장이 졸렬하고 내용이 소략하여 군주의 선악, 신하의 충사(忠邪), 국가의 안위(安危), 인민의 치란(治亂)을 모두 나타내지 못하고 또 교훈을 주지 못한다.” (『동문선(東文選)』 권44 「진삼국사기표(進三國史記表)」)
학자들이 우리나라 역사를 잘 모르고, 내용이 소략하기 때문에 『삼국사기』를 편찬한다는 이유를 들었다.
그러나 그는 서경 천도운동의 역사의식인 고구려 중심 사관을 수정해 신라 중심의 사관을 확립하려 했다. 또한 묘청의 난 이후 정국 혼란을 수습하고, 유교 정치이념을 확립하기 위해 『삼국사기』를 편찬한 것이다. 정치뿐만 아니라 문화와 사상까지도 그의 뜻대로 움직이기를 바랐던 것일까? 정국은 다시 개경 문벌귀족이 주도하는 형세로 바뀌었다. 그러나 절대 권력은 반드시 부작용을 낳는다. 권력의 정상에 우뚝 선 그의 발 밑으로 ‘무신정변’이라는 엄청난 정치적 격랑이 밀려오는 조짐을 그는 모르고 있었다.
- 중앙선데이 | 박종기 국민대 교수 | 제346호 | 2013.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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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남 거제시 둔덕면 거림리 둔덕기성. 고려 의종이 왕에서 쫓겨난 뒤 3년간 유폐된 곳이며 폐왕성으로도 불린다. 송봉근 기자 |
역사의 승자 무신, 의종을 무신 난 도발자로 규정 |
의종과 무신정변
고려왕조의 최대 정변인 무신의 난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는 것이 우리 학계의 대세다.
“의종은 환관 무리와 놀러 다니는 일로 날을 보내어 정치를 돌보지 않았다. 국정은 어지럽고 기강은 땅에 떨어졌다. 문신들과 주지육림(酒池肉林) 속에서 음풍농월로 세월을 보내고, 무신을 혹사하고 천대한 결과 마침내 무신의 대란(大亂)을 도발케 했다.”(김상기, 『고려시대사』, 1984).
연회에 빠져 국정 혼란과 기강을 무너뜨리고, 문신을 우대하고 무신을 천대한 의종(毅宗; 1146~1170년 재위)에게 정변의 책임을 묻고 있다. 그런데 정설(定說)과 다름없는 이 견해는 조선 초기에 편찬된 『고려사』 기록을 옮겨 놓은 것이다.
“사신(史臣) 유승단(兪升旦)이 말한다. ‘불행하게도 의종은 아첨하고 경박한 무리들을 좌우에 두고 재를 올리고 기도하는데 재물을 기울여 탕진했다. 정치에 쏟아야 할 시간과 정력을 주색(酒色)에 빠져, 풍월을 읊는 것으로 정치를 대신했다. 이로써 점차 무신의 노여움이 쌓여 화(禍: 정변)가 일어났다’라고 했다.”(『고려사절요』 권11 의종 24년 8월 사평(史評))
무신그룹이 권력 잡고 ‘의종실록’ 편찬
학계의 견해는 『고려사』에 실린 유승단의 의종 평가와 판박이다. 그런데 당시 실록 편찬에 참여한 유승단은 무신정변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처지가 아니었다. 무신권력자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의종실록 편찬 자체가 출발부터 왜곡되었다.
“어떤 사람이 무신정권 최고기관인 중방(重房)에 다음과 같이 고발했다. ‘(의종실록) 편찬자 문신 문극겸(文克謙)은 의종이 피살된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했습니다. 국왕 시해는 천하의 가장 큰 죄입니다. 무신으로 사관(史官)을 교체해 사실대로 쓰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왕[명종]도 어쩔 수 없이 무신 최세보(崔世輔)를 사관으로 임명했다. 최세보는 마음대로 사실을 고쳐 (의종)실록을 편찬했다. 이 때문에 실록에는 탈락되고 생략된 사실이 많았다.”(『고려사』 권100 최세보 열전)
최세보는 조상도 알 수 없을 정도의 미천한 가계에다 글도 몰랐는데, 무신정변 덕에 재상 자리까지 올랐다. 실록 편찬의 사관(史官)에는 문신이 임명되던 관례를 깨고, 이때 무신이 처음 임명된 것이다. 의종실록은 최세보가 편찬책임자에 임명된 1186년(명종16) 12월 무렵 시작해 그가 사망한 1193년(명종23) 10월 무렵에 편찬이 마무리된다.
의종실록은 무신정변이 일어난 지 약 20년이 지난 뒤 무신정권의 안정기에 편찬되었다. 그 때문에 무신들은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정변의 책임을 의종의 실정(失政)에서 찾으려 했던 것이다. 의종 시해 사실처럼 무신들에게 불리한 사실이 많이 생략되었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기록된 유승단의 의종 평가도 온전할 리 없다. 따라서 무신정변의 원인에 관한 과거와 현재의 기록은 결코 객관적일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나아가 의종은 과연 문신을 우대하는 문신 친화적인 정책을 펼친 반면에 무신을 천대했을까 의문을 던지게 된다. 역사를 대하며 반면(反面)의 사실을 읽을 수 있을 때 역사의 묘미(妙味)가 있다.
“의종이 태자로 있을 때 국왕[인종]은 태자가 장차 왕으로서의 책임을 다할 수 있을까 걱정했다. 왕후 임씨도 둘째 아들 왕경(王暻)을 사랑해 그를 태자로 세우려 했다. 그러나 태자(훗날 의종)의 스승 정습명(鄭襲明)이 충성으로 태자를 가르치고 보호해 폐위되지 않았다.”(『고려사』 권96 정습명 열전)
정습명은 당시 김부식과 함께 문신귀족을 대표하는 정치인이다. 부왕인 인종과 모후를 등에 업은 외척들은 도량이 있고 따르는 사람이 많은 차남 왕경(王暻)을 왕위에 앉히려 했지만 ‘장자 계승’을 주장한 정습명으로 상징되는 문신귀족의 명분에 밀려 의종이 즉위한 것이다.
의종은 즉위 후 묘청 난을 진압해 정치의 주도권을 쥔 김부식 ㆍ 정습명 등 유교 관료집단의 요구를 외면할 수 없어, 사실상 이들에게 포위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1151년(의종5) 김부식과 함께 자신을 보필한 정습명이 죽은 뒤엔 자신의 구상대로 정치를 한다.
고려 내시집단은 국왕 보좌한 신진 관료
의종은 1154년(의종8) 서경에 중흥사(重興寺)를 창건한다. 1158년(의종12)에는 ‘백주 토산(兎山)의 반월 언덕(半月岡)은 왕조 중흥의 땅이다. 이곳에 궁궐을 지으면 7년 안에 금나라를 병합할 수 있다’라는 주장에 따라 대궐 중흥궐(重興闕)을 창건한다. 또한 측근인 재상 김영부(金永夫)와 김관의(金寬毅)에게 『편년통록(編年通錄)』을 편찬케 한다. 1157∼1160년 무렵으로 추정된다.
김영부는 뒷날 의종 복위 운동을 일으킨 김보당의 부친이다. 태조 왕건 이전 왕실 세계(世系)를 정리하고, 왕실의 기원을 중국 당나라 왕실에 연결시켰다. 풍수지리 도참사상 등에 입각해 왕실과 왕권의 신성함을 강조해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1145년)와 다른 성격의 역사서다. 정변이 일어나기 2년 전인 1168년(의종22) 의종은 서경에 행차하여 자신의 통치철학을 담은 이른바 ‘신령(新令)’을 반포하여, 음양사상·불교·선풍(仙風: 도교)을 통치이념으로 내세운다. ‘왕조의 중흥’이 의종이 바라던 정치 세계였다. 의종은 문신귀족과 달리 왕권을 강조한 절대 군주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사신의 평가와 같이 결코 무능한 군주가 아니었다.
의종의 정치를 보좌한 세력은 내시집단, 환관과 술사(術士: 풍수지리에 밝은 사람), 의종을 호위한 친위 군사집단의 세 그룹이다. 반(反)문벌귀족 세력이란 공통점을 지닌다. 내시는 조선시대와 달리 국왕의 정치를 보좌한 신진기예의 관료집단이다. 일반 군인은 어느 때나 고역에 시달리게 마련이다. 그렇지만 의종을 호위한 친위군사인 상급 무신은 비록 정변을 일으켰지만, 평소 의종의 우대를 받았고 의종을 지지한 측근 그룹의 하나였다. 의종은 무신을 천대하지 않았다.
| | |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1790년 편찬)에 실린 수박희(手搏戱) 모습 | 권력은 결코 나눠 가질 수 없다. 그로부터 나타난 폐단이 측근 그룹 가운데 내시, 환관과 술사그룹, 친위 군사그룹 사이의 권력 다툼으로 나타난다. 무신정변은 일차적으로 측근세력 내부의 권력 다툼에서 시작되었다. “왕이 보현원(普賢院)에 가기 위해 오문(五門) 앞에 도착했다. … 왕은 무신들이 실망하지 않게 위로하기 위해 수박희(手搏戱: 태권도의 일종)를 하게 했다. 내시 한뢰(韓賴)는 (왕을 호위하는) 무신들이 왕의 총애를 받는 것을 시기했다. 마침 대장군 이소응이 수박희를 하다 힘이 부쳐 달아나자, 그의 뺨을 치고 비웃었다. 내시 임종식·이복기 등도 이소응을 모욕했다. 정중부 등은 ‘이소응이 비록 무신이나 벼슬이 3품인데 어찌 이렇게 욕을 보이는가?’하고 소리를 질렀다. 왕이 정중부를 달랬다.” (『고려사』 권128 정중부 열전)
무신정변이 일어난 날 낮에 벌어진 일이다. 왕은 수박희를 열어 친위 군사들의 사기를 북돋우려 했는데, 왕의 총애를 다투던 내시 출신 한뢰·이복기·임종식 등이 그 참에 불을 지른 것이다. 친위 군사들은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린 일반 군인과는 처지가 다른, 국왕의 총애를 받은 집단이다. 모욕을 당한 이소응과 정중부는 국왕을 호위하는 친위 군사 출신이다. 모욕 사건이 발생한 그날 저녁 마침내 정변이 일어났다.
“밤이 되어 왕의 수레가 보현원에 도착했다. 이고·이의방은 왕의 명령을 가짜로 만들어 (친위군사인) 순검군을 집합시켰다. 왕이 숙소에 들어가자, 이들은 임종식 · 이복기 · 한뢰 등을 죽였다. 왕을 호위한 관료들과 환관이 모두 피해를 입었다. 정중부는 왕을 개경으로 돌려보냈다.”(『고려사』 권19 의종 24년(1170) 8월)
정중부와 함께 최초의 정변을 일으킨 이의방·이고 등도 역시 의종을 호위한 친위 군사였다. 이렇듯 정변은 일차적으로 측근 그룹인 정중부 등 친위 군사들이 내시 환관과 또 다른 측근 그룹을 제거하면서 일어난 것이다. 무신에 대한 푸대접이 아니었다. 의종 복위 운동 핑계로 문신들 대량 학살
그날 저녁 의종은 친위 군사들의 호위를 받아 왕궁으로 돌아와 보현원 사건은 일단락되는 듯했다. 그러나 피해를 입은 내시 환관 등이 다시 반발하자, 무신들은 의종을 거제도로 유폐한 후 환관과 내시들을 무더기로 제거한다. 3년 후인 1173년(명종3) 김보당을 주모자로 한 문신들이 거제도에 유폐된 의종을 경주로 모셔와 복위운동을 일으켜 무신에게 저항하자 마침내 이 정변은 문신들에 대한 대량 학살로 확대되었다.
당시 역사가들은 무신정변을 ‘경계(庚癸)의 난’이라 했다. 즉 최초 정변이 일어난 경인년(庚寅年: 1170년)과 복위운동이 일어난 계사년(癸巳年: 1173)의 두 차례 정변을 합해 무신정변이라 했다. 최초의 정변은 의종 측근세력 내부의 권력 다툼이며, 그런 빌미를 제공한 의종에게 일단의 책임이 있지만 의종의 책임은 여기까지였다. 두 번째 정변인 의종 복위 운동이 일어날 때 일반 군인들의 호응 아래 무신들은 문신에 대한 대량 살육을 저질렀다. 의종의 손을 떠난 정변이다.
무신정변은 가까이는 왕실 중흥과 왕권 강화를 시도한 의종과 그에 반대한 문신 관료집단 사이의 대립이라는 파행적인 정치로부터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멀리는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 등 12세기 이래 누적된 지배층 내부의 대립·갈등의 산물이 끝내는 무신정변이란 파국을 초래했다. 의종에게 모든 책임을 돌릴 수는 없다. 그것은 정변을 일으킨 무신 권력집단의 역사왜곡일 뿐이다.
- 중앙선데이 | 박종기 국민대 교수 | 제347호 | 2013.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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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 개성 교외에 있는 신종의 능. 인종의 5남인 신종 재위 때 신라부흥운동이 일어났다. 두 차례 무신정변 때 재위한 의종(인종 장남), 명종(인종 3남)의 능은 현재 소재를 알 수 없다. [사진 장경희 한서대 교수] |
천민 출신 권력자, 실권 넘어 왕권을 꿈꾸다 |
이의민과 신라 부흥운동
500년(918∼1392년)의 고려 역사에서 특이하게도 100년쯤은 무신정권(1170~1270년) 시대다. 『고려사』를 편찬한 조선 초기 역사가들은 ‘고려왕조 멸망의 계기는 무신정권 때부터’라고 혹평했다. ‘의종과 명종(무신정변) 이후 권세 가진 간사한 무리[權姦]들이 국정을 마음대로 하여 나라 근본을 깎고 상하게 하고 비용을 함부로 사용해 나라 창고가 텅 비었다’ (『고려사』 권78 식화지 서문)는 식의 평가가 그렇다. 그렇지만 무신정권 붕괴 후 고려왕조는 120년이나 더 지속한다. 다양한 고려의 역사를 너무 단순화해 버렸다.
무신정권을 혹평한 까닭에는 당시의 권력자 이의민(李義旼·1184∼1196년 집권)도 포함된다. 그는 무신정변이 일어나기 전까지 250년 고려사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인물의 한 사람이다. 국왕과 관료집단 중심의 왕정 체제를 없애고 새로운 세상을 꿈꾼 혁명가였다. ‘왕후장상(王侯將相)의 씨가 따로 없다’라는 기치를 내세워 1198년(신종1)에 일어난 만적(萬積)의 난도 이의민이 뿌린 씨앗에서 발아한 데 불과하다. 그는 직설적이고 거침없는 무신의 전형적인 기질을 지닌 인물이었다.
| | | 『고려사』 반역전에 실려 있는 이의민 열전의 일부분. | 아버지는 상인, 어머니는 사원 여종
경주 출신인 이의민은 천민이었다. 아버지는 소금과 체를 파는 상인, 어머니는 사원의 비(婢)였다. 이의민은 8자나 되는 큰 키에다 힘이 세어 두 형들과 마을에서 횡포를 부리다 안렴사(조선의 관찰사 격) 김자양에게 붙잡혀 모진 고문을 받은 끝에 두 형은 죽었으나 그만 살아남았다. 김자양은 그의 완력을 보고 경군(京軍:개경방어 군인)으로 선발했는데, 그것이 인생의 커다란 전기가 되었다. “아버지 이선(李善)은 어린 아들 이의민이 푸른 옷을 입고 황룡사 구층탑으로 올라가는 꿈을 꾸고선 아들이 필시 귀한 신분이 될 것이라고 여겼다. …이의민은 경군에 선발되어 가족을 데리고 개경으로 가다 날이 저물어 개경 성문이 닫혀 성 밖 연수사라는 절에서 묵었다. 꿈에 긴 사다리가 성문에서 궁궐까지 걸려 있어 그는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꿈을 꾸었다. 꿈에서 깬 그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고려사』 권128 이의민 열전)
부자(父子)의 꿈속에는 천민 신분을 벗어나려는 열망이 담겨 있다. 경군이 된 그는 타고난 완력으로 수박희(手搏戱:태권도의 일종)를 잘해 국왕 의종의 총애를 받아 단숨에 별장(別將:정7품 벼슬)으로 승진한다. 결정적인 기회가 그에게 찾아왔다. 1170년 무신정변이 일어나자 그는 크게 공을 세워 장군(將軍:정4품)으로 승진한다. 장군은 1000명의 군사를 지휘하는 무반의 고위직이다. 많은 사람이 피해를 본 무신정변이 그에게는 도약의 기회가 되었다.
1173년(명종3) 김보당(金甫當)이 주동한 의종 복위운동이 일어났다. 김보당의 명령을 받은 장순석 등이 거제도에 유폐된 의종을 경주로 모셔와 그를 구심점으로 무신정권을 타도하려 했다. 복위운동의 거점 지역을 경주로 택한 것은 옛 신라 수도라는 상징성에다 이곳의 반(反)왕조적인 정서를 이용하려 했기 때문이다. 무신정권 때 조위총의 난과 고구려 부흥운동, 의종 복위운동과 신라 부흥운동이 각각 서경과 경주에서 일어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옛 삼국의 수도였던 두 지역은 고려 건국 후 개경 중심 정치에서 소외받았기 때문이다. 황룡사 구층탑에 올랐다거나, 개경 남문에서 궁궐로 사다리를 타고 넘어갔다는 이의민 부자의 꿈에는 고려왕조에 대한 경주인의 반감이 투영된 측면이 없지 않았다.
최고 권력자 정중부는 복위운동 진압 사령관으로 경주 출신 이의민을 선택한다. 경주의 반왕조적인 정서를 역이용한 것이다. 그의 의도대로 경주민들은 이의민을 반기면서 반란 주동자를 단숨에 제압하고 의종을 경주 관아에 가두었다.
“이의민은 곤원사(坤元寺) 북쪽 연못가로 의종을 불러내어 술 몇 잔을 올리고, 그의 척추를 꺾는다. (의종이) 지르는 비명소리를 들으며 그는 껄껄 웃기까지 했다. (부관인) 박존위가 의종의 시체를 이불에 싸 가마솥 두 개와 함께 묶어서 연못 가운데로 던져 넣었다. …헤엄질을 잘하는 이 절의 승려가 가마솥만 건져내고 시체는 버렸다. 시체가 여러 날 동안 물가에 떠올라도 물고기나 새들이 뜯어먹지 않았다. 전 부호장 필인(弼仁) 등이 몰래 관을 마련해 물가에 묻어 주었다. 이의민은 스스로 공을 내세워 대장군(大將軍:종3품) 벼슬을 받았다.”(『고려사』 권128 이의민 열전)
의종 허리 꺾어 곤원사 연못에 던져
그러나 의종 시해의 죄과는 그를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아넣고, 발목을 잡는 족쇄가 된다. 1179년(명종9) 정중부를 제거한 무신 경대승(慶大升)은 왕정 체제를 부활하려 했다. 그러면서 국왕을 시해한 이의민을 제거해야 할 첫 번째 인물로 규정한다. 이의민은 1181년 경주로 피신한다. 국왕은 그의 반란을 염려해 벼슬을 주고 귀경을 권유한다. 1184년 경대승이 병사한 것을 계기로 재상이 되어 최고 권력자가 된다. 이의민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1193년(명종23) 경주 인근 운문사(雲門寺:경북 청도군 소재)의 김사미(金沙彌)와 초전(草田:경남 밀양시)의 효심(孝心)이 봉기하자 사령관 전존걸(全存傑)은 장군 이지순(李至純) 등을 거느리고 진압에 나섰다. 이의민의 아들 이지순은 반적들에게 몰래 정보를 주고 의복과 식량 등을 보냈다. 반적들도 금은보화를 그에게 뇌물로 보냈다. 이 때문에 진압군은 이길 수 없었다. 이 사실을 안 사령관 전존걸은 ‘만약 법으로 이지순을 처벌하면 그 아비(이의민)가 반드시 나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적이 더욱 기세를 떨쳐 아군이 패배할 것이다. 패배의 죄를 누가 지겠는가?’라고 분하게 여겼다. 마침내 그는 약을 마시고 자결했다.(『고려사』 권128 이의민 열전)
이의민의 아들인 이지순의 단순한 탐욕이 아니었다. 이의민이 반군과 내통하여 새 왕조를 건국하려는 야망을 품었던 것이다.
“이의민은 일찍이 붉은 무지개가 두 겨드랑이 사이에서 일어나는 꿈을 꾼 후 대망을 품었다. 또한 용의 자손(고려 왕실을 뜻한)은 12대로 끝나고 다시 십팔자(十八子)가 나타난다는 옛 예언을 듣고, 십팔자는 이(李)씨를 뜻한 말이란 사실도 알았다. 이로써 그는 왕이 되려는 헛된 야망을 품고 탐욕스러운 마음을 억누르고 명사들을 등용시켜 자신도 어느 정도 명성을 얻었다. 경주 출신인 그는 신라를 부흥시키겠다는 뜻을 몰래 가지고 반적 김사미·효심 등과 내통했다. 반적들도 엄청난 재물을 바쳤다.” (『고려사』 권128 이의민 열전)
이의민은 기존 질서를 부정하고 새로운 시대를 갈망한 유일한 무신 권력자였다. 국왕과 관료 중심의 왕정체제에 기생하여 경제·군사·인사권을 독점해 달콤한 권력에 안주하려 한 정중부·경대승·최충헌 등의 무신 권력자와는 다른 유형의 인간이었다. 김사미와 효심의 봉기가 진압된 후인 1196년(명종26) 4월 이의민은 냉정한 권력자이자 또 다른 야심가 최충헌(崔忠獻)에 의해 제거된다.
“적신 이의민은 잔인한 성품으로 윗사람을 함부로 대하고 아랫사람을 업신여기고 임금의 자리마저 흔들려 했습니다. 그 때문에 재앙이 불꽃처럼 치솟고 백성들은 편안하게 살아갈 수 없었습니다. 이에 신들이 폐하의 신령스러운 위엄을 빌려 적신들을 단번에 쓸어 없애버렸습니다. 폐하께서는 낡은 제도를 혁파하고 새 정치를 펼치기 바랍니다. 오직 태조께서 가르치신 전범(典範:훈요십조)을 준수하여 중흥의 길을 밝게 여시기 바랍니다.”(『고려사』 권129 최충헌 열전)
최충헌은 단순한 칼잡이가 아니라 정치적으로 노회한 인물이었다. 새 왕조가 아니라 태조 왕건의 고려왕조를 연장시키겠다는 현실주의 노선을 표방했다. 이는 이의민 제거의 명분일 뿐만 아니라 국왕과 관료집단의 지지를 얻어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데 더 없이 좋은 명분이었다.
이의민 실각하자 경주서 신라부흥운동
최충헌의 집안은 부친과 외조부 모두 상장군 출신인 무반 가문이었다. 그 덕에 그는 과거를 거치지 않고 음서의 혜택으로 관료가 되었다. 이의민과는 신분이 달랐다. 무신정변으로 무신이 득세하자 자신의 출세에 유리한 무반으로 관직을 바꾼다. 1174년 서경에서 일어난 조위총의 난을 진압해 별장(정7품 벼슬)으로 승진한 후 안동부사(副使)와 안렴사를 거쳐 행정 경험을 쌓았다. 이의민의 미움을 받아 관리생활을 포기하다, 1193년 장군(정4품)에 임명되어 다시 정계에 등장한 후 3년 만에 이의민을 제거하고 최고 권력자가 된다. 이의민이 제거된 후유증은 1202년(신종5) 11월 경주의 신라부흥운동으로 나타났다. 이의민 제거 후 최충헌이 경주에 있던 이의민의 삼족(친족·외족·처족)을 살육한 데 대한 반발로부터 시작되었다.
“경주 사람이 신라 부흥운동을 꾀하여 몰래 배원우를 (전라도) 고부군에 유배된 전 장군 석성주에게 보내 ‘고려 왕업은 거의 다 되었다. 신라가 반드시 다시 일어날 것이다. 그대를 왕으로 삼아 사평도(沙平渡:한강)로써 경계를 삼으려 한다’ 하면서 그를 꾀었다.”(『고려사절요』 권14 신종 5년 11월)
최충헌은 1204년 이 난을 진압한다. 새 왕조를 건설하려 한 이의민의 꿈은 이로써 좌절된다. 최충헌은 아들에서 증손자까지 ‘이(怡)-항(沆)-의(誼)’로 이어지는 62년간(1196∼1258년)의 최씨 정권을 열었다. 그 비결은 변혁을 바라지 않은 국왕과 관료집단의 여망을 정확하게 꿰뚫은 현실주의 정치이념이었다. 그는 이의민과는 다른 정치이념으로 정권을 장기간 유지할 수 있었다
- 중앙선데이 | 박종기 국민대 교수 | 제348호 | 2013.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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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문에서 바라본 강화산성. 1232년 강화 천도 당시 축조된 후 여러 차례 보수되었다. 인천시 강화군 강화읍 소재. 조용철 기자 |
무신정권의 역설 … 정권 지키려 과거 급제자 대폭 증원 |
이규보와 강화 천도
고려의 최고 문장가 이규보(李奎報ㆍ1168∼1241년)는 37세 되던 해(1204년) 재상 최선(崔詵)에게 벼슬자리를 얻으려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선비가 벼슬을 하는 것은 구차하게 일신의 영달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배운 것을 정사에 반영하여 나라와 백성을 구하는 길을 찾고 왕실에 힘을 보태 길이 이름을 남기고자 합니다. …인생은 백세라지만 칠십을 사는 사람이 드뭅니다. 삼십에 벼슬에 오르더라도 오히려 늦다고 하는데, 제 나이 지금 삼십칠 세입니다. 어릴 때부터 쇠약하고 병이 많아 삼십사 세에 흰 털이 보이더니 뽑아도 다시 나기를 그치지 않아 지금은 반백입니다.” (『동국이상국집』권26 재상 최선에게 올리는 글) 23세 때(1190년) 과거에 합격했지만 14년 동안 백수로 지내다 보니 머리조차 반백(半白)이 되었다는 구차한 얘기도 담겨 있지만, 벼슬자리 하나 얻으려는 그의 절박한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 이후에도 이규보는 4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다른 재상에게도 같은 취지의 편지를 썼다.
“예전엔 과거에 합격하면 바로 지방관에 임명되고, 늦더라도 3~4년 안에 다 임명 되었습니다. 요즈음 문관들이 올바르지 않은 방법으로 빨리 진출하는 사람이 많고, 지방관청이 늘지 않아 마냥 기다리기만 하는 사람은 거의 임명되지 못한 채 밀려 30년 혹은 28, 29년이 되도록 임명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동국이상국집』 권26 조태위(趙太尉)에게 올리는 글)
이 글에서 이규보는 자기처럼 청탁을 하지 않은 채 마냥 기다리다간 30년을 넘겨도 발령을 받지 못한 경우도 있다고 말한다. ‘18년 백수’의 이규보가 왜 이토록 청탁의 편지를 썼는지 이해되는 대목이다. 무신정권 당시 과거 합격자들의 일반적인 처지가 이규보와 비슷했음은 다음의 통계 자료가 뒷받침한다.
100년간 합격자, 전체의 33%인 2229명
고려 500년 동안 과거 합격자(최종 시험인 예부시 합격자)는 현재 확인된 바로는 6735명이다. 무신정권 100년간 합격자는 전체의 33%인 2229명이나 된다. 기간을 감안할 때 산술적으로 20% 정도가 정상일 것이다. 과거와 별 인연이 없어 보이는 무신의 시대인 점을 감안하면 그 이하라 해도 이상하지 않다.
그런데 전체 합격자의 33%가 이때 배출된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이 기간에 1회 평균 선발인원은 34.9명(전체 평균 27.7명)이었고, 시험간격은 평균 1.4년(전체 평균 1.7년)으로, 무신정권 때 더 자주 과거를 치르고, 더 많이 뽑았다는 얘기다. 합격자 숫자가 많아지면서 관직 대기자 숫자는 1205년(희종1) 452.5명, 1210년(희종6) 461.1명, 1215년(고종2) 525.8명으로 늘어난다 (소수점은 평균사망률 적용 때문). 고려왕조 건국 후 가장 심한 인사 적체 현상이 생긴 셈이다 (허흥식, 『고려 과거제도사 연구』, 1981년).
왜 무신 권력자들은 과거를 자주 치르고, 시험 때마다 합격자 수를 늘렸을까? 그 이유는 과거 지망생들에게 희망을 주어 정권에 대한 불만을 해소하려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지만 합격의 기쁨은 잠깐이었다. 관리가 되려면 또 다른 관문인 ‘천거’를 거쳐야 했다. 이규보가 요로에 자신을 관리로 추천해 달라는 편지를 쓴 것은 이 때문이다. 요직에 있던 관리들은 정권에 충성을 다할 인물을 이리저리 따져본 다음 최고 권력자에게 천거했다. 과거제 위에 천거제가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무신정권은 천거를 통해 정권에 철저하게 충성하는 자를 가려내었다. 정권에 충성을 다하는 인물이 바로 무신 권력자가 바라는 관료상이었다. 그래서 천거야말로 관리가 되는 가장 쉽고 빠른 길이었다. 그러나 천거는 쉽게 이뤄지지 않았다. 최고 권력자 최충헌은 이규보를 세 번이나 만나 그의 자질을 시험한다.
첫 번째는 1199년(신종2) 5월이다. 이때 최충헌은 집 마당에 석류꽃이 활짝 피자 당대 최고의 시인인 이인로(李仁老)·함순(咸淳)과 함께 이규보를 불러 시를 짓게 했다. 그의 시재(詩才)를 눈여겨본 후 다음 달 전주목사를 보좌하는 속관으로 임명한다. 하지만 이규보는 1년 만에 목사와의 불화로 그만둔다.
1202년(신종5) 12월 경주에서 신라부흥운동이 일어나 각종 문서를 작성할 관원을 모집했으나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그러자 이규보가 자원해 진압군의 일원으로 주요 산천에서 반란을 진압할 제문(祭文) 작성을 전담했다. 1204년 반란을 진압하고 개선했으나 그는 관리로 임명되지 못했다. 천거가 없이는 험한 싸움터를 아무리 누벼도 소용이 없는 일이었다. 이에 실망한 그는 “이번 싸움에 세운 공이 누가 제일이냐, 지금도 지휘한 사람은 기억조차 않는다네” (『동국이상국집』 연보)라며 서운한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두 번째 기회가 찾아왔다. 1207년(희종3) 최충헌은 당대 문사인 이인로 등과 함께 이규보를 초대하여 그가 새로 지은 모정(茅亭ㆍ지붕을 띠로 덮은 정자)의 기문(記文)을 짓게 했다. 이때 이규보는 1등으로 뽑힌다. 최충헌은 이규보를 임시직인 직한림원(直翰林院)에 임명했다가 이듬해 비로소 정식 관원으로 임명한다. 그의 나이 41세였다. 그는 곧 뛰어난 문재(文才)를 발휘하기 시작한다. 특히 최충헌의 아들 최이(崔怡ㆍ1219∼1249년 집권)의 눈에 들었다.
세 번째 기회는 최이가 마련한다. 1213년(강종2) 이규보의 나이 46세 때 최이는 다시 최충헌에게 그를 천거한다. 최충헌은 그의 집 마당에 노니는 공작에 대해 시를 짓게 했다. 이규보의 시를 보고 최충헌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는 단숨에 7품으로 승진한다. 비로소 최씨 정권 최고의 문사로 활약할 길이 활짝 열린 것이다.
동기생 유승단, 천도 반대하다 의문사
| | | 강화 천도 후 축조된 고려 궁궐 터(북문 아래 소재). 조용철 기자 |
고구려의 주몽을 노래한 유명한 서사시 ‘동명왕편’은 이규보가 과거에 합격한 지 3년이 지난 1193년에 지었다. 26세 때이다. 이규보는 과거에 합격한 20대 시절 이미 개경에서 문재(文才)를 떨쳤다. 그렇지만 쉽게 관료가 될 수 없었다. 그러다 최고 권력자의 천거를 얻어 관리가 될 수 있었다. 그렇게 발탁된 그가 최씨 정권에 충성을 바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1231년 8월 몽골군이 고려를 침입한다. 최고 권력자 최이는 1232년(고종19) 6월 마침내 200년 도읍지 개경을 버리고 강화도에 천도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반대도 만만치 않았다. 그 선봉에 선 이가 유승단(兪升旦ㆍ?∼1232년)이다. 그는 이규보와 함께 1190년(명종20) 과거에 합격한 동기생이다. 두 사람은 당시 고려를 대표하는 최고의 문인이자 지식인이었다. 유명한 고려가요 ‘한림별곡(翰林別曲)’에 당대 최고의 문장가를 품평한 기록이 있다. ‘고문(古文)은 유승단, 빨리 글을 짓는 주필(走筆)은 이규보가 각각 최고’라 했다. 이규보는 자신이 지은 시 뭉치를 유승단에게 보내 윤문을 부탁할 정도로 둘 사이는 절친한 문우(文友)이기도 했다. 그러나 유승단은 강화도 천도에 강력하게 반대한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 섬김은 당연한 일입니다. 예로써 섬기고 믿음으로써 사귀면, 저들은 무슨 명분으로 매양 우리를 괴롭히겠습니까? 성곽을 버리고 종묘와 사직을 돌보지 않은 채 섬으로 도망하여 구차스럽게 세월을 끄는 동안 변방의 백성과 장정들은 적의 칼날에 다 죽고 노약자들은 노예와 포로가 될 것이니, 천도는 국가의 장구한 계책이 아닙니다.”(『고려사』 권102 유승단 열전)
유승단이 천도에 반대한 것은 태자 때부터 모셔온 고종의 뜻과 무관하지 않다. 고종은 천도 후 한 달이 지나 강화도에 갈 정도로 천도에 미온적이었다. 그가 일찍 재상이 된 것도 고종의 후광이었다. 천도 두 달 후인 8월 유승단은 사망하는데, 그의 사망 역시 예사롭지 않다. 민심도 천도에 대해 냉담했다. 당시 역사가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국가가 태평한 지 이미 오래 되어 지금 개경은 10만 호나 되었고, 단청한 좋은 집들이 즐비하며, 사람들도 자신의 거처를 편안하게 여기고 천도를 곤란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최이를 두려워하여 감히 한 말도 하는 자가 없었다.” (『고려사절요』 권18 고종 19년 6월조)
천거제 활용해 무신정권 100년간 유지
이규보는 천도를 강행해 정권을 유지하려는 권력자 최이의 의중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는 천도에 찬성하는 글을 올린다.
“도읍을 옮기는 일은 하늘로 오르기만큼 어려운 일, 마치 공을 굴리듯 하루아침에 옮겨왔네. 천도 계획을 서두르지 않았으면, 우리 삼한은 이미 오랑캐의 땅이 되었을 것일세. 쇠로 만든 듯이 크고 단단한 성과 그 주위를 둘러싼 물결, 그 공력을 비교하자면 어느 것이 더 나을까? 천 만의 오랑캐 기마병이 새처럼 날아온다 해도, 눈앞의 푸른 물결을 건널 수 없으리.” (『동국이상국집』 권18)
이규보는 바다에 둘러싸인 천연의 요새인 강화도로 천도하지 않았다면 삼한은 벌써 오랑캐의 땅이 되었을 것이라며 천도를 옹호했다. 천도에 대한 이규보의 진심은 알 길이 없지만, 최이의 천거로 최씨 정권의 문객이 된 그로서는 천도 반대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이규보는 천도 이듬해인 1233년 재상이 된다. 초고속 승진이다. 이후 그는 당대 최고의 문장가로서 몽골에 보내는 대부분의 외교문서를 직접 작성할 정도로 최씨 정권의 철저한 이데올로그가 된다. 왜 무신권력자가 천거제를 통해 관료를 충원했는지 알려주는 좋은 사례이다. 이러한 인사정책은 무신정권이 100년이나 유지된 원인의 하나로 작용했다.
- 중앙선데이 | 박종기 국민대 교수 | 제349호 | 2013.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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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1614년)에 실린 ‘김천이 어머니 몸값을 치르다’의 그림과 글. 그림은 포로(오른쪽 하단), 상봉(오른쪽 중단), 몸값 치르기(맨 위), 장례(왼쪽 중단)로 돼 있다. |
몽골군 포로 된 백성 한 해 20만 … 사망자는 그 이상 |
전쟁과 민초(民草)
1231년 1차 몽골군의 고려 침입 때 구주(龜州)성은 최대의 격전지였다. 이 전투의 고려군 지휘자는 서북면[평안도]병마사 박서(朴犀)였다. 그는 한 달간 계속된 전투에서 몽골군의 구주성 점령을 저지해 영웅이 된다. 당시 생생한 전투 장면이 『고려사』에 기록돼 있다.
몽골군이 쇠가죽으로 감싼 사다리 수레 속에 군사를 감춰 성 밑으로 접근해 굴을 판 다음 성 안으로 들어오려 했다. 박서는 굴 속으로 쇳물을 부어 몽골군을 막고, 썩은 이엉에 불을 붙여 몽골군의 수레를 불태워 쫓아냈다. 몽골군이 사람 기름에 불을 붙여 공격하자 박서는 진흙에 물을 부어 불길을 잠재웠다. 몽골군이 다시 건초에 불을 붙여 공격해오자 이번에는 물을 부어 불길을 잡았다. 점령에 실패한 몽골군은 구주성을 우회해 개경을 공격하고 고려 왕조의 항복을 받아낸다. 몽골의 압력을 받아 고려 왕조는 사신을 구주성에 보내 항복을 권유했으나 박서는 응하지 않았다. 국왕이 나서 항복을 권유하자 박서는 어쩔 수 없이 항복했다. 몽골은 다시 박서의 처단을 요구했다. 무신 권력가 최이(崔怡)는 박서를 고향으로 도망치게 했다. 이 전투에 참여한 70여 세의 몽골군 노(老)장수는 “내가 20세부터 천하의 수많은 성을 공격했으나 이같이 오래 버티며 항복하지 않은 장수는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고려사』 권103 박서 열전). 박서는 이 전투를 계기로 백성들의 추앙을 받는 영웅이 된다.
지배자들은 백성들에게 희생과 충성심을 이끌어내기 위해 새로운 영웅을 만든다. 영웅은 전쟁을 통해 화려하게 무대 위로 등장한다. 그렇지만 전쟁으로 고통받은 수많은 민초들이 그 무대를 떠받치고 있다는 사실을 잊을 때가 많다. 전쟁의 고통을 겪은 민초들의 얘기 역시 전쟁을 막고 평화를 누리기 위한 역사 서술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더욱이 고려 후기에는 삼국부흥운동을 비롯해 수많은 하층민의 봉기, 삼별초 항쟁, 몽골군과의 전투 등 수많은 내란과 전쟁을 겪었지만, 그에 관해 전해지는 민초들의 얘기는 다음의 두 개 기록에 불과할 정도로 간략하다.
원나라 끌려가 종살이하던 모친 구한 김천
| | | 권금성(權金城:속초의 외설악 소재). 1353년 몽골군 침입을 막기 위해 쌓았다. [한국학중앙연구원] |
명주(溟州:강릉) 호장(戶長:향리 우두머리)인 김천(金遷)의 어머니와 동생 덕린(德麟)은 몽골군의 포로가 돼 만주 요양(遼陽:지금 심양)으로 끌려가 각각 몽골 군졸인 요좌(要左)와 천노(天老)의 종이 된다. 김천의 나이 15세 때이다.
14년 후 원나라에서 돌아온 백호(百戶:당시 하급 장교) 습성(習成)이란 자로부터 김천은 어머니와 동생의 소식을 듣는다. ‘나는 살아 있고, 원나라에서 종이 되어 있다. 굶주려도 먹지 못하고 추워도 입지 못한 채 낮에는 밭을 매고 밤에는 방아를 찧는 등 갖은 고생을 하고 있다’는 어머니의 편지를 받은 것이다. 세상을 떠난 줄 알고 제사를 지내오던 김천은 빚을 내어 몸값을 치를 은(銀)을 마련한다. 개경에 가서 국왕이 원나라로 가는 편에 따라가기를 요청했으나 허락받지 못한다. 그는 6년 동안 개경에 머물면서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한다. 어느 날 고향에서 알던 승려를 만나 군인인 그의 동생이 만주 요양으로 간다는 얘기를 듣고 겨우 허락을 받아 어머니가 있는 곳으로 간다. 군졸 요좌의 집에 이르자 한 할머니가 절을 하면서 말했다.
“나는 명주 호장 김자릉의 딸이다. 형제인 김용문은 과거에 급제했고, 나는 호장 김종연에게 시집가서 해장(海莊:김천)과 덕린(德麟)이란 아들 둘을 낳았다. 내가 이곳에 온 지 이미 19년이 되었고, 둘째 아들도 이웃의 종으로 있다.”
죽은 줄 알았던 어머니를 20년 만에야 찾은 것이다. 주인 요좌에게 애걸하여 은 55냥으로 어머니의 몸값을 치렀다. 돈이 부족해 동생은 바로 데려올 수 없었다. 홀로 남은 동생은 ‘만일 하늘이 복을 내리면 반드시 서로 만날 때가 있을 것입니다’라면서 어머니와 형을 전송했다. 모자는 서로 안고 울었다. 그때 고려 재상 김방경(金方慶)이 귀국길에 이 소식을 듣고 모자에게 증명서를 만들어줘 공로(公路)를 통해 귀국하게 했다. 6년 뒤 김천은 86냥의 몸값을 치르고 동생도 데려왔다 (이상 『고려사』 권121 김천 열전).
김천의 어머니와 동생은 고종(1214∼1259년 재위) 말년 포로가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1253년(고종40) 10월 몽골군이 양주(襄州:강원도 양양)를 함락한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그 인근의 명주(강릉)도 이때 공격을 받아 김천의 어머니 등도 몽골군의 포로가 되었다. 김천의 어머니가 포로가 될 당시 고려는 전쟁으로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몽골과의 30년 전쟁에서 최대의 인명 피해를 입은 해가 1254년(고종41)이다. 이 해 원나라에 포로로 끌려간 인원이 약 20만7000명이나 된다. 사망자는 더 많았다고 한다. 당시 고려 인구는 500만 명 안팎으로 추정된다.
“이 해에 몽골의 군사에게 사로잡힌 남자와 여자는 무려 20만6800여 명이다. 살육된 사람의 숫자는 헤아릴 수 없다. 몽골군이 지나간 마을은 모두 잿더미가 되었다. 몽골의 병난이 있는 이래 금년처럼 심한 적은 없었다.” (『고려사』 권24 고종 41년 조)
원나라는 고려인 포로들을 통치하기 위해 1296년(충렬왕22) 심양에 고려군민총관부(高麗軍民總管府)를 설치한다. 당시 심양왕(瀋陽王)이란 책임자를 임명했는데, 고려 국왕과 같은 지위를 부여했다. 만주의 심양 지역에는 그만큼 고려인이 많이 거주했다.
김천의 집안은 대대로 강릉의 지방행정을 맡아 온 토착 향리 출신이다. 김천의 부친과 외조부는 모두 향리의 최상층인 호장이었고 삼촌은 과거에 합격한 진사였다. 호장층은 세습 계층이다. 따라서 김천의 집안은 강릉에 오랫동안 뿌리를 내리고 살아온 유력 계층이었다. 또한 상당한 경제력이 있어 모친과 동생의 몸값을 치르고 귀국시킬 수 있었다. 포로 중엔 그렇지 못한 민초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포로로 이국으로 끌려가 노비로서 비참한 일생을 마칠 수밖에 없었다. 비록 20년 동안 종살이를 했지만 김천의 어머니와 동생이 귀국한 것은 행운이라 할 수 있다.
전란에 친부와 시부 · 남편까지 잃은 조씨
고려 말 유학자 이곡(李穀:1298∼1351년)은 1341년 ‘절부조씨전(節婦曺氏傳)’ (『가정집』 권1)이란 전기를 지었다. 그는 전쟁고아와 미망인인 조씨의 삶을 ‘곧게 살아온 여인[節婦]’이라고 압축적으로 표현했다. 이곡은 조씨의 집을 구입했는데, 조씨의 손녀사위가 자신과 같은 해 과거에 합격한 동년(同年)이라는 인연으로 이후 조씨와 자주 만나 얘기를 나누면서 그녀의 기구한 삶을 기록할 수 있었다. 조씨의 삶 속에는 몽골과의 전쟁 이후 고려사회가 겪은 여러 전쟁의 흔적이 그대로 담겨있다.
1270년(원종11) 6월 고려 정부가 강화에서 개경으로 환도하기로 결정하자 이에 반발한 무신들이 반기를 든 삼별초의 난이 일어난다. 이때 6세인 조씨는 군인인 아버지 조자비(曺子丕)와 함께 삼별초군에 체포되어 삼별초군을 따라 진도로 남하한다. 남하 도중 아버지 조자비는 딸을 데리고 탈출하여 개경으로 귀환한다. 조자비는 다시 고려군에 편성되어 1271년(원종13) 겨울 삼별초군을 정벌하러 탐라(제주도)에 갔다가 전사한다.
아버지를 잃은 조씨는 13세 되던 해(1278년) 대위(隊尉:정9품) 벼슬의 군인 한보(韓甫)에게 출가했다. 조씨의 시아버지도 군인이었다. 결혼 3년 만인 1281년(충렬왕7) 여름 조씨의 시아버지는 몽골·고려 연합군의 2차 일본 원정에 참전했다가 전사한다. 1290년(충렬왕16) 12월 원나라 사람 내안(乃顔)이 만주에서 세조 쿠빌라이에 반란을 일으킨다. 내안의 휘하 장수 합단(哈丹)이 원나라 군사에 쫓겨 고려로 침입한다. 충렬왕이 강화도로 피란을 갈 정도로 상황은 위급했다. 원나라는 군사 1만3000을 보내 고려군과 함께 합단을 공격하여 이듬해 이들을 소탕한다. 조씨의 남편 한보는 1291년(충렬왕17) 여름 합단의 군대와 전투를 벌이다가 전사한다. 조씨가 27세 되던 해이다. 조씨는 7세 되던 해에 아버지를 잃어 고아가 되었고, 출가 후 전쟁터에서 시아버지와 남편까지 잃었다. 이후 77세까지 50년간 과부로서 홀로 지낸다.
과부가 된 조씨는 언니의 집에서 기숙한다. 그러다 자신의 딸이 출가하자 딸의 집에 몸을 의탁한다. 그런데 1남1녀를 낳은 딸마저 일찍 죽어 손녀에게 의탁해서 지금까지 살고 있다. 이곡은 조씨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조씨는 50년을 과부로 지내면서 밤낮으로 길쌈과 바느질 같은 부녀자의 일을 열심히 했다. 그 덕에 딸과 손자·손녀를 먹이고 입히며 살아갈 터전을 잃지 않게 하였다. 또한 손님을 접대하고 혼례 ㆍ 상례와 제례의 비용을 손수 마련하였다. 지금 77세나 되었는데도 아직 탈 없이 건강을 유지하고 있다. 거기에다 총명하고 지혜로워 적에게 사로잡힐 당시의 상황이라든가 근래 정치의 잘잘못이라든가 사대부 집안의 내력 등을 이야기할 땐 하나도 빠뜨리는 일이 없이 모두 기억하고 있다.”
이곡은 50년 동안 ‘부절’을 지키면서 꿋꿋한 삶을 살아온 조씨를 기리려고 이 전기를 지었다. 그러나 이를 통해 전쟁으로 아버지와 시아버지 · 남편을 차례로 잃은 후 전쟁고아와 미망인의 고단한 삶을 살아온 민초의 삶을 읽을 수 있다. 수많은 내란과 전쟁으로 얼룩진 고려 후기사회를 살았던 민초들의 얘기를 더 이상 찾을 수 없음은 유감이다.
- 중앙선데이 | 박종기 국민대 교수 | 제350호 | 2013.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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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남 천안의 광덕사 앞에 있는 호두(胡桃) 시식비(始植碑 오른쪽 아래)와 400여 년 된 호두나무. 유청신의 경제적 기반이 천안이어서 이곳에 처음 호두나무를 재배한 것으로 추정된다. 조용철 |
하층민들 신분 상승 봇물 … 재상 반열 오르기도 |
元나라 간섭기와 민초(民草)
일제 식민지 시기의 조선인 역사가 안확(安廓)은 『조선문명사』(1923년)에서 고려의 ‘귀족정치시대’를 움직인 세 집단은 승려, 무신, 폐신(嬖臣)이라고 주장했다. 여기서 폐신이란 원나라 간섭기에 고려정치를 주도한 세력을 말한다. ‘폐신’은 국왕의 총애를 받는 신하라는 뜻이며, 폐행(嬖倖)이라 부른다. 이들의 행적을 따로 기록한 것이 『고려사』 폐행 열전(권123)이다.
폐행 열전엔 주로 원 간섭기에 활동한 55명의 인물이 실려 있다. 출신이 밝혀진 인물 가운데 문·무반 출신 관료는 5명에 불과하다. 이들을 제외하면 평민(15명), 천민(10명), 상인(2명), 승려(3명), 외국인(7명) 등 미천한 신분이 많다. 사회 밑바닥의 민초(民草)들이 원 간섭기에 국왕 측근이 되거나 지배층으로 진출한 사실은 신분제 사회에서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원 간섭기를 우리 역사에서 수치 스러운 역사의 하나로 여긴 때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미 90년 전에 민초들의 지배층 진출에 주목한 역사가 안확(安廓)의 안목은 실로 신선하고 놀랍다. 억압과 규제만 받아온 민초들에게 원 간섭기는 기회와 희망의 시기였다.
고려 건국 때 반기 든 지역 주민 차별
민초들의 신분 상승을 주도한 계층은 부곡인(部曲人)이다. 이들은 신분상 양인이지만 군현(郡縣)에 거주한 일반 농민에 비해 차별을 받아 사실상 노비와 비슷한 처지였다. 한마디로 신분과 현실의 처지에서 양인과 천인의 두 경계를 넘나든 ‘경계인(境界人)’이었다. 이들의 일부가 각종 사회적 규제와 통념을 극복하고 지배층으로 편입된 사실이 역사 기록에 나타나고 있다.
“박구(朴球)는 울주(蔚州:울산) 소속의 부곡인이다. 조상은 부자 상인[富商]이었다. 그 역시 큰 부자[요재(饒財)]로 알려졌다. 원종(元宗) 때 상장군(무반 최고직:정3품)이 되었다. …원나라 세조가 일본을 정벌할 때 고려군 부사령관으로, 사령관 김방경과 함께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그 후 재상인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종2품)가 되어 합포(지금의 마산)를 지켰다. 찬성사(贊成事:정2품)의 관직에 있다가 죽었다. 박구는 다른 기능은 없고 전쟁에서 공을 세워 귀하게 되었다.” (『고려사』 권104 박구 열전)
박구(?∼1289년)가 원종(1259∼1274년 재위) 때 무반 최고직에 오른 것으로 보아, 고종(高宗:1214∼1259년 재위) 때 처음 군인이 되었을 것이다. 당시 몽골과의 전쟁에서 공을 세워 출세의 길로 들어섰다는 얘기다. 1274년(충렬왕 즉위연도) 원나라 출신 공주(충렬왕비)가 고려로 올 때 그는 공주의 호위 군사를 맡을 정도로 충렬왕의 측근이었다. 1281년 5월 고려군 부사령관으로 제2차 일본 정벌에 참전했다. 부곡인이 재상 자리까지 오른 것은 박구가 처음이다.
부곡인은 향(鄕), 부곡(部曲), 소(所), 장(莊), 처(處)라는 특수 행정구역에 거주하던 주민이다. 이 중 향과 부곡은 통일신라 때 처음 생겨난 행정구역이다. 인구 · 토지 규모가 작아 군이나 현이 되지 못한 지역을 주변의 군 · 현에 소속시킨 소규모 행정구역이다.
“지난 왕조(고려) 때 5도와 양계(함경도 · 평안도)에 있던 역과 진에서 역을 부담한 사람[驛子와 津尺]과 부곡인은 모두 태조 때 반기를 든 사람들이다. 고려 왕조는 이들에게 천하고 힘든 일(賤役)을 맡게 했다.” (『조선왕조실록』 권1 태조 원년 8월 己巳일 조)
위 기록과 같이 고려 정부는 후삼국 통합전쟁 때 왕조에 반기를 든 주민을 향 · 부곡 지역에 소속시키거나, 소(所) · 장(莊) · 처(處)라는 특수 행정구역을 만들어 일반 농민들과 차별하고 특별한 역(役)을 지게 했다. 향 · 부곡의 주민은 국가 토지 경작, 소 주민은 수공업 생산, 장·처 주민은 왕실·사원의 토지를 경작하는 역을 각각 부담했다. 부곡인은 일반 조세 외에 이런 역을 추가로 부담해 사회경제적으로 어려운 처지였다. 게다가 다른 곳으로 허가 없이 거주지를 이전할 수 없으며, 대대로 특정의 역을 세습해야 했다. 그들은 관리가 되더라도 고위직에 오를 수 없었다.
부곡인이 이런 규제와 제약을 벗어나기 시작한 것은 무신정권 때다. 무신 권력자들이 불법으로 남의 토지를 빼앗고 공물을 지나치게 많이 수탈하자, 이를 견디지 못한 하층민이 저항하기 시작한다. 이런 저항운동을 주도한 계층이 부곡인이다. 최씨 정권의 권력자 최의(崔?)가 1258년 피살되고, 이듬해 몽골과 강화(講和)를 맺는다. 몽골의 압력으로 1270년 개경으로 환도(還都)했지만, 그에 반발한 삼별초의 난은 1273년에야 진압됐다. 이후 고려는 원의 간섭을 받으면서 정치·사회·경제 분야에서 많은 변화를 겪는다. 이런 현실은 부곡인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었다.
원나라는 고려 국왕 임명권을 장악해 내정을 간섭했다. 고려 국왕과 원나라 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만 국왕이 되었다. 원에서 성장하고 교육을 받은 후 책봉된 국왕은 국내 정치 기반이 취약해, 원나라에서 자신을 보좌한 측근을 중심으로 정사를 펼쳤다. 국왕이 바뀔 때마다 새로운 측근들이 정치를 주도하는 형태의 궁중정치가 유행했다. 이렇게 해서 등장한 지배층이 권문세족(權門勢族)이다. 일본 원정과 내란 진압 등 전쟁을 통해 무공을 세운 사람, 원나라 말에 능통한 역관(譯官), 원나라 왕실의 환관(宦官)이나 공주 집안 사람 등 대체로 4가지 경로를 통해 진출한 인물들이 주류였다. 원 간섭기라는 새로운 시대 변화에 편승해 앞에서 말한 부곡인 박구도 충렬왕의 측근이자 재상이 되었다. 몽골어에 능통한 역관으로 출세한 부곡인도 있었다.
| | | 천안 호두과자’의 원조인 유청신(柳淸臣)의 공적을 기린 비. |
“유청신(柳淸臣)의 처음 이름은 비(庇)다. 장흥부에 소속된 고이(高伊)부곡 출신이다. …나라 제도에 부곡인은 공을 세워도 5품을 넘을 수 없다. 유청신은 몽골어를 잘해 여러 차례 원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일을 잘 처리했다. 이 때문에 충렬왕의 사랑을 받았다. 충렬왕은 특별히 교서를 내려, ‘유청신은 조인규를 따라 힘을 다해 공을 세웠다. 비록 그는 5품에 머물 수밖에 없으나, 그에겐 특별히 3품의 벼슬을 내린다’고 했다. 또 그의 출신지 고이부곡을 고흥(高興)현으로 승격했다.” (『고려사』 권125 유청신 열전)
부곡인은 5품 이상 관직에 오를 수 없었다. 그러나 유청신(?∼1329년)은 일본 원정과 원나라 내안(乃顔)의 반란 때 양국 사이의 통역 업무를 잘 처리한 공을 인정받아 1287년(충렬왕 13) 8월 규정에 없는 대장군(종3품)으로 승진한다. 1297년(충렬왕 23)엔 재상 자리에 오를뿐더러 충선왕의 측근이 돼 원에 있던 충선왕을 대신해 국내 정치를 전담한다.
縣 승격으로 부곡집단 해체 가속화
박구와 유청신이 재상 반열에 오른 것처럼 원 간섭기에 부곡인들을 속박했던 규제는 상당 부분 무력화됐다. 나아가 유청신의 출신지 고이부곡은 고흥현으로 승격되었다. 지배층 진입에 만족하지 않고, 출신지를 현으로 승격시킨 것이다. 박구·유청신과 같이 고위직은 아니지만 원나라에서 환관·군인이 된 부곡인의 출신지가 군현으로 승격되는 현상도 나타난다.
“1335년(충숙왕 4) 원나라에서 온 상호군·안자유 등은 고려 국왕에게 (원나라) 황후의 명령을 전했다. ‘영주(永州:경북 영천) 이지은소(利旨銀所)는 옛날엔 현이었는데, 고을 사람들이 나라 명령을 어겨 현을 없애고, 주민은 은을 세금으로 바치는 은소가 된 지 오래되었다. 이곳 출신 나수(那壽)와 야선불화(也先不花)가 어려서 (원나라) 궁궐에 근무해 공을 세웠으니, 그들 고향을 다시 현으로 승격하라’라고 했다.” (『졸고천백』 권2 영주이지은소승위현비(永州利旨銀所陞爲縣碑))
원나라 환관으로 활약한 나수 등의 요청에 따라 이지은소가 현으로 승격됐는데 이 사실을 기념해 당대 최고 문장가 최해(崔瀣)가 지은 비문이다.
그러면 이들은 왜 부곡 지역을 군현으로 승격시키려 했을까? 현으로 승격되면 이지은소 주민들이 은을 채취해 국가에 바치는 고된 역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부곡의 해체는 국가 수취와 재정 제도의 해체로 이어질 수 있는 큰 변화를 낳았다. 스스로의 신분 변화에 만족하지 않고 부곡인은 출신지를 군현으로 승격시켜 출신지 주민들의 부담을 없애려 했던 것이다. 다음의 기록도 부곡 집단의 해체가 하나의 대세였음을 알려준다.
“충렬왕 때 가야향(加也鄕) 출신으로 군인이 된 김인궤(金仁軌)가 공을 세워 그의 고향이 춘양현(春陽縣)으로 승격되었다. 충선왕 때 경화옹주(敬和翁主)의 고향 덕산(德山)부곡은 재산현(才山縣)이 되었다. 충혜왕 때 환관인 강금강(姜金剛)이 원나라에서 수고한 공으로 그의 고향 퇴관(退串)부곡이 나성현(柰城縣)으로 승격되었다.” (『고려사』 권57 지리2 안동도호부조)
지금의 안동에 소속된 부곡인들이 고려와 원나라에서 군인 · 옹주 · 환관 등으로 출세한 뒤 자신의 출신지를 군현으로 승격시켰다는 기록이다. 부곡인의 신분 변화에서 부곡집단의 해체에 이르는 과정을 잘 말해준다.
이런 변화가 왜 고려 후기에 집중됐던 것일까? 무신정권의 수탈, 부곡인과 하층민의 봉기, 몽골과의 전쟁, 원나라와의 교류 등으로 고려 후기사회는 정치·경제·사회 분야에서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부곡인은 그런 변화에 편승하여 계층 분화를 촉진시켰다. 계층 분화는 군현 승격 이후 부곡지역을 해체하는 현상으로 발전되었다. 왜 우리 역사는 이런 민초들의 역사에 무관심했을까? 원나라의 간섭과 지배층의 움직임에만 눈을 맞추어 역사를 서술했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아래로부터의 변화는 물론 역사의 다양한 모습을 놓치게 된다. 역사 공부의 어려움은 여기에 있다.
- 중앙선데이 | 박종기 국민대 교수 | 제351호 | 2013.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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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취려 묘.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 소재. 14세기 원과의 관계가 호전되자 김취려는 사후 백 년 만에 재평가를 받는다. 조용철 기자 |
“몽골, 시기심 많고 잔인” → “몽골과 형제맹약 뒤 안정” |
元 간섭기의 역사서술
원나라 간섭기에 역사가 이제현(李齊賢·1287∼1367)은 ‘김공행군기’ (金公行軍記:1325년)에서 김취려(金就礪·1172∼1234)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나는 다음과 같이 논한다. 국가의 덕이 쇠하지 않았는데 전란이 있으면 반드시 재주와 지혜가 뛰어난 신하가 나타나 국왕의 쓰임을 받아 시대의 어려움을 구하게 된다. …공(公:김취려)은 멀리 있는 몽골 군사와 교류하고 가까이 있는 적 거란을 공격했다. 몽골과 (형제) 맹약을 맺어 나라의 근본을 순식간에 안정시켰다. 우리 사직의 신령이 재주와 지혜가 뛰어난 신하를 뒤에서 도운 것이 아니겠는가?”(‘김공행군기’)
1218년 몽골군과 연합해 몽골과 형제 맹약을 체결한 주역 김취려를 높이 평가한 글이다. 이 책에는 1216년 고려에 침입한 거란족을 물리친 김취려의 행적이 주로 기록되어 있다. 이제현은 형제맹약을 ‘(전란의 피해를 줄여) 고려 백성에게 큰 도움이 되었고, 고려가 원나라에 세운 커다란 공적’ (『고려사』 권21 충숙왕 10년 1월조)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즉 형제맹약은 두 나라 관계의 시작이자, 당시 백 년간의 역사에서 가장 의미 있는 사건이라고 보았다. 그 속엔 몽골에 대한 우호적인 시선이 담겨 있다. 나아가 몽골전쟁 중 사망해 가리워졌던 김취려 역시 재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형제맹약과 몽골 전쟁을 직접 체험한 한 세기 전의 역사가 이규보(1168∼1241)의 생각은 이제현과 달랐다.
“몽골은 시기심과 잔인함이 막심해 비록 화친을 하더라도 믿지 못합니다. 우리나라가 그들과 좋게 지내는 것은 본의가 아닙니다. 지난 기묘년(1219:고종6) 강동성(江東城:평양 부근)의 형제맹약은 형세가 어쩔 수 없어서 맺은 것입니다.”(『동국이상국집』 권28 동진국에 보낸 편지)
이규보는 시기심이 많고 잔인한 몽골과의 형제맹약을 ‘어쩔 수 없이 맺은 것’이라 했다. 그는 다른 글에서 ‘심하도다, 달단(몽골을 지칭)이 환란을 일으킴이여! 그 잔인하고 흉포한 성품은 이미 말로 다할 수 없고, 심지어 어리석고 엉큼함은 금수(禽獸)보다 심하다’ (『동국이상국집』 권25 ‘대장경판각 군신(君臣) 기고문(祈告文)’)라고 표현했다. 백 년 사이에 몽골에 대한 인식이 왜 이렇게 달라졌을까?
고려, 몽골제국 중 유일하게 국가 유지
1259년 쿠빌라이 집권기(1259∼1294), 최씨 정권 붕괴와 왕정 복고로 몽골과의 전쟁은 종식된다. 이로써 고려와 원나라(1260년 이후 몽골에서 원으로 국호 변경) 사이에 새로운 관계가 전개된다. 1273년 두 나라는 삼별초의 반란을 함께 진압한다. 1274년 충렬왕은 원나라 공주와 혼인하면서 고려는 부마국(駙馬國:사위 나라)이 된다. 두 나라가 함께 두 차례(1274·1281년) 일본을 정벌하면서 긴밀한 관계로 접어든다. 즉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천자-제후국 관계로 바뀐 것이다. 그 대신 고려는 왕조의 정통성을 유지하려 했다.
새로운 관계의 전개는 역사 인식의 변화를 가져왔다. 쿠빌라이 사후 즉위한 원나라 성종은 두 나라가 처음 관계를 맺은 시기를 고려에 묻는다. 고려는 다음과 같이 답변한다.
“(금나라 치하의 거란 출신) 금산(金山) 왕자가 태조 황제(칭기즈칸)의 명령을 듣지 않고, 국호를 ‘대요(大遼)’라 칭하고 자녀와 재물을 약탈하여 고려로 침입했다 쫓겨 강동성에 진을 쳤습니다. 조정(몽골)에서 합진(哈眞)과 찰자(札刺)를 보내 토벌했는데, 눈이 쌓이고 길이 험해 식량이 공급되지 못했습니다. 고왕(高王:고종)이 이를 듣고 조충(趙충)과 김취려를 보내 군사와 식량을 공급하고, 그들을 함께 섬멸했습니다. 이제 76년이 되었습니다.”(『고려사』 권31 충렬왕 20년(1294) 5월)
고려는 거란족을 섬멸한 1218년(고종5)을 두 나라 관계가 시작된 원년으로 보았다. 원나라 무종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지금 천하에서 백성과 사직을 가지고 왕 노릇 하는 국가는 오직 삼한(三韓:고려)뿐이다. (삼한이) 선대(태조 칭기즈칸)에 귀부한 지 거의 백 년이 되었다. 아비가 땅을 일구었고, 자식이 기꺼이 다시 파종을 했다.”(『고려사』 권33 충선왕 2년(1310) 7월조)
1218년 형제맹약 이후 몽골제국의 천하에서 유일하게 고려는 백성과 사직을 유지한 국가라고 했다. 형제맹약은 두 나라가 천자-제후 관계를 맺어 고려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백 년간의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14세기 초 두 나라 지배층이 공유한 역사 인식이었으며, 이후 두 나라 관계는 실제로 어느 때보다 돈독하게 유지되었다. 그럴 경우 형제맹약의 효력을 무력화시킨 1232년 이후 몽골과의 30년 전쟁은 의미 없는 역사가 된다.
원나라의 제후국을 자청한 충선왕
충선왕(忠宣王:1308∼1313년 재위)은 1309년(충선왕1) 7월 죽은 부왕(父王)의 시호(諡號)를 원나라에 요청한다. 이때 부왕 외에 이미 시호를 받은 증조왕(曾祖王) 고종과 조왕(祖王) 원종의 시호까지 이례적으로 요청한다. 1310년(충선2) 7월 원나라는 부왕에게 충렬왕, 고종에게 충헌왕(忠憲王), 원종에게 충경왕(忠敬王)이라는 시호를 고려에 통보한다. 원나라는 고려를 제후국으로 여겨 이렇게 ‘왕’이라는 호칭을 붙였다. 덧붙여 원나라에 충성을 하라는 뜻에서 칭호에 ‘충(忠)’자까지 붙였다. 원나라의 고려 지배가 그만큼 철저하고 강했다는 증거이다.
당시 원나라에 시호를 요청한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라 한다.
“이전에 고려가 송·거란·금의 연호는 사용했지만 역대 국왕의 시호는 모두 종(宗)으로 스스로 칭했다. 원나라를 섬기면서 (천자-제후의) 명분이 더욱 엄했다. 옛날 한(漢)나라 제후들은 모두 한나라로부터 시호를 받았다. 그 까닭에 국왕(충선왕)은 죽은 전왕(충렬왕)의 존호(尊號)를 요청하고, 고종과 원종의 시호까지 추가로 요청했다. 이에 원나라가 조서를 내려 고려의 요구에 따랐다.” (『고려사』 권33 충선왕 2년 7월조)
국왕 시호를 원나라에 요청한 것은 한나라의 관례를 따른 것이라 했다. 즉 충선왕은 천자국 원나라에 대해 제후국으로서 국왕 시호를 요청한 것이다. 시호 요청은 두 나라를 각각 천자-제후국의 공식적인 관계로 받아들인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이제현이 저술한 또 다른 역사서 『충헌왕(忠憲王)세가』 (1342년)에는 1309년 당시 세 국왕이 시호를 받아야 할 공적이 실려 있다. 고종은 몽골과의 형제맹약, 원종은 1259년 세자로서 몽골 쿠빌라이에게 직접 찾아가 강화(講和)를 맺은 사실, 충렬왕은 1274년 몽골 출신 공주와의 혼인 후 두 차례에 걸친 일본 정벌을 수행한 공적이 각각 기록되어 있다.
두 나라 사이에 천자-제후의 새로운 질서가 수립되면서 그에 걸맞은 새로운 역사인식, 즉 형제맹약 이후 백 년의 역사에 대한 재인식이 대두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제현이 저술한 『충헌왕세가』와 『김공행군기』는 그러한 역사인식의 변화를 대변한 상징적인 역사서이다. 두 책은 모두 1218년 형제맹약 이후 백 년간의 관계를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으며, 한편으로 이제현이 살던 당시 백 년의 역사서이다. 그야말로 ‘고려판 현대사’라 할 수 있는 당대사(當代史) 역사서이다. 김부식이 삼국시대 역사인 『삼국사기』(1145년)를, 1451년 정인지가 『고려사』를 편찬한 것처럼 전(前)근대 역사는 지난 왕조의 역사를 서술하는 것이 원칙이다.
이제현이 현실적인 영향력이 큰 당대사를 편찬한 사실은 주목된다. 당대사 연구가 새로운 역사서술 경향으로 대두한 것이다. 형제맹약을 관계의 시작으로 볼 때 가장 큰 걸림돌은 1232년부터 1258년까지의 30년 전쟁에 관한 서술이다. 당대를 살았던 이규보의 생각에서 드러나듯 몽골에 대한 적대적 서술에 대한 수정이 필요했다. 문제가 된 것은 30년 전쟁 당시 재위한 국왕의 역사 『고종실록』이다. 1277년(충렬왕3) 완성된 이 책은 고종의 시호를 원나라에 요청한 시점인 1309년에 다시 편찬된다. 수정의 초점은 당시 전쟁에 대한 평가문제일 것이다.
당대사 연구가 새로운 역사서술로 대두
민지(閔漬)는 충렬왕 재위(1274∼1308) 말년 『세대편년절요』를 편찬하는데, 태조부터 고종·원종까지의 역사가 서술되어 있다. 서술의 초점은 고종 당시 몽골과의 전쟁에 관한 새로운 서술일 것이다. 이제현은 민지의 저술을 토대로 『충헌왕세가』를 저술했으며, 민지의 역사서는 충선왕이 즉위한 1308년 원나라에 보내진다. 이로 볼 때 이들 저서는 몽골에 대한 적대적 서술을 수정한 것이 분명하다.
원나라 역시 전쟁을 전후한 고려의 역사 서술에 관심을 가졌다. 1325년(충숙왕12) 원나라는 칭기즈칸 이래 원나라에 공을 세운 고려 인물에 대한 역사 편찬을 고려에 요구한다. 몽골군과 함께 거란족을 물리치고 형제맹약을 체결한 김취려의 행적을 적은 이제현의 『김공행군기』는 이때 저술된 것이다.
14세기 고려 왕조는 원나라와 수립된 새로운 관계를 발전시켜 나갔다. 이를 위해 몽골과의 30년 전쟁에 대한 재서술 등 가까운 백 년의 역사를 새롭게 조명한 이른바 ‘고려판 현대사’인 당대사 연구를 활성화시키려 한 것이다. 그러한 역사 서술이 현재 전해오는 『고려사』 가운데 원 간섭기 역사 기술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조선 초기에 편찬된 이 책은 이제현의 역사서술을 상당 부분 반영한 것이다. 실제로 원 간섭기 역사는 고려와 원 관계를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고 고려와 몽골의 전쟁에 관한 서술이 풍부하지 않다. 살아 있는 현재를 지나치게 강조하는 일이 과거의 다양한 역사를 오도 또는 말살하는 잘못을 범할 수 있다는 사실은 아직도 유효한 역사의 교훈이다.
- 중앙선데이 | 박종기 국민대 교수 | 제352호 | 2013.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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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천사 10층 석탑. 개풍군 광덕면 광수리에 있었다. 개항기에 일본인에 의해 불법 반출됐다가 반환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다. [중앙포토] |
기 황후가 元 패망 촉발? 궁정 실권자였다는 방증 |
기 황후와 원나라 순제
고려인 출신 기(奇) 황후는 원나라 마지막 황제 순제(順帝:1333∼68년 재위)의 제2비(1340년)를 거쳐 정후(正后:1365년)가 된다. 아들 애유식리달랍(愛猷識理達臘)은 황태자(1353년)로 책봉된다. 기 황후의 부친 기자오(奇子敖)는 제후인 영안왕 (榮安王)에 봉해진다. 그녀의 일족이 원나라 황실의 일원이 된 것은 기 황후가 힘을 쏟은 궁중정치의 결실이다. 그녀는 고려 출신 환관(宦官)들과 결합해 원나라와 대(對)고려 외교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했다.
“고려 여인(※기 황후)이 궁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황실 법도가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이로써 식자(識者)들은 천하에 난이 일어날 것을 알았다.”(『庚申外史』)
“감찰어사 이필이 상소했다. ‘기씨가 황후가 된 후 재변이 자주 일어나고, 하천이 범람하고, 지진이 일어나고, 도적이 번성했다. 음(陰:기 황후)이 성하고 양(陽:순제)이 쇠미한 현상입니다. 기씨를 황후에서 비(妃)로 낮추어야 재변이 없을 것입니다.’ 황제가 듣지 않았다.”(『원사』 본기)
기씨가 정후로 된 지 수년 만에 원나라가 망한다. 이 때문에 위 기록과 같이 그녀는 원나라 쇠망의 책임까지 뒤집어쓴다. 오히려 위 기록은 기 황후가 당시 정치에 깊이 관여하고 있음을 알려주고 있다.
원나라 쇠망의 잘못을 뒤집어 쓴 기 황후
기씨는 어떤 과정을 거쳐 여기에까지 이르렀을까? 기 황후는 원래 원나라에 바쳐진 공녀(貢女) 출신이다. 고려 처녀들이 강제로 징발되는 처참한 모습은 다음의 글에 잘 나타나 있다.
“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고려 사람들은 딸을 낳으면 곧 숨기고, 드러날까 두려워 이웃에게도 알리지 않는다. 원나라 사신이 오면 군인과 관리가 사방에서 집집마다 수색하여 여자를 숨기면 이웃을 잡아가두고 친족까지 잡아들여 나라를 소란케 했다. …한 여자를 얻기 위해 수백 집을 뒤진다. 이러기를 한 해에 한두 번 혹은 2년에 한 번씩 하며, 한 번에 많을 경우 40, 50명을 뽑는다. 뽑힌 여자의 부모와 종족은 밤낮으로 울어 곡소리가 끊기지 아니하고, 떠날 때는 옷자락을 붙잡고 발을 구르며 넘어져서 길을 막고 울부짖다가 슬프고 원통하여 우물에 몸을 던져 죽는 자, 목매어 죽는 자, 근심과 걱정으로 기절하는 자와 피눈물을 쏟아 눈이 먼 자도 있었다.” (『고려사』 권109 이곡 열전)
원나라에 처녀를 바치기 위해 처녀들의 국내 혼인을 금지한 1275년(충렬왕 1)의 기록이 공녀(貢女)에 관한 첫 기록이다. 이후부터 원나라가 망할 때까지 계속된다. 가장 많은 숫자를 보낸 때는 동녀(童女:처녀) 53명과 화자(火者:거세된 환관) 23명을 보낸 1320년(충숙왕 7)이다. 명문가의 처녀를 요구했고, 딸을 숨기거나 바치지 않은 관리들은 유배 같은 처벌을 받았다. 기 황후의 고조부는 최충헌 정권 때 재상을 지냈으며, 아버지도 음서로 관료가 되어 수령을 지냈다. 그녀 역시 공녀의 조건에 들어맞는 명문가 출신이었다.
1333년(충숙왕 복위2) 6월 즉위한 순제는 이해 9월 권력자 연철목아(燕鐵木兒)의 딸 답납실리(答納失里)를 정후(正后)로 맞이한다. 기 황후는 이해 12월 고려 출신 환관 독만질아(禿滿迭兒)의 추천으로 궁녀가 된다. 이후 곧 순제의 눈에 띄어 총애를 받는다. 이 때문에 정후의 질투와 미움을 받는다.
“기씨(祁氏:기황후·祁는 奇와 同音)는 성품이 지혜롭고 영리해(慧.) 황제(※순제)의 총애를 받았다. …황후는 권신(權臣)의 딸이라 교만했고 나이 어린 황제를 얕보았다. 기씨가 황제의 총애를 받는 것을 보고 불평하여 하루 저녁도 거르지 않고 매일 회초리로 그녀를 때렸다. 또 무릎을 꿇게 해 죄를 추궁하고, 그녀의 몸을 불로 지지기도 했다.”(『庚申外史』)
문종(文宗:순제의 삼촌)이 죽자 연철목아는 문종의 아들을 옹립하려 했다. 문종 비 복답실리(卜答失里) 태후의 반대로 순제의 배다른 동생 영종(寧宗)이 즉위 했으나 2개월 만에 죽는다. 연철목아의 딸과 혼인하는 조건으로 순제는 즉위한다. 그러나 순제는 원하지 않은 혼인에다 자신을 얕보는 황후 대신 기 황후에게 더 마음을 쏟았다.
1335년 6월 순제 폐위 역모사건을 주도한 연철목아와 그 아들 당기세 형제가 살해되고, 답납실리 황후도 연루되어 죽임을 당한다. 기 황후에겐 좋은 기회였다. 기 황후를 정후로 맞이하려 한 순제의 뜻과 달리 1338년 3월 원나라 황실과 대대로 혼인해 온 홍길자(弘吉刺) 가문의 백안홀도(伯顔忽都)를 정후로 받아들인다. 대신 1340년 3월 기 황후는 제2 황후로 책봉된다. 그러나 정후 백안홀도는 명목상의 제1 황후에 불과했다.
제2 황후 된 1340년 이후 정국을 요리
기 황후는 이때부터 권력을 주무르기 시작한다. 1346년(충목왕 2) 8월 문종 비 복답실리(卜答失里) 태후(※순제의 숙모)가 순제를 폐하고 아들 연첩고사(燕帖古思)를 즉위시키려고 모의했다는 이유로 모자는 축출된다. 당시 비난의 화살은 기 황후와 그 세력, 즉 기당(祁黨)을 겨냥하고 있었다.
“(祁黨은) 상을 주어야 할 곳에 상을 주지 않고 형벌을 주어야 할 곳에 형을 주지 않아 상벌이 균형을 잃어 기강이 이때부터 크게 무너졌다. 중원의 도적은 이때부터 일어났다.”(『草木子』 권3의 상)
기 황후가 제2 황후로서 실권을 행사한 1340년부터 중국 대륙에선 한족(漢族)의 대규모 반란이 일어난다. 이 반란은 원나라의 멸망과 주원장의 명나라 건국으로 이어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당시 기록은 반란의 원인을 기 황후 일당이 상벌의 원칙을 무너뜨린 문란한 정치 때문이라고 규정한다. 1340년대 기 황후가 제2 황후로서 당시 원나라 궁정의 실권자임을 알려주는 기록이다.
1353년 6월 기 황후의 아들 애유식리달랍(愛猶識理達獵)이 황태자로 책봉된다. 정후(正后)의 아들이 있는데도 기 황후의 아들이 태자로 책봉된 것이다. 기 황후는 마음대로 정치를 요리하는 위치에 있었지만 그녀의 정치는 자신과 황태자의 지위를 유지하는 것 외에는 달리 찾을 만한 것이 없었다. 1365년 7월 기 황후와 황태자를 제거하고 정후 백안홀도의 아들을 태자로 앉히려는 발라첩목아(발羅帖木兒)의 반란이 진압된다. 이어 정후 역시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이해 12월 기 황후는 제1 황후가 되어 명실상부한 최고 권력자로 군림한다. 원나라 멸망 3년 전이었다. 기 황후의 품성을 알려주는 기록이 있다.
“(기황후는) 일이 없으면 여효(女孝:孝經의 일종?), 경전 및 역사책 읽기를 좋아하고 역대 황후 가운데 어진 사람을 모범으로 삼았다. 사방에서 보낸 귀한 물건이 있으면 사신을 시켜 태묘에 보내 먼저 제사를 올린 후에야 그것을 먹었다.”(『원사』 열전)
기록에 따르면 기 황후는 미모뿐 아니라 교양이 풍부하고 지적으로 세련된 여인이었다. 순제가 그녀에게 혹할 만했다. 순제는 술을 마시거나 연회 같은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림 그리기와 천문 관측을 잘했으며 장편 시를 남길 정도로 예민한 감각과 풍부한 표현력의 소유자였다. 순제는 유약한 호문(好文)의 군주에다 권력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기 황후는 순제의 이런 점을 이용해 궁중에서 권력을 마음껏 행사할 수 있었다.
| | | 겸재 정선의 금강산 장안사. 기 황후의 원찰. 6·25전쟁 때 소실됐다. [사진 간송미술관] |
자정원, 궁중정치의 핵심 기구
1340년 12월 기 황후가 제 2황후가 되자 원나라는 황후의 각종 비용을 전담하는 재정기구로 자정원(資政院)을 설치한다. 자정원은 3개 현(縣)과 2개 주(州)의 21만4538호가 소속되어, 그곳에서 거둔 조세로 운영되었을 정도로 재정규모가 상당히 큰 기구였다. 기 황후는 자정원의 풍부한 재정을 바탕으로 정국에 깊숙이 개입할 수 있었다.
기 황후는 고려 출신 환관들을 기용해 자정원을 운영했다. 최고책임자인 자정원사(資政院使)에 전주 출신 환관 고용보(高龍普)를 기용했다. 기 황후의 고향인 행주(幸州) 출신의 환관 박불화(朴不化)도 자정원 소속이었다. 둘은 자정원을 관리하면서 황후의 명령을 받아 각종 정치에도 관여했다. 또한 황제의 원찰 해주 신광사(神光寺)와 기 황후의 원찰 금강산 장안사(長安寺)와 개경 경천사(敬天寺)에 대신 불공을 드리려고 고려에 자주 왔다. 그들은 고려에 머물면서 고려 정치에도 깊숙이 관여했다. 특히 고용보는 개경 경천사에 10층 석탑을 제작했다. 이 탑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기 황후는 자정원의 재정을 바탕으로 고려 처녀를 데려다 양육시켜 원나라 고위층에 뇌물로 선사해 자신과 황태자의 지위를 유지하려 했다.
“기 황후는 고려 미인을 길러 권세가에게 바쳤다. 원나라 서울에서 현달한 고위 관인과 귀족은 반드시 고려의 미인을 얻어야 명가(名家)라 했다. 고려 여인들은 예쁘고 귀여워 사람을 잘 섬겼고, 그 집안에 들면 곧 사랑을 독차지했다. 지정(至正:1341)년 이후로 궁중의 일을 맡은 사람의 태반은 고려 여인이었다. 이 까닭에 사방의 옷차림, 신발, 모자가 모두 고려 제품을 사용했다.”(『庚申外史』)
1341년 이후의 시기는 기 황후가 제2 황후로 있을 때다. 기 황후는 자정원의 재정을 바탕으로 많은 고려 여인을 길러 원나라 고위 관료에게 첩으로 보냈다. 고려 여인을 첩으로 두어야 명문가로 행세할 수 있고, 황실의 시중 드는 여인의 태반이 고려 여인이라는 기록은 매우 흥미롭다.
기 황후는 그 지위 때문에 정국의 전면에 나서지 못한 채 환관에 의존한 궁중정치를 통해 권력을 행사했다. 이것이 훗날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원인을 제공했다. 원나라 쇠망기에 정국을 주도하다 보니 그녀가 망국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비난까지 받게 되었다. 또한 자신과 일족의 지위를 유지하는 데 급급한 것도 그런 비난을 증폭시켰다. 이 과정에서 그녀는 고려의 정치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 중앙선데이 | 박종기 국민대 교수 | 제353호 | 2013.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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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민왕 신당. 서울 종묘의 망묘루와 향대청 사이 귀퉁이에 있다.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의 영정이 회오리 바람을 타고 와 떨어진 곳에 세웠다고 전해진다. 조용철 기자 |
3수 끝에 즉위한 공민왕, 원 쇠망 타고 反元 개혁 |
기 황후와 공민왕
1356년(공민왕 5) 5월 공민왕은 기철(奇轍)·권겸(權謙)·노책(盧책)을 반역을 꾀했다는 죄로 처단한다. 기철은 기 황후의 오빠이다. 권겸은 원나라 황태자(기 황후 아들)의 장인이다. 노책은 딸을 원나라 순제에게 바쳤다. 세 사람 모두 원나라 황실의 일족이 되어 고려에서 최고의 권력을 누린 인물들이다. 공민왕은 세 사람과 그 일족을 처단하는 것을 신호탄으로 유명한 반원(反元) 개혁을 단행한다 이해 7월 원나라를 처단하는 것을 신호탄으로 유명한 반원(反元) 개혁을 단행한다. 이해 6월 공민왕은 인당(印當)에게 군사를 주어 압록강 이동·이서 지역의 원나라 역(驛) 8곳을 공격하게 한다. 7월엔 쌍성(雙城)총관부를 점령함으로써 약 100년 만에 원나라에 빼앗긴 동북 지역(함경도 일대)을 고려 영토로 편입시킨다.
이해 7월 원나라는 일련의 사태에 대한 해명을 요구한다. 공민왕은 다음과 같이 해명한다.
“적신(賊臣) 기철이 노책 · 권겸과 반역을 꾀했습니다. 그들은 원나라 황실과 혼인한 것을 계기로 황실의 위엄을 빌려 국왕을 협박하고 백성들의 토지 등 원하는 모든 것을 빼앗았습니다. 제가 원나라를 두려워해 문책을 못하니 백성들의 원한이야 어떠하겠습니까? 기철 등은 천하(※중국 대륙)가 병란에 싸이자 하루아침에 권세를 잃을까 염려해 모든 요직에 자기들의 심복을 심어두고, 무기를 만들어 공공연하게 연습하고 온갖 유언비어로 선동했습니다. 드디어 금년 5월 18일 무뢰배를 모아 무기를 싣고 궁궐을 습격하려 했습니다. 이에 원나라에 알릴 틈도 없이 처단했으며, 살아남은 무리들이 변방으로 도망한 것을 추격하다 본의 아니게 압록강을 넘게 되었습니다.”(『고려사』 권39 공민왕 5년 7월)
고려 왕조에 반역한 기철 일당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도망친 잔당을 잡으려다 쌍성총관부와 압록강 건너 원나라 역을 공격했다고 변명했다. 공민왕은 압록강을 건넌 장수 인당의 목을 베어 원나라의 의심에서 벗어나려 했다.
원나라의 쇠망과 한족의 흥기
기철 일당이 반역을 꾀했다는 구체적인 증거는 없다. ‘기철 일당은 천하가 병란에 싸이자 권세를 잃을까 염려해 모든 요직에 심복을 앉혔다’는 공민왕의 해명에 진실이 담겨 있다. 기철 일당의 세력 확장이 왕권을 위협했기 때문에 공민왕이 미리 조치를 취한 것이다. 대륙 정세의 급변도 그런 조치를 취한 또 다른 배경이다.
공민왕은 원나라 요청에 따라 1354년(공민왕 3) 대륙의 한족(漢族) 반란군을 진압 하기 위해 유탁·염제신·최영 장군 등에게 고려군 2000명에다 현지 고려인 2만 명을 붙여 원나라에 파견한다. 이들은 이듬해 귀국하면서 원나라의 쇠망과 한족의 흥기를 상세하게 보고한다. 공민왕은 이러한 대륙 정세를 읽고 기철 등을 제거했다. 쇠망의 길로 접어든 원나라가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공민왕은 꿰뚫어 본 것이다.
기씨 일족은 1340년 3월 기 황후가 제 2황후가 된 이후 고려 정치에 깊이 개입하기 시작한다. 기 황후 덕에 부친 기자오(奇子敖)와 모친 이씨는 제후의 지위인 영안왕(榮安王)과 영안왕 대부인(大夫人)으로 각각 책봉된다. 이미 사망한 부친을 대신해 살아있던 모친이 극도의 환대를 받는다. 고려 국왕은 매년 이씨 집을 방문해 잔치를 열었다. 1353년(공민왕 2) 기 황후 아들이 원나라 황태자로 책봉되자, 원나라는 황족을 보내 성대한 잔치를 베푼다. 당시 잔치의 모습이 다음의 기록으로 전해진다.
“공주(※공민왕 비)와 태자(※원에서 보낸 황족)는 남쪽에 앉고, 왕(※공민왕)은 서쪽에, 이씨는 동쪽에 각각 앉았다. …잔치가 끝날 무렵 사신과 그 수행원은 서쪽 계단에, 호위 무사는 동쪽 계단에 각각 앉아 고기 많이 먹기 내기를 했다. 잔치 후 모두 뜰에 내려와 비단 1필을 서로 이어 잡고 호가(胡歌:몽골 노래)를 부르고 춤추면서 서너 차례 뜰을 돈 후 비단을 잘라 나누어 가졌다. 잔치에 베를 오려 꽃을 만들었는데, 무려 베 5140필이 들었다. 다른 물건도 이 정도의 기준에 맞춰 준비했을 정도로 잔치는 매우 사치스러웠다.” (『고려사』 권131 기철 열전)
고려 국왕과 이씨는 같은 제후왕으로 마주 앉았다. 기씨 일족이 공민왕에 버금가는 지위를 누렸다는 증거다. 5000필이 넘는 베를 잘라 꽃을 만들어 장식할 정도로 호화판 잔치였다. 이 잔치에 참석한 원나라 사신들이 ‘묵을 공관이 부족해 무려 30여 곳의 재상들의 집에 유숙했다’(『고려사절요』 권26 공민왕 2년 8월조)고 말할 정도였다.
충혜왕과 기 황후의 악연
기 황후 모녀가 각각 제 2황후와 영안왕 대부인으로 책봉되면서 당시 국왕 충혜왕(1330∼1332년, 1339∼1344년 재위)이 가장 어려운 처지에 놓인다.
“충혜왕이 세자로 원나라에 있을 때 승상 연철목아(燕鐵木亞)는 그를 보고 크게 기뻐하여 아들처럼 대했다. 충숙왕이 왕위에서 물러나자, 연철목아는 황제에게 상소해 왕위에 오르게 했다.”(『고려사』 권109 이조년 열전)
연철목아는 1330년 충혜왕 즉위를 도운 인물이다. 원 간섭기 고려 국왕은 원나라 공주가 낳은 왕자만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충혜왕은 고려 왕비가 낳은 왕자이기 때문에 왕위에 오를 수 없는 혈통상의 문제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위에 오른 것은 실권자 연철목아의 든든한 후원 덕택이었다.
연철목아는 원나라 황제 순제의 즉위에도 관여했다. 그는 자신의 딸과 혼인하는 조건으로 순제의 즉위(1333년)를 승인한 당시 원나라 최고의 실권자였다. 순제의 총애를 받았다는 이유로 기 황후는 연철목아의 딸이자 순제의 정후인 답납실리(答納失里)로부터 큰 고통을 받았다. 연철목아와 그 일족은 순제 역모 사건으로 1332년 정적 백안(伯顔)에게 제거된다. 그의 실각으로 충혜왕도 이해 왕위에서 물러난다. 이런 연유 때문에 충혜왕과 기 황후는 불편한 관계였다.
충혜왕이 1339년 11월 부왕 충숙왕이 사망해 두 번째로 즉위한다. 그런데 4개월 후인 1340년 3월 기 황후가 제 2황후가 되어 원나라의 새로운 권력자로 군림한다. 8년 전 순제를 제거하려 한 연철목아의 후원을 받은 충혜왕은 기 황후의 등장으로 커다란 정치적 부담을 안게 되었다. 충혜왕은 이해 3월 ‘황제의 생일을 축하한다’는 명분으로 황후의 오빠인 기철을 원나라에 파견한다. 또한 기 황후의 재정기관인 자정원(資政院) 책임자인 고려 출신 환관 고용보(高龍普)를 이듬해(1341년) 2월 삼중대광(三重大匡) 완산군(完山君)으로 책봉한다. 충혜왕이 기 황후의 환심을 얻어 국왕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고육책의 하나였다. 이러한 충혜왕의 정책은 결과적으로 기 황후 일족을 중심으로 한 부원(附元) 세력이 고려에서 활개를 치는 빌미를 제공했다. 기 황후 역시 충혜왕 재위 동안 자신의 일족이 고려에서 지위를 잃지 않기 위해 어떤 형태로든 정국에 관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철은 1343년(충혜왕 복위 4년) 8월 충혜왕이 음란하고 탐욕하여 나라를 다스릴 능력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고려를 없애고 원나라의 성으로 편입시켜야 한다는 상소를 원나라에 올린다. 왕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고려 조정에 기용된 지 불과 3년 만에 기철은 국왕을 우습게 여길 정도로 정국의 실권자가 되었다. 결국 충혜왕은 이듬해(1344년) 기 황후의 측근 환관 고용보에 의해 체포되어 원나라로 압송되어 왕위를 잃는다. 충혜왕은 원나라에서 유배 도중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다.
기 황후, 편협한 정치로 역사의 혹평
이어 충혜왕의 8살짜리 아들 충목왕이 즉위한다. 환관 고용보가 그를 안고 황제에게 선을 보인 후였다. 충목왕이 재위 4년 만에 죽자, ‘나라 사람들이 (공민왕을) 왕으로 세우기를 원했다. 그러나 원나라는 충정왕을 내세웠다’(『고려사』 권38 공민왕 총서)고 한다. 기 황후 일족이 공민왕 대신 충혜왕의 서자이자 11살짜리 나이 어린 충정왕을 선택한 것이다. 기 황후 일족이 고려 국왕 임명에 직접 관여했다는 증거다.
이때 20세의 공민왕은 나라 사람의 신망을 받는 훌륭한 제왕의 자질을 지녔으나 두 번이나 국왕에 임명되지 못했다. 충정왕이 재위 약 2년 만에 죽자 그때야 즉위한다. 충혜왕의 동생인 공민왕이 높은 신망을 받고도 바로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은 역시 원나라 공주 소생의 자식이 아니라는 혈통상의 문제 때문이었다. 형인 충혜왕의 죽음을 목격했고 3수(修) 끝에 어렵게 왕위에 오른 공민왕과 기 황후 일족의 관계는 원만할 수 없었다. 즉위 5년 만에 기철 일당을 제거한 공민왕의 반원 개혁은 원나라의 쇠망과 맞물려 큰 저항 없이 단행되었다.
기 황후는 일족과 측근이 제거되자 황제와 태자에게 복수를 요청한다. 고려 출신 원나라 고위 관료 최유(崔濡)는 기 황후의 뜻에 따라 공민왕을 폐하고 덕흥군(德興君)을 국왕으로 세우기 위해 고려를 침략하기로 결정한다. 1363년(공민왕 12) 5월 고려에 이 소식이 알려지자, 고려는 경천흥(慶千興)을 서북면 도원수로 삼아 압록강에서 개성으로 이어지는 요새에 군사를 배치한다. 최유는 원나라 군사 1만 명을 거느리고 1363년(공민왕 12) 6월 고려를 침공했으나, 이듬해 1월 마침내 패배한다.
이듬해(1364년) 5월 원나라는 사신을 보내 덕흥군 옹립과 공민왕 폐위에 앞장선 인물들의 처단을 통보하면서, 6월엔 공민왕을 다시 고려 국왕으로 책봉한다. 고려를 우군으로 삼아 고려가 신흥 한족과 연결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너무 늦었다. 4년 후 원나라는 신흥국 명나라에 쫓겨 몽골 지역으로 쫓겨났다. 1365년 12월 기 황후는 원나라 황제의 정후(正后)가 되지만 빛바랜 영화에 불과했다. 온 생애를 바쳐 얻은 권력으로 원나라에선 자신과 황태자, 고려에선 일족의 안녕과 지위를 유지하려던 그녀의 편협한 정치는 모국 고려에서조차 외면을 받아 역사의 혹평을 받게 된다.
- 중앙선데이 | 박종기 국민대 교수 | 제354호 | 2013.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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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종기 국민대 교수 박종기 서울대 국사학과 졸업. 역사와 현실의 일체화, 전통과 현대의 접목을 통한 새로운 역사학 수립에 노력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 『지배와 자율의 공간, 고려의 지방사회』 『안정복, 고려사를 공부하다』 『새로 쓴 5백년 고려사』 『고려의 부곡인, <경계인으로 살다>』등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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