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띠논쟁, 念과 慧의 혼동서 비롯"
마인드풀니스 & 사띠 논쟁-14(끝)
법보신문 | 2010-03-04 | 권오민 교수(경상대 철학과)
사념처 본질 慧와 수단 念은 상보적 관계
위대한 논사들 선행연구 외면현실 아쉬워
지난 2009년 12월초 동방대학원대 교수이자 한국명상치료학회장 인경 스님이 “서구 불교심리치료의 핵심개념인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를 ‘마음챙김’으로 번역하는 것은 불교명상과 심리치료의 근본정신에 명백하게 어긋난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이후 인경 스님과 김재성 서울불교대학원대 교수 사이에 열띤 지상논쟁이 이어졌다. 이어 자비선 명상센터 지도법사 지운 스님, 임승택 경북대 철학과 교수, 안양규 동국대(경주캠) 불교학부 교수, 이필원(청주대 강사) 박사, 부산대 인문학연구소 HK전임연구원, 김정호 덕성여대 심리학전공 교수 등이 이번 논쟁과 관련된 자신의 견해를 속속 밝혔다.
이런 가운데 본지에선 초기경전의 일차적인 해석체계인 아비달마에서는 사띠(4념처)수행을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권오민 경상대 철학과 교수에게 원고를 청탁했다. 권 교수는 아비달마와 관련된 많은 논문과 저술이 있으며, 『구사론』, 『순정리론』, 『현종론』, 『금십칠론』 등 많은 역서들이 있다. 편집자
비록 신문지상이기는 하지만 이처럼 하나의 문제를 두고 다수의 학자가 참여한 논쟁을 필자는 일찍이 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다양하고도 깊은 식견에 감탄하면서도 뭔가 정리되지 않은 듯한 허전함을 느껴야만 하였다. 그것은 한편으로 착잡함이기도 하였고 안타까움이기도 하였다.
이는 아마도 필자의 관심분야가 다양한 초기경설을 정리하고 해석한 아비달마 논장이고, 그 중 몇 가지를 번역해본 경험이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먼저 이 논쟁에서 필자가 이해하기 어려운 사실은, 이미 몇몇 분에 의해 지적된 바지만 불교학 내부에서의 사띠와 심리치료의 한 방법으로서의 사띠를 동일하게 취급한다는 점이다. 양자는 본질(깨달음)과 응용(심신치유)의 관계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 사띠(4념처) 자체만을 문제로 삼아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처럼 실제 심리치료와도 관련된 술어를 찾으면 되겠지만, 전자의 경우라면 여타의 불교 교학이나 술어와의 관계를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흔히 상종(相宗)으로 일컬어지는 초기불교의 분석(분별)론적 사유는 우리의 사유와 전혀 다르며, 이를 담고 있는 언어적 표현은 더더욱 그러한데, 이것이 불교어의 우리말 번역의 근본적인 어려움이라 할 수 있다.
사띠(sati, skt. smṛti) 즉 ‘염(念)’은 심소법 중의 하나이다.
심소법은 ‘마음에 소유된 법’이라거나 의식작용 정도로 이해되지만, 마음과는 별도의 존재이다. 이러한 심소법으로 설일체유부에서는 46가지, 상좌부에서는 52가지, 대승의 유가행파에서는 51가지를 헤아리는데, 유부의 경우 어떠한 마음도 반드시 수(受)․상(想)․사(思)․촉(觸)․욕(欲)․혜(慧)․염(念)․작의(作意)․승해(勝解)․삼마지(三摩地)와 함께 일어난다.(상좌부의 경우 앞의 네 가지와 삼마지․목숨․작의, 유가행파의 경우 앞의 네 가지와 작의와 함께 일어난다.)
예컨대 마음(=識)이 어떤 한 사물을 인식할 때 반드시 지각(느낌)․표상․의사․감각․희구․판단․기억․주의․확신․집중이라는 심리작용이 수반되어야 한다. 치매환자에게서 보듯이 ‘기억’이 없으면, 혹은 ‘주의’하려는 관심이 없으면, 혹은 관심을 가지려는 ‘의사’가 없으면 마음은 끝내 일어나지 않는다. (참고로 상좌부의 경우 念은 청정한 마음과 상응하며, 유가행파의 경우 대상에 따라 마음과 함께 일어나기도 하고 일어나지 않기도 하는 別境心所이다.)
따라서 의미상의 미묘한 차이를 갖는 이러한 다수의 심소가 찰나찰나 마음과 함께 일어난다는 사실을 우리말로 옮기기란 쉬운 일이 아니며, 여기에 다시 선․악의 여러 심소가 수반되는 마음이라면 더더욱 그러한데, 과연 이 같은 일상의 심리현상으로서의 ‘염’을 ‘마음챙김’이나 ‘알아차림’ 혹은 ‘주의집중’으로 번역할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그럴 경우 그 밖의 다른 심소는 무엇으로 번역할 것인가?
‘마음챙김’은 일견 주의(attention)의 작의에 가깝고, ‘알아차림’은 ‘혜(慧)’, '주의집중' 은 작의와 삼마지일 뿐더러 마음(識) 또한 식별 즉 인식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인식은 논리적으로 자성분별(지각)․계탁분별(사유)․수념분별(기억이나 재인식)로 구분되는데, 수념분별을 ‘마음챙김(혹은 알아차림)에 따른 인식’이라고 하는 것은 난센스에 가깝다.
아무튼 4념처(신역은 念住)는 念(기억: 不忘)에 근거하여 신(身)․수(受)․심(心)․법(法)을 부정(不淨)․고(苦)․무상․무아로 관(觀, 통찰: 簡擇)하는 행법으로, ‘염’과 ‘관(=慧)’을 두 축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논쟁의 소지가 있으며, 실제 아비달마 시대에도 중요한 논쟁거리였다.
그러나 과거 임승택/조준호 선생 사이의 지(止,사마타)․관(觀,위빠사나) 논쟁이나 오늘의 사띠 논쟁은 이러한 두 축을 간과한 채 4념처의 본질을 다만 술어적 의미에 따라 念(sati)으로 간주하고, 이를 다시 경설 상의 의미에 따라 마음지킴과 수동적 주의집중, 마음챙김과 알아차림 등으로 이해한데서 비롯된 것이지만, 이미 선결문제(4념처의 본질) 미해결의 오류에 기초한 것이라 시비의 끝을 가늠하기 어렵다.
4념처의 본질은 무엇인가?
아비달마 상에서 제법의 탐구는 대개 그것의 정의로부터 시작한다. ‘염’인가? 이는 당시 분별론자의 주장으로, 그들의 논거는 “염근(念根)으로 4념처를 관찰하라”는 경설이었다. 그러나 유부에 의하면 『염처경』에서 신(身) 등에 대한 순관(循觀, anupassanā, skt. anupaśya) 즉 신체의 움직임이나 들숨과 날숨, 머리털 내지 오줌 등과 같은 신체부위, 나아가 시체와 뼈 등의 대상에 따른 계속된 관찰로 설하고 있기 때문에 4념처의 본질은 ‘혜’이다. 그렇다면 왜 혜처(慧處)라고 하지 않고 염처(念處)라고 한 것인가?
『대비바사론』의 정설은 마치 코끼리가 머무는 곳을 상처(像處)라고 하듯이 ‘염’이 여기(觀)에 머물기 때문에 ‘염처’라고 하였다는 것이지만, 이외에도 7가지 설을 더 들고 있다. 몇 가지만 언급해 보면, 수행자는 먼저 ‘염’으로써 대상에 안주한 후에 관찰하거나 혹은 먼저 통달(찰)한 후에 ‘염’으로써 안주하며 문지기처럼 이를 수호하기 때문에; 농부가 먼저 왼손으로 풀을 잡고서 오른 손의 낫으로 풀을 베듯이 먼저 ‘염’으로써 대상을 잡고 그 후 ‘혜(慧)’로써 관찰하여 번뇌를 끊기 때문에; 수행자는 생사의 전쟁터에서 ‘염’의 갑옷을 입고 ‘혜’의 칼을 쥐고서 번뇌라는 원수를 항복시키기 때문에 ‘염처’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구사론』에서는 ‘염’를 쐐기에 비유한다. 즉 도끼가 쐐기의 힘에 의해 장작을 쉽게 쪼개듯이 ‘혜’ 또한 그러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식념(持息念, ānāpāna sati)의 ‘염’ 또한 이와 같은 의미라고 말한다. 이러한 해석이 오로지 유부 아비달마에 한정된 것인가? 하면 그렇지 않다. 상좌부 아비담마에서도 역시 그러하다.
예컨대 『분별론(Vibhaṅga)』「염처분별」에서는 4념처의 순관을 ‘혜’와 지(知) 나아가 무치(無癡)와 택법(擇法)과 정견(正見)으로 정의하며, 「각지분별」에서는 택법각지를 ‘염’에 머물며 ‘혜’에 의해 그러한 법을 간택하고 또 간택하며 자세히 살피는 것으로 정의하는데, 이에 상응하는 유부 논서인 『법온족론』의 「염주품」과 「각지품」에서도 동일한 내용을 전하고 있다.
또한 『청정도론』에서는 ‘염’를 신(身) 등의 대상에 견고히 안주하게 하고 감관의 문을 지킨다 는 점에서 기둥이나 문지기에 비유하기도 하였고, 마음이 도거(들뜸)나 방일(게으름)에 빠지는 것을 수호한다는 점에서 음식의 맛을 내는 소금이나 향료, 정사를 처리하는 대신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한편 『유가사지론』「섭사분」에서는 4념처를 사마타에서 觀(위빠사나)을 닦는 유가행으로 규정한 뒤 유가행은 요리법에, 사마타에서 일어나는 “무엇을 어떻게 사유할 것인가”하는 내적 마음과 그 상(相)은 요리사와 그가 만든 반찬의 맛에, 이러한 내적 마음의 사타마(寂止)와 통찰(즉 정념과 정지)을 최상의 음식에 비유하기도 한다. 또한 「성문지」에서도 정념(正念)은 염처의 대상에 마음을 메어두고, 감관의 문을 수호하여 정지(正知)에 머물게 하기 때문에 정온(定蘊)에 포함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4념처는 “위빠사나(觀)인가, 사마타(止)인가?” 혹은 “알아차림(慧)인가, 마음챙김(念)인가?”하는 식의 양자택일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요컨대 4념처의 본질은 ‘혜’(위빠사나: 알아차림)이지만, 그것의 가장 견고한 보조적 수단이 ‘염’(사마타: 마음챙김)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염’를 통해 ‘혜’를 성취하는 행법이다.
그러나 ‘혜’는 ‘염’에 의해 유지되지만, ‘염’ 또한 ‘혜’에 의해 관찰된 바를 기억하기 때문에 양자는 서로를 돕는 반려가 된다. 그래서 정념과 정지(=正慧)는 항상 짝이 되어 쓰여지는 것으로, 『구사론』에서는 그 논거로서 “순관(循觀)에 머물 때 ‘염’에 머물게 된다”는 경설(잡아함 제281경)을 들고 있다.
참고로 무착(無着)은 『대승아비달마집론』에서 4념처의 본질을 ‘혜’와 ‘염’ 두 가지 모두로 규정하였는데, 비록 『대승아비달마잡집론』에서 이는 ‘순관’이라는 경설 상의 의미와 ‘염처’라는 술어적 의미에 따른 것이라고 해설하였을지라도 바로 이 같은 유부 아비달마의 논의에 기초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무튼 이상에서 논의한 ‘염’과 '혜'의 관계는 염처 자체의 본질에 대한 것이고, ‘혜’와 함께 일어나는 여타의 심소나 그 대상까지 포함하여 논의할 경우는 결코 간단하지 않다. 따라서 ‘혜’에 근거하여 ‘알아차림’이라 하든, 念에 근거하여 ‘마음챙김’이라 하든 4념처의 온전한 의미를 드러낼 수 없다.
임승택 교수가 제안한 ‘마음지킴’ 또한 ‘염’의 측면만을 드러낸 것으로 마음챙김과 뉘앙스 상의 차이만이 있을 뿐이다. 더욱이 마음(혹은 감관)을 제어하고 수호한다는 ‘율의(律儀, saṃvara)’라는 술어가 이미 별도로 존재하는데, 이것과 ‘마음지킴’을 어떻게 차별시킬 것인가?
앞서 말하였듯이 불교어의 우리말번역은 이처럼 서로 차별 짓기 어렵다. ‘蘊’을 어떻게 번역해야 하나? ‘무더기’인가? 그렇다면 유신견(有身見)의 ‘신(kāya)’은? 識(vijñāna)을 의식(consciousness)이라 해야 하나, 인식(cognition) 혹은 지식(knowledge) 이라 해야 하나? 이는 모두 근대일본에서 서구문화를 수용하면서 불교어를 차용하여 만든 신조어 이지만, 불교법상에서 意(manas)와 식, 인(kśānti)과 식, 지(jñāna)와 식 은 그 의미가 다르다.
따라서 ‘마인드풀니스’를 비롯하여 영어로 번역된 불교어를 무비판적으로(다만 영어사전에 근거하여) 우리말로 재역하는 데에는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문제가 따른다. 아울러 ‘알아차림’과 같은 순우리말과 ‘지각’과 같은 신조어로서의 한자어와 관(觀, 또는 見)이나 혜(慧), 혹은 지(知), 각(覺)과 같은 전통술어를 혼용할 때 초래되는 혼란 또한 간과할 수 없는 문제이다.
그러면 어쩌자는 것인가? 특별한 대안이 없는 한 그냥 ‘정념(사띠)’ 이나 ‘염처’ 로 쓸 수밖에 없으며, 이를 마음챙김(혹은 지킴)으로 해석하든 알아차림으로 해석하든, 혹은 ‘마음을 놓치지 않고 지켜봄’(필자사견)으로 해석하든 그것은 해설자가 알아서 판단할 문제이다.
무책임한 발언이라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심리(지식)현상에 관한 불교어에는 念 이외에도 수백의 술어가 있거늘 이에 대해서는 왜 무관심한가? 오히려 사띠에만 관심을 기울인 나머지 결과적으로 작의(주의 경각)나 혜(판단 간택) 등 다른 불교어의 의미를 훼손시키는 우를 범하지 않았던가? 앞서 필자가 이 논쟁을 지켜보면서 ‘착잡함’을 느꼈다고 한 것은 바로 이 같은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사띠의 우리말 번역어를 두고 이같이 갑론을박하면서 등장한 모든 논자들이 ‘삼빠잔나’라는 말을 거침없이 사용하는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念보다 훨씬 의미가 분명한 ‘정지(正知)’라는 말이 있음에도.
또 하나. 오늘날 4념처를 『대념처경』의 ‘eka yāno maggo’에 따라 ‘[열반으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염’에 대해 이토록 갑론을박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불교에 있어 ‘유일한 길’이라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그것이 유일한 길이라면 차후의 4정근 내지 7각지 8정도와 같은 보리분법(깨달음의 길)은 무엇인가?
이는 한역 아함에서 일승도(一乘道: 잡아함 제535, 607, 1189경), 일도(一道: 중아함 제98 『염처경』), 일취도(一趣道: 『대비바사론』『순정리론』 등에서의 『염처경』 인용문) 등으로 번역되는데, 과거에는 이 말을 대승의 일승보살도의 연원으로 간주하더니 오늘날에는 유일한 길로 간주한다.
‘하나’와 ‘유일’은 뉘앙스가 전혀 다르다. 『대비바사론』에는 이에 관한 대단히 다양한 해석이 논설되고 있지만, 말하자면 그것은 열반에 이르는 ‘하나의 길’이다. 그런데 중현(衆賢)은 흥미롭게도 여기서 ‘하나’를 독존(獨尊)의 뜻으로 해석하고, 이는 다름 아닌 ‘혜’라고 말한다. 이를테면 번뇌를 끊고 열반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 중에서 ‘혜’가 가장 뛰어나기 때문에 ‘일취도’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아비달마 논장에서의 논의가 금과옥조일 수는 없다. 그러나 그것은 『염처경』을 비롯한 초기경전의 일차적 해석체계로서, 오늘날 우리가 문제로 삼는 거의 모든 문제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그것은 말하자면 위대한 논사들에 의한 선행연구이며, 선행연구에 대한 검토는 오늘날 불교학계에서 출간되는 거의 모든 논문집의 집필원칙이고 심사규정이기도 하다.
이에 필자는 지난 연말에 발표한 어떤 한 글에서 이 같이 토로한 적이 있다.: “우리 또한 끊임없이 아비달마(불타교법에 대한 논의)를 산출하고 있지 않은가? 많은 경우 그에 관해 이미 아비달마 논장에서 논의하였음에도 논의하였는지도 모른 채. 어떻게 논의하였는지, 왜 그렇게 논의하였는지도 모른 채. 자기 마음대로, 거칠게. 그러면서 도리어 아비달마를 ‘치심의 번뇌만을 증장시키는 난삽한 교학(공리공론의 희론)’으로 치부하는 만용은 어디서 비롯된 것인가?” 이것이 필자가 이 논쟁을 지켜보면서 느꼈다고 한 ‘안타까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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