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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s://blog.naver.com/jkp5732/221159036760
오늘날 칼빈주의를 말하면, 오해와 비난의 소리를 종종 들을 수 있다. 이들은 칼빈주의에 대해 악의에 찬 비난의 목소리를 동원하여, 칼빈을 비난하는 이유가 하나님 주권에 대한 강한 주장과 예정론 때문이다. 저들은 예정론을 주장하면, 사람들이 자신이 선택되었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에 거룩한 삶을 위한 노력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를 들어서 칼빈주의를 비난한다. 그러나 그것은 청교도들의 경건을 통하여 그들의 선입견이 잘못되었음을 입증하였다.
칼빈의 신학은 칭의에 머물렀던 신학이 아니었다. 그는 구원의 문제를 다루면서도, 결코 오늘날 복음주의에서 범하고 있는 쉽고 간편한 구원을 가르치지도 않았다. 4영리에 의한 복음전도와 함께 영접기도를 하게하고 나서 ‘당신은 구원을 받았습니다.’라고 선언하는 복음은 분명 칼빈주의적인 것이 될 수 없다. 칼빈은 구원에 관하여 좀 더 심각하게 다루었다.
그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성도는 마땅히 성도의 열매를 맺는 것을 주장하였다. 그래서 그에게 칭의와 성화는 논리적으로 구분되지만, 사실상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그것을 믿는 성도에게 당연히 적용되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이며, 체험적으로는 구분될 수 없는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들은 자연스럽게 거룩한 삶을 살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나무는 그 성향의 열매를 맺기 때문이다. 칼빈의 뒤를 이은 개혁주의 신학은 성화 없는 믿음은 상상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교의학에서 ‘일시적인 믿음’과 ‘지속적인 믿음’을 구분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일시적인 믿음’은 거짓 믿음이나 ‘지속적인 믿음’은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닮아간다. 즉 칼빈뿐만 아니라 그의 후계자를 자처하는 개혁주의 신학은 끊임없이 성화를 강조하였다.
진실로 칼빈은 성화의 신학자였다. 사실 16C 교회개혁은 루터의 칭의론 발견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사도바울이후 이신칭의 교리의 발견은 루터 이전에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루터의 이신칭의 교리는 그 이후 참 기독교의 표지가 되는 중요한 교리가 되었다. 칼빈 역시 칭의론을 소중히 다루었으나, 또한 칭의가 교회개혁의 주요점이며 핵심교리이지만 그 자체가 신앙생활의 목표가 아니라 참된 경건의 바탕이며 출발점이었을 뿐이다. 오히려 칼빈은 하나님 앞에서의 거룩한 삶에 관심을 두었다. 그리하여 “칼 바르트조차도 칼빈을 성화의 신학자라 하였다.”
칼빈의 성화론은 기독론적 바탕에서 종말론적 내세론의 소망을 두고 진행된다. 그는 자신의 성화론을 자신의 강요 제 3권 6장에서부터 시작하여 10장에 걸쳐서 기독신자의 생활은 자신을 부정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러한 삶의 방편은 십자가를 지는 삶으로써 십자가를 통하여 그가 성화를 이루어가며, 내세를 갈망하고 점점 그리스도를 닮아간다고 주장하였다. 욥이 고난을 통하여 흠 없는 그리스도의 위격을 발견하는 것이 어거스틴의 주장이라면, 칼빈에게는 성도의 십자가의 삶과 고난을 통하여,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깨닫고, 옛 사람의 습관과 가치관을 저버리고, 옛 사람에게 어리석어 보이던 새 사람의 가치관을 가지게 되며, 내세를 소망하고 거룩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멜랑히톤은 성화를 철저하게 구원론적 입장에서 정리하였다. 그렇게 하면서, 성화의 주제가 될 수 있는 환난과 십자가의 삶에 대해서는 성화와는 별도로 취급하여서, 성화에 대한 깊이 있고 연속성 있는 고찰을 하는데에 실패하였다. 후세의 개혁주의 신학도, 칼빈의 기독론적 입장에서의 성화를 고찰하는 예를 따르지는 않았다. 오히려 성령의 사역 편에 속한 구원론적 입장에서 구원의 서정과 관련한 성화를 언급하였다. 그렇게 함으로써 성화의 또 다른 측면인 십자가의 삶과 고난에 대한 언급은 별도로 취급함으로써 성화론에 대한 집중적인 고찰을 흐려버렸다. 진실로 칼빈의 성화론은 그의 체험이 깊숙이 고백되어지는 지상최고의 성화론일 것이다.
(1) 기독교인의 생활동기로써의 성화
칼빈에게 거룩한 삶은 “기독신자들의 생활 동기”였다. 여기에 몇 가지 의미가 있다. 첫 번째는 ‘기독신자들의’ 생활 동기라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기독교인에게 필수적으로 있어야 할 것임을 의미한다. 진실로 성화가 없는 그리스도인은 이미 죽은 그리스도인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곧 죽은 믿음이기 때문이다.
그 다음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거룩이 그리스도인의 ‘생활 동기’라는 것이다. 즉 생활의 ‘결과’가 아니라 ‘동기’이다. 우리의 거룩한 삶은 생활의 결과가 아니다. 우리는 여전히 이 세상에서 불완전하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성화가 혹은 거룩한 삶이 우리의 결과라고 한다면 그것은 자기기만이 되거나 혹은 우리의 비참함이 될 것이다. 만약 거룩이 우리의 생활결과라고 한다면, 우리는 하루하루 삶에서 자신이 거룩하지 못함을 볼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두 가지 형태를 나타낼 수밖에 없는데 하나는 바리새인처럼 거룩을 위장하는 자기기만에 빠지거나, 또 다른 하나는 자신의 거룩하지 못함을 솔직하게 바라보며 비참한 자신에 대하여 더 이상 소망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거룩은 우리의 생활 ‘동기’이므로 우리는 지금의 모습을 보고 결산을 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을 목표로 나아가고 있다.
더욱더 은혜로운 것은 “첫째는 우리의 본질상 전혀 하고 싶지도 않는 의를 사랑하는 것을 우리 마음속에 부어주어 또 확립하게 하는 것이고, 둘째는 그 의를 위하여 애쓸 때 우리가 이리저리 방황하지 않도록 우리에게 어떤 규칙을 작정해 준다는 것이다.” 여기서 칼빈이 제시하는 규칙은 바로 성경이었다.
비록 우리가 거룩이 그리스도인들의 생활 동기라 할지라도, 우리는 역시 우리의 본 모습에 실망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본질은 의에 대하여 전혀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의로운 삶은 바보 같은 삶일 뿐이다. 오직 육신에게 관심을 끌게 하는 것은, 쾌락과 끊임없는 자기사랑이다. 그렇다 우리는 전적으로 타락하였다. 그래서 우리 본성이 요구하는 것은 거룩과는 전혀 거리가 멀다. 인간과 하나님은 정 반대이다. 그래서 “심히 부패한 인간을 바로 아는 것이 전능하시고 절대적으로 선하신 하나님을 아는 것이며,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이 자신을 바로 아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사람과 하나님의 성품은 본질상 반대이며, 원수 되어서 하나님의 진노의 그릇이었으나 하나님께서는 그 택한 자에게 의를 사랑하는 것을 우리 마음속에 부어주신다는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의에 대해 즐겨 확립하도록 도와주신다. 바로 성령께서는 우리를 감동시키실 때, 거룩을 사랑하도록 도와주신다. 그 일을 위하여 아직 우리와 원수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꾸준히 자신을 계시하시면서, 인간에 대한 구원의 길을 열어두시고, 그 아들을 보내셨다.
우리에게 의를 사랑하는 마음을 부어주신다 하더라도, 방향이 없으면, 우리는 헛된 에너지를 소비할 것이다. 우리 속에서 가르치시는 성령님은 한정이 없으시지만, 우리는 성령께서 가르치는 것을 다 이해할 수 없다. 더구나 성령께서는 말씀과 함께 역사하신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서 ‘우리가 의를 위하여 애쓸 때 어떤 규칙을 작정해주셨다는 것’이다.
우리가 거룩해야 할 첫 번째 이유는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이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시므로, 죄를 싫어하신다. 그분이 죄를 싫어하시는 정도를 논하자면 그 아들을 보내어 죽이기까지 죄를 싫어하신다. 그러므로 죄를 싫어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광의 본질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를 위하여서는 그 분의 목적에 맞추어야만 한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에게 거룩을 요구하셨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연합관계에 있을 때 해결된다. 우리는 죄를 완전히 끊지는 못하지만, 우리는 전 생애를 불의와 불결에 맡기지도 않는다. 이미 하나님과 연결 될 때 하나님의 성결을 부음 받고, 그것이 그와 우리의 연결의 줄이 되기 때문이다.
특히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백성들이 거하는 예루살렘성은 거룩한 곳이다. 그러한 거룩한 곳에 살기 위해서는 우리도 거룩해야 한다. 우리가 더러움으로 거룩한 예루살렘을 훼손시켜서는 안 된다.
(2) 기독론적 바탕에서의 성화
성경이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활에 대한 창시자요 또 그것을 묶고 계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생활 방식의 창시자가 하나님이심을 나타낸다. 왜냐하면 그분이 우리를 창조하셨을 때 삶의 방식까지 창조하셨을 것이라는 것은 명확한 논리적 귀결이다. 이것은 목적론적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하나님의 형상인 우리도 어떤 기계를 만들 때 반드시 목적이 있고, 그 목적에 따라 그 기능을 발하도록 설계를 하며, 그 기계의 움직이는 방식까지 창조한다. 우리의 생활 방식은 하나님을 범사에 인정하는 것이며, 또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거기에 모든 생활의 원리가 있다.
성경은 또한 우리가 우리의 창조주의 참 근원과 창조 때의 원 상태로부터 타락하였다는 것을 가르친다. 아담과 하와는 역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창조되었다.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금하신 이유는 그들이 선악과를 보면서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의 완전한 선택권을 사용하여,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써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삶의 방식까지도 왜곡하였다.
기계가 그 사용가치를 잃으면 인간은 그 기계를 폐기처분한다. 시골에서는 새벽을 알려야 할 수탉이 초저녁에 울면 잡아버린다. 인간은 자신들의 목적에 부합하지 않은 자신들의 개발품이나 혹은 가축에 대해서 냉정하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서는 이미 가치를 잃은 인간을 그냥 버리시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분께서는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다시 인간이 마땅히 생활해야 할 방식을 되찾게 하셨다. 그 방식은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그분께서는 완전하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으로써 율법을 완전히 순종하셨다.
그리고 그분의 십자가의 수난과 죽으심,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 죄를 대속하시고, 우리와 하나님이 화해하게 하셨다. 이것은 인간으로 오신 예수께 있는 신성과 인성의 양성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우리의 죄는 하나님께 대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자격이 있으신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또한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용서하실 방법을 제시할 수 있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에 대해서 ‘죽음’을 선언하셨다.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대신 누군가가 죽어야만 했었다. 이것은 채권자와 채무자의 관계에서 성립되는 법정적인 관계이다. 즉 채권자가 채무자에게 납부의 의무를 부여했지만, 만약 채무자가 납부할 능력이 없는데 누군가 제3자가 대신 납부한다면, 채권자는 그것으로 채무자에게 다시 납부를 강요하지 않을 것이며, 채무자 또한 채권자에게 자유로울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은 모두 죄인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채권자 하나님께 대하여 제3자의 자격을 갖출 사람은 없었다. 모두 자기 죄에 대하여 죽을 뿐이었다.
다만 우리 구주 예수님께서는 인간으로 오셨다. 그분은 인간이시기 이전에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완전하셨으며, 또한 인간이셨기에 우리의 연약함을 모두 경험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율법에 완전히 순종하셨다. 인간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대신해서 죽으셨다. 그분만이 하나님과 인간관계에서 일어나는, 즉 채권자와 채무자의 관계에서 제3자가 되실 수 있었으며, 또 그분은 대신 우리의 빚을 갚아주실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진실로 하나님이시기에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죄에 대한 완전한 청산을 보증하실 수 있으시다. 그분은 바로 그렇게 죄 많고, 부족한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셨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그를 닮아가게 하셨다.
그러므로 칼빈은 말한다. “성경은 단지 우리의 생활을 그 창시자요 또 그것을 묶고 있는 하나님께 속해야 할 것을 명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창조주의 참 근원과 창조 때의 원상태로부터 타락하였다는 것을 가르친 후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은혜 가운데 하나님께 화해되게 하여 그리스도를 모범으로 우리 앞에 세워 주어서 우리의 삶에서 그의 형상을 나타내도록 부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성화의 모범이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성화의 담보이시며, 우리의 성화의 비밀이시다. 우리의 성화는 그 분 안에서 일어난다. 따라서 만약 그리스도인인데도 불구하고 성화가 없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성화의 담보가 되신 것이 실패로 끝났다는 얘기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구세주 되심이 거짓이라는 말이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담보를 ‘칭의’를 통하여 이미 찾으셨고, 또한 성화를 통하여 점점 찾아가실 것이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며, 동시에 지혜가 출중하신 분이시다. 사람이 망대를 세울 때도 자신의 재산능력을 계산한다. 또한 적군이 올 때, 그 적군의 숫자를 헤아리고 우리 군사력과 비교하여 싸울 것인지, 아니면 급히 화해할 것인지를 결정한다. 우리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담보로 정하실 정도로 그분은 우리의 성화를 기대하셨다. 그 기대는 우리에게 하시는 기대가 아니라, 하나님 당신의 능력에 대하여 스스로 기대를 걸고 계시는 것이다. 이 담보에 의하여, 우리의 성화가 지금은 미미하나, 이미 확정적인 것이다.
담보의 내용이 무엇인가? 그리스도를 우리의 생활 가운데서 재현하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낮아지심과 높아지심이 우리의 생활 가운데서 재현된다. 그리스도의 율법에 대한 무조건적이고, 완전한 복종이 우리 생활 가운데서 재현된다. 그리스도의 하나님의 뜻을 구하시는 생활이 우리 생활 가운데서 재현된다.
우리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하셨다. 그때 마귀가 금식으로 인하여 주리신 예수께 제일 처음 낸 시험이 돌덩이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는 것이다. 우리 예수님께 돌덩이로 떡덩이가 되도록 하는 일은 매우 쉬운 일이다. 그러나 돌덩이로 떡덩이가 되게 하는 것이 누구를 위한 일인가? 광야에서 주리고 거의 죽을 것 같은 인성을 가지신 인간 예수를 위한 일이었다.
과거 아담과 하와는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서 선악과를 따먹었다. 그것을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는 허황된 소망에서이다. 원래 사람의 제일된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상실해버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돌덩이로 떡덩이를 만드시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도 아니요, 하나님의 뜻도 아니었기 때문에, 지금 죽을 것 같은 그런 상황에서도 자신의 능력 행사하시기를 거부하셨다. 바로 성도에게는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 것에 대한 그의 일관성 있는 생활이 재현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칼빈은 말한다. “우리를 주님께서 아들을 삼아 주신 것은 양자로 삼아 주신 담보 즉 그리스도를 우리의 생활 가운데서 재현하는 조건 아래서 된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의를 위하여 전심전력하지 않는 한 우리는 우리의 창조주로부터 극히 흉악하게 배반될 뿐만 아니라 그를 우리의 구주로 삼는 것까지 거절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우리의 성화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관계하여서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성부와의 관계에서 아들은 아버지를 닮는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하고 있다. 그런데 아버지는 거룩하시다. 아들은 아버지를 닮아야 하므로 거룩해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우리는 “배은망덕”을 저지르는 것이다.
성자와의 관계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그의 몸으로 접붙여 주셨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의 머리가 되신다. 머리 되신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를 접붙이시고 하늘로 승천하셨다. 인체를 바라보는 측면에서 그리스도께서 머리되시니, 몸은 자연적으로 머리의 지시를 따라야한다. 손과 발은 이에 대해 아무런 능력이 없다. 또한 권리도 없다. 요구되는 것은 오직 순종이다. 더구나 그분이 하늘로 승천하셨으니 우리는 필연적으로 저 천국을 소망해야 한다. 당연히 천국의 방식을 따라야 한다. 성경은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고 하였다.
성령님과의 관계에서, 성령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신전”으로 성별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거룩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무소부재하시지만, 그러나 이스라엘을 위해 성전을 특별히 구별하셨다. 그리고 거기에서 오직 하나님과만 관계하도록 하셨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개인적인 생활이 비록 경건 그 자체라 하더라도, 성전에서의 거룩은 분명 그것과도 구분되었다. 거기에는 오직 하나님이 정하신 방법대로의 예배만 있을 뿐이다.
종말론적 관점에서 거룩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하늘나라가 예비 되어 있다. 그곳은 흰 옷 입은 천사들이 있는 곳이며, 하얀 세마포를 입은 성도들이 거하는 곳이다. 성경에서 흰 옷을 얘기할 때 그것은 거룩을 의미한다. 즉 천국은 거룩한 자들이 가는 곳이다. 그곳에서 우리는 별과 같이 빛날 것이다. “우리의 영혼과 육체는 하늘나라의 불멸과 썩지 않는 면류관을 받도록 되어” 있다.
우리는 복음을 옳게 이해해야 한다. 만약 복음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다면,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도 성립하지 않는다. 만약 우리에게 행함이 없다면, 그가 아무리 유식하게 복음에 관하여 말한다 하더라도 그 지식은 거짓된 것이다. 또한 그 지식을 불법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다. 복음은 말만의 교훈이 아니다. 그것은 생활의 교훈이다. 복음은 이해나 기억이나 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영혼 전체를 점유하고, 마음의 가장 깊은 감정 가운데 그 자리와 안정을 찾을 때에만 소유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성화는 우리들이 그리스도와의 신비로운 연합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인하여 그의 몸에 접붙임을 당하였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믿는다면서 만약 성화가 없다면 그것은 올바른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가 없다. 그리고 그 성화는 전인격적이다. 왜냐하면 ‘복음의 효력은 철학자들의 냉담한 권고보다는 백배가 강하여 마음 속 깊이까지 출두하여 영혼 가운데 자리를 겸하여 전 인격을 뒤흔들기 때문이다.’
(3) 기독론적 바탕에서의 성화 : 예수님의 낮아지심과 죽으심(성도의 자기부정 : 옛 사람에 대해 죽음)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면서 완전할 수는 없다. 그러나 완전을 목표로 정해놓고 열심히 추구해야 한다. 완전의 기준은 말씀이다. 따라서 우리는 말씀 전체를 묵상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은 완전할 수 없다. 아담 이후 우리는 태생적으로 죄를 먹고 사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그래서 우리는 완전을 목표로 삼기 위해서는 죄의 본성을 가지고 있는 자신을 바라보면서, 죄 없으신 분을 바라보아야 한다.
여기에서 우리가 죄 많은 우리의 모습에서 탈피하여 완전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나를 부정해야 한다. 나를 부인할 때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인정하게 되며, 그리스도를 바라볼 수 있다. 더구나 우리의 몸과 우리의 모든 것은 우리의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창조주가 되시니,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만든 물건이 있다면 그것에 대해 주인의 권리를 행사한다. 심지어 우리가 만들지 않더라도, 우리가 값을 지불한 것에 대하여도 권리를 행사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유일한 창조자가 되신다. 거기에다가 피를 흘려 피 값을 지불하시기까지 하셨다. 따라서 그분이 우리의 주인 됨을 고백해야 할 것이다.
우리 몸이 우리 것이 아니라면, 우리 자신의 이성을 부정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 이성은 자신도 모르게, 자신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망각하고, 자기 자신을 위하도록 우리를 설득하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의 이성은 본능적으로, 우리의 영광을 구하며, 나의 유익을 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같은 선상에서 우리의 계획을 부정해야 한다. 또한 본능적으로 자기 자신을 위해 재빠르게 하기에 익숙하고 훈련되어진 우리의 행동을 부정해야 한다. 우리 자신을 위한 모든 것을 다 포기해야 한다. 그럴 때에 우리는 죄인 된 우리 자신의 추구하는 것에서 해방되며, 동시에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것을 바라볼 수 있다.
그래서 칼빈은 말한다.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성이나, 이지나, 자기 계획이나 행동에 지배되지 않도록 할 것이다. 또 우리 몸이 우리의 것이 아닌 이상, 육신에 따라 자기에게 유익된 것이나 구하는 데 목표를 두어서도 안되겠다. 할 수 있는 한 우리들 자신이나 우리들 자신의 것들을 모두 잊어버리도록 할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것이 아니므로 우리의 모든 것을 부정해야 한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것이므로, 우리의 전인격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전인격을 하나님께 드려야 함을 상기시키기 위해서, 또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기 위해서, 예배를 제정하셨다. 그러나 그러한 하나님께서 형식적인 예배를 싫어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범죄에 빠졌을 때, 그들의 제물을 싫어하신다고 선지자들을 통하여 질책하셨다. 우리 하나님께서 진정 원하시는 것은 산제사이다. 살아있는 제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고 그것을 행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일을 위해서 전심전력해야 한다. 그분이 우리의 주인인 이상, 우리는 그분의 지혜에 점령되어야 한다. 우리의 의지가 그분께 점령되어서 그분의 의지가 드러나야 한다. 우리의 어떤 부분도 그분과 상관없어서는 안된다. 성경은 믿음으로 하지 않는 것은 모두 죄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래서 칼빈은 말한다.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 것인 이상, 그를 위해서 살고, 그를 위해서 죽도록 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것인 한 그의 지혜와 의지가 우리의 행동 전체를 점령하도록 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것인 이상, 따라서 우리 생활의 모든 부분도 우리의 유일한 합법적인 목표로서 그에게로 정진토록 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그러한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리의 이성을 성령께 순복해야 한다. 내 생각이 성경과 틀리다면, 그것은 내가 틀린 것이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그것을 인정하기를 싫어하였다. 그들은 모든 면에서 자신들의 이성을 앞세웠다. 결과적으로 기적과 신비가 가득한 성경은 비평의 대상이었고, 그리스도는 그들이 만들어낸 그리스도에 불과했다. 사람이 스스로의 이성을 포기하지 못하는 죄악이 이와 같다. 이 얼마나 참람하고 비참한 일인가?
① 자기부정의 방법 1 : 하나님 영광을 구하라
앞에서도 밝혔지만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하여 우리의 옛 사람이 함께 못 박혔다. 따라서 우리는 더 이상 옛 사람에 속한 육신의 소욕을 구하지 않아야 한다. 나아가 우리의 새 사람이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살아났으며, 타락하기 이전의 아담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리스도의 구속사역과 함께 우리와 하나님사이에서 회복되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는 이제 우리를 자신의 보혈로 사셨다. 진작 우리가 하나님이 피조물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소유가 확실한데, 이제 예수께서 우리를 피로 사셨으니, 우리는 이중적으로 하나님의 소유가 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주께 속한 것을 추구하여야 하며 정진하여야 한다. 또 그의 영광을 구해야 할 것이다.
자기 부정을 이루는 방법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방법은 오직 말씀에 순종하는 방법이다. 최근 ‘신사도운동’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의 이단과 혹은 건전하지 못한 사상들이 교회 내에 침투해 있다. 일명 체험주의라고 할 수 있는 내용들에 대해 우리는 신중할 필요가 있다. 체험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을 그냥 일방적으로 귀문을 닫아서는 아니 될 것이다. 그들의 주장이 과연 성경적인지 비성경적인지를 먼저 따져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단이 아니지만 우리의 이웃 중에 체험주의자(오순절을 비롯한)들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둬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체험주의자들의 전체적인 주장은 건전하지 못하다. 그들은 먼저 체험을 통하여 알게 된 하나님을 얘기하려 하고, 체험을 통해서 알게 된 성경원리를 말하게 되며, 체험을 통해서 알게 된 진리를 말하려고 한다. 그러나 성경은 이미 우리에게 모든 것을 말씀하셨다. 체험주의자들이 부분적으로는 깊은 성경적 원리를 안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성경 전체를 살피려는 데에는 게으르고 또 신학을 논하는데 대해서는 체질적인 거부반응을 가지고 있음으로 말미암아 균형 잡힌 시각을 확보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들이 바른 은혜를 받고 바른 체험을 한다면, 성경원리에서 벗어나는 주장을 할 수는 없다.
성경은 우리에게 개인의 이해관계와 관련한 것들을 무시할 것을 명하신다. 물론 이 부분에서 우리는 분별을 해야 할 것이다. 이해관계와 관련한 모든 것을 무시하라고 할 때, 우리의 사업과 관련된 것이나 그 모든 것을 기준 없이 무시하라는 명령이 아니다. 어떠한 것이든 하나님 영광에 과연 지금 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것인지, 혹은 자신의 영광을 구하는 것인지를 분별해야 한다. 인간은 사실 그 자신의 양심에 스스로 그것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 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터럭 같은 이익을 위하여서는 양심을 속이고, 속으로는 자신의 영광을 구하면서 겉으로는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척, 매우 능숙하게 위선을 떤다.
바울은 자신에게 모든 권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복음을 위하여서, 믿음이 연약한자를 위하여서 먹는 것을 포기하였다. 먹어서 그에게 즐거움이 되었지만, 자신의 욕구보다 복음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가 더 귀중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끼치는 것이 아니다”는 것을 성도들에게 그의 서신을 통해 가르쳤다. 우리가 무시해야 할 개인의 이해는 소유욕이나 권세욕, 혹은 사람들의 호의를 얻으려는 기분 등도 있지만 “자기 야심”을 빼놓아서는 안된다.
우리는 교회의 일을 하면서도 그 일이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 자신의 일로써 일할 수 있다. 바로 “자기 야심”이 개입된 일들이다. 이러한 자기 야심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를 거부하며 자신이 그 영광을 받기를 원한다. 바벨탑을 쌓은 자들은 자신들의 영광을 구한 것이다. 그것은 세속적이며, 또한 하나님을 도전하는 죄악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자기 자신을 부정할 뿐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의 모든 것들을 컨트롤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성령님께 자신을 맡기기를 원한다. 그래서 칼빈은 말한다. “따라서 기독신자는 틀림없이 전 생애를 통하여 하나님께 상관하도록 마음을 다짐하고, 준비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같이 하여 그는 자기 전체의 일을 하나님의 결정과 판단에 맡기는 것처럼, 자기의 정신의 전체 의향을 하나님께 경건되이 바치게 될 것이니, 그것은 그가 해야 할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배운 사람은 동시에 모든 헛된 생각을 피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② 자기 부정의 방법 2 : 근신과 의로움과 경건을 구하라
자기 부정을 위해서 필요한 또 다른 하나는 근신과 의로움과 경건을 구하는 것이다. 근신과 의로움과 경건을 구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자신을 끊어야 한다. 여기에는 적극적인 끊음과 그에 따르는 아픔 내지는 고통을 수반한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그가 우리를 대신해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 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딛 2:11-14).”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 신앙을 고백하며, 구원의 큰 힘을 얻어서 주께 거룩한 삶을 살아갈 동력을 얻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여전히 죄의 흔적이 남아 있어서 이것이 방해가 된다. 본문에서는 그 방해가 되는 것을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남으로 제거됨을 얘기하고 있다. 그 방해가 되는 것은 바로 불경건과 세상정욕이다. 불경건은 바로 미신을 비롯한 “하나님을 간절히 두려워하는데 모순되는 모든 것”이다. 또한 세상정욕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등을 뜻한다.
이러한 장애물이 제거가 되면, 하나님께서는 근신과 의로움과 경건으로 그 인생이 모든 행동을 주관할 것을 명하신다. 즉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생의 생활의 원리는 근신, 의, 경건으로 축약된다. 근신과 의와 경건을 칼빈은 이렇게 정의하였다. “근신”은 “정절과 절제”이며 “금생에 있어서 물질을 손결하게, 그리고 절제 있게 사용하고 또 궁핍에 인내하는 것을 의미”하고 “의”는 “각 사람에게 자신의 것을 돌리기 위하여 공정한 의무를 포괄하는 것”이며, 경건은 “우리가 세상 불의로부터 성별할 때 참된 거룩함으로 하나님과 연합시켜 주는 것”을 의미한다.
③ 자기부정의 방법 3 : 십자가를 지라.
그리고 마지막 자기 부정을 하는 방법은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좇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 올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사도들은 신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 교회가 감당해야 할 고난에 대해서 언급을 하였다. 물론 그리스도의 고난과 교회가 감당할 고난은 질적인 차이가 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그 백성을 구원하는 데까지 이르렀으나, 성도들이 받는 고난은 다만 자기에게 분담된 고난에 불과하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되었다면, 그리고 그리스도가 우리의 머리라면, 우리의 고난은 사실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성도들에게 고난당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고 도리어 기쁘게 여기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완전한 아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야 했다(히 5:8).
이러한 차원에서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친 자녀들에게 수련과정을 주셨다. 그것은 그들이 수련을 통해 정금과 같이 되어서, 거룩하고 흠 없는 백성으로 만드시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점진적인 성화로 이어진다. 그래서 칼빈은 성도들이 마땅히 거쳐야 할 십자가 고난에 대하여 말하였다. “자기가 택한 친 자녀들이 체득하기 위하여 일정한 수련 과정을 이수케 하는 것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인 것이다.”
십자가는 우리의 교만을 꺾기 위해 필요하다. 우리는 아담의 혈통을 이어받아 태생적으로 교만하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말에 선악과가 보기에 아름답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도 보였다. 그 죄를 이어받은 우리는 우리 스스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항상 자기착각에 빠져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한 실체를 우리가 인식하게 하시기를 기뻐하신다. 우리는 십자가의 고난을 통하여 우리의 연약함을 절실하게 깨닫게 된다.
사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스스로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베드로가 말했던 “모든 사람이 다 주를 떠나갈지라도 저는 주를 떠나지 않겠습니다.”라는 장담 속에서 그는 닭이 울기 전의 시험은 꼭 필요했던 것이다. 만약 그런 상황을 만나지 않으면 우리는 남의 사정을 우습게 여기며, 자신은 절대로 흐트러지지 않고,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주 앞에 설 수 있다고 착각하면서 어쩔 수없는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지 못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천성적으로 잘되면 내 탓하고 못되면 남 탓하는 교만이 이미 몸에 배어있다.
그리하여 칼빈은 이러한 교만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지능적으로) 혈육에게 미련하게 그리고 쓸 데 없이 자신을 가지도록 으쓱해지며 다음에는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 없이 우리들 스스로의 능력만 가지고도 충분한 것처럼 하나님께 대적하여 완고하게 콧대를 높이게 되는 것이다.”
④ 관계에서의 자기부정 : 이웃을 존중할 것
성경은 사람들을 대한 행동이 우리들 보다 낫게 존중하라고 명하신다(빌 2:3). 그리고 전심전력하여 선을 행하라고 명하신다(롬 12:10). 그러나 우리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기본위의 사고방식에서 탈피하지 못한다. 그것은 때때로 집단우월의식으로도 드러난다. 백인들의 인종적 우월감, 헬라인들의 지식적 우월감, 중국인들은 자신의 우월감을 드러내기 위해 자신들의 주위 사람들을 모두 오랑캐로 인식했다. 안동 사람들은 대구이남 지역을 하도사람이라 해서 무시한다.
이러한 자기우월감을 드러내는 이유는 자기 스스로 의로운 것처럼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이라면 모두 가지고 있는 본능적인 자기방어이며, 동시에 자기만족이요, 허세이며, 위선이기도 하다. 따라서 우리 사람은 위의 말씀 즉 빌립보서 2장3절의 말씀이나 로마서 12장10절의 말씀을 자신의 노력으로는 도저히 지킬 수 없다. 위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는 우리의 본능에서 탈피해야 한다. 오직 그리스도와 함께 내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사람들 중 그래도 의식이 있는 사람은 자신보다 어떤 분야의 전문가에게 양보를 할 줄 안다. 그것은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였다. “가난한 자들은 부자들에게 양보를 했고, 평민은 귀족들에게, 종들은 주인에게, 무학자들은 학식 있는 자들에게 양보를 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양보 속에서도 자신의 우월성을 애써 찾으려 한다. 그리고 자신이 부족함을 느낄 때 열등감으로 인생을 우울하게 보낸다. 이웃과의 관계에서 자기부정은 자기 사랑을 없애는 것으로 나타난다. 자기 사랑을 없앴을 때, 우리는 열등감에서 해방되며, 애써 우월감을 찾으려 하지도 않는다.
⑤ 관계에서의 자기부정 : 이웃의 유익을 구할 것
사람들은 자신의 우월감을 애써 발견한 뒤에 곧 바로 자기만족에 빠져서 자기가 거의 완전하거나 혹은 가장 나은 것처럼 으쓱거리고, 그로 말미암아 자신을 즐겁게 하기를 원한다. 같은 선상에서 자신의 우월을 드러내기 위하여 남을 깎아내리기를 즐겨한다. 그러나 이런 “경쟁심과 자기 사랑이라는 가장 독한 역병”은 수술해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어떤 재능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관심이 당신의 나라에 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신 재능은 우리를 위해 사용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용하라고 주신 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용하라고 값없이 주셨다. 그래서 우리가 그 재능을 가지고 나의 우월감을 위해 사용하면서, 하나님이 주신 재능을 무단사용 내지는 불순종으로 이용할 때, 그것은 “자기의 배은망덕을 폭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복종에 겸손이 수반되어야 한다.
성경에는 달란트 비유가 기록되어 있다. 이 달란트는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사람의 분량만큼 주셨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존중해야 할 이유는 그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재능’을 주셨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각자에게 재능을 주셨고, 또 그 재능은 각자가 존경을 받도록 하신 것이다. 그런 만큼 우리는 각자에게 재능을 인정해주고 그들을 세워주어야 한다.
성경에서 달란트를 주셨을 때, 어떻게 사용하였으며 얼마를 남겼는지를 주님께서 직접 회계하신다. 또 다른 측면에서, 성경은 고린도전서를 통하여 특별한 은사를 말씀하셨다. 그 말씀 속에서 일만 마디 방언을 말하는 것 보다가도 다섯 마디의 예언이 낫다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방언은 교회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되지 못하나, 예언은 교회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어떤 은사를 받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은사들을 사랑으로 사용해야 할 것을 가르쳤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재능을 주신 그 자체가 나를 위해 사용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사용되어져야 하는데, 교회의 유익을 위하여, 이웃의 유익을 위하여 사용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부패한 우리의 심성으로는 모든 관심이 자기 자신에게 쏠릴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가 모든 재능을 나를 위해 쓰지 않고 이웃을 위해 사용하는 것에는 또 다른 자기 부정이 있다.
그래서 칼빈은 말한다. “성경은 손을 잡고, 우리를 여기까지 인도하여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은사들은 무엇이나 교회의 공통유익을 위하여 써야 한다는 조건 아래 우리에게 위탁하여 주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은사들을 정당하게 사용하는 것은, 이것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아낌없이, 그리고 사랑으로 나누는데 있는 것이다. 즉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은사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여해 주셨고 우리에게 위탁해 주신 것은 그것을 우리 이웃의 유익을 위하여 분배해야 된다는 조건 아래 되었다고 가르쳐 주고 있다.”
더구나 성경은 우리의 재능들이 각자에게 각각 다른 것을 들어서 지체에 견주고 있다. 지체는 서로 도와주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눈이 비록 모든 것을 본다고 하더라도, 눈은 반드시 손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손이 안경을 씌우기도 하며, 또 눈 보호를 위하여서 별도의 조치를 취할 수도 있다. 안약을 넣기도 한다. 손에 든 가시는 눈이 있어야 찾고 뽑을 수 있다. 따라서 이 지체의식을 영적인 것에 응용하면, 전체의 공동유익을 위하여 우리의 재능이 사용되어져야 함을 말한다.
⑥ 관계에서의 자기부정 : 이웃은 하나님의 형상임을 알 것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이스라엘 백성이 지켜야 할 율법을 주셨고, 그 율법의 핵심 속에는 십계명이 있었다. 이 십계명을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압축시키셨다. 이렇게 구약성경의 율법은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이다.
성경은 끊임없이 이웃을 향해 선을 행하라고 하신다. 설혹 그 사람이 대할 가치가 없는 자라도 우리는 그들을 향해서 선을 행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사람이 가치 없다고 할 때, 그것은 우리의 판단이지 하나님의 판단은 아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렇게 볼 때에는 우리 역시 비참한 존재요 또한 가치 없는 존재일 것이다. 우리가 가치가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의미를 부여해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악을 미워하라고는 가르쳤으나, 사람에 대해서는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가르쳤다. 또한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했을 때에도 분명 대할 가치조차 없는 자들이 우리의 싸움의 대상이 아님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우리의 대적은 오직 악으로부터 오는 영적인 존재들이다. 성경은 악한 사람에게도 너그러워질 것을 명하신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칼빈은 말한다. “우리는 그 사람의 악을 생각하지 않고, 그들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형상이 그들의 결함을 은폐하고, 또 말살하고 그 아름다움과 위엄을 가지고 우리를 끌어 그들을 사랑하고 받아들이도록 해 주는 것이다.”
⑦ 관계에서의 부정 : 하나님과 관계에서의 부정
우리는 몇 가지 이유에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부정하고 낮추어야 한다. 먼저 신분상의 문제를 생각할 수 있다. 하나님은 창조주며 우리는 피조물이다. 그분은 우리 아버지이시기 전에 우리의 주인이 되신다. 그리고 우리의 소유주가 되신다. 이런 신분관계상 우리의 복종은 필연적이다. 두 번째로는 신뢰의 문제에서 그러하다. 그분은 우리보다 훨씬 지혜롭다. 그리고 능력이 많으시다.
그런데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자기 아들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신다. 때때로 그분이 우리에게 행하시는 일들은 욥의 상황과 같이 부당해보일지라도 그분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 주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자신의 모든 소유를 주님의 뜻에 내맡기고, 우리의 마음의 감정을 그에게 맡겨 익힘을 받고 종속되도록 해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부정하기 위해서는 탐심과 야심을 피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출세를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출세에 대해서 남에게 높아지고자 하는 본성이 가세하여서 그 탐욕이 끝이 없다. 또한 우리 자신이 남에게 비천하게 보여서 남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무시당하는 것에 대하여 지나칠 정도로 민감하여 그곳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이러한 우리 본성이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방법에 순종할 수 없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부정하는 또 하나 가지 방법은 오직 하나님이 내려 주시는 복만을 바라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사악한 방법으로 우리의 욕구를 채우려는 것을 포기할 때, 오직 하나님만 바라볼 수 있다. 또한 하나님께서 부어주시지 않으시면 우리가 원하는 바는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파악해야 한다. 이렇게 우리 자신의 추악한 방법을 포기할 때 우리 하나님의 거룩하신 방법에 순종할 수 있다.
⑧ 자기 부정이 주는 유익 : 역경을 이김
자기부정을 통해 전적으로 주님을 의지하는 자는 어떤 비참한 일이 일어나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는다. 그 고통이 아무리 심각하고 자신에게 큰 위협이 된다 해도 눈에 보이는 문제 때문에 호들갑 떨지도 않는다. 그들은 발등에 불이 떨어짐과 같은 다급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주님만 바라본다. 진정 경건한 자는 공평하신 하나님의 주권을 바라보면서 절대적으로 주님을 신뢰하고 주님을 놓지 않는다. 이러한 자들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자들이다. 또한 어떠한 역경도 넘어뜨릴 수 없는 자들이다.
(4) 기독론적 바탕에서의 성화 : 예수님의 부활하심(성도의 새사람이 됨)
① 이웃 사랑의 원리에서 자기 부정으로 새 사람이 된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라고 했을 때 우리의 본성이 나를 먼저 위하기 때문에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존재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끊임없는 자기 부정으로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우리가 전심으로 이웃을 사랑하게 될 때, 우리 안에서 바로 그 하나님이 원하시는 새사람의 삶의 방식이 실현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부활과 더불어서 우리의 새사람이 사는 것은 바로 끊임없는 자기 부정을 통해 이웃을 사랑함으로써 나타난다. 이때 우리는 이웃을 향하여서 성령의 열매 중 어떤 것들을 맺게 된다.
그래서 칼빈은 말하였다. “우리가 사랑의 임무를 다하게 된다면 그 때에 비로소 ‘자기에게 죽은 것’이 우리 속에 자리를 점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을 성취하는 자, 사람의 모든 의무를 단지 다하는 자가 아니고 중심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감정으로부터 이름하는 자를 말하는 것이다.”
② 하나님이 주시는 복만을 바라봄으로 새사람이 된다.
이러한 믿음은 우리가 번영에 이르는 모든 방편과 성공이 오직 하나님의 복에만 의존하는 신앙이다. 이러한 신앙은 그 과정에서 예측하지 못한 어려운 시련이 닥치고, 또 인간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 법 한 방법이 눈에 보여서 자신을 유혹하더라도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이 인도하시는 대로만 가려고 한다. 이런 자들은 항상 결백에서 떠나지 않으려 하며 또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신경질을 내지 않는다.
③ 십자가를 짊어짐으로 새사람이 된다.
인간은 태생적으로 교만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십자가를 체험하게 하므로 자신이 얼마나 무능한지 철저하게 체험하게 하신다. 그렇게 하면서 자신에 대해 적나라하게 살피며 돌아보게 하셔서 겸손하게 하신다. 우리는 이런 십자가와 같은 고통 속에서 헤어나기를 원하지만 우리는 세상의 환경 속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세상의 재난, 혹은 사별, 치욕스러운 일들 등은 우리가 원하지 않는다고 우리를 피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인간은 이러한 일들을 당하면서도 미련하게 고집을 피우다가, 결국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가서야 굴복하고 만다. 아무리 이론적으로 하나님 앞에 숙여야 한다는 것을 안다고 하더라도, 막상 그 일이 닥치면 거덜이 나고 나서야 깨닫는 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다.
우리는 이런 상태에서 몇 가지 중요한 것을 깨닫는다. 우선은 이 세상의 모든 것에서 자신이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전혀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설혹 극복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허락 속에 이루어졌음을 겸손하게 시인하면서, 자신의 무능에 대해 더 이상 부정하지 않는다. 이 세상의 모든 일이 그분의 손길이 아니면 이루어질 수 없으며, 그분의 결제가 없으면 허락되어지지 않음을 알게 된다. 더구나 자신이 무능한 것 자체뿐만 아니라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알게 된다. 뻔히 알면서도 자신은 고집을 부릴 만큼 미련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러한 것을 깨달을 때 비로소 나에게는 새사람이 살아난다. 전에 인간이 보기에 지극히 미련하게 보이던 하나님의 방법을 의존하게 된다. 그리고 인간의 헛된 방법을 더 이상 사용함이 무익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칼빈은 말하였다. “겸손해지면 우리는 하나님의 힘을 불러 구하게 되는데, 이 힘만이 환란의 무거운 짐에 눌려도 굳게 설 수 있도록 해준다.” 이제 새사람이 살아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을 진정으로 구하게 된다.
우리가 평화로울 때는 우리의 힘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계명을 잘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께 정조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며 또 인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갑작스런 위협이 닥칠 때 본능적으로 자기 자신을 보호하느라 진리마저 외면하는 자신을 보고 “이 모든 것이 위선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러한 자기 발견이 있고 나서야 우리는 자기를 제대로 보고 잘못된 자기 자신을 부인한다. 그리고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에 자기를 위탁하는 것이다. 이러한 후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 힘이 우리를 충분히 보존하고 도와준다.”는 것을 얻게 된다.
십자가는 인내를 키워준다. 칼빈은 말하였다. “또 바울이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이룬다(롬 5:3-4).’라고 가르친 것은 이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환난 가운데서 신자들과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신 것을(고후 1:4) 참된 것이라고 체험하는 것은 하나님의 손의 보호를 받아 인내로 참아 나가는데, 그 인내야 말로 그들 자신의 힘을 가지고 인내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실제 필요할 때에 약속한 도움을 주신다는 사실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또 그들의 소망은 더 튼튼해지는데,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성실성이 확고부동 불변할 것임을 이미 체험하고 났으니, 그것을 앞으로 믿지 않는다는 것은 너무나도 배은망덕한 것인 때문이다.”
이러한 체험들로 우리 성품 속에 저절로 단련되어진(이것은 우리의 노력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의 반대 개념을 말하기 위함이다.) 인내와 또 체험을 통해 튼튼해진 소망은 범사에 유익하다. 이러한 체험들을 통하여 우리는 스스로의 힘을 과신하여 주제넘게 생각하던 자신의 허망한 과신에서 시작된 자신의 계획을 스스로 포기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 자신에게 스스로 속여서 “자신을 즐겁게 해주는 위선”의 실체를 알고 멀리한다. 자신이 그렇게도 자긍하고 자만하던 모습에서 돌이켜 겸손하게 되며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지하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을 바라보면서 그분만을 의지하게 될 때 우리는 절대로 낙심하지 않는다. 또한 절대로 주눅 들지 않는다. 그 분이 나의 하나님 되시는데 두려울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이때로부터 성도는 내 안에서부터 우러나오는 새사람의 삶이 몸에 습관적으로 배이게 된다. 우리 하나님께서 우리를 연단하실 때, 단지 우리를 인지하도록 연단하시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의 몸에 습관적으로 배이도록 연단하신다. 그리하여 내안에서부터 새사람이 점점 살아나고 옛사람이 죽는 것이다.
성도의 십자가의 고난 가운데,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잔잔하게 위로하시며 힘을 주신다. 암흑가운데 빛이 더 밝게 빛나듯이 환난가운데 위로는 환난으로 무너져 내릴 것 같던 성도의 가슴에는 여름철의 얼음냉수와 같다. 이러한 은총을 발견하면서 성도는 순종을 배우게 된다. 이러한 순종을 배울 때 그들은 “자기의 뜻대로 변덕을 부리며 살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도록” 배운다.
우리에게 십자가는 어떤 의미에서 일생동안 계속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방종하고자 하는 유혹에 항상 노출되어 있고,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조금만 유하게 하시면, 우리는 할 수 있는 대로 방종하기를 원한다. 그리하여 거룩한 부담에서도 벗어나기를 원한다.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께 매여서 하나님의 지배를 받으며 또한 그의 은혜에 감사하고 그를 사랑하며, 자진하여 하나님께 끌려가야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관대하신 잠시 동안을 틈타서 우리는 당장 방종에로 달려가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어떤 훈련을 통해서 견제하신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마치 가시와도 같은 것을 허락하신다. 그리하여 우리가 잘 될 때 의기양양하여 교만하지 않도록 하신다. 우리 주님께서는 참으로 우리에게 최선을 다하신다. 우리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시면서도 우리에게 가장 유익한 것을 주시는데, 십자가도 바로 그러한 유익한 것 중에 하나이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라는 구조책에 의해서 걷잡을 수 없는 우리 육의 교만을 꺾어 순복케 하고 억제하시는 것이다.” 고로 십자가를 통해 인간의 고질적인 병이 치료되면서 나의 새사람이 살아난다.
십자가는 아버지의 징계 역할을 한다. 징계가 없는 자는 사생아라고 하셨다. 그래서 사랑하는 아들에게 징계를 주신다. 이 징계를 통하여 새사람으로 살아가도록 유도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식일수록 작은 실수에도 곧 바로 매를 대신다. 그렇게 하시면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스타일을 알게 하신다. 이렇게 훈련 받은 주의 백성은 고난을 당할 때 과거를 회상하면서, 자신이 왜 이런 고난을 당하는지 알아차리게 된다. 우리 하나님께서 자신의 어떤 잘못을 징계하시는지 알아차리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주님께서 아예 징계를 통하여 우리가 어긋나지 않도록 끊임없이 살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 방식이다. 우리는 이런 징계를 통하여 진정한 아들로 살아가게 된다.
그러나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께서는 이 징계를 통하여 우리가 아예 멸망하도록 버려두시는 것은 아니다. 그분께서는 그 일을 통하여 당신이 직접 징계하시면서, 이 세상에게 우리가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도록 세워주신다. 아브라함이 자기 아내의 일로 실수가 많았으나, 하나님께서는 아내를 도로 찾게 하시면서 기왕에 아브라함이 애굽 왕을 위하여서, 또는 불레셋 왕을 위하여서 기도하게 하시면서 그의 권위를 세워 주셨다. 그래서 칼빈은 말한다. “그가 우리에게 괴로움을 주시는 것은 정리를 멸망시키거나 멸절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고, 도리어 세장 정죄로부터 자유케 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일을 통하여서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고 있는 우리의 신분을 재차 확신하게 되는 것이다.
십자가를 감당하는 것은 이미 우리가 새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이다. 사도들은 여러 곳에서 우리가 핍박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 예수님의 백성이란 증거라고 밝혔다. 그래서 고난당하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 하셨다. 또한 사도들도 옥에 갇혔을 때 자신들이 주를 위하여 옥에 갇히는 것을 기뻐하였다. 이와 같이 십자가란 의를 위하여 받는 핍박을 의미한다.
사탄은 끊임없이 우리를 기만하여 여러 가지 환난으로 빠뜨린다. 악한 자들을 격동하여 우리를 상해하기도 하며, 우리의 생명이나 재산을 위협할 수도 있다. 또한 우리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포기하므로 가난뱅이로 처참하게 살아갈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불평하지 말아야 할 것은 칼빈의 다음의 성경적 논리를 가지고 펼친 전개에서 위안을 얻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순진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면서 불경된 자들의 악행에 의해서 우리의 재산이 약탈당하는 경우, 우리는 실로 사람들 앞에서는 궁핍의 상태에까지 내려간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앞에서는 그 때문에 우리의 참 부가 더욱 늘어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우리 집에서 쫓겨나는 경우 그만큼 더 친밀하게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 가운데 영접이 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괴로움을 당하고 멸시를 받게 되는 경우, 그만큼 우리는 더욱 높은 지위를 하나님의 나라에서 차지하게 된다. 만약 우리가 죽임을 당한다 해도 그 때문에 복된 생애의 관문이 열리게 된다. 주님이 이렇게 크게 가치를 부여한 것을 현세의 그림자나 지나가 버리는 유혹물보다도 낮게 평가하는 일은,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가 없는 것이다.”무엇보다도 성도들은 십자가 고통을 통하여 결국 이 세상에서 천국을 누린다. 칼빈은 우리가 고난을 받을 때 그 십자가를 기쁘게 받지 않는 것은 “배은망덕한 죄”라고 얘기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마땅히 감당해야 할 것이며 동시에 많은 위로가 보장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십자가 고난을 통하여 고난에 대한 인내를 훈련받고, 끝내는 그 인내를 통하여 세상의 모든 환난에 대하여 물러서지 않고 싸운다. 바로 여기에서 성도는 하나님의 신령한 위로를 얻으며 만족하고 나아가서 성도는 “쾌활해질 수 있다.”
(5) 십자가의 결과 : 종말론적 내세의 소망을 향해 전진하는 성화
사람은 짐승과 같다. 즉 항상 자기 배만을 위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라 하더라도 십자가 고난이 없으면, 그들은 현세에 만족한다. 구약의 이스라엘 성도들이 가나안에서 풍성하게 될 때에 따라 온 것은 타락이었다. 곳곳에서 우상이 숭배되었으며, 하나님의 말씀은 무시되었다. 물질이 풍요롭고 평안할 때, 가장 경건적인 교회가 있던 곳이라도 타락함의 사실은 역사가 증명한다.
따라서 성도는 십자가 고난을 통하여, 현세를 직시하게 된다. 성도는 그 고난을 통하여 현세의 즐거움이 허망하다는 것도 안다. 이렇게 될 때에 우리는 더 이상 현세를 사랑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영생에 대한 갈망을 한다. 우리가 마땅히 할 일은 주님의 영광을 구하며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오직 주님만 사랑할 일이다.
우리는 현세에 대해 십자가 고난을 통하여 우리의 무절제와 사치를 엄격하게 제재하는 것이 마땅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금욕도 또한 방종 못지않게 위험한 생각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람의 양심을 주님의 말씀보다 더 엄하게 묶어 버리는 처사로써 매우 위험한 죄악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금욕도 죄악이고, 방종도 죄악이라면 그 기준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 칼빈은 이렇게 정리한다. “하나님의 선물들은 창시자 자신이 창조하셔서 우리를 위해 목적을 향하여 사용할 때에는 잘못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칼빈은 우리의 거룩한 삶 가운데서 누리는 것을 정죄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복을 어떻게 누릴 것인가? 칼빈은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복을 누릴 때 감사해야 한다. 또한 하늘나라의 영생을 바라보면서 이 세상에서의 과도한 사치를 절제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분수에 맞게 우리가 욕심 부리고 있는 것 없이도 참고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정당하게 누렸는지에 대해 결산할 날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또한 모두 자기 소명에 유의해야 한다. 칼빈은 소명을 말할 때 하나님께서 각자의 다른 생활양식을 주셨고 또 임무를 정해 주셨음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래서 그는 누구든지 물질 사용에 있어서 자신의 “한계를 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한 생활 양식”을 소명이라고 말한다.
(6) 이생에서는 완전하지 않은 성화
이 세상에 아무리 하나님 앞에서 십자가 고난을 통하여 훈련을 많이 받았다 하더라도, 혹은 끊임없는 자기 부정으로 나름대로 승리의 생활을 한다고 자부하는 사람도, 이 세상에서 완전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항상 유혹을 받으며, 잠시라도 성령께서 풀어놓으시면, 자신의 쾌락을 좇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은 이러한 것을 일종의 연약으로 보고 죄로 보지 않았다. 그러나 칼빈은 이러한 부분을 모두 죄로 보았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완전한 성화를 요구한다면 교회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절대로 완전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완전을 목표로 “필사적으로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말씀 전체를 묵상해야 한다. 그리고 끝까지 주의 법도 안에서 정진해야 한다.
3. 근 현세 교회의 성화론
1) 소시니안들의 성화론
소시누스주의 교리적 표준문서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그리스도를 닮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분의 생명의 지배에 따른 우리의 생명의 평안이다. 그것은 무엇에 달려 있는가? 주 예수께서 살아 있는 모범이신 자신 속에서 우리에게 제시하신 미덕들을 실천하는 일에 달려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들에게 복음에 대한 우리와 일치하는 메시지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는 단순한 모범적 인격을 가지신 분이시며, 그리고 이 분의 모범적 선행은 우리들도 모두 실천할 수 있는 도덕적인 부분일 뿐이다. 사람이 감히 흉내조차도 낼 수 없는 대속적 의미를 지니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이나, 부활로 인한 궁극적인 승리는 찾아볼래야 찾아 볼 수도 없다. 여기에 나타나는 그리스도는 다만 인간 예수일 뿐이다.
소시니언의 특징은 삼위일체의 부정이다. 이들 후손이 유니테리언교단을 형성하였다. 또한 이들에게 있어서 원죄는 없다. 모든 사람은 심지어 죄를 지을 때조차도 도덕적인 능력이 감소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다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같이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할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은 선천적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충분한 능력을 갖추고 있다. 의의 진보를 위해서는 추가적인 지식의 형태로 조명받기만 하면 된다. 바로 이 필요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오셨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는 인간 선지자로서의 자신의 역할을 통해 인간의 필요를 충족시키셨다. 그리스도는 때로는 약속으로, 때로는 위협으로 하나님께 대한 순종의 본보기 역할을 하심으로써 사람들을 자극하여 거룩에 이르도록 한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고 그리스도를 본받음으로써 거룩을 이룬다.
브라운은 이러한 소시니안을 매우 효과적으로 비판하였다. “소시니안은 성화가 단지 행동의 수정이어서 자기가 가장 중독되어 있는 죄만 돌이키면 된다고 심히 잘못 가르친다. 그러나 성화란 실로 모든 본성을 정결케 만든 것이다.”
2) 감리교와 성결교의 성화론
우리 개혁주의 신학은 ‘성령의 인침’이나 ‘성령의 세례’를 중생과 관련해서 이해하였다. 그러나 어떤 부류의 사람들은 이러한 것들을 특별한 체험으로 이해한 사람들이 있었다. 감리교 계통의 신학자들에게서는 ‘성령의 인침’이나 ‘성령의 세례’는 ‘은혜의 2차적 역사’ 또는 ‘2차적 축복’으로 성화의 완결을 의미한다. 이들은 바로 이러한 2차적 역사를 통해 순간적으로 완전하게 변한다. 이것을 ‘완전주의 교리’라 한다.
오늘날 알려져 있는 완전주의 교리는 “모두 웨슬리에 의해서 가장 큰 영향을 입어 시작된 것이다.” 사람은 어떤 계기를 통하여 우리 하나님이 주입하시는 마음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금하신 것은 자발적으로 범죄할 수 없다. 웨슬리는 말한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믿고 그 분을 사랑하며 그 분 앞에 자신의 마음을 쏟아 붓는 한, 그는 하나님이 금하신 걸로 알고 있는 일을 말하거나 행함으로 하나님의 어떤 계명이라도 자발적으로 범할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람은 순식간에 변화되었다. 웨슬리는 말한다. “(완전히 성화된 사람은 순결한 사랑의 지배를 받으므로) 교만, 자기의지, 분노 및 불신에서 자유롭다. 마음에 이렇게 영적으로 할례를 받은 그리스도인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온전하심과 같이 온전할 만큼 마음의 형상이 새롭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기심도 모두 소멸되어졌다. 피니는 말한다. “완전 성화는 모든 형태의 이기심의 완전한 소멸을 뜻한다.”
이들에게 있어서의 완전은 성경의 모든 본문을 초월한다. 찰스 피니는 바울이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한 본문을 인용하여, 바울이 죄 없이 살았다고 주장했다. “그(바울)가 죄 없이 살았으며, 또한 영원히 성화되었다는 의미에서 자신을 죄에 대해 죽은 것으로 간주했음을 강하게 시사한다. 그는 사도가 된 뒤로는 아무 곳에서도 죄를 고백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모두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다. 웨슬리는 말했다. “그리스도인은 죄를 짓지 않을 만큼 완전하다.” 왜냐하면 완전성화는 우리의 모든 원죄까지 씻어버린다. 그라이더는 말한다. “완전 성화는 전적인 성화이자 씻음이다. 우리의 능력을 부패시키고 우리를 죄악 된 행동으로 기울게 하는 어떤 정욕이나 원죄도 남아 있지 않다.”
성결교는 그리스도인이 ‘2차적 축복’을 경험한 뒤에 ‘전적성화’, ‘그리스도인의 완전’, ‘완전한 사랑’, ‘축복의 경지’에 들어간다고 주장한다. 대부분 감리교인들이 성령세례와 같은 것으로 여기는 ‘2차적 축복’의 체험은 현세에서 유전된 죄를 제거하고, 육신적 본성을 뿌리뽑으며,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자범죄 없이 살 수 있게 하고, 심령을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완전한 사랑으로 채운다. 그래서 이 성령의 세례의 결과로 신자는 죄로부터 완전히 깨끗함을 받으며 완벽하고 철저하게 성화된다는 것이다. 웨슬리는 완전 성화가 마지막 심판 때의 최종적 칭의의 조건이라고 주장했다. 웨슬리는 주장했다. “나는 완전이라는 표현을 ...... ‘죄 없는’이란 말과 나란히 말하지는 않지만, 그렇게 하는 것에 반대하지도 않는다.”
저들 감리교 계통의 신학자들은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행 15:8)에서 ‘깨끗이 하다’는 ‘완전히 깨끗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에 너로 사환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해진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행 26:16~18)에서 신자들이 ‘믿음으로 거룩하게 된다’는 말씀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이 두 가지 본문을 근거로 그리스도인이 완전히 성화되며 정결케 되는 것이 가능하다고 가르친다. 또한 자기들은 완전히 성화되고 정결케 되어서 더 이상 자기들 속에 죄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조차 있다. 물론 그들은 매우 진지하고 또 경건한 사람들임은 우리가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사도행전 15장의 경우 여기서 베드로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칭의’와는 대조적 의미인 ‘성화’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었다. “여기에서의 예루살렘 공회의 초점은 교회와 관련하여 이방인들의 지위와 조건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였다.”
베드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신앙을 고백한 고넬료와 그의 가정이 성도로써 교회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허락했다. 베드로의 관심은 이방인 성도들에게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그들이 교회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더 이상 유대인이나 이방인을 구별하고 차별해서는 안 된다고 역설한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니 깨끗하고 이방인들은 ‘개들’이니 부정하다는 구약시대적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깨끗해졌다’는 말이나 ‘믿음으로 거룩함을 입었다’는 용어의 의미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결코 감리교도들이 주장하는 대로 완전해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칭의의 관점에서 모든 죄가 사해졌으며, 또한 이제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니다. 그러나 성화의 관점에서는 아직 우리에게 여전히 죄가 남아 있다. 이들의 완전주의는 오직 자기기만이요, 자기만족에 불과하다.
아들 핫지는 완전주의 이론을 강하게 반대하였다.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얻지 않고는 도덕적으로 바로 일을 전혀 할 수 없다. 그리고 이 은혜를 받더라도, 절대적으로 완전을 요구한 저 처음의 아담의 법을 완전히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공로를 보셔서, 신자들의 경우에는 절대적 완전을 은혜로 믿음과 복음적 순종으로 낮추셨다. 완전한 사랑과 복음적 율법에 진심으로 순종하는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 금생에서 모든 사람이 가지는 특권이며 의무이다. 이를 은혜로운 완전성 또는 그리스도적 완전성이라 부른다.”
이상에서 감리교 계통의 성화론을 살펴보건대 이들은 대체적으로 도덕주의적이고, 완전론적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요구하시고 있는 거룩은 도덕을 초월한다. 감리교적 사고방식으로 죄를 논하게 되면, 그것은 지극히 인본주의적 방식이요, 세상 철학과 다를 바 없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실상 칼빈주의를 제외한 거의 모든 신학들이 죄를 논할 때 도덕주의적 요소가 있음을 배제할 수 없다. 따라서 도덕주의와 완전주의에 관한 비판은 별도의 항목에서 하도록 하겠다.
3) 자유주의 성화론
자유주의 성화는 전형적인 도덕주의의 틀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철저한 인본주의이다. 이들은 성화를 말할 때, 자신들의 성화의 기준과 방향이 하나님을 향하여 있지 않다. 오히려 이들에게는 사람만 있을 뿐이다. 따라서 성화도, 자기의 이기주의를 버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성화의 본질이다. 브라운은 말한다. “성화란 자기 만족을 이웃에 대한 봉사로 대체하는 것, 또는 자기 중심적인 삶 대신 타인 지향적인 삶을 선택하는 것을 나타낸다. 모든 사람의 완전을 향한 점진적 성장은 내세에 계속되어 완성될 것이다.”
이들은 원죄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오직 이 세상에 모범을 보이시기 위하여 오신 분일뿐이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 세상을 심판하실 이유도 없으시고, 또한 지옥도 만들지 아니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사랑하면서, 점점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우리의 노력으로 서로 사랑하고 비리와 죄악이 없는 세상이 만들어지면, 그것이 바로 천국이다. 우리는 이성을 가지고 더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고 천국을 만들 수 있다.
하나님은 오직 우리를 용서하시기 위해서만 존재하신다. 이러한 자유주의자들의 신학을 사람들은 자유주의자들은 하나님을 가축으로 생각한다고 비꼬았다. “양털을 얻기 위하여 양을 기르고 우유를 얻기 위해 소를 기르듯이, 당신은 용서를 얻기 위해 하나님을 기르고 있는 것이다.” 만약 그들이 옳다면, 여기에서 우리 하나님은 하실 일이 아무것도 없다.
심지어 그분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까지 우리는 의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분이 만약 만드셨다면, 오늘날 죄가 만연한데,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우리는 두 가지 가설을 세울 수밖에 없다. 하나는 하나님은 무능력하신 분이시다. 그래서 당신은 거룩하신데 인간을 창조하셨지만, 인간의 타락을 심판하지도 못하시는 즉, 자기 피조물도 제대로 다스릴 방도가 없으신 분이시다.
만약 그것이 아니라면, 하나님도 인간과 똑 같기 때문에 죄를 지은 인간을 차마 벌할 수 없으신 것이다. 즉 하나님 스스로도 죄가 많기 때문에 인간의 죄를 방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펠라기우스가 악하다면, 자유주의는 더 악하다. 펠라기우스가 이단으로 정죄되었듯이 자유주의는 이단 축에도 들 수 없다. 그들은 기독교가 아니다.
워필드의 자유주의 비판의 의지하여 비판한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주장은 펠라기우스를 비펠라기우스화한 하나의 펠라기우스주의다. 왜냐하면 펠라기우스는 어느 정도 죄책에 대한 인식을 하였고, 이 죄책을 속죄한다는 면에서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약간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신학은 이러한 약간의 인정조차 하지 않는다. 실제로 죄책에 대한 의식이 없이, 그리고 죄로 말미암는 무능력에 대한 최소한의 느낌도 없이, 이 신학은 자기 멋대로 하나님이 용서를, 누구든지 자기 손으로 말미암아 그것을 취하고자 하는 자의 처분에 맡겨 버린다.”
4) 신정통주의의 성화론
자유주의의 신학이 득세하던 시절, 칼 바르트는 자유주의 신학을 대적하여 일어났다. 그는 16세기의 교회개혁시대를 거쳐 일어났던 17세기의 정통주의 신학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는 그 당시 독일이 처했던 시대적 문화적 배경의 틀을 뛰어넘지 못했다. 그는 정통으로 돌아가길 원했으나, 새로운 정통을 만들어내고 말았다. 우리는 그들의 신학을 신정통주의라고 부른다. 바르트의 신학은 형식상 많은 개혁파 신학과 동일한 주제를 말한다. 그러나 그 한 주제에 대한 그들의 신학은 개혁파 신학과는 너무나도 차이가 있어서 서로의 접촉점은 전혀 찾을 수 없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칭의와 성화는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구분할 수 없다. “(칭의와 성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한 구속적 행위의 동일성은 시간적 연속으로 쪼갤 수 없고 심리학적으로 그런 식으로 해석할 수도 없다.”
모든 인간의 공로와 교만을 제거하기 위해 성화는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이며 하나님의 역사이다. 그 효과는 보편적이다. “그 분의 행동은 인간의 성화다” 그리스도께서도 죄에서 완전히 해방되신 분은 아니셨다. 그리스도는 죄악으로 가득한 인간의 본성을 입고 이 땅에 오셨기 때문에 거룩해질 필요가 있었다. 그리스도의 성화는 그분이 어떤 죄악 된 행위도 범하지 않으셨고 그분의 인성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새로운 존재의 차원으로 높여지셨다는 사실에 있다. 그리스도인은 인자의 성화에 참여할 때 성화된다(고전 1:30). 그리스도는 온 세상에 대해 권위 있는 방식으로 거룩하게 되셨다. “우리는 이미 이 한 분 안에서 거룩해졌고, 이미 성도이기 때문에 성도이며 거룩해진다. 이미 그분 안에서 우리는 이런 행동에 부름 받았다.” 하나님의 작정으로 인해 객관적으로 모든 사람은 하나님과 화해하고 의롭게 되며 거룩하게 된다.
온 세상은 원칙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고, 그 죄를 버렸으며 하나님께로 돌이켰으며, 그것이 바로 성화의 의미다. “인간의 성화는......, 사실 모든 사람에게, 즉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 각자에게 효력 있고 권위 있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이 성화는 모든 사람에게 다 이루어지는 보편적인 성화이다. 그러나 성화를 알고 지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인간의 성화와 하나님께 대한 회심은 칭의와 마찬가지로 온 세상에 대해, 즉 모든 사람이 칭의를 이해하고 인정하며 알고 고백하지 않는 것처럼, 사실상 모든 사람이 성화를 아는 것이 아니라 단지 깨달아 믿음에 이른 사람만이 성화를 안다.”
그리스도인들은 칭의와 성화를 안다. 그러나 불신자들은 칭의와 성화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불신자들이 칭의되지 못하고 성화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칭의와 성화를 주관적으로 인정하는 이들은 성령의 능력으로 영적인 잠에서 깨어난 죄인들이다. 반면 객관적으로 성화되었으나 주관적으로는 성화되지 않은 이들은 그 잠에서 아직 깨어나지 않은 사람들이다. 이 후자의 사람들은 화목 되고 성화되었으나 이 위대한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산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잠에서 깨어난 죄인들은 하나님의 언약의 신실한 동반자로서 새로운 존재방식에 입문한다.”
깨어난 죄인들은 사랑, 선행, 십자가의 인내, 하나님께 대한 찬양으로 이루어진 삶을 살아야 한다. 교회의 사명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법적으로 이미 발생한 모든 인류와 인간의 삶의 성화를 계시하는 곳”이다.
신정통주의의 저변에 흐르는 사상은 ‘보편구원론’이다. 하나님이 하신 일은 이미 모든 사람에게 그대로 적용되며, 그것은 객관적으로 이루어지는 사실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도 모두에게 객관적으로 이루어졌다. 따라서 교회가 하는 일은 모든 사람에게 ‘당신 구원 받았습니다.’라는 선포 밖에 없다. 이들 신학은 전도의 동기를 상실하게 한다. 실제로 오늘날 다원주의 내지는 혼합주의로 흐르고 있는 WCC는 칼 바르트의 신학에 많이 의존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서 그리스도의 피 값은 정말로 헐값이 되고 말았다. 그 피값의 효능에 있어서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다 적용되지만, 이 세상의 사람은 그 피 값에 의하여 하나님의 사람이 될 필요가 전혀 없다. 그냥 세상에서 자기의 것을 누릴 만큼 누리고, 하나님을 고의적으로 대적하면서 살아가더라도 이미 구원은 그에게 이루어졌기 때문에, 더 이상 세상에서 빛 되게 살아가야 할 의무도 전혀 없다.
5) 케직 운동에서 나타난 성화론
케직운동은 미국의 근본주의 운동이 일어날 무렵 영국에서 시작된 영국식 근본주의적 부흥사경회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의 케직운동은 거의가 장로교 목회자들이었으나 신학은 웨슬리의 ‘완전론’을 수정한 형태였다. 이 운동의 특징은 승리에 대한 쟁취이다. 이들에게 있어서 성화의 나타남은 죄에 대한 일관된 승리의 삶이었다. 바라바스는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이 깨달은 죄에 대한 일관된 승리의 삶이라고 가르친다고 믿는다.” 이것이 1단계 성화의 과정에 있는 사람들이다.
2단계의 사람들은 회심 이후의 사람들이다. 그들은 우리의 주님이신 그리스도께 결정적으로 순종하는 일로 시작되는 경험적 성화를 갖는다. 그들은 내주하는 죄에 대한 승리와 더 높은 차원의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가져온다. 참으로 영적인 그리스도인을 만들어 내는 이 두 번째 단계는 최초의 결정적 순간과 뒤이은 일련의 과정 모두를 포함한다.
2단계의 사람들은 영에 속한 사람들이다. 그리스도를 믿는다 하더라도 육에 속한 사람들과 영에 속한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맥퀼퀸은 말하였다. “성경은 기독교인들을 기본적으로 구별한다. 성경은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처럼 행동하는 육신적인 그리스도인과 삶에서 성령의 지배를 받는 영적인 그리스도인(고전 3:1~3)을 구별한다.”
이 단계의 사람들은 죄에 대하여 일관적으로 저항한다. 맥퀼퀸은 말한다. “케직은 영원한 상태 이전에 인간 존재가 완전해질 가능성은 가르치지 않지만 알고 있는 하나님의 뜻을 고의로 어기고 싶은 유혹에 일관되게 저항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는 가르친다.”
이 땅에서는 완전한 성화가 없다. 완전한 성화 즉 마지막 성화는 그리스도인이 재림의 순간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화되는 때 일어난다. 우리에게 있어서 성화는 점진적이 아니다. 그것은 어느 순간에 세 가지 단계의 변화로 순식간의 변화이다. 점진적인 성화는 가짜이다. 트럼벌은 말하였다. “삶 속에서 죄들을 하나하나 극복해 나가면서 악에 대한 점진적인 정복으로 얻어낸 승리는..... 가짜 승리다. 주 예수께서는 삶 속의 죄에 대해 우리에게 그런 점진적인 승리를 주시는 것이 아니다.”
또한 우리는 성화를 위해서 어떤 애를 쓸 필요도 없다. 트럼벌은 말한다. “애써서 쟁취해야 하는 어떤 승리도 다 가짜다. 당신이 승리 위해 노력해야 한다면 그것은 참된 승리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당신에게 주시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성화를 위해서 죄와 맞서 싸울 필요도 없다. 트럼벌은 말한다. “죄와 맞서 싸울 필요가 없으며, 죄의 권세, 심지어 죄의 정욕에서도 완전한 자유를 얻는다.”
이러한 성화에 대한 견해는, 웨슬리의 그것에 비하여서는 훨씬, 연결성과 연속성이 보인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이미 영에 속한 사람으로 인정하고 있다. 케직은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을 영에 속한 사람과 육에 속한 사람으로 나누지만, 이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백성들마저도 다 찾지 못하고 계신 무능하신 분이시며, 자신이 피 값을 지불하시고도, 그 지불한 대가를 찾지 못하시는 분으로 깎아내리고 말았다.
또한 스스로 3단계의 성화를 논하면서도 점진적인 성화가 없다는 말로 스스로의 모순을 자아내었다. 또한 인간에게는 성화의 책임이 전혀 없다. 오직 인간은 나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하시는 대로 수동적인 반응만 보이면 된다. 물론 우리는 성령께서 힘을 주시지 않으면, 우리의 한 발자국도 거룩을 향해 내디딜 수 없다. 그러나 성령께서 힘주실 때 우리의 자유의지가 반응하여 거룩을 향하여 한 발자국 내디딘다는 사실도 주시해야 할 것이다.
6) 해방신학의 성화론
해방신학자들의 성화는 주변에 있는 소외되고 억압된 이들의 해방을 쟁취하는 것이다. 보니노는 말한다. “우리의 성화는 어떤 이상주의적인 완전의 기준이나 그와 동일하게 비현실적인 동기의 순수함 따위로 평가해서는 안 되며, 오히려 현재라는 결정적 순간의 구체적 요구에 따라 평가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지금 필요한 행동, 계획, 성취 목표가 있다. 오늘 사랑의 섬김을 실현하는 행동이 있다......., 그것은 곧 순종의 성숙하고 무르익은 형태인 완전이다.”
이들은 마태복음 25장 35~45절을 근거로 역사 속에서 소외되고 가난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돌아보는 것은 그리스도를 돌아보는 것이고 그들을 사랑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구티에레스는 말한다. “가난한 사람 속에서 그리스도와 만나는 일은 진정한 영적 경험을 이룬다. 그것은 성령 안에서, 성부와 성자,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의 결합 안에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가난한 이들과의 만남 속에서, 그들과의 연대 속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발견한다.”
이들은 그들을 해방하기 위하여 어떤 방법을 사용하더라도 그것이 다 정당하다. 그래서 그들은 마르크스주의의 사고방식도 무리 없이 따른다. 흑인신학자 콘은 말한다. “흑인의 신앙에서 성화는 역사적 해방을 위한 흑인들의 투쟁을 빼놓고는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해방은 단순히 성화의 경험에서 나오는 하나의 결과가 아니다. 성화가 곧 해방이며 이는 곧 자유를 위한 역사적 투쟁에 정치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성화를 이런 식으로 정의하면, 성화를 사회주의 내지 마르크스주의, 즉 만인을 위한 자유와 정의에 기초한 사회의 재건과 관련짓는 것도 가능하다.”
남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값없이 내어주는 해방을 위해 충성된 자는 하나님의 생명의 충만함을 경험한다. 다시 말해 가난하고 억압된 이들을 위한 해방적 행동이야말로 변혁과 성화를 이루는 행동이다. 인류 절반이 인간 취급을 받지 못하고 억압받고 있는 현실에서 자기 혼자만 성숙하고 자기만 돌볼 수는 없다. 그리스도인들이 정의를 위한 싸움에 동참할 때, 전통신학에서 성화라고 부르는 자기의식의 변혁이 일어난다. 힘없는 사람들을 위한 인간적인 사랑의 행위가 구속과 성화의 은덕을 지니고 있다.
7) 17세기 칼빈주의 성화론
(1)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성화론
칼빈이 기독론적 입장에서의 그리스도와의 신비로운 연합을 통한 성화를 주장했다면, 칼빈의 후예들인 청교도들은 자신의 신앙고백서를 통해 그 성화의 교리를 삼위일체의 협력사역에 의한 구원론적 입장으로 접근을 하였다. 칼빈이 좀더 신앙체험에서 오는 고백적인 성화론을 펼쳤다면, 그 이후 세대들은 이 성화론을 좀 더 학문적인 체계에서 구원의 서정과 관련하여 이해하였다.
성화는 중생한 자들에게 찾아오며,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점진적으로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이 사는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성화한다. 나무가 열매를 맺는 것이 정상이듯이 그리스도인들의 성화는 필연적이며 만약 성화가 없다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효과적으로 부름받고 중생한 사람들 속에는 새 마음과 새 정신이 창조된다. 이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부활로 말미암아 이들 속에 거하시는 그의 말씀과 성령에 의하여 계속 인격적이고 진정한 성화를 거듭한다. 몸 전체를 지배하던 죄의 권세는 파괴되고 몸의 육정들은 점차 약화되고 죽고 나아가서 이들은 온갖 구원의 은혜를 얻어 참된 거룩을 실천하도록 자극을 받고 강화되어 간다. 이와 같은 거룩한 삶을 영위하지 않는 한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 없다.”
이러한 성화는 전인격적이다. 또한 우리는 우리가 육체의 생명을 이어가는 동안은 항상 불완전하다. “이 성화는 평생을 통하여 전인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 성화는 이생에 있어서 불완전 하다. 그러나 전인의 구석구석에는 부패의 잔재가 아직 남아 있다. 따라서 영과 육체 혹은 육체의 영은 계속해서 싸우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 성화는 지금 불완전하나 완전을 향해서 점점 나아가며, 성령님의 힘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거룩한 삶은 점점 더 성장한다. “이 싸움에 있어서 남아 있는 부패한 부분이 일시적으로는 우세하나 그리스도의 성화시키는 성령으로부터 계속해서 힘을 공급받음으로 중생한 부분이 극복하고야 말기 때문에 성도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에 거룩한 삶을 실천함으로 은혜 안에서 성장하는 것이다.” 우리의 생명이 끝나고 주님 앞에 설 때 우리의 성화는 완결된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완결되었고, 아직 아니 완결되었다.
(2) 존 오웬의 성화론
존 오웬은 리차드 십스와 토마스 굿윈과 더불어 청교도의 거장으로 불린다. 같은 시대 윌터 마샬도 성화에 대하여 기록을 하였는데, 토마스 굿윈 특히 성도의 고난을 통한 성화에 대하여 한편의 위대한 글을 썼으며, 윌터 마샬의 성화론은 자신의 체험에 입각하여, 그 체험적 순서에 따라서 글을 쓰면서 이론을 곁들였다. 존 오웬은, 그의 성령론에서 우리의 중생과 관련한 그의 사역에 초점을 맞추어 기록을 하였다.
그는 성령의 사역을 4단계로 구분하였으며, 그 중 성화를 맨 마지막 단계에 놓고 기록하였다. 그의 성화론은 전체 8장과 부록 2장이 구성되어 있다. 전체 8장은 크게 3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데, 1~3장까지는 성화의 총론에 해당하는 것들로 성화에 대한 정의, 목적 등이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4~7장까지, 성화의 첫 단계인 죄 씻음까지의 이론적 설명(4장)과, 그 사역에 대한 그리스도와의 연합관계(5장), 성령의 사역(6장), 인간의 협동(7장)을 다룬 다음, 성화의 본격적인 시작인 죄를 죽이는 것에 대하여 제 8장에서 다루고 있다.
그는 제1장에서 성화와 거룩의 본질에 대해 다루었다. 이 성화는 중생한 사람에게 반드시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시작되며, 성령께서 적용시키신다. 우리의 성화를 적용시키시는 주체는 하나님이시다. 이 하나님을 오웬은 바울서신에는 “평강의 하나님”으로 소개한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우리의 거룩이 하나님과의 평강을 계속해서 유지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거룩은 영적인 위기를 막아주며, 적대감정을 제거해준다. 그리고 본성 전체가 하나님이 지배를 받는다. 이러한 성화는 전인격적인 성화이며, 즉 영혼과 지성과 감성과 육체의 모든 부분에서 성화이다. 오웬은, 성화사역이 구원론 전체에서 살펴볼 때, 이것은 우리의 구원을 위한 보존으로 보았다. 이러한 사역은 성령의 직접적인 사역이며 또한 하나님의 사역이다.
성화를 말하는 성경적 용어는 “거룩”이다. 거룩은, 하나님께 지정된 성물, 또는 하나님에 의하여 임명된 성직자들을 지칭할 수 있다. 여기에서 주님은 우리를 위하여 거룩하게 되신 분이시며, 따라서 우리를 의롭고 거룩하게 하신다. 이 거룩은 인간의 이성으로는 알 수 없다. 심지어 믿는 사람마저도 이해하지 못할 수 있다. 오웬에 의하면 성화는 “우리의 삶을 영원과 영광으로 통과하는 것”이다.
이러한 영광스럽고 영원한 조건은 모든 위로의 근거가 되며, 우리에게 기쁨을 준다. 사랑은 우리를 하나님과 떨어지지 않게 하고, 믿음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한다. 신자는 교회에서 성장하는데, “교회의 내면은 성령의 은혜로 장식되어 있다.” 성도는 교회에서 장성하며, 그 장성한 성도는 그리스도의 의로우심이 임하심으로 아름다운 성도가 된다. 오웬은 이것을 “하늘의 첫 번째 열매”라고 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거룩하기를 요구하실 뿐만 아니라 “믿음으로 속죄받고, 만족한 상태에 있기를 원하신다.” 천주교의 쓴 뿌리를 제거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거룩을 깨닫는데 이성이 하는 것은 없다. 오직 복음의 빛이 우리에게 들어와서 우리를 조명할 따름이다. 우리를 성화 시키시는 것은 선행을 위한 것이다.
제2장에서는 성화의 점진적 사역에 대해 가르쳤다. 성화는 하나님이 직접적인 사역이며, 인간의 본성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믿는 자의 영혼을 죄의 오염과 더러움에서 깨끗하게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형상을 사람들 속에 새롭게 갱신하신다. 이 성화는 시작은 있으나 끝은 없다. 점차적으로 일어날 따름이다.
오웬에 의하면 성화가 시작되는 것이 “땅에 씨를 심는 것”이다. 씨는 심으면 싹이 트고 자라난다. 마찬가지로 성화도 심령에 심어지고 성령에 의하여 보존되며, 길러진다는 것이다. 즉 성화의 요소가 하나님이 심어 주신 씨인데, 이것이 우리 마음속에서 정직하고 선한 심성을 받아들이게 하여 열매를 맺게 한다. 거룩하여 진 사람은 선한 일을 한다.
이러한 성화의 은혜는 우리의 경건의 연습을 통하여 강화되고 증가된다. 경건의 연습은 성령께서 성도들의 훈련을 통해 하신다. 이때 성령께서는 신자들에게 믿음의 진리, 그리고 믿음의 실제를 또한 그들의 탁월함을 경험하게 하신다. 약한 교회들을 경험하게 하시면서 위로를 하시고 역사하신다. 이렇게 성화는 증가된다. 또한 우리들 속에서 직접적으로 실제적으로 증가하도록 역사하시기도 하신다.
성화의 은혜는 성도들이 신앙적인 활동을 통해서 받기도 한다. 왜냐하면 거룩하게 되는 것은 실제생활과 여러 가지 상황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은혜로운 생활을 계속하면 하나님의 성품을 가지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모든 고난을 통해서 신앙적인 활동을 하게 하시며,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성품을 가지게 하신다.
오웬은 성화를 식물의 성장에 비유했다. “은혜와 성화는 나무와 식물의 성장과 같다.” 그 이유는 나무가 성장하듯이 성화가 점진적으로 성장한다. 나무와 식물이 위로부터 물을 공급받아야 하듯이 성화 역시 외부적인 공급 즉 성령하나님의 은혜를 공급 받아야 한다. 식물의 성장이 잘 발견이 안되듯이 성화 역시 성장이 발견되기 어렵다. 이렇게 성장한 성도의 믿음, 사랑, 겸손, 관대의 성품들이 이웃에게 실천적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성화는 신인 협동적임을 설명하였다. 오웬은 신인 협동을 “은혜의 성령과 간구”라는 말로 표현하였다. 왜냐하면 성화는 우리에게 은혜 주시는 하나님께 반응하여, 우리가 기도로 성화를 사모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도는 성령의 응답하심으로 나타난다. 즉 성화의 성령이 성도들 가운데 역사함으로 성도가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
제3장에서 오웬은 성화의 목적과 거룩의 실체에 대해 다루었다. 그는 먼저 신자의 실체를 믿음으로 보았다.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거룩하게 된다. 또한 믿음이야말로 거룩하게 되는 원인이며 도구이다. 모든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며, 또한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길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 뿐이다.
성화는 그리스도와의 연합 없이는 되지 않는다.
오웬이 보기에 성화에 대한 오해들이 있는데, 1. 그리스도와의 연합 없이 성화가 된다고 믿는 것. 2. 성화를 도덕으로 정직하고 덕성을 가지는 것 정도로 생각하는 것. 3. 율법적은 확신으로 성화를 증거 하며, 최후의 이 땅에서의 복을 강조하는 것. 4. 성화 없이도 구원받는 오해 등이 있다.
성화의 좌소는 우리 안에 있다. “성화는 우리 안에 실재하는 것이며, 지속적으로 거주하는 것이다.” 성화의 주체는 신자의 전 인격에 있다. 우리의 본성이 하나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그러나 죄로 인해 하나님의 형상이 손상을 입었고, 그것은 우리의 전 본성을 잃어버린 것이다. 잃어버렸다는 말은 타락했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성화를 “우리들의 전체적인 본성을 전면적으로 온전한 모습으로 수리하는 것”이라고 한다.
여기에 인간도 협력하는데, 거룩한 참여하며,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특별한 영향 아래 자신이 있도록 해야 한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거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에 의하여 살며 그 안에 살면서 거룩하게 된다(롬 8:10; 빌 3:20; 고후 4:14 등).
오웬은 자신의 성령론 제4부 제4장에서 성화의 첫 단계인 죄 씻음에 대하여, 총론적인 것을 다루었다. 그는 여기에서 죄의 심각한 것을 다루었다. 성화는 바로 죄에서 깨끗하게 되는 것인데, 우리는 하나님의 영과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서 깨끗하게 된다. 성화는 “죄로부터 깨끗하게 씻는 방법이며 처방”인데, 이것은 우리의 협력을 요구한다.
성경에는 죄의 본질에 대해 가르치고 있다. 또한 세상은 죄와 오염으로 가득 차 있고, 퇴폐풍조가 넘치고 있다. 이것들은 하나님이 몹시 싫어하시는 것들로 피, 상처, 종기, 문둥병, 악창 등으로 비유해서 언급되었다. 신자들은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통해 죄를 깨닫는다. 죄의 오염과 부패성은 사람을 타락하게 하고 무질서하고 어지럽히며, 부정직하게 한다.
사람에게 원죄와 자범죄가 있는데, 원죄는 우리의 본성이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자범죄는 율법에 명령한 것을 위반할 때 범한다. 죄로 인해 타락한 사람들은 수치심마저 타락하고 부패했다. 자범죄에 있어서는 사람마다 다양하며 편차가 있는데, 죄로 인해 깨끗하지 못하면 불결함이 남아있고, 하나님의 기쁨에 참여하지 못한다. 이러한 죄로부터 자유함을 얻기 위해서는 성령의 특별한 도움을 받아야 한다.
제5장은 우리를 정결하게 하시는 성령님과 성자의 사역을 소개하고 있다. 성령께서 하시는 일은 우리에게 힘을 주셔서 죄를 대적하게 하시고, 우리를 더러움으로부터 지켜주시고, 순결하고 거룩하게 보존하신다. 그러나 그러한 성령의 사역은 그리스도의 피에 근거한다. 그리스도의 피는 속죄의 의미도 되지만 피 뿌림으로 인하여 죄 씻음의 의미도 된다. 우리의 성화와 관련해서는 피 뿌림이라고 불리어진다(벧전 1:2).
여기에는 인간도 참여하는데 그것은 믿음이라는 수단을 통해 참여한다. 참된 믿음은 내적으로 마음을 정결하게 하며 외적으로 사랑으로 행한다. 우리는 믿음에 의해서 정결케 된다. 믿음 그 자체가 우리의 성품을 하나님 형상으로 회복시키시고 우리의 본래적인 부패성으로부터 해방시키신다. 또한 그리스도의 피의 효과를 보게 한다. 우리의 정욕들을 점차적으로 제어하며 우리에게 제시되는 모든 동기들을 통해 우리를 자극함으로 우리를 지키도록 하신다.
오웬도, 우리의 성화를 위해서는 고통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고통은 죄로부터 정결하게 하는데, 고통으로 우리를 연단하기 때문이다. 고통은 우리를 치료하며 그리스도께 순종하도록 한다. “고통은 죄를 기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상징해주기 때문에 믿는 자들로 하여금 죄의 혐오스러움에 대하여 신선한 관점을 갖게 해준다.” 또한 고통은 이 세상의 매력을 빼앗아간다. 또한 우리 성정의 모난 부분을 둔화시킨다. 그리고 성령님의 은혜들이 활발하게 움직이도록 자극하신다.
제6장에서는 성령님의 성화에 대한 사역을 논하고 있다. 성령께서 우리의 성화를 위하여 하시는 사역은 적극적인 사역이시다. 성령께서는 우리들의 본성을 깨끗하게 하시며, 거룩하게 하신다. 먼저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초자연적 원리 또는 습관을 가지게 하신다. 이런 결과로 성도는 하나님을 향해 살 수 있고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다. 성령께서 또한 우리에게 거룩을 요구하신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그와 동일한 신성을 가지고” 태어났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그리스도와 하나로 만든 것이며, 그리스도의 본성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만족은 우리의 임무를 수행하고 또한 순종하는 것에 두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본성에서 나오는 자발적인 실천은 하나님께서 거절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성화된 만큼 실천하게 되는 바로 그 실천을 받아주신다. 그것만이 하나님께 인정된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거룩하게 되는 훈련을 할 때에 잘못된 방법으로 훈련을 하거나 다른 방법을 추구한다. 어떤 사람들은 도덕적인 덕성을 거룩으로 착각한다. 또 다른 부류는 미신적인 것으로 오해하고 거기 몰두한다. 올바른 성화는 성령의 조명 없이는 이해하지 못한다.
오웬은 성화를 논할 때 거룩한 요소와 거룩한 습관에 주의를 기울였다. 거룩한 습관은 거룩한 행동을 하게하며, 거룩한 성향을 갖게 하며, 거룩한 일에 종속하게 한다. 이것은 곧 “성화의 재산”이다. 이러한 성화는 목적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 뜻대로 사는 것이다. 거룩한 요소는 전영혼이 거룩한 행동을 보편적, 지속적, 영구적으로 하게한다.
성화는 거룩한 순종을 하게하며 또한 거룩한 의무를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한다. 이러한 능력은 우리의 마음속에, 의지속에, 성정속에 있다. 마음속에 있는 능력은 구원의 조명에 의해 우리가 가지게 되며 영적인 것을 구별할 수 있는 영적인 빛과 영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의지속에 있는 능력은 영적인 일들에 대해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이러한 실천적 능력은 이 일들을 승낙하고 선택하고 포용하는 자유의 능과 함께 한다. 성정속의 능력이란 준비성과 용이성을 말하며, 준비성은 우리 마음속에는 이미 장애물을 물리칠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한다. 또한 성화된 사람들에게 순종을 쉽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것이 용이성이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세상과 다른 습관을 가지는데, 우선 좋은 목적을 위해서 죄악을 버리고 하나님을 향해서 산다. 또한 은사를 통해서 거룩하게 살며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의무를 다한다. 거룩하게 사는 것은 세상 사람은 감당하지 못할 것이며, 오직 믿음의 사람에게만이 가능한 일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에 의한 선택에 기인한다. 왜냐하면 거룩의 원인 자체가 그리스도의 중보에 있기 때문이다. 모든 복음적인 성화의 직접적인 동인은 오직 하나님의 영이시다.
거룩하게 된 사람은 거룩한 행실과 거룩한 의무가 있다. 이것은 주께서 우리를 속량하셨기 때문에 전에는 우리가 죄에게 종이 되었다면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께 매인 자 되었기 때문이다. 오웬은 자신의 책 4권 7장에서 이 문제를 다루었다. 그는 먼저 아벨과 가인의 예를 들어서 둘 다 외적으로는 제사의 모습이 있었으나 외적인 부분에서는 둘 다 같았으나 내적인 차이가 있음을 언급하였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는 거룩의 의무이다. 이러한 의무는 내적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외적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의무는 내적이며 또한 외적이다. 우리는 영적인 존재여서 하나님을 향해서 살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그러나 은혜 없이는 사람은 영적으로 선한 일을 전혀 할 수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으며 하나님의 실제적 은혜의 공급으로 각자의 의무를 감당한다.
이러한 일들은 죄를 죽이는 것에서 나타난다. 오웬은 8장에서 바로 이 문제를 다루었다. 우리의 육체는 죄악을 행하는데 있어서 서로 잘 순응하고 협조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죽여야 한다. ‘죽인다.’는 단어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네그로사테’(골 3:5)와 ‘다나투테’라는 단어이다.
네그로사테는 ‘누르다, 억제하다, 파괴하다, 부패한 본성의 모든 힘과 정력을 끊다, 세상적이고 육체적인 것으로 기울어지는 성향을 근절시키다’이다. 다나투테는 ‘죽이다.’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리스도의 의무는 가치있고 효과있고 모범적이 되었다. 우리의 죄는 십자가 위에서 죽는 것 같이 죽는다.
우리는 죄를 죽여야 하는 의무가 있는데, 왜냐하면 죄에 대한 고난이 우리들에게 지워진 책임인데 여기에서 전적인 순종이 시작된다. 이 죄에 대한 책임은 우리에게 항상 지워져 있다. 이러한 죄는 고난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 죄는 하나님의 영에 의하여 우리에게 이루어지는 것들을 정면으로 대립한다. 그래서 은혜와 죄는 항상 대립한다.
죄를 죽이는 이 일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성령하나님이 필요하다. 죄는 그냥 죽는 것이 아니라 죽여야 죽는다. 성령님께서 우리의 죄를 뽑아주시고 거룩한 성품을 심어주신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죄를 죽이시는 일을 그의 은혜를 통하여 계속적으로 공급하신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도우시고 죄를 뿌리뽑는 방법을 가르쳐 주신다.
죄를 죽이는 일에는 그리스도의 사역 또한 필요하다. 그분이 십자가에 죽으셨듯이 우리는 그분과 일치되어 죄에 대하여 죽는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죽으심은 우리의 죄를 완전히 사하시는 효과가 있기에 우리의 죄를 죽이기에도 효과가 있다. 그리고 성령께서 이 일을 믿게 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신다.
[출처] 개혁주의성화론(2) 칼빈의 성화론|작성자 김에스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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