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추워서인가?
오는 동안 길에 걷는 사람들이 없다.
생태습지를 둘러보려다가 아무도 없는 아침이라 새도 없을듯 해서 그냥 통과한다.
성내천 길도 오 가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
지난번 걸을 때부터 걷는 길과 안내간판이 모두 새롭게 정비됐음을 느낀다.
장지동 근린공원에 왔는데 멀리서부터 저 바위가 눈에 들어온다.
직감적으로 '아! 진짜 "장사바위"가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작년 봄에 올때만 해도 저 '장사바위'라는 바위만 있었는데
그 아래 있는 안내문을 보면 장방형의 큰 바위가 있었다고 써 있다.
다시 말해서 그때는 그 "장사바위"의 소재를 알 수없다는 이야기였다.
이 바위는 근처 부대의 진입로를 만들 때 매몰됐다가 작년에 찾아낸 것이라고 한다.
아직 흙이 곳곳에 떨어지지 않고 있어 조금 어수선하지만 자리를 잘 잡아 멋진 기념물이 됐으면 좋겠다.
송파 산대놀이.
우측 벽에 붙어있는 송파산대놀이에 대한 이야기는 그자리에서 보기도 어려웠고,
사진을 찍어서 확대해도 보기가 난해했다.
게다가 산대놀이만의 전문용어는 일반인이 이해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사진을 읽기가 어려워 글로 써 봤지만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송파 산대놀이.
산대놀이는 서울을 중심으로 경기지방에서 온 날놀음으로 구파발,녹번 애오개(아현)등에 본산대가 있었고,
그 분파로 보이는 양주구읍, 퇴계원, 송파, 노들(노량진)등지에 산대놀이가 있었으며 현존하는 것은
관원놀이의 성격을 띈 양주별산대놀이와 상역지에서 성행하던 탈꾼패놀이의 일종인 송파산대놀이뿐이다.
송파(현 잠실대교 근처)는 서울 근교 한강나루터 중의 하나로 강원도까지 배가 내왕하였고
마행상들이 전국을 돌았던 상역지(商易地)였다.
조선 후기에 전국에서 가장 큰 열다섯 향시중의 하나로 상업적 부촌이였기 때문에
송파산대놀이의 경제적 여건이 갖추어져 있었다.
그러나 근대에 이르러 동대문밖의 우시장과 천호동시장 등이 생겨나 송파의 상업적 세력이 약화되었으며
설상가상으로 을축년(1925년)한강내 홍수로 인하여 마을이 유실되어
신송파(가락동)와 돌마리(석촌동)으로 물러나 정착하면서부터 차츰 탈놀이도 시들어갔으며
겨우 명맥만을 유지해오다 1973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 49호로 지정되면서부터 다시 전수활동이 활발해졌다.
손꼽히는 상업적 부촌이였기 때문에 송파산대놀이의 경제적 여건이 갖추어져 있었다.
연희시기(演戱時期)는 정월대보름, 단오, 백중, 추석등의 명절에 세시놀이로 행해졌는데 특히 백중 명절에는
각지방의 명연희자들을 초청하여 일주일씩 탈놀음을 하였다하며 또한 상역지(商易地)였기 때문에 장이 덜되어도
상인들이 추렴하여 줄걸고(줄타기), 씨름붙이고, 산대놀이를 벌이면서 장이 어우러지게 했다고 한다.
연희형태는 다른 탈놀음같이 춤이 주가되고 재담과 소리와 동작이 곁들여지며
반주음악은 삼현육각(三絃六角)의 염불 12 박타령 굿거리장단이 주가 되며
춤사위는 염불, 거드름춤, 나령, 깨끼리춤(깨끼춤), 굿거리, 건드렁춤의 유형으로 나뉘며
40여종의 춤사위로 세분화되어 있어 한국민속무용의 춤사위로 대변할만하다.
마당 구성도 탈놀음 12마당이 그대로 전승되고 있으며, 가면수도 32개로
산대도감 탈들이 거의 보존되어 있어 비교적 고형을 보존하고 있다.
혹시 오자(誤字)가 있거나 산대놀이를 이해못해 틀린글자가 있어도 이해해 주시기 바란다.
산대놀이마당이 있는 장수공원에서 송파파인단지 사이를 빠져나오면 새로 정비된 "송파대로6길"이 나온다.
여기에서 "장지천"을 따라 내려가면 이내 "탄천"이 나온다.
"장지천"주변도 잘 정비가 되어 있는데 한가지 불만이라면 앉는 의자가 모두 돌로 되어 있다.
여름이면 몰라도 겨울에는 앉기가 불편하다.
탄천 다리를 건너 수서역으로 올라가는 길은 정비중이다.
빙 돌아 올라오니 산듯하게 정비된 둘레길 표시가 반긴다.
여기서 수서역까지는 멀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