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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 13:20-21, 성도를 위한 기도, 21.11.14, 박홍섭 목사
히브리서는 편지 형식의 긴 설교입니다. 설명과 권면을 마친 저자는 지도자와 자신을 위한 기도 부탁에 이어 독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송영으로 편지를 마무리합니다. 뒤에 나오는 22-25은 추신으로 보면 됩니다. 성도를 위한 저자의 기도는 짧고 압축적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를 원한다.” 이 짧은 기도 속에 여러 가지 수식어구들을 붙여서 지금까지 말해온 모든 내용을 압축해서 담아냅니다.
먼저 하나님을 평강의 하나님으로 부르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20절을 다시 보십시오. “양들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거룩하신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 지혜의 하나님,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 등 하나님을 부르는 많은 표현이 있지만 왜 평강의 하나님이라고 합니까? 히브리서 내내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를 강조했습니다. 그 예수님을 보내신 분이 하나님입니다. 왜 보내셨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하나님과 원수 된 우리를 화목하게 하시고 자녀로 삼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평강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사랑과 공의와 인내와 지혜가 우리에게 은혜로 주어지는 가장 큰 이유는 평강을 위해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그의 탄생과 생애와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 그리고 지금도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하시는 모든 일에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공의로우심, 사랑과 자비, 인내와 지혜가 다 담겨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과 은혜는 궁극적으로 평강을 위해서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평강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주어집니다. 예수님을 통하지 않는 평강은 참된 평강이 아닙니다. 피스와 샬롬은 다릅니다. 자기보다 더 힘이 약한 자를 힘으로 굴복시키는 피스는 예수님 없이도 얼마든지 조성할 수 있는 평화입니다. 팍스 로마나, 팍스 아메리카나, 전부 예수 없이 세상의 힘으로 만들어낸 평화 아닙니까? 언제든지 힘과 힘이 충돌할 수 있는 잠시의 숨죽인 평화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그와 다른 영원한 평화,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부터 오는 평화가 있습니다. 이 평화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허락되는데 전쟁 속에서도 누릴 수 있고 죽음 속에서도 맛볼 수 있으며 고난 속에서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누립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입니다. 예수님을 무엇이라고 부르고 있습니까? 양들의 큰 목자입니다.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를 받는 양의 자리에 있으면 하나님의 평강은 우리의 평강이 됩니다. 반대로 예수님의 인도를 받지 않으면 무엇을 얻고 어떤 자리에 가더라도 참된 평강은 없습니다. 사람들이 부자만 되면 평안해지는 줄 알고 있습니다. 부자가 되면 편안해지기는 합니다. 그러나 부가 주는 편안이 평안을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지금 독자들이 예수님을 떠나려 하고 있습니다. 왜 떠나려 합니까? 고난을 끝내고 편안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불행을 끝내고 행복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떠나서 어떻게 평강을 얻을 수 있고 행복을 추구할 수 있습니까? 이런 독자들을 위한 저자의 기도를 들어보십시오. “양들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참으로 가슴이 먹먹하지 않습니까? 눈물나지 않습니까? 그리스도를 떠나 하나님에 대해 그 어떤 말을 하더라도 다 무의미합니다. 평강의 하나님은 양들의 큰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셨고 우리의 큰 목자이신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로 우리에게 평강을 주셨습니다. 지금도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양인 우리의 삶을 평강으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런데 왜 예수 안에 있는 성도의 삶에 고난이 있습니까? 이걸 이해시키기 위해 이토록 긴 히브리서가 쓰여졌습니다. 그리고 그 결론적 답이 이 기도에 담겨 있습니다. 21절이죠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하게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평강과 편안함은 다릅니다. 평강은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나 편안한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과 화평한 상태와 그 상태에서 오는 샬롬을 의미합니다. 오히려 하나님과 화평한 관계가 되었기 때문에 그분과 불화하지 않기 위해 죄와 싸워야 할 수 있고 불의와 전쟁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는 의를 행하고 사랑하는 삶을 위해, 모든 선한 일을 행하는 자가 되기 위해 구비되고 준비되어야 합니다. 그 준비를 위해 편안함이 아니라 고난이 필요합니다. 히브리서 독자들이 받고있는 고난은 평강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우리의 삶에 펼치고 행하기 위해 모든 선한 일에 준비되는 연단입니다.
성도의 고난은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속에서 허락되는 위대한 경륜의 한 부분입니다. 그래서 저자의 기도에 영원한 언약이 언급됩니다. 하나님이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 가운데서 우리에게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주, 대제사장이며 동시에 언약 안에서 영원한 우리의 큰 목자입니다. 예수님은 창세 전에 삼위 하나님 간에 맺어진 영원한 언약에 근거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언약대로 십자가에 피 흘려 죽었고 언약대로 부활하셨습니다.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며 우리를 편드실 때 영원한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그 언약이 목표하는 생명과 진리로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큰 목자이신 예수님의 양들이 받는 고난은 언약의 경륜 안에서 허락되는 고난입니다. 성도의 인생은 자기 능력과 자기 결정과 세상의 정치와 경제와 문화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성도의 운명은 영원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진리와 생명으로 이끄는 평강의 언약 안에 있습니다. 이 언약의 목표가 어디입니까? 우리의 뜻이 이루어지는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앞에서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루시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우리는 지금 그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모든 선한 일에 온전하게 구비되고 있습니다. 나의 삶이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 안에 붙들려 있다는 사실을 믿을 때 성도는 어떤 환경과 처지 속에서도 평안할 수 있습니다.
이 평안을 얻으면 어떻게 됩니까? 자기의 허탄한 계획과 세상의 헛된 욕망을 향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삶으로 진전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시켜 우리에게 평강을 허락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입니다. 온전하게 한다는 말은 준비시킨다. 단련시킨다는 뜻입니다. 성도의 삶은 주 앞에 가는 그날까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행하는 존재로 준비되고 단련되는 과정입니다.
현존하는 물질 중에 가장 단단한 물질이 다이아몬드입니다. 보석 중의 보석, 보석의 황제라 불리는 다이아몬드는 99.9% 이상의 순수한 탄소로 구성되어 있고 나머지 0.1%는 색깔을 결정하는 불순물입니다. 다이아몬드가 어떻게 만들어집니까? 탄소는 지표 근처에서는 거의 이산화탄소로 존재하고 드물게 일산화탄소로도 존재합니다. 환원 조건으로 가더라도 낮은 압력에서는 다른 원소와 결합한 탄화수소로 존재하거나, 흑연에 머무릅니다. 흑연에서 다이아몬드가 되기 위해 요구되는 에너지는 엄청난 고온과 고압입니다. 이런 고온과 고압이 있는 환경은 지구 표면으로부터 약 120Km 내지 많게는 1000km 아래입니다. 거기에서 엄청난 고온과 고압을 견디면서 다이아몬드가 형성됩니다. 그 단련을 견디지 못하면 터져서 그냥 탄소로 남죠. 그 고열과 고압을 견디어낼 때 단단하게 응축되어 영롱한 보석의 황제 다이아몬드가 됩니다.
인공적으로 다이아몬드를 만드려면 어떻게 합니까? 1500도에 흑연을 집어넣어 5만 기압을 주어서 응축시킵니다. 그것을 견뎌내어야 다이아몬드가 만들어집니다. 단단한 다이아몬드는 그냥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보석 중의 보석은 그냥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엄청난 압력과 뜨거움을 견디어내어야 보석이 형성됩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으로 준비되려면 그냥 되지 않습니다. 다이아몬드를 만드는 고온과 고압처럼 고난을 통해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존재로 빚어지고 준비되고 만들어집니다. 히브리서 독자들이 겪고 있는 고난, 저와 여러분이 겪고 있는 삶의 여러 어려움과 고난은 우리를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보석이 되게 하는 온전한 연단의 과정입니다.
나태주 시인의 ‘마이너 없이 메이저도 없다’라는 책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11월 어느 날 비닐하우스의 지붕이 옆으로 벗겨져 있음을 보고 농부에게 물었습니다. “기껏 딸기 모종을 심고 가꾸다가 왜 추운 날씨에 하우스 옆구리를 열어 찬바람에 노출 시킵니까?” 그때 농부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이거, 딸기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잠재우는 거예요” 지금까지 비닐하우스에서 잘 자라고 있던 딸기지만 겨울을 체험하지 않으면 꽃을 피우지 않기에 하우스 옆구리를 올려 일부러 찬바람을 집어넣어 가짜 겨울을 만들어 준다는 답변입니다. 겨울이 없으면 꽃을 피우지 못하는 식물이 있습니다. 비닐하우스에서 재배되는 딸기에 겨울바람이 필요하고, 다이아몬드가 만들어지기 위해 고열과 고압을 견디는 연단이 필요하듯이 주의 백성들이 온전히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인생이 되기 위해서는 시련 속에서 자신의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수납하여 구비되는 기간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믿음으로 잘 견디라는 기도입니다.
어떻습니까? 고난 중에 있는 독자들을 붙들어주기 위한 편지인 히브리서의 마지막 부분까지 왔는데 기대하는 답을 얻으셨는지요? 조금 실망스럽지 않습니까? 영혼이 잘됨 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다는 결론이면 속이 시원할 텐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으면 고난도 없어지고 조금만 참으면 좋은 날이 온다는 말은 없고 “피곤하여 낙심하지 말라, 아들에게는 징계가 있다. 너희들만 아니라 모든 믿음의 선진들도 약속을 다 받지는 못하고 더 좋은 것을 소망하며 죽었다. 그러니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고 인내로써 믿음의 경주를 달려라. 너희는 시내 산에 있지 않고 시온산에 있으니 형제를 사랑하고 손님을 대접하고 갇힌 자와 학대받는 자를 생각하고 결혼을 귀히 여기고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여기라. 예수의 치욕을 짊어지고 너희도 영문 밖으로 나아가라.” 이런 말만 계속되었잖아요.
히브리서만 아니라 성경의 결론은 언제나 우리의 세상적 기대에 맞는 명징한 답이 아니라 어찌보면 우리의 시각에서는 모호한 하나님의 뜻을 향하여 열려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복음서를 보십시오. 주님이 말씀으로 오셔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계속 못 알아듣습니다. 그러다가 눈앞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십니다. 얼마나 놀랍고 두렵고 황당했겠습니까? 두려워서 문을 걸어 잠그고 있는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셔서 평안하냐 하고 평안을 전했습니다. 이제는 죽음을 이긴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니까 우리의 기대와 소원을 이루어주시는가 했는데 성령을 받으라고 하시고 보는 앞에서 또 승천해버리십니다.
사도행전에 가면 성령을 받습니다. 베드로와 요한과 제자들이 기적을 행하고 교회를 세웁니다. 바울이 회심하고 주께로 돌아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주장합니다. 성령을 받으면 된다. 제자들도 변화 받고 우리의 삶도 변화 받고 승리하는 삶이 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신자의 삶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예수 믿고 성령 받으면 고난이 없어지고 부자 되고 하는 일이 잘되는 그런 뚜렷한 약속이 없습니다. 기적으로 시작한 사도행전의 마지막은 바울이 잡혀가 로마로 압송되어 가택연금 상태에 있는 것으로 끝납니다. 기적이 우리의 뜻과 소원으로 연결되지 않습니다. 기적이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사도들이 죽고 잡히고 갇히고 그 속에서도 주의 복음이 전해지는 내용으로 연결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속에서도 평강을 누리고 그들이 잡히고 죽고 갇혀도 하나님의 나라는 잡혀 있거나 끝나거나 갇히지 않는다는 메시지입니다.
히브리서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인생으로 온전하게 구비되어 가는 일에 평강의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와 함께하며 우리를 편드신다는 약속 외에 명쾌하고 시원한 현실적 답이 없습니다. 성경은 토정비결이 아닙니다. 그 대신 너희의 남은 삶이 평강의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삶으로 온전하게 준비되기를 원한다는 기도로 끝이 납니다. 성경은 신자의 삶을 우리의 기대와 좁은 세계관에 가둬두지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약속과 함께 열어둡니다. 열려있기 때문에 남은 우리의 삶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인도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우리의 삶이 결코 내버려진 삶이 아니며 언약의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의 경륜 속에 붙들려 있고, 우리의 큰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도 속에 있다는 믿음이 우리에게 평강을 허락합니다.
히브리서의 마지막이 지도자를 위한 기도와 성도를 위한 기도로 끝나는 것은 우리의 남은 생이 기도할 수밖에 없는 나날임을 가르쳐줍니다. 그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과 우리의 기대가 갖는 차이 속에서 멍이 들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그런 시간들이 우리를 자라게 합니다. 가슴에 멍이 들고 무릎에 힘이 드는 그 시간들을 믿음으로 견디면서 우리 안에 인생과 세상의 큰 그림을 볼 수 있는 안목과 사상을 가진 보석같은 존재로 구비됩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런 그리스도인으로 잘 자라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