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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음성은 불이 된다
이동아
녹슨 문장 하나는
버려진 말이 아니라
가슴에 묻힌 씨앗이었다
버려진 줄 알았던 말들은
어둠 속에서 먼저 깨어
푸른 순을 밀어 올리고
흘려보낸 것들은
벼랑 끝에 설 때마다
예리한 촉이 되어
보이지 않는 죽음을 먼저 짚는다
그 좁은 길 위에 서니
험한 산조차 무릎을 낮추고
낡은 활자마다 번뜩이는 빛으로 되살아난다
단감처럼 익고
흰 박처럼 속이 찬 시간
만추의 붉은 골짜기를 적시며
그분의 심장 한 줄이
내 발치에 내려와
등불이 된다
거룩은 멀리 있지 않고
기름처럼 스며
심지에 불을 옮긴다
사라진 음성은
꺼진 것이 아니라
더 깊은 빛으로 자리를 옮겼고
나는 이미
그 불의 방향으로
걷고 있었다
──────────────
심지의 방향
사라진 음성은
꺼진 것이 아니라
심지 속으로 옮겨 붙었다
나는 몰랐다
이미 그 불의 방향으로
걷고 있었다
──────────────
세상은 낡고 녹슨 문장은 이미 힘을 잃었고, 사라진 음성은 끝내 꺼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이 시는 그 익숙한 해석을 정면으로 뒤집어, 버려진 줄 알았던 말이야말로 가슴에 묻힌 씨앗이 되어 가장 먼저 깨어난다고 말한다. 어둠 속에서 푸른 순을 밀어 올리고, 흘려보낸 것들이 벼랑 끝에서 오히려 예리한 촉이 되어 죽음을 먼저 짚는 장면은 상실과 낡음이 소멸이 아니라 분별과 생명의 감각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보여 준다. 이 시는 여기서 머물지 않고, 그분의 심장 한 줄이 발치에 내려와 등불이 되는 지점에서 반전을 만든다. 멀리 있는 거룩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려온 빛이 심지에 불을 옮기고 있었음을 뒤늦게 깨닫게 하기 때문이다. 이 시의 힘은 신앙의 진술을 높이 들어 설명하지 않고 씨앗, 푸른 순, 벼랑, 낡은 활자, 단감, 흰 박, 붉은 골짜기, 심지와 등불 같은 촉각적인 사물들 속에 영적 이동을 숨겨 두는 데 있다. 끝내 이 시는 문장에서 씨앗으로, 음성에서 빛으로, 바깥의 거룩에서 내면의 심지로 이동하며, 나는 이미 그 불의 방향으로 걷고 있었다는 존재의 이동을 완성한다
심지에 옮겨 앉은 불
이동아
녹슨 문장 하나
가슴에 묻힌 씨앗이었다
버려진 줄 알았던 말들이
어둠 속에서 먼저 깨어
푸른 순 밀어 올린다
흘려보낸 것들이
벼랑 끝에 설 때마다
예리한 촉이 되어
보이지 않는
죽음 먼저 짚는다
그 좁은 길 위에 서니
험한 산조차 무릎 낮추고
낡은 활자마다
번뜩이는
빛으로 되살아난다
단감처럼 익고
흰 박처럼 속이 찬 시간—
만추의 붉은 골짜기 적시는
그분의 심장 한 줄이
내 발치에 내려와
등불이 된다
거룩은
멀리 있지 않고
기름처럼 스며
심지에 불 옮긴다
사라진 음성은
꺼진 것이 아니라
더 깊은 빛으로 자리 옮겨—
나는 이미
그 불의 방향으로
걷고 있었다
──────────────
심지
사라진
음성이
내
안에
불을
옮겼다
──────────────
긴 공감 해설
이 시는 사라진 음성이 오히려 더 깊은 불이 된다는 역설을 붙든다. 우리는 흔히 들려오던 음성이 멈추면 그 자리도 함께 꺼진다고 여긴다. 스승의 목소리, 오래된 문장, 익숙한 부름이 사라지면 마음 한 자리도 어두워진다고 믿는다. 그러나 시는 그 통념을 조용히 뒤집는다. 녹슨 문장은 버려진 것이 아니라 가슴에 묻힌 씨앗이었고, 어둠은 소멸의 자리가 아니라 발아의 자리였다고 말한다. 사라짐이 곧 옮겨감이라는 것을, 시는 서두르지 않고 밀어 올린다. 흘려보낸 것들이 벼랑 끝에서 예리한 촉으로 되돌아오고, 낡은 활자는 좁은 길 위에서 다시 번뜩인다. 이미지는 씨눈에서 촉으로, 촉에서 활자로, 활자에서 등불로 체인처럼 이어진다. 만추의 붉은 골짜기, 단감과 흰 박이 익어가는 시간 속에서 그분의 심장 한 줄이 발치로 내려온다. 위에서 내려다보던 거룩이 아래로 내려와 등불의 자리에 앉는다는 이 하강이 시의 결정적 장면이 된다. 거룩은 멀리 있지 않다고 시는 단언한다. 기름처럼 스며 심지에 불을 옮긴다고 말한다. 선언이 아니라 감지의 언어, 사건의 결과가 아니라 결의 언어로 시는 낮아진다. 그리하여 사라진 음성은 꺼진 것이 아니라 더 깊은 빛으로 자리를 옮긴 것이라는 역설이 완성된다. 부재가 곧 임재가 되고, 침묵이 곧 방향이 된다. 돌아보니 이미 그 불의 방향으로 걷고 있었던 발걸음이 남는다. 거룩은 도착이 아니라 이동이며, 심지는 불이 옮겨 앉을 자리를 이미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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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心地)
이동아
녹슨 문장 하나
가슴에 묻힌 씨앗이었다
버려진 줄 알았던 말들이
어둠 속에서 먼저 깨어
고구마 씨눈처럼 푸른 순 밀어 올린다
흘려보낸 것들이
벼랑 끝에 설 때마다
예리한 촉이 되어
보이지 않는 죽음 먼저 짚는다
그 좁은 길 위에 서니
험한 산조차 무릎을 낮추고
가슴에서 꺼낸 한 마디마다
낡은 활자가 번뜩이는 빛으로 되살아난다
단감처럼 익어가고 흰 박처럼 속이 찬 시간—
만추의 붉은 골짜기 적시는
그분의 심장 한 줄이
내 발치에 내려와 등불이 된다
거룩은 멀리 있지 않고
기름처럼 스며
심지에 불 붙인다
사라진 음성은 꺼진 것이 아니라
더 깊은 빛으로 옮겨가
내 안에서 타오르고—
나는 그 불의 방향으로
이미 걷고 있다
──────────────────────────
심지(心地)
버려진 줄 알았던 말들이
어둠 속에서 먼저 깨어났다
거룩은 멀리 있지 않고
기름처럼 스며
심지에 불 붙인다
사라진 음성은 꺼진 것이 아니다—
나는 그 불의 방향으로
이미 걷고 있다
──────────────────────────
긴 공감(핵심 반전)
이 시는 버림받은 것들의 복권(復權)을 선언한다. 우리는 잊힌 말, 흘려보낸 문장을 쓸모 없어진 것으로 읽는다. 하지만 이 시는 그 통념의 땅을 뒤집는다. 녹슨 문장이 가슴에 묻힌 씨앗이었다는 첫 행의 선언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버려진 것이 실은 묻혀 있던 것이었고, 침묵은 죽음이 아니라 발아(發芽) 이전의 어둠이었다는 인식의 전환이다. 시의 결정적 장면은 "거룩은 멀리 있지 않고 / 기름처럼 스며 / 심지에 불 붙인다"는 세 행이다. 거룩을 저 너머의 것으로 미루는 통념을 기름과 심지라는 지극히 낮고 가까운 사물로 단번에 무너뜨린다. 기름은 스며야 비로소 불이 된다. 그 스밈의 시간이 바로 녹슨 문장이 어둠 속에 묻혀 있던 시간이었다. 역설은 마지막 두 행에서 완성된다. 사라진 음성은 꺼진 것이 아니라 더 깊은 빛으로 옮겨갔다—그 문장은 죽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이 종료가 아니라 이동이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나는 그 불의 방향으로 / 이미 걷고 있다"는 결말은 다짐이 아니다. 이미 시작된 사실의 확인이다. 시는 독자를 설득하는 대신 독자가 이미 걷고 있었다는 것을 조용히 알려준다.
녹슨 문장, 불이 되다
이동아
녹슨 문장 하나
가슴에 묻힌 씨앗이었다
버려진 줄 알았던 말들이
어둠 속에서 먼저 깨어
고구마 씨눈처럼
푸른 순 밀어 올려
거친 생의 밭두렁을
조용히 덮어 간다
하찮은 군소리로 흘려보낸 것들이
벼랑 끝에 설 때마다
예리한 촉이 되어
보이지 않는 죽음 먼저 짚는다
그분이 가라던
그 좁은 길 위에 서니
험한 산조차
먼저 무릎을 낮추고
가슴에서 꺼낸 한 마디마다
낡은 활자가
번뜩이는 빛으로
되살아난다
단감처럼 익어가고
흰 박처럼 속이 찬 시간
만추의 붉은 골짜기 적시는
그분의 심장 한 줄
그 마지막 말이
내 발치에 내려와
어둠 밀어내는
작은 등불이 된다
거룩은 멀리 있지 않고
기름처럼 스며
심지에 불 붙인다
사라진 음성은
꺼진 것이 아니라
더 깊은 빛으로 옮겨가
내 안에서 타오르고
나는
그 불의 방향으로
이미 걷고 있다
녹슨 문장, 불이 되다
사라진 말은
없어진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불로 타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녹슨 문장, 불이 되다
우리는 종종
“왜 그때 그 말을 더 귀하게 여기지 못했을까”
뒤늦게 후회한다.
흘려보낸 문장들,
귀에 걸렸던 잔소리들,
가볍게 넘겼던 한마디들.
하지만 이 시는 말한다.
그 말들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씨앗으로 묻혀 있었다”고.
그래서 평온할 때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벼랑 끝에 서는 순간,
그 문장은 갑자기 살아나
우리보다 먼저 길을 더듬는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알게 된다.
그 말이
나를 억누르던 소리가 아니라
나를 살리던 방향이었다는 것을.
그래서 마지막은 이렇게 바뀐다.
말씀을 ‘지키는 삶’이 아니라
이미 그 말씀이
내 안에서 불이 되어
나를 움직이고 있었다는 깨달음으로.
임의 말, 등불로 남다
이동아
임의 문장은 녹슬어도
생명 품은 씨앗이었다
가슴 깊이 묻어 둔 씨앗들
고구마 씨눈처럼
푸른 순 밀어 올려
거친 생의 밭두렁
조용히 덮어 간다
가려운 군소리라 흘려버렸으나
벼랑 끝 지뢰밭 건널 때마다
예리한 더듬이가 되어
보이지 않는 죽음
먼저 짚어낸다
임이 가라던
좁은 길 위에 서니
험산조차 스스로 무릎 꿇고
가슴 속에서 꺼내는
그 한 마디마다
낡은 활자가
번뜩이는 보화로 되살아난다
단감처럼 익고
흰 박처럼 영근 시간
만추의 붉은 골짜기 적시는
임의 심장
그 유언,
내 발치의 등불로 내려와
어둔 길 밝히는
따뜻한 불씨가 된다
거룩한 기름,
뜨거운 심지로 타오르며
남은 밤 끝까지 밝히는
순종의 불꽃
사라진 음성은
더 깊은 빛으로 흐르고
그 불 따라
다시 길 걷는다
말의 등불
묻어둔 말 한 줌이 푸른 순으로 살아나
벼랑길 어둠 속에 먼저 길을 짚어주니
유언은 등불 되어 내 밤을 밝힌다
고전 시조
낡은 말 묻어 두니 푸른 생명 돋아나
벼랑 끝 어둠 길에 등불 되어 비추고
임의 뜻 불꽃 되어 내 길 끝까지 간다
발치의 등불
이동아
임의 녹슬고 낡은 말들 가슴 깊은 곳에
꼬옥 묻어 두었더니 고구마 씨눈처럼
푸른 순 밀어 올려
생의 거친 밭두렁 죄다 덮는다
그때는 가려운 군소리라 버렸으나
벼랑 끝 지뢰밭 지날 때마다
임의 말은 예리한 더듬이가 되어
죽음의 문턱 무사히 건너게 한다
임이 가라던 그 좁은 길 위에서
험산은 제풀에 무릎 굽히고
가슴 속에서 언어 꺼낼 때마다
낡은 활자들은 번뜩이는 보화가 된다
단감으로 익고 흰 박으로 영글어
만추의 붉은 계곡 적시는 임의 심장
임의 유언은 이제 내 발치의 등이 되어
거룩한 기름 뜨거운 심지로
남은 밤 환하게 태우며 흐른다
[시조] 유언의 등불
낡고 녹슨 임의 말들 가슴속에 묻었더니
푸른 순 밀어 올려 지뢰밭을 건너게 해
내 발치 등불이 되어 남은 밤을 태우네
타오르는 심지
이동아
임의 녹슬고 낡은 말들을
가슴 깊은 곳에 꼬옥 묻어 두었더니
고구마 씨눈처럼 푸른 순 밀어 올려
생의 거친 밭두렁 죄다 덮는다
그때는 가려운 군소리라 버렸으나
벼랑 끝 지뢰밭 지날 때마다
임의 말은 예리한 더듬이가 되어
죽음의 문턱 무사히 건너게 한다
임이 가라던 그 좁은 길 위에서
험산(險山)은 제풀에 무릎 굽히고
가슴 속에서 언어 꺼낼 때마다
낡은 활자들은 번뜩이는 보화가 된다
단감으로 익고 흰 박으로 영글어
만추(晩秋)의 붉은 계곡 적시는 임의 심장
임의 유언은 이제 내 발치의 등이 되어
거룩한 기름으로, 뜨거운 심지로
남은 밤 환하게 태우며 흐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