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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등불의 목적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준비하였습니다.
누가복음에서 오늘 우리가 교독한 말씀은 예수님께서 복음 전하시다가 동네 많은 무리가 예수께 나오는 것을 보시고 먼저는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말씀하시고 난 다음에 바로 등불과 관련된 말씀을 주셨습니다.
근데 마태복음에 보면 축복의 산에서 산상보훈으로 알려진 말씀을 전하시면서 팔복의 말씀 후에 바로 등불과 관련된 말씀을 주셨습니다.
같은 내용을 두 제자가 다른 환경 가운데 기록하였는지 아니면 다른 환경 가운데 같은 말씀을 예수께서 하셨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같은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두 제자 뿐 아니라 마가도 요한도 등불과 관련된 내용을 기록하였습니다.
사복음서 네 명의 기자들이 다 기록하였다면 좀 중요한 말씀처럼 여겨집니까?
등불이 무엇 때문에 필요한지는 말씀드리지 않아도 다 잘 이해하시겠죠?
제가 한번은 시골 고향 교회에서 이웃 동네에 우리 성도님 집에서 안식일 오후에 가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재미가 있어서인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제 집에 가야겠다고 하면서 집을 나오니 캄캄한 밤이였습니다.
전등을 주시려는 것을 괜찮다고 하면서 그냥 왔는데 후회를 많이 하였습니다.
조금 가면은 어두운 환경에 적응되어 잘 볼 수 있겠지 라는 마음으로 집으로 향하였는데 얼마나 어두운지요,
거기다가 비가 부슬부슬 옷이 젖지 않을 만큼 오는데 그러니 어둠은 얼마나 심하였는지 정말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길이었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밤길을 잘 다녔습니다.
무서움 같은 것을 타지 않았고요.
그런데 그날은 무서웠습니다.
그때에 저희 동네에서 살인사건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정신병이 걸려 있는 딸을 죽여서 마을 건너편 산에 묻었다가 경찰에 잡혀 갔었습니다.
길이 마을과 그 산 가운데 있어서 어두운 길을 오는데 저의 눈이 왜 자꾸 그 산쪽으로 가는지요,
어둠 가운데 1킬로 정도 되는 길을 오면서 좀 그랬습니다.
그래서 찬미를 크게 부르면서 왔습니다.
오늘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그런 불을 가지고 하신 말씀이 아니겠죠.
등불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밝게 하는 것이 주 목적입니까?
그렇다면 등불 말고 다른 것으로도 밝게 하는 목적을 가진 것이 있죠?
무엇입니까? 예 빛이죠?
등불과 빛, 같은 것으로 봐도 됩니까?
등불과 빛은 대부분 같은 목적으로 사용 됩니다.
성경도 등불과 빛을 같은 의미로 쓰인 곳이 있습니다.
요 5:35 “요한은 켜서 비추이는 등불이라 너희가 한때 그 빛에 즐거이 있기를 원하였거니와”
요한은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켜서 비추이는 등불이라,
그리고 그 빛에 라고 합니다, 등불 빛이라는 말씀을 같은 의미로 기록하였습니다.
이곳에 요한은 어떤 요한을 가리키는 말씀입니까? 침례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이죠?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에 대하여도 분명한 이해를 하고 있는 것이 좋습니다.
어떤 분이 예수의 부친 요셉이 애굽의 총리대신 요셉이냐고 물으시는 분이 계셨습니다.
우리 성도님들 중에도 성경에 대하여 잘 모르시는 분들은 모르시겠지만 교회를 10년 이상 다니시고 집사의 직분을 맡고 있으시면서도 그렇게 물으시는 분이 있었습니다. 모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르는 것을 묻는 것은 너무 좋은 일입니다.
우리 성도님들도 모르시는 것이 있으면 부끄러워 마시고요 물어 보시길 바랍니다.
어느 교회에서 말씀을 인도하시는 분이 요한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시면서 침례 요한과 제자 요한을 분간하시지 못하시고 혼돈하여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목사님께서 바로 잡아 주셨습니다만 그렇게 이해할 수도 있기 때문에 성경에 나오는 인물에 대하여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 요한이라는 이름을 가진 유명한 두 분이 있었죠?
한 분은 예수님의 제자 요한이고요,
다른 한 사람은 예수님을 침례 준 침례 요한입니다.
그럼 이곳에 요한은 켜서 비추이는 등불이라고 하신 이 요한은 어떤 요한을 가리키는 말씀입니까?
예 침례 요한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사도 요한이 지금 침례요한을 비취는 빛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한 때 그 빛에 즐거이 있기를 원하였다 하셨죠?
요한의 무엇이 등불과 빛과 같은 역할을 했다는 말씀입니까?
그 다음 말씀을 보면 요한의 어떤 것이 빛의 역할과 등불과 같은 역할을 하였는지 알 수 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요 5:36 “내게는 요한의 증거보다 더 큰 증거가 있으니 아버지께서 내게 주사 이루게 하시는 역사 곧 내가 하는 그 역사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것이요”
요한의 무엇이라고 합니까? 증거,
그러면서 예수님은 내게는 요한의 무엇보다 더 큰 증거가 있다고 하십니까?
요한의 증거보다 라고 합니다.
이제 요한복음 5장에서 말하는 등불의 의미가 들어났습니까?
등불은 빛을 가리키고요, 그 빛은 증거를 가리킴이다, 이해하셨습니까?
우리 성도님들 여러분들에게는 어떤 증거들이 있습니까?
어떤 증거가 있느냐라는 말씀은 어떤 등불을 가지고 있는가? 또는 어떤 빛을 가지고 있는가 라는 말씀과 같은 말씀으로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사람마다 다 증거들이 있습니다. 무슨 말일까요?
그 증거를 사도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고후 2:15-16 “우리는 구원 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
우리는 그리스도의 무엇이라고 합니까? 향기니,
향기를 다른 말로 하면 무엇이라 합니까?
향기는 좀 고상한 표현이고요, 순수 우리 말은 무슨 말을 사용합니까?
향기니 라고 기록하고요 사도는 그 다음 문장에서 16절에 향기를 무엇으로 바꾸어 기록합니까?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부터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부터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합니다.
향기와 냄새가 비슷한 말입니까?
저는 금요일 저녁마다 창세기를 하면서 야곱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무슨 냄새 많이 나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까? 사람 냄새 많이 나는 사람,
좋은 냄새라는 말입니까? 좋지 않은 냄새라는 말입니까?
아니사람이 사람 냄새 풍기는 것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말하는 사람 냄새는 어떤 냄새를 의미합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알기 전의 우리를 통해서 풍겨 나왔던 그러한 냄새를 의미 합니다.
누가 그런 냄새를 많이 풍기면서 살았다고요? 야곱이.
그러나 야곱의 삶을 살펴보면 얍복강 이후로는 사람의 냄새가 풍기지 않고 온전히 예수그리스도의 향기만이 풍기면서 살았던 야곱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냄새와 향기의 글을 기록한 사도 바울은 어떠합니까?
그도 사람 냄새 많이 풍기면서 살았습니까? 언제까지요?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 사람 냄새,
사도 바울의 표현으로는 그거 맡으면 죽는 그런 냄새를 풍기면서 살았다.
그런 냄새를 풍기면서 살았던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이런 간증을 합니다.
빌 3:7-11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게 유익하던 것을 어떻게 했다고 합니까? 배설물로 여겼다.
무엇을 가지고 배설물이라 합니까? 사람의 몸에서 불필요하다고 해서 몸이 빼 내는 것들이죠? 고상한 표현을 해서 배설물이라고 하는데 똥과 오줌이죠?
어떤 사람들은 그것도 약이라고 하면서 먹으라고 하는 사람들 있는데 약이 될지는 모르지만 몸에서 필요 없다고 버리는 것을 다시 잡아 넣는다는 것은 자기 몸을 학대하는 행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혹 그런 소리 들으시면 듣지 않은 것으로 하시길 바랍니다.
똥 이야기를 해서 죄송합니다만 똥이 냄세가 납니까?
어떤 똥은 냄새가 아주 고약하게 나죠?
무엇이 그렇다는 말입니까? 야곱이 피웠던 사람 냄세가 그러하였다.
사도 바울이 피웠던 예수님을 알기 전의 고약한 냄새들이 그런 냄새였다고 합니다.
바울에 의하면 그런 것이 어떤 것이었다고 합니까?
빌립보서 3장 7절을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빌 3: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똥 냄새 나는 것들이 어떤 것이라고 합니까?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이라고 합니다,
그 유익하던 것들이 예수님을 알고 나니까 무엇이라는 것입니까? 그런 것이 똥 냄새를 피우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 그것이 무엇인지는 말씀 드리지 않겠습니다.
우리 성도님들 각자가 판단하길 바랍니다,
더욱이 하나님을 믿는 일에 방해가 되는 것들은 똥이 아니라 그런 것은 썩은 똥입니다. 악취가 나는 나의 신앙과 믿음을 좀 먹는, 나로 하여금 죽게 할 뿐 아니라 나를 접하는 사람들에게 까지 죽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거보다 더 필요한 부활의 권능이 우리의 삶을 통해 나타나는 은혜의 삶을 살아가시길 축복합니다.
그 향기 다른 말로는 냄새가 빛과 등불과 같은 역할을 한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그럼 우리의 삶에서 똥 냄새가 나지 않고 생명을 주는 향기가 나도록 살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다른 말로는 우리의 증거가 우리가 가진 빛이 생명을 줄 수 있는 빛으로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 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이라고 사도는 말합니다.
버려라 합니다. 무엇을 버려야 할까요?
똥 냄새 나는 것을 안고 있으면 똥 냄새가 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광야의 이스라엘을 언급하면서 이스라엘이 버려야 할 것들을 버리지 않고 하나님을 버렸다는 말씀을 볼 수가 있습니다.
신 31:16 “또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제 조상과 함께 누우려니와 이 백성은 그 땅으로 들어가 음란히 그 땅의 이방 신들을 따르며 일어날 것이요 나를 버리고 내가 그들과 맺은 언약을 어길 것이라”
누구를 버리고 누구를 따랐다고 합니까?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신 들을 따랐다.
광야의 이스라엘은 오늘 교회의 모습을 과거의 백성들을 통해 보여주는 거울입니다.
그들이 누구를 버렸다고 합니까? 버려야 할 자신을 버리지 않고요,
버려야 할 자기 속에 있는 똥 냄새 나는 자아를 버리지 않고요, 누구를 버렸다고요?
자기를 지으시고 인도하시는 빛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버렸다.
빛을 버리니 어둠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의 향기를 버리고 똥을 안고 있으니 구린 냄새 똥 냄새가 나는 것입니다.
처녀 총각을 만나게 해 주고 나중에 이야기를 들으니 냄새가 나서 싫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에게서 나는 상징적인 냄새 말고 진짜 냄세 있죠?
그런 냄새가 나서 싫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애고 진작 알았으면 입에 향수를 좀 뿌리고 만나라 할 것을 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집사람은 속에서 올라오는 냄새는 입에 향수를 뿌린다고 없어지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런 냄새 싫죠, 그 보다 더 나쁜 것이 우리의 삶에서 버리지 못하는 자아가 나타나는 나의 삶을 통하여 풍겨나오는 냄새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모습은 제가 가장 많은 죄인중의 괴수의 모습임을 고백합니다.
저도 그러한 저의 모습을 버리려고 기도하면서 노력을 하고 있는데 잘 되지 않습니다.
얼마 전 성도님들과 대화를 하면서 우리 장 의자를 바꾸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가 나오게 되었고요 이제 오시는 목사님이 타원식 원탁과 의자에 대한 말씀을 하시드라 하는 이야기를 듣고 저의 목소리의 톤이 좀 높았죠,
제가 나쁘게 한 말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했는데 들으시는 분들에게는 저의 똥 냄새였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런 예기를 들어도 좀 더 부드럽게 말씀을 드려야 되었는데 너무 죄송합니다.
그때 그러한 말을 들으신 모든 분들게 진심으로 사과를 드립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하여도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데 하는 생각을 하면서 똥과 같은 저의 그런 모습을 버리려고 오늘도 기도를 드리면서 마음을 다 잡습니다.
우리 성도님들 우리 모두의 삶에서 똥 냄새 나는 옛 사람을 다 버리게 되길 소망합니다.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아까워서 버리기가 싫지는 않습니까?
버리고 싶은데 잘 버려 지던가요? 잘 버려지면 우리 모두가 다 버렸을텐데 그게 잘 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까?
이제 그것을 버릴 수 있는 비결을 말씀드리려 합니다.
무슨 비결요? 똥을 버릴 수 있는 비결요,
제가 버렸기 때문에 드리는 말씀이 아니고요 함께 버리자고 드리는 말씀임을 이해하시길 바랍니다.
어느 교회의 안식일 학교 시간이었습니다.
안교단 옆에 탁자가 놓여 있고 탁자 위에는 유리로 된 항아리가 놓여 있고요 그 안에는 물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렇게 준비된 다음 순서자가 나왔습니다.
이 항아리의 물을 손을 대지 않고 비울 수 있는 방법을 아시는 분이 있으면 나오라고 하였습니다.
아무도 나오지 않자 순서자는 미리 준비해 놓은 항아리 보다 넒은 대야를 준비하고는 대야 안에 항아리를 담고요.
항아리 안에 미리 준비한 돌을 집어 넣엇습니다.
돌이 하나 둘 넣을 때 마다 무엇이 넘쳐 흘렀습니까?
돌을 항아리 가득 집어넣으니 그 많큼 물이 항아리에서 대야로 흘러 나왔습니다.
그리고 틈 사이로 인조 방수 모래를 집어 넣었습니다.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항아리 속에 있는 물이 거의 다 비워 졌습니다.
그리고 순서자는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더러운 죄악들 이기심들 그리고 나의 자아들을 제거하려고 하면 할수록 할 수 없다는 것을 느끼지 않습니까?
그러나 나의 마음에 돌 되시는 예수그리스도를 넣으면 넣는 만큼 내 맘속에 있는 더러운 것이 빠져 나갑니다 라고 했습니다.
이 정도만 말씀 드리면 무슨 말씀인지 감이 잡히십니까?
우리의 마음에 있는 악취나는 더러운 것을 내 버리려 하지 마시고 무엇을 채우자고요?
예수님으로 채우자.
이러한 어두운 공간, 그 어둠을 몰아 내기 위하여 바가지로 퍼내면 될까요?
선풍기를 동원하면 될까요?
선풍기로 밤 새도록 붙여도 어둠을 물러가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어둠을 날라 가게 하는지 우리 성도님들 다 잘 아시지 않습니까?
어떻게 하면 됩니까?
불을 켜라! 불을 켜면 어둠이 물러갑니까?
성냥개비와 같은 아무리 작은 불이라 할 찌라도 불을 켜는 순간 어떻게 됩니까?
오늘 저는 등불의 목적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등불의 목적이 많이 있지만 오늘 제가 드리는 목적은 무엇인 것 같습니까?
어둠을 몰아내고요? 길을 밝혀 줍니다.
성경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마 5: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너희는 무엇이라고요? 세상의 빛이라.
여름밤에 빛을 보고 무엇이 모여 드는 것을 볼 수 있습니까? 모기들이 모여든다.
우리가 진짜 빛이라면 우릴 보고 모기와 같은 사람들이 모여 들 수 있다는 말입니까?
한 장님이 있었습니다,
장님에게는 밤이나 낮이나 똑 같죠?
그런데 그분이 등불을 들고 길을 나섰습니다.
다른 분이 말합니다.
아니 등불이 있으나 없으나 똑 같을 텐데 왜 등불을 켜서 가시려 합니까? 하니
그 장님의 말씀 나는 보이지 않으나 다른 사람이 나의 등불을 보고 나를 피해서 갈 것 아닙니까 하드랍니다.
나를 위함이 아니라 누구를 위하여 등을 들고 간다는 말입니까? 남을 위하여.
우리 성도님들 우리 자신만을 위하여서 그리고 죽어가는 영혼들을 위하여서 영혼의 불을 켜고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등불을 들고 가는 장님이 등불을 들고 가다가 다른 사람과 부딫쳤습니다.
그러니 장님이 화가 났습니다.
아니 여보슈 내가 당신 같은 사람을 위하여 등불을 들고 다니는데 이 불이 보이지 않습니까? 왜 부딫칩니까? 라고 화를 내면서 말을 하니 부딫친 사람이 당신의 불이 꺼져 있습니다 라고 하드랍니다.
불이 어떻게 되었다고요?
우리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가 다른 사람과 부딫칠 때가 있습니까?
그럴 때는 무엇이 꺼져 있다고요? 등불이 꺼져 있다.
등불이 꺼져 있다는 말씀은 내 마음이 무엇이 없다는 말씀과 같다는 것을 이해하셨습니까? 내 마음에 예수가 없다.
그럼 내 마음에 불을 밝히기 위하여서는 내 마음에 누구를 모셔야 합니까? 예수를
어떻게 하면 예수를 내 마음에 모실 수 있습니까?
저는 20년 가까이 그런 말씀을 자주 그리고 많이 드렸습니다.
드리면 무엇을 합니까?
저의 마음에 예수님을 모시고 산다고 생각을 하였는데 순간 순간 예수님 없는 저의 모습을 우리 성도님들에게 보였으니 그 모든 것이 다 거짓이라는 것을 보이면서 20년을 살았으니 그러한 말씀을 들으신 우리 성도님들의 삶의 모습이 변할 리가 없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정말 희망없는 저의 모습을 다시 보면서 회개하였습니다.
그런 모습의 삶이 언제까지 일지는 모르지만 주님 께서 저의 삶을 고쳐 주실 것을 믿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예수님을 내 마음에 모시는 것일가요?
오 예수님 저의 마음을 엽니다 내 마음에 들어와 계시옵소서 라고 기도하면 예수님께서 내 마음에 들어와 계시나요?
물론 그런 기도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정확한 수학적인 방법이 있습니다.
내 마음에 예수님을 모시는 방법요.
요한복음 1장 1절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이곳에 언급하신 말씀이 누구라고 하십니까?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시다.
그러한 말씀을 기록한 요한복음 15장은 우리 마음에 예수님께서 거하시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 볼 수 없고요, 필요한 말씀만을 올립니다.
요 15: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두 동작이 동시에 일어납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으면 예수님도 우리 안에 계시고요?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면 나도 예수님 안에 있는 것이다. 이해하셨습니까?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를 다음절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요 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드리는 말씀 중에 한 가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죠? 무엇입니까?
우리 안에 예수께서 거하시는 것이 무엇임을 가르쳐 줍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있는 상태입니다.
다음 말씀 올립니다.
요 15:10 “내가 아버지의 계명을 지켜 그의 사랑 안에 거하는 것 같이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
정확한 답이 나왔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 안에 예수님 안에 있는 것이고요.
예수님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기록된 삶으로 살아가는 것이 예수님 우리 안에 내 안에 거하시는 삶입니다.
우리 성도님들 여러분들의 심령 안에 예수께서 계시나요?
저의 모습을 보시지 마시고 전해지는 말씀만 받으시길 바랍니다.
말씀이 우리의 삶을 주장하는 삶 그것이 빛을 발하는 삶이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한 목적이 무엇이라고요? 영혼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로 작용하게 된다.
우리 성도님들 우리 모두 말씀 안에 살아가길 소망합니다.
그렇게 하고는 내 모습 보시지 마시고요 오직 말씀만 보시길 바랍니다.
내 모습 보면 언제나 변화되지 못한 모습만 보입니다. 그게 거듭난 사람들의 정상적인 모습이고요. 그래서 내 모습 보고 남도 판단하지 마시고 나도 판단하지 마시고 오직 말씀만을 바라보시고 말씀만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우리 성도님들 우리 마음에 기록된 말씀이 우리의 삶을 통하여 나타나게 되길 소망합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하나님의 사람들로 살아가다가 자기것을 찾으시기 위해 오시는 주님의 영광스런 재림의 날에 하늘 창고에 알곡으로 거두어 들임을 받으시는 은혜가 우리 모두와 함게하길 축복합니다.
기도
하늘에 계시는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의 심령에 말씀이 없으면서도 내가 빛으로 산다고 착각한 허물들을 용서하여 주소서 날마다 말씀을 먹음으로 말씀이 우리의 삶을 주관하여 말씀의 사람들 하나님의 사람들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우릴 사랑하시되 세상 끝까지 사랑하실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눅 8:16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그릇으로 덮거나
평상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들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숨은 것이 장차 드러나지 아니할 것이 없고
감추인 것이 장차 알려지고 나타나지 않을 것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들을까 스스로 삼가라
누구든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줄로 아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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