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잡던 칼 내리꽂고는 “나도 부처다”
<51> 부추밀에게 보내는 대혜선사의 답장 ③-1
[본문] 보낸온 편지에 “처음 공부를 하는데 잠간 조용하게 앉아서 좌선을 하니 공부가 참 잘 된다”라고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그렇다고 감히 함부로 조용하다는 견해를 짓지 않는다”라고 하였으니, 그것은 부처님이 말씀하신, “비유하면 마치 어떤 사람이 자신의 귀를 막고 큰 음성으로 소리를 질러서 다른 사람들이 듣지 않기를 구하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스스로 장애와 어려움을 지을 뿐입니다.
만약 생사의 마음을 깨트리지 못하면 하루 24시간 가운데 어둡고 아득한 것이 마치 혼이 흩어지지 아니한 죽은 사람과 일반일 것입니다. 다시 무슨 고요함을 이해하고 시끄러움을 이해하는 부질없는 공부를 찾겠습니까?
누구나 본래부터 위대한 인간부처
수행을 하고 아니하고 차별 없어
[강설] 참선을 하는 사람으로서 처음 공부를 할 때는 누구나 조용한 환경을 찾아서 하게 된다. 부추밀도 조용한 곳에서 공부를 해보니 상당히 잘되는 것 같고 재미가 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조용함에 대한 견해를 짓지는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 말속에는 너무나 모순이 많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조용한데서 공부하면서 조용하다는 견해를 짓지 않는다니 그런 모순이 어디 있겠는가라는 뜻이다. 부처님의 말씀은 능엄경의 내용이다.
또한 선불교 공부의 궁극적 목표는 생사의 마음, 즉 순간순간 변화무상하게 생멸하는 의식의 흐름을 깨트려야 하는 것이다. 만약 생멸하는 의식을 깨트리지 못하면 의식의 생멸변화에 따라다니느라 하루 종일 어둡고 아득하여 멍청한 삶을 사는 것이 “마치 혼은 있으나 죽은 사람과 같다”고 하였다.
그런 입장에서 무슨 고요하고 시끄러움을 거론할 공부가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선불교에는 “화두를 놓치고 사는 참선납자는 천명이면 천명, 만 명이면 만 명을 다 때려죽인들 무슨 죄가 되겠는가”라는 말도 있다. 간화선의 대선지식인 대혜 선사의 입장에서 이제 막 입문한 초학자의 공부를 살펴본 광경이 명확하게 드러난 내용이다.
[본문] 열반회상에서 광액도아(廣額屠兒)가 소를 잡던 칼을 집어던지고 곧바로 성불하였습니다. 그 사람이 어찌 고요한 가운데서 공부를 하던 사람이겠습니까.
그리고 그 사람이 어찌 초심자가 아니겠습니까마는 그대가 이것을 보고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하면서 반드시 부정하기를, “그 사람은 옛 부처가나타난 것이요, 요즘 사람으로서는 이러한 역량이 없다”라고 할 것입니다. 만약 이와 같이 본다면 자신에게 있는 수승한 점을 믿지 않고 스스로 하열한 사람으로 달게 여기는 것이 됩니다.
[강설] 부추밀이 고요함과 시끄러움을 분별하면서 공부를 한다고 하므로 열반경에 있는 예화를 하나 들었다. 광액도아라는 매일매일 소를 잡아서 생계를 유지하는 백정이 어느 순간 자신이 그대로 부처라는 사실을 깨닫고는 소를 잡던 칼을 도마에 내리 꽂고는 “나도 부처다”라고 선언한 아주 유명한 이야기다.
사람이 본래로 부처라는 사실(人佛思想)에는 전생과 금생의 차별도 없으며, 수행을 하고 아니하고도 차별이 없다. 남녀노소도 차별이 없으며, 빈부귀천도 차별이 없으며, 동서고금도 차별이 없다. 그런데 무슨 고요하고 시끄럽고가 무슨 문제이겠는가.
사람 사람은 본래부터 누구나 위대한 인간부처며, 부처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매일매일 소를 잡아 생계를 유지하던 백정도 그대로 부처라고 선언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견해는 참다운 불교의 견해지만 만약 이 원리와 이 원칙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난 견해는 삿된 마군이의 견해다. 불교의 견해라고 할 수 없다. 진정한 불교는 이와 같이 쉽다. 쓸데없는 방편불교가 어렵고 힘이 든다. 이 얼마나 통쾌한가.
[출처 : 불교신문 2012.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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